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13년 6월 28일 14시 38분 등록

<신화와 인생>

조지프 켐벨 지음 / 다이앤 K. 오스본 엮음 /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펴냄

 

 

 

 

. 저자에 대하여

(저자 조지프 캠벨에 대한 조사는 별도로 하지 않았다. 이 책의 옮긴이의 말 중에, 저자에 대한 부분 중에 몇 가지를 옮겨적는다.)

 

428.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이 조지프 갬벨의 사상을 잘 요약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약된 내용만으로는 캠벨의 사상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전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429. 아울러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캠벨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독자들이라면 그의 대표작들을 몇 권 더 읽어보길 권한다. 특히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에세이 모음집인 『신화와 함께하는 삶』은 캠벨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430. 사실 캠벨의 두 전공은 종교학, 그 중에서도 인도의 전통에 비중을 많이 둔 비교종교학이라고할 수 있다. 신화 연구는 그러한 학문의 추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며, 보다 더 근본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단이 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신화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화의 의미, 다시 말해서 신화를 통해 캠벨이 가리키고자 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캠벨을 ‘신화학자’라고만 규정하는 것은 그 너머의 달을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격이다.

캠벨 사상을 굳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힌두교-불교 전통에 근거한 일종의 범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 가슴을 치는 글귀

헌사

조지프에게

젊은 파르치팔에게

불멸의 인물에게

* 파르치팔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졌다.

 

들어가는 말 : 캠벨 사상의 정수,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

 

7. ‘이 새로운 종류의 물리학에는 장과 물질 모두를 위한 자리는 전무하다.

왜냐하면 유일한 실재는 장이기 때문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7. 자기 자신을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을 구별하는 것- 가령 “어, 아니야, ‘우리’는 달라.”하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전체성에 대립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의 폭을 좁히고 우리 자신이 들어갈 감옥의 벽을 만든다. 자신의 사고와 삶에서 이원성을 만드는 것은, 곧 대립을 만드는 행위이다.

 

8. “그는 천사도 성자도 아니었다. 용기와 동정심이라는 한 쌍의 덕, 거기에 한 가지 더 보태자면 의리라는 덕을 갖추고 모험을 떠나며 행동하는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그는 초자연적인 은총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덕목에서 확고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마침내 성배를 손에 넣게 된다.

 

9. 우리가 스스로의 선택의 폭을 제한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을 제한하게 되고, 그런 제한이 지나치면 우리 역시 ‘세계의 경찰관’, 즉 자기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상자 밖으로 남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11. 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닫기만 하면 신들은 우리를 향해 열 걸음을 다가서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한 걸음, 여정의 그 영웅적인 첫 걸음은 여러분의 울타리 바깥으로 또는 그 가장자리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며, 우리는 가끔 심지어 도움을 받고 있음을 깨닫기도 전에 발걸음을 먼저 내딛어야만 한다. 영웅의 여정은 탄생에 비유되어 왔다. 처음에는 안전한 장소에서 따뜻하고 아늑한 상태로 시작된다. 그러다가 신호가 오고, 그것이 점점 강렬해지면, 이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지나도록 거기 머물기만 하면 썩어버리게 된다. 피와 찢어짐과 고통이 없다면 새로운 생명도 있을 수 없다.

 

14. 나무의 의식이 ‘제재소 너머까지도’ 이어진다고, 즉 나무들의 몸으로 만들어진 집은 물론이고 거기 사는 사람들까지도 알고 있다고 말이다.

 

이 집과

이 의자와

이 페이지도 마찬가지리라.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 다인엔 K 오스본 

 

도입의 단계 :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In the Field

 

19. 여러분의 지금 모습 그대로.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평생 누릴 특권이다.

 

20.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20.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이든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진정한 의미란 살아 있음 바로 그것이다.

 

21. 전사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이다.

 

21. 이 세상의 슬픔에 대해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라.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21. 만약 우리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우리는 단단히 잘못 짚은 셈이다.

 

이 세계는 완벽하다. 그것은 혼란의 도가니이다.

이 세계는 항상 그렇게 혼란의 도가니였다.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켜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계획해 두었던 삶을

기꺼이 내팽개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를 기다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니까.

 

22. 지옥이란 말라붙은 삶이다.

* 황무지

 

23. 현재의 형상에만 매달리면,

우리는 다음의 형상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서

오믈렛을 만들 수 있겠는가

 

23. 파괴가 있은 다음에 창조가 있다.

 

24. 완벽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과정은 우선 뭔가를 깨뜨리는 것과 연관된다.

 

24. 생명이란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켜 살아가는 것이다.

 

24. 우리 자신의 생명은 다른 사람들의 희생에 근거한 것이다.

 

25. 자신이 살만한 가치를 지녔다면 그 가치를 기꺼이 취하라.

 

25. 우리의 삶에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삶을 경험하는 것.

고통과 기쁨 모두를 경험하는 것이다.

 

25. 이 세상은 우리의 짝이며, 우리 역시 이 세상의 짝이다.

 

26.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26.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26.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26. 어떤 것에 대해 [의례적으로] 공정한 태도를 지니는 것은 곧 그것을 모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26. 경외심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27. 여러분이 현재 처한 상황을 희극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여러분은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된다. 결국 유머 감각이 여러분을 구원하리라.

 

28. 영원은 여기와 지금으로 이루어진 차원이다.

신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다.

 

28. 사회가 그 체제를 개인에게 강요할 때 사회는 곧 적이 된다.

그 용에게는 수많은 비늘이 있으니, 그 각각에는 “너는 할지니”라고 적혀 있다.

“너는 할지니”라고 하는 용을 죽여라. 그 용을 죽인 사자는 비로소 아이가 된다.

 

29. 뱀이 그 허물을 벗어 버리듯, 여러분은 지난 날을 내평개쳐라.

 

30. 여러분 만의 희열을 따라.

영웅적인 삶은 ‘각자만의’ 모험을 실행하는 것이다.

 

30. 모험으로의 부름에 따르는 것에는 아무런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다.

 

30.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미리 안다면 그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30. 여러분이 긍정적으로 경험하지 않는 것은 결국 부정적으로 경험될 것이다.

 

30. 여러분은 숲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가장 어두운 곳을 골라서. 그곳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 만약 그곳에 어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길이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길이 아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의 길을 따라간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33. 심연 속으로 내려감으로써 우리는 삶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분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려는 곳, 거기에 여러분의 보물이 묻혀 있다.

여러분이 차마 들어가기 겁내던 바로 그 동굴이, 여러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의 원천임이 밝혀진다.

동굴 속에 숨어있던, 그 무시무시하던 저주받은 것이 바로 그 중심이 된다.

 

33.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않을 것이다.

34. 여정의 목적은 공감이다.

 

35. 여러분은 반드시 희열(bliss)을 느끼고 돌아와 그것을 통합시켜(서 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35. 귀환은 어디에서나 광휘를 목격하는 것이다.

 

36. 스리 마라크리슈나는 말했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37.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37.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의식의 첫 번째 단계: 현세에서의 삶

Living In the World

 

41.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말했다. “어디 시작해 볼까.”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잠재우고, 그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말마따나 이브는 “커틀릿 사이즈의 배우자”였다. 바로 그때부터 문제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게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 삶과 죽음, 선과 악.

이런 것이 대립자의 문제들이다.

이로부터 시작된 문제가 바로 이원성의 발견이었다. 그것은 바로 타락이었다.

 

42. -시간의 장(수많은 대립자들이 있는)에서 달의 의식과 생명을 나타나내는-은 이브를 보고 그녀가 지루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 뱀이 말했다. “이것 봐, 이 나무에는 아주 재미있는 게 있거든, 그 멍청한 노인네는 신경 쓰지 마. 그냥 한 입만 먹으면 진짜 뭔가를 알게 될 거라니까.

 

42. 뱀으로 말하자면 동산에서도 가장 똑똑한 존재였다. 아담과 이브는 시간의 장 속으로 내던져졌다.

 

43. 기독교와 유대교는 귀양살이 종교다. 인간은 동산에서 쫓겨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44. 처음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아트만(자아)만이 있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그가 아닌 다른 존재는 있지를 않았다……. 그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것과 같은 크기가 되었다. 그 자신을 둘로 떨어지게 하였다. 거기에서 남편과 아내가 생겨났다. 성자 야자발키야도 몸은 과일()을 두 쪽으로 나눈 것 같이 절반이라 하였다. 나머지 절반은 대공인 여자로 채워지는 것이니, 그는 여자와 하나가 되었으며, 거기에서 인간이 나게 되었다…… 그녀는 암소가 되었다. 그는 수소가 되어 그녀와 결합하였으니, 거기에서 소가 나왔다. 그녀가 암말이 되자, 그는 수말이 되어 그녀와 결합하였다. 그녀가 암탕나귀가 되자, 그는 수탕나귀가 되어 그녀와 결합하였으니, 그로부터 단단한 발굽이 있는 짐승들이 태어났다. 그녀가 암염소가 되자, 그는 숫염소가 되었다. 그녀가 암양이 되자, 그는 숫양이 되어 그녀와 결합하였다. 그로부터 염소와 양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그는 개미에서부터 모든 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양성 양성의 성교를 통해 만들었다. -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44. 결혼이란 자웅동체를 재건하는 것이다.

 

46.  플라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최초의 인간들은 남성-남성 과 남성-여성 그리고 여성-여성의 세 종류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놀라운 힘을 가졌다. 신들은 그들의 위력을 두려워하였다. 따라서 제우스는 그 인간들을 모두 두 동강 내기로 결심했다. 마치 사과를 절여서 저장하려고 할 때 절반으로 쪼개듯 말이다…… “그래서 본래의 몸이 갈라졌을 때, 그 반쪽은 각각 다른 반쪽을 그리워하고 다시 한 몸이 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서로 목을 끌어안고 꼭 붙어 있으려고 하였으며, 또 서로 떠나서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 이렇듯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먼 옛날부터 그들 속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본래의 몸뚱이 부분을 다시 한데 모아 둘에서 하나가 되게 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즉 서로 분리되어 있는 우리들 각자는 한 인간의 나머지 절반입니다. 마치 넙치처럼 한 쪽 면만 갖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의 다른 반쪽을 상상 찾는 것입니다.

 

47. 나는 마음이 계속 들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마침내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냈고, 그야말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나는 한참 뒤에야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아주 은근한 표시를 했다. 곧 졸업할 그녀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한 것이었다. 바로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이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의미심장한 것이기도 했다.

 

48. 그 투사는 내 깊은 삶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었고, 바로 그곳에서 한 사람의 운명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 투사는 여러분 자신의 삶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즉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몸 속에 있는 에너지의 잠재성이 성취된 것이다.

 

48. (남성의 경우) 투사 형성 요인은 아니마 또는 아니마로 표상되는 무의식이다. 꿈에서건 환상에서건, 공상에서건, 그녀(아니마)가 나타날 때는 인격화된 형태를 취하고, 따라서 그녀가 구현하는 요인들이 여성적 존재의 모든 뛰어난 특성들을 보유하고 있음을 예시한다. 그녀는 의식의 발명품이 아니라, 무의식의 자발적인 산물인 것이다. 또한 그녀의 어머니의 대체 형상도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어머니의 이미지를 그토록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장엄한 성질들은 그런 아니마의 집합적 원형-모든 남자 아이들 속에 새로이 현현되는-으로부터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50. 사랑에 빠지는 것은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성(異性)에게 자기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그 시작이다.

 

51. ‘아가페’는 ‘자비’요 신적이자 영적인 것이고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향한 것’이며, ‘에로스’는 욕정’이요 자연적이자 육적인 것이고, ‘섹스의 충동, 욕구, 기쁨’이라는 것이다. …… ‘아모르’는 오른쪽 길(승화시키는 영, 정신, 인간 공동체)도 아니며, 바로 앞에 있는 , 눈의 길이며 눈이 심장에 보내는 메시지이다.

 

52. 사랑에 눈을 뜨는 순간, 어떤 것이 명백히 외부로부터 “영원히 그의 영혼 속으로 옮겨 갔고, (제임스 조이스의 말이다.)(……) 그의 영혼은 그 부름을 받고 뛰었다. 살며, 과오를 범하며, 타락해 보고, 승리하고, 삶에서 삶을 재창조하는 거다!

 

53. 사랑이 멀리 있으면 삶도 멀리 있다. 사랑은 정확히 삶만큼 강력하다.

 

54. 영혼은 상처의 치유법을 알지만, 그 치유법은 아픔을 준다. 때로는 애초의 상처보다도 그것의 치유가 더 많은 아픔을 주지만, 만약 그걸 견딜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더 강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로서 여러분은 보다 더 넓은 (삶의) 기반을 찾은 셈이기 때문이다. 전념한다는 것은 범위를 좁히는 것이며, 그런 전념이 실패로 끝나면 여러분은 보다 넓은 (삶의) 기반으로 물러나, 그걸 부여잡기 위한 힘을 얻는 것이다.

 

55. 여러분이 견뎌 내는 재난은 그 무엇이건 간에 여러분의 성격, 여러분의 됨됨이, 여러분의 삶을 향상시킨다. 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이야말로 여러분 자신의 본성을 자발적으로 샘솟게 할 기회이다.

 

55. 여러분에게 벌어지는 일 가운데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비록 그 순간에는 부정적인 재난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재난은 여러분을 뒤로 물러나게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자면) 여러분이 힘을 드러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재난이 생기는 것이다.

 

56. 신화학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가운데로 쏟아지는 에너지의 신비를 깨닫게 해준다.

그 안에 여러분의 영원이 놓여 있다.

 

56. 신화학이란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에서 인간 영혼의 경험, 행동, 성취에 관한 은유를 간직한 이미지들이 조합된 것이다.

 

57. 금혼이라는 목표는 관계의 첫 순간부터 암시되고 있다. 노년은 어린이의 세대에 이미 내재된 것이다. 어린이의 노년은 일찌감치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여러분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아직 꼬마임을, 그리고 자신의 옛 경험이란 이제 겨우 시작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인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아래는 연구원 김대수씨가 찾은 ‘피네간의 경야’에 대한 글) ******************

이것은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중요한 테마 가운데 하나다.

