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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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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0일 11시 52분 등록

신화와 인생

 

조셉 캠벨 선집 , 다이앤 K. 오스본 엮음.

 

저자에 대하여 조셉캠벨

 

2편 우주의 가락에 춤을 춘 캠벨

 

나는 일찍이 유럽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고 파리 소르본 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번역자인 조지프 베디에르 아래서 로망스어, 문헌학, 고대와 중세 프랑스어와 프로방스어, 라틴어 그리고 음유 시인의 시들을 공부했다. 유럽에 가서야 나는 현대 예술을 발견했다. 피카소, 브라크, 몬드리안 등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현대 문학인 예이츠, 엘리엇,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를 접했다. 나의 친구 안젤라 그레고리는 나에게 미학을 가르친 저명한 조각가 앙투안느 부르델의 스튜디오에서 나의 흉상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의 파리는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

 

1928년 독일 뮌헨대학으로 가서 산스크리스트와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 괴테와 토마스만의 문학, 프로이트와 융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힌두교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또 저쪽에서. 그 당시에 내가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다시 저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야만 할까?” 켈트 로망스에 관한 내 관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공황에 따른 경제적 사정으로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1929년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하기 2주 전에 귀국했다. 나는 대학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다. “저기요, 나는 저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학위 취득을 위한 필수과목을 모두 수강한 상태였고, 이제 그 망할 놈의 논문만 쓰면 땡이었다. 하지만 대학 측에서는 내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공부를 계속하도록 허락해 주지 않았다. 결국 이까짓 것 개나 줘 버리자고 생각했다.

 

나는 박사논문을 접고 대신 여동생 앨리스와 함게 우드스탁 숲속으로 들어갔다. 1년에 20달러짜리 오두막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5년 동안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나는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자유로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강요할 갖가지 계획을 갖고 있다.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길

원하는 사람은 세사에 하나도 없다.

 

그들은 여러분이 여행을 떠나길 원하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나도 그랬다. 나는 숲 속으로 들어가서

5년 동안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의 5년간이었다. 나는 뉴욕 주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 살면서 그저 책만 파고들었다. 그저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노트 필기를 했다. 그 당시는 대공황의 오중이었다. 돈이라곤 한 푼도 없었지만, 당시 뉴욕에는 스테처트 해프너라는 큰 서점이 있어서 나는 거기다가 책을 주문했다. 하지만, -특히 프로베니우스의 책들은 매우 비쌌다. 그 즉시 책값을 지불하지는 않았다. 대공황 때에는 다들 그랬다. 서점에서는 내가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나는 일자리를 구하고 나서 책값을 냈다. 그야말로 훌륭한 태도였다. 나로선 지금도 감사해 마지않을 만한 일이다.

 

돈이란 내게 그 어떤 의미도 없다. 내가 유럽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 3주 만에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대폭락했다. 당시 내가 지닌 유일한 재산은 대학의 어는 재즈 밴드에서 연주를 해서 모은 것뿐이었다. 다해서 수천 달러가량 되었는데-그 당시에는 제법 큰 돈이었다- 나는 그 돈이 완전히 바닥날 대까지 버텼다. 다시 말해 이후 5년동안 나는 땡전 한 푼 벌지 못했던 것이다. ....

나는 이제껏 돈에 관해 완전 무심한 삶을 살아왔다. 대신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함으로써 제법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결국 돈이 따라오게 된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삶에 선사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에게 보답하는 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나는 조이스와 토마스만과 슈펭글러를 읽었다. 슈펭글러는 니체를 언급했다. 나는 니체도 읽었다. 그러다가 니체를 읽으려면 쇼펜하우어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쇼펜하우어도 읽었다. 그러다가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칸트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칸트도 읽었다. 일단 거기까지만 가도 되긴 했지만,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상당히 힘들었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괴테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 가지 흥미진진했던 사실은 조이스 역시 이들과 똑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물론 조이스가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언급한 적은 없어도, 자는 조이스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어 쇼펜하우어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나는 융을 읽었고, 그의 사고 체계가 근본적으로 슈펭글러의 사고 체계와 똑같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이 모든 것을 한데 버무리기 시작했다.

 

내 경우 20대와 30대, 심지어는 40대에도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은 나의 스승이었다.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대담중인 모이어스가 질문을 했다.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마음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 삶에서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그 사람을 붙잡고,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된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신화의 힘 197p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 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무얼 해야지’하고 미리 생각해 둔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 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며,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진짜다, 이건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다. 여러분을 옥죄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싹 지워 버리면, 여러분은 마치 룰렛 바퀴 위의 공처럼, 자신이 어디에 안착할 것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룰렛 공은 결코 ‘아, 여기 내려앉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기 내려앉아야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할 거야’하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 그저 ‘그들만의’ 생각일 뿐이니까.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치워 버려야 희열이 온다.

 

방랑을 하는 동안 여러분은 일종의 신비로울 정도의 유기적인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마치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다. 다음번에 어디가 자라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나뭇가지는 이쪽으로 자랄 수도 있고, 그 다음에는 저쪽으로 자랄 수도 있으며, 그리고 나서는 또 다른 쪽으로 자랄 수도 있다. 나무를 제멋대로 자라게 내버려 두고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가하지만 않으면, 나중에 가서 여러분은 그것이 하나의 유기적 발전 과정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기억하라. 파르치팔은(성배 성에서 왕의 부상에 관해 질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고서도)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던 대로 행했기 때문에 오히려 망치고 말았다는 사실을.

 

1931~1932년 나는 진로를 구상하기 위해 혼자서 차를 몰고 어머니가 운영하던 Model T Ford로 향해 간다. 가는 길에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 들러 나의 오랜 친구이며 영양사인 아델데이비스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존 스타인백과 캐롤 스타인백 부부와 그들의 이웃이었던 생물학자 에드 리켓을 소개해 준다. 에드 리켓과 나는 알래스카의 브리티쉬 콜럼비아까지 해안을 따라 여행하며 조수간의 동물군을 수집하는데, 이 여행은 신화학과 생물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나의 믿음을 재확인시켜줬다.

 

1933년 85개의 대학들에 지원을 한 끝에 나의 모교였던 캔터베리 프레프 스쿨(예비학교)에 취직했다. 역사, 영어, 불어, 독어를 가르치는 한편, 슈펭글러, 토마스 만, 융, 조이스, 프레이저 등에 대해 공부했다. 나는 그해 말에 은퇴하고 다시 우드스탁으로 돌아와 독서와 집필에 열중했다.

 

1934년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되어 이후 38년 동안 문학, 독일 철학, 비교신화학 등을 가르쳤다.

 

[ 그의 방대한 지식과 다양한 어학 실력 앞에서는 모두가 혀를 내둘렀는데 신기하게도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잘 깨닫지 못했다.

캠벨이 로렌스 대학에서 재직할 당시에. 한 여학생이 캠벨에게 질문을 했다.

“우리는 그 분이 내어 주시는 일 주일분의 독서량에 기가 막혔답니다. 결국 우리 중 누군가가 벌떡 일어서서 그 분과-사라 로렌스 대학식으로-맞섰습니다. 그 학생이 그랬지요.

“선생님께서 이시다시피 저는 이 과목만 듣는 게 아니고 다른 세 과목을 함께 듣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독서량을 할당하십니다. 도대체 이걸 일 주일에 어떻게 다 읽으라는 것입니까?”

그러자 캠벨 선생님이 웃으시면서 이러시더군요.

“해보기는 했다니 놀랍군,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일 주일에 읽으라는 것이 아니고 팽생 읽으라는 것이네. ” ]

 

1938년 나의 학생(사라 로렌스 대학)이었으며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 단원이었던 진 어드먼과 결혼한다. 나의 나이 34세였다. 유명한 무용가 마서 그레이엄의 제자였던 진 어드먼은 훗날 일류 무용가로 명성을 떨쳤다. 나는 내가 쓴 것을 모두 진에게 읽어 주고, 그러면 아내는 내게 필요한 비판과 지원을 해 주었다.

 

1941년 인도연구자 하인리히 침머를 만났다. 침머는 나에게 볼링겐 시리즈이 설립자 폴 멜론과 메리 멜론에게 소개시켜준다. 나는 볼링겐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자 나의 첫 번째 출판물인 제프 킹 글, 모드 오크스 그림의 <그 두 사람이 아버지에게 온 곳: 나바호족의 전쟁의례 Where the Two Came to Their Father : A Navaho War Ceremonial> 라는 주석본을 만들게 된다.

 

1942년 이후 3년 동안 스와미 니키라난다와 함게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The Gospel of Sri Ramakrishan> 과 < 우파니샤드 Upanishads >의 번역과 편집을 진행한다.

 

1943년 침머가 폐렴으로 사망하자. 그의 부인이 캠벨인 나에게 침머의 유작들의 편집을 부탁한다. 나는 12년 동안 이 작업을 하여, 1946년 <인도이 예술과 문명 Myths and Symbols in Indian Art and Civilization>, 1948sus <왕과 시신 The King and the Corpse>, 1951년 <인도철학 Philosophies of India> , 1955sus <인도 아시아의 예술 The Art of Indian Asia>을 출판한다.

 

1944년 헨리 모튼과 함께 쓴 <피네간의 경야를 여는 곁쇠 A Skeleton Key to Finnegans Wake> 가 출간한다. <그림 동화>의 주석을 쓰고, <댄스 옵서버 The Dance Observer>지의 편집진에 참여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의 집필을 시작한다.

