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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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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1일 22시 55분 등록
1 ) ‘저자에 대하여’ - “책, 여행, 자기 원칙과 소신에 투철한 삶”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 ~ )은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다. 영국의 공산당 당원이자, 공산당 역사가 그룹의 회원이다. 현재 런던 버벡 칼리지(Birkbeck College)의 학장이다. 많은 근현대사 책을 저술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4권으로 구성된 홉스봄의 시대 시리즈다.

우선 20세기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했다. 1914년에는 제1 세계대전이 터졌고, 1939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91년 냉전 체제의 한 축이었던 소련이 몰락했다. 즉 20세기에 일어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사회주의국가와 자본주의국가의 대립을 낳았고, 제3세계에는 식민지배와 해방이라는 뼈아픈 과거의 흔적을 남겼다.

현재는 과거라는 거울이 비친 결과라는 결론을 내린 그는 근대 유럽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분석하여 프랑스 혁명이 터진 1789년부터 유럽 전역에서 혁명이 좌초하는 1848년까지를 다룬 『혁명의 시대』, 부르주아가 주도권을 잡는 1848년부터 전 세계가 시장 질서로 편입되는 1875년까지를 다룬 『자본의 시대』, 전 세계적 불황이 처음 닥친 1875년부터 개별 기업이 아니라 국가까지도 시장 확보를 위한 쟁탈전에 나서는 1차 세계대전 전야까지를 다룬 『제국의 시대』, 그리고 소련이 무너지기까지 20세기의 역사를 다룬 『극단의 시대』인 네 권의 명저로 담아냈다.

『극단의 시대』의 이면사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는 20세기를 이해하는 데 구십 평생을 바쳐온 홉스봄의 특별한 기록이다. 베를린 학창시절에 히틀러의 태동을 지켜본 지식인이요, 귀족 자녀들이 우글거리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유일한 촌놈이었던 홉스봄은 트라팔가 광장에서 버크런트 러셀과 함께 핵무기 확산 반대 시위를 벌였고, 아바나에서 체 게바라를 위해 통역을 해주었고, 부다페스트에서 소련의 스파이와 크리스마스 저녁을 함께 보냈고, 런던에서는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필명으로 재즈비평가 노릇을 했으며 재즈를 통해 역사의 흐름 역시 감지했다. 이집트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영국국적을 가진 코스모폴리탄이지만 유럽대륙에서는 잉글랜드인이요, 영국에서는 유럽 이민자요, 어디에서나 유대인이었지만 이스라엘에서도 왕따를 당했다. 게다가 최고의 마르크스학자였지만 그의 저서는 소련에서 판금되었고 유럽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별종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홉스봄은 “개인으로서는 이것 때문에 살아가기가 고달팠지만 역사가에게 그것은 각별한 자산이었다.”라고 고백한다.

홉스봄이 산 20세기는 본인 말대로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세기”였다. 열여섯 살 때 역사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이후로 홉스봄은 세상을 관찰하고 세상이 내는 소리를 귀담아들으려고 애썼고 자기가 살아가는 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1990년대 초반 동유럽권 몰락과 함께 영국 공산당이 해체될 때까지 끝끝내 공산당원으로 남을 만큼 자기 원칙과 소신에 투철한 사람이었지만 현실을 보는 눈은 더없이 유연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인간의 반사 속도에 맞게 움직이고 자동차처럼 판매기에 둘러싸여 자연의 빛과 공기와 소리와 냄새로부터 격리되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가 도로를 가득 메우지 않았던 1930년대에 놀라우리만큼 아름답고 다채로운 풍광을 가진 아담한 크기의 나라를 돌아보는 데 자전거만큼 좋은 이동 수단이 없었다고 홉스봄은 이야기한다. 나에게도 그런 자전거가 있길 소망한다. 자유로움과 세상을 느끼기에 충분한 그런 자전거를 타고 지구의 절반을 누비면서 극지방에서도 열대지방에서도 잘 사는 철새가 되어 여행하련다.

홉스봄을 지금의 그로 이끌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것이 있다면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의 삶의 모습 중에 닮고 싶은 세 가지를 꼽으라면 “책, 여행, 자기 원칙과 소신에 투철한 삶” 이다. 그가 자신의 삶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꿈을 향해 오늘도 아름다운 변화를 꿈꾸는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마음에 새긴다. 나도 언젠가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누군가에게 꿈이 되어줄 아름다운 나의 이야기를 담아내리라.



