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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4일 06시 18분 등록
미완의 시대
-에릭 홉스봄 자서전


1. 저자에 대해서
에릭 홉스봄
주요저서
『혁명의 시대』1789-1848
『자본의 시대』1848-1875
『제국의 시대』1875-1차세계대전 전야
『극단의 시대』소련이 무너지기까지의 20세기 역사를 다룸
『미완의 시대』1917-2004

『미완의 시대』에서 자신이 왜 자서전을 쓰는지,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왔는지,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는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그는 전체를 통째서 자신은 역사가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세상이 내는 소리에 귀 귀울였고, 그리고, 세상을 좀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고자 노력했음을 말한다. 역사를 보는 시각은 종교 전쟁에서 비롯되는 격정, 감정, 이념, 공포에서만 거리를 두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세계를 옹호하는 시각에서도 거리를 두어아 한다고 역설한다.

아래는 1936년 저자가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가지 전에 감상이나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고 무언가 정리를 해야 할 순간이 왔다 싶었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해 일기장에 적은 글이다.

‘에릭 존 어니스트 홉스바움, 호리호리하고 젓가락 같고 구부정하고 못생기고 머리는 금발인 열여덟 살 반 먹은 녀석. 이해력이 빠르고 피상적이지만 일반 상식이 대단히 많고 이론적이고 보편적인 영역에서 남다른 아이디어도 풍부하다. 거드름을 피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데 문제는 본인도 이것을 믿기 때문에 그만큼 더 위험하고 또 때로는 먹혀들 때가 있다는 것. 사랑에 빠지는 적은 없고 욕정을 승화하는 데 상당한 재주가 있어 보이는 데, 자주 그런 건 아니지만 자연이나 예술을 감상하면서 맛보는 희열로 표현되기도 함. 도덕심은 전혀 없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쳤음. 어떤 사람은 그를 몹시 역겨워하고 어떤 사람은 좋아하지만 대다수는 그냥 우습게 봄. 혁명가가 되고 싶어 하지만 아직까지는 신통한 지도력을 보이지 못했음. 작가가 되고 싶어 하지만 자료를 주무를 수 있는 역량과 끈기가 모자람. 태산을 옮겼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만 하지 신념은 없음. 허영과 자만에 빠져 있음. 겁이 많음. 자연을 정말로 사랑함. 독일어를 까먹고 있음.(p.168)’

이글은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맞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미완의 시대』라는 자서전 전체를 통해서 보여준 그의 삶의 모습은 18살의 혁명에 대한 순수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며,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행동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포용한 자신감이 넘치는 역사학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자서전 속의 어떤 구절에서는 저자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 부분을 여기에 옮기고 아래쪽에 느낌을 적었다.

188. 어떤 사람이 회고록에서 1938년에 내가 서기장을 맡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타고난 지도자형은 아니었다는 그의 관찰은 정확하다.
--> 저자는 자신을 보는 시각이 객관적이다.

514. 두 연인 사이에서 선택을 못하고 고민하는 사람처럼 언어들과 문화들 사이에서 줄타기르 하던 나는 기질도 지성도 정서도 프랑스인이었으면서 독일을 사랑했고 무엇보다도 프랑스와 독일을 모두 야유할 줄 알았던 지로두의 능력에 호감을 품었다.
--> 지로두에 대한 호감을 표현하는 부분이 자신과 너무 닮아서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유대인이면서 반시온주의자이고, 독일에 살았고, 영국에 살았으면서도 두 나라를 모두 이성적으로 비판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보인다.

506. 진정한 거점은 어느 한곳에 터를 잡고 사는 가족과 나그네와 외국인과 도착과 일감이 출발이 하나로 녹아 들면서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지역에 뿌리를 둔 네크워크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 자신이 말하는 네트워크와 맞게 활동했고 그렇게 살고 있다. 여러 언어에 능통한 코스코폴리탄으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한 조건을 갖추었고, 자신의 전문분야로 인적 네크워크를 구성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545. 청중이 그 자리에 모인 까닭은 누군가가, 이를테면 나 같은 사람이 당이 어떻고 정통성이 어떻고 하는 구분이 무의미해진 상황에서 좌파를 여전히 지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솔직하게, 비판적으로, 시큰둥하게, 고집스럽게, 그러면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였다.
669. 중유럽 사람들 속에서 나는 잉글랜드 사람이었고, 영국에서는 유럽에서 온 이민자였으며, 어디를 가도 유대인이었고 특히 이스라엘에서도 다른 곳에서 유대인이 받았을 법한 왕따를 당했다. 전문가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거기에 반대하는 길을 걸었고, 여러 언어에 능한 코스모폴리탄이었고, 못 배운 사람에게 정치적 관심과 학문적 관심을 쏟아 부었던 지식이었다. 심지어 나는 내가 접해본 나라들 안에서 정치적으로 소수파에 머물러 있던 공산주의자들 안에서도 상당히 오래동안 별종취급을 받았다. 개인으로서는 이것 때문에 살아가기가 고달팠지만 역사가에게 그것은 각별한 자산이었다.
--> 545.669.에서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선 속에서도 자신을 꿋꿋하게 지키는 ‘솔직한 사람, 비판적인 사람, 고집스런 사람, 여전히 공산주의자인 것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2. 인용문: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머리말: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한세기>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알고 싶다는 호기심의 차원과는 별도로 몇가지 이유에서 이 책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이 살아온 역사 중에서도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한 세기를 거의 다 살았다. 나는 여러 나라에서 살았고 세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도 많다. 이 기나긴 삶을 살아오는 동안 종이에다 글자만 많이 남기고 세상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을지는 모르지만, 열여섯 살 때 역사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이후로 나는 세상을 관찰하고 세상이 내는 소리를 귀담아들으려고 애썼고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역사가로서 자선전을 썼고 그것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의 물음에 대한 답변

12. 한 사람의 삶과 시대가 맞물리는 양상에 주목하면서 이 둘을 모두 응시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개인사와도 시대사와도 다른 역사적 분석의 틀이 만들어졌고 바로 이것이 은근한 효과를 발휘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2. 자서전은 바로 그런 일을 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 책은 개인의 경험으로 그려낸 세계사가 아니라 세계사가 경험의 내용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아니 카를 마르크스의 말을 약간 고쳐서 써먹자면 "인간이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가되 자기 마음대로 [그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상황 속에서 [그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주어졌거나 물려받았기 때문에 바로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 아니, 인간을 둘러싼 세계가 선택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데 발판이 되는 늘 똑같지는 않지만 늘 제한된 수의 선택항을 내놓은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 <극단의 시대>의 뒷면이라고 볼 수도 있다.