 

1949년 두 곳의 출판사에서 수정 요구 및 거절을 받은 후, 볼링겐 시리즈에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이 출간된다. 이 책을 국립예술문자협회상을 받는다.

 

1953년 크리에이티브 영화 재단의 대표가 되었고, 스위스 아스코나에서 열린 에라노스 협회에서 20여 년 동안 나온 회보를 모은 <에라노스 연감 회보>의 편집을 맡았다. 나는 이 일로 스위스에서 칼 융, 마르치아 엘리아데, D. T. 스즈키 등을 만난다.

 

1954년 안식년을 맞아 인도, 스리랑카, 타이, 버마, 홍콩, 일본 등을 여행한다. 1956년 워싱턴 D.C. 의 국무부 외교연수원에서 강의를 시작한다. 1957년 그가 편집한 에라노스 협회의 첫 번째 회보, <의미없는 상징 The Symbol Without Meaning>이 출간된다.

 

1959년 나는 에라노스 협회에서 <원시시대 사냥꾼과 농부의 재생 신화와 의례 Renewal Myths and Rites of the Primitive Hunters and Planters>를 출간하고, 캠벨의 저서 <신의 가면> 시리즈의 1권이 출간된다.

 

1967년 ‘예술, 종교, 현대 문화 학회’의 운영진이 된다.

1972년 뉴욕시의 쿠퍼 유니온에서 행한 강연을 모은 강연집, <신화와 함께 하는 삶 Myths to Live By>이 출간된다. 캠벨은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퇴임하고 ‘종교학회’ 회장이 된다. 아이슬란드와 터키를 여행하고, 아내인 진 어드먼과 뉴욕 시에 ‘앨린 눈 극자 Theater of the Open Eye'을 세운다.

 

198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새로운 감독/ 새로운 영화 축제에서 <영웅이 여정; 조셉 캠벨의 세계 The Hero's Journey: The World of Joseph Campbell>의 시사회가 열린다. 10월 30일, 조셉 캠벨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사망한다. 캠벨은 존 F. 캐네디 암살 24주년이 되는 날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1987년 12월에 PBS에서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 ‘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이 방영된다.

1988년 사라 로렌스 대학교에 ‘비교신화학의 조셉 캠벨 강화’가 개설된다.

1991년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 Foundation이 설립되었다.

조셉 캠벨의 생애나 저작, 강연기록 등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Joseph Campbell Foundation(www. jcf. org)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에게 열어 준 많은 가르침의 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열린 세계 종교 학회에서 캠벨은 뉴욕의 사회철학자와 일본 신도의 신주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는다.

사회철학자가 신주에게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신도의 종교 의례를 숱하게 보아 왔고, 귀국의 성지도 여러 곳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신도의 종교적 이념을 모르겠어요. 신도의 신학을 이해할 수 없어요.”

일본인 신주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고갤르 가로 저으면서 응수한다. “글쎄요. 우리에게 종교적 이념 같은게 있는 것 같지 않군요. 신학도 없고요. 우리는 춤을 출 뿐이지요..”

그렇다. 캠벨도 춤을 추었다.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다.

캠벨의 인생철학은 이른바 ‘희열을 쫓으라 Follow your bliss’이다.

 

 

3. 내가 저자라면

3-1. 이 책의 전체적 뼈대를 논하라.

 

<신화와 인생> 이 책은 1983년에 에설런 연구소에서 조셉 캠벨의 강의를 들었던 다이앤 K. 오스본의 필기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거기다가 기존에 출간된 캠벨의 저서 가운데 관련된 부분의 인용문들을 발췌, 수록한 방식으로 꾸며진 일종의 선집이다. 원제는 <조셉 캠벨 편람 Joseph Campbell Companion 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캠벨의 강의록으로서 그의 사상에 대한 개론적인 성격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들어가는 말 : 캠벨 사상의 정수,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이다.

조셉 캠벨은 1983년 어는 한 달 동안 에설런 연구소에서 열린 작은 세미나(10명 정원)에서 전문가적인 감성으로 참석자들의 인생을 살펴보았다. 다들 신화의 영역에 대단한 응집력과 집중력을 보이며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어느 날 에설런 연구소의 소장이 세미나 중에 자기도 참석하고자 하는 의사를 보였다. 이에 조셉 캠벨은 “그건 적절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석자들 사이에는 이미 성스러운 원scared circle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만큼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의심한 바들을 털어놓았으며, 마법과 환희에 관한 이야기들을 교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셉은 이 세미나를 마치면서 다들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을 운명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 가운에 상당 부분은 에설런에서 있었던 수개월간의 기록 집중적인 세미나에서 말한 것을 가져왔다. 또한 그의 저서에서 가져온 인용문들도 수록했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잠언은 그가 평소에 애용하던 표현이다. 이 책은 의식의 세가지 층위- '도입의 단계-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의식의 첫 번째 단계-현세에서의 삶' '의식의 두 번째 단계-깨달음을 향한 길' '의식의 세 번째 단계-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 등 크게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단계(현세에서의 삶은)은 주로 골반에 위치한 에너지의 중심부(차크라)의 주제-생존, 섹스, 그리고 힘-를 다루고 있다. 돈, 이성, 노년의 양상, 죽음, 결혼, 전쟁, 출산, 제의 등에 관한 조셉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은 노예의 도덕이며, 영혼과 육체에 있어 죽음과 부패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그 말 자체가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 귀를 기울이라고 조언했다. 그 의도가 오만이거나 악의이거나 무지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며, 에를 들어서 말했다. 누군가 우리를 향해 이기적이라고 말할 경우, 십중팔구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우리가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스스로의 선택 폭을 제한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을 제한 하게 되고, 그런 제한이 지나치면 우리 역시 ‘세계의 경찰관’, 즉 자기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상자 밖으로 남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깨달음을 향한 길)은 우리 스스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진리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의 희열을 향해 나아간다. ‘희열’이란 우리의 가장 높은 열광enthusiasm을 뜻하며 ‘엔타오스entheos'는 ’신으로 가득 찬‘이라는 뜻이다. 우리를 신성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즉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기 위해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이 세계를 바로잡기 위해 바깥으로 투사되었던 그 에너지를 안쪽으로 돌려 스스로를 바로잡는 -스스로의 진로를 따라 나아가고, 여러 세계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춤추는 - 바로 그 경지로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다.

 

세 번째 마지막 단계인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까지 성장해 나아가면,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환영‘마야maya'의 차단막을 걷어 올리고 지상에 펼쳐진 신의 세계를 볼 수 있다. 그 마야를 만든 장본인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의 삶은 전체의 리듬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고, 우주의 박동이 우리의 것이 된다.

 

사랑, 결혼, 직업, 예술 등에 관한 그의 개인적인 생각과 경험 등이 담긴 내밀한 에세이집이다. 무엇보다 캠벨의 목소리와 여러 인용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그가 전하고자 한 깨달음과 성찰의 순간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우리가 이 책을 이해함에 있어 신화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화의 의미, 다시 말해서 신화를 통해 캠벨이 가리키고자 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목차

들어가는 말 : 캠벨 사상의 정수,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

도입의 단계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의식의 첫 번째 단계 : 현세에서의 삶

의식의 두 번째 단계 : 깨달음을 향한 길

의식의 세 번째 단계: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3-2.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결혼은

여자가 주도하고

남자가 따라가는 것이다.

 

양쪽 모두 정신적 길잡이가 없는 한,

결혼이란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자아가 무너져야만

두 사람은 합쳐질 수 있다.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영혼은

발효되고, 융합되고,

분해되고, 부패되어야 한다.

 

결혼이란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그 관계됨에 희생시키는 것이다.

 

75.

성배로 향하는 열쇠는 공감,

다른 사람의 슬픔을 마치 여러분의 것인 양

느끼고 또 같이 고통 받는 것이다.

 

공감의 위력을

깨달은 사람은

성배를 발견한 사람이다.

 

385.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흔히 말하는 작가의 슬럼프를 돌파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은 내가 보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우선 여러분이 말을 걸고 싶은 상대를 하나 찾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루에 두 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시간을 떼어 두라는 것이다.

 

작가의 슬럼프는 너무 머리가 많아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여러분의 머리를 자르라.

페가수스, 곧 시詩는 메두사의 머리가

잘린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에는 무모해야한 한다.

여러분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미쳐야 한다.

 

388.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보내고, 아예 죽여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2년 뒤에

진작 그래야 했다며 후회하리라.

 

3-3. 인상적이고 탁월한 착안점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깊은 명상 속에 있다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짤막한 시나 경구 속에 생각할 수 있는 주제나 여러 시일을 두고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특히 조셉이 말한 글쓰기는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느꼈던 것을 솔직히 말해줌으로써 캠벨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3-4. 보완점

제목이 대단원으로만 있었다. 큰 단원으로만 목차를 정했다. 중제목이나 소제목으로 있었다면, 그 챞터에 대한 이해도가 더 높았을 것 같다. 중간 중간 많은 글들이 소제목이 없어서 그 글에 대한 내용을 다 읽은 후에나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관음과 청년, 달의 이미지, 나의 글쓰기, 마야가 가진 세가지 힘 등등 이런 식으로 했다면 읽기 전에 워밍업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들어가는 말 : 캠벨 사상의 정수,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

 

10. 상징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은 “기껏 식당까지 찾아가서는 메뉴판만 먹어치우고”, 정작 메뉴판에 나온 진짜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는 이처럼 메뉴판만 먹어치우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 결과 공허감과 영혼의 곤궁이 비롯되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자연 속에서건 대화 속에서건 그가 관심을 집중하는 모든 것이 일종의 불꽃이 되어, 그의 정신 속에 있는 방대한 도서관, 그 풍부함과 지속성의 끝없는 원천이 되는 그곳 안의 또 다른 책 한 권을 비춰 주는 작용을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열린 태도는 경이와 마법의 가장 거대한 원천이 바로 그 자신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11. 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만 하면 신들은 우리를 향해 열 걸음을 다가서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1. 피와 찢어짐과 고통이 없다면 새로운 생명도 있을 수 없다.