⇒ “제임스 조이스(사진)는 말년의 역작 ‘피네간의 경야’에 대해 100년 후에 대중화될 작품이라고 말했어요. 60여 개 언어, 6만여 단어로 이루어진 가히 인류의 문화유산이라 할 이 작품은 신조어 등 언어 유희가 특징인데 이 언어 유희는 현재 한국에서도 유행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 조이스가 17년이라는 세월을 쏟아 부어 1939년 펴낸 ‘피네간의 경야’는 비록 책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그동안 ‘결코 읽을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요, 복잡한 미로’로 통할 만큼 일반인의 접근은 용이치 않았다. …… 그러나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20세기의 걸작이라면 ‘피네간의 경야’는 포스트 모던 시대인 21세기의 걸작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입니다.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지요. 이 작품에 도전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젊어지는 기분이 들었지요.” ……‘율리시스’가 깨어있는 시간의 사건을 서술한 ‘낮의 책’인 반면 ‘피네간의 경야’는 잠자는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밤의 책’이다. 4부로 이루어진 작품은 1938  ك 21일 월요일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주인공인 이어위커라는 인물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인간의 출생, 결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 “조이스가 조어로 만든 제목에 주제가 들어있어요. ‘핀(fin)’은 불어로 ‘끝’이라는 뜻이고 ‘네간(negan)’은 어게인(again)이라는 뜻인데 끝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부활의식을 의미하지요. ‘웨이크(wake)’는 사람이 죽으면 밤샘을 하는 경야(經夜)를 의미하는데 술을 사랑하는 벽돌공 피네간이 사다리에서 추락해 죽자 조문객들이 모여들어 떠들썩한 술판을 벌이지요. 그러다 피네간의 얼굴 위에 위스키가 엎질러졌을 때 그는 기다렸다는 듯 부활해 조문객과 축제를 벌입니다. 조이스의 조국 아일랜드처럼 한국도 장례를 축제로 치르지 않습니까. 조이스는 조문객들이 나누는 인간의 원죄, 부부의 갈등, 형제의 다툼 등을 인간 보편적 문제로 승화시켜 세계 각국 언어로 써내려갔지요.” ……작품에 사용된 60여 개 언어를 일일이 확인하기 위해 사전만 수십 개를 활용했다는 그는 “결국 이 작품은 인류사, 세계사를 한 권의 책으로 응축시킨 전무후무한 소설이자 꿈의 메커니즘을 이용해 시공간을 넘나든 상상력의 보고”라고 말했다.

- 국민일보(2012.11.15) 역자 김종건 명예교수의 인터뷰기사 발췌

******************

 

57. 인생의 전반기에 우리는 사회에 봉사한다. 이것은 종속이다. 인생의 후반기에 우리는 내면으로 돌아선다. 이것은 해방이다.

 

59. 단테는 연옥을 통과하면서 그곳의 강물을 마심으로써 자신의 모든 죄를 기억 밖으로 씻겨 나가게 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해 주는 강물을 마셨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천국에 들어서려는 자는) 심지어 죄에 대한 기척조차 완전히 망각해야 했던 것이다.

* 어려서 사춘기 때에 친구가 이것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다. 잘못한 일에 용서를 구했을 때, ‘어? 그런 일이 있었냐?’라고 대답하는 상대를 만나기도 한다고. 죄에 대한 기억조차 없는 이를 만들어주는 놀라운 용서.

 

59. 힌두교에서 비슈누 신에 대한 종교는 곧 사랑의 종교다. 비슈누 식으로 사랑을 분석해 보면, 사랑에는 다섯 가지의 단계와 함께 그 각각의 단계를 대표하는 모델이 하나씩 있다. 깨달음을 찾고 성취하는 모든 훈련은 이 경로의 에너지로부터 수행될 수 있다.

사랑의 첫 번째 단계는 주인에 대한 하인의 사랑으로,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이것은 두려움의 종교다. 여러분은 신의 존재에 대해 아직 자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것은 저기 있지만, 당신은 여기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사고에 대해서나 사랑에 대해서 스스로를 헌신할 만한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방법이다.

두 번째 단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우리가 즉 서구인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이 두 번째 단계의 사랑의 모델은 친구 대 친구, 가령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이라든지, 또는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어떤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행동으로서 사랑을 경험할 때마다 여러분은 제1단계에서 벗어나 제2단계로 진입하는 셈이다.

세 번째의 사랑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이것은 친구 대 친구의 사랑에 비해 훨씬 친밀하고 강력한 사랑이다. 이것은 성스러운 힘이 여러분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자각되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사랑의 네 번째 단계는 배우자 대 배우자의 관계로, 여기서는 자웅동체의 또는 ‘다른 한쪽’의 발견이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신을 발견하고, 이제는 이 친밀하면서도 가장 오래 지속되는 종류의 관계 속에서도 신이 발견된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의 다섯 번째에 이르는데, 이것은 강박감에 사로잡힌, 억제하기 어려운 금지된 사랑으로, 여기에서는 오로지 사랑뿐이어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된다. ‘르 포(광인), 즉 사랑에 몰두한 까닭에 결국 미쳐 버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62~64)

 

65. 힌두인들이 제공한 이 작은 척도-첫째는 주인 대 하인, 둘째는 친구 대 친구, 셋째는 부모 대 자녀, 넷째는 배우자 대 배우자, 그리고 다섯째는 오로지 이 절대적인 사랑-에서 우리는 순수한 사랑의 경험을 완화시키면 마치 뭔가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그걸 완화시켜야 한다. 여러분에게는 실제로 가능한 관계가 무엇일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67. 고결한 마음을 위해서는 결혼은 우선 반드시 영적이어야 하며, 물리적 완성은 그 다음이어야 한다.

 

69. 내 생각에 결혼이란 상대방을 책임지고 사랑함으로써 상대방과 진정한 일체가 되는 것이다. ... , 여러분 혼자의 운명을 두 사람의 운명으로 전환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헌신이다.

 

70. 배우자와의 관계가 여러분의 삶에서 최우선의 고려사항이 아닌 한, 내 생각에 여러분은 (결혼했어도) 결혼한 상태가 아니다. 반드시 그 관계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72. 여자의 삶(생명)의 ‘샤크티(sakti), 즉 에너지이다. 남자는 그 에너지에 올라타 달리는 방법을 배워햐 하며, 삶을 향해 직접 지시해서는 안 된다…… 남자는 여자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73. 결혼이란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그 관계됨에 희생키시는 것이다.

 

74. 내 생각에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쩌면 성배가 아닐까 싶다. 성배는 하나님과 악마 사이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방식으로 심판하지 않는다. 그것은 심지어 하나님을 넘어선다.

 

75. 바로 ‘그’ 사람을 위한 것이지, 그 외의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 그 무조건적인 니 사랑은 만물에까지 미치며, 그것은 영적인 삶에서도 획기적인 단계다. 하지만 그것을 여러분의 바깥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그것을 찾아야 할 유일한 장소는 여러분의 내부다. 만약 내부에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다면, 바깥에는 무엇이 있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75. 성배로 향하는 열쇠는 공감,

다른 사람의 슬픔을 마치 여러분의 것인 양,

느끼고 또 같이 고통 받는 것이다.

 

공감의 위력을 깨달은 사람은 성배를 발견한 사람이다.

 

75.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나는 무엇에 대해서나 항상 공감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공감이란 말 그대로이다. , ‘같이 고통 받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즉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77. 쇼펜하우어는 (……)그러한 행동이 자신과 그 타인이 사실은 하나라는 진리를 본능적으로 인식한 데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타인과 별개라는 이차적인 자아의식 때문에 행동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토대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더 크고 더 참된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 누군가의 생명을 목숨걸고 치키는 현상에 대하여

 

77. 생존은 삶의 두 번째 법칙이다.

첫 번째 법칙은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79. 신화는 우리의 깨어나는 의시고가 우주의 신비 사이를 연결시켜 준다. 신화는 우주의 지도 또는 그림을 우리에게 선사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자연에 대한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가령 우리가 아버지 하늘과 어머니 대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화는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지지하며 정당화한다.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십계명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신화는 우리가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는 삶의 여러 단계를 통과하고 감당할 수 있게 해준다.

 

80. 여러분은 어머니로부터 여러분의 몸을 얻었다.

여러분은 아버지로부터 사회에서의 역할을 얻는다.

 

82. 돈은 응결된 에너지이므로 돈을 포기하는 것은 삶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지금과 같이) 경제중심적인 사회에서 삶의 가능성이란 사실상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는지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돈이란 내게 그 어떤 의미도 없다. 내가 유럽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 3주 만에 월스리트의 주가가 대폭락했다. 당시 내가 지닌 유일한 재산은 대학의 어느 재즈 밴드에서 연주를 해서 모든 것뿐이었다. 다해서 수천 달러가량 되었는데 - 그 당시에는 제법 큰돈이었다 - 나는 그 돈이 완전히 바닥날 때까지 버텼다. 다시 말해 이후 5년 동안 나는 땡전 한 푼 벌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깨달은 사실은 만약 부양할 가족이 없다면 돈이 전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해 줄 때 전혀 돈을 바라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나 역시 벌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벌려고 했지만, 결코 돈을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나는 이제껏 돈에 관해 완전히 무심한 삶을 살아왔다. 대신 나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함으로써 제법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결국은) 돈이 따라오게 된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삶에 선사하는 것과 삶이 여러분에게 보답하는 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84. 여러분은 자신이 육성해온 이득을 잘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그것들을 놓칠 경우, 여러분은 대략 10년쯤 지나서 부정적인 반작용을 경험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이 하나의 문턱에서 또 다른 문턱으로 움직일 때에는 차라리 점프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더 아래로 내려갈 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점점 더 많은 것이 피어날 것이다. 여러분의 중심으로부터의 잠재력은 다음 모험에 필요한 미래 예측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86. 여러분이 단순히 열등감을 상쇄하기 위해 학위과정을 밝고 있다면, 그런 열등감은 벗어던져라. 왜냐하면 열등감이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88. 나는 조이스와 토마스 만과 슈펭글러를 읽었다. 슈펭그럴는 니체를 언급했다. 나는 니체도 읽었다. 그러다가 니체를 읽으려면 쇼펜하우어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쇼펜하우어도 읽었다. 그러다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칸트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칸트도 읽었다. 일단 거기까지만 가도 되긴 했지만 칸트를 줄발점으로 삼자니 상당히 힘들었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괴테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 가지 흥미진진했던 사실은 조이스 역이 이들과 똑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물론 조이스가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언급한 적은 없어도, 나는 조이스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어 쇼펜하우어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 나는 융을 읽었고, 그의 사고 체계가 근본적으로 슈펭글러의 사고체계와 똑같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이 모든 것을 한데 버무리기 시작했다.

* 조셉 캠벨의 공부 방법

 

89. 자유는 의사결정을 수반하는 것이고, 각각의 결정은 운명적인 결정이다. 여러분의 내부에 있는 시스템이 열망하는 것과 딱 맞아 떨어지는 어떤 것을 외부 세계에서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완벽한 삶을 산 것 같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내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맞춰 나타나 주었다. 내가 그 당시에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5년 동안 직업도 없이 지낼 수 있는 삶이었다.

 

90.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여러분에게 (자연스레)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길이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앞서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도 없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밖에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

 

92. 카멜 도서관에서 나오는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두 권짜리 『서구의 몰락』을 꺼내 들었는데, 이런, 세상에! 거기 적힌 내용은 벼락과도 같았다. 슈펭글러는 말했다. “젊은이며, 만약 그대가 미래의 세계에 있고 싶다면, 자신의 그림붓과 시 쓰는 펜일랑 선반 위에 얹어 두고, 멍키 스패너나 법전을 집어 들어라. 나는 스타인벡에게 말했다. “저기요, 이것 좀 한번 읽어보세요.” 나는 그 책의 제1권을 다 읽은 다음에 그에게 건네 주었다. 그는 잠시 후에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아, 나는 이 책 절대 못 보겠는걸. , 내 예술을 어쩌나.” 그는 거의 2주 동안이나 한방 먹은 사람처럼 넋이 나가 좀처럼 글을 쓰지 못했다.

 

93. 슈펭글러 책을 읽은 것이야말로 내겐 중요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나는 에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있잖아요, 에드.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껏 평생 삶에 대해 ‘아니’라고 말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그래’라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그가 말했다. “그래, 근데 그렇게 하려면 술에 취해야 되니까 일단 파티를 열자고. 그 당시는 대공황의 시대일뿐만 아니라 금주법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가 말했다. “내가 우리 실험실에서 쓰는 알코올을 가져올 테니까, 거기 뭘 좀 섞어서 한번 만들어 보자고.

아이고, 어찌나 뻑적지근한 밤이었는지!

 

99. , 정말로 좋은 시절이었다. 나는 그저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다녔다. 나는 오로지 내적으로 이치에 닿는다고 느껴지는 일만을 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는 도무지 살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때에는 책을 읽는 게 최고인 거다.

 

99.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 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뭘 해야지’라고 미리 생각해해 둔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 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냐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99. 중요한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 그저 ‘그들만의’ 생각일 뿐이니까.

 

103. 성배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높은 영적 성취다.

 

104. 성배 전설에서 말하는 황무지란 뭔가(의례적으로) 마땅히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또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땅이다. ……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 역시 내게는 황무지이다.

 

105. 고귀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발적으로 행동하며, 황무지를, 즉 “너는 할지니”의 세계를 회피하게 될 것이다.

 

105. 여러분이 (의례적으로) 마땅히 어떻게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바와 정반대되는 생동이 바로 공감이다. 성배를 발견하는 사람은 그 장소에 온 살마인 동시에 공감의 살을 사는 사람을 상징한다. 공감의 역동성을 자신의 동기(動機)로 삼는 사람만이 성배를 발견한 것이다. 이는 나와 너의 동일성에 관한 자연스러운 인식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성배의 중심이다.

 

105.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나의 조국이든 나의 교회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 그리고 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두렵지 않아. 그것이 설사 큰 잘못이고, 평생에 걸친 잘못, 어쩌면 영원히 계속될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두렵지 않아, - 스티븐 디덜러스

* 공감

 

106. 캘러해드 경의 이야기에서 기사들은 탐색에 나서기로 동의하지만, 한꺼번에 무리를 지어 행군하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한 나머지, 각자 “숲에서 가장 울창하다고 생각되는 이 지점 저 지점으로 들어갔다. 그들 모두 길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들어갔다.” 길이나 오솔길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다른 누군가의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제각기 숲 속에서도 가장 신비스러운 지점으로 들어갔으며, 각자의 직감을 딸Tejs 것이다. 그들 각자가 불러낸 것은, 이전까지는 땅에서건 바다에서건 결코 없었던 것들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누구의 것과도 다른, 각자의 독특한 잠재력의 성취였던 것이다.