2 ) '내 마음에 들어 온 글귀'

처음에 정리하였던 것을 줄이고 줄여도 그 분량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 많기에 그렇다. 앞으로 알아가야 할 것들이 많아 나에게도 이 세상이 흥미로운 미완의 시대로 느껴지지만 그 공백 사이에서 아름다운 변화와 도전이 이어질 나의 삶을 기대해본다.
머리말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한 세기

자서전을 쓰는 사람은 남이 쓴 자서전도 열심히 읽기 마련이다. P9

내가 얻으려는 것은 역사적 이해이지 동의나 승인, 연민은 아니다. P11

열여섯 살 때 역사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이후로 나는 세상을 관찰하고 세상이 내는 소리를 귀담아들으려고 애썼고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P12

1 프롤로그

자서전을 쓰는 역사가의 임무는 단순히 옛날로 다시 가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지도에 담는 것이다. 지도가 없이 어떻게 그 굴곡 많은 일생의 여정을 쫓아갈 수 있고, 언제 그리고 왜 우리가 머뭇거리고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는지, 또 우리가 기댔고 얽혀들었던 사람들 속에서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P27

2 빈과 유대인 소년

어릴 때부터 나는 구체적 현실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일도 그렇고 관심사도 그렇고 나와 겹치는 구석이 없었으므로 어른들은 적어도 나한테는 구체적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현실과 책에서 배운 것과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P41

3 힘들었던 시절

아버지가 나한테 자주 신경질을 부리더라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들었지만 설령 그것이 사실이었다 하더라고 나는 그런 기억을 지워버렸다. P61

어머니가 일급작가라는 생각은 안 든다. 아무리 내 인생에서 소중한 사람이나 대상에 대해서도 나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고 그때부터 생각한 모양이다. P77

아무리 똑똑한 아이라도 머리가 여물어서 반성하는 능력을 갖게 되기 전에는 정치적 참여를 미루는 것이 좋다고 넌지시 유도한 것도 어머니였고 나이가 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것도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언제나 솔직했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를 믿었다. P79

4 베를린: 바이마르의 종식

생각해 보면 학교는 베를린에 있었어도 베를린에 정말 뿌리를 박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차 드러나겠지만 홉스봄 일가는 베를린에 살았던 것이 아니라 국가를 넘어선 세계에 살았다. P96

수업 시간에 무엇을 배웠는지는 가물가물하다. 학교 수업은 어설프게 아는 어른들의 권위와 인내심을 관찰하고 조종하고 때로는 실험하는 맛은 있었지만 제일 비중이 크지는 않았다. P100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 아이는 인간에게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인간보다는 새에 대한 관심이 더 컸다. 또 세상사에는 유난히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아이 같았다. P104

이미 독일에 오기 전부터 심정적으로 좌파에 끌렸던 소년의 처지에서는 공산주의자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P106

5 베를린: 갈색과 빨간색

고향을 떠난 뿌리를 잃고 살아가던 아이는 또 한 번 혼란을 겪어야 했다. P133

6 섬나라에서

첫사랑을 느낄 만한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 살 무렵에 나는 이렇게 음악의 계시를 받았다. 내 경우에는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외모가 워낙 자신이 없다 보니 나는 보나 마나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육체적 관능과 성욕을 억눌렀다. 지적 유희와 말에 온통 점령당한 나의 삶에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절대적 감성을 심어준 것은 바로 재즈였다. P140

두 해 반 동안 나는 정치 활동을 유보한 채로 살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지적 활동에만 몰두했고, 지금 생각해도 경탄스러울 만큼 책을 많이 읽었다. P141

나는 그레틀 이모를 굉장히 좋아했다. 이모의 분별력을 마음속 깊이 존경했다. 한창 민감할 나이의 사춘기의 청소년은 부모와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드물지만 나는 이모한테 인생의 고민이 있으면 다 털어놓았고 내가 읽은 책 이야기도 했다. P143

내가 시드니 삼촌을 존경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삼촌처럼 되기 싫었다. 아니, 삼촌의 자기연민, 금세 달아올랐다 식어버리는 불안한 성격, 불같이 화를 냈다가는 감정에 호소하는 감성성의 표출이 당혹스러웠고 한심스러웠다. 화를 내는 것은 그만큼 무력하다는 뜻이었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P144

확실히 나는 학교에서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 마지막 학년에는 학교는 그저 나 혼자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는 서재나 다를 바 없었다. 그렇지만 세인트메릴레본 그래머스쿨에 나는 큰 빚을 졌다. P163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책을 열심히 읽은 것일까? 간단하게 답하자면, 마르크스의 시각으로,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역사적 시각으로 세상을 풀이하고 싶었다. P164-165

1934-1935년에 쓴 일기를 읽어보면 일기의 주인공은 확실히 조금씩 역사에 마음이 끌렸던 모양이다. 내가 무엇보다도 하고 싶었던 것은 내가 읽은 마르크스의 역사 해석을 치밀하게 가다듬는 것이었다. P166

에릭 존 홉스바움. 호리호리하고 젓가락 같고 구부정하고 못생기고 머리는 금발인 열여덟 살 반 먹은 녀석. …… 이런 심정으로 나는 1936년을 맞이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들어갔다. P169