★ 새로운 생명이란, 또 다른 나를 잉태하고 탄생시키는 것이다. 과거와의 작별을 고함은, 과거의 낡은 습관, 오래되고 묵은 찌꺼기를 버린다. 예를 들어, 연구원 생활을 하고자 했으면, 책 읽는 시간을 만들고 컴퓨터를 치는 시간을 벌려면, 과거에 했던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 새로워지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한다면, 누워있고 편하고자 하는 몸을 일으켜 바로 하고자 하는 바를 실행해야 한다.

 

12. “인생에 대해 작별을 고하지 못하는 노인은 인생을 포용할 수 없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병약하게 보인다. ” -융-

★ 노인이 되지 않고도 인생에 대해서 작별을 자주 고해야겠다. 죽음이 있기에 살아있는 순간이 빛나고 아름답다. 인생에 작별을 고하는 연습을 자주 하다 보면, 살아숨쉬기에 겪는 고통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13. 모든 부활절 달걀은 우주의 알, 즉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와도 같은 영혼의 탄생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모든 부활절 토끼는 작아졌다 켜졌다 하는 달의 주기-항상 변하면서도, 항상 똑같은 - 에 관한 상징이다.

★ 데미안에 보면 알을 깨고 나온 새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스스로 자신을 깨야만이 새로운 세상을 대면할 수 있다. 부활절 달걀의 의미도 영혼의 탄생, 거듭되는 새로운 자아의 탄생이다.

 

13. “왜 저 나무들 아래를 걷다 보면 항상 크고 아름다운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돋아나는 것일까?” 월트 휘트먼은 묻는다.

“생각건대 겨울과 여름 내내 그 나무들 위에 걸려 있던 생각들이 마침 내가 지나갈 때 과실처럼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 의문이 떠오르면 바로 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계속 생각한다. 그 의문을 가지고 있는 한, 마음을 열어놓고 있으면, 언제 어느 순간 자신에게 답이 찾아오리라. 마음속에 떠오르리라.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언제 어느 순간 찾아오는 것이 우주의 진리이기에.

 

 

도입의 단계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In the Field

 

여러분의 지금 모습 그대로.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평생 누릴 특권이다.

 

★ 나는 내 모습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나와 다른 사람은 그들대로 존중해주자. 나에게 주어진 생명을 온전히 감사히 받아들이자.

 

*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 일이 해야 할 의무라면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힘들것이다. 같은 일을 하더라고 내 마음이 내가 세상을 보는 프레임을 달리 하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이든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진정한 의미란 살아 있음 바로 그것이다.

 

전사戰士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이다.

 

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단지 태어나서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의미를 붙였을 것이다. 의미를 붙여야만 살아갈 힘이 생겼을 것이다. 인생에 의미를 붙이고 자기 인생을 해독하는 것.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기 생을 바라보는 시야도 달라지니까.

 

*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라.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 상황은 똑같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일어나는 일은 어쩔 수 없다. 일어나는 일을 내가 무슨 수로 막겠는가. 다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일어나는 일에 대한 나의 반응을 어떻게 할 것인지이다.

 

*

만약 우리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우리는 단단히 잘못 짚은 셈이다.

 

이 세계는 완벽하다. 그것은 혼란의 도가니이다.

이 세계는 항상 그렇게 혼란의 도가니였다.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내 자신도 변화시키기 힘든데, 어찌 남을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특히 친구간이나 가족간에도 상대방이 변하기를 원한다. 기억하라. 나 자신도 변화하기 힘든데, 하물며 어찌 남을 세상을 변화시킬려고?....

 

우리는 스스로가 계획해 두었던 삶을

기꺼이 내팽개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를 기다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니까.

 

★ 세상은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힘들거나 실망하지 말아라. 내가 계획한 것보다 우주의 더 큰 계획을 보아라. 인간은 한 티끝의 먼지만도 못하다. 또한 인간속에는 위대한 씨앗이 들어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

낡은 허물을 벗어던져야만

새로운 껍질이 나오기 때문이다.

 

예전 것에 집착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어떤 형상에 매달리게 되면

우리는 썩을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

 

 예전 과거 습관을 벗어던져야 한다. 좀 더 새로운 길로, 새로운 모험을 할려면 낡은 것을 버려야 한다. 깨어있어야 한다. 내 마음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어떤 생각과 생각 사이에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

지옥이란 말라붙은 삶이다.

 

*

욕심꾸러기,

뭔가를 고수하려 하고 붙들어 놓으려고만 하는 우리 안의

그 욕심꾸러기를 반드시 없애 버려야만 한다.

 

*

현재의 형상에만 매달리면,

우리는 다음의 형상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서

오믈렛을 만들 수 있겠는가.

 

*

파괴가 있은 다음에 창조가 있다.

 

완벽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과정은 우선 뭔가를

깨뜨리는 것과 연관된다.

 

생명이 움트기 위해서는

반드시 흙이 부서져야만 한다.

 

씨앗이 죽지 않는다면

식물이 생길 수 없다.

 

빵이란 결국

밀의 죽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

생명이란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켜 살아가는 것이다.

 

*

우리 자신의 생명은

다른 사람들의

희생에 근거한 것이다.

 

*

자신이 살 만한 가치를 지녔다면

그 가치를 기꺼이 취하라.

 

 나의 생명이 다른 이의 희생위에 존재한다. 그 희생이 헛되지 않게 내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태어났으니, 생명이 주어졌으니 감사히 받으며, 내 자신을 위해 춤을 추자. 나도 우주의 가락에 맞춰 춤을 추면서 살아가자.

 

*

우리의 삶에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삶을 경험하는 것.

고통과 기쁨 모두를 경험하는 것이다.

 

 고통을 겪을 때면,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 원망을 했다. 그러한 고통을 겪었기에 남이 고통을 겪을때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고통이 있었기에 기쁨이 어떤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느낀다. 고통과 기쁨을 모두 경험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란다. 삶은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기꺼이 수용하자. 수용하는 속에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축복이니.

 

*

이 세상은 우리의 짝이며,

우리 역시 이 세상의 짝이다.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 행복하고 기쁠때는 위기를 느끼지 못한다. 불현 듯 힘겨움이 나에게 닥쳐왔을 때, 나를 돌아본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본다. 겸허함을 갖게 한다. 고개를 숙이고 남도 돌아보게 된다. 힘겨움은 나를 성장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아픔만큼 성숙할 수도 있지만, 망가지기고 하는게 인생이다.

 

*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

어떤 것에 대해(의례적으로) 공정한 태도를 지니는 것은

곧 그것을 모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경외심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

여러분 자신의 길을 따라

삶을 계속해 나아가는 동안에는

혹시 새똥이 떨어진다 해도

그걸 닦느라 신경 쓰진 마라.

 

 중요한 일을 할때는 사소한 일에 신경쓸 틈이 없다. 내 길을 가는데, 남들이 뭐라하든 그들 머리로 그들 입으로 하는 이야기들을 그들은 그들 생각을 할 뿐이것을, 뭐 그리 신경쓰겠는가. 남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냥 자신들의 프레임으로 나를 보는 것일뿐이다.

 

*

여러분이 현재 처한 상황을

희극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여러분은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된다.

결국 유머 감각이 여러분을 구원하리라.

 

영원은

여기와 지금으로

이루어진 차원이다.

 

신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다.

 

 유머, 희극, 골계, 해학, 웃음은 사람을 긴장에서 풀어준다. 웃음은 나를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보게 한다. 웃음은 나를 여유있게 만들어 준다.

 

*

여러분 자신의 중심에서 살아가라.

 

여러분의 진정한 의무는

공동체로부터 멀리 떠나

여러분만의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

사회가 그 체재를

개인에게 강요할 때

사회는 곧 적이 된다.

 

그 용에게는 수많은 비늘이 있으니

그 각각에는 “너는 할지니”라고 적혀 있다.

“너는 할지니”라고 하는 용을 죽여라.

그 용을 죽인 사자는

비로소 아이가 된다.

 

*

깨뜨리고 나옴은

(남이 보여 준) 희열의 모범을 따르고,

옛 장소에서 떠나고,

여러분의 영웅 여정을 시작하여,

여러분만의 희열을 따르는 것이다.

 

뱀이 그 허물을 벗어 버리듯,

여러분은 지난 날을 내팽개쳐라.

 

여러분만의 희열을 따르라.

 

영웅적인 삶은 ‘각자만의 ’모험을 실행하는 것이다.

 

*

모험으로의 부름을 따르는 것에는

아무런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다.

 

*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미리 안다면

그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인간은 그저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나의 미래는 내가 마음먹은 될 수도 안될 수도 조금 지연될 수도 조금 빨리 다가올 수도 있다. 과정을 무시한 결과는 삶의 과정을 무시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다. 살아가는 오늘 하루하루가 삶의 과정이다. 과정이 충실하면 어떠한 결과가 나와도 받아들이게 되어있다.

 

*

그런 부름을 거부하는 것은

부패를 의미한다.