13. 역사와 사회과학이라는 경기에서 뛰는 선수에게는, 특히 나처럼 직관과 우연에 힘입어 주제를 선택한 다음 나중에 가서 조리 정연하게 내용을 엮는 역사가의 경우에는 더더욱,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 다시 말해서 자기 몸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바깥에 설 줄 아는 능력이 이성을 신뢰하고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능력 다음으로 중요하다.

13. 철학자 아그네서 헬러... "역사는 밖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것이고 회고록은 일어난 일을 안에서 기록하는 것"이다.

<1. 프롤로그>

25. 그 기억이라는 것도 서로에 대해서 까맣게 몰랐고 단 한 순간도 서로를 제대로 생각한 적 없이, 아무런 연결 고리도 없이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70년이라는 광대한 공간을 이어주는 가늘디가는 거미줄일 뿐이다. 이런 삶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20세기를 살아온 유럽인의 남다른 경험이다. 다시 찾은 공동의 유년시절, 노년에 이루어지는 상봉은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모습을 극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부조리하기도 하고 얄궂기도 하고 초현실주의적이기도 하고 소름끼치는 일이기도 하다.

27. 자서전을 쓰는 역사가의 임무는 단순히 옛날로 다시 가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지도에 다룬 것이다. 지도가 없이 어떻게 그 굴곡 많은 일생의 여정을 쫓아갈 수 있고, 언제 그리고 왜 우리가 머뭇거리고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는지, 또 우리가 기댔고 얽혀들었던 사람들 속에서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것들은 개개인의 삶에만 빛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에 빛을 던진다.

41. 어릴 때부터 나는 구체적 현실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일도 그렇고 관심사도 그렇고 나와 겹치는 구석이 없었으므로 어른들은 적어도 나한테는 구체적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현실과 책에서 배운 것과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51. 나는 그 당시에 열세 살도 채 안 되었는데, 1930년에 독일 총선에서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당이 제2당으로 올라섰다는 소식을 듣고 어른들이 경악하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른들은 거기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간단히 말해서, 앞으로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반유대주의를 경함한 적은 거의 없었다. 내 안에는 잉글랜드인의 피도 섞여 있었으므로 적어도 학교에서는 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부각되지 않았다 내가 유대인 민족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것도 그 덕분이었던 것 같다.

53. 어머니는 따끔하게 야단을 치셨다."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듯한 행동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고 하는 척이라도 해서도 안 된다."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홉스봄은 이것으로 인해 후에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뿐만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것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54.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는 겨레의 훈장을 달지도 않고 나라의 깃발을 휘날리지도 않는다. 역사가로서 판단하기에 나는 만일 세계 인구의 0.25퍼센트를 차지하는 , 내가 그 일원으로 태어난 종족이 '선택'받았거나 특별한 민족이라는 주장이 조금이라도 정당하다면 그것은 과거나 현재 또는 미리에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그 부족이 모여 살았던 게토나 집단 거주 구역 안에서 이루어진 업적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이 게토를 떠나도록 허용받았거나 스스로 떠나는 쪽을 선택한 이후로 주로 두 세기 동안 드넓은 세계에서 그들이 인류를 위해 이룩한 괄목할 만한 업적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3. 힘들었던 시절>
60.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기억할 수도 있었을 것을 대부분 내가 일부러 까먹는 쪽을 택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78. 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끝내 잊어버리지 않게 한 것도 어머니였다. 단순한 부정도 얼마든지 정체성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의 태도는 어정쩡하다면서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무리 똑똑한 아이라도 머리가 여물어서 반성하는 능력을 갖게 되기 전에는 정치 참여를 미루는 것이 좋겠다고 넌지시 유도한 것도 어머니였고 나이가 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것도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언제가 솔직했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를 믿었다.

80. 그렇지만 그 시절이 아주 고통스러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워낙에 나라는 사람이 불쾌하거나 받아들이기가 싫은 데이터는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되살릴지언정 일단은 ‘쓰레기통“에다 던져놓고 보는 컴퓨터 가은 성향이라서 이런 착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80. 내가 어려운 상황을 무사히 헤쳐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현실 세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4. 베를린:바이마르의 종식>
88. 그는 당국에 입바른 소리를 여러 번 했지만 탄압을 받지는 않았다. 동독 정부가 비판을 용인한 것은 그가 철저한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이더라도 하인리히 쿠친스키는 동독 지도자들보다도 공산당에 더 오래 몸담은 대선배였다.

95. 운명은 그처럼 무심코 내린 집안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 인생은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때에 다른 일이 벌어진다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100. 지금은 어떤 교사였는지 이름밖에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빌리 보드슈라는 선생님한테 내가 공산주의를 신봉한다고 밝혔더니 그 양반이 발끈하면서 나더러 당장 가보라고 한 곳도 학교 도서관이었다. 그는 나한테 단호히 말했다.(그리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네는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그저 떠드는 군. 도서관에 가서 공산주의가 뭔지 한 번 찾아보기나 해.” 나는 그 말을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공산당 선언』을 건졌다!

102. 베를린 생활을 하면서 나는 일평생 공산주의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아니면 적어도 누가 보아도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또 이제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나도 알지만 학생 때부터 헌신했던 정치적 활동 없이는 인생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103.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이다. .... 그것은 한 세기의 4분의 3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쌓인 지질학적 퇴적물을 벗겨내 그 속에 묻혀 있던 낯선 사람을 드러내거나 찾아내서 다시 뜯어 맞추는 것을 뜻한다.

<5. 베를린:갈색과 빨간색>
115. 물론 자서전을 쓰면서 이 세상에서 자기가 더 멋있고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처럼 꾸미면서 거기에 걸맞게 인생이 줄거리를 바꾸는 사람은 레더 말고도 얼마든지 있다.
.... 코리노가 확보한 증거로 미루어보면 실망스러운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레더가 왜 그랬는지 더욱 이해가 간다. 결국 그는 없는 사실을 지어냈다기보다는 윤색을 하거나 소망을 현실로 둔갑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124.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마지막 몇 달 동안 내가 했던 체험을 되살리면서, 내가 이제 역사가로서 아는 지식과, 독일의 좌파가 했어야 할 일과 하지 말았어야 할 일에 대해서 일평생 해온 정치적 토론과 사색을 통해 갖게 된 견해와 그때의 기억을 따로 가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125. 우리는 세계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었던 젊은 공산주의자였지만 1932년의 마지막 몇 달 동안에 그것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알았음에 틀림없다.