 

108.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할 때 거기에 그물을 씌워 날지 못하게 한다고, 너는 나에게 국적이니, 국어니, 종교니 하고 말하지만, 나는 그 그물을 빠져나가 도망치려고 노력할거야. - [젊은 예술가의 초상]

 

113 여러분의 모험은 여러분 자신의 내부에서 곧바로 솟아나야만 한다. 여러분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전까지는 문이라곤 없었던 곳에서, 그리고 다른 누구도 겪어 보지 못했던 곳에서 여러분을 위한 문이 열릴 것이다. 여러분은 반드시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모험을 향한 부름이며, 다시말 해서 이제부터는 아무런 안전도, 아무런 규칙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115. 그런 뒤에 여러분은 자신이 출발했던 바로 그 장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고 또 만드는 마지막 경험에 도달한다. 이 경험은 네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성스러운 결혼’ 두 번째는 ‘아버지와의 화해’ 세 번째는 ‘신격화’(영웅은 자기가 바로 그것, 즉 붓다의 이미지, 진리를 아는 자임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불사약 빼앗기’로 앞에 열거한 것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깨달음이다.

 

117. 세 번째 가능성은 여러분이 되돌아온 그 영역 중에서 여러분이 주려는 것을 최소한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국면을 일부나마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 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 맞추거나 그것에 비례해, 자신이 발견한 것을 이른바 삶의 은혜로 가공하고 전달할 수단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공감과 인내가 필요하다. 벽에 금 간 곳을 찾아낸 다음, 오로지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여러분의 보석을 주는 것이다.

 

118.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 여러분은 결코 모험을 완결할 수 없다. 숲에 들어가야 할 때가 있고 돌아와야 할 때가 있는 것이며, 여러분은 그게 언제인지 잘 알고 있다. 여러분은 용기가 있는가? 여러분이 숲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려고 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방식이며, 여기에서 맨 마지막은 여러분이 영원히 휴식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삶을 알고, 사랑하고, 베푸는 것이다. 그 휴식의 순간은 그 모든 것 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비록 여러분이 이 세계의 밖에서 활동하고 있더라도, 여러분의 내부에는 완전한 마음의 평정과 휴식의 순간이 있다. 그런 것이 없다면, 여러분은 고통에 빠지게 된다.

 

120. 예전에 들은 일본 속담 중에 인간의 성장에 있어 다섯 단계를 설명한 것이 있다. “열 살에는 짐승, 스무 살에는 미치광이, 서른 살에는 실패자, 마흔 살에는 사기꾼, 쉰 살에는 범죄자.” 나는 여기에 덧붙여, 사람이 예순 살에는 (그때까지는 이 모든 과정을 거칠 것이므로) 친구에게 충고하기 시작하고, 일흔 살에는 (그동안 들은 것들이 모두 오해였음을 깨닫고) 침묵을 지키고 현자로 여겨진다고 말하고 싶다. 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든 살에 나는 나의 자리를 알고 굳게 섰다.

 

121. 여러분은 노래하며 자신의 죽음으로 가는 것이다. 

 

122. 전형적으로 중년은 달성의 기간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간이며, 또한 성취의 기간이 되어야 마땅하다. 니체가 구분한 단계에 따르면, 낙타는 짐을 잔뜩 싣고 나면 제 발로 일어나 사막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사자로 변신한다. 사자의 임무는 “너는 할지니”라는 임무의 용을 죽이는 것이다. 이 자기발견의 사자가 용을 죽이고 나면, 용 속에 묶에 있던 모든 에너지는 이제 여러분의 것이 된다. 중년이 되어서까지도 여전히 착하게 굴면 이득을 얻고, 나쁘게 굴면 벌을 받게 된다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뒤처진 것이다. 그들은 유아적 자아가 중년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적절치 않다.

 

123-124.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출가의 기초적인 단계-인도의 방식에서 ‘숲으로 들어가는’ -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1) 점진적 출가

2) 갑작스런 출가

3) 원숭이의 출가

 

122. 삶의 첫 4분의 1은 학생의 삶이며, 그다음 4분의 1은 순종으로 니체가 말하는 낙타의 기간에 해당된다. ……. 그 다음 4분의 1인 집주인의 삶이다. 책임 속으로 움직이는 darma , 즉 여러분이 사는 사회질서 이 법칙으로 표현된다. …… 전형적으로 중년은 달성의 기간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간이며, 또한 성취의 기간이 되어야 마땅하다. 니체가 구분한 단계에 따르면, 낙타는 짐을 잔뜩 싣고 나면 제 발로 일어나 사막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사자로 변신한다. 사자의 임무는 "너는 할지니"라는 이름의 용을 죽이는 것이다. 이 자기발견의 사자기 용을 죽이고 나면, 용 속에 묶여 있던 모든 에너지는 이제 여러분의 것이 된다.

 

128. 의례의 기능이란 오로지 여러분의 마음을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의 의미에 집중케 하는 것뿐이다.

 

130. “브라흐만은 우주에 충만하고, 만물에 편재하고, 삶의 의식 에너지이니, 우리는 모두 그현현일 뿐이다. 브라흐만은 희생이다. 브라흐만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다. 브라흐만은 희생의 소비자다. 브라흐만은 희생을 불로 옮기는 국자다. 브라흐만은 희생의 과정이다. 만물이 브라흐만임을 깨닫는 자는 자기안에 브라흐만이 있음을 깨닫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130. 우리는 물질적인 부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음식 - 가령 우리가 먹는 식물과 동물 - 은 세속의 음식이지만, 우리는 또한 우리의 영적인 부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영적 음식을 먹어야만 한다. 그리고 성찬, 즉 그리스도의 삶을 먹는 행위는 그런 영적 영양분의 흡수를 상징하는 것이며, 또한 명상의 관념을 구체화한 것이다. 하지만 뭔가를 먹기 위해서는 그 뭔가를 죽여야만 하기 때문에, 또다시 우리는 이러한 희생의 개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또한 기꺼이 먹힐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도 음식 재료이기 때문이다.

 

137-138. 하지만 문지기가 있는 출구를 빠져나가기 전에 여러분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 제의는 정말이지 효과를 발휘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결과, 참가자들은 각자의 마지막 보물을 포기한 순간 ‘모크샤(moksa), 즉 ’해방‘을 실제로 경험했다.

...... 내게 있어 무엇보다도 흥미진진한 것은 바로 그 실제 경험이었다. 그것은 행복한 참여의 감정이었다. 일찍이 나 자신을 구속하던 것이 사라져 버림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포기한 보물을 향한 우리의 감정을 실제로 바꿔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집착 없이도 그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더욱 증대시킨 것이었다. 정말이지 놀라웠다.

 

140.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중에서

 

141. (......) 천장의 전구가 모두 빛의 수레이듯, 아래에 있는 우리 모두는 저마다 의식의 수레이다. 하지만 전구에게는 빛이 질이 가장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는 의식의 질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을 덧없는 육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자기 육체를 단순한 의식의 수레로 여기고, 의식을 우리 모두를 통해 현현하는 존재로 여길 수도 있다. - [신화와 함께하는 삶]

 

141.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죽는 것은 반드시 태어난다.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 (......) 모든 사람의 육체 안에 사는 절대자아는 결코 죽지 않는다. (......) 그것은 무기로도 베지 못한다. 그것은 불로도 태우지 못한다. 그것은 물로도 적시지 못한다. 그것은 바람으로도 말리지 못한다.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자아는 영원히 한결같다. (......) 모든 육체 안에 사는 절대자아는 죽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떤 피조물을 위해 슬퍼하지 말라. - [바가바드 기타]

 

142. “만물은 나아가고,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이는 오직 뿌리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가 인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기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 아니다.” – 노자

 

142.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성에서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 오비디우스

 

144. 죽음과 낳음은 동시에 다가온다.

 

144. 오직 탄생 - 낡은 것의 탄생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 - 만이 죽음을 (진정으로) 정복할 수 있다.

 

145. 오로지 최고만이 희생제물로 바쳐진다.

희생되는 것은 곧 집으로 가는 방법이다.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다시 찾게 되리라.

 

149. 내가 보기에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생각은 나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여기, 즉 여러분이 살아 있는 이 유일무이한 순간을 음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49. 모든 순간들은 그야말로 유일하며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삶은 특유의 통렬함을 지니는 것이며, 여러분은 지금 경험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15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151. 불교의 중심 사상은 집착 없는 공감이다.

 

의식의 두 번째 단계 : 깨달음을 향한 

Coming Into Awarencess

 

162. 수피교도들은 제6 차크라와 연관된 멋진 비유를 이야기한다. 이는 할라지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밤 나방 한 마리가 등잔을 보았다. 유리 안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방은 밤새 유리에 몸을 부딪치면서 그 불길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였다. 아침이 되자 나방 친구들에게 돌아와서 그 불길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는지 말해주었다. 친구들은 말했다. “뭐 하러 그런 짓을 하려고 해?  요가 수행자가 (현상태를) 뚫고 나아가려 할 때의 상황이 바로 이러하다. 그리하여 나방은 다음날도 등잔을 찾아가서 어찌어찌 한 끝에 결국 유리를 뚫고 들어갔다. 나방은 순식간에 자기 목표를 성취했다. 불길이 된 것이다. ‘타트 트밤 아시’, “네가 바로 그것”이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유리관을 사이에 둔 채로 여기에 주체가, 또 여기에 객체가 있다. 다시 말해 영혼과 신이 있는 것이다. 그 유리판을 없애 버리고 나면, 여기에는 주체도 객체도 더 이상 없다. 객체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체를 소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163.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놓인 최후의 장벽은 여러분이 신이되는 것을 막는 장벽이다. 우리판은 (이 두가지 단계를) 갈라 놓는 요소를 말한다. 유리를 제거하는 것은 곧 여러분이 신을 아는 것을 막는 뮤지의 차단막을 소멸시킴을 의미한다. 이 단계에서 여러분은 어떤 상징을, 어떤 경험을 가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의 마지막 속삭임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을 바라본다. 그것이야말로 최후의 장벽이다.

 

159-164. 1차크라인 물라다라,(Muladhara) 즉 ‘뿌리 받침’은 척추이 맨 밑에 위치 한다. 이 단계에서의 세계관은 ‘분명한 사실들’에 의해 통제되는 활력없는 유물론으로 이루어진다. 이 단계에서는 삶에 대한 어떤 열망도 없고, 확장해 나가려는 뚜렷한 충동도 없다. 단지 기면 상태의 욕망이 존재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이 고착 상태는 결국 깨어져야 하고, 그래야 정신은, 그냥 그대로 있으려는 단순하고 둔한 욕망을 버리게 될 것이다. (......)

2차크라는 스바디슈타나(Svadhishthana), 즉 ‘그녀의 특별한 집’은 성기 단계에 있다. 이 단계에서 쿤달리니가 활발해지면, 삶의 전체 목표는 섹스에 있게 된다. 성적인 목적을 향한 방법으로서든, 좌절된 성적 욕망에 대한 보상적 승화로서든 간에, 모든 사고와 행동이 성적인 동기를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무조건 성적 테마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달리 말해서 여기서 성적인 에너지는 프로이트적 리비도의 성격을 갖는다. 신화의 신들과 종교적 의례들은 성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경험된다.

3 차크라인 마니쿠라, 즉 ‘빛나는 보석의 도시’는 배꼽의 단계에 있다. 여기서는 에너지가 폭력으로 바뀌며, 그 목적은 세계를 소모하고 지배하여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 그리고 자신의 소유로 바꾸는 것이다. 여기에 적절한 서양의 심리학은 ‘힘을 향한 의지’를 주장한 하들어의 학설일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섹스도 에로틱한 경험이 아니라 쟁취와 정복과 자기 확신, 그리고 때로는 복수의 의식이 되어 버린다.

4 차크라인 아나하타(Anahata)는 ‘부딛히지 않음’이고, 심장의 높이에 있다. 이것은 종교적 삶의 시작이며,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깨달음이며, 그 이름은 곧 어떤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해서 만들어낸 거시 아닌 소리를 지칭한다. 우리가 듣는 모든 소리는 어떤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해서 생긴다. 그렇다면 어떤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소리란 어떤 소리일까? 그것은 에너지의 소리이며, 그 소리의 현시가 바로 우주이다. 따라서 이는 사무롭다 앞서는 소리이다.

심장 차크라는 영적 차원으로 가는 입구이다. 모든 것이 신비의 은유다. 모든 것이 신비의 은유인 그 지점에 일단 여러분이 도달하면, 이 하위의 힘들은 정화된다.

5 차크라는 비슈다(Vishuddha), 즉 ‘정화됨’이며 후두 높이에 위치한다. 이것은 에너지가 유래하는 동물적 시스템을 물리치려는 영적 노력이 차크라이다. (......) 5 차크라를 티베트에서는 엎드린 형체들 위에 서 있는 신들이라는 이미지로 흔히 나타내는데, 이는 전적으로 육체적인 것을 무기와 진인함으로 굴복시킨 것을 뜻한다. 즉 여러분은 스스로를 잔인할 정도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6 차크라는 아냐(Ajna), 즉 ‘명령’의 연꽃으로 미간에 위치해 있으며 이른바 천국의 차크라, 즉 육신을 갖춘 형체의 세계에서는 가장 높은 차크라이다.

7 차크라는 사하스라라(Sahasrara), 즉 머리의 정수리에 위치한 ‘천 개의 꽃잎이 달린’ 연곷이다. 이 차크라에 도달한 사람은 결코 신을 의식하지 않는다. 이곳엔 오로지 분화되지 않은 의식, 즉 침묵이 있을 뿐이다. 7 차크라에 도달하면 여러분은 무감각 상태가 된다. 이른바 긴장성 의식불명이라고 일컫는 것이며, 여러분은 단순히 하나의 사물로 환원된다.

* <신화의 이미지> 재인용

 

164. 쿤달리니가 제6 차크라에 도달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바라본다. 이 하나님이 바로 ‘형체를 지닌 브라흐만’이다.

 

164. 7 차크라에 도달하면 여러분은 신을 지나서 초월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형체를 지니지 않는 브라흐만’이다.

 

163. 나는 신을 바라본다. 그것이야말로 최후의 장벽이다.

