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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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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3일 20시 0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이 책은 작가 자신이 말하듯 20세기 영국 지식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으며 평생을 공산주의자로 좀 특이하게 살았던 “마르크스주의자 역사가라 불리는 홉스봄”의 자서전으로 역사가의 관점에서 역사의 흐름에 대하여 그 역사가 세기를 이어오는 동안에 선택한 역사적 변화와 변천 과정을 그리는 동시에, 바로 그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개인으로서 접하거나 목격한 부분과 선택한 삶을 통하여, 한 개인이 역사가가 되고 역사에 일부분으로 참여하고 관찰한 무려 한 세기에 가까운 변화를, 객관적 시각과 보편지향의 관점에서 역사의 흐름으로 조명하고 고찰하며 역사의 이해를 돕고자 담담하게 집필해 나갔다.

이시대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 관찰자”이며 역사학자로서의 개인적 삶이 기도한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세기를 살아왔다고 표현하는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1917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으로 1870년대에 영국으로 이주했다. 2세때 가족 모두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하고 1931년에 다시 베를린으로 이주 하였으나 히틀러(Adolf Hitler)가 집권하자 1933년 다시 런던으로 갔다.

케임브리지의 킴스칼리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으며 1982년까지 런던대학교의 버백칼리지에서 사회경제사 교수를 지냈다. 고등학교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져 대학 때 영국 공산당에 입당하고 1946년부터 1956년까지 ‘공산당 역사가들의 모임’에서 활동하였으며, 공산주의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역사연구에서도 이념을 앞세우지 않은 관계로 뒤에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마르크스주의 저술가가 되었다.

그의 초기 저작들은 주로 19세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17,8세기 및 20세기에 관해서도 저술해 왔으며 정치, 역사서술, 사회이론뿐 아니라 재즈 비평가로 활동할 만큼 문화비평과 예술에 많은 관심과 열정을 지닌 작가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으로 19세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형성과 붕괴를 다루었던 역사에 관한 3부작 [혁명의 시대 1962], [자본의 시대 1975], [제국의 시대 1987]가 있으며 그 밖에 [노동하는 인간], [산업과 제국], [원초적 반란자들 1959], [극단의 시대 1994], [예술의 힘 1995], [노동의 세기, 실패한 프로젝트], [노동의 전환점 1948] 등이 있다.

왜 하필이면 나 같은 사람이 자서전을 써야 하는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왜 나하고 별다른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 또는 서점에서 책 표지를 보기 전까지는 나라는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을 사람들이, 이런 책을 읽어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에릭 홉스봄은 이 책의 서문에서 우리에게 피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가로서의 책임과 역사의 현장에서의 한 개인으로서의 삶과 가치관을 돌아보게 함과 동시에 역사의 흐름과 변천 속에서 개인이 선택하고 모색해 나아갈 바를 치열하게 찾고, 그것을 한편으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응시해 개인과 사회가 분리된 이원화된 이념이나 사상이 아닌,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진정하게 녹아들고 스미는 삶이 될 수 있는 적극적 자기인식을 통해 끊임없이 갈구하고 만들어 나가기를 멈추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졌다. 처음의 짧은 프롤로그에 이어 개인사와 정치사를 담은 1장에서 16장까지는 대체로 연대순으로 펼쳐지면서 192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를 다루고 17장과 18장은 역사가라는 전문직을 가지고 살았던 저자의 경력의 기록이 나타나있다.
19장부터 22장까지는(작가가 태어난 중유럽과 잉글랜드 말고도)인연이 깊었던 나라와 지역, 이를테면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라틴아메리카, 제3세계 여러 나라와 미국에 관한 회상이다.

2]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1. 프롤로그

(소설가에게도 그렇지만 역사가에게도 모든 사람의 사생활은 원료와도 같은 것이어서 나는 ⌈극단의 시대⌋의 도입부에서 이분들이 만났던 정황을 써먹었다.) p20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조이터 빌라는 홉스바움 (알렉산드리아의 영국 공사관 서기가 잘못 써서 그렇지 원래는 ‘홉스봄(Hobsbawm)'이 아니라 '홉스바움(Hobsbaum)'이었다. p22

2. 빈과 유대인 소년

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학교와 가족이라는 두 개의 관계망 중에서 훨씬 항구적인 쪽을 꼽으라면 단연코 가족이다. p39

3. 힘들었던 시절

넋두리는 위안이 되지 못했다.
2년 반 뒤에 어머니도 서른여섯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달 동안 한겨울의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않고 자책감에 못 이겨 아버지의 무덤을 틈만 나면 찾아갔던 것이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폐병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괴로운 몇 달 동안 어머니가 조금씩 자제력을 잃고 허물어진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정작 놀라운 것은 어머니가 초인적 노력을 발휘하여 그 어려운 사정을 자식들에게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젊은 부부가 든든한 영국 돈을 적당히 가지고 이집트에서 살다가 물가가 막 급등하기 시작하던 오스트리아로 옮겨 온 이후로 사정은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다. p58

어머니가 글을 써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진지한 각오로 글 쓰는 시간을 점점 늘려 나갔던 것도 생활고 탓이 아닌가 싶다. p59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고 아주 힘든 일이 아니고 그저 평범한 직장에 다녔다면, 그리고 그 직장이 운동과 음악에 대한 약간의 소양, 구김살 없는 성격을 알아주는 곳이었다면, 아버지는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p63

어머니가 몸져눕자 우리의 처지도 달라졌다. 열두 살 먹은 남자아이와 아홉 살 먹은 여자아이를 중병에 걸린 여자가 기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천만 다행으로 1929년 봄부터 시드니 삼촌의 형편이, 1920년대 내내 하도 어렵게 살아서 홉스바움 집안과 그륀 집안의 눈높이가 낮아진 탓도 있었겠지만, 그런대로 폈다. 베를린의 유니버설 영화사에 취직한 것이다. 비록 안정된 직장은 아니었지만 앞날을 기약할 수 있었고 어쨌든 월급도 나왔다. 덕분에 시드니 삼촌은 예술 분야에서 창조적인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평생의 꿈을 이룰 수 있었고 고아나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된 조카들을 거둘 만한 여력이 생겼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 것은 유니버설 영화사를 세우고 할리우드의 스타 시스템을 만들어낸 칼 렘리인 셈이었다. 우리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여동생 낸시는 바로 베를린으로 갔고 나는 1931년 7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빈에서 지냈다. p68

영국은 좀 멋은 없을지 몰라도 강하고 안정되고 변덕스럽지 않은 나라였다. 적어도 모두 잉글랜드 남자와 결혼한 그륀 집안의 딸들이 보기에는 그랬다. 결혼 문제는 접어두고라도 어머니는 워낙에 영국을 좋아했다. ... 집에서는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하고도 영어를 써야 한다고 고집한 것도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 영어를 바로잡아 주었고 집안에서 대화를 나눌 때도 될 수 있으면 어려운 단어를 많이 써서 내 어휘력을 늘려주려고 애썼다. 나중에 내가 인도 총독부의 관리가 되거나 아니면 내가 워낙 새에 관심이 많으니까 인도 산림청에라도 들어가서 어머니가 좋아하던 키플링의⌈정글 북⌋같은 세계로 성큼 다가서는 것을 보는 것이 어머니의 소망이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이것은 머나먼 미래의 꿈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를 영국으로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미미 큰이모가 랭커셔 지방에서 하숙집을 차리려고 하는데 나도 이참에 보내라고 연락이 온 것이다. 부근에 버크데일 골프장이 있는 사우스포트의 변두리 동네였다. 1929년에 한 학년을 마치고 나는 그곳으로 갔다. 영국 땅은 처음 밟아보았다. 나 혼자 여행을 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큰이모는 내가 도착하니까 대뜸 내가 가지고 간 돈부터 챙겼다. 그때도 이모는 워낙 어렵게 살고 있었다.) p69

내가 영국에서 살고 싶어 했는지, 영국에서 산다는 생각을 어떻게 받아드렸는지, 지금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 돈을 내는 하숙생들 사이에서 살아가자니 고달팠다.
런던으로 기차를 타고 가면서 누르스름한 잿빛의 벽돌집이 다닥다닥 붙은 길이 끝없이 이어지던 기억, 랭커셔 사람들의 모음 발음이 우리와는 너무나 달랐던 기억 말고도 나는 영국에 와서 중요한 발견을 크게 두 가지 했다. 첫째는 부모가 노동자로 살아가는 계층의 남자아이들이 열심히 읽는〈위저드〉,〈어드벤처〉같은 주간지가 영국의 친척들이 빈으로 가끔 보내주던 점잖은 읽을거리와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런 주간지를 게걸스럽게 읽어댔다. ,,..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촘촘한 세로 칸에 회색 글자가 빽빽이 들어찬 환상 모험 소설과 공상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진정한 영국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환상 소설은 잠시나마 내 또래의 다른 영국 소년들과 똑같은 주파수로 나를 공명시켰다. p70