127. 육체적 경험과 맹렬한 격정이 가장 깊이 맞물린 활동은 누가 뭐래도 섹스이겠지만 그 다음 가는 것은 바로 뜨겁게 달아오른 분위기에서 대중 시위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결국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섹스와는 달리 대중 시위는 집단적 성격을 가지며 적어도 남자의 경우에는 순간으로 끝나는 섹스의 절정과는 달리 대중 시위에서 맛보는 희열은 몇 시간이나 이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섹스와 마찬가지로 시위에 나선 사람은 걷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육체 활동을 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개인은 집단 안에서 일체감을 느끼고 집단과 하나가된다.
--> 교회 동기녀석이 고등학생 때 거리 시위에서 나섰다가 전경에게 붙잡혀 그 녀석이 속한 모든 소모임들이 해체되었다. 그 녀석은 왜 거리에 나섰을까?

128. 나는 내 공산주의의 바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이 “집단 황홀경”은 피억압자에 대한 연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완벽하고 총체적인 지적 체계가 주는 미학적 매력, 새로운 예루살렘을 염원하던 시인 블레이크와 비슷한 약간의 소망, 속물근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지적 혐오감과 함께 내가 공산주의에 빨려든 다섯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131. 아무리 가망이 없고 위험한 일이라도 당이 하라면 해야 하는 공산주의운동 특유의 생리를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것도 그때였다. 선거 운동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도왔겠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한, 다시 말해서 당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나타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움직였다.

131. 위험을 감수하는 데서 느끼는 찌릿한 희열도 있었지만 정말로 두려움을 느낄 만큼 위험한 일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 이 때의 경험을 “나를 때리려고 하는 사람 앞에 서서 주먹이 날아오기를 기다릴 때처럼 몸이 오그라들면서도 가볍게 말라붙는 듯한 느낌”이라고 묘사했다.

<6. 섬나라에서>
140. 첫사랑을 느낄 만한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 살 무렵에 나는 이렇게 음악의 계시를 받았다. 내 경우에는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외모가 워낙 자신이 없다보니 나는 보나 마나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육체적 관능과 성욕을 억눌렀다. 지적 유희와 말에 온통 점령당한 나의 삶에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절대적 감성을 심어준 것이 바로 재즈였다.

142. “ 사회주의 국가는 묵은 관습의 단점은 없애되 장점은 살려 나가는 새로운 사회주의 관습을 만들어내야 마땅하고 또 만들어 낼 것이다.” 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규칙이 없는 사회를 염원하면서 반란과 혁명에 뛰어들었던 여느 운동가들과는 달리 보수당 성향의 공산주의자 기질이 이때부터 싹텄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자신이 생각하는 국가가 사회주의가 기본 바탕이 되게 세계를 그리는 것이 이 글을 쓸때부터였던가 보다.

146. 삼촌에게는 자기가 파는 제품이 우수하다고 철석같이 믿는 세일즈맨 특유의 열정 같은 것이 일종의 갑옷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전화로 매몰차게 거절을 당하고 주문이 취소되어도 꿋꿋하게 비틸 수가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아서 밀러가 쓴『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멋진 연극에서 나는 삼촌의 모습을 발견했다.

153. 자유로워지는 데 빠져서는 안 될 조건이 기동성이라고 한다면, 자전거야말로 구텐베르크 이후로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의 가능성을 온전히 구현한 최대의 발명품, 그것도 단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발명품일자도 모른다.
--> 자전거 타기를 매우 좋아해서

158. 영국만 놓고 보자면 세계 혁명은 평소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일기장에다 나는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열일곱 살 소년의 눈에는 마흔도 너무나 먼 미래였다.) 어쩌면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지 모른다고 썼다. 하지만 이 무렵 코민테른도 파시즘과 세계 전쟁애서 먼저 이겨놓지 않으면 혁명은 이루기 어렵다는 사실을 막 깨달아가고 있었다.

164. 그런데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책을 열심히 읽은 것일까?
간단하게 답하자면, 마르크스의 시각으로,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역사적 시각으로 세상을 풀이하고 싶었다. 가슴은 뜨거웠지만 조직에 속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소극적으로 움직이던 10대의 공산주의 지식인에게는 그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사실 없었다.

166. 마르크스주의가 마약처럼 뿌리치기 어려웠던 까닭은 사상이 워낙 총체적이었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삼사만상의 이론”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삼라만상을 보는 틀”은 제공했다. 무기체와 유기체의 본성을 인간 세계와 연결하고 집단과 개인을 연결하고 끝없이 유동하는 세계에서 모든 상호 작용의 기본 이치가 무언인지를 일깨워주었다.

167.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를 꼼꼼히 분석하여 그 바탕 위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점쳤다. 모든 정황, 모든 연결고리와 관계를 빠짐없이 고려하여 자본주의 문학을 꼼꼼히 분석하면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해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거창한 예언은 얼마 못가서 나도 관심을 잃었지만 열일곱 살 때 나 스스로 던졌던 역사적 질문은 역사가로서 나의 연구 방향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나는 “이런저런 시대에 씌어진 시의[좀 더 넓게는 사상의] 내용과 형식을 규정하는 (사회적) 영향력을 분석”하려고 노력한다.

<7. 케임브리지>
171. 20세기 전반기의 잉글랜드 같은 사회에서 한 계급 안에서 살다가 다른 계급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이민을 가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176. 게림브리지가 정치 이론과 실천에서 무엇보다도 기여한 것은 F.M. 콘퍼드라는 고전학자가 『요지경 학계』(1908)라는 짤막한 풍자문에서 기막히게 묘사한 대로 “시기 상조의 원칙”이었다. 누가 무는 제안을 내놓더라도 무조건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이것은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원칙의 강력한 뒷받침을 받았다.

180. 명문가끼리 맺은 혼인을 통해서 만들어진 이른바 “귀족 지식인 사회”의 거점이 게임브리지라는 사실을 나는 전혀 몰랐지만, 킹스칼리지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곧 그것을 알게 되었다.

190. 내가 가장 정성을 쏟아 부은 곳은 물론 당이었다. ....결국 나는 내가 정말로 되고 싶었던 “직업 혁명가”의 길은 나한테는 맞지 않는다는 씁쓸한 깨달음을 얻고 어느 정도 타협을 하면서 먹고 살 방도를 찾기로 한 발 물러섰다.

<8. 반파시즘과 반전 투쟁>
193. 1933년 이후로 학생 운동은 파시스트 독재의 등장을 막고 파시스트 정권이 필연적으로 일으킬 세계 대전을 막는 쪽에 주안점을 두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대변해서가 아니라 파시즘과 전쟁으로 치닫는 분위기에 제동을 걸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하는 심약함 때문에 영국 정부를 몰아 세웠다.

202. 우리가 활기를 잃지 않았던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우리의 적은 오직 하나, 그러니까 파시즘과 영국 정부처럼 파시즘을 막으려 하지 않는 세력이었다. 둘째, 우리는 스페인이라는 전쟁터에서 실제로 싸움을 하고 있었다. ... 마지막으로 우리는 낡은 세상이 무너지고 나서 펼쳐질 새로운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점에서는 다른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판단 착오를 한 셈이었다.