7 케임브리지

나는 1935년 장학생 선발 시험을 보러 가면서부터 케임브리지 대학과 인연을 맺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대학과의 인연이라기보다는 내가 몸담게 된 킹스칼리지와의 인연이었다. P174

실력 있는 학생은 한 시간 동안 따분한 강의를 듣는 것보다 근사한 칼리지 도서관, 학과 도서관, 중앙 도서관에서 한 시간 동안 책을 읽을 때 더 얻을 것이 많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P187

나는 시험은 시험대로 잘 보면서 학보도 열심히 만들었고 사회주의자 클럽과 공산당 활동에도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뿐인가, 친구들과 토론도 자주 하고 어울려 놀기도 하고 캠 강에서 보트도 적고 연애도 했다.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 일은 없었다. P188

8 반파시즘과 반전투쟁

1933년 이후로 학생 운동은 파시스트 독재의 등장을 막고 파시스트 정권이 필연적으로 일으킬 세계 대전을 막는 쪽에 주안점을 두었다. …… 1938년의 뮌헨 협정 여파로 일주일 만에 300여명의 신입 회원이 케임브리지 대학 사회주의 클럽에 들어왔다. P194

1930년대에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를 좌파가 지배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P195

“내가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모든 공산주의자의 유일한 공통점은 뛰어난 머리였다.” P198

나는 방학을 크게 런던 정격대학(LSE)과 프랑스 두 곳에서 보냈다. P204

9 공산주의자가 되다

나는 1932년 공산주의자가 되었지만 당에 실제로 가입한 것은 1936년 가을 케임브리지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그리고 약 50년 동안 당을 떠나지 않았다. P215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P217

공산당은 레닌은 말하는 “직업혁명가”중심이었다. P217

우리에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으뜸가는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 유일무구한 권리를 가진 것은 바로 당이었다. 당의 요구는 세상없어도 따라야했다. P226

당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상황분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었고 모름지기 공산주의자라면 그런 분석 능력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P227

당원이 아니거나 당에 들어올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과 진지하게 사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이이었다. P228

10 전쟁

2차 세계대전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맛본 경험은 전쟁이 내 인생에서 6년 반을 앗아가 버렸다는 말로 가장 잘 요약된다. 나는 영국 군대에서 6년을 보냈다. 나한테는 “좋은 전쟁”도 “나쁜 전쟁”도 아니었다. 나는 전쟁에서 의미 있는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고 또 그런 일을 해달라는 부탁도 받지 않았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시기였다. P258

1943년 5월 나는 아주 매력적인 LSE의 공산주의자 여학생으로 전부터 어렴풋이 알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상무부에서 일하던 뮤리엘 시맨과 결혼했다. P227

10대에는 엄청난 분량의 일기를 독일어로 썼고 전쟁 중에도 틈나는 대로 독일어로 일기를 썼다. 평소에는 영어로 글을 썼지만 독일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하는 나의 능력을 히틀러와 싸우는 전쟁에서 내 나라가 써먹어주지 않는 사실이 안타까워 독일어 실력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P280

군대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두는 생활은 그래서 별로 힘들지도 않았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아내도 있었고 친구들도 있었고 런던에 나가면 문화를 즐길 수 있었다.
젊은 병사들을 위해 재즈 음반 감상반을 만들어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P282

11 냉전

서로 만나면 경험담을 비교하고 전쟁 전에 공산주의자였던 학생 같으면 “아직도 당원이야?” 하고 묻는 것이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상당수의 학생은 이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P291

나는 한편으로는 논문을 쓰느라 끙끙댔고 한편으로는 웬일인지 순탄치 못했던 결혼 생활로 허덕거렸다. P292

영국에서도 비교적 눈에 띄지 않는 점잖은 방식이긴 했지만 여건이 달라지고 있었다. 공직에서 공산당원을 대놓고 몰아내지는 않았지만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사람은 민감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자리에서 배제되었다. P299

1948년 이후로는 약 10년 가까이 이름깨나 알려진 공산주의자 치고 대학 교수로 임용된 사람이 없었고 이미 교수로 있던 사람도 승진이 안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가령 나는 케임브리지 대학 경제학과의 졸업시험에 경제사 분야의 심사관과 감독관으로 줄곧 참여했는데도 경제사 교수 임용 심사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버벡 칼리지에서 부교수로 승진한 것도 1959년 가서였다. P301

아슬아슬하던 나의 첫 번째 결혼은 1950넌 여름에 결국 깨지고 말았다. 나는 그때 받은 상처로 여러 해 동안 불행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P306

나는 연구에 몰두하고 여행을 다니고 심지어는 정치적 저항도 하면서 잡념을 떨치려고 애썼다. P306

케임브리지에서 살면 살수록 이 대학이 나를 원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었다. P307