둘째는 보이스카우트였다. 그 당시 내가 살던 사우스포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열린 세계 잼버리 대회에 갔다가 베이든 파월이라는 사람이 쓴⌈소년 스카우트 교본⌋이라는 책자를 받아가지고 오면서부터 나는 거기에 푹 빠져서 언젠가는 반드시 가입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이듬해 빈에서 보이스카우트에 들어갔다. 당시 빈에는 보이스카우트 말고도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주도하던 파란 제복의 “붉은 매”라는 소년단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붉은 매는 캠프파이어는 훌륭하지만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드리기에는 내가 아직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혁명의 열기와는 거리가 멀었고 주로 빈의 중산층 유대인 자녀로 이루어진 보이스카우트 행진에 끼면서 열네 살의 나이로 처음 공동체 생활을 맛보았다. .... 나는 야외 활동이나 단체 생활에서 특출난 재능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아주 열심히 했다. 심지어는 반 친구들까지 대원으로 끌어들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도 같은 보이스카우트 대원이었다. .... 독일에 베이든 파월 같은 스카우트 조직이 있었다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독일에 갔을 때 아마 거기 들어갔을 테지만 당시에는 그런 조직이 없었다. p71

마르크스주의에 대적할 만한 경쟁자가 없었던 것이다. p71

4. 베르린: 바이마르의 종식

나는 세계 경제가 폭삭 무너진 1931년 늦여름 베를린으로 왔다. 내가 온 지 몇 주 만에 19세기의 중심축이었던 영국이 금본위제와 자유무역을 포기했다. 미국이 대출금을 회수하면서 중유럽의 파산은 시간문제였는데 이미 초여름에 굴지의 은행 두 곳이 문을 닫았다. 경제난은 뿌리를 잃은 10대 소년에게는 직접적 영향을 못 미쳤지만 이미 가파르게 치솟던 실업은 (1932년에 독일 노동자의 실업률은 44퍼센트였다.) 우리 집에도 촉수를 뻗었다. 전에 시드니 삼촌하고 같이 살았고 아직도 가끔 들르던 사촌형 오토가 직장을 잃더니 아예 공산주의자로 나섰다. 사촌형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1932년에 독일공산당 당원의 85퍼센트가 실업자였다. p89

운명은 그처럼 무심코 내린 집안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1931년에 파리로 갔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p95

날이 갈수록 베를린은 전망이 없어 보였다. 히틀러한테 당한 것이 아니라 ‘대공황’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5. 베를린: 갈색과 빨간색

결국 그는 없는 사실을 지어냈다기보다는 윤색을 하거나 소망을 현실로 둔갑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p115

주점 안에서 동지들이 포도주 잔이나 (독일 같으면)맥주 잔을 높이 쳐들고 건배를 외치는 동안 주점 안에 딸린 골방에서는 식탁에 둘러앉아서 진지한 회의를 가졌다. 물론 골방에서도 술을 시켜다 먹을 수는 있었지만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우리는 제대로 조직을 꾸렸다. p118

독일 러시아의 공산당 조직은 머리글자보다는 코민테른, 콜호즈, 굴라그처럼 음절이 들어간 합성어를 선호하였다. 이런 별칭을 쓰면 왠지 회의에 격조가 있어 보였다. p119

육체적 경험과 맹렬한 격정이 가장 깊이 맞물린 활동은 누가 뭐래도 섹스이겠지만 그 다음 가는 것은 바로 두껍게 달아오른 분위기에서 대중 시위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결국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섹스와는 달리 대중 시위는 집단적 성격을 가지며 적어도 남자의 경우에는 순간으로 끝나는 섹스의 절정과는 달리 대중 시위에서 맛보는 희열은 몇 시간이나 이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섹스와 마찬가지로 시위에 나선 사람은 걷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육체 활동을 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개인은 집단 안에서 일체감을 느끼고 집단과 하나가 된다. p128

선거 운동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도왔겠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한, 다시 말해서 당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나타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움직였다. .... 위험을 감수하는 데서 느끼는 짜릿한 희열도 있었지만 정말로 두려움을 느낄 만큼 위험한 일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1년쯤 지나서 나는 일기장에다가 이때의 경험을 “나를 때리려고 하는 사람 앞에 서서 주먹이 날아오기를 기다릴 때처럼 몸이 오그라들면서도 가볍게 말라붙는 듯한 느낌”이라고 묘사했다. p131

6. 섬나라에서

나는 1935년 케임브리지 대학 장학생 선발 시험을 보기로 결심한 것이 결국 영국에 눌러앉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미미 이모는 영국 남부의 브라이튼이라는 해안 도시에서 버스로 조금만 가면 나오는 한적한 자연 보호 지역 안에서 정말로 마음에 딱 드는 집을 발견하면서 영국에 남기로 결심했다. 이모는 그곳에서 평생의 꿈을 이루었다. 헛간과 광을 개조하여 ‘올드 비엔나 카페’라는 자기만의 성을 만든 것이다. p138

1933년 영국은 명문화되지 않았지만 구속력을 갖고 있었던 규칙과 의식과 발명된 전통이 삶을 이끌어 나갔던 자족의 섬이었다. 그 규칙은 대부분 계급이나 남녀의 역할에 관한 규칙이었지만 왕에 관한 규칙처럼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규칙도 있었다. 극장이나 영화관에서는 공연이나 상연이 끝날 때마다 국가가 연주되었고 관객은 기립을 하고 끝까지 그것을 듣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p151

자유로워지는 데 빠져서는 안 될 조건이 기동성이라고 한다면, 자전거야말로 구텐베르크 이후로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의 가능성을 온전히 구현한 최대의 발명품, 그것도 단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발명품인지 모른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인간의 반사 속도에 맞게 움직이고 자동차처럼 판대기에 둘러싸여 자연의 빛과 공기와 소리와 냄새로부터 격리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자동차가 도로를 가득 메우지 않았던 1930년대에 놀라우리만큼 아름답고 다채로운 풍광을 가진 아담한 크기의 나라를 돌아보는 데 자전거만큼 좋은 이동 수단이 없었다. 자전거, 텐트, 프리머스 버너, 새로 나온 마즈 초콜릿 바를 가지고 사촌 로니 (로니는 그 초콜릿 바를 프랑스식으로 “마흐”라고 발음했다.)와 나는 단아한 아름다움을 가진 남부 잉글랜드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한 번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데 겨울에 북부 웨일스까지 고생고생을 하면서 간 적도 있다. (거의 60년이 지나서 마즈 초콜릿 바를 먹으면서 버텼던 이 긴 자전거 여행의 기억이 이 제품을 손수 만들었고 이제 나이가 여든 줄로 접어들었으며 이 세상에서 제일 규모가 큰 순수 개인 회사의 주인으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살고 있던 포리스트 B. 마즈로부터 이 세상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게 도와달라는 뜻밖의 제안을 받고 되살아났다.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학구적이었던 주변의 한 젊은 여성이 시대에 영합하지 않는 탄탄한 개인 기업의 본보기가 될 만한 회사와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역사가의 색다른 협력을 건의한 모양이었다.) p153
자기 나라이면서도 낯설기만 한 이 나라에 1933년에 첫 발을 내딛은 10대 소년은 어떻게 적응했을까? 어떤 면에서는 나는 가족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한테 가장 좋은 친구였고 또 유일하게 가까운 친구였던 사촌들이 열어놓은 좁은 문과 통로를 통해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에 온 엘리스처럼 영국으로 들어갔다. p154

나는 교외의 소시민과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해리 삼촌이 대변하는, 그리고 삼촌보다 더 왼쪽으로 기울었던 그 아들이 대변하는 노동당도 개량주의로 기운 사회민주주의자가 장악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곤혹스러운 면도 있었다. 독일의 사민당한테 퍼부은 것과 똑 같은 욕을 영국의 노동당한테 할 수는 없었다. 해리 삼촌은 영국 공산당의 지독한 공격에서 당을 악착같이 변호한 열혈 노동당원 이었지만 영국 노동 운동 진영에서 기본적으로 갖고 있던 인식, 곧 표현은 어떻게 하더라도 소비에트 러시아는 결국 노동자들의 나라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대부분의 노동당원과 노동 운동가처럼 삼촌도 공산주의자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그들도 결국은 노동당원과 한 배를 타고 있다고 믿었다. p157

1926년의 총파업을 경험한 나로서는 영국 노동 운동이 보여준 모습은 “(혁명적)프롤레타리아”라는 나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곤혹스럽기도 했다. 그것은 어딘지 낯익은 모습, 곧 1929년에 일어난 위기로 전 세계의 경제와 정치가 격랑에 휩싸였을 때 독일의 노동 운동이 보여주었던 실망스러운 모습이기도 했던 것이다. .... 영국만을 놓고 보자면 세계 혁명은 평소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일기장에다 나는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열일곱 살 소년의 눈에는 마흔도 너무나 먼 미래였다.) 어쩌면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지 모른다고 썼다. 하지만 이 무렵 코민테른도 파시즘과 세계 전쟁에서 먼저 이겨놓지 않으면 혁명은 이루기 어렵다는 사실을 막 깨달아 가고 있었다. p158