 

여러분이 긍정적으로 경험하지 않는 것은

결국 부정적으로 경험될 것이다.

 

*

여러분은 숲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가장 어두운 곳을 골라서

그곳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

 

만약 그곳에 어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길이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길이 아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의 길을 따라간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보석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영웅의 여정에 담긴 목표는

영혼에서 여러 층위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파헤쳐

마침내 여러분 자신이

붓다의 의식이며

그리스도라는

신비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인생)여정이다.

 

*

그것은 바로

몰입이 물방울처럼 떨어져 내리는

여러분의 마음 속 정점靜點을

찾아내는 것이다.

 

심연 속으로 내려감으로써

우리는 삶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분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려는 곳

거기에 여러분의 보물이 묻혀 있다.

 

여러분이 차마 들어가기 겁내던

바로 그 동굴이, 여러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의 원천임이 밝혀진다.

동굴 속에 숨어 있던, 그 무시무시하던

저주받은 것이

바로 그 중심이 된다.

 

*

여러분은 보석을 발견하고

보석은 여러분을 끌어당긴다.

 

*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않을 것이다.

 

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면, 세속적인 것도 소중하다는 뜻이네, 정신이 영적인 것이라면, 육체는 세속적인 거라고 비교할 수 있을까? 정신이 아무리 뛰어난다 한들, 몸이 없으면 살았다고 할 수 없다. 육체가 아무리 훌륭한다 한들, 살아있는 정신을 갖지 못하면 살았다고도 할 수 없을게다. 조화와 균형, 영적인 것을 갖추어도 세속적인 것 또한 갖추어야 한다는 뜻일게다.

 

*

여정의 목적은

공감이다.

 

여러분이 여러 대립자들을

지나쳐 왔을 때,

여러분은 이미 공감에 도달했던 것이다.

 

*

목표는 보석을 다시 이 세계로

가져오는 것이고,

그 두 가지를 서로 합치는 것이다.

 

겉으로는 따로따로인 듯

보이는 사물들도

근본적으로는 하나에 불과하다.

 

대립자의 세계 너머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경험되는

통일성과 동질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

오늘날 지구는

유일하게 적절한 내집단內集團이다.

 

*

여러분은 반드시

희열을 느끼고 돌아와

그것을 통합시켜(서 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

귀환은

어디에서나

광휘를 목격하는 것이다.

 

*

스리 라미크리슈나는 말했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 간절함이 없는 것은 볼 수 없다. 간절함만이 내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찾을 수 있다.

 

*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거대한 풍파 속에서도

신과 같은 침착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마치 디오니소스가 표범에 올라타고도

갈가리 짖기지 않은 것처럼.

*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소년이

입문제의를 행할 때

이런 조언을 얻었다.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멍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 커다란 구멍앞에 멈칫 할 수는 있으리라. 멈칫하고 뒤돌아가면 나는 또 다른 나를 찾을 수 없다. 뛰어넘어야 내 안의 또 다른 광맥을 찾아낼 수 있다. 내안의 광맥을 찾아내는 길은 내 앞에 주어진 구멍을 뛰어 넘는 것이다. 한번만 나타나는게 아닐 것이다. 구멍이 여러번 수십번 나타날때마다 뛰어넘다 보면, 어느새 또다른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의식의 첫 번째 단계 : 현세에서의 삶 Living In the World

 

47. 나 자신의 그런 투사의 배후에는 뭔가가 있었다.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서 이런 투사가 나온 것일까? 그 투사는 내 깊은 삶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었고, 바로 그곳에서 한 사람의 운명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 투사는 여러분 자신의 삶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다. 새 삶이-내가 여성에 대해 지닌 모든 경험(심지어 유년 시절에 있었던 것까지도 포함해서)이 - 그 투사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즉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몸 속에 있는 에너지의 잠재성이 성취된 것이다. 그 에너지는 특별한 방식으로 작용하며, 그것으로부터의 작용이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48.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만나면, 아니무스는 강력한 검을 뽑고, 아니마는 환상과 유혹의 독을 내뿜는다. - 융

 

50. 사랑에 빠지는 것은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異性이성에게 자기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그 시작이다.

 

51. ‘아가페’는 ‘자비’요 신적이자 영적인 것이고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향한 것’이며,

‘에로스’는 ‘욕정’이요 자연적이자 육적인 것이고, ‘섹스의 충동, 욕구, 기쁨’이라는 것이다.

‘아모르’는 오른쪽 길(승화시키는 영, 정신, 인간 공동체)도 아니요.

왼쪽 길(자연의 자연발생, 음경과 자궁의 상호 자극)도 아니며,

바로 앞에 있는 길, 눈의 길이며 눈이 심장에 보내는 메시지이다.

 

53. 사랑이 멀리 있으면

삶도 멀리 있다.

 

사랑은 정확히 삶만큼 강력하다.

 

 삶은 사랑이라고 한다. 나에 대한 사랑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전이된다. 자신을 존중하면 남도 존중하게 된다. 나 자신을 소중히 하면 남도 소중히 한다. 나에 대한 사랑이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55.

영혼의 어두운 밤이 지나야

곧이어 계시가 나타난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온통 어둠인 것처럼 보일 때,

새로운 삶이, 하나같이 내가

필요로 하던 것들이 나타난다.

 

 심연으로 들어가야 볼 수 있다? 어두움은 밝음이 있음이요. 고통은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삶은 동전의 양면이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결국은 어둠이 밝음이 올 수 있다는 암시이다.

 

56.

신화학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가운데로 쏟아지는

에너지의 신비를 깨닫게 해 준다.

 

그 안에 여러분의 영원이 놓여 있다.

 

*

신화학이란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에서 인간 영혼의

경험, 행동, 성취에 관한 은유를

간직한 이미지들이 조합된 것이다.

 

 신화를 접하면서 그 이면의 상징들을 배웠다. 신화를 읽으면서 그 상징들이 의미하는 그 너머를 볼 수 있어야 겠다.

 

인생의 전반기에

우리는 사회에 봉사한다. 이것은 종속이다.

인생의 후반기에

우리는 내면으로 돌아선다. 이것은 해방이다.

 

 아무것도 모른채 삶이 급박하고 먹고 살기 위해 생존했었다. 생존이 곧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삶은 생존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자아를 깨우는 것이었다. 삶은 내가 곧 누구이며 같은 일을 하더라고 깨어있으면서 하는 삶은 차원이 달랐다. 숨만 쉬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살아갔다.

 

*

노쇠의 시기에 이르러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감사하고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60. 힌두교에서 비슈누 신에 대한 종교는 곧 사랑의 종교다.

사랑에는 다섯 가지 단계와 함께 그 각각의 단계를 대표하는 모델이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주인에 대한 하인의 사랑으로,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두 번째 단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세 번째 사랑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네 번째 단계는 배우자 대 배우자의 관계로, 자웅동체의 또는 ‘다른 한쪽’의 발견이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다섯 번째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억제하기 어려운 금지된 사랑으로, 여기에서는 오로지 사랑뿐이어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된다.

 

 

66.

결혼은 연애가 아니라,

시련이다.

그것은 종교적 훈련, 성찬식,

도 다른 삶에 참여하는 은총이다.

 

 결혼에 대한 환상은 거의 없었다. 어떻게 그 젊은 날에 그런 생각을 가졌었는지를. 맞다. 결혼은 시련이었다. 나와 다른 낯선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도 쉽지도 않았다. 많은 시간이 흐른뒤에 알았다. 문제는 상대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있었다.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하자 문제될 것이 없었다. 기대하지 않으니 서운한 것도 없었다. 내가 내 삶을 살 듯이, 상대방도 자신의 삶을 살기를 독려한다.

 

성공적인 결혼은

혁신적인 삶을 함께 이끄는 것이며,

열려 있는 것이며, 계획표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낙하다.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날 때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다.

 

바다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처럼,

여러분은 이리저리 떠다니겠지만

지혜와 연민으로

헤쳐나가야 한다.

 

 인생의 제 2의 새로운 시작이 결혼이다라는 생각이다. 나와 다른 낯선이와 함께 공동의 인생을 꾸려나가야 하는 것. 문제가 닥칠때마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서로의 지혜가 모아져야 할 것이다.

 

67. 여러분이 사랑이라고 불러 왔던 것이 실상은 욕정이었을 경우, 그것은 단순히 어떤 일시적인 상태에 불과하다. 시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시들지 않는다.

 

 처음의 사랑이 욕정으로 시작된 것은 진실일거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어찌 고귀한 사랑이겠는가. 욕정이 정화되고 승화되어 사랑이 되는 것이지. 본능으로 시작한 것이 남녀의 끌림일거다. 호르몬의 작용. 즉 ‘눈에 콩깍지가 씌인다’는 뜻일게다. 호르몬이 정상수치로 돌아오면. 일상의 성격이 나오는데, 바로 그때 사랑이 시작되거나 식거나 할 것이다. 그래서 결혼하면 시련이 시작되면서 연애는 끝이 난다.

 

고결한 마음을 위해서는,

결혼은 우선 반드시 영적이어야 하며,

물리적 완성은 그 다음이어야 한다.

 

68. 책임감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건 단지 소유물을 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러분은 과연 누군가를 소유하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관계를 구축 하려하는 것인가?

사람이 평생에 한 번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결혼이다. 결혼생활을 한다는 것은 곧 상대방의 삶이 내게 달려 있다는 의미임을 수긍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차마 결혼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69. 내 생각에 결혼이란 상대방을 책임지고 사랑함으로써 상대방과 진정한 일체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것, 즉 여러분 혼자의 운명을 두 사람의 운명으로 전환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헌신이다.