오래 있으면서도 정말 재미있게 지낸 곳은 파리, 그리고 특히 맨헤튼 같은 대도시였다. P307

사도 모임의 한 세기를 지켜본 한 섬세한 관찰자의 말을 빌리자면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두 가지에 몰입한다. …… 하나는 우정이요 하나는 지적 정직함이다.” P312

1950년대의 전반부는 개인적으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일과 집필, 사색, 강의, 방학마다 다니던 여행, 그리고 충실한 당 활동으로 시간으로 채웠다. P313

원래 사람은 20대 때 머리가 가장 핑핑 돌아가고 생각도 겁 없이 하는 법이다. P313

12 스탈린과 그후

1933년 이후로 당원이라는 사실은 나한테 중요한 뜻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투사에서 지지자 내지는 동조자로 다시 태어났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몸은 영국 공산당 당원이었지만 마음은 내가 생각하는 공산주의 이념에 부합되었던 이탈리아 공산당 당원이었다. P355

나의 튀는 점은 재즈를 사랑하는 교수라는 것과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공산당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P356

1956년의 나라는 사람을 자서전 집필가의 눈이 아니라 역사가의 눈으로 되돌아보았을 때 물론 당을 떠날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당에 남은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잉글랜드에서 영국 젊은이로 공산주의에 입문한 것이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져갈 때 중유럽에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내가 공산당에 들어갔을 때만 하더라고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그저 파시즘하고만 싸운다는 뜻이 아니었다. 세계 혁명을 위해 싸운다는 뜻이었다. 정치를 보는 중심 거점이 10월 혁명에 있었던 1세대 공산주의자들의 말석에 지금도 나는 앉아 있다. P356

하지만 역사가가 아니라 자서전을 쓰는 사람으로 돌아와서 말한다면 개인적 감정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자존심이었다. 공산당원이라는 멍에를 벗어 던진다면 적어도 미국에서는 더 잘나갈 것이다. 은근슬쩍 빠져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냉전의 한복판에서 그런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공산주의자로 성공함으로써 자신에게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자부심이 잘났다는 것은 아니지만 못날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남았다. P357

13 40대에 맞는 전환기

지진이라든가 화산 폭발처럼 한눈에 재앙처럼 보이는 순간이 역사에도 있다. 가령 두 번의 세계대전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한 사람의 인생살이에도 그와 비슷한 순간이 있다. 앞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내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지리적 비유를 좀 더 쓰자면 분수령이라는 말이 참으로 적절해 보이는 순간도 있다. 눈에 확 들어오는 사건도 없었고 극적인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별 볼일 없는 고개를 넘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역사에서건 삶에서건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을 체험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들 때가 있다. 내 경우에는 4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접어들었던 1960년에 그런 분수령이 나의 삶에 찾아들었다. P359

나는 한 남자로서도 직업인으로서도 이 시기에 큰 변화를 겪었다. 국제 정세를 논하던 자리에서 스라소니 털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입은 빈 출신의 여자를 만났다.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그 여자는 UN 직원으로 콩고 문제에 관여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직후였고 나는 카스트로가 집권한 아바나로 떠나기 직전이었다. 마를렌과 나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결혼했다. 처음 내 이름으로 된 책이 나온 지 3년 뒤의 일이었고 『혁명의 시대 1789-1848』가 나오기 몇 주일 전의 일이었다. 국제학계에 내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외국 출장도 부쩍 잦아졌다. 그래서 1950년대부터 자주 찾았던 프랑스, 이베리아반도, 이탈리아 같은 나라 말고도 방문하는 나라가 많아졌다. 1960넌대에 들어와서 나는 미국과 쿠바에서 열리는 학술 대회에도 참석했다. 라틴아메리카를 발견하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과 인도에도 갔고 어렸을 때 떠나고 한 번도 못 가본 중유럽에도 가보았다. P360-361

개인의 삶은 역사라는 더 넒은 세상에 얹혀 있다. P364

대학 교수와 재즈 평론가를 구별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그 다음 10년 동안 뉴 스테이츠먼이라는 잡지에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 P369

재즈는 “특정한 음악 형식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두드러진 단면”이기도 하다. P369

출판사 사름들은 나더러 재즈에 관한 책을 써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쓴 책이 내가 처음으로 역사서를 낸 1959년에 같이 나온 『재즈판』이다. 이 책은 호평은 받았지만 별로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나는 책을 쓰면서 재즈의 세계를 좀 더 체계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P370

나는 1970년대가 되어서야, 그러니까 내 나이 쉰 줄로 접어들어서야 교수로서 정년도 보장받았고 학술원에도 들어갔고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이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일찍 정상에 올라서 제도권의 밋밋한 고원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가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을 지금의 성취와 한때 쌓아 올렸던 명성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너무 늦게 출발을 했고 오랜 세월 동안 발목이 묶여 있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나는 남들 같으면 내리막길을 미루기 위해 골몰할 나이에 아직도 이루어놓아야 할 일이 많았다. P378

