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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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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4일 11시 20분 등록
<미완의 시대, Interesting Times>(2007)

(1) 저자에 대하여

노래방이 대 히트를 치며 음주 문화의 한자리를 꿰차고 나니(요즘은 그나마 시들해졌지만) 사람들의 노래 가사 암기 능력은 퇴화되어 버렸다. 굳이 외울라치면 못할 것도 없는데 하염없이 노래를 들어도 무반주로 노래 한가락 뽑을라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다. 통기타를 튕기며 사랑을 고백하는 낭만도 사라졌으니 애들에게 신세대 아빠로 보이고 싶은 욕심만 잘 참는다면 그저 화면을 보고 박자만 챙기는 것으로 족하다. 얼마 전 모 통신회사 광고에서 '핸드폰에서 주소록을 없애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들의 번호 정도는 외울 수 있도록…'하는 광고가 사람들의 가슴을 세차게 후려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척' 들어 맞는다. 통하겠다는 마음이 부족하니 자꾸 겉으로만 흐른다.

'관점'의 부재는 '방향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매력적인 표지 디자인과 제목, 목차와 서평 등이 책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일단 선택을 하고 난 후에는 이러한 것들에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책에서 정보 습득 이상을 원한다면 작자의 의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이러한 사전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때로 유용하다. 특히 어떤 필요나 요청에 의해서 이미 책이 선택된 경우라면 사전 정보는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역할을 하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읽는 나만의 '관점'이 필요하다. 피아노를 치며 청혼을 하겠다고 마음 먹는 순간 노래 가사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스며든다.

'미완의 시대'라는 첫 번째 과제를 확인하고 서점으로 나섰다가 책을 찾고 보니 그 두께에 질리고 주제에 당황스럽다. 서점 한가운데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 싶은 마음을 겨우 달래고 보니, 그제서야 3기 연구원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방법을 찾고 계신다던 선생님의 글이 떠오른다. 역사가의 자서전이라니, 그것도 공산주의 역사가라니… 중도에 포기할만한 사람은 미리 포기하라는 의미인가?

그러나 책을 읽기 시작하자 이런 혐의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인 무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관점'이 의외의 힌트로 작용했다. 그가 온몸으로 살아온 20세기의 사실과 사건 그리고 인물들에게서 눈을 조금 돌리자 에릭 홈스봄 그 자신의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믿었던 신념에 젊음을 걸었던 공산주의자였고 평생 원하는 것을 연구하고 쓰고 가르치는 일을 했던 행복한 학자였다, 또한 역사 책을 쓰는 동시에 재즈에 심취했던 평론가였으며 자연을 사랑하고 아이들과의 따뜻한 추억을 가슴에 간직한 아버지였다.

역설이라면 역설이었지만 예전의 신념을 그래도 쉽게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어렵사리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냉전 시대에 서방 어디에서나 기승을 떨치던 반공주의였다. (p. 298)

쉽게 포기하지 않는 뚝심을 가졌지만 평생을 지켜온 신념의 패배를 인정할 줄 아는 페어플레이어(Fair player)이기도 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자신의 이야기가 젊은 역사가에게 그리고 어두운 전망을 가진 미래에 빛이 되기를 바라는 가슴 따뜻한 박애주의자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성배가 아니라 성배를 찾아 나서는 것이라는 아서 왕의 말은 옳지 않은가? "성배를 포기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p. 254)

아~ 이 솔직하고 귀여운 양반 같으니라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 자서전을 집필한 노 역사학자는 여유가 있고 유머가 넘치며 깜짝 놀랄 만큼 솔직하다. 중요한 것은 성배가 아니라 성배를 찾아 나서는 것이라는 그의 한마디는 그가 평생을 추구한 것에 대한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 보는 단초가 된다.

너무 늦게 출발을 했고 오랜 세월 동안 발목이 묶여 있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나는 남들 같으면 내리막길을 미루기 위해 골몰할 나이에 아직도 이루어놓아야 할 일이 많았다. (p. 378)

'아직 늦은 것이 아니구나. 혹 늦었더라도 그래서 가야 할 길이 있는 거구나.'

책을 읽는 내내 구본형 선생님이 에릭 홉스봄의 글을 빌어 말씀하시는 것만 같아 즐거웠다. 그리고 그보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즐거워 하셨을 선생님의 경험을 일부나마 공유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관점'은 '방향성'을 깨운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을 알고 싶다는 설렘은 그의 다른 저서들로 나를 이끈다.