7. 케임브리지

20세기 전반기의 잉글랜드 같은 사회에서 한 계급 안에서 살다가 다른 계급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이민을 가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1935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장학생이 되었다는 것은 낯설기만 한 새 나라로 이주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 나라는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어느 나라보다도 낯설었다. 딱 한 가지는 마음에 들었다. 3년 동안은 얼씬도 못하다가 베를린을 떠난 다음부터는 부득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 활동과 토론에 다시 뛰어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고대하던 공산당에 들어가서 정치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케임브리지로 왔다. 알고 보니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대학을 다닌 학생들은 케임브리지 역사상 가장 빨갛고 급진적이었는데 나는 그 한복판에 있었다. 뉴턴, 다윈, 제임스 클럭 맥스웰 같은 쟁쟁한 역대 졸업생을 감안하더라도, 내가 들어갔을 무렵의 케임브리지는 역사상 가장 화려한 업적을 올리고 있었다. p171

나는 시험은 시험대로 잘 보면서도 학보도 열심히 만들었고 사회주의자 클럽과 공산당 활동에도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뿐인가. 친구들과 토론도 자주 하고 어울려 놀기도 하고 캠 강에서 보트도 젓고 연애도 했다.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 일은 없었다. p188

8. 반파시즘과 반전 투쟁

우리가 활기를 잃지 않았던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우리의 적은 오직 하나, 그러니까 파시즘과 영국 정부처럼 파시즘을 막으려 하지 않는 세력이었다. 둘째, 우리는 스페인이라는 전쟁터에서 실제로 싸움을 하고 있었다. 넘치는 카리스마로 우리한테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존 콘포드는 스물한 살을 맞은 생일날 코르도바에서 전사했다. .... 학생은 될 수 있으면 국제여단의 전투병으로 뽑지 말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학생 공산당원은 무엇보다도 좋은 성적을 따서 나중에 쓸모 있는 인재가 되는 것이 당을 돕는 길이라는 논리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낡은 세상이 무너지고 나서 펼쳐질 새로운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안다고 생각했다. 그 점에서는 다른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판단 착오를 한 셈이었다.
한 때는 좌파의 영웅이었던 시인 오든은 자신은 미망에 젖어 있었다면서 1930년대를 “저열하고 표리부동한 10년”이라고 깎아내렸지만 우리한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살았던 1930년대는 올바른 가치를 내걸고 악의 무리와 정면 대결을 벌였던 시절이다. 우리는 그것을 즐겼다. 그리고 케임브리지의 급진파 학생들 대부분이 그런 일에 시간을 많이 투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p202
우리도 이런 노래를 불렀다.

사랑일랑 집어치우자
그리고 말하자
우리의 애정을 오직
노동자에게 바치겠다고
사랑일랑 집어치우자
혁명이 올 때까지
그때까지는 사랑은
반혁명이다. p203

9. 공산주의자가 되다

전후 이탈리아가 특히 그랬다. 가정과 지역 사회에 뿌리를 둔 이탈리아 공산당은 유서 깊은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 레닌주의에 바탕을 두고 돌아가는 조직의 효율성, 세속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가톨릭교회의 도덕적 권위가 뭉뚱그려져 있었다. (1945년에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어느 집에 가도 마르크스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그림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가령 모데나 출신의 젊은 여성은 자기한테 구혼을 한 젊은 경찰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중앙당을 통해 파도바 지구당에 자연스럽게 문의할 수 있었다. 여기서 공과 사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였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코민테른 시절의 공산당은 노동 계급에 뿌리를 두었고 노동 계급의 이익과 열망을 대변한다면서 때로는 바른 소리를 할 때조차도 이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공산당은 레닌이 말하는 “직업 혁명가” 중심이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소수의 선택받은 집단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직이었다. 그런 조직에 들어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결단이었으므로 공산당으로 “지인”을 끌어들인 사람에게도 공산당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도 인생을 바꾸는 결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이중의 결단이었다. (적어도 공산당이 집권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공산당에 남아 있다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쉽게 떠날 수 있는 공산당을 떠나지 않겠다는 선택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했기 때문이다.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들 대부분에게 공산당원은 정치 활동에서 한 번쯤 거쳐 가는 경력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1968년 세대와는 달리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사람은 마치 여유 있는 사람들이 쾌적한 관광을 즐기기 위해 클럽 메드에 가입하는 것처럼 한가롭게 혁명에 투신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클럽 메드는 2차 세계대전 때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젊은 공산주의자가 세운 기업이다.) p218

20세기의 전반기에 좌익은 우익보다 훨씬 많은 지식인을 빨아들였다. 심지어는 합리적 사유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창조적 예술 분야에서도 반파시즘 정서가 분위기를 주도했다. “시몽 레이스”는 마오쩌둥의 신화를 해체하는 데 독보적 업적을 남긴 벨기에의 중국학자가 쓰는 가명인데 이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 놀라우리만큼 간결한 표현으로 쐐기를 박았다. “우리 지식인 세계에서는 한때 공산주의자였다가 생각을 바꾼 사람들이 누구인지 안다. 하지만 한때 파시스트였다가 돌아선 사람을 만나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전쟁이 끝나고 나서 생각을 바꿨고 안 바꿨고 와는 무관하게 사실은 그런 사람 자체가 많지 않았다. p220

냉전 시대에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유사성을 드러내고 싶어서 몸이 단 저술가들이 그런 논리를 주로 폈지만 정치적으로 편향된 사회심리학은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좌와 우의 “극단주의”는 근본적으로 통하는 데가 있기 때문에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라는 자유주의자의 믿음은 어쨌든 근거가 약하다. p221

우리는 당이 시키는 대로 했다. p227
당이 애인이자 배우자와 헤어지라고 하면 당원은 군말 없이 헤어졌다. p228
전쟁이 끝나고 나서 아우슈비츠에서 풀려난 사람들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수용소 안에서는 당비를 금쪽보다도 귀한 담배로 냈다고 한다. 그 귀한 담배를 당원들이 수용소 안에서 조달할 수 있었다는 데서 집단 투쟁을 이끌어내는 당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원이 아니거나 당에 들어올 (또는 복귀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과 진지하게 사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당원은 성에 대해서 그만큼 트인 생각을 가졌으므로 열렬한 투사라고 해서 정치와는 무관한 섹스를 하나같이 삼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브레히트가 쓴⌈후손들에게⌋라는 훌륭한 시에 나오는 코민테른 요원이 아무하고나 잠을 잤다는 것(“나는 깊은 생각 없이 사랑을 했고”) 은 그 어떤 개인사보다도 당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나도 고백하자면 당에 들어올 가능성이 별로 없는 사람과 한 번 진지하게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을 때가 바로 나도 더 이상 젊었을 때처럼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아니구나 하는 자각을 했을 때였다. p229

혁명가의 심리를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갈파한 밀로반 질라스처럼 나도 “이것은 종파의 윤리”라는 사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변화를 주도하는 추진력이 생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 무렵에는 깨달았다. p230

양차 세계대전과 그 사이에 유럽에서는 오직 혁명에서만 이 세상의 미래를 볼 수 있었다고 말하기는 너무나 쉬웠다. 낡은 세상은 아무튼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하고많은 열망 중에서도 공산주의가 그리는 이상 낙원은 세 가지 점에서 달랐다. 첫째, 마르크스주의는 우리가 기필코 승리한다는 사실을 과학적 방법으로 입증했다. 그것은 1940년대까지 세계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승리를 거두었고 혁명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사실로 검증되고 입증된 예언이었다. .... 이제는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을 안다는 이런 확신의 토대가 허물어졌고 특히 공장 노동자 계급이 변화를 이끌어 가는 주역이라는 믿음이 무너졌지만 “파국의 시대”에는 그런 확신과 믿음은 굳건해 보였다.
둘째, 국제주의가 살아 있었다. 우리의 운동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었지 특수한 집단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의 이상은 개인의 이기심이나 집단의 이기심을 뛰어넘었다. p231

뉴욕에 살며 나와 잘 아는 철학자 아그네스 헬러는 헝가리의 시온주의 진영에서 일하다가 1947년 열여덟 살의 나이로 공산주의로 돌아섰을 때의 심경을 냉소주의를 가장한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담아낸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살았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 있었다.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돈도 재산도 아니었다. ..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나는 부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암거래 상인, 달러 투기꾼, 그악스럽고 탐욕스러운 사람을 혐오했다. 걱정이 없었다! 평생을 가난한 사람 편에 서리라 다짐했으니까. 그렇게 철딱서니가 없다 보니까 가난한 사람과 같이하려고 공산당에 들어간 것이다. p232

굳세다는 것은 군인의 덕목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쓰던 정치 용어에까지 스며들었다.(“비타협”, “불굴”, “강철같이 단단한”, “일심동체”) 혁명 이전에도 혁명 기간에도 혁명 이후에도 일단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을 굳세게, 아니 무자비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공산주의자의 본질이었다. 그것은 시대 앞에서 나온 불가피한 반응이었다. 브레히트는 말한다.