202. 우리가 살았던 1930년대는 올바른 가치를 내걸고 악의 무리와 정면 대결을 벌였던 시절이다. 우리는 그것을 즐겼다. 그리고 게임브리지의 급진파 학생들 대부분이 그런 일에 시간을 많이 투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세상일에 대해서 예전의 우리와 똑같은 문제 의식을 느끼면서도 우리하고는 달리 자기들의 의분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또 거기서 좌절감을 느끼지만 우리는 불행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9. 공산주의자가 되다.>
215. 나는 1932년에 공산주의자가 되었지만 당에 실제로 가입한 것은 1936년 가을 게임브리지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그리고 약 50년 동안 당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왜 그렇게 오래도록 당원으로 남았는가 하는 물음은 자서전에는 어울리지만 일반 역사의 차원에서는 그리 흥미로운 질문이 아니다. 그렇지만 공산주의가 우리 세대의 가장 똑똑한 남녀를 왜 그렇게 많이 빨아들였는가 하는 물음과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우리한테 어떤 뜻이 있었는가 물음은 20세기의 역사에서 핵심 주제가 되어야 한다. 내 친구 안토니오 폴리토는 “20세기에 가장 위력을 떨친 악마의 하나는 정지척 열정”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처럼 20세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은 없다. 그리고 그런 열정의 핵심을 꿰찬 것이 공산주의였다.

216. 우리한테 꿈을 심어주었지만 이제는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삭막한 폐허만을 남기고 깡그리 허물어져서 공산주의라는 구상 자체에 처음부터 허물이 있었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내기 어렵다. 그렇지만 공산주의라는 신념에서 자극을 받았던 사람들이 이룩한 업적과 “공산주의가 정복하지 못할 요새는 없다”는 믿음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217. 공과 사과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였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226. 우리는 당에 인생을 걸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당에 바쳤다. 그 대가로 우리는 당으로부터 승리한다는 확신과 형제애를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으뜸가는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 유일무이한 권리를 가진 것은 바로 당이었다. 당의 요구는 세상 없어도 따라야 했다.
--> 학습을 이끌었던 ‘당이 원하면 한다’라는 말을 농담인 듯 진담인 듯 했던 선배는 ‘녹슬은 해방구’를 멋들어지게 불렀고, 기독교사회운동연합회 역사분과 사람들 몇몇에게는 동지라는 호칭을 썼다.

229. 반세기 전 우리가 당원으로서 무엇을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되돌아보면서 말하기는 쉬워도 왜 그런 일을 했고 왜 그런 느낌을 가졌는지를 설명하기는 참 어렵다. 과거의 나를 사람을 재현하기가 어렵다.

229.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섣불리 떠들지 않는 지혜를 보여주었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그들이 말한 몇 안되는 예언도 공산주의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내다보았던 바로 그 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한계를 모르는 엄청난 생산력의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230. 나는 가장 치밀한 혁명가도 “그런 이상주의 내지는 ‘실현 불가능한 기대’를 품고 있으므로 사회주의 세상이 왔다고 해서 모든 걱정과 슬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실연과 삼심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거나 해결 가능성이 높아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무리 생각이 트인 사람도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고 썼다. “혁명 운동은.... 우리 손으로 바꾸지 못할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썼다.

230. 혁명가는 성자를 빼놓고는 어느 누구보다도 높은 윤리의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밀며 그런 순간이 닥쳤을 때는 정말로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 그때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회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안에서 형제가 되고 자신의 개별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점에서 이상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을 하는 동안에는 이럴 수가 있는데 왜 나머지 경우에는 그러지 못하는 것일까?
(혁명가의 심리: 밀로반 질라스)

236. 앤드류는 철저하게 충성을 지키고 철저하게 헌신한 공산주의자로 내내 남았다. 앤드류 같은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자기가 믿는 이념에 얼마나 헌신적인가의 기준은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것을 옹호하려는 마음가짐에 있는 것’이라고 앤드류가 믿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기독교에선 “끄레도 키아 압수르둠”(부조리하기 때문에 믿는다)이라는 말이 있지만 앤드류 같은 사람은 끝없는 도전에서 믿음의 근거를 찾지 않았나 싶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라는 말처럼 이성적으로만으로는 뭔가를 따르지는 않은가 보다.

240. 탄압이 아니라 특권을 누렸던 공산주의 체제라는 아주 다른 상황에서 살았던 공산당원의 경우는 어떨까? .... 우리와는 달리 그들은 자기네 나라에서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모든 불의와 잘못에 대한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243. 알고 지내는 사람과 정치적 견해를 가르는 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같이 있으면 재미있고 익살맞은 사람이었지만 그 뒤로 우리 부부와 소무예이 부부는 차츰 멀어졌다. 개인적 살과 공적 삶은 나눠서 생각하기 쉽지 않은 모양이다.

251. 괴물처럼 모든 것을 삼키는 관료주의는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기보다는 끊임없이 닦달하면서 당근과 채찍을 주었다. 그들이 만들어가던 사회는 나쁜 사회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교육도 시켜주고 의료 혜택, 사회보험, 연금이 보장되고 선량한 사람들이 정직하게 일하는 아주 체계가 잡힌 공동체에서 휴가를 보내고 수준 높은 문화를 서민도 즐길 수 있고 야회에서 운동도 하고 여가 활동도 할 수 있는 사회였다. 신분 차별이 없는 사회였다. 다시 찰스 마이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아주 좋게 보자면 “사회주의와 편안함” 사이의 어디쯤 아니면 “느긋한 집단주의”로 귀착된다.

253.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동유럽에서도 공산주의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얼마 못 가서 소련도 허물어졌다.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남긴 유산은 썰물이 진 바닷가의 고래처럼 덩그마니 남았다.

254. 우리는 성배를 영영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배가 아니라 성배를 찾아 나서는 것이라는 아서 왕의 말은 옳지 않은가? “성배를 포기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어디 포기하는 것이 우리 뿐이겠는가?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없이, 자유와 정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 없이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20세기에 실제로 그렇게 살다간 사람들을 기억조차 해주지 않고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10. 전쟁>
255. 전쟁이 터지면서 나 같은 젊은이들의 미래는 갑자기 멈추었다.

258. 2차 세계대전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맛본 경험은 전쟁이 내 인생에서 6년 반을 앗아가버렸다는 말로 가장 잘 요약된다. ... 나한테는 “좋은 전쟁”도 “나쁜 전쟁”도 아니었고 그저 허망한 전쟁이었다.