그것은 어찌나 달콤한지, 우리는 그걸 선뜻 포기하려 들지 않지만, 궁극적인 포기는 바로 여러분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게속해서 여러분의 영혼에 매달린다면 여러분은 신과 함께 있는 자가 될 수 없다. 여러분은 심지어 여러분의 배우자와 함께 있는 자기 될 수도 없다. 이것을 반드시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옴(OM)'을 듣는다. 나는 신이 도처에 있음을 안다. 성스러운 에너지는 여전히 내 주위에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167. 내 멋진 친구이며, 내 마지막 구루였던 하인리히 침머는 종종 이런 말을 했다. “가장 좋은 것은 말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말의 범위 너머에 놓여 있는 것에 관해서는 차마 무엇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좋은 것은 오해되기 십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말할 수가 없는 것들에 관한 서술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오해되는 까닭은 여러분이 사용해야만 하는 기호의 어휘들이 마치 역사적 사건들을 지칭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좋은 것은 대화, 정치 참여, 경제, 그런 것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다루는 것으로서 바로 처음의 세 가지 차크라를 말한다.

 

168-169. 이 새끼 호랑이는 연못을 바라봄으로써 난생처음으로 자기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다. 큰 호랑이는 자기 얼굴을 그 옆에 갖다 대고는 말했다. “이것 봐. 네 얼굴도 내 얼굴이랑 비슷하지. 넌 염소가 아니야. 나하고 똑같은 호랑이라고. 그러니 나하고 똑같이 되어야지.

이것이 구루가 하는 일이다. 내 모습을 마음에 새기고, 나하고 똑같이 되거라. 이는 혼자 하는 수행과는 정반대의 방법인 것이다.

 

169. 그 피투성이를 고기를 한 입 베어 물면서 큰 호랑이가 말했다. “마음껏 먹어 봐.” 그러자 새끼 호랑이는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저는 채식주의자인데요.” “헛소리 하지 말고!” 큰 호랑이가 이렇게 말하며, 고기 토막을 하나 집어서 새끼 호랑이의 목구멍 속에 쿡 찔러 넣었다. 새끼 호랑이는 숨이 막혀 캑캑거렸다. 문헌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진정한 가르침 앞에서 모든 사람이 그러하게 마련이듯이.

진정한 가르침과 마주하고 캑캑거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끼 호랑이는 그것을 자기 핏속에, 자기 몸속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이 그에게 올바른 먹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올바른 본성을 건드려 주었기 때문이다.

 

169. 채식주의는 생명을 향한 가장 큰 모독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오로지 도망칠 수조차 없는 것들만 먹는다.

 

170. 여러분은 법률이라는 겉옷을 입고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면서도, 동시에 신비주의적인 방법이라는 속옷을 입고 있다. 또한 예수는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는 각자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혹시 밖에 나갈 때에는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나가야한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엉터리 또는 가짜가 되는 것이다. 

 

171. 시간의 장은 곧 슬픔의 장이다. “모든 삶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정말 그렇다. 여러분이 슬픔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다면, 여러분은 그 슬픔을 다른 어디론가 옮겨 가지만 하면 된다. 삶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런 삶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여러분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영원을 자각한다. 여러분은 해방되고, 도 그런 한편으로 다시 속박된다.

 

175. 힌두교의 격언 가운데 ‘나데보 데밤 아르카에트“,   ”신은 오로지 신에 의해서만 예배될 것이니” 여러분의 신은 여러분 자신의 의식 수분의 현시다.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이나 지옥에 있는 모든 것이 여러분 속에 들어 있다.

 

176.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 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

 

176. 의식 그 자체는 이러한 어둠의 단계 아래에, 꿈의 이식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178. (무의식의 장에서) 사람은 더 이상 별개의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그의 정신은 넓어지고, 인류의 정신은 융합된다.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통적인 인류의 무의식으로 융합되는 것이다.

 

188. 융은 영혼의 구조에 관한 분석에서, 우리를 외부 세계와 연결해주는 심리학적 기능 네 가지를 구분한 바 있다. 바로 감각, 사고, 감정, 직관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감각이란 뭔가가 존재함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능이다. 사고란 그게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능이다. 감정이란 그 가치를 우리에게 평가해 알려 주는 기능이다. 직관이란 우리가 그 대상이나 그 상황에 내재된 가능성을 예측하게 해 주는 기능이다. 따라서 감정은 가치에 대한 내부의 안내자이다. 하지만 그 판단은 보통 외부적인, 경험적인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191. 행동하는 인간은 완벽을 표상할 수 없다. 여러분은 항상 이원성-그 자체로는 완벽인- 에서도 유독 한 측면만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행동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다른 방식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스꽝스럽다. 이들은 스스로에 대해서 나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192. 가령 여러분은 공동선을 받아들이고, 거기 집중하는 것을 여러분의 방향으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다른 편이 아닌 어느 한편에 대한 결정이건 마찬가지다. 따라서 여러분은 차라리 불완전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감수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 관념이 인도에서는 여러분이 수많은 환생 뒤에 마침내 완전을 성취하면, 더 이상 환생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멈추는 것이다. 벗어나는 것이다.

 

194. “이것이 바로 로빈슨 제퍼스가 ‘성스럽게 넘쳐나는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이로구나.” 그것은 내 삶에 있어 아무런 실용적 가치를 지니지 못했지만, 그 순간은 그 자체로 뭔가 대단한 것이었다.

 

- 차를 마시는 행위는 친구와 함께 방에 앉아 있는 것처럼 세속적이고 흔한 일상자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행위를 모든 각도에서 철저하게 주목할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해 보라. 친구와 함께 방에 앉아서, 가장 적합한 찻잔을 선택하고, 그것을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내려놓으며, 재미있게 생긴 다기를 사용하고, 가장 친한 친구 몇 명과 함께 차를 마시며, 그들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각각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동시에 함께 묶여 빛을 발하도록 완벽하게 배치된 약간의 꽃, 그 분위기에 맞게 조화를 이룬 하나의 그림, 어느 방향에서나 열고 닫고 들여다 볼 수 있는 재미있게 생긴 작은 상자. 차를 준비하고  나누어 주고 마실 때, 참석한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각각의 단계가 기능적인 방식으로 우아하게 행해진다면, 일상사가 시로 경지로 승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소네트를 쓸 때에는 매우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평범한 도구인 말을 사용한다. 차의 경우도 시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오랜 경험의 결과, 어떤 규칙과 방식이 발전하였고, 이러한 것들에 숙달함으로써 극도로 고양된 표현력을 얻는 것이다. 예술이 작업 방식에서 자연을 모방하듯이 차도 마찬가지다.

* [동양신화 : 신의 가면 제2]

* SW2R 모임을 할 때, 유성 외곽의 미술관으로 로마유물 전시를 보고는 차를 마신 적이 있다. 같이 같던 김성일과 테게네와 그 방에 앉았던 사람들 모두가 특별한 경험을 하였다.

 

199. 그것은 내겐 깜짝 놀랄 만한 경험이었고, 아마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암스트롱의 달 착륙 바로 직전에 있었던 아폴로 호의 우주비행 당시, 휴스턴의 지방관제센터에서 이렇게 물었다. “누가 조종하고 있나?” 그러자 우주선에서는 이런 대답이 날아왔다. “뉴턴!

* 와우!

* 1968 12 21일 발사된 아폴로 8호로, 사상 최초로 달 주위를 선회하고 돌아오는 임무를 수행했다.

 

200. 사실상 우리는 이 지구의 산물인 것읻. 우리는 말 그대로 지구의 기관이다. 우리의 눈은 바로 이 지구의 눈이고 우리의 지식은 이 지구의 지식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바 이 지구의 지식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바 이 지구는 우주의 산물이다. (....)

* 영화 ‘은하수를 건너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컴퓨터 설계자. 지구라는 거대한 컴퓨터를 설계한 우주인들.

 

201. 심리학의 한계는 신학의 한계와 똑같다. 그것들은 추월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화와 관계가 있으며, 이 두 가지의 한계는 똑같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단순히 심리적 기능 또는 요인으로 환언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까지만 가고 더 이상은 가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가조 있는 한, 여러분은 머물러 있는 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을 상기하라. “버리고 취하기의 궁극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취하는 것이다.

 

202. ‘하나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단 하나의 단어이며, 이는 사실상 부적절한 단어다. 이 단어는 항상 인격화를 내포하고 있으며, 누군가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한 오로지 남성 인격화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제한된 어휘가 우리를 옭아매고, 우리를 묶어 두고 있는 것이다.

 

205. 두려움과 욕망에 의해 위협을 당할 때에는 자아를 놓아 버려라.

 

206. 시간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단 한 번의 삶을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서 에덴동산의 비밀을 찾아내야 한다. – 로렌 아이슬리

 

209. 만약 여러분이 자신과 자신의 전통에 집착하여 여러분 혼자만 ‘그것’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인류의 나머지로부터 스스로를 제거한 셈이 된다.

* 배타적 종교의 모습과 유대교와 비슷하다.

 

209. 즉 광신자는 자기 마음을 청결히 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오히려 세상을 청결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210. 공산주의자의 형제단 말고도 이 세상에는 유대인 공동체, 기독교 공동체, 이슬람 공동체 등이 잇다. 유대교의 경우는 전도의 열망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다른 세 가지 - 즉 이슬람교, 기독교, 공산주의 - 는 전도를 지상과제로 삼는 전통이 아닐 수 없다. 그 각각은 완벽한 세계 정복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쇼가 아닐 수 없다. 이 세계를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다.

 

211. 삶의 목표는 여러분의 심장의 박동을 우주의 박동에 맞추는 것이며, 여러분의 본성을 자연에 맞추는 것이다.

 

211. , ‘이슬람’이란 바로 ‘순종’,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과 숭배이다. 이러한 신조는 전사들에게 크나큰 용기와 힘을 제공한다. 즉 그들이 죽임을 당하건 안 당하건 간에 그들은 운명에 대한 순종을 지니고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어쨌거나 전사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211. 전사(戰士)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이다.

 

211. 역사적 행위의 측면에서 보자면,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똑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 둘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위해 이 세상을 새로 만들려고 한다. 나로선 무척이나 거부감이 들지만, 사실상 그로 인해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기에, 여러분도 거기에 대해 “예”라고 말해야만 한다. 여러분이 자신의 삶에 사소한 세부사항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리는 셈이 된다. 여러분은 반드시 모든 것에 대해서, 심지어 그 소멸에 대해서도 ‘예’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작은 주제가이다.

* 전진석의 스토리... <천일야화>에 중동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소제목 이름이 ‘어린 전사’였던 것 같다. 종교로 갈라놓은, 국가의 이득에 따라 갈라놓은 사람사이에 일어나는 일, 명령을 받는 사람과 지시를 내리는 사람, 그 사이에 갈등하는 같은 이름을 가진 폭탄 테러리스트, 같은 이름의 어린 전사.

그 이야기를 읽는 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 이야기를 읽고서, 교회에서 중동지역에서 우리나라 선교사 납치사건에 대해서 발언하는 것을 듣고는 그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느 한쪽의 시각으로 비판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듣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212. 사랑은 온 우주에 알려주네.

바로 밑에 있는 지옥의 심연을.

 

214. 사탄은 뭔가를 범할 수 있는 자아의 축도다.

 

214. - 페르시아의 시인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 바 있다. (그 이후에) 사탄은 과연 무슨 힘으로 견딜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들이 발견한 답변은 이러한 것이었다. “일찍이 ‘내 앞에서 사라져라!'하고 말했던 하나님이 목소리에 대한 추억으로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한때는 환희였으나 지금은 사랑의 고통이 된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절묘한 영적 고통의 이미지인가!

- <신화와 함께하는 삶> (182)

 

215. - “두려워 마라,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편히 쉬고 있기 때문이다. 왔다가 가는 것의형상 -너희들의 육신 역시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냐 - 은 내 춤추는 사지의 스핌에 불과하다. 나를 완전히 안다면, 너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중에서

 

215. 지옥이란 여러분의 삶의 경험의 구체화이며, 여러분이 집착하는 곳, 바로 황무지다. 지옥에 있으면 여러분은 어찌나 스스로에게 메여있는지, 은혜가 들어올 수 없다.

 

217. 워싱턴 D.C.의 외부무 연수원에서 동아시아나 서남아시로 발령받은 외무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던 도중에, 나는 한 가지 흥미로운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한번은 내가 담당한 조에 아주 똑똑한 흑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이제 막 오스트리라 빈에서 근무를 마치고 인도로 발령을 받은 참이었다. 그가 속한 조에서는 매번 나를 워터게이트 호텔에 있는 아주 훌륭한 레스토랑으로 초대해 점심을 대접했는데, 하루는 그들이 바로 이사람에게 나를 거기까지 차로 모시고 오라고 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주 훌륭한 스포츠가를 타고 있었고, 매우 남자다운 사람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맨 먼저 내게 흑인으로 산다는 것에 관해, 그리고 자기에게 불리한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지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오늘은 이 친구한테 본때를 보여 줘야겠군. 이런 불평을 듣는 것도 이제는 이골이 났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는 다른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당신은 이미 출세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잘 나가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에게 불리한 어떤 것을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출세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매력이 없고, 그로 인해 자기가 불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톨릭 국가에서 개신교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개신교 국가에서 가톨릭 신자로 살아가죠. 당신이 오로지 흑인이라는 사실만 갖고서 당신의 삶에 있어서 부정적인 것들을 계속 들먹이며 비난한다면, 당신은 인간이 됨으로써 얻은 다른 특권들을 깡그리 부정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다만 흑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직 인간이 되지 셈이죠.” 바로 그때 우리의 일행이 식당으로 들어왔고, 그는 나머지 시간 내내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 아니 , 그 친구가 당신 책을 모조리 사가지고 와서는, 지금 밑에 있는데 거기다 당신 서명을 받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물어봤죠. 왜 갑자기 그러느냐고 말이에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그러던걸요. ‘캠벨 교수님이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셨거든.’”

그것은 내게도 큰 교훈이었으며, 그렇게 남의 동정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즉효약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다시 말해 그는 이제껏 자기만의 지옥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한계라고 스스로 설정한 것 너머를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 나는 이 사건을 모두 옮겨 적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많이 겪는 것 같다. 어느 한 가지 면에 빠져서 전체의 것을 보지 못하고, 불행한 사람을 말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하다. 그러나

 

219.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이다. 즉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이다.

 

220. 우리가 살의 한 장소에 있을 때, 그리고 다른 장소에 있고 싶을 때, 우리에게 극복해야할 장애물, 즉 지나가야 할 문턱이 있다.

 

222. ‘악마’라는 말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222.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노력해야 할 일은 바로 의식을 확장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지식과 사랑이 보다 더 크고 더 큰 지평을 얻게 하는 것이다. 쿤달리니가 나타날 때 벌어지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즉 그 몸이 점점 더 광휘와 의식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223. 여러분을 가로막는 상징을 발견하고 나면, 이번에는 그 상징이 여러분에게 의미하는 바의 중요성에 부합되는 사고와 경험의 양태를 찾아내도록 하라. 그 상징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를 알아내지 못하는 한, 여러분은 그 상징을 제거할 수 없다.