우리가 스러져가면서 뿌린 피
속에서 나온 그대들은
우리의 허물은 말할 때는
아무쪼록 기억하라
우리가 헤치고 나온
그 캄캄한 시대를

하지만 나 같은 세대의 공산주의자들 마음을 파고드는 브레히트의 시가 말하려던 것은 결국 그런 굳센 정신이 혁명가들에게 강요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부드러움의 바탕을 마련하고 싶었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p234

스탈린과 코민테른에게 모든 것을 걸었을 때 우리는 스탈린 치하에서 소련 인민이 얼마나 허덕였는지를 상상하지도 못했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정말로 몰랐거나 모르고 싶었기 때문에 우리 옆에서 벌어진 참극을 부정했다고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어차피 우리는 자유주의자가 아니었다. 자유주의는 실패한 이념이었다. 전면전에 뛰어든 사람은 자기희생에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희생에도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권력을 잡지도 않았고 당장 잡을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우리는 교도관이 아니라 죄수가 되리라 생각했다. p235

마레크는 당에서 축출했다. 그렇지만 〈비너 타게브흐〉라는 좌파 성향의 독립 월간지 편집자로 계속 활동했고 (나와 몇 사람과 함께) 줄리오 에이나우디의 야심만만한 ⌈마르크스주의 이야기⌋를 기획하고 편집하면서 생활을 해결했다. 그러다가 1979년 여름 평소부터 안 좋았지만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그는 공산주의자로 죽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이탈리아 공산당이 참석했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물건은 책 몇 권만 덜면 가방 두 개에 다 집어넣을 수 있었다. p239
강인하고 명철한 지성에다 놀랄 만큼 박식했던 그는 사상가, 작가, 저명한 학자가 얼마든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해석하기보다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을 선택했다. 좀 더 큰 나라에서 태어났거나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비중 있는 정치 지도자로 떠오를 수 있었으리라. 그는 탈정치 시대의 문학이나 대학원 세미나로 도피하고 싶은 유혹을 끝까지 이겨내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갔다.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는 옛날에도 고약했고 지금도 고약한 우리 시대의 영웅이었다.

탄압이 아니라 특권을 누렸던 공산주의 체제라는 아주 다른 상황에서 살았던 공산당원의 경우는 어떨까? 그들은 국외자가 아니라 내부자였다. 대게는 국민한테서 반감을 사면서 한 나라에서 저항세력이 아니라 지배세력으로 살았다. 경찰은 그들의 적이 아니라 하수인이었다. 혁명이후의 찬란한 미래는 그들에게는 꿈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었다.
우리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핵무기 제거라는 양심과 확신을 가지고 싸워야 한 적이 있었기에 사기를 잃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와는 달리 그들은 자기네 나라에서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모든 불의와 잘못에 대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p240

나는 동독 첩보기관의 수장이었던 마르쿠스 볼프와 한 네덜란드 텔레비전 방송사가 제작한 토론 프로에서 냉전을 주제로 대담을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동독체제가 잘 안 돌아간다는 결론을 1970년대 후반에 내렸다고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동독이 무너지기 전에는 공개적으로 개혁 노선을 추구했다. 첩보 기관의 우두머리로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p251
1980년에 헝가리의 야노스 코르나이는⌈결핍의 경제학⌋이라는 책에서 소련식 경제가 왜 자기 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가를 날카롭게 분석했다. 1980년대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가 (마오쩌둥이 죽고 나서 개방을 선택한 중국 경제와는 달리) 10년 동안 눈에 띄게 침체되었을 때 벌써 폴란드나 헝가리처럼 비교적 운신의 폭이 컸던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은 변혁을 준비하고 있었다. p252
체크나 동독처럼 강경 노선을 걷던 체젠은 소련의 무력 개입에 기댈 수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다음부터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동유럽에서도 공산주의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얼마 못 가서 소련도 허물어졌다.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남긴 유산은 썰물이 진 바닷가의 고래처럼 덩그마니 남았다.
1980년대 말, 그러니까 체제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동독의 한 극작가는⌈원탁의 기사들⌋이라는 희곡을 썼다. 우리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기사 랜슬롯은 묻는다.
..... 우리는 성배를 영영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배가 아니라 성배를 찾아 나서는 것이라는 아서 왕의 말은 옳지 않은가? “성배를 포기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어디 포기하는 것이 우리뿐이겠는가?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없이, 자유와 정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 없이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20세기에 실제로 그렇게 살다가 간 사람들을 기억조차 해주지 않고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잇겠는가?

10. 전쟁

2차 세계대전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맛본 경험은 전쟁이 내 인생에서 6년 반을 앗아가 버렸다는 말로 가장 잘 요약된다. 나는 영국 군대에서 6년을 보냈다. 나한테는 “좋은 전쟁”도 “나쁜 전쟁”도 아니었고 그저 허망한 전쟁이었다. 나는 전쟁에서 의미 있는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고 또 그런 일을 해달라는 부탁도 받지 않았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시기였다. p258
나는 군인 노릇을 잘할 사람도 아니었고 사람들을 통솔하는 지휘자감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20대의 태반을 나한테도 나라에도 도움이 못되고 헛되이 시간만 낭비하면서 보내야 했던 주된 이유는 십중팔구는 정치 활동 때문이었다. P259

케임브리지에 있을 때부터 벌써 나는 첩보부의 감시 대상에 올라가 있었던 걸까? 확실히는 모른다. 나하고 잘 알던 보안대의 한 중사가 지켜보는 사람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귀띔해 준 것이 1942년 중반이었으니까 그 무렵에는 내 신상 기록을 당국에서 관리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겠다. p260

런던은 내가 어른으로 정말 살아간 곳이었다. 휴가란 휴가는 모두 런던에서 보냈다.
1943년 5월 나는 아주 매력적인 LSE의 공산주의자 여학생으로 전부터 어렴풋이 알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상무부에서 일하던 뮤리엘 시멘과 결혼했다. p277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는 사람을 아내로 둔 사람의 처지에서는 학위 주제를 바꾸지 않으면 아내를 런던에 두고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서 몇 년을 보내다 와야 할 판이었다. p278

11. 냉전

자유주의자들의 반공주의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냉전이 시작되니까 미국과 영국 정부의 자금 지원 아래 이루어진 광범위한 선전 활동으로 말미암아 스탈린에 대한 혐오감과 (비록 영국 정부는 그렇게까지 믿지는 않았지만)소련이 세계를 적화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다는 믿음이 반공주의를 병적수준으로까지 끌어내렸다. p290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우위에 있다는 신념과 확신도 그대로 있었고 공산주의 이념이 이 세상을 바꾸어 놓으리라는 믿음도 여전했지만 우리의 희망, 아니 적어도 나의 희망은 발터 벤야민이 말한 파국이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진보의 폭풍에 휘말려 날개를 접을 수 없는 "역사의 천사"처럼 불가피한 비극 의식과 맞닿아 있었다. 역설이라면 역설이지만 예전의 신념을 그대로 쉽게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어렵사리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냉전시대에 서방 어디에서나 기승을 떨친 반공주의였다. p298

피카소도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소련이 후원하는 회의에 참석하러 가다가 붙들려서 런던 토링턴스퀘어에 있던 버널 집에다 즉흥적으로 벽화를 그려준 적이 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이 벽화는 버벡 칼리지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 위대한 화가는 버널처럼 공산주의 자였을 뿐 아니라 버널처럼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그렇지만 버널은 성적으로든 지적으로든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접했다. p301

이미 1950년에 역사가 E. H. 카는 “러시아에 대해 ‘기독교의 시각으로 아주 두루뭉술하게’ 다루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가는 밥줄까지 끊기지는 않을지 몰라도 승진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사정이 어려워졌다.”고 현실을 정확히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이 적어도 공식 언론에서는 공산주의자에게 적용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p303

사도는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작은 공동체다. 주로 아주 똑똑한 학부생이나 대학원 초년생이 중심이 되어서 다른 회원들을 끌어들이면서 조직을 꾸려나간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회원들이 쓴 논문을 같이 읽고 토론을 한다. 사도의 주역은 학부생이었다. 사도는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거나 떠나면서 모임을 통해 만들어진 “진짜 세상”을 떠나 바깥의 “덧없는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날개를 단다”고 해서 “천사”라고 불렀다.)보다 학부생이 우위에 있었다.