(2) 내 마음에 들어 온 글귀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얽혀 있는 문제에 대해서 자서전을 쓰는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으면 그것 때문에 억울하게 상처를 받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는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p. 10)

나의 어린 시절이 정치적 의식화의 과정처럼 보이는 것은 지나고 나서 보니까 그렇게 보일 뿐이다. (p. 38)

학교 역사를 자꾸만 연대와 군주와 전쟁의 기계적 나열로 축소시키는 것은 정치적 연속성을 고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다. (p. 48)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는 겨레의 휘장을 달지도 않고 나라의 깃발을 휘날리지도 않는다. … (p. 54)

정원에서 아빠가 불같이 화를 내던 모습. (p. 60)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이다. (p. 103)

"연주 실력보다 사람이 되어먹었더라."는 독일의 속담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p. 114)

에릭 존 어니스트 홉스바움. 호리호리하고 젓가락 같고 구부정하고 못생기고 머리는 금발인 열여덟 살 반 먹은 녀석. 이해력이 빠르고 피상적이지만 일반 상식이 대단히 많고 이론적이고 보편적인 영역에서 남다른 아이디어도 풍부하다. 거드름을 피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데 문제는 본인도 이것을 믿기 때문에 그만큼 더 위험하고 또 때로는 먹혀들 때가 있다는 것. 사랑에 빠지는 적은 없고 욕정을 승화하는 데 상당한 재주가 있어 보이는데 자주 그런 건 아니지만 자연이나 예술을 감상하면서 맛보는 희열로 표현되기도 함. 도덕심은 전혀 없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쳤음. 어떤 사람은 그를 몹시 역겨워하고 어떤 사람은 좋아하지만 대다수는 그냥 우습게 봄. 혁명가가 되고 싶어하지만 아직까지는 신통한 지도력을 보이지 못했음. 작가가 되고 싶어하지만 자료를 주무를 수 있는 역량과 끈기가 모자람. 태산을 옮겼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만 하지 신념은 없음. 허영과 자만에 빠져 있음. 자연을 정말로 사랑함. 독일어를 까먹고 있음. (p. 168~169)

내가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모든 공산주의자의 유일한 공통점은 뛰어난 머리였다. (p. 198)

내 친구 안토이노 폴리토는 "20세기에 가장 위력을 떨친 악마의 하나는 정치적 열정"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처럼 20세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은 없다. 그리고 그런 열정의 핵심을 꿰찬 것이 공산주의였다. (p. 215)

권력은 어김없이 개인을 부패시킨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부패한 권력은 떨치기 어려운 유혹인 것도 사실이다. (p. 218)

전면전에 뛰어든 사람은 자기 희생에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희생에도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권력을 잡지도 않았고 당장 잡을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우리는 교도관이 아니라 죄수가 되리라 생각했다. (p. 235)

1956년 소련이 동유럽을 침공했는데도 내가 당을 떠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공산주의 운동이 그런 남녀를 키워냈기 때문이었다. (p. 237)

중요한 것은 성배가 아니라 성배를 찾아 나서는 것이라는 아서 왕의 말은 옳지 않은가? "성배를 포기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p. 254)

처칠은 영국이 두 손을 든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제560야전공병대의 부대원 같은 평범한 영국 서민의 생각을 대변했다. (좀 더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상당수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p. 270)

그 곳은 재앙의 자리였다. 그렇지만 그 피의 자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여전히 죽음이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그곳은 비극의 자리라기보다는 희망의 자리였다. (중간 생략) 이렇게 무신경해진 까닭은 육신이 잘려 나갔다고 해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하 생략) (p. 284~285)

그렇지만 나치의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를 그대로 뒤집어서 우리가 반독일주의로 치닫지 않은 것은 우리 나름대로 현실 인식과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도 우리는(적어도 나만큼은) 국가사회주의를 탓했지 독일인을 욕하지는 않았다. (p. 296)

역설이라면 역설이었지만 예전의 신념을 그래도 쉽게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어렵사리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냉전 시대에 서방 어디에서나 기승을 떨치던 반공주의였다. (p. 298)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천재라서 노벨상을 탈 만큼 한 가지 주제를 오래 파고 들지 못했다. 하지만 버널에게 영감을 받은 노벨상 수상자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p. 300)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두 가지에 몰입한다. 너무나 순수한 몰입이라서 쌀쌀맞은 사람은 어이없어하고 포근한 사람은 탄복을 금치 못한다. 하나는 우정이요. 하나는 지적 정직함이다." (p. 312)

글을 못 읽는 사람이 태반인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불과 한 세대 만에 박식한 지식인으로 바뀐 것이다. (p. 329)