14 웨일스의 크니흐트 기슭

15 1960년대

1776년의 미국혁명, 1789년의 프랑스 혁명,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익히 알았고 1933년 이후의 파란만장한 사태 변화를 몸으로 겪은 기성세대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의욕이 넘치더라도 혁명은 정치적 목표가 있어야 했다. P412

1960년대를 상징하는 것이 있다면 누가 뭐래도 록 음악이다. 록은 1950년대 후반부터 세계정복의 제동을 걸더니 얼마 안 가서 1955년을 전후로 하여 록을 아는 세대와 록을 모르는 세대의 골이 깊게 패버렸다. P415
1960년대에 제 3세계는 혁명의 희망을 제 1세계에 다시 심어주었다. 국제 사회를 열광시킨 두 주역은 쿠바와 베트남이었다. P419

대표단에 대해서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예전에 힐튼 호텔이었던 곳에서 우리에게 오찬을 베풀어준 체 게바라를 위해 통역을 했다는 것이다. P423

20세기 후반의 역사에서 일어난 정말로 기념비적인 사건은 이념도 아니고 학생들의 대학 점거도 아니고 노동자들이 작업복이었던 청바지의 힘찬 진군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P432

16 정치 관람자

여기저기서 하던 강의를 빼놓으면 나의 정치활동은 주로 책과 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P434

워낙 내 전공이 노동사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P434

파업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던 1970년대의 영국에서 살았던 사람은 노조와 정부의 대립과 노조의 강경 노선을 생생히 기억한다. P436

1979년 대처의 보수당이 승리를 거둔 다음부터는 노동당의 미래가, 아니 노동당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졌던 것이다. P439

한 나라의 일은 공사를 막론하고 사업 수완이 있고 사업 감각이 있는 개인이 맡아야 한다는 대처리즘 P449

1992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간발의 차이로 패배하면서 개혁의 꿈은 무산되었다. 내가 정치에 관심을 두고 살아온 이후로 그날 밤처럼 슬프고 암담한 적도 없었다. P453

고르바초프 시대의 막을 내린 1991년의 실패한 쿠데타를 헬싱키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이렇게 썼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 곧 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 ‘글라스노스트’ 곧 개방을 선택했지만 거꾸로 했어야 했다. P458

17 역사가들 속에서

학교 교과서에 들어가는 내용과 과거에 대해서 정치인이 떠드는 말에 들어가는 내용, 소설을 쓰는 작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비디오 제작가가 기대는 자료는 결국은 역사가한테서 나온다. P461

모름지기 역사가라면 자기와 똑같은 역사가들만 읽는 글을 써서는 안 된다. P462

피에르 부르디아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가 보기에 지식인의 삶은 판에 박힌 강단보다는 예술가의 삶에 더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지적 활동의 형식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안겨준 활동은 사회학자라는 직업이었습니다.
사회학자 자리에 “역사가”만 집어넣으면 나는 이 말에 백 번 동의한다. P483

18 지구촌에서

선생 노릇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확실히 학자들보다는 학생들과 같이 어울리는 것이 더 재미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그들의 젊음과 젊은이 특유의 패기, 열정, 희망, 무지, 미숙에 끌렸기 때문이지 학생들이 우르르 모여 있는 앞에서 내가 특별히 많은 것을 기대했기 때문은 아니다. P486

가르치기와 글쓰기의 핵은 모두 소통이다. 두 가지를 모두 즐기는 사람은 복이 많은 사람이다. P488

자서전을 쓰는 학자의 기억에서 지나간 세월은 언젠가 아메리카의 높은 언덕에서 지켜보았던 짐칸을 끝없이 달고 대지를 가로지르던 화물열차처럼 아득히 뻗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짐칸 하나하나 보다는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달라지는 풍광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탄 기차는 세 대륙, 아니 아메리카를 남과 북 둘로 나누면 네 대륙에 흩어진 도시와 대학을 지나갔다. P489

비행기를 타고 우리는 핀란드에서 나폴리까지, 캐나다에서 페루까지, 일본에서 브라질을 누비고 다녔다. 언론사의 해외 주대원은 보금자리가 달라지는 데서 느끼는 당혹감과 황당함과 기쁨을 곧잘 회고하는 전문직이지만 세상을 유랑하는 교수도 본질적으로는 해외 주재원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교수로 살아오면서 2세기 말의 양대 문화 중심 도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거기서 가르쳤다는 행운을 누렸다. 런던에서는 영국 박물관에서 없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연구실이 있었고 뉴욕에서는 맨해튼에서 제일가는 재즈 클럽 브래들리즈가 있는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살았다. P490-491

나는 중년까지 청년처럼 앞날을 바라보면서 살 수 있었다. 재혼을 해서 아이들이 생긴 것도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P491