아무리 혁명가라 하더라도 좋은 전통을 이어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었다. 19세기의 케임브리지를 호령한 사람은 대체로 사도였는데 그런 선배들과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시인 테니슨, 탁월한 물리학자 클럭 맥스웰, 케임브리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역사가 프레더릭 메이틀런드, 버트런드 러셀, 그리고 케임브리지의 에드워드 황금기를 주도한 케인즈, 비트겐슈타인, 무어, 화이트헤드, 문학의 E. M. 포스터, 루퍼트 브룩 같은 사람이 모두 사도였다. 19세기에 케임브리지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학자였던 크라이스트칼리지의 찰스 다윈만이 빠졌다. 한 미국 교수가 철저하고 날카롭게 분석한 빅토리아 시대와 에드워드 시대의 사도 중에서 상당수는 결코 이런 사람들의 급이 아니었다. 지식이든 다른 무엇이든 위대한 성취는 자기와 관심사가 똑같이 일치하지만은 않은 친구들을 따분하게 만들 위험성을 감수해야 할 때가 많았고 사도치고 같은 사도들을 따분하게 만들고 싶어 할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도는 나중에 그 위대한 전통의 본보기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 때문에 괴로워했다.
사도로 뽑히는 기준은 아마 지금도 그럴 테지만 그때도 관심 주제나 신념, 심지어 출중한 머리도 아니었고 그저 “사도다움”이었다. p310
사도 모임의 한 세기를 지켜본 한 섬세한 관찰자의 말을 빌리자면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두 가지에 몰입한다. 너무나 순수한 몰입이라서 쌀쌀맞은 사람은 어이없어하고 포근한 사람은 탄복을 금치 못한다. 하나는 우정이요 하나는 지적 정직함이다.” p312
교수들은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까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지적 정직함”에다 외교적 수완을 살짝 가미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나이와 기질의 장벽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1950년대 초반에 사도로 활동한 학부생들 덕분에 오랜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p313

학자의 입장에서는 강의 준비를 하는 것처럼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이 없었다. p313

스탈린이 아직 살아있던 1952년 소련의 역사가 E. A. 코민스키는 부인과 함께 영국을 잠깐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소련당국으로부터 받았다. 코민스키는 중세 잉글랜드 영지의 역사의 여러 가지 쟁점을 다룬 논문을 발표하여 역사학계에서 주목을 끌다가 1920년대에 런던을 떠났는데 그때 이후로 처음 영국을 다시 찾은 길이었다.

코민스키의 주선으로 소련 과학원이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을 소련으로 초대했다.
모든 공산주의 지식인의 삶에서,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차대한 궤도 수정이 나중에 일어났을 때 내가 당황하지 않은 것은 이때 이루어진 소련 방문의 도움이 컸다. p323

12. 스탈린과 그 후

13. 40대에 맞는 전환기

지진이라든가 화산 폭발처럼 한눈에 재앙처럼 보이는 순간이 역사에도 있다. 가령 두 번의 세계대전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한 사람의 인생살이에도 그와 비슷한 순간이 있다. 앞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내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지리적 비우를 좀 더 쓰자면 분수령이라는 말이 참으로 적절해 보이는 순간도 있다. 눈에 확 들어오는 사건도 없었고 극적인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별 볼일 없는 고개를 넘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역사에서건 삶에서건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을 체험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들 때가 있다. 내 경우에는 4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접어들었던 1960년에 그런 분수령이 나의 삶에 찾아들었다. p359

런던은 살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분수령을 넘어선 시기에 나는 그런 분위기에서 살았다. 나는 한 남자로서도 직업인으로서도 이 시기에 큰 변화를 겪었다. p360

세계를 위협하는 것은 미국 같은 나라의 호전성이나 세계 정복의 야심이 아니라(소련은 그런 야심을 갖기에는 너무 약했다.) 핵무기를 쓰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정치인과 장성의 판단 착오라는 전제 위에서 어느새 나는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은 얼마든지 있었다.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케네디도 흐루시초프도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바로 이런 교훈을 얻었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안다. 요컨대 적어도 내가 보기로는 1960년부터는 비록 냉전은 여전히 계속되었지만 핵전쟁의 위험은 현저히 낮아졌다. p362

같은 세대 안에서도 이런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온 다음부터는 상대적으로 낮은 자리에서 옛날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던 사람, 그리고 부모가 이미 아이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재산이나 특권, 권력이나 특출한 전문적 기량을 쌓아올린 최상층부에 속한 사람이 그런 경우였다. P365

1960년대의 청년 반문화를 상징하는 특성의 상당 부분은 흘러간 재즈에서 찾을 수 있다. 마약이 그렇고 내가 예전에 “인기 있는 연예인과 올빼미처럼 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오붓하게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작은 섬에 둥지를 틀고 부평초처럼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는 음악을 업으로 삼은 흑인(과 백인)연주자들의 공동체”라고 묘사한 적이 있는 생활방식도 그랬다. p371

14. 웨일스의 크니흐트 기슭

15. 1960년대

(화보집에서는 “네 멋대로 해라.”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오르가슴을 멈추지 마라.”는 뜻이었다.)
역사가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혁명은 혁명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수히 많은 말을 통해 그 성격을 알 수 있는 법이다. 그것은 입으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문자가 있는 사회에서는 글을 아는 남녀가 써내는 수많은 글로 나타난다. p410

학생들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한 것은 인간관계를 바꾸어서 “일상생활의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던 “상황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사회를 그냥 제껴놓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뒤집어엎고 싶어 했다. p411

“금지하는 것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구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규범이라면 덮어놓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식에서 유토피아를 읽어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정부에 대해서든 교사에 대해서든 부모에 대해서든 우주에 대해서든 젊은 반항자들의 심리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은 누구한테서도 간섭받고 싶지 않다는 그런 구호였다. p412

이 새로운 운동을 보면서 나이든 좌파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첫마디는 “이 친구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목표를 이루어내는 방법을 더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p413

베트남 반전 운동이 절정에 이르렀던 1967년에 미국에서 강의를 했고 1968년에는 파리에서 학생 시위를 지켜보고 나서 나는 1969년에⌈혁명과 섹스⌋라는 냉소적 논문을 썼다. 혁명과 섹스에 어떤 관련성이 있다면 그것은 부정적 관련성이라고 나는 썼다. 지배자는 노예와 빈민의 성적 자유를 부추김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를 거론하면서 마약도 또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거론 했던 것 같다. 명색이 역사가로서 나는 모든 혁명에는 누구나 마음껏 행동하는 자유 지상주의의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문화적 저항과 문화적 항거는 어디까지나 징후이지 그 자체가 혁명의 원동력”은 아니었다. 미국에서처럼 “그런 일이 두드러져 보이면 보일수록” “정말로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큰 일”이 자본주의라든가 억압적이거나 부패한 정치 체제를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 안에서 사람들과 개인의 행동 안에 고착된 인습적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1960년대의 반란 세력이 좌파의 또 다른 양상이나 변형이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그것은 혁명을 꾀하다가 불발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혁명을 효과적으로 수용한 셈이 되어버린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아래 종래의 정치판을 갈아엎고 종국적으로는 전통 좌파의 정치 형태에도 마침표를 찍으려는 시도가 된다. 30년도 넘어서 되돌아보면 내가 1960년대의 역사적 의미를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p415
1950년대 만들어진 아가씨와 건달들이라는 뮤지컬을 보면 미국 뒷골목에서 온 껄렁한 관광객들이 쿠바의 아바나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지만 내가 갔을 때만 하더라도 아바나에는 쿠바 원주민의 전통 춤인 룸바와 문화적 관용주의가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었다. p421

16. 정치 관람자

1981년이 되면 노동당은 개혁을 요구하면서 떨어져 나간 이른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잔류 당원들로 갈라져 있었다. P436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정치인과 경제학자는 슬슬 불안감을 느꼈지만 노조 지도자들은 이 시기에 승승장구했다. 그들은 노조의 힘을 제한하려는 노동당 정부의 계획을 막아냈고 전국적인 광부 파업으로 보수당 정부를 두 번이나 무릎 꿇렸다.