* 내가 ‘검은 꽃’을 그리기를 두려워했듯이. 검은 토끼를 그리고 나서, 그것에 대해 글을 쓰고 나서 마음이 편해졌듯이.

 

225. 대죄란 본인이 충분히 숙고한 다음에 저지르는 죄이며, 완전한 본인의 의지로 저지르는 죄이다. .... 이는 은혜의 선물을 고의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며, 악마로 상징되는 바 그 자체이다. 초자연적인 은혜, 즉 하나님의 음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225. 상징이 구체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것으로 해석될 때,

그것들은 계시를 낳게 된다.

 

226-227. “저 칼을 사고 싶은데요.” 그러자 주인은 순순히 물건을 건네주었다.

“여기 있다 , .

“장부에 달아 주세요.” 그러자 주인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 알았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것 좀 보세요. 주머니칼인데 길에서 주웠어요.”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정말 길에서 주운 거니?

“예, 맞아요. 길에서 주운 거에요.

하지만 그달 말에 주머니칼 값을 내라는 청구서가 날아오자,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 이리좀 와 봐라. 이번 토요일에 고해하러 가면, 그 주머니칼을 갖고 가서 이저도오 신부님께 그 죄를 고백하고, 성물실로 가져가 그것을 신부님께 드리거라.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처벌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것이었으니까. 주기도문 다섯 번과 성모송 다섯 번을 외는 것과 그 주머니칼을 포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천지차이였다. 그래서 나는 고해를 하러 가서, 신부님에게 내 소행을 말씀드리려고 했다. 나는 그 당시에 복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왜 “내 탓이오, 내 탓이오”하는 것 말이다. 고해를 한 뒤 나는 성물실로 가서 그 주머니칼을 신부님께 드렸다. 그러자 신부님은 오히러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이런, . 그 죄가 이렇게 심각한 줄은 나도 미처 몰랐구나.

그 순간, 나는 그 주머니칼을 손에 넣기까지는 전혀 몰랐던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 즉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도 전혀 모른 채 그걸 외상으로 샀을 때의 기분이야말로 최고였다는 걸 말이다.

* 나는 이 부분까지 읽고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228. 『성배의 탐색』이라는 훌륭한 아서왕 로망스에서는 모든 기사들이 성배를 찾아 나선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랜슬롯은 성배를 볼 수가 없는 것으로 나온다. 왜일까? 그것은 그가 귀네비어와 저지른 간통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가 그 사랑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껏 자신(랜슬롯)이 교회로부터 받은 깨달음을 훨씬 능가하는 또 다른 깨달음을 그 귀네비어와의 관계를 통해 경험한 랜슬롯이었으니, 하긴 어떻게 감히 그 경험을 회개할수 있었겠는가?...... 즉 그는 간통을 뉘우칠 수도 없었고, 간통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성배를 목격할 만한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228. 성배라는 것은 자연의 풍부함,

즉 기고한 영적 깨달음,

즉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소진되지 않는 그릇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230. 여러분이 자신의 삶에 권위자가 되었을 때,

여러분은 비로소 성숙하게 된다.

 

231. 인간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 혼자만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신들은 숭배자들을 얻기 위해 매우 열심인 것이다. 신들을 숭배할 인간이 없다면 신들도 있을 수 없다. 신들의 숫자는 무수히 많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종류가 무수히 많듯이. 가령 멀리건 부인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교황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똑같은 하나님이 아니다.

* 이런 도발적인 것도 말할 수 있다니, 캠벨 아저씨 멋지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는 나도 깊이 생각해 봐야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이전에 알던 신과 이 책에서 캠벨이 말하고 있는 신의 개념이 충돌하고 있으니까.

 

231. 신을 선택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신들은 무수히 많다.

여러분의 신을 선택하라.

 

여러분이 숭배하는 신이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신이다.

 

232. 하나님은 인간을 필요로 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고 할 때, 여기사 말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미지, 하나님이 개념, 하나님의 이름, 그리고 특정 민족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틀림없다.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거기에 없었을 것이므로.

 

232. 이 세계의 모든 신들은 힘이 아니라 은유다.

 

233. 하나님은 환영이 아니라, 그 자신의 너머에 있는 것을, 즉 하나됨(속죄)의 신비에 대한 자각을 지시하는 상징이다.

 

234. 여러분이 초인격인 (즉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곳에 도달하면, 여러분은 ‘정의’와 ‘불의’에 관해 이야기할 수가 없다.

 

235-236. 그는 자신의 고난을 자신이 이른바 (신들을 향한) 보답으로서의 예배에서 자신이 행한 일 때문인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 이처럼 만약 여러분이 예배를 이른바 뭔가를 향한 보답이라는 견지에서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완전히 잘못된 길에 들어선 셈이다. 「욥기」는 사실 그런 관념을 박살내고 있다. 하지만 여러분이 「욥기」에 제시도니 하나님의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려고ㅗ 한다면, 여러분은 이를 약간 더 세련되게 만들 필요가 있다.

..... 여러분이 만약 세상에 속에 거하는 하나님을 보고 싶다면, 바로 인간 속에서 찾으면 된다. 이것이 융이 내놓은 욥에게 보내는 회답의 핵심이다. 즉 하나님을 향해, 우주를 향해, 또는 이와 같은 종류의 어떤 것을 향해 비난을 돌리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관념은 이른바 인간 속에 실제로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특성에 관한,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이미지일 뿐이니까.

 

237. 융이 『욥에의 회답』에서 하는 말도 바로 이것이다. 즉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상상의 존재의 이미지에 투사된 것은 사실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는 사실상 그때그때 인간이 처한 조건이 반영된 거울 속 이미지라는 것이다.

 

237.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는 믿지 않는다. 여러분이 믿지 않는다면 나는 믿는다.”….. 내 믿음이 무엇이냐 하면, 어느 누구도 궁극의 환희를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립자의 쌍을 초월한 것이므로,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경험했다면, 그곳에는 이미 어느 누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38. 이 세상에는 초월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있음을 알라. 그러고 나서는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마라. 단지 모든 곳에 있는 광취를 목도하라.

 

242. 따라서 십자가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신들이 우리에게로 내려온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진정한 교통(십자가를 놓음, 즉 가로지름)인 것이다.

 

240. 아버지의 나라(천국)는 여기 있다.

우리는 세계를 바라보고

그 광휘를 목도한다.

 

부활절의 계시가 바로 거기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241.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몸-지상의 상징-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자신과 함께 하나인-에게 갔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우리 내부에 있는 영원한 생명과 동일시될 것이다. 그 상징은 또한 하나님이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인간의 삶의 시험과 슬픔에 그가 참여함으로써 그가 바로 여기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즉 타락이나 실수로서가 아니라 환희와 기쁨으로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따라서 십자가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신들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신들이 우리에게로 내려온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진정한 교통(십자가를 놓음, 즉 가로지름)인 것이다.

 

243.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

그가 아버지에게 간 것, 성령,

이 모두는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어떤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할 일이었다. 

 

영웅의 죽음과 부활은 오래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기를 위한 모델이다.

 

243. - 동물계도 아니고, 식물계도 아니며, 천상의 기적도 아니고, 이제는 오로지 인간 자신만이 중대한 신비다. …… 하지만 인간은 ‘나’로서가 아니라 ‘너’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종족이나 인종이나 대륙이나 사회 계급이나 세기의 그 어떤 이상이나 일시적 제도조차도, 소진됨이 없고 다방면에 걸친 놀라운 신성한 존재, 즉 우리 모두의 속에 있는 삶의 척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네가 바로 그것이다> 중에서

 

248. 성 아우쿠스티누스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나아간 것을 이른바 신랑이 그 신부에게 나아간 것에 비유했다. 여기에는 긍정이 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의 집자가를 기꺼이 대신 짊어지고 가는 모습을 그린 티치아노의 훌륭한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부활절 및 유월절의 신비에 대해 우리 모두가 반드시 지녀야 하는 자유롭고 인간적이며 자발적인 참여를 묘파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앞에 놓인 도전이다. 자기보존은 그저 삶의 제2법칙에 불과하다. 살의 제1법칙은 여러분과 타인이 하나라는 것이다.

 

257. 이제 만약 교회가 여러분의 밧줄이라면, 그리고 만약 그것이 여러분을 축복받은 희열의 장소로 데려간다면, 그런 장소를 여러분이 직접 만들어야 하는 문제는 면제되는 셈이다. 하지만 다른 길이 있으니 거기에 매달린 자기 자신을 다른 것들부터 격리시킬 수 있는, 여러분만의 작은 예배당, 즉 여러분 자신의 성스러운 공간을 직접 만드는 것이다.

* 손에 쥘 수 있고, 자그마해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것이면 좋겠다. 그것을 주고 두손을 모으면 그곳이 예배소가 되도록.

‘이곳이 어떤 곳인가?’라는 질문에 ‘영적인 곳이요’라고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58. 여러분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공간이라든지, 피난처를 지니려 한다면, 그곳은 우선 황무지가 아니어야 하며, 암브로시아 – 외부로부터 여러분 안에 불어넣는 기쁨이 아니라, 여러분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 – 의 샘이 있는 어떤 활동 공간, 즉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모든 사람은 – 본인이 알건 모르건 간에 – 그런 공간을 필요로 한다.

* 사부님의 서재, 산행하시던 북한산?

* 그럼 내게는 어디? 한밤중 리뷰를 쓰고 있는 이 서늘한 베란다? ‘드림페인터’의 미래 모습이 적힌 종이가 붙은 냉장고 앞? 아직 마련하지 못했구나. 어디서든지 작은 준비만으로도 자신안의 성소가 되도록 만들면 좋겠다.

 

259.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259. 내 생각에 성스러운 공간을 고안하는 좋은 방법은 그것을 놀이터로 삼는 것이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마치 놀이 같다면, 여러분은 거기 열중하게 된다.

 

259. 내 경우에는 읽은 때는 재미있지만 어떤 결론을 내려 주지는 않는 책이 장난감 노릇을 한다.

 

259. 융이 자신의 삶에 깃든 신화를 밝혀내리라고 결심했을 때,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즐겨 하던 놀이는 무엇이었나?” 바로 돌멩이를 가지고 마을과 거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놀이의 일환으로 땅을 조금 구입해서 거기다가 집을 짓기로 했다. 상당히 힘든 일이었으며, 그가 이미 집을 한 채 갖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불필요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성스러운 공간을 만들어 내는 적절한 방법이었다. 순전한 놀이였기 때문이다.

 

260.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 이 강의(성소에 관련된 강의)는 모든 곳을 옮겨적고 있구나. , 미치겠다.

하하하. 나는 현재 성소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있나보다.

 

260. 어른이 되고 나면, 여러분은 자기 삶을 움직이는 힘을 반드시 재발견해야 한다.

 

262.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때, 그때부터 일이 시작된다.

 

262. 여러분의 삶이 놀이가 아니라면, 또는 여러분이 놀이를 하긴 하지만 아무런 재미가 없다면, 그때는 그만 두도록 하라! 성스러운 공간의 정신은 바로 시바의 춤이다. 모든 의무를 벗어던진 것이다. 이처럼 의무를 벗어던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상관이 없다. 휴식이 곧 놀이인 것이다.

 

263. 그 장소에서 여러분은 현상적 경험의 장과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 자신의 내적 삶의 장과 관계를 맺는다.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여러분은 결코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 성배 성을 방문하려면 여러분은 반드시 성스러운 공간을 가져야만 한다.

 

265. 성스러운 공간에서는 무슨 일을 하건 간에 그 주위는 은유가 된다.

 

271.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고, 모든 것이 성스러운 광휘라면, 어떻게 우리는 무지나 잔인함이나 또 다른 것들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당신과 나의 경우, 우리는 ‘예’라고 합니다.

 

271. 신화의 이상을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신비주의자의 길이다.

 

271. “어떤 생각과 생각 사이,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 말해 여러분은 항상 생각을 하고 있으며, 또한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과 생각 사이에 여러분은 과연 어디 있는 것일까?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너머, 즉 여러분이 자신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을 일별이라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여러분의 모든 에너지가 비롯되는 원천의 장이다.

 

272.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파도와 함께 흔들리는 법을 배우라.

조이스의 말마따나, 세상의 쓰레기 속에서도 ‘광휘를 발하는’ 채로 남아 있으라.

* ~ 이런. 난 이제 욕을 그만해야겠다. 만일 한다하면 그때는 웃을 수 있는, 유머러스한 것을 입에 담아야겠다. Yes 면 충분하다.

어느 날, 이야기를 읽다가 질문을 받았다. 아마도 책에서 보았을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가 내게 이야기를 해주다가 질문을 했을 것이다.

“너는 이 세상이 마음에 안드니? 네가 만일 신이라면, 너는 어떻게 세상을 만들래? 이 세상을 새로 만든다면 무엇을 뺄거니?

답은 내가 이보다 더 세상을 멋지게 만들 수는 없을 것 같다이다. 세상은 이대로 참 괜찮다. 가끔은 어떤 일로 울고,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벌벌 떨고 울었지만 그래도 그런게 없으면 안될 것 같다. 내가 만일 신이라해도 이렇게 조화롭게 만들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 너의 인생과 같은 삶을 다시 한번 더 살라고 한다면 어떤 것을 빼고 싶냐고? 대단히 유혹적인 질문이다. 상상하는 갓만으로도 좋다. 좀더 좋은 환경에서 편히 지내고 자라왔으면 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그 모습은 지금의 내가 아닐 거다. 만일 어린시절로 다시 돌아가 겪어야 한다면, 지금같은 기억을 모두 잊은 채로 다시 그 일들을 겪어도 좋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모두 포함해서. 예전보다 더 잘해낼 자신 따위는 없다. 그런 게 삶이란 것을 그냥 안다. 

 

273. 붓다의 이미지는 역사적 붓다의 초상화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붓다의 존재이며, 만물 또한 붓다의 존재다. 따라서 붓다의 이미지는 구체적으로 이해되어야하는 조각된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명상의 도구이며, 꿰뚫어 봐야할 무엇이다. 그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불성에 관한 명상을 지원하는 도구이지 ‘저 바깥’에 있는 어떤 실제의 붓다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274. 하늘나라 전체가 우리 안에 있지만, 그걸 찾기 위해서는 바깥에 있는 것과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274. 여러분은 반드시 여러분의 신을 죽여야 한다.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모든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278.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거기 들어가서 네 할 일을 하라.