역사는 미사일처럼 빠르게 움직일지 몰라도 연속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P494

1970년대가 되면 나는 정치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학문적으로도 존경도 받고 인정도 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P494

『극단의 시대 1914-1991』는 뉴욕과 뉴스쿨 대학교에서 즐겁게 지내면서 쓴 책인데 내가 그동안 쓴 책 중에서 가장 많이 팔렸고 반응도 가장 좋았다. P496

역사책을 쓴다는 것은 한 나라의 정치와 세계의 정치에 깊이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인데 정치와 역사를 따로 떼어서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 중에는 마르크스주의자로 낙인 찍혀서 바닥 안에서만 인정을 받는 신세를 푸념하는 학자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내가 역사가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내가 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졌다는 데서 틀림없이 덕을 많이 보았다. P497

내 책을 읽은 독자가 있는지조차 몰랐던 나라도 있다. 나는 1987년 한국에 가서야 비로소 내 책 다섯 권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P501

역사학도는 언어학도나 비교문학도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보다도 외국어를 잘해야 한다. 주제가 아주 협소한 향토사라면 모를까 웬만한 나라에서는 하나의 언어만 알아가지고는 역사를 제대로 연구할 수가 없다, P501

교수도 그렇고 기자도 그렇고 기업인도 그렇고 지구촌이라는 것은 살아가는 곳이라기보다는 만나는 곳이다. P506

나는 정말이지 즐겁고 편안하게 살았다. 여행도 많이 다녔고 아내도 나이기 들면서 점점 더 같이 다닐 때가 많았는데 우리의 여행은 일과 발견과 휴가와 색다른 경험과 오랜 우정이 하나로 녹아든 것이었다. P507

나는 어릴 때부터 꿈꾸던 삶을 살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삶이 풀려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부질없고 어리석기조차 하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직도 이렇게 속삭이는 작은 유령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이런 세상에서 마음 편히 지내서는 안 되지.” 젊었을 때 내가 그 글을 열심히 읽었던 사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P508

19 마르세예즈

나는 2차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는 1983년부터 거의 해마다 프랑스에 갔다.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 나라는 내 삶의 일부였다.
여행을 그렇게 많이 다녔지만 아마 외국 도시 중에서 파리만큼 내가 자주 간 곳도 없을 것이다. P509

우리 세대한테 프랑스는 지금도 남다르다. 이재에 밝았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언어가 세계를 정복하면서 교양있는 볼테르의 언어가 패배한 데서 프랑스인이 느끼는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나는 공감한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가 바뀐데 그치지 않고 문화가 바뀐 것을 뜻한다. P545

20 프랑코에서 베를루스코니까지

역사가로서 내가 처음 쓴 『원시적 반란자들』이라는 책은 1950년대에 내가 자주 여행을 다녔고 그때부터 내 인생과 저작물과 깊은 관련을 맺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두 나라 덕분에 씌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P548

21 제3세계

1962넌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약 석 달 동안 나는 농민 반란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이렇게 분에 넘치는 사치를 누리면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볼리비아, 콜럼비아를 중심으로 남미를 한 바퀴 돌았다. P585

1960년대 이전까지 사람들은 크게 두 집단에 들어갔다. 기독교도와 공산주의자였다. 방법은 달랐지만 둘 다 총체적 해방을 추구했고 평등주의에 대한 신념에서 인종주의를 혐오했다. 그리고 기독교도도 그랬지만 특히 공산주의자는 반제국주의라는 현실적 방침과 혁명의 잠재력에 대한 기대로 비백인 사회의 역사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P588

개인적 교분을 통해서 한 사회를 아는 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친구는 그 사회에 너무나 푹 젖어 있어서 둔감해지기 쉬웠다. 그리고 거리라든가 문화, 언어가 경험을 가로막는 것처럼 계급도 그에 못잖은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P590

22 루스벨트에서 부시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미국은 정말 미국이 아니라 주로 미국 문화를 통해 전파된 모습이었다. P623

나의 미국 방문자 자격 문제는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방문교수로 초빙을 받았던 1967년에 가서야 완전히 해결되었다. P629

40대의 역사학자가 청춘 남녀처럼 젊음을 만끽하기에는 너무 늦었을 테지만 그래도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 밤에 재즈를 듣다보면 살아 있음이 무한한 기쁨이었다. P637

미국은 사는 곳과 일자리와 배우자를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도 심하게 바꾸는 남녀가 살아가는 나라다. P649

뉴욕을 알려면, 하다못해 맨해튼이라도 알려면, 거기서 살아봐야 한다. P650

미국은 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재능과 열정과 새로움에 개방되어 있다. P652

미국은 지금까지 정부 수반으로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이탈리아인이나 유대인을 뽑는 사소한 변화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미국 정부에는 위대한 결정을 내릴 줄 아는 사람이 드물어졌다. P658