노조가 영광의 세월을 보낸 1970년대는 노조 좌파에게도 영광의 세월이었다. p437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배신했다는 야유”를 일축하고 상황을 현실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말로는 쉬웠다. 하지만 실제는 어려웠다. p450

고르바초프 시대의 막을 내린 1991년의 실패한 구테타를 헬싱키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이렇게 썼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 곧 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 ‘글라스노스트’ 곧 개방을 선택했지만 거꾸로 했어야 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도 서방 경제학자도 그쪽으로는 이론과 경험이 없어서 아무 도움이 못 되었다.” 산호초로 다가가는 망가진 거대한 유조선처럼 방향타를 잃은 소련은 해체의 길로 나아갔다. 그리고 결국은 침몰했다. 그리고 중단기적으로는 단순히 옛 소련에 살았던 민족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그 피해를 입었다. “자본주의와 부자는 당분간은 겁먹을 일이 없다”고 나는 1990년에 썼다. p458

하지만 사회민주주의의 조직력이 약해지고 공산주의가 해체된 지금 위협은 이성의 적에서 생겨나고 있다. 바로 종교나 민족・부족 근본주의자, 외국인 혐오주의자, 지금 인도, 이스라엘, 이탈리아의 정권을 쥔 세력처럼 파시즘의 후예거나 파시즘에 고무된 정당들이 그들이다. 반세기 동안 반공주의로 냉전을 이어왔는데 미국 영토 안에서 미국 국민을 살상한 미국의 유일한 적이 한때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돈을 대준 수니 이슬람 근본주의 투사들과 미국의 극우 광신도들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수많은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다. 로자 룩세부르크가 말한 사회주의냐 야만주의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사회주의에서 등을 돌린 것을 세계는 다시금 후회할 것이다. p459

17. 역사가들 속에서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양극화된 냉전과 이념 대립에도 불구하고 역사 연구 방법론의 쇄신을 부르짖은 다양한 학파의 개혁파들은 같은 길을 가면서 똑같은 적과 싸우고 있었으며 본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주적은 “사실”을 제대로 모으면 결론은 사실이 알아서 내린다고 보는 “실증주의”였고 왕과 고관, 전투와 조약, 다시 말해서 정치와 군사 방면에서 꼭대기에서 내려진 결정을 선호하는 주류 역사가들의 편견이었다. p470

객관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과거를 탐구하는 것이 바로 역사라는 명제는 그래도 아직 도전을 받지 않았다. 그런 명제에 도전장을 내민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이 용어는 1980년대 이전까지는 영국에서는 사실상 생소한 개념이었고 다행히 21세기로 접어들어서야 진지한 역사학 저술에서 찔끔 선을 보이는데 그쳤다. 그렇지만 1970년 초반의 어느 시점에서인가부터 역사학의 풍조가 달라졌다. 1930년대부터 싸우는 족족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이제는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구조”는 지는 해였고 “문화”가 뜨는 해였다. p479

하지만 내 때에도 역사가는 괜찮은 직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즐거웠다. 지적 성숙이라는 주제로 담소를 나누면서 지금은 작고했지만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가 보기에 지식인의 삶은 판에 박힌 강단보다는 예술가의 삶에 더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 지적 활동의 형식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안겨준 활동은 사회학자라는 직업이었습니다.

사회학자 자리에 “역사가”만 집어넣으면 나는 이 말에 백 번 동의 한다. p483

18. 지구촌에서

학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선생 노릇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확실히 학자들보다는 학생들과 같이 어울리는 것이 더 재미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그들의 젊음과 젊은이 특유의 패기, 열정, 희망, 무지, 미숙에 끌렸기 때문이지 학생들이 우르르 모여 있는 앞에서 내가 특별히 많은 것을 기대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교육자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두 기관, 그러니까 런던 대학 산하의 버벡 칼리지와 뉴욕에 있던 뉴스쿨 대학교는 꼭 그렇지는 않았다. 두 학교 모두 약간 튀는 면이 있었고 학생들도 특이했다. 1825년에 세워진 런던 기계학원의 후신인 버벡 칼리지는 낮에는 일을 하는 직장인을 가르치는 야간 대학이다. 내가 영국에서 교직 생활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낸 이유의 하나는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바로 들어온 보통 젊은이와는 달리 나이도 많고 더 성숙하고 배우려는 열의가 굉장한 남녀 학생을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런 학생들과 대면하면 정말로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 특히 학생들과 소통하는 법을 톡톡히 배웠다. 뉴스쿨 대학교는 이단과 국제주의가 혼합된 독특한 학교였다. p487

가르치기와 글쓰기의 핵은 모두 소통이다. 두 가지를 모두 즐기는 사람은 복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절해고도에서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누가 읽을 지도 모를 글을 책처럼 생긴 병에 담아서 드넓은 바다로 띄워 보내야 하는 막막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불이 꺼지지 않는 점만 다르지 배우가 극장에서 관객들을 마주보면서 관객과 교감하는 것처럼 교수도 학생들이 꽉 들어찬 방에서 학생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교감을 나눈다.
배우도 교수도 관객과 청중을 위해 공연하는 연기자다. 듣는 사람들이 슬슬 딴전을 피울 때야말로 강의를 하면서 뼈아프게 배우는 순간이다. 교수는 배우보다 더 힘든 일을 한다. 공연을 보면서 정서적 만족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새겨듣고 써먹어야 할 구체적 정보와 사상을 청중에게 듬뿍 안겨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능한 강사라 하더라도 결국 그가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무대를 휘어잡는 공연자가 뿜어내는 개성, 기질, 이미지, 열의밖엔 없고 운이 좋으면 객석에 앉아 있는 몇 사람의 상상력에 불을 지필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전달했는지 확인하려면 천상 토론 수업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도 나는 특수한 주제를 다루는 수업보다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수업이 더 마음에 들었다. p488

나의 허영심을 불안하게 만든 것은 가톨릭 공동체가 영국 사회 안에서 워낙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 안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끼리 알고 지내는 동네에서만 나를 알아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p493

역사는 미사일처럼 빠르게 움직일지 몰라도 연속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p494

교수도 그렇고 기자도 그렇고 기업인도 그렇고 지구촌이라는 것은 살아가는 곳이라기보다는 만나는 곳이다. ..... 지구촌은 오늘날의 지구에서 학술대회나 심포지엄처럼 예상했던 만남이든 출장이나 휴가 여행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만남이든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하는 이런 주체들의 교점이 만들어내는 집합이다. ..... 진정한 거점은 어느 한곳에 터를 잡고 사는 가족과 나그네와 외국인과 도착과 일감과 출발이 하나로 녹아들면서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지역에 뿌리를 둔 네트워크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요컨대 그것은 지구 곳곳에 퍼진 가족의 환대라는 회로로 이어져 있다. p506

“내가 겪은 삶과....... 20세기의 현실....... 인류가 겪어야 했던 그 끔찍한 사건들 사이의 명백한 모순”에 놀란다. 직업의 성취도라는 기준으로 보자면 나의 인생은 그리 불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개인적 행복을 내게 안겨준 삶이었다. p507
나는 어릴 때부터 꿈꾸던 삶을 살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삶이 풀려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부질없고 어리석기조차 하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직도 이렇게 속삭이는 작은 유령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이런 세상에서 마음 편히 지내서는 안 되지.” 젊었을 때 내가 그 글을 열심히 읽었던 사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p508

19. 마르세예즈

우리 같은 젊은 혁명 세대에게 대중 시위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에게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나 다를 바 없었다. p523

공인이면서도 이런 공인의 지위를 의식하지 않았던 “프랑스의 대지식은”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는 사르트르밖에 없었다.
평등자체에도 격식이 배어 있었다. p528

..... 좋은 역사가가 되려면 좋은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려주어 아내의 환심을 샀다. p538

20. 프랑코에서 베를루스코니까지

1952년부터 1997년까지 이탈리아는 사회・문화의 극적인 변화와 얼어붙은 정치가 묘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냉전이 끝나갈 무렵이면 전통적으로 가난한 나라였던 이탈리아의 국민이 한 사람당 보유한 차량 대수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많았다. 교황의 나라는 낙태와 이혼을 합법화시켰다. 이탈리아 국민은 이혼은 눈에 띄게 자제했지만 낙태는 열심히 했다. 이탈리아는 딴판이 되었다. 하지만 1947년 동서 대립이 시작될 때부터 미국은 이탈리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집권은커녕 공직에 뽑히는 것도 결코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소련과 이탈리아 공산당이 건재하는 한 그것은 미국의 근본 방침 내지는 “출발점”이었다. 1950년대 중반이 되면 이탈리아 남부의 농촌 지역에서 일어난 저항도 수그러들었지만(내가 “원시적 반란”에 끌린 것도 사실은 이 무렵이었다.)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받는 공산당을 경찰의 탄압이나 헌법의 공갈로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도 분명했다. 현실 감각이 있던 이탈리아의 기민당은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문화와 언론에서, 그리고 지역 기반이 있는 곳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에게 정치적 공간을 열어주었다.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 공화국도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손잡고 세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안에서는 냉전은 너 죽기 아니면 나 죽기 식의 제로섬 게임이 아니었다. p576

폴로: 생지옥은 미래형이 아닙니다. 그것이 존재한다면 이미 여기 있습니다. 같이 살아 있는 데서 만들어지는 우리의 일상생활이 지옥입니다. 그것을 견디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길을 사람들은 쉽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을 받아들이고 지옥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요. 지옥이 거기 있다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을 때까지요. 두 번째 길은 위험한 데 늘 깨어있어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지옥의 한복판에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고 알아보고 그것이 이어질 수 있도록 숨통을 터주는 것입니다. p584