 

 내가 상대방이 운명을 바꿀수 있는게 바로 결혼이다. 내가 상대방의 운명이 되고, 상대방또한 나의 운명이 되는 것, 상대방을 위한 헌신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를 위한 헌신이라는 의미를 되새겨 봐야 겠다.

 

70. 혼외에도 사랑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여러분이 혼외로부터 오는 사랑을 차단하게 되면,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일부를 결혼생활에 가두게 되는 셈이다.

여러분은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법을 단 하나만이 아니라 다양하게 계발해야만 한다.

 

 

72.

 

결혼은

여자가 주도하고

남자가 따라가는 것이다.

 

양쪽 모두 정신적 길잡이가 없는 한,

결혼이란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자아가 무너져야만

두 사람은 합쳐질 수 있다.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영혼은

발효되고, 융합되고,

분해되고, 부패되어야 한다.

 

결혼이란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그 관계됨에 희생시키는 것이다.

 

75.

성배로 향하는 열쇠는 공감,

다른 사람의 슬픔을 마치 여러분의 것인 양

느끼고 또 같이 고통 받는 것이다.

 

공감의 위력을

깨달은 사람은

성배를 발견한 사람이다.

 

 상대방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 일게다. 상대방에 대해 공감한다는 것은 내가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이나 깊이가 있음이다. 내가 경험한 만큼 상대방을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게다.

 

75. 이런 질문을 던져 보다. “나는 무엇에 대해서나 항상 공감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공감이란 말 그대로이다. 즉 ‘같이 고통 받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즉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도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본인의 안전을 망각하고,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는 정도로 말이다.

 

 공감이란 상대방이 받고 있는 고통을 같이 받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힘듬에 함께 있는 것.

 

77. 쇼펜하우어는 타인과 별개라는 이차적인 자아의식 때문에 행동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토대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라는 더 크고 더 참된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생존의 삶의 두 번째 법칙이다.

첫 번째 법칙은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80.

여러분은 어머니로부터 여러분의 몸을 얻었다.

여러분은 아버지로부터

사회에서의 역할을 얻는다.

 

82. 돈이란 내게 그 어떤 의미도 없다. 내가 유럽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 3주 만에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대폭락했다. 당시 내가 지닌 유일한 재산은 대학의 어는 재즈 밴드에서 연주를 해서 모은 것뿐이었다. 다해서 수천 달러가량 되었는데-그 당시에는 제법 큰 돈이었다- 나는 그 돈이 완전히 바닥날 대까지 버텼다. 다시 말해 이후 5년동안 나는 땡전 한 푼 벌지 못했던 것이다. ....

나는 이제껏 돈에 관해 완전 무심한 삶을 살아왔다. 대신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함으로써 제법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결국 돈이 따라오게 된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삶에 선사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에게 보답하는 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 내 삶에서 하나가 사라지면, 또 하나가 다가온다는 것을 나는 항상 믿는다. 사라지고 없어진 것만을 보지 말고, 내게 새롭게 다가온 것을 볼려고 한다. 삶은 동전의 양면이다. 사라짐은 곧 새로운 것이 다가옴을 의미한다.

 

83. 삶의 에너지로서 경험되는 돈은 실제로 명상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을 축적하는 대신 흘려보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는 한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돈에 몰두한 삶으로부터 뭔가 아름다운 것이 자라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겐 매우 놀라웠다.

 

 돈은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용하기 위해서 번다. 내가 의미있게 나와 남을 위해 사용하든 돈은 필요하다. 돈은 사막에 꽃도 피워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축적하는 돈보다는 돈을 사용함으로써 내가 다른 사람의 삶에 참여한다.

 

84.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이 하나의 문턱에서 또 다른 문턱으로 움직일 때에는 차라리 점프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더 아래로 내려갈 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점점 더 많은 것이 피어날 것이다. 여러분의 중심으로부터의 잠재력은 다음 모험에 필요한 미래 예측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 뭔가를 시작할 때, 나는 늘 ‘뭐 바닥인데, 잃을게 더 이상 없으니. 뭐가 두렵겠는가?’ 라는 생각을 한다. 잃을게 없으니 두려울게 없다. 가진 것이 소유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함으로서 내가 세상에 서는 것이다. 소유족이 아니라 ‘내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있는 것. 존재적 인간이 되야 하지 않겠는가.

 

85. 여러분에게는 에너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를 흘려 보낼) 경로의 모델을 제공하는 사고력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여러분의 삶은 진정으로 꽃을 피울 수 있다.

 

 에너지를 흘려보낼 경로의 모델이 필요하다? 생각해볼 만한 구절이다.

 

86. 열등감이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99.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 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무얼 해야지’하고 미리 생각해 둔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 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며,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진짜다, 이건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다. 여러분을 옥죄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싹 지워 버리면, 여러분은 마치 룰렛 바퀴 위의 공처럼, 자신이 어디에 안착할 것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룰렛 공은 결코 ‘아, 여기 내려앉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기 내려앉아야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할 거야’하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 그저 ‘그들만의’ 생각일 뿐이니까.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치워 버려야 희열이 온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그들 머리를 가지고 그들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을 내가 뭐라 하겠는가. 그들은 그들 삶을 사는 것이고, 나는 내 삶을 살아갈 뿐, 남의 눈대로 살아가는 것은 나의 삶이 아닌 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진정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야만이 남의 인생도 존중해줄 수 있다.

 

100. 방랑을 하는 동안 여러분은 일종의 신비로울 정도의 유기적인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마치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다. 다음번에 어디가 자라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나뭇가지는 이쪽으로 자랄 수도 있고, 그 다음에는 저쪽으로 자랄 수도 있으며, 그리고 나서는 또 다른 쪽으로 자랄 수도 있다. 나무를 제멋대로 자라게 내버려 두고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가하지만 않으면, 나중에 가서 여러분은 그것이 아나의 유기적 발전 과정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기억하라. 파르치팔은(성배 성에서 왕의 부상에 관해 질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고서도)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던 대로 행했기 때문에 오히려 망치고 말았다는 사실을.

 

105.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느냐는 것이다.

 

107. “결국 모든 삶은 전체의 실현, 즉 자아의 실현이다. 때문에 그 현실을 ‘개성화’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삶은 그것을 실현하는 각각의 운반자에 매여 있으며, 운반자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운반자는 개별적인 운명과 목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했을 때에야 비로소 삶을 이해할 수 있다. ”-융

 

108. “ 이 나라에서는 할 사람의 영혼이 탄생할 대 거기에 그물을 뒤집어 씌워 날지 못하게 한다고, 너는 나에게 국적이니, 국어니, 종교니 하고 말하지만, 나는그 그물을 빠져 나가 도망치려고 노력할거야.

 

영혼에게 “뒤집어 씌워 날지 못하게” 하는 그물이라도 도 다른 사람, 즉 자신의 한가운데(중심)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향후의 모험을 위해 본인이 자유롭게 선택한 옷이 된다.

 

109.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셨는가?’ 라는 질문에

천국이란 여러분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그것은 영원히 여러분 자신의 근본적인 측면이다. 그것이 바로 환희이다. 그다음 현세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 지식과 사랑과 봉사’를 , 즉 여러분과 만물 내에 존재하는 삶의 에너지를 생성할 것을 요구한다.

내 경험은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나는 내가 성배의 성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런 성취가 이루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맹세코 내가 그 성을 잃어버렸다고. 그 성이 사라져 버렸다고 느끼게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111. 영웅의 여정은 항상 부름으로 시작된다. 인도자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아라. 너는 지금 ‘잠든 당’에 있다. 깨어나라. 여행을 떠나라. 저곳에 너의 의식의, 또한 너의 존재의 온전한 측면이 있건만, 아직 한 번도 손댄 적이 없었다. 그러니 너는 여기서 그냥 머물 것이냐? 아니. 그러헥 하는 건 너에게 충분치가 않다.” 그렇게 해서 여정이 시작된다.

 

모험에의 소명(부름)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고지자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소명에 따르면, 낮의 장벽을 통과해 보석이 빛나는 밤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부름은 곧 어떤 사회적 지위로부터 떠나라는, 즉 여러분 자신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 보석을 찾으라는 즉 여러분이 사회적으로 속박되어 있을 때에는 찾기가 불가능한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중심을 잃은 상태가 되며, 스스로가 그렇게 중심을 잃은 상태라고 느낄 경우, 여러분은 떠날 때를 맞이한 것이다. 영웅이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걸 찾으러 갈 때, 그게 바로 출발인 것이다. 여러분은 문턱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위험한 모험이니, 이는 여러분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관한 지식의 영역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120. 일본 속담 중에 인간의 성장에 있어 다섯 단게를 설명한 것이 있다.

“열살에는 짐승,

스물 살에는 미치광이,

서른 살에는 실패자.

마흔 살에는 사기꾼,

쉰 살에는 범죄자, ”

나는 여기에 덧붙여,

사람이 예순 살에는 (그때까지는 이 모든 과정을 거칠 것이므로) 친구에게 충고하기 시작하고, 일흔 살에는 (그동안 들은 것들이 모두 오해였음을 깨닫고) 침묵을 지키고 현자로 여겨진다고 말하고 싶다. 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든 살에 나는 나의 자리를 일고 굳게 섰다.”