지금은 어느 누구도 미국에 제동을 걸지 못한다. 이 글을 쓰는 2002년 4월 현재 미국의 막강한 힘이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고 또 명백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P659

우리의 문제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 혹은 자신의 한계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미국은 자기편에 저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몰아붙인다. “미국의 세기”가 정점에 이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고충이다. 올해로 여든다섯인 나는 그 결과를 보지 못한고 눈을 감을 것 같다. P660

23 에필로그

2002년의 세계에는 어느 때보다는 역사가가, 특히 의심 많은 역사가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늙은 역사가의 평생에 걸친 편력을 읽으면 젊은 역사가가 21세기의 어두운 전망에 그에 합당한 비관주의만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더 투명한 눈, 과거를 기억하는 역사 감각, 현재의 열풍과 장사판에서 거리를 두는 능력을 가지고 맞서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P663

“미국의 세기”가 끝나는 것을 내 눈으로 보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 중에는 그것을 볼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히 빗나간 예상은 아니니라. P665

나만큼 오래 산 사람은 20세기를 겪으면서 역사의 힘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30년 동안 세계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느낌은 똑같은 기간으로 따졌을 때 인류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급격하게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P666

역사에 필요한 것은 기동성과 넓은 영토를 내려다보고 살필 수 있는 능력, 즉 자기의 뿌리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는 태어난 흙과 서식지를 떠나지 못하는 식물이 아니다. 하나의 서식지나 환경은 아무리 고유하더라도 우리의 주제를 남김없이 규정하지 못한다. 우리의 이상은 아무리 늠름하다 하더라도 소나무가 아니라 지구의 절반을 누비면서 극지방에서도 열대지방에서도 잘 사는 철새라야 한다. P667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상상력이 풍부하더라도 그런 무지는 잘 극복이 안 된다. 과거는 여전히 다른 나라다. 과거라는 나라에 그어진 국경선은 여행자만이 넘나들 수 있다. P667

“우주 쪽으로 슬며시 비껴 있다.” 역사가에게도 그것은 바람직한 자세이다. P668

아무리 덩치가 크더라도 일체감을 느끼는 집단은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그 집단의 입맛에만 맞도록 달라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과거 역시 그런 식으로 달라질 수는 없는 법이다. P669

나는 시험에서 몇 점이나 받았을까? 점수가 너무 낮으면 이 책은 앞으로 저자보다 대부분 더 오래 살게 될 독자들이 새로운 세기를 헤쳐 나가는 데 별다른 도움을 못 줄 것이다.
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P671

옮긴이의 말
20세기는 홉스봄의 한 세기였다.

홉스봄한테서 한국 독자들은 왜 신뢰감을 느끼는 것일까? 역사책에도 연구자의 주관은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서양 학자들이 쓴 책 중에서 가끔씩 느껴지는 은근한 우월감이 홉스봄에게는 없다. 그것은 홉스봄이 아마도 젊은 시절부터 우리 나이로 아흔 살이 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국경의 울타리를 넘어 보편주의를 일관되게 추구해 온 좌파의 지성인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P673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끔 공동체도 개인을 존중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공동체와 개인의 이런 건강한 긴장 관계야말로 평생을 공산주의자로 살아왔으면서도 개인을 압살하는 소련이나 중국 공산주의의 교조주의적 이념에는 늘 저항감을 보였던 에릭 홉스봄이 소망해 온 삶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P678

개인이든 나라든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은 필연적으로 긴장의 이완을 낳으며 그것은 타락으로 이어진다. 사람은 자신이 몸담은 체제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가, 역사가 도달한 정점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을 고집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순간부터 역설적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체제와 시대는 본안들의 희망사항과는 달리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P679

이 책의 원제를 “Interasting Times"로 단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노역사가 에릭 홉스봄에게 자신이 한평생 살았던 시대는 참으로 흥미로운 시대였다. 하지만 홉스봄은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를 그저 호기심과 흥미의 대상으로 보고 관찰만 한 것이 아니라 더 좋게 다듬어 나갈 수 있는 실천의 대상으로 여기고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홉스봄에게 역사와 시대는 인간이 참여하여 만들어 나가야 할 미완의 것이었다. 홈스봄이 쓴 자서전의 한국어판 제목을 ”미완의 시대“라고 지은 것도 그런 뜻에서다. 노역사가가 못다 이룬 사회 개혁의 꿈은 시대와 국경의 벽을 넘어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어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난 이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 P680



3 ) ‘내가 저자라면’ - “그에게 아름다운 시대를 선물하리라”

“남들은 책으로만 아는 역사가 단순히 오래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일부가 되고 기억의 일부가 되었다. 1980년대 초반이나 중반에 태어난 세대한테는 20세기의 역사라는 것은 영화나 비디오로 접하는 시대극이라든가 역사적 일화와 관련된 이런저런 단편적 이미지 말고는 아득히 먼 과거일 뿐이지 머리로 떠오르는 내용이 거의 없다. 20세기의 역사는 살아 있는 현실이 아니라 그저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기 위해 배운다.”