그결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 

 

278. 슬픔을 본질이라고 인식하라.

시간이 있는 곳에는 슬픔도 있게 마련이니.

 

우리는 세상의 슬픔을 없앨 수는 없지만,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선택을 할 수는 있다.

 

283. 달라이 라마가 한 말은 대략 이러했다. “이제 여러분은 불교도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계속해서 명상하십시오. 즉각적인 깨달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정신은 천천히 깨달음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방법에만 집착하지는 마십시오. 명상을 하는 중에 여러분의 의식이 확장되고 변화되면, 그때 가서 여러분은 모든 길들이 타당한 길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84. 합리적인 정신은 대립자들을 강조한다.

동정과 사랑은 대립자의 쌍들을 넘어선다.

 

288. 진정한 근원을 찾기 위해서는 대립자의 쌍들의 너머까지 반드시 나아가야 한다.

 

288. 스리 라마리슈나는 칼리 여신에게 귀의했다. 칼리라는 단어는 ‘검다’는 뜻과 ‘시간’이라는 뜻 모두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문물이 산출되고 또 돌아가는 수수께끼의 검은 심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칼리다.

 

288.. 어떠한 관념도, 어떠한 개념도, 어떠한 이름도 최후의 장애물이다. 어떠한 종료가 됐든 그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는 사람도 최후의 장애물이다…… “버리고 취하기의 궁극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취하는 것이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시적인 것은 단지 상징에 불과하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영원한 것은 단지 은유에 불과하다.” …… ‘모든 것’에는 하나님, 천국, 지옥, 그 전체가 포함된다. 따라서 여러분이 천국에 가기 위해 살아가는 한, 여러분은 그런 정점을 찾지 못할 것이다.

 

290.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말했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294. “신을 예배하려는 자는 우선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할지니….” 탄트라의 격언은 예배에 앞서 여러분 스스로가 신들에 의해 요약되고 상징되는 의식과 사랑의 층위를 자기 속에서 발견해야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96. 하늘나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깨달음 속에 있다. 우리 이웃 속에 , 적들 속에, 자신 속에 편재하는 신들의 현존에 관한 깨달음 속에.

 

297. 따라서 불교의 가장 큰 가르침, 즉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바의 의미는 “여러분의 합리 체계를 떠나, 항상 만물 사이로 움직여 나가는 놀라운 경험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리라.

* 이 책에서는 계속 어떤 신비한 경험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경험이 바로 천국을 경험하는 순간이며, 신과 하나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늘 신과 하나되길 추구하지만, 우리의 명상은 짧아서 가끔만 그 순간을 느낄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인건 그걸 한번이라도 경험한다는 것. 그렇다면 그 느낌을 간직한 채, 자신의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니까.

 

298. 나는 고민 끝에 집사람을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는 문제를 앨런에게 털어놓았다.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기다리다 보면 화가 치밀고, 그러다가 결국 집사람이 나타나면 거기다 대고 짜증을 부리게 되거든.

그러자 앨런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자네의 문제는 집사람이 거기 도착하기를 바란다는 것, 그리하여 자네가 속해 있지 않은 어떤 상황을 열망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명심하게. 줄곧 현실과는 다른 일을 생각함으로써 자네는 거기서 진을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었던 다른 경험들을 망치고 있는 셈임을 말이야.

그 이후로 진을 기다리는 것은 일종의 영적 훈련이 되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진이 벌써 도착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해. 주위를 둘러보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봐야지.” 그러고 나면 내가 있는 장소는 어찌나 흥미진진한지, 나로선 집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지루할 새가 없을 지경이다. 가끔은 진이 나를 좀 더 기다리게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니 말이다. 나로선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앨런은 내가 현실이 지금과는 달랐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차단해 보도록 조언해 준 것이었다.

* 나도 이와 같은 상황을 많이 겪었다. 나는 기다리다가 짜증내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이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내 친구는 기다리게 하는 쪽이었다. 이 글을 읽는데 그 친구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이것과는 다른 일이지만 일방적으로 내가 무얼 한다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난 적이 있다. 다른 한 친구는 둘이 만날 약속을 할 때, 매번 자신의 집 근처로 약속장소를 잡는다. 그래서 만나자고 통화를 할 때, 이번에는 우리집 가까이 하자고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앨런이 충고해준 방식으로 이런 문제를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바보같다.

 

299. 두려움과 욕망의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여러분은 불멸로부터 스스로를 배제시키는 것이다.

 

300. 모든 종교 훈련의 목표는 심리학적 변화다. …… 여기서의 핵심문제는 여러분의 마음에서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여러분은 각자의 자녀를 돌보고, 취객을 진찰하고, 책을 쓰는 일을 하는 와중에도 신들을 알고, 사랑하고, 거기 봉사하는 것에 근거하여 각자의 명상과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 만물이 곧 브라흐만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한, 여러분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명상이 될 수 있다. 그 일의 과정이며, 행동이며, 여러분이 지금 바라보는 대상, 그리고 지금 여러분을 바라보는 대상, 그 모두가 브라흐만이라는 것이다.

* 맨 앞에 명료한 명제를 제시하고, 다름 문장들에서 그것들이 구체화된 것들을 나열하여 설명하고, 그리고 나서 그 의미를 재해석해준다.

나는 첫 문장으로 이 말의 뜻을 내 삶에 가져와서 쓰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지만, 같은 문단을 이루고 있는 뒤쪽의 설명들 덕분에 그 말의 의미가 일상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실행되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이런 방식은 이런 구조를 가진 이유가.... 강의를 기록하여 정리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 귀환은 어디에서나 광휘를 목격하는 것이다.

300. 여기서의 핵심문제는 여러분의 마음에서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여러분이 돌아온 마을은 바로 여러분이 떠난 마을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 그 여정은 아직 완수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스스로가 자신의 삶이라고 간주한 장소로 돌아오는 것이고, 똑같은 직업으로 돌아오는 것이지만, 반드시 똑같은 위치로 돌아와야 할 필요는 없다.

* 9기 수업에서 김대수씨가 웨이스트랜드를 떠나 생명의 서를 찾아 나섰다가 결국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험 이야기를 해주면서 젊은이들에게 생명의 서를 찾아나설 것을 이야기한다. 영웅은 보물을 획득하여 반드시 귀환해야하는 것이다. 영웅이 귀환하면 그때부터는 돌아온 마을은 이전의 마을과 같지만, 이전과는 다른 마을이 된다.

* <나무를 심는 사람>이 만든 땅과 같다.

 

302. 선과 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이 어느 편을 드는가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다.

 

302. 여러분의 판단이 오는 곳에서부터, 여러분의 한계도 온다.

 

304. 세상을 변화시킬 필요 없이 단지 관점을 바꿈으로써 슬픔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삶이란 항상 슬픔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 이 말을 하도 여러 번 보니 이제는 그렇게 느껴진다. 박경리씨가 ‘삶은 슬픈거다’라는 관점에서 소설을 썼다는 게 생각난다. 소설 <토지> 20대 초반의 내 삶을 바꿀수는 없었지만, 위로를 해주고 그 상황을 약간은 떨어져서 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305. 여러분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 낮은 체계에 헌신하도록 한다.

 

310. “스승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청년은 자기가 겪은 일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따졌다. “제가 곧 하나님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랬지. 네가 곧 하나님이니라.

“그리고 만물 역시 하나님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만물이 역시 하나님이리라.

“아무렴. 코끼리 역시 하나님이지. 하지만 너는 왜 그 코끼리의 머리 위에서 비키라고 소리치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 게냐?

 

310. 지혜와 어리석음은 사실상 똑같다.

두 가지 모두 세상의 견해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 하나는 몰라서 무관심하고, 하나는 자기가 그걸 안다고 자신의 방식으로만 해석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에 무관심하지.

 

310. - 전설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은 이 고통 받는 세계를 내려다보고는 자비심으로 가득 차서 머리에서는 수없이 많은 머리가 솟아났고 (......) 몸에서는 도움의 손길이 달린 천 개의 팔이 솟아났는데, 이것은 마치 휘황찬란한 광배와 같았고, 그 각각의 손바닥에는 무한한 시야를 가진 눈들이 나타났다. (.......)

관세음보살의 몸에 있는 모든 숨구멍은 수천 명의 부처들과 온갖 성자들과 세계 전체를 담고 내보낸다. 그의 손가락으로부터 암브로시아의 강물이 흐르는데, 그 강은 지옥의 열기를 식혀주고 배고픈 귀신들을 먹인다. (.......) 그는 브라흐만들에게는 브라흐만으로 나타나고, 상인들에게는 상인으로 나타나며, 곤충들에게는 곤충으로 나타나는 등, 각자에게 그것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화의 이미지> 중에서

* 아멘. 가장 밀접한 것으로 나타나시는구나. 다행이다. 난 이야기가 좋다.

 

314-315. - (......) 그리고 힌두교의 여신 칼리는 (......) 자기 배우자인 남신 시바의 엎드린 몸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신은 죽음의 칼을 휘드르고 있는데, 이 칼은 곧 영적 훈련을 의미한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인간의 머리는 그 귀의자에게 “여신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두려워 말라’와 ‘은혜를 내림'은 이 여신이 자녀를 보호하는 것을, 보편적 고통의 대립자의 쌍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영원에 중심을 잡고 선 자의 시각에서 보자면 ’선‘, ’악‘의 환영은 오로지 마음의 반영을 불과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치 여신 자신조차 비록 남신을 짓밝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 모두가 남신의 행복한 꿈에 불과하듯 말이다.

 

317. 그녀의 자궁은 공간의 장이며, 그녀의 심장은 시간의 맥박이고, 그녀의 생은 우주적 꿈을 반영하는 우리들 각자의 삶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피안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의 매혹하는 힘이다. 성서로 치자면 그녀는 이브이다. 인류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들, 즉 바위, 나무, 짐승, 새와 물고기, 태양과 달과 별들의 어머니로 확장된 이브라고 할 수 있다.

 

319. 남성 = 사회의 질서,

여성 = 자연의 질서

 

남성의 일은 생명과 관계하는 것이다.

여성의 일은 생명 자체가 되는 것이다.

 

320. “남성은 역사를 만든다. 여성은 역사 자체다. 여성은 그것 자체이고, 남성은 여성의 역사를 만들고 역사 그 자체인 곳의 장을 꾸며 줄 뿐이다. - 슈펭글러

 

320. 남성의 기능은 행동하는 것이다.

여성의 기능은 존재하는 것이다.

여성은 ‘그것’이다. 여성은 어머니 지구이다.

 

321. 여신은 모든 여성 속에서 작용하며, 이는 남신이 남성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과 전혀 다르다. 나는 그(하인리히 침머)가 이렇게 말했을 때에 그의 눈에서 빛나던 광채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거기 계신 게 보입니다.

 

323. “아가씨와 같은 식탁에서 먹고, 아가씨와 같이 놀고, 아가씨와 같은 침대에서 자고 싶어요.” 개구리를 하찮게 여긴 아가씨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 그렇게 할게.

 

324. 이 이야기의 결말은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소녀가 개구리를 집어서 벽에다 힘껏 집어 던지는 것이다. 개구리는 퍽하고 산산조각 나고, 거기서 마치 낙타처럼 긴 속눈썹을 지닌 잘생긴 왕자가 걸어 나온다. 그 왕자 역시 그동안 문제를 겪고 있었던 것 같다. ..... 성년으로 들어서지 못한 소년, 소녀 ..... 이제는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를 돕고 있으며, 이것은 정말이지 아름답고 도 아름다운 경험이다.

 

328. 내가 알기로는 여성들이 이처럼 비인습적인 삶의 방식을 지닐 수 있는 유일한 분야는 – 물론 학계를 제외한다면 – 예술계 뿐이다…… 그들의 성취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반면, 예술가의 성취는 오히려 과정을 중요시하므로,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르다.

 

329. 문학을 통틀어 여성의 모험을 다른 작품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여성은 이미 ‘그것’이며, 여성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자각하느냐 뿐이기 때문이다.

 

329. 남성은 반드시 행해야만 한다.

남성은 반드시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자신의 ‘행동’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 길은 곧 고통의 길이다.

여성은 그저 있기만 하며 s된다.

 

330. 남성의 경우에는 이러한(결혼을 하면서 자신의 이력을 지속할 수 없는) 파국이 일어나지 않는다. 여성이 남성을 부를 때에 남성은 그저 나아가서 결혼하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여성은 저 밖에, 그러니까 자신이 자연적으로 있는 곳에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여성의 여정에 있어서 한 가지 특징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여성에게 주어진 본성 속에는 여성이 다루어야 할 훨씬 더 무거운 짐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소녀에게 생리가 일어나면서부터 시작되며, 그때부터 소녀는 여성이 된다.

 

332. 여성들은 각각 반드시 선택을 내려야만 하며, 만약 자기 남편이 원하는 대로 굴복하겠다고 선택을 내릴 경우, 그녀의 모험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다른 무엇이든지 대체물은 될 수 있다. 하지만 목표는 여러분 자신의 모험에 나서는 것이어야지, 대체물을 지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334. 유능한 여성들이 전혀 낯선 문화에 속한 남성들과 결혼한 경우, 남성들이 전혀 낯선 문화에 속한 여성들과 결혼한 경우에 비해 훨씬 편안하게 느끼기 마련이다. 여성은 두 가지 사이에 고리 역할을 한다.

 

334. 남성이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 여러분은 분리를 겪는다.

여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둘이 아닌, 포용하는 특성이 존재한다.

* , 내 남동생 아버지와 나의 세계에서 무척 힘들었겠구나.

 

334. 어머니는 그런 식의 어떤 성취를 토대로 하여 자녀를 평가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표상할 뿐이다.

 

338. 예술가인 여성은 육체적 삶뿐만 아니라 영적 삶 - 그 즉시 드러내 보이는 힘이 되는 - 또한 제공하는 분야에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도 바로 그것이다.

 

342. 그 모두가 사랑일 때, 세상 모두는 반드시 사랑이어야만 한다. 무엇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의식의 세 번째 단계 :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Living In the Sacred

 

345. 마야는 매혹이자, 매력, 특히 여성적 매력으로 경험된다. ...

”마야의 모든 형태 중에서 여성의 형태가 가장 훌륭하다.- 루리 드 라 발레 푸생

 

346-347. 우주 기원의 본질이자 여성성과 개인성의 본질인 마야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힘을 지녔다고 한다.

1. 차단하는 힘

2. 투사하는 힘

3. 드러내 보이는 힘.