 

융은 일생의 곡선이 딱 반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그 중 전반은 관계의 시간이며, 나머지 후반은 자기 안의 삶의 감각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또는 힌두인들이 말하듯 “마르가marga'를 따라가서-여기사 ‘마르가’란 길. 즉 여러분이 겪은 인간 경험의 발자취를 말한다- 여러분 자신으 내부를 향한 삶으로 가는 시기이다. 그러고 나서 완전한 해방이 찾아온다. 분노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인생의 마지막 단계을 지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노래하며 자신의 죽음으로 가는 것이다.

 

“”의사로서 나는 사람들이 죽음에서 어던 추구할 만한 목적을 발견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확신한다. 죽음을 외면하는 것은 인생의 후반기에서 그 목적을 빼앗는 불건전과 비정상의 징후라고 생각한다.“- 융

 

128.

의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여러분에게 알려준다.

 

식사 전에 드리는 감사기도는

지금 먹게 될 음식이 한 때는

살아 있었던 것임을 여러분에게 일깨워 준다.

 

여러분이 취하는 동물의 생명을

돌려주는 방법은, 지금 여러분이

무엇을 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130.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서를 연구하는 중에 나는 수도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식전 기도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기원이었다.

 

“브라흐만은 우주에 충만하고, 만물에 편재하고, 삶의 의식 에너지인.

우리는 모두 그 현현일뿐이다.

브라흐만은 희생이다.

브라흐만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다.

브라흐만은 희생의 소비자다.

브라흐만은 희생을 불로 옮기는 국자다.

브라흐만은 희생의 과정이다.

만물이 브라흐만임을 깨닫는 자는

자기 안에 브라흐만이 있음을 깨닫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이 감사기도의 의미는, 음식을 여러분의 체내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헌주를 희생의 불길 위에 붓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소화기관에서 나오는 불길이 여러분이 먹는 것을 살라 소비하기 때문에, 음식을 먹는 것은 곧 희생이나 마찬가지다.

 

“씨앗이 죽지 않는다면, 식물이 생길 수 없다.” 씨앗으로 죽어야만 새싹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131. 여러분 또한 기꺼이

먹힐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도 음식 재료이가 때문이다.

 

133. 한 청년이 화가에게 말했다.

“여자들도 (아이를 낳을 때) 시련을 겪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남자들)역시 고통 받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

 

134. 나는 여성 특유의 경험이란 이처럼 뭔가를 견뎌 내야 하는 것임을, 따라서 거기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인내, 즉 견디는 힘임을 깨닫게 되었다.

소년은 남자임을 ‘드러내야만’한다. 반면 소녀는 여자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삶이 그녀를 압도하는 것이다.

 

137. 가가자의 마지막 보물을 포기하는 순간 ‘모크샤(moksa), 즉 ’해방‘을 실제로 경험했다.

 

(.....) 삶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있어서의 시래는 결국 의식의 제약으로 나타나는 수밖에 없다. 사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내게 있어 무엇보다도 흥미진진한 것은 바로 그 실제 경험이었다. 그것은 행복한 참여의 감정이었다. 일찍이 나 자신을 구속하던 것이 사라져 버림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포기한 보물을 향한 우리의 감정을 실제로 바꿔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집착 없이도 그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더욱 증대시킨 것이었다.

 

139.

종말이란

불타는 아마겟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자기만족이

끝난다는 뜻이다.

 

141. (....) 천장의 전구가 모든 빛의 수레이듯, 아래에 있는 우리 모두는 저마다 의식의 수레이다. 하지만 전구에게는 빛의 길이 가장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는 의식의 질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을 덧없는 육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자기 육체를 단순한 의식의 수레로 여기고, 의식을 우리 모두를 통해 현현하는 존재로 여길 수도 있다.

 

육신이 전구라면, 그리고 전구가 나가 버린다면,

더 이상은 전기가 없다는 의미가 되는 것일까?

에너지의 원천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육신을 내버리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바로 원천이가 때문이다.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죽는 것은 반드시 태어난다.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 (...) 모든 사람의 육체 안에 사는 절대자이는 결코 죽지 않는다. (....) 그것은 무기로도 베지 못한다. 그것은 불로도 태우지 못한다. 그것은 물로도 적시지 못한다. 그것은 바람으로도 말리지 못한다.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자아는 영원히 한결같다. (....) 모든 츅체 안에 사는 절대자아는 죽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떤 피조물를 위해 슬퍼하지 말라.”

- 바가비드 기타-

 

“만물은 나아가고,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이는 오직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靜溢(넘칠일)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魔(마귀)가 인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 아니다. -노자

 

우리는 원기회복을 위해 죽음으로 내려가낟.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오비디우스

 

아즈텍에서는 임종을 맞이한 사람에게 이렇게 기도한다. (....)

“자녀여, 그대는 이승의 삶이라는 수로오운시련을 다 치러 내고 승리한 자이니라. 이제 우리 주님이 그대를 데려갔으니, 그 얼마나 기쁜 일이야? 우리 역시 영원히 이승에 있는 것은 아니요. 잠시 다녀가는 것 뿐이라. 우리의 삶이란 햇빛에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느니라.”

 

149. 모든 순간들은 그야말로 유일하며 결코 영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삶은 특유의 통렬함을 지니는 것이며, 여러분은 지금 경험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150.

죽음에 대한 저항은

여러분이 죽고 나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151.

불교의 중심 사상은

집착 없는 공감이다.

 

의식의 두 번째 단계 깨달음을 향한 길 Coming Into Awareness

 

162.

깨달음 직전에 도달하면

예전 방식이 오히려 더 유혹적이어서

여러분을 뒤로 잡아끌게 마련이다.

 

타트 트밤 아시’, 즉 “네가 바로 그것”

객체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주체를 소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최후의 장벽은 여러분이 신이 되는 것을 막는 장벽이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여러분의 영혼에 매달린다면, 여러분은 신과 함께 있는 자가 될 수 없다.

 

167. “가장 좋은 것은 말할 수가 없다.” -하인리히 침머

 

168. 요가의 첫 번째 잠언은 다음과 같다.

“요가는 마음의 자발적인 활동을 의도적으로 중지시키는 것이다. ”

우리의 마음은 지속적인 유동체로서,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연못의 수면과도 유사하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보는 형상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의 삶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갖가지 형상들은 단순히 시간의 장 속에서 왔다가 가는 이미지들을 투영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모두의 아래에는 형상들의 본질적인 형상이 있는 것이다. 그 연못을 완전히 고요하게 만든다면, 즉 바람을 물러가게 하고 물을 맑게 한다면, 그러한 정지 상태에서 여러분은 그 모든 변화하는 형상 아래에 있는 완벽한 이미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169. 채식주의는

생명을 향한 가장 큰 모독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오로지

도망칠 수조차 없는 것들만 먹는다.

 

171. 보디사트바(菩리)의 방법-즉 영원에 근거화되 시간의 장 속에서 움직이는 자의 방법-의 마지막 공식으로 이끌어 간다. 시간의 장은 곧 슬픔의 장이다.

“모든 삶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173. 융은 1909녀에 이르러서야 신화와 꿈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디만, 인도에서는 그런 사실이 영원으로부터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옴 또는 아움(A-U-M)이라는 철자에 함축되어 있다.

옴은 자연의 소리, 다시 말해 자연이 그 스스로 즐거워할 때에 발하는 소리라네.“

‘아’는 깨어나는 의식이다. ‘우’는 꿈의 의식이다. ‘옴’은 깊고도 꿈조차 없는 잠의 영역이다. 아움은 하나님의 광휘의 소리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신비롭고 중요한 것이며, 일단 한번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매우 간단하다.

 

176.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 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

 

176. “우리는 매일 밤 브라흐만의 세계로 가지만, 아뿔사, 잠든채로 가는 것이다. -우파니샤드

 

180.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고 에로틱한 충동에 사로잡히면 여러분은 자기보호를 포기하는 것이다.

 

192. “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악덕을 포기하지 마라.

그 악덕이 여러분을 위해 일하게 하라.

 

여러분이 오만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오만을 없애지 마라.

그것을 여러분의 영적 탐구에 활용하라.

 

196. ‘노예의 도덕’-즉 지배에 순종하고, 시키는 대로 행하고 나쁘지 않고 착하게 구는 것-과

‘주인의 도덕’-그리스적인 덕의 관념이며, 르네상스의 ‘비르투virtu'라는 관념에 상응하는 것이며, 어떤 것에 유능한 사람에 의해 성취되는 종류의 탁월함과 관계가 있는 것-을 구분했다.

 

199. 심리학이란 해석의 수단, 즉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해석하기 위한 방법이다. ... 그 신은 반드시 심리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따라서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이 ‘저 바깥에 ’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0. 이 지구는 그 태양의 위성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는 그 지구에 있는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무이다. 사실상, 우리는 이 지구의 산물인 것이다. 우리는 말 그대로 지구의 기관이다. 우리의 눈은 바로 이 지구이 눈이고 우리의 지식은 이 지구의 지식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바 이 지구는 우주의 산물이다. ).....)

 

202. 우리의 제한된 어휘가 우리를 옭아매고, 우리를 묶어 두고 있는 것이다.

 

205. 두려움과 욕망에 의해

위협을 당할 때에는

자아를 놓아 버려라.

 

206.

“시간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단 한 번의 삶을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서 에덴동산의 비밀을 찾아내야 한다. -로렌 아이슬리

 

207. 관계의 종교는

추방의 종교다.

 

우리의 실제적이고 궁극적인 뿌리는

우리의 인간성 속에 있는 것이지

우리의 족보에 있는 것이 아니다.