이 부분이 가슴에 어찌나 와 닿던지... 3기 연구원이 되기 위해 치루는 2차 관문의 첫 번째 과제가 나에게는 ‘처음’이라는 신선함과 낯설음의 공존으로 다가왔다. 서점에서 우연히 스칠 법한 두께의 이 책을 마주하면서 며칠을 홉스봄과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도 그를 잘 알지 못한다. 눈앞에 놓인 그의 책을 보면서 어찌 저 많은 것을 일러주었는데도 그럴까? 하는 한숨이 새어나오는 순간이다. 하지만 스스로 ‘그만큼 역사도, 시대와 함께 호흡한 그의 인생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야.’ 라고 위로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와 마주하면서 나에게 작은 변화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를 통해 ‘변화’를 느껴본다. 처음에는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을 수나 있을까? 첫 번째 과제로 이 책이 선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저런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로 당최 집중하기조차 어려웠던 내가 역사탐정이라도 된 듯 그의 삶 속에 나타난 역사적인 사건, 인물, 문화, 나라 등을 여행하기를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공산당’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깨끗할 치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하고 순화시켜 주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그저 시험을 위해 외우던 역사적인 사건들이 오늘의 나를 존재하게 하였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놀랍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살아 온 시대 환경적 배경이 지금의 그로 이끌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지금의 나로 이끈 과거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그와 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기도 한다. 사실, 지금은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산 노역사가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나의 지식의 끈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고 다양한 사료를 통해 머릿속에 그려낸 상상력으로도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른다. 그와 함께 과거로, 여러 나라로,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한다.

“불쾌하거나 받아들이기 싫은 데이터는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되살릴지언정 일단은 ‘쓰레기통’에다 던져놓고 보는 컴퓨터 같은 성향과 현실 세계와 어는 정도 거리를 두면서 살아갔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을 무사히 헤쳐 나올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을 비극과 충격과 상실과 불안의 세월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그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그에 비준하는 원인이 있다’ 고 생각한다. 그의 아동기의 경험과 가족관계가 시대적 배경 못지않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결핍으로 인한 채움의 욕구가 그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호기심, 탐구, 고독한 독서, 관찰, 비교, 실험을 하면서 주로 시간을 보낸 그 아이에게 삶이 던져준 과제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시험에서 몇 점이나 받았을까? 점수가 너무 낮으면 이 책은 앞으로 저자보다 대부분 더 오래 살게 될 독자들이 새로운 세기를 헤쳐 나가는 데 별다른 도움을 못 줄 것이다. …… 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라고 독자들에게 역사적인 사명을 심어준 그에게 몇 점을 주어야 할까?

이 한권의 책으로 역사를 온전하게 이해하기에 살아온 시간이 짧은 세대에게는 역부족인 듯싶다. 적어도 그의 다른 저서들을 차례대로 읽으면 이야기가 달라질까? 책을 읽으면서 책과 함께 영상물도 함께 보았더라면 이해가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아니면 역사적인 이야기를 함께 담은 그의 사진첩이 함께 있었더라면... 나의 시선이 닿지 못한 그곳을 알기 위하여 역사가가 고서(古書)에 파묻히거나 동료학자의 딱딱한 논문을 읽는 것과 같이 나 역시 역사적 사건의 단편들을 찾아 나섰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를 이해하고 나를 알아가고 과거와 미래의 통로가 될 오늘을 느껴본다.

그의 삶이 어떤 이의 삶에 영향을 주기를, 역할모델이 되기를, 꿈을 향한 도전에 용기가 되기를,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나에게는 어떤 영향을 줄지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과거, 현재, 미래와 소통하는 방법을 일러준 홉스봄에게 감사를 표하며, 미완의 시대를 살아간 그에게 아름다운 시대를 선물하고 싶다.
IP *.27.8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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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12 23:08:57 *.140.145.63
임효신님.. 진지함으로 본인의 삶과 연결고리를 찾는 무언의 노력이
절절히 읽혀지는군요. 그리고 저자 에릭의 인생코드라 할만한 점들을
(책, 여행, 자기 원칙과 소신에 투철한 삶) 짚어주신 대목이 좋네요..

님만의 아름다운 언어로 이야기하는 날이 모호한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풍경과 같은 생생한 언젠가임을 축원하고
응원합니다..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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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효신
2007.03.13 12:57:42 *.27.82.173
리뷰 감사드립니다..^^

무언가를 접할 때마다 배울것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기분좋습니다.
두꺼운 책읽기가 힘에 부치기도 했지만
제자신을 알아가고 새로운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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