그가 발표한 모든 글은 무한히 방대하고 모든 주제를 어우르긴 했지만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었던 대작의 일부분이었다. 래피얼은 너무나 많은 과거(그래봐야 영국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에서 경이로움을 느껴서 그 중에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를 몰랐다. (p. 348)

1980년대 초반에 반핵 운동을 하느라 글쓰기를 접었다고 해서 학자를 나무랄 수는 없겠지만 알튀세 때문에 쏟아 부은 시간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 당시 나는 톰슨에게 앞으로 10년만 지나면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못 줄 사상가의 생각을 돌려놓기 위해 역사에 하나의 획을 긍르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연구 활동을 포기하는 것은 범죄 행위나 다를 바 없다고 몰아세웠다. (p. 353)

언론에 찌든 사회에서 한 사람의 개성을 포장하는 가장 빠른 길은 한두 가지의 튀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나의 튀는 점은 재즈를 사랑하는 교수라는 것과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공산당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p. 356)

하지만 나는 냉전의 한복판에서 그런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공산주의자로 성공("성공"이 무엇을 뜻하든 간에)함으로써 자신에게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자부심이 잘났다는 것은 아니지만 못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았다. (p. 357)

눈에 확 들어오는 사건도 없었고 극적인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별 볼일 없는 고개를 넘어서 나서야 비로소 역사에서건 삶에서건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을 체험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들 때가 있다. (p. 359)

이 시기가 되면 여행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자서전에 걸맞은 일은 저자의 머리나 다른 사람들의 머리에 들어 있는 내용 말고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중간 생략) 명망 높은 학자의 삶은 드라마로 가득 찬 것이 아니다. 설령 드라마라 하더라도 그것은 관직에 몸을 담았던 사람의 삶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직접 뛰어 들었던 사람들에게나 흥미를 끌 수 있을 내용이다. (p. 363)

역사가라는 사람도 사후 약방문을 쓰는 데만 능할 뿐이다. (p. 364)

나는 책을 쓰면서 재즈의 세계를 좀 더 체계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p. 370)

너무 늦게 출발을 했고 오랜 세월 동안 발목이 묶여 있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나는 남들 같으면 내리막길을 미루기 위해 골몰할 나이에 아직도 이루어놓아야 할 일이 많았다. (p. 378)

어쩌면 너무 지내기가 고달퍼서 웨일스에 자꾸 끌렸는지도 모른다. (중간 생략) 두 꼬맹이를 데리고 돌투성이의 눈 덮인 산길을 걷다가 산자락의 동굴에서 잠시 숨을 돌리면서 아이들한테 초콜릿을 주던 기억, (이하 생략) (p. 395)

지배자는 노예와 빈민의 성적 자유를 부추김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p. 414)

서양을 정말로 바꾼 것은 1960년대의 문화 혁명이었다. 20세기 역사의 분수령이 된 것은 1968년이 아니라 비록 정치적으로는 이렇다 할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프랑스 의류 산업에서 처음으로 여성용 바지가 치마보다 더 많이 생산되고 가톨릭 사제 지원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한 1965년인지도 모른다. (p. 431)

돌이켜보면 마르크스주의자로 죽 살아왔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답지 않게 1956년 이후로 내가 직접적으로 정치 활동을 거의 안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도 문득 놀라곤 한다. (p. 433)

신자유주의를 비판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거의 사반세기 동안 노벨 경제학상이라는 엄청난 후광으로 화려하게 꾸몄지만 실은 세계 자본주의와 날이 갈수록 죽이 잘 맞는 경제학이라는 "과학"의 권위에 편승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이다. (p. 454)

"자본주의와 부자는 당분간은 겁먹을 일이 없다."고 나는 1990년에 썼다.

이 나라처럼 불의와 불평등 속에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데서 부자들이 자기들 말고 남한테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뭐란 말인가? (중간 생략) 아무리 나빴다고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사회주의권이 사라지고 나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 10년 남짓 지난 지금 두려움이 다시 되살아났는지도 모른다. 부자와 부자한테 하도 설득 당하여 부자가 없으면 망한다고 믿는 정부는 빈자에게 안겨줘야 하는 것은 경멸이 아니라 양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p. 458~456)

내 때에도 역사가는 괜찮은 직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즐거웠다. 지적 성숙이라는 주제로 담소를 나누면서 지금은 작고했지만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가 보기에 지식인의 삶은 판에 박힌 강단보다는 예술가의 삶에 더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 지적 활동의 형식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안겨준 활동은 사회학자라는 직업이었습니다.