265. 공병으로 지내는 동안 나는 압도적으로 잉글랜드인이 많았던 노동자들 속에 섞여 살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때로는 거칠어질 때도 있었지만 그들의 올곧음과 허튼소리에 대한 경멸감과 계급 의식과 동지애와 협동 정신을 평생토록 존경하게 되었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모름지기 공산주의자라면 프롤레타이라의 미덕을 철석같이 믿어야 했지만 그것은 이론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확인하고 보니 참으로 마음이 놓였다.

277. 독일 공군이 런던을 맹폭하던 1940년과 1941년에는 어느 정도 감각이 마비된 운명론(“어차피 죽어야 할 목숨이면 죽겠지.”)에 젖어 들지 않으면 폭탄이 쏟아지는 도시에서 도저히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밤중에 거리를 걸으면서 깨달았다.

279. 전쟁중에서 틈나는 대로 독일어로 일기를 썼다. 평소에는 영어로 글을 썼지만 독일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하는 나의 능력을 히틀러와 싸우는 전쟁에서 내 나라가 써먹어주지 않는 사실이 안타까워서 독일어 실력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 능력을 쓰고 싶은데 쓰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절절하다.

<11.냉전>
294. 우리는 적개심을 못 느꼈다. 적어도 나는 못 느꼈다.
물론 “이렇게 선량해 보이는 사람들이 1933년과 1945년 사이에 안한 짓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줄곧 들었다. 서유럽에서 살던 유대인치고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친척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전쟁이 끝난고도 50년이 흘렀다. 우리나라 6,25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서로 총을 맞대고 싸웠던 남과 북을 서로를 바라볼 때 이런 감정이 들 수 있을까?

303. 냉전시대에 자유주의자가 떠들어댄 논리 중에서 정말로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은 공산주의자는 누구나 적국 소련의 첩자이며 따라서 공산주의자는 지식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304. “이 일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말해 줄 수 있는가 모르겠네.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건 잘 알지만, 자네 아직도 공산당원인가?”

309. 사도는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작은 공동체다. 주로 아주 똑똑한 학부생이나 대학원 초년생이 중심이 되어서 다른 회원을 끌어들이면서 조직을 꾸려나간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회원들이 쓴 논문을 같이 읽고 토론을 한다. 사도의 주역은 학부생이었다. 사도는 사회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거나 떠나면서 모임을 통해 만들어진 “진짜 세상”을 떠나 바깥의 “덧없는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날개를 단다”고 해서 “천사”라고 불렀다.)보다 학부생이 우위에 있었다.

310. 사도로 뽑히는 기준은 아마 지금도 그럴 테지만 그때도 관심 주제나 신념, 심지어는 출중한 머리도 아니었고 그저 “사도다움”이었다.

312.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두 가지에 몰입한다. 너무나 순수한 몰입이라서 쌀쌀맞은 사람은 어이없어하고 포근한 사람은 탄복을 금치 못한다. 하나는 우정이요 하나는 지적 정직함이다.”

<12. 스찰린과 그 후>
327. ... 지식인한테는 “뒤적거릴 것”이 무엇보다도 요긴한데 그럴 것을 구할 도리가 없었다. 전화번호부도 없었고 지도도 없었고 대중 교통 시간표도 없었다. 일상생활에서 써먹을 수 있는 기본적 참고 자료가 하나도 없었다. 간첩이라면 경기를 일으킬 만큼 두려워하다 보니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정보마저도 국가 기밀이 되어버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사회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1954년 러시아 방문에서)

328. 돌아가는 것이 참 자의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328. 결정을 내리는 러시아인과 그렇지 않은 러시아인 사이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우리끼리 농담 삼아서 한 소리이긴 하지만 그들은 머리털부터가 달랐다. 결정을 내리는 사람의 머리털은 머리위로 빳빳이 섰거나 아니면 하도 세워서 나중에는 빠져버렸다. 결정을 내리지 않는 사람은 이마 위로 머리털이 가느다란 직모였다.

333. 공산주의자의 임무는 세계를 해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것이었으니까.

334. 일반 공산주의자에게는 언제라도 달려와 부자를 일망타진할 것 같은 “큰 콧수염 아저씨”가 가난한 민중의 승리와 해방을 상징했으니까 스탈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335. 다수의 일반 당원들이 곤혹스러워했던 까닭은 스탈린의 학정에 대한 인정 사정 없는 규탄이 잘 읽지도 않지만 어쩌다가 읽으면 중상 비방과 기만이라는 간단히 일축할 수 있는 “부르주아 언론”서 나온 것이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336. 1956년이 시작될 무렵 비집권 공산당 지도부 중에서 스탈린 격하가 결국은 공산당의 역할, 목표,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 결과로 이어지리라고는 진지하게 내다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353. 당시 나는 톰슨에게 앞으로 10년만 지나면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못 줄 사상가(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의 생각을 돌려놓기 위해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연구 활동을 포기하는 것은 범위 행위나 다를 바 없다고 몰아세웠다.

356. 나는 한때 공산주의자였다가 공신적은 반공주의자로 돌아선 무리와 한패가 된다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그들은 공산주의라는 “실패한 신”을 섬기는 데서 해방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자기들이 해방되기 위해 그 신을 사탄으로 몰아붙였다. 냉전 시대에는 그런 사람이 수두룩했다.

357. 성장한 곳의 풍토와 혁명 운동에 투신한 시기가 남들하고 달랐기 때문에 나는 홀가분하게 공산당을 박차고 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공산당에 남은 것은 그래서가 아닌가 싶다. 아무도 내 등을 떠밀지 않았을 뿐더러 나가야 할 피치 못할 이유도 없었다.
공산당원이라는 멍에를 벗어 던진다면 적어도 미국에서는 더 잘나갈 것이다. 은근쓸쩍 빠져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냉전의 한복판에서 그런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공산주의자로 성공함으로써 자신에게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자부심이 잘났다는 것은 아니지만 못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았다.

<13. 40대에 맞는 전환기>
359. 눈에 확 들어오는 사건도 없었고 극적인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별 볼일 없는 고개를 넘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역사에서건 삶에서건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을 체험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들 때가 있다.

361. 적법한 여권, 수틀리면 언제라도 원하는 나라로 태워다줄 비행기 표를 살 수 있는 풍부한 비상금, 언제라도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는 단촐한 생활, 그리고 꼭 챙겨 가야 할 물품의 목록 같은 것은 우리에게 필수적이었다.
--> 피난민의식

364. 개인의 삶은 역사라는 더 넓은 세상에 얹혀있다.