 

209. 만약 여러분이

자신과 자신의 전통에 집착하여

여러분 혼자만 ‘그것’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인류의 나머지로부터

스스로를 제거한 셈이 된다.

 

211. 삶의 목표는

여러분의 심장의 박동을

우주의 박동에 맞추는 것이며,

여러분의 본성을 자연에 맞추는 것이다.

 

전사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이다.

 

214. 사탄은 뭔가를 범할 수 있는 자아의 축도다.

 

219. 다른 사람이 하는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악의? 무지? 오만? 사랑?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이다. 즉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이다.

 

223. “ 네가 다섯 개의 손가락을 통과시킬 수 있다면 대문大門이고,

그렇지 않으면 문門이다. “ -조이스의 <율리시스>

우리가 접하는 어려움 역시 닫힌 문이 아니라, 오히려 활짝 열린 대문으로의 변화 가능성이라고 간주되어야 하리라.

 

230.

여러분이 자신의 삶에

권위자가 되었을 때,

여러분은 비로소 성숙하게 된다.

 

231.

신을 선택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신들은 무수히 많다.

여러분의 신을 선택하라.

 

여러분이 숭배하는 신이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신이다.

 

232.

부족에게 신들은

힘을 의인화한 것이었다.

나중에 가서는,

그것들이 힘의 원천이 되었다.

 

이 세계의 모든 신들은

힘이 아니라 은유다.

 

246.

오해는 다름이 아니라

영적이고 신화적인 상징을

마치 그것들이 역사적 사건을

가리킨다고 독해함으로써 생긴다.

 

258.

여러분의 성스러운 공간은

여러분이 자신의 모습을

거듭거듭 찾을 수 있는 장소다.

 

암브로시아- 외부로부터 여러분 안에 불어넣는 기쁨이 아니라, 여러분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의 샘이 있는 어떤 활동 공간, 즉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

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 있어야 한다.

 

259.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 하나는

어떤 결론을 내려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매사가 그 순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260.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어른이 되고 나면,

여러분은 자기 삶을 움직이는 힘을

반드시 재발견해야 한다.

 

긴장, 정직의 결여,

그리고 비현실적 감각은

여러분 삶의 잘못된 힘을

따름으로써 나타난다.

 

261. 내 경우에는 열한 살 때부터 열 다섯 살 때까지 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해 열광한 적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미국 인종국의 보고서인 <파크먼 전집>을 비롯해서 그 주제에 관한 갖가지 책들을 사 주셨다. 나는 제법 훌륭한 소규모 장서를 갖고 있었으며, 책버팀대로 사용하는 멋진 인디언 두상들이며, 나바호 족 깔개 등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 불이 나고 말았다. 우리 가족에게는 크나큰 재난이었다. 그 사고로 인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 물건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262.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때

그때부터 일이 시작된다.

휴식이 곧 놀이인 것이다.

 

“이 세계의 감각과 사물에 집착하는 사람은 누구나(...) 무지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며, 자신의 열정을 표상하는 뱀에 의해 잡아먹히는 중인 것이다. -블랙 엘크(검은 고라니)

 

성스러운 공간은 속세로부터 완전히 밀폐 봉인되어 있다. 여러분이 그런 공간 안에 들어가면, 그 밀봉된 곳으로는 아무것도 통과할 수가 없다. 여러분은 날짜나 시간이 주는 자극의 영향으로부터 보호받는 영원의 장소에 있게 되는 것이다. 명상을 할 때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즉 여러분 스스로를 봉인하는 것이다. 명상의 자세는 봉인하는 자세이며, 규칙적인 호흡은 여러분의 내부로 향한 탐험을 더욱 북돋운다. 이 세계는 봉인되고, 여러분은 독립적인 실체가 되는 것이다. 천국이란 바로 ‘여러분 안에’ 있는 밀폐 봉인된 공간을 말한다.

 

264.

성스러운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상징적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영적 삶이 가능하고,

여러분 주위의 만사가

영의 고양을 이야기하는 곳 말이다.

 

265. 명상 훈련이라든지 성스러운 공간의 경험을 통해서- 성스러움이 무엇인지르 배워야 한다. 성스러움이란 주위의 대상과의 은유적 관련성이다.

 

성스러운 공간에서는

무슨 일을 하건 간에

그 주위는

은유가 된다.

 

266. 성스러운 공간은 초월에 대해 투명한 공간이며, 그러한 공간 안에 있는 만물은 명상을 위한 기반을 제공한다.

 

271. 캠벨이 인도 스승 ‘스리 아트마난다’를 만나러 갔을 때 일어난 이야기.

내가 던진 질문은 이러했다.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고,

모든 것이 성스러운 광휘라면,

어떻게 우리는 무지나 잔인함이나 또 다른 것들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당신과 나의 경우, 우리는 ’예‘라고 합니다. “

 

사회의 이상을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신비주의자의 길이다.

 

그러더니 그는 내게 작은 생각거리를 건네주었다.

“어떤 생각과 생각 사이,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 말해 여러분은 항상 생각을 하고 있으며, 또한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과 생각 사이에 여러분은 과연 어디 있는 것일까?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너머, 즉 여러분이 자신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을 일별이라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여러분의 모든 에너지가 비롯되는 원천의 장이다.

 

명상을 할 때에는

여러분 자신의 신들에 관해 명상하라.

 

삶의 목표란 뭔가 더 높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탈것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눈을 저 높이에,

즉 대립의자 쌍들 사이에 고정시키고

이 세상속에서 여러분의 ‘놀이’를 바라보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파도와 함께 흔들리는 법을 배우라.

 

조이스의 말마따나,

세상의 쓰레기 속에서도

‘광휘를 발하는’ 채로 남아 있으라.

 

274. 하늘 나라 전체가

우리 안헤 있지만, 그걸 찾기 위해서는

바같에 있는 것과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여러분은 반드시 여러분의 신을 죽여야 한다.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모든 고정관념들을 없애 버려야 한다.

 

277. 어휘설명

 

278.

“거기 들어가서 네 할 일을 하라.

그 결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슬픔을 본질이라고 인식하라.

시간이 있는 곳에는 슬픔도 있게 마련이니.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없앨 수는 없지만,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선택을 할 수는 있다.

 

283. “여러분 모두의 길은)인간의) 의식과 깨달음을 확장하는 데 있어 타당한 길입니다.”

-달라이 라마-

 

“이제 여러분은 불교도의 길에 들어섰스빈다. 계속해서 명상하십시오.

즉각적인 깨달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정신은 천천히 깨달음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방법에만 집착하지는 마십시오. 명상을 하는 주에 여러분의 의식이 확장되고 변화되면, 그때 가서 여러분은 모든 길들이 타당한 길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

 

285. 여러분이 뭔가를 욕망하고 뭔가를 두려월할 때, 그것이 바로 유한이다. 붓다가 겪은 세 가지 시험-욕망, 두려움 그리고 의무-은 시간의 장에서 여러분을 붙잡도 있는 것들이다. 유한과 영원을 판별함으로써, 여러분이 스스로의 주위를 밀폐 봉인하게 되면, 여러분은 스스로의 안에서 변하지 않는 정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니르바나’를 성취한 것이다. 그 정적인 장소는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타오르는 불길이다.

 

286. 니체는 우리가 반드시 자기 힘의 4분의 3만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그것이 바로 판별이다.

 

여러분이 하는 일에는 무엇에나 정점이 있다.

여러분이 그런 정점에 있을 때,

여러분은 최대한도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290. 인도에서 비구가 입는 노란 승복은 본래 시신에 입히는 수의의 색깔이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자라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

 

291. 이것이 바로 수도승의 삶이다. 이것이 바로 학생의 삶이다. 이것이 바로 교단에 복종하는 것이다. 삶은 이제 염주를 이리저리 굴리고 ‘옴’을 외는 것으로 축소된다.

 

294. ‘기쁨이 곧 요가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삶이 곧 여러부느이 요가다.

 

붓다는 완전한 의식에 대해

눈이 열린 사람을 말한다.

 

“신을 예배하려는 자는 우선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할지니-탄트라의 격언

 

296. 하늘나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깨달은 속에 있다.

우리 이웃 속에, 적들 속에, 자신 속에

편재하는 신들의 현존에 관한 깨달음 속에,

 

297. 여러분의 합리 체계를 떠나,

항상 만물 사이로 움직여 나가는 놀라운 경험 속으로 들어가라.

 

삶을 통해서면

우리는 영을 경험하고

또 영과 의사소통한다.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 속에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영을 완전히 추구하는 사람은

삶의 목표가 곧 죽음임을 안다.

 

298. 앨런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자네의 문제는 집사람이 거기 도착하기를 바란다는 것. 그리하여 자네가 속해 있지 않은 어떤 상황을 열망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명심하게. 줄곧 현실과는 다른 일을 생각함으로써 거기서 진을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었던 다른 경험들을 망치고 있는 셈임을 말이야. ”

 

앨런은 내게 현실이 지금과는 달랐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차단해 보도록 조언해 준 것이었다.

이것은 두려움과 욕망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으리라. 나는 상황이 내 계획대로 되기를 욕망하고, 그런 욕망은 나로 하여금 다른 경험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게 바로 그것이다! 이게 바로 삶이다.! 바라보라! 기운이 넘치지 않는가?

 

299. 두려움과 욕망의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여러분은 불멸로부터

스스로를 배제시키는 것이다.

 

300. 모든 종교 훈련의 목표는 심리학적 변화다.