 

347. 미술의 기능이란 마야의 드러내 보이는 힘에 봉사하는 일이다.

 

348. 공포와 욕망은 또한 예술가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348. - 예술의 첫 번째 기능은, 경험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동산 문의 수문장들 – 욕망과 두려움 – 을 지나쳐 그 안에 위치한 깨달은 삶의 나무까지 데려가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 나오는 시인 블레이크의 말을 빌리자면, “지각의 문이 정화되면, 만물이 인간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무한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문들의 정화, 즉 수문장들인 화염검 든 케루빔의 일소 등은 예술의 첫 번째 효과이고, 그와 동시에 두 번째 효과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단 한 올의 터럭 속에서 ‘수천 마리의 황금사자’를 인식하는 기쁨이다.

 

348. “어떤 물건이든 세심하게 관찰해 보면 신들의 불멸의 영겁에로 접근하는 문이 될 수 있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서  벅 멀리간이 하는 대사이다. 이 대목에서 레오폴드 블룸은 자신의 가정 문제를 생각하면서, 바스 맥주의 병에 붙은 상표 속의 붉은 삼각형을 열열히 바라보고 있다. 누군가가 블룸을 방해하기 시작하자, 멀리간은 상대방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한다. (......) 드루이드 신도의 침묵을 지키란 말이야. 그의 영혼은 멀리 가 있어. 하나의 환상으로부터 깨어난다는 것은 아마 태어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거야. 어떠한 물건이든 세심하게 관찰해 보면 신들의 불멸의 영겁으로 접근하는.....” 이런 식이다.

 

349. - 그 용도와 이름을 잊어버리고 계속해서 주시하면서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라. “이게 무엇일까? (......) 그 용도에서 떨어져 나오고, 그 명명에서 벗어나면, 곧 이어 경이의 차원이 열린다. 왜냐하면 그 물건의 존재에 관한 신비는 곧 우주의 존재에 관한 신비와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여러분 자신의 신비와도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 <야생 기러기의 비행> 중에서

 

349. 미술의 드러냄[계시]은 윤리도 아니고, 판단도 아니며, 심지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인간성도 아니다. 오히려 그 드러냄은 만물을 통과해 빛나는 지고의 빛을 발하는 ‘형상’에 대한 놀라운 인시이라고 할 수 있다.

 

351. 삶의 목표는 환희다. 예술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352. 조이스는 이른바 ‘적절한 예술’과 ‘부적절한 예술’을 구분한다. ‘적절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실제로 예술에 속하는 바를 의미한다. 반면 부적절한 예술이라는 것은 예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봉사하는 예술을 말한다. 적절한 예술은 정적인 것이며, 따라서 심미적으로 도취되는 반면, 부적절한 예술은 활동적이며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여러분을 욕망으로, 아니면 두려움과 혐오로 이끈다는 의미다.

 

353. 조이스는 적절한 예술의 도움을 받아 아퀴나스에게도 나아간다. 그는 라틴어를 사용해서 심미적 대상이 세 가지 순간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인테그리타스(integritas) (=전일성), ‘콘소난티아(consonantia) (=조화), 그리고 ‘클라리타스(claritas)(=) 이다.

 

354. 고 벅민스터 풀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바라보고 음미하는 법에 관한 정의를 남겨 주었다. (.......)

“삶의 크나큰 복잡성을 이해하고, 우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맨 처음 배워야 할 말은 시너지(상승작용)이다. ‘시너지는 전체 체계의 행동이며, 그 각 부분의 행동에 의해서는 예측되지 않는다. 여러분은 반드시 (커대한 구와 작은 구 처럼) 두 개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지구와 달을 역어주는 것과 같은 시너지가 발생한다. 이 시너지는 또한 우리의 우주를 하나로 엮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 ‘시너지와 에너지의 관계란 곧 통합과 분화의 관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358. 음악의 구조와 건축의 구조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모든 건축은 공간 속의 구조다. 이는 또한 공관과 연관된 기능을 지니게 된다. 가령 뉴욕의 센추리 클럽은 저명한 건축가인 샌퍼드 화이트가 19세기 말에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은 역사적 기념물이다. 로비는 매우 조화롭다. 매우 균형잡힌 공간이기 때문에, 거기 들어가면 누구나 편안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358. “예술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다. - 장 폴 세잔

358. “예술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다.” 물론 여기에는 두 가지 자연이 모두 관계된다. 하나는 자연, 즉 저 바깥에 있는 세계고, 또 하나는 우리안에 있는 자연(본성)의 세계다. 다시 말해서 예술가의 의도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를 도모하는 것이라면  그 조화는 여러분의 내부에 있는 뭔가와 공명하고, 여러분을 심미적으로 심취시키고, 여러분은 그렇게 큰 “아하!“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기능이란 유형적이고 가시적인 세계의 소진 가능한 것을 열어 젖힘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광휘- 여러분 안에 있는 것과 똑같은 광휘-가 환히 비치게 하는 것이다.

 

361. 예술가의 기예를 적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령 칠면조 요리를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저 심미적인 것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예술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예술’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것은 ‘성스럽게 넘쳐나는 아름다움’과 심미적 도취와 관계가 있다.

 

364.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는 아주 훌륭한 대사가 등장하는 데, 이 모든 이단적인 주장을 듣고 있던 스티븐의 친구가 문득 너 혹시 프로테스탄트가 되려는 것이냐고 물어본다. “나는 신앙을 상실했다고 했어.” 스티븐이 대답한다. “하지만 내가 자존심마저 상실했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논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부조리를 버린 후, 비논리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부조리를 포용한다면, 그게 어떻게 해방이 될 수 있겠니? 

 

365. 나는 그 성당(샤르트르 성장)에 다섯 번 가 봤는데, 한번은 안내책자를 이용해 각각의 창문에 그려진 내용들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모두 다 기독교이 전통에 있는 여러 일화를 언급하고 있었으며, 나는 거기서 기독교의 교리 전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미창은 오히려 광휘를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것은 장엄한 예술이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심미적으로 심취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성당 그 자체 역시 예술작품이다.

 

369. 나는 설교대에 섰는데, 이런, 솔직히 말해서 설교대는 무기나 다를 바 없었다. 거기에는 힘을 위한 예술이 있었다. 바로 그것의 배치 자체가 그 예술이었다. 그곳과 다른 모든 사람이 관계하는 방식이 그러했다. 여러분이 설교대 위에 서 보지 않는 한, 여러분은 자신에게 어떤 힘이 있는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이 거기 서 있으면,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다치게 할 수 없다. 여러분은 뱃머리에 선 것이며, 저 아래에 있는 바다의 표면을 가르고 나가려는 참이다. 처음에는 제단에 대해 약간의 경외심을 품었지만, 두 번째에는 이제 그걸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잘 알게 되었다.

* 무거운 중책을 맡아둔다고 해서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고 있는 리더이다.

 

370.  예술가란 예술 작품을 완성한 사람이지, 단순히 완성하려는 의도를 품었다고 해서 예술가라고 할 수는 없다. 올해나 내년에 그 작품을 판매할 수 있을지 없을지 여부는 예술 작품으로서 그 고유의 가치나 정의에 하등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반 고흐는 평생 단 한 점의 작품도 팔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의 작품 두어 개만 가지고도 박물관을 하나쯤 만들 수 있을 정도다. 크나큰 심리학적 문제를 겪고 있었지만, 그는 예술가였다.

 

371. 여러분이 어떤 결정을 내리건 간에, 거기에는 학습과 분석의 기간이 있으며, 여러분이 행동하고 있지 않을 때, 여러분의 몸은 움직이고 있지 않은 셈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기술을 가르쳐 본 사람이라면 이 단계를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학생은 그 기술을 분석하고 시도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체득하지는 못한 상태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사람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372. 예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오랜 속담이 있다. “우선 모든 규칙을 배운 다음, 그 규칙을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

 

372. 책 한 권 쓰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우선 자신의 영감과 직관에서 출발한 다음, 곧이어 어려운 과정을, 즉 여러분이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역을 맞닥뜨리게 되고, 바로 거기서 멈춰 버리게 된다. 바로 그때가 여러분이 규칙을 끌어내야 할 때이다.

 

373. 여러분이 아는 것에 근거하여 행동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단순히 자신의 지식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여러분은 그것을 움직임으로 변환시켜야 한다. 예술에서는 이것이 전부다.

 

374. 창의적 행동은 뭔가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창의적인 움직임을 산출하는 것이다.

 

375. 예술을 통한 치료요업의 실시는 그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 놓는, 그를 조화로운 인간으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조화로운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 “예술은 자영과 평행한 조화다.” 그리고 만약 그 사람이 아직 자연과 평행하지 못한다면, 예술은 그 사람을 그 지점까지 데려가기 위한 치료요법에 불과하다. ‘치료요법으로서의 예술’은 이른바 ‘회복’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그것을 실시하는 사람 본인은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예술이 아니다.

 

376. 춤이란 생명 그 자체의 지고한 상징이다.

 

376. 인간은 노래하고 춤추면서 보다 높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표현한다. 그는 걷는 법과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춤추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려 한다. 그가 마법에 걸려 있음이 그의 몸짓에 나타난다. (......) 그는 스스로를 신으로 여기며, 마치 꿈속에서 신들이 소요하는 것을 본 것처럼 그 자신도 황홀해지고 고양되어 돌아다닌다.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예술 작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근원적 일자의 최고의 환희를 위하여 전체 자연의 예술적 힘은 여기 도취의 소나기 아래서 스스로 나타난다. (......) 자연이 꾸밈없는 진실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한다. “나처럼 되어라!” 현상의 끊임없는 변화에서 영원히 창조적이고, 영원히 실존을 강요하며, 이 현상의 변화에 영원히 만족하는 원초적 어머니인 나를! - 니체

 

377. 예술은 우리를 스스로의 얽힘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한 쌍의 날개다.

 

378.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춤추는 것이다.

 

378. 성스러운 춤은 신들을 위한 것이지 관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무대 위에서 포크댄스를 공연하려고 할 때에 생기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즉 포크댄스란 그 춤을 추는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므로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전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379. 신이 곧 무용수이고, 여러분은 신을 예배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 안에서 신을 찾기 위해 반드시 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깨달은 것은 바로 관객을 위한 춤과 신을 위한 춤이 지닌 함의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여러분이 혼자이고, 자기 장소에 있을 경우, 여러분은 신을 위해 춤추고 스스로를 신과 동일시한다. ....... 신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바로 그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신을 뭐라고 부르고, 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건 간에, 여러분이 예배하는 신은 생성이 가능한 신이다.

 

379. 신들의 힘은 자연 속에 있는, 그리고 여러분의 본성 속에 있는 힘이 의인화된 것이다. 여러분이 그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놀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 작품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사실 예배이기 때문이다.

 

226. 여러분이 직장에서 능력을 발휘하면, 여러분의 고용주는 여러분을 더 높은 지위로 승진시키려 할 것이다. 여러분은 이전보다도 더 많은 것을 직업에 바쳐야 하며, 여러분은 더 많은 봉급을 받겠지만, 새로운 책임으로 인해 여러분의 자유시간은 줄어들 것이다. 내 조언을 이렇다. 승진을 받아들이지 마라. 기본 수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위에 더 많은 무더기를 얹어 놓지는 마라. 왜냐하면 자신의 직업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작업에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올라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서 결국 대학 행정부에 소속되고, 그러면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소비하고 만다. 예술가는 어떤 구조물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의 동력을 발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381. 예술가는 어떤 구조물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의 동력을 발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382.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몇 시간씩 더 자신에게 허락하되, 단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을 할 시간과 에너지는 반드시 남겨 두어야 한다.

이는 마치 훈련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러분은 훈련에 돌입할 때 시간을 설정해 놓으며, 그것은 거룩한 시간이다. 여러분의 예술에 대해서 똑같이 해야 한다.  ,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큼을 여러분의 예술에 바치고, 그것을 시종일관 지켜야 한다. 그러면 뭔가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간에 그 시간 동안은 거기 앉아 있어야 한다.

 

229. 창조적 모험은 항상 무모하다.

383.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385.  여러분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비판을 미루어 두어야 한다. 글쓰기에 있어서도 문장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런 일을 해야 한다. 비판을 미루어 두는 것은 이른바 ‘너는 할지니’라는 용을 죽이는 것이다. 그놈을 다 죽여 버려라.

 

385. 작가의 슬럼프는 너무 머리가 많아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여러분의 머리를 자르마.

페가수스, 곧 시는 메두사의 머리가 잘린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에는 무모해야 한다. 여러분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미쳐야 한다.

 

389. (고갱)의 여정은 영웅의 여정이었지만, 그로 인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는 그야말로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여러분은 그가 한 인간으로서 완전히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는 예술가로서는 승리를 거두었다.

 

390. 하지만 명성이란 예술가들의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상업 예술가들만 그런 말을 한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든, 나는 그것을 줄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에게 찾아온 재능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 재능의 수용은 다음과 같은 뜻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그걸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었다.

 

390.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못할 것이다.

 

391.-392. (제임스 조이스) 12년이 걸려서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완성했다. 그는 본래 1904년에 에세이를 의도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정작 이것이 소설로 발전해서 출판된 것은 1916년의 일이었다. …… 그는 그 와중에 ‘더블린 사람들’을 탈고하고 ‘율리시스’를 쓰는 중이었으니, 나중 책을 쓰는 데에만 7년이 걸렸다. …… 그는 16년 동안이나 ‘피네간의 경야’를 썼고, 그게 나왔을 때의 서평은 정말이지 난리가 아니었다. “도대체 이 작자가 뭘 하는 거야? 이 사람 미쳤나? 미친 작품을 그냥 우리 앞에 내놓은 것 아닌가?” ‘피네간의 경야’의 초판본은 출간 직후 2개월이 지나도록 안 팔리고 남아 있기만 했다. 나는 권당 56센트씩을 주고 양장본 4권을 샀다. 책이 안 팔리고 남아 있자 출판사는 인쇄비라도 뽑기 위해 안달하고 있었다. 물론 저자는 한 푼도 못 받았고 말이다……. 그는 내 삶에 있어서 모범은 될 수 없겠지만, 예술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범은 될 수 있으리라. 토마스 만은 조이스야말로 20세기 최고의 소설가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조이스가 내 놓은 것이 무엇인지를 보라.

 

392. 조이스는 이 모든 진통을 고스란히 감내했으니, 이는 완전함을 향한 그의 의도 때문이었다. 완전함이야말로 예술에 함의된 성취이고, 그는 그것을 달성했다. 반면 불완전함은 곧 삶이다. 삶의 모든 형태는 불완전함이고, 예술의 기능은 광휘가 불완전함을 관통해 나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392. 예술가는 작품의 형태를 초월로 열어젖힌다.