사회학자 자리에 "역사가"만 집어넣으면 나는 이 말에 백 번 동의한다. (p. 483)

가르치기와 글쓰기의 핵은 모두 소통이다. 두 가지를 모두 즐기는 사람은 복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절해고도에서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누가 읽을지도 모를 글을 책처럼 생긴 병에 담아서 드넓은 바다로 띄워 보내야 하는 막막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p. 488)

나는 어릴 때부터 꿈꾸던 삶을 살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삶이 풀려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부질없고 어리석기조차 하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직도 이렇게 속삭이는 작은 유령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이런 세상에서 마음 편히 지내서는 안 되지." 젊었을 때 내가 그 글을 열심히 읽었던 사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p. 508)

나와 말이 통한 것은 마네의 [올랭피아]였다. (중간 생략) 하지만 이 대작과의 첫 만남을 내가 도저히 잊지 못하는 까닭은 관능미가 아니라 이 뛰어난 화가가 일시적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진실"을 겨누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속된 말로 "까놓고 말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p. 512)

이재에 밝았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언어가 세계를 정복하면서 교양 있는 볼테르의 언어가 패배한 데서 프랑스인이 느끼는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나는 공감한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가 바뀐 데 그치지 않고 문화가 바뀐 것을 뜻한다. (p. 545)

항상 눈을 뜨고 세상을 살피려고 했던 역사가의 입장에서는, 더구나 사회사가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스치듯 지나가면서 본 첫 모습도 그야말로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중간 생략) 역사적으로 너무나 친숙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 땅을 파고들지 않고는 배길 재간이 없었다. (p. 601)

뛰어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자존심과 자긍심을 해쳐도 괜찮을 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인지를 한 사람이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p. 628)

일단 선례가 생기면 관료 체제는 요령을 안다. 지난번과 똑같이 하면 되는 것이다. (p. 631)

미국은 사는 곳과 일자리와 배우자를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도 심하게 바꾸는 남녀가 살아 가는 나라다. (p. 649)

소리와 종이에 둘러싸여 침대에 누운 몸으로 나는 2002년의 세계에 어느 때보다도 역사가가, 특히 의심 많은 역사가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늙은 역사가의 평생에 걸친 편력을 읽으면 젊은 역사가가 21세기의 어두운 전망에 그에 합당한 비관주의만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더 투명한 눈, 과거를 기억하는 역사 감각, 현재의 열풍과 장사판에서 거리를 두는 능력을 가지고 맞서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p. 663)

시대착오와 지방색 이 둘은 참으로 무서운 역사의 죄악이다. 둘 다 다른 곳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무지에서 생겨난다. (p. 667)

파스칼이 말한 "머리가 모르는 가슴의 사연",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인연이 깊거나 자기가 선택한 집단한테 느끼는 정서적 일체감에 내가 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체감은 다른 누구인가에 맞서서 정의되는 것이므로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와는 이질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것은 참극으로 이어진다. (p. 669)

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p. 672)

(3) 내가 저자라면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얽혀 있는 문제에 대해서 자서전을 쓰는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으면 그것 때문에 억울하게 상처를 받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는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p. 10)

그래서였을까? 홉스봄은 '머리가 모르는 가슴의 사연'을 늘어놓는 대신, 대단히 균형 잡힌 모습으로 시종일관 객관성을 잃지 않는다. 그의 이런 균형 감각은 책에 진실성을 더하고 3자의 시선으로 20세기를 흐르는 사건들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사건들은 그가 기록했던 자료를 바탕으로 놀랍도록 자세하게 되살아난다. 중간중간 스스로 기록한 것을 참조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놀라운 기억력에 좌절했을 지도 모른다. 그가 살아온 삶의 반도 채 살지 못한 내가 자서전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써야 한다면 무엇으로 시작해야 할까? 기록을 남기는 것의 위력에 새삼 감탄할 수 밖에 없다.

한편으론 너무 많은 내용을 나열식으로 기술하다 보니 그 글을 따라가는 독자로서는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더군다나, 그래야 했었다는 '사회적 당위성'에 치중하다 보니 그렇게 선택한 '주관적 의도성'은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아지고 말았다. 물론 이 책이 나 같은 근대 유럽역사에 무지한 '평범한 서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내 아쉬움은 억지스러운 불만이 되겠지만 저자가 마지막에 이야기한대로 젊은 역사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랬다면 조금만 더 친절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지나치게 여러 번 언급되는 섹스, 동성애 그리고 혼외정사에 대한 다소 과장된 인용과 비유를 보며 그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일부나마 추측하게 되는 것은 재미는 있을지언정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국내 모 교수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 조금만 이야기하자면, 개인적으로 괄호를 사용하여 설명을 덧붙일 경우 글이 산만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삶 전체에서 묻어나는 진정성은 괄호에 담긴 솔직한 첨언들을 통해 글에 생명력을 더했다.(물론 내가 마구잡이로 첨부하는 괄호 속의 추가 설명들은 글을 산만하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자주 발견되는, 문법적인 것을 포함한 번역상의 오류들이다. '똥값', '먹물', '깠다' 등의 통쾌한 단어 선별도 오자와 잘못된 연도 표시 앞에서는 고개를 숙인다.