21. 제3세계

내 인생의 전반부에는 이 80퍼센트의 사람들은 바깥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고 바깥세상도 줄잡아 몇 천 명에 이르는 개인들 말고는 이 사람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인상 깊은 것은 1970년 이후로 제3세계 사람들이 제1세계에 눈을 떴다는 사실, 또는 제1세계다 제3세게다 하는 말이 냉전 시대에 쓰이던 말이니까 다소 표현을 달리하자면, 가난한 사람들이 잘사는 나라로 가면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1960년대 이후로 미국처럼 드문 예외도 있었지만 잘사는 나라는 아무리 일손이 필요해도 못사는 사람들이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 생에의 전반부 40년 동안은 그렇지 않았다. 언어가 사람들을 고립시켰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국어”가 아니라 글을 못 읽는 사람들이 말하는 언어, 50킬로미터 밖으로만 나가도 못 알아듣는 지독한 사투리를 말한다. 문맹률이 높은 탓도 있었지만 아직은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접하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라서 아주 큰 한두 가지의 중요한 세계적 사건을 빼놓고는 “뉴스”라는 것을 보고 들을 수가 없었다. p587

개인적 교분을 통해서 한 사회를 아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친구는 그 사회에 너무나 푹 젖어 있어서 둔감해지기 쉬웠다. 그리고 거리라든가 문화, 언어가 경험을 가로막는 것처럼 계급도 그에 못잖은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590
파블로 네루다의 ⌈모두의 노래⌋의 “마추피추 고원”

위라코차의 돌 깨는 아들이여
푸른 별의 식은 음식을 먹던 아들이여
파란 보석의 맨발로 다니던 손자여

“남미를 이해하고픈 마음이 있으면 맞추피추에 가서 그 시를 읽어야 합니다.” 영국을 떠나기전 사람들은 나에게 말했다. p621

22. 루즈벨트에서 부시까지

내 또래의 지식인에게 두 개의 조국, 그러니까 하나는 자기가 태어난 나라, 또 하나는 프랑스가 있었다면, 20세기에 서양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 아니 궁극적으로는 세계 어디든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정신적으로 자기가 태어난 나라와 미국이라는 두 개의 조국이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의 눈에는 “할리우드”와 “코카콜라”라는 글자가 어디서나 눈에 들어왔고 글을 못 읽는 사람 중에도 이런 제품과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야말로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은 굳이 발견될 필요가 없었다. 미국은 우리 존재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p623

.......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는 나는 아직도 의인(정직한 사람들)이 의인답게 행동하고, 그래서 비록 공존은 할지언정 악인보다 낫고 악인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초등학생이나 할리우드의 기본적 도덕관을 갖고 있었다. 아주 불완전한 세상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아직도 그것을 믿고 싶어 했다. p636

40대의 역사학자가 청춘 남녀처럼 젊음을 만끽하기에는 너무 늦었을 테지만 그래도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 밤에 재즈를 듣다보면 살아있음이 무한한 기쁨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재즈가 좌파 정치와는 동떨어져 있었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1960년까지만 하더라도 학계에서 재즈의 위치는 동성애와 비슷했다. 그것은 개인적 취향이었지 학문 활동의 일부분은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스콘신 주의 그린베이보다 평균적인 미국의 모습을 훨씬 덜 갖고 있었던 뉴욕이 나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 굉장한 나라를 이해할 수 있고 어쩌면 사랑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데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맨하튼은 너나 할 것 없이 마녀사냥을 경멸했고 유대인 이민자가 많았고 고급출판, 연극, 대중음악, 음반 산업의 중심지였으므로 전에 마르크스주의를 믿었거나 지금 믿는 사람이 몇 사람 섞여 사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드렸다. 뉴욕 시에서 어떤 사람의 정치적 신념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정말로 신경을 쓴 것은 FBI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거기에 갔을 무렵에는 억만장자 중에도 민주당원이 드물지 않았다. 묘하게도 재즈는 미국의 열성 마르크스주의자들한테는 먹혀들지 않았다. 그들은 고전음악이라든가 정치의식이 깔린 포크송을 체질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p638

...... 존은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1930년대의 전투적 좌파로 끝까지 남았지만 공산당원은 아니었기 때문에 FBI는 그의 발목을 묶을 수가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 재즈의 역사는, 아니, 1930년대에 “스윙 음악”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었던 만큼 미국의 역사도 존 해먼드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임종하는 자리에서 나는 존에게 가장 뿌듯한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존은 빌리 홀리데이를 발굴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와 알게 되었던 무렵에는 존은 더 이상 음악계의 중심은 아니었지만 봅 딜런을 막 띄우려는 준비를 하던 사람을 퇴물 취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p639

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전화와 이메일이 보편화된 1990년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항공 교통의 혁명이 일어난 1960년대에 들어오면 이미 그것은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그렇지 않은 나라로 영원히 이주하는 선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중 국적이나 다중 국적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과 이중 문화나 다중 문화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흔해졌다.
돈에 끌린 거만도 아니었다. 미국은 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재능과 열정과 새로움에 개방되어 있다. 미국은 또 점점 시들어가고는 있지만 지적 탐구의 기회를 누구에게나 무료로 평등하게 제공하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p652
미국의 국가 이념에서 미국은 그저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다. 미국은 줄기차게 이루어내는 나라라야 한다. 다른 모든 나라를 합친 것보다 우월하고 전 세계가 인정하는 모범으로 자리 잡은 최고의 나라, 가장 위대한 나라로만 미국은 스스로를 인식한다. 한 축구감독의 말대로 “승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부다.” 외국인한테 미국이 참 희한한 나라로 보이는 것은 그런 점 때문이다. ..... 별난 느낌이 미국에서 드는 것은 미국이 자신의 색다른 점(“오직 미국만이 .....”)을 강조하거나 스스로에 대해 묘한 불안감을 느끼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미국의 역사가들은 자기 나라 역사에 대해 말할 때 “미국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을 끈질기게 던지지만 내 또래의 유럽 역사가들은 스스로에 대해 그런 질문을 던지니 적이 거의 없었다. p653

내 한평생 아니면 적어도 내가 처음 그 땅을 밟은 이후로 40여 년 동안 미국은 도대체 어느 만큼이나 달라졌을까? 늘 듣는 말이지만 뉴욕은 미국이 아니다. 그리고 오든이 말한 대로 죽어도 미국인이 될 수 없는 사람도 스스로를 뉴욕 사람으로 여길 수는 있다. p655

영국인의 생활방식은 1950년대 중반을 전후로 하여 역사적 간극이 생겼다고 해도 좋을 만큼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사실을 나는 1960년에 와서야 깨달았지만 미국에서 1950년대는 대공황의 충격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되찾은 미국의 백인들이 두 세대 전부터 익히 누렸던 20세기의 생활상이 좀 더 개선되고 확대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미국은 이미 걸어온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뿐이었다. p657

나한테 켈리포니아는 1970년대든 1980년대든 1990년대든 내가 1960년에 처음 그곳에서 운전을 하면서 보았고 느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에 스페인과 시칠리아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뉴욕은 내 일평생 동안 늘 이민자들이 바글거리는 코스모폴리탄 도시였다. 런던이 그렇게 된 것은 1950년대부터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양탄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부는 달라졌고 언제나 달라지고 있지만 기본 무늬는 단기적으로는 놀라운 안정성을 보여준다.
역사가로서 나는 이런 가변적 안정성의 배후에서 어쩌면 근본적일지도 모르는 장기적 변화가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그런 변화는 미국의 공적 제도와 절차를 한사코 바꾸지 않으려는 저항 때문에 가려지고 있다. 미국이 살아온 방식, 피에르 부르디외의 좀 더 보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아비투스((habitus), 곧 체화된 암묵적 관행을 고수하려는 욕망에 가려지고 있다. p658

고상한 정치와 위대한 개인의 중요성을 신봉하는 역사가는 미국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 미국은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초강대국 노릇을 조용히 준비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미국의 입장에서는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 정치 제도는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펼쳐지는 야심과 그 여파, 지역 보호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만들어졌기 때문에 미국은 막강한 힘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군사력과 경제력이 막강하다 하더라도 초강대국 하나가 얼마 동안이라도 군림하기에는 이 세계는 너무나 크고 복잡하다. 공포심으로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세계의 승자는 과대망상이라는 직업병에 걸린다. p659

.... 문제는 우리가 미국화되어 간다는 것이 아니다. ..... 미국은 본받을 만한 나라 노릇을 못하고 있다. ..... 사춘기 이후로 나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시간을 미국에서 보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아이들이 거기서 자라지 않은 것과 내가 다른 문화에 속한 것을 늘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래도 미국은 나의 문화다.
우리의 문제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 혹은 자신의 한계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미국은 자기편에 서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몰아붙인다. “미국의 세기”가 정점에 이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고충이다. p660

23. 에필로그

21세기는 어둑한 땅거미와 함께 시작되었다. p662

소리와 종이에 둘러싸여 침대에 누운 몸으로 나는 2002년의 세계에는 어느 때보다도 역사가가, 특히 의심 많은 역사가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p663