 

392. 내가 이해하는 바, 예술은 마땅히 마야의 드러내 보이는 힘이 되어야 한다. 즉 음악과 무용과 시각 예술과 문학에서 ‘성스럽게도 넘쳐나는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즉 실용적인 유용성은 없다 다만 그 내부의 차원을 열어젖히는, 심미적 도취를 위한 대상을 생산하는 것이다.

 

394. 인도에는 두 가지 종류의 미술이 있다. 하나는 심미적인 미술이고 또 하나는 사원 미술로서, 후자는 그 목표에 있어서 심미적이지 않다. 사원 미술은 사람의 눈을 붙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미술가와 관람자의 영적 변화에 영향을 주는 것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종류의 미술 속으로 접어든다. 이미지의 원천은 환상이다. .... 인도인들이 구현하는 이미지는 사물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변화를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395. 시바에 귀의한 사람에게는 그 대상(나타라자 시바 Nataraja Shiva, 춤의 왕 시바) 을 자신의 의식의 중심, 즉 그 안에 있는 시바에 상응하는 것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여긴다. “나는 곧 시바다.” 이것은 단순히 시바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395. 그 이미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주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신의 위치로 이동해야만 한다.

 

399. 성스러운 공간이란 다시 말해 사물이 그 어떤 실용적 용도도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 경험되는 곳이다.

 

401. 예술 작품은 그 정의상 ‘성스럽게 넘쳐나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여러분은 이 안에서 마야의 투사하는 힘과 드러내 보이는 힘을 볼 수 있는가? 욕망과 혐오의 동기가 여러분을 움직이는 한, 그것은 바로 투사하는 측면일 것이다. 여러분 스스로가 곧 마야를 만들어 내는 존재이며, 여러분의 태도가 붓다의 태도일 때 여러분은 그 드러내 보이는 힘을 여는 사람인 것이다.

 

402. 여러분이 만약 선과 악을 구분할 경우, 여러분은 예술을 잃는 셈이다.

예술은 도덕 너머로 나아간다.

여러분의 공감의 범위가 곧 여러분의 예술의 범위다.

 

403. 조이스의 비법은 어디에서나 상징을 보는 것이다.

 

404. 신들의 현시는 편재하고 있건만, 우리의 눈이 열리지 않아 못 볼 뿐이다.

상징은 우리의 눈을 열어 준다.

 

410. 탄드라의 속담이다. “신을 예배하려는 자는 우선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할지니라.

 

410. 삼위일체에서 성부는 여러분의 주의가 집중되어야 하는 신이다. 여러분은 성자이고, 성부를 아는 자이다. 그리고 성령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표상한다.

 

410. , 그 신을 아는 자, 또 그 둘 사이의 관계, 그리고 여러분을 그 신에게 점점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하는 점진적인 앎.

신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다.

 

412. - (.......) 이러한 온 우주 속에서 우리는 우리 내면의 가장 내밀한 본성을 확대한 반영으로서 인식된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로 그 귀이며, 그 눈이며, 그 생각이며, 그 말이다. 또는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귀이며, 하나님의 눈이며, 하나님의 생각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우리는 우리 정신의 그 공간 내이 무한 속에서 지속되며, 행성의 진로인 동시에 우리의 동포지구인들이 포함되어 있는 창조 행위에 지금 바로 여기서 참여하는 참여자인 것이다. - <신화와 함께 하는 삶> 중에서

 

411. - 우주를 지금의 모습보다도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 또 자신들이 그걸 만들었다면 어땠을지 안하고 생각하는 자들 - 그들의 이름은 군대다 - 의 경우에는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고, 시간도 없고, 살도 없기 때문에 깨달음에 적합하지가 않다. 또는 ‘우선 사회를 바로잡고 나서, 그런 다음에 나를 바로잡겠다’고 생각하는 자들 - 상당수가 그렇게 생각하듯 - 은 심지어 하나님의 평화의 저택의 출입문에서조차 입장을 금지당할 것이다. 모든 사회는 악하고, 슬픔이 가득하고, 불공평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이 세상을 돕고 싶다면, 여러분이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은 어떻게 그 안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에 관한 지식에서 비롯되는 즐거운 슬픔과 서러운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몸소 체득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414.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 ‘보라,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다’고 하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를 앞설 것이고, 그들이 바다에 있다고 하면 물고기들이 너희를 앞설 것이다.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으니, 너희 자신을 알게 되면 너희는 알려질 것이며, 너희가 살아계신 아버지의 자식들임을 알게 될 것이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모르면 곤궁 속에 살 것이며, 너희가 곤궁일 것이니라. - 예수 그리스도

 

417. - 우리는 땅의 일부이며, 당신들 역시 땅의 일부이다. 이 땅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다. 이 땅은 여러분에게도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세상에 신은 하나라는 것을. 인디언이건 백인이건, 그 어떤 인간도 거기서 떨어져 나갈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형제이기 때문이다.

* 1855년 시애틀 추장이 한 연설 (415~418)

 

419. 이 세상은 우리의 짝이며, 우리 역시 이 세상의 짝이다.

 

244. - 그들은 생각을 뛰어넘어 무한한 우주로 날아간 다음, 불모지인 달을 여러 번 선회한 뒤 먼 거리를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우주비행사들은)자신들의 목적지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반가운 광경이었는지 몰랐다고 말한다. 이 지구라는 행성은 “마치 무한한 우주라는 사막 속의 오아시스 같았다!라는 것이다. 이제 여기에는 뚜렷한 이미지가 있다. 이 지구는 온 우주를 통틀어 단 하나의 오아시스며, 삶의 의례를 위해 따로 떼어 놓은 특별한 종류의 성스러운 숲인 것이다. 그리고 이 지구의 어느 한 부분이나 구획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이제는 성소, 따로 떨어진 축복받은 장소인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는 이제 하늘에서 태어난 땅이 얼마나 작은지를, 그리고 그 소용돌이치고 빛을 내며 아름다운 구의 표면에 자리잡은 우리의 위치가 얼마나 위험천만한지를 직접 보게 되었다.

- <신화와 함께하는 삶> 중에서

 

420.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은 여러분이 있는 장소를 신성화하는 것이다.

 

420. - 시인 릴케는 이렇게 썼다. “이 세계는 거대하지만, 우리 안에서 바다처럼 깊다.” 우리는 자기 안에 법률을 지니고 다닌다. 그로 인해 세계는 질서를 유지한다. 우리 자신은 그야말로 신비스런 존재다. 세계의 경이를 탐색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이를 동시에 깨닫게 된다.

 

425.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249. 신화는, 또는 달리 말해서, 신화와 종교는 위대한 시이며, 그와 같이 인식할 경우에는 십중팔구 사물과 사건을 관통해서 서로 완전하며 전체인 어떤 존재 또는 영원의 편재를 가리킨다. …… 따라서 모든 신화가 삶의 현대의 삶에 맞도록 가공하기 위해 반드시 성취해야만 하는 첫 번째 조건은 한때는 끔찍하면서도 매혹적이었던 우리 자신과 우주-우리가 곧 그 귀와 눈과 정신으로 작용하는-의 경이를 향한 지각의 문을 정화하는 것이다.

 

250.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소년이 입문제의를 행할 때 이런 조언을 얻었다.

“삶의 길을 가다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 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426-427.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주관적 의미에서 보자면 오래되고, 영원하고, 끊임없는 신화이며, 기억되는 과거나 투사되는 미래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견지에서 시적으로 갱신되는 신화이다. 이는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즉 특정한 ‘민족들’의 아첨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각성할 수 있게 호소하는 것이 신화인 것이다. 즉 개인이 스스로를 이 아름다운 행성 표면의 특정한 장소를 얻기 위해 싸우는 자아로서뿐만 아니라 거대한 정신-각자 자기 나름대로, 모두와 (경계없이) 하나가 되어-의 중심으로서 각성하도록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옮긴이의 말

428.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이 조지프 갬벨의 사상을 잘 요약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약된 내용만으로는 캠벨의 사상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전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429. 아울러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캠벨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독자들이라면 그의 대표작들을 몇 권 더 읽어보길 권한다. 특히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에세이 모음집인 『신화와 함께하는 삶』은 캠벨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430. 사실 캠벨의 두 전공은 종교학, 그 중에서도 인도의 전통에 비중을 많이 둔 비교종교학이라고할 수 있다. 신화 연구는 그러한 학문의 추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며, 보다 더 근본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단이 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신화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화의 의미, 다시 말해서 신화를 통해 캠벨이 가리키고자 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캠벨을 ‘신화학자’라고만 규정하는 것은 그 너머의 달을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격이다.

캠벨 사상을 굳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힌두교-불교 전통에 근거한 일종의 범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 내가 저자라면

1. 강의 내용 정리에 따른 편집

이 책은 조지프와 함께한 오스본의 강의노트 정리이다. 아포리즘이 있고, 조지프가 설명한 말들을 적은 오스본의 기록들이 있다. 조지프의 책에 나온 부분을 다시 발췌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탤릭체로 씌여진 부분은 조지프의 책 중에 주요 부분이다. 이런 것들이 한데 섞여 있다.

강의 중에 조지프가 언급한 책들이나 인용문구는 따옴표로 적고 있어 구분이 된다. 그런데, 필사하면서 이들 구분이 모호하다.

 

(11)“인생의 의미란 무엇일까요?”조지프는 종종 이렇게 묻고 나서 곧 스스로 답하곤 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죠.” 카를 융과 마찬가지로 조지프는 노년기를 인생의 감소기를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개의 시기로 보았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컵을 가득 채우고, 태워 버릴 것은 다 태워 버렸다면 노년의 고요는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

 

(300). 모든 종교 훈련의 목표는 심리학적 변화다. …… 여기서의 핵심문제는 여러분의 마음에서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여러분은 각자의 자녀를 돌보고, 취객을 진찰하고, 책을 쓰는 일을 하는 와중에도 신들을 알고, 사랑하고, 거기 봉사하는 것에 근거하여 각자의 명상과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 만물이 곧 브라흐만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한, 여러분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명상이 될 수 있다. 그 일의 과정이며, 행동이며, 여러분이 지금 바라보는 대상, 그리고 지금 여러분을 바라보는 대상, 그 모두가 브라흐만이라는 것이다.

* 맨 앞에 명료한 명제를 제시하고, 다름 문장들에서 그것들이 구체화된 것들을 나열하여 설명하고, 그리고 나서 그 의미를 재해석해준다.

나는 첫 문장으로 이 말의 뜻을 내 삶에 가져와서 쓰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지만, 같은 문단을 이루고 있는 뒤쪽의 설명들 덕분에 그 말의 의미가 일상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실행되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이런 방식은 이런 구조를 가진 이유가.... 강의를 기록하여 정리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책을 읽을 때는 왜 같은 말을 몇 번씩 되풀이하여 다른 말로 다시 설명하나 하는 의문을 갖게 했다. 이것은 조지프가 알고 있는 것을 강의장 안에 있는 상대가 이해하도록 여러 나라의 관점, 여러사람들이 이해한 방식들을 가지를 측면으로 보여진다. 이 방법의 이점은 삶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까지 알려주는 친절한 설명이란 점이다.

 

2. 목차와 구조

도입단계 - 의식의 첫 번째(현세의 삶) - 의식의 두 번째 단계(깨달음을 향한 길) - 의식의 세 번째 단계(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4단계의 구조는 영웅의 여정의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4단계로 구분한 것은 너무나 크게 나누어서 오랜시간이 걸려 읽어가기에는 집중하기가 어렵다. 각 꼭지글에 제목이 없어서 각각에 소제목을 붙였으면 한다. 이 책을 나중에 다시 읽을 때 나름대로 정리방법을 갖지 못하면 찾아읽기가 어려울 듯 하다. 자신만의 목차를 따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을 엮을 때, 조지프의 강의 순서대로 엮은 것인지, 아니면 관련있는 부분 부분을 모아서 새로 구성했는지 궁금하다. 강의순서대로 엮어진 것이라면 강의 각 날의 주제에 맞춘 소제목이 있을 듯하다.

 

3. 다이제스트본의 약점

이 책은 역자의 당부사항대로, 이 책으로 입문을 하였다면 캠벨의 다른 책을 찾아야 할만큼 캠벨 사상의 정수다. 요약본은 다른 저서들보다 깊은 맛이 덜하다. 캠벨의 메시지를 전체적으로 전해받을 수는 있지만, 읽는이가  각각의 맥락과 의미를 나름대로 찾아가는 과정이 없는 점이 서운하다.

IP *.131.89.17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12 (No.10)오비디우스[변신이야기]민음사-9기 서은경 file tampopo 2013.06.17 3721
1311 (9-7) 변신이야기(오비디우스,민음사) [2] 땟쑤나무 2013.06.17 2606
1310 [6월 3주차] 변신이야기_박진희 file [2] 라비나비 2013.06.17 2424
1309 <변신 이야기> 오비디우스 지음 file jeiwai 2013.06.17 2970
1308 변신이야기metamorphoses file [3] 오미경 2013.06.17 9949
1307 6월 3주차 북리뷰_오비디우스_변신이야기 file 유형선 2013.06.17 2518
1306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강유원- 장재용 2013.06.18 3414
1305 #56_포트폴리오 인생, 찰스핸디 [1] 서연 2013.06.20 1964
1304 [2-9] 변신이야기 - 오비디우스 file 한정화 2013.06.20 2356
1303 #8.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셉 갬벨 file 쭌영 2013.06.26 2633
1302 #8(북리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캠벨) 땟쑤나무 2013.06.26 2297
1301 6월 5주차_조셉캠벨_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file 유형선 2013.06.26 3283
1300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조셉 캠벨 file [2] 오미경 2013.06.26 5714
1299 [6월 4주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_박진희 file 라비나비 2013.06.26 4410
1298 (No.11)조셉캡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민음사-9기 서은경 file [3] tampopo 2013.06.26 2320
1297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캠벨 file jeiwai 2013.06.26 3433
» [2-10] 신화와 인생 - 조지프 캠벨 타오 한정화 2013.06.28 2494
1295 #9. 사기열전 / 사마천 file 쭌영 2013.07.01 2676
1294 <사기열전 1 > 사마천 지음 file [3] jeiwai 2013.07.01 2838
1293 #9 북리뷰 - 사기열전(상) (민음사,사마천) 땟쑤나무 2013.07.01 26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