개인적으로 '미완의 시대'라는 제목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애초에 많이 팔리는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제목과 상관없이 볼 사람은 볼 책이었을 텐데 책의 표현대로 '먹물'스러운 제목을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흥미로운 시간들(interesting times)'이란 제목에 담겨 있는 홉스봄의 유머와 재치가 조금은 빛 바랜 느낌이다. '미완의 시대'라는 제목을 보며 '사랑은 미완성'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면 너무 억지스러운가? 20세기를 통째로 살아온 세계적 역사학자의 '흥미로운 시간들', 어떻게 이보다 더 멋질 수 있을까?

IP *.227.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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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12 23:53:52 *.140.145.63
신종윤님 리뷰의 도입부가 꽤나 인상적이군요. '관점'의 부재는 '방향성'의 상실을 의미한다.에 공감 한표 일단 던지구요. 구선생님의 향취
를 이 책에서 느끼셨다는 대목에서 오옷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내제목에 대한 딴지를 누군가는 한번 걸어줄 것 같은 기대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님께서 결국 해주셨군요.. 저만의 헛된 기대로 끝나게해
주지 않으셔서 감사 드립니다.. 오프에서 뵐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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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3.13 00:40:22 *.72.153.12
저도 제목이 왜 '미완의 시대'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자의 아직 끝나지 않은 생과 미국의 이야기까지 썼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변한다. 두고 본다는 의도를 반영해서 그런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나름대로 생각했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혁명'을 '세상을 바꿀 것'을 기대하는 그의 마음을 반영해 주지 책제목이 될 것 같고.

블로그 검색 중에, interesting times의 의미가 '흥미로운 시대'는 중국에서는 '위험한 시대'라는 의미라는 것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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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윤
2007.03.19 14:14:46 *.227.22.4
제가 너무 굳어 있나봅니다. 기분좋게 달아주신 댓글에 감사하게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는데... 꼭 숙제하듯이 쓰고 지우기를 수도 없이 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했네요..

기찬님 감사합니다. 꼭 오프에서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구원으로 뵙게 되면 더 좋을 것 같고 아니더라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정화님도 감사합니다. 사실 제목에 대해서는 딴지를 걸면서도 나름 멋지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주말 내내 방에 들어앉아 숙제 하느라 몰랐는데 날이 너무 좋네요. 근무 시간 중간에 잠시 땡땡이라도 치고 한바퀴 돌고와야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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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7 [01] 미완의 시대 - 에릭 홉스봄 [6] 옹박 2007.03.12 2293
4346 에릭 홉스봄의 '미완의 시대'를 읽고 [4] 김도윤 2007.03.12 2494
4345 에릭 홉스봄 &lt;&lt;미완의 시대&gt;&gt; [2] 김지혜 2007.03.12 2082
4344 &lt;호모 코레아니쿠스&gt; 를 읽고 [1] 정재엽 2007.03.12 2176
4343 에릭홉스봄의 [1] 최정희 2007.03.12 1949
4342 『미완의 시대』를 읽고 [1] 이희석 2007.03.12 2191
4341 미완으로 마칠뻔한 '미완의 시대를 읽고' [1] 정양수 2007.03.12 2038
4340 미완의 시대 - 자서전 속의 역사 [4] 김민선 2007.03.12 1973
4339 미완의 시대 [5] [1] 정선이 2007.03.13 2155
4338 미완의 시대: 늘 깨어서 가야할 길 [4] 한정화 2007.03.14 1872
4337 사람에게서 구하라 / 구본형 하루 2007.03.14 2124
» 미완의 시대, '흥미로운'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3] 신종윤 2007.03.14 1951
4335 「대한민국 개발자 희망보고서」 [2] 신재동 2007.03.15 1881
4334 [코리아니티] 달인이 찾은 Corea [1] 송창용 2007.03.16 2295
4333 (002)코리아니티 경영 [2] 최영훈 2007.03.16 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