378. 나는 1970년대가 되어서야, 그러니까 내 나이 쉰 줄로 접어들어서야 교수로서 정년도 보장받았고 학술원에도 들어갔고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일찍 정상에 올라서 제도권의 밋밋한 고원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가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지금의 성취와 한때 쌓아 올렸던 명성의 거리가 점정 벌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378. 너무 늦게 출발을 했고 오랜 세월 동안 발목이 묶여 있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나는 남들 같으면 내리막길을 미루기 위해 골몰할 나이에 아직도 이루어놓아야 할 일이 많았다.

<14. 웨일스이 크니흐트 기슭>
395. 어쩌면 너무 지내기가 고달파서 웨일스에 자꾸 끌렸는지도 모른다. 웨일스에만 가면 자연에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험한 날씨와 지형과 늘 씨름을 하는 데서 묘한 희열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15. 1960년대>
410. 역사가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혁명은 혁명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수히 많은 말을 통해 그 성격을 알 수 있는 법이다. 그것은 입으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문자가 있는 사회에서는 글을 아는 남녀가 써내는 수많은 글로 나타난다.

412. “금지하는 것을 금지시켜야 한다.”

431. 서양을 정말로 바꾼 것은 1960년대의 문화혁명이었다. 20세기 역사의 분수령이 된 것은 1968년이 아니라 비록 정치적으로는 이렇다 할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프랑스 의류산업에서 처음으로 여성용 바지가 치마보다 더 많이 생산되고 가톨릭 사제 지원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한 1965년인지도 모른다.

432. 피터 팬처럼 어른이면서도 영원히 소년으로 살아가고 싶어 했던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나는 공감하는 바가 별로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장 나이 많은 소년의 역할을 현장에서 해낼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디까지나 원칙의 문제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젊은 옷을 안 입기로 결심했고 또 실제로 안 입었다.

<16. 정치 관람자>
452. <<마르크시즘 투데이>>는 아무리 내키지 않더라도 세상이 너무나 변했다는 사실을 한사코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겁쟁이는 물러서고 배신자는 비웃어라, 우리는 여기 남아서 붉은 깃발을 휘날릴 테니.”)은 무익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17. 역사가들 속에서>
461. 대부분의 역사가는 아무리 먼 과거를 다룬다 하더라도 과거를 탐구하다 보면 결국 현재와 눈앞의 사안에 대해 생각하다 말하고 또 현재와 눈앞의 사안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전문가에게만 아니라 시민에게도 중요하다.

462. 역사가라면 자기와 똑같은 역사가들만 읽는 글을 써서는 안 된다.

462. 먼저 역사적 논제 하나를 소상히 설명하고 이어서 그것을 완전히 발가벗긴 다음 마지막에 가서 자기 식으로 하는 그의 강의는 지식과 수사학이 자웅을 겨루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당시 게임브리지 대학의 경제사를 강의한 포스탄 교수에 대해서)

483. 지적 성숙이라는 주제로 담소를 나누면서 지금은 작고했지만 피르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가 보기에 지식인의 삶은 판에 박힌 강단보다는 예술가의 삶에 더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 지적 활동의 형식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안겨준 활동은 사회학자라는 직업이었습니다.’
사회학자 자리에 “역사”만 집어 넣으면 나는 이 말에 백번 동의한다.

<18. 지구촌에서>
488. 가르치기와 글쓰기의 핵은 모두 소통이다. 두 가지를 모두 즐기는 사람은 복이 많은 사람이다.

488.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전달했는지 확인하려면 천상 토론 수업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도 나는 특수한 주제를 다루는 수업보다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수업이 더 마음에 들었다.

506. 진정한 거점은 어느 한곳에 터를 잡고 사는 가족과 나그네와 외국인과 도착과 일감이 출발이 하나로 녹아 들면서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지역에 뿌리를 둔 네크워크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507. 나처럼 혜택을 누리고 산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바겠지만 나는 “내가 겪은 삶과.... 20세기의 현실 .... 인류가 겪어야 했던 그 끔찍한 사건들 사이의 명백한 모순”에 놀란다.

<19. 마르세예즈>
511. 나와 말이 통하는 것은 마네의 「올랭피아」였다. 열다섯 살 먹은 사춘기 소년이 호사스럽고 느긋한 자태를 마음껏 드러내면서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관능적 쾌락에서도 벗어난 것처럼 초연해 보이는 벌거벗은 여자의 냉담하고 성숙한 시선에 압도당하여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 나도 이와 비슷한 사춘기 때의 경험이 있다. 하교길에 지나는 길목에는 예술회관(전주)이 있는 데, 그때는 전라북도 미술대전이 열리고 있었고, 그 해에 수상한 많은 작품이 전시된 그 공간에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나와 눈을 맞추는 한 남자의 시선이 무심한 시선이 담긴 입선작이었다. 제목이 ‘추곡수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림 속에는 예비군 복을 입은 한 중년 남자가 덤덤하다 못해 무표정하게 한 손에 불 붙은 담배를 든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림을 보고 있는 나를 보고 있는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의 시선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림을 보는 사람을 무표정한 모습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그림들에게 눈을 맞추었고, 그림들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림을 이전보다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514. 두 연인 사이에서 선택을 못하고 고민하는 사람처럼 언어들과 문화들 사이에서 줄타기르 하던 나는 기질도 지성도 정서도 프랑스인이었으면서 독일을 사랑했고 무엇보다도 프랑스와 독일을 모두 야유할 줄 알았던 지로두의 능력에 호감을 품었다.

527. 지금도 프랑스인은 굉장히 격식을 따지는 사람들이고 프랑스 사회는 명확하게 미리 정해진 규칙과 절차로 이루어진 극장과도 같다. 바람둥이로 이름난 중년의 철학자가 1950년대에 여전히 무릎을 꿇고 여인에게 장미 한 송이를 바치는 것을 주특기로 삼을 수 있었던 나라는 내가 알기로는 프랑스 말고는 없다.

545. 우리 세대한테 프랑스는 지금도 남다르다. 이재에 밝았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언어가 세계를 정복하면서 교양 있는 볼테르의 언어가 패배한 데서 프랑스인이 느끼는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나는 공감한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가 바뀐 데 그치지 않고 문화가 바뀐 것을 뜻한다.

<20. 프랑코에서 베를루스코니까지>
547. 역사가가 되려는 사람한테 과거의 어떤 부분을 파고들어야 하는지 차근차근 알려주는 길잡이가 없다.

566. 이탈리아는 아직도 글보다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로 의사소통을 나누는 나라였다.

578. 이탈리아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1990년대는 고약한 기존의 체제를 무너뜨릴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꼭 더 나은 체제가 들어설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584. 이것은 마르코 폴로가 여행하다가 보고 들었던 실제 도시나 상상의 도시에 대해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이레네는 아득히 먼 도시의 이름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더 이상 똑같다고 말할 수 없다.” ... 태양의 도시라는 유토피아가 그런 도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그리고 가고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는지 모른다. 막판에 가서 황제는 이름을 들어본 악몽 같은 도시에 대해서 묻는다.