 

일시적으로나마 삶을 뒤로 함으로써,

여러분은 스스로를 삶에 바치는 것이다.

세속적 이득에 대한 욕망과

상실에 대한 공포로 인해

여러분은 스스로를 삶에 내어주는 데에서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사회적 의무를 수행한다면,

그것은 결코 ‘여러분의 ’행위가 아니다.

다만 사회가 그런 의무를 부과했을 뿐이며,

여러분을 스스로의 삶에서 차단시킨 것이다.

 

304. 세상을 변화시킬 필요 없이 단지 관점을 바꿈으로써 슬픔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삶이란 항상 슬픔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305.

“불어오는 바람을 행해 침을 뱉을 때에는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니체

 

310

지혜와 어리석음은

사실상 똑같다.

두 가지 모두 세상의 견해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317. 그녀의 자궁은 공간의 장이며, 그녀의 심장은 시간의 맥박이고, 그녀의 생은 우주적 꿈을 반영하는 우리들 각자의 삶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피안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의 매혹하는 힘이다. 성서로 치자면 그녀는 이브이다. 인류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들, 즉, 바위, 나무, 짐승, 새와 물고기, 태양과 달과 별들의 어머니로 확장된 이브라고 할 수 있다.

 

318. 농사가

생계의 주요 수단일 때

이 세상에는 땅과 여신의 힘이 있다.

 

사냥이 주요 수단일 때,

짐승을 잡을 수 있게 하느 srjt은

바로 남성의 주도권이다.

 

319.

남성 = 사회의 질서

여성 = 자연의 질서

 

남성의 일은 생명과 관계하는 것이다.

여성의 일은 생명 자체가 되는 것이다.

 

“남성은 역사를 만든다. 여성은 역사 자체다.”

여성은 그것 자체이고, 남성은 여성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 그 자체인 곳 안의 장을 꾸며 줄 뿐이다.

 

남성의 기능은 행동하는 것이다.

여성의 기능은 존재하는 것이다.

여성은 ‘그것’이다. 여성은 어머니 지구이다.

 

334.

남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

여러분은 분리를 겪는다.

여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둘이 아닌, 포용하는 특성이 존재한다.

 

335.

완전 무장한 기사가

위험한 침대를 향해 다가간다.

그 안에 누우려고 할 때마다

침대는 펄쩍 뛰고 반항하며 움직인다.

 

위험한 침대는

여성의 기질을 표상한다.

만약 남성이 그냥 매달릴 수만 있고,

남성이 견딜 수만 있다면,

그 침대는 얌전해지고

남성은 그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338.

아버지는 분리자이다.

어머니는 합체자이다.

 

주요한 여성의 힘과 미덕이 바로 공감이다.

참여에의 포용이다. 우리 모두의 존재 기반이기도 한 보편적 공통성에 대한 포용성이 바로 공감이다. 자발적 감정을 인식하고, 포용하고, 나아가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여성의 힘이다.

 

342. 그 모두가 사랑힐 때,

세상 모두는 반드시 사랑이어야만 한다.

무엇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의식의 세 번째 단계: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Living In the Scared

 

345. ‘환영(幻影)’이라는 뜻을 지닌 인도의 ‘마야maya'는

-'측정하다: 재어서 나눠 주다; 형성하다; 창조하다; 짓다; 드러내 보이다; 전시하다’라는 듯의 동사 어근 ‘마야ma'에서 유래한다-

환영을 창조하는 힘과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假像가상 둘 다와 관련된다. 예컨대 마술사의 기술도 마야이고, 그가 창조한 환상도 마야다. 군사전략가나 상인, 배우, 도둑의 기술도 마야다. 마야는 매혹이자 매력, 특히 여성적 매력으로 경험된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한 불교도의 말을 빌리자면 “마야의 모든 형태 중에서 여성의 형태가 가장 훌륭하다.’

346. 마야란

초월을 세계로 전환시키는

힘이다.

 

348. 공포와 욕망은

또한 예술가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음이 인식할 준비가 된 것을

드러내는 시詩가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지각이 문이 정화되면, 만물이 인간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무한하게 드러난다.”

- <천국과 지옥의 결혼> 에 나온 시인 블레이크-

하지만 문들의 정화, 즉 수문장들인 화염검 든 케루빔의 일소 등은 예술의 첫 번째 효과이고, 그와 동시에 두 번째 효과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단 한 올의 터럭 속에서 ‘수천 마리의 황금 사자’를 인식하는 기쁨이다.

 

“어떠한 물건이든 세심하게 관찰해보면 신들의 불멸의 영겁에로 접근하는 문이 될 수 있지. -

제임스 조이스<율리시스>에서 멀리간이 하는 대사

 

349. 예술은 곧 변모의 경험이다.

 

351. 삶의 목표는 환희다.

예술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353. 조이스는 적절한 예술의 도움을 받아 아퀴나스에게로 나아간다. 그는 라틴어를 사용해서 심미적 대상이 세 가지 순간을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integrita,전일성, ’consonantia, 조화‘ ’claritas, 빛‘이 그것이다.

 

357. 인도의 음악은 결코 어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들의 음악은 의식의 평원을 표상하며, 끝도 없이 계속될 뿐이다.

 

358. 음악의 구조와 건축의 구조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모든 건축은 공간 속의 구조다.

 

“예술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다.” -세잔

 

359. 우리 안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었던 자연인 것이다.

 

368. 미술이란 동정녀의 매개다. 미술은 마야의 드러내 보이는 힘의 수단이며, 우리가 지상에서 초월로 나아가는 수단이다. 미술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항상 여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72. 예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오랜 속담이 있다.

“우선 모든 규칙을 배운 다음, 그 규칙을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 ”

다시 말해서 규칙들이 순수한 행동 속으로 노아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372. 책을 한 권 쓰는데 있어서 여러분은 우선 자신의 영감과 직관에서 출발한 다음, 곧이어 어려운 과정을, 즉 여러분이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역을 맞닥뜨리게 되고, 바로 거기서 멈춰 버리게 된다. 바로 그때가 여러분이 규칙을 끌어내야 할 때이다.

 

374. 창의적 행동은

뭔가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창의적인 움직임을 산출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되려고 시도하면서도, 그 기예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결코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치료요법으로서의 예술’과 ‘예술고서의 예술’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 치료요법은 한 사람을 인간적이게 만들고, ‘예술로서의 예술’은 그 사람을 인간성을 넘어 새로운 차원으로 데려간다.

 

376. 춤이란

생명 그 자체의

지고한 상징이다.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예술 작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처럼 되어라! 현상의 끊임없는 변화에서 영원히 창조적이고, 영원히 실존을 강요하며, 이 현상의 변화에 영원히 만족하는 원초적 어머니인 나를!” -니체

 

예술은

우리를 스스로의 얽힘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한 쌍의 날개다.

 

378.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춤추는 것이다.

 

379. 자기 안에서 신을 찾기 위해 반드시 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바로 그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신을 뭐라고 부르고, 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건 간에, 여러분이 예배하는 신은 생성이 가능한 신이다.

신들의 힘은 자연 속에 있는, 그리고 여러분의 본성 속에 있는 힘이 의인화된 것이다. 여러분이 그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놀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 작품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사실 예배이기 때문이다.

 

380. 운명의 수레바퀴에서는

지혜가 한가운데를 가리킨다.

젊음은 가장자리를 가리킨다.

 

381. 승진을 받아들이지 마라. 기본 수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위에 더 많은 무더기를 얹어 놓지는 마라. ...

예술가는 어떤 구조물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의 동력을 발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383.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385.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흔히 말하는 작가의 슬럼프를 돌파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은 내가 보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우선 여러분이 말을 걸고 싶은 상대를 하나 찾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루에 두 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시간을 떼어 두라는 것이다.

 

작가의 슬럼프는 너무 머리가 많아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여러분의 머리를 자르라.

페가수스, 곧 시詩는 메두사의 머리가

잘린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에는 무모해야한 한다.

여러분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미쳐야 한다.

 

388.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보내고, 아예 죽여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2년 뒤에

진작 그래야 했다며 후회하리라.

 

“명성이란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존 케이지

명성의 불빛은 빨리 지나가게 마련이어서, 어떤 사람은 3분 동안 그 속에 있을 수 잇고, 또 30분 동안 있을 수도 있고, 또 전혀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명성이란 예술가들의 목표가 아니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에게 찾아온 재능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 재능의 수용은 다음과 같은 뜻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그걸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었다. ”

 

 

 

 

IP *.50.65.2

프로필 이미지
2013.06.12 07:37:58 *.152.83.4

하하하!

먼저 양에 놀라고, 다음 내용에 놀라고 마지막으로 그 열성이 놀라게 하는군요.

이래서 샘이 눈여겨 보셨나 봅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3.06.13 00:03:05 *.131.89.172

미경님, 미안합니다.

제가 미경님의 깊이 제대로 읽고 싶다는 마음, 열정을 이해하지 못해 제가 미안한 말을 많이 했습니다.

신화관련 책들 너무 벅차지요. 읽다가 미칠 것같이 좋아서 진지하게 읽고 싶어지는 책들이기도 합니다.

 

교육지원팀의 여러분들과 6월 리뷰와 칼럼 제출 일정, 7월 일정에 대해서 얘기 나눠볼께요.

제 의견도 잘못된 것이었지만, 이건은 저 혼자만의 의견으로 답변드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논의하고 알려드릴께요.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드려요. 듣지 않고 먼저 판단하고 이야기한 것,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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