남들은 책으로만 아는 역사가 이 얼마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오래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일부가 되고 기억의 일부가 되었다.
내 또래의 역사가들은 사람들이 세상을 다르게 보았던 과거의 중요한 지점, 그 또 다른 나라로 가는 여행의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다. 거기서 살아보았기 때문이다. p664

..... 우리는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느낌인지를 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들이 저지르는 시대착오를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다. ...... 미국의 세기가 끝나는 것을 내 눈으로 보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 중에는 그것을 볼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히 빗나간 예상은 아니리라. 게다가 나이든 사람은 이런 유행 저런 유행이 오고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소련이 망한 이후로 개인주의로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 말고 다른 대안은 없으며 자본주의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는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표준적 통치 형태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 하나의 정설 내지는 통념으로 굳어졌다. p665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을 가정, 공동체, 사회 안에 묶어두었던 규칙과 관습이 제 구실을 못하는 역사적 시기를 살아본 첫 세대다. 그 기분이 어떤가 하는 것은 오직 우리만이 말해줄 수 있다. 되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 우리는 말해줄 수 있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라고. p666

나이는 역사적 관점이라는 것을 만들어주지만 나의 인생은 그것 말고도 내가 또 하나의 관점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것은 거리라는 관점이다. ..... 역사는 우리 식의 종교 전쟁에서 비롯되는 격정, 감정, 이념, 공포에서만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위험한 “일체감”이라는 유혹도 멀리해야 한다. 역사에 필요한 것은 기동성과 넓은 영토를 내려다보고 살필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서 자기의 뿌리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다. ..... 우리의 이상은 아무리 늠름하다 하더라도 참나무나 삼나무가 아니라 지구 절반을 누비고 다니면서 극지방에서도 열대지방에서도 잘사는 철새라야 한다. 시대착오와 지방색 이 둘은 참으로 무서운 역사의 죄악이다. ..... 과거는 여전히 다른 나라다. 과거라는 나라에 그어진 국경선은 여행자만이 넘나들 수 있다. 하지만 여행자는 정의상으로 자신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이다. p667
한 사람이 역사가로서 제대로 살았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은 .....“만약에”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지 또 거기에 답변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진짜 역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은 진짜 역사에 대한 질문은 아니고,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쩌면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은 일에 대한 물음이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물음이다. p670

나는 장기적으로는 유지되기 어려워 보이는 미국의 세계 제국을 전에 영국 제국이 남긴 기록을 되돌아볼 때보다 더 무섭긴 하지만 시큰둥한 마음으로 내다본다. 영국은 나라가 작았기 때문에 그만큼 과대망상에 덜 빠졌다. 나는 시험에 몇 점이나 받았을까? 점수가 너무 낮으면 이 책은 앞으로 저자보다 대부분 더 오래 살게 될 독자들이 새로운 세기를 헤쳐 나가는데 별다른 도움을 못 줄 것이다. 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p672





3] 내가 저자라면

먼저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개인의 삶과 세기의 역사가 이렇게 맞물리고 얽혀서 이 시대를 유유히 조명하고 바라보게 하는 거대한 한 편의 자전적 역사서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과 전율이 느껴졌다. 나는 그저 지구촌 어느 한 모퉁이에 흔적조차 없을, 그냥 개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내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으며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온 것인가 자문하고 반성해보지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시점은 남은 내 인생을 향한 한 출발점이 되기에 너무나 충분하고 다행인 그러나 적잖이 걱정이 되기도 하는, 당혹감과 벅찬 감동이 교차되고 부족함에 한이 서리기도 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 홉스봄은 그동안 내가 생각해온 공산주의라는 선입견과 마르크스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좀 섬뜩하기도 했던, 나의 지난 시절 변변한 독서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살아온 무지와 그러나 그것이 문제될 것도 없는, 더구나 오히려 어떤 면에서 한때 당연하기까지 했던 내 의식을 일순간에 초라하고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역사가 이전에 일생을 공산주의자로서 살아온 그가 그동안의 공산주의 체제의 비합리성을 절실하게 깨닫고 근본의 문제와 대안의 제시를 끝까지 찾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과 자신의 이념과 사상의 경계까지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유연함과 융통성을 발휘했다는 것은 커다란 변혁이며 그 근간에 개인의 삶이 중요하다는 인식과 사람 자체에 중요한 기반을 두고 실현해 나아가는, 이념과 철학으로 승화시켜 나갔다는 점은 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결국 이 세상은 우리 인간이 인간답게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해 나가야 하는 사람을 중점에 둔 철학과 사상이어야 함을 자기의 사상과 체제를 뛰어넘어 인류를 위한 가장 근간의 틀을 세웠다는 점에서 꿈을 향한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할 귀한 자료였음을 깨닫게 된다.
변화경영연구소 소장님의 ‘사람에서 구하라’에서처럼 철학은 우리의 삶에 녹녹히 스미고 녹아들어서 아무것도 아니게 우리에게 자유롭게 삶과 어우러져야 한다. 내가 믿는 철학이 이념적 가치적 차원이 아닌 내 생활의 바탕이 되고 실현과 성취가 되는 동질의 같은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억압이나 탄압에 의한 굴복과 복종이 아닌 이상적 가치에 머무는 지향이 아닌 생각과 태도와 행동이 삶 자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처음에 책에 대해 좀 당황했으나 그 다지 단점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노장 역사가의 전 생애를 통한 자전적 역사서라는 점과 무엇보다 우리와는 사상적 체제가 다른 이질의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역사가가 한 개인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진지하고 애틋한 삶의 고찰과 시대상황에 대한 설명이었기에 그가 말했듯 역사를 이해하는 관점에서 접하게 되었고 이 책의 메시지를 바르게 알고 배워야겠다는 의욕을 주었다. 다만 그간의 독서력 부족을 절실하게 깨달았을 뿐이며 귀한 시간이 되었다.

다소 두껍고 긴 내용이 부담이 되었으나 이해할 수 없다기보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고 이해를 돕고 싶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 만큼 차라리 훈훈함이 감돌기까지 한다.
읽은 내용만큼 정리가 되지 못함이 아쉽다. 더욱 독서에 정진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IP *.70.7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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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12 23:59:36 *.140.145.63
써니님.. 고생 많이 하신게 느껴집니다. 저도 만약 연구원에 지원해서
이걸 읽었다면 못 견뎠을꺼 같아요..ㅜㅜ 그래도 해내셨고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이 책이 주는 직.간접적 메시지가 써니님에게
도 전달되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조금 더 즐기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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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3.13 00:19:28 *.72.153.12
써니님, 전 왜 써니님의 인용글에서 사람이 느껴지고, 일상이 더 느껴질까요?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 역사학자보다는 그냥 특별하지 않은 인간으로 느껴져요.
제가 좀 이상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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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3.13 08:11:42 *.70.72.121
정말 ..너무.. 많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격려해 주셔서 고맙고 또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기만 합니다. 올리지 못하겠는 마음과 지워버리고 싶은 갈등을 종일 참은 날이었습니다.

기찬님이라면 훨씬 더 잘 해내시죠. 그걸 믿어요.
정화.. 접때 언니라고 해서 디기 좋았다. 당신이 나보다 더 언니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

모두 고맙고 감사합니다. 다시 .. 부끄러움.. 느끼면서.. 하여간 다 만나서 부등껴 안고 울고 싶은 심정.. 이해하고픈 마음입니다.

뒤에 달린 반복되는 꼬리부분이 지워지지 않아서 그래로 두게 되었어요. 그점도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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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3.13 08:24:28 *.115.160.23
고생했구나!
답글이 늣었지. 언제든지 써니라 하여라. 작가가 되어도, 써니의 향기를 찾아 헤메었다. 연인을 만나려는 애뜻한 맘과 같이...

넌 한국 최고의 작가가 될 것이고, 쓰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남해에서 만나서 크게 한번 웃자구나.

서울에서 선생님 곁에 살고 있으니 연구생이 되거든 조교한다고 지망해라. 꼭 시켜달라고 졸라대어라. 구선생님은 애원하는 사람에게 약하신 분이다. 넌 이재 리견대인의 경지를 넘었다.

"君子 終日 乾乾 夕척若 여 无咎"
<하루종일 노력하고 애써고 저녁이 되어서도 걱정하고 반성하니 어려워도 허물이 없으리다.>
써니야. 이 구절을 명심하여라. 그리고 실천하여라.

아무리 무거운 글을 쓴다고 써니를 선희로 바꾸지 말아라. 지금부터 써니브랜드를 만들어야지.

* 지금부터 일년간이 너의 인생을 바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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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2007.03.13 17:11:06 *.111.247.32
언니. 언니가 옆에서 열정적으로 책에대해서 이야기해주는것 같아.
나두 글올리고 어찌나 부끄럽던지..
안절부절 하던 그 마음 백배천배 공감해.^^
앞으로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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