‘폴로: 생지옥은 미래형이 아닙니다. 그것이 존재한다면 이미 여기 있습니다. 같이 살아 잇는 데서 만들어지는 우리의 일상생활이 지옥입니다. 그것을 견디는 길은 두가지 입니다. 첫 번째 길은 사람들은 쉽다고 합니다. 지옥을 받아들이고 지옥의 일부다 되는 것이지요. 지옥이 거기 있다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을 때까지요. 두 번째 길은 위험한 데 늘 깨어 있어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지옥의 한복판에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고 알아보고 그것을 이어질 수 있도록 숨통을 터주는 것입니다.’
-->홈스봄은 이 글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되고, 가슴 밑바탕에서부터 바램을 계속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폴로가 말한 두 번째의 선택을 한 사람이다. 그는 그의 삶을 통해서 늘 깨어 있었고, 세상의 한복판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산 사람이니까.

<21. 제3세계>
621. 파블로 네루다가 「모두의노래」라는 서사시의 ‘마추피추 고원“이라는 부분에서 장중한 시로 노래하면서 생각했던 중남미 대륙이었다. 이 시는 죽어버린 푸르른 이름 모를 사람들의 넋을 부르는 것을 끝난다. 시인은 그들의 죽은 입을 통해서 말하고 싶어 한다.
‘위라코차의 돌 깨는 아들이여
푸른 별의 식은 음식을 먹던 아들이여
파란 보석의 맨발로 다니던 손자여
“남미를 이해하고픈 마음이 있으면 맞추피추에 가서 그 실을 읽어야 합니다.”

<22. 루스벨트에서 부시까지>
623. 내 또래의 지식인에게 두 개의 조국, 그러니까 하나는 자기가 태어난 나라, 또 하나는 프랑스가 있었다면, 20세기에 서양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 아니 궁극적으로는 세계 어디든 도시에서 살아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가 태어난 나라와 미국이라는 두 개의 조국이 있었다.

649. 미국은 사는 곳과 일자리와 배우자를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도 심하게 바꾸는 남녀가 살아가는 나라다.

654. 미국은 어느 모로 보나 2세기의 나라 중에서 성공한 경우다. 경제는 세계 제일의 규모로 세계 경제의 발전 속도와 방향을 좌지우지하고 기술 발전 수준은 독보적이며 자연과학ㅇ과 사회과학에서 모두 앞서가서 심지어는 철학자들도 세계를 주도하는가 하면 세계 소비 시장에서 차지하는 패권은 어느 누구고 넘볼 수가 없다. 미국은 유일무이한 패권을 휘두르는 세계 제국으로 20세기를 마함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미국은 20세기가 낳은 최선의 가치를 상징한다.” 여론 조사가 아니라 이주의 방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면 십중팔구 미국은 영어를 조금은 할 줄 알고 이런저런 사람으로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뜰 수밖에 없거나 뜨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가장 가서 살고 싶어 하는 나라로 떠오를 것이다.

654. 미국의 창조적 예술이 압도적으로 많이 다루는 주제는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국이라는 현실이다. 어떤 식으로든 모든 것을 담아내겠다는 꿈을 미국의 예술가들은 버리지 못했다. .... 그런 목표에 누구보다도 가깝데 도달한 사람은 사실은 작가가 아니라 피상적으로 보이면서도 생명력이 놀라우리만큼 오래간 이미지의 창조자였다.

658. 미국이라는 거대한 양탄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부는 달라졌고 언제나 달라지고 있지만 기본 무늬는 놀라운 안정성을 보여준다.

660. 우리의 문제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 혹은 자신의 한계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미국은 자기 편에 서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몰아붙인다. “미국의 세기”가 정점에 이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고충이다. 올해로 여든다섯인 나는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 것 같다.

<23. 에필로그>
664. 나이가 많다는 것이 여기서는 유리하다. ..... 남들은 책으로만 아는 역사가 ..... 단순이 오래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일부가 되고 기억의 일부가 되었다.

666. 나만큼 오래 산 사람은 20세기를 겪으면서 역사의 힘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666.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을 가정, 공동체, 사회 안에 묶어두었던 규칙과 관습이 제 구실을 못하는 역사적 시기를 살아본 첫 세대다.

666. 나이는 역사적 관점이라는 것을 만들어주지만 나의 인생은 그것 말고도 내가 또 하나의 관점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것은 거리라는 관점이다.

667. 역사는 우리 식이 종교 전쟁에서 비롯되는 격정, 감정, 이념, 공포에서만 거리를 두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위험한 “일체감”이라는 유혹도 멀리해야 한다. 역사에 필요한 것은 기동성과 넓은 영토를 내려다보고 살필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서 자기의 뿌리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다.

667. 우리의 이상은 아무리 늠름하다 하더라도 ... 지구의 절반을 누비고 다니면서 극지방에서도 열대지방에서도 잘사는 철새라야 한다. 시대착오와 지방색 이 둘은 참으로 무서운 역사의 죄악이다. 둘 다 다른 곳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무지에서 생겨난다.

669. 일체감은 다른 누군가에 맞서서 정의되는 것이므로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와는 이질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것은 참극으로 이어진다. 흑인을 위한 흑인의 역사든 동성애를 위한 동성애의 역사든 여성을 위한 여성사든 자기중심의 민족사나 국민사든 오로지 그 집단을 위해서만 씌여진 끼리끼리의 역사(“일체감의 역사”)는 일체감을 느끼는 광범위한 집단의 저변에 깔린 이념을 반영하면서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에서 어느 정도 탈피했다손 치더라도 역사로서는 함량 미달이다. 아무리 덩치가 크다 하더라도 일체감을 느끼는 집단은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그 집단의 입맛에만 맞도록 달라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과거 역시 그런 식으로 달라질 수는 없는 법이다.

670. 한사람의 역사가로서 제대로 살았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은 그 자신과 이 세상에 각별한 문제가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 마치 기자가 아득히 먼 과거사를 대해 보도하듯이, 그러면서도 국외자가 아니라 깊이 결부된 사람으로서, 특히 “만약에”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지 또 거기에 답변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진짜 역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은 진자 역사데 대한 질문이 아니고,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쩌면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은 일에 대한 물음이다. 그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에 대한 물음이다.

3. 내가 저자라면 - 책의 좋은 점과 보완할 점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 에릭 홈스봄과 함께 20세기를 다룬 긴 다큐멘터리 시리즈 저자의 설명을 들어가며 본 기분이다. 역사가들만이 읽는 글이 아닌 20세기를 알아야 할 많은 독자들이 함께 읽을 만한 독특한 역사책을 한권 읽은 것 같다. 저자 에릭 홉스봄은 ‘개인의 삶은 역사라는 더 넓은 세상에 얹혀있다’고 말한 것처럼 개인사와 정치사를 명확히 분류하지 않은 자서전을 썼다. 덕분에 자서전과 딱딱한 역사책이 아닌 20세기 주요 역사를 한번에 읽은 기분이다.

자서전이라면 최근 10년이내에 단 한권밖에 읽지 않아서 어떤 식으로 자서전이 쓰여지는 지,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자신의 감상을 적은 글이 아닌 이상, 책을 읽은 독자를 배려하는 저자를 좋은 저자라는 생각에 독자로서 좋았던 점과 보완할 점들을 적고 싶다.

머리말에서 책의 구성을 언급해 주어서 좋았다. 연대기적 구성을 따랐지만 시간순으로 따르지 않는 것은 따로 묶어서 3부로 했다는 가이드에 따라 순차적으로 앞에서부터 읽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1부에서는 프롤로그와 1장에서 16장까지 개인사와 정치사를 담았고, 2부는 역사가를 전문직활동 경력을, 3부는 인연이 깊은 나라의 지역의 회상과 특징을 담았다. 23장 에필로그는 저자는 3부까지 넣지 않았는데, 4부로 따로 떼어도 좋을 만큼 비중이 큰 것 같다. 자신의 일관된 견해를 다시 한번 짚어주어 정리하는 기분으로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또 다른 좋은 점 중에 하나는 자신과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은 가족이나 동지들에 대해서 서술한 때, 솔직한 점이다. 그 점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을 묘사를 서술한 것도 저자의 시각을 따라서 편안히 받아 들일 수 있었다.

보안할 점이라면 이 책은 전에 읽었던 자서전과 비교한다면 가장 큰 차이점은 무척 읽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에필로그를 제외하고는 어려웠다.
우선 나는 20세기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고, 저자 에릭 홉스봄이 내 관심분야의 사람도 아니고, 내가 속한 사회에서 이름이 거론되는 중요 인물이 아니다. 살아온 환경과 세월이 전혀 판이한 한 사람의 생애를 보는 것은 지적 호기심으로 자극하는 것이어서, 저자가 정작 말하고자 하는 것을 놓치고 세부적인 것에 신경이 쏠리기 일쑤였다. 자서전의 반이 넘어가는 데까지 가서야 시시콜콜한 시대나 사람의 묘사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특정 사건에 대해서 언급할 때 시작이 무겁다.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건을 먼저 말하는 수법이 아닌 인물을 먼저 등장시키는 것이었는데, 긴 수식어를 달고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인물로 관심이 쏠려 버려 사건(역사)에는 나중에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장이 내겐 좀 길었다. 한 문장 안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관점과 그에 반박하는 관점이 대조를 이루는 것이 많았다. 그러니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자칫 서로 다른 2개의 주장을 섞어버릴 우려가 있다. 저자가 먼저 양족을 비교 분석하여 어느 한쪽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서로 분리된 문장을 쓰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책 읽는 데 어휘가 막혀서 읽는 속도가 나지 않았다. 코스모폴리탄이 아닌 나는 수많은 사건들과 유럽의 이름과 지명들 속에서 자주 헤맸다. 개정판이 나온다면 나처럼 작가와는 상황이 다른 사람이 읽는 것을 감안하여 번역할 때에 고유명사를 그대로 옮긴 독일식 지명을 그대로 그냥 옮기는 ‘○○플라츠’라는 표현보다는 ‘○○광장’이라고 해주면 좋겠다.

4. 끝으로
10대부터 현재까지 공산주의자와 역사학자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한 의심없는 사람을 살아온 그의 생을 나타내는 주는 이야기로 다시 생각해 본다.

‘두 번째 길은 위험한 데 늘 깨어 있어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지옥의 한복판에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고 알아보고 그것을 이어질 수 있도록 숨통을 터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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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3.12 10:31:30 *.145.83.153
이것이 겉의 가식을 벗어버린 정화의 참 모습이다.
정말 어른스럽고 혁명가의 깊은 속살이 보인다. 지루하다 못해 구역질나는 장르를 다 읽고 사고하였구나, 아마 연구원 과제가 아니였으면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자네의 글이 달라 질 것이다. 단번에 칠부능선을 올라갔으니 구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려야 겠구나. 대학에서도 이렇게 열심히 지성적으로 공부하지 못했을 거야.

연구원 시험이 끝난후의 정화의 글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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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3.12 17:11:12 *.72.153.12
그러게요. 연구원 시험이 아니었으면 이 책을 어떻게 읽었나 싶습니다.
평소엔 하기에 좀 귀찮거나 어려운 일 할때 '필요하면 해야죠.'라고 했었는데, 막상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을 하려고 보니까 어떤 계기라던가 뒤로 물러서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이번에는 시험이 그런 장치가 되어주고 있어요.

글을 짧게 쓸데는 어떻게 꾸며서 저를 감추거나 하기도 하겠는데, 방대한 책속에서 제게 와 닿는 문구를 찾거나 긴 글을 써야 할 때는 역시 다른 사람처럼 쓰는 것이 아닌 저로 돌아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게 제 진짜 모습인지는 또렷히 보지는 못하지만, 조금씩 더 또렷해지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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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12 23:45:01 *.140.145.63
일단 기선제압용으로 결정적 오타 하나 지적. 주요저서 소개에서
극단의 시대』소년->소련으로 정정했으면 좋겠구요..^^

자신안으로 들어온 글귀가 가장 길었던거 같네요. 오윤님과 언뜻
비슷한 형식이 보이기도 했지만 정화님의 시선은 연상되는 자신의
이야기도 있지만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동시에 담겨
져 있기도 하네요..

마지막에 인용한 대목은 부정적인 뉘앙스가 물씬 풍겨서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한번쯤 마음에 새겨둘 필요도 있어 보이네요..

성의있고 성실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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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3.13 00:24:27 *.72.153.12
이기찬님 답글 감사합니다.
(오타가 엄청 많네요. 리뷰를 보는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인용글 써놓고 보니 20쪽이더라구요. 너무한다 싶어 엄선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13쪽 이더라구요.읽다보니 홉스봄 아저씨가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밑줄 긋고 싶은 말도 많았지 싶네요.

저는 세상이 지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저자가 살아온 삶이 순탄하다면 순탄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보면 그럴수도 있고 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자가 험난해도 쉬운 선택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고 싶어해서...
저도 물론 제자신과 세상을 더 좋게 바꾸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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