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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2일 11시 25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에릭 홉스봄 – 그는 국제적인 왕따다. 유대인으로서 태어나 떠도는 생활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이집트에서 태어나 빈과 베를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고아가 되어 열 세 살에 혼자 영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생활한다. 사십대에 이르러 미국 땅을 처음 밟기 시작하면서 MIT, 스탠포드 대학 등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그는 ‘중유럽 사람들 속에서 나는 잉글랜드 사람이었고, 영국에서는 유럽에서 온 이민자였으며 어디를 가도 유대인이었고 특히 이스라엘에서도 다른 곳에서 유대인이 받을 정도’의 집단 따돌림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를 왕따로 만든 것은 그의 태생만이 아니었다. 홉스봄은 1936년 케임브리지 시절 공산당에 가입하여 1991년 해체되기 얼마 전까지 남아 있었던 “후회하지 않는 공산주의자”였다. 자유진영의 나라에서 살면서도 공산주의라는 자신의 신념을 지킨 탓에 곤란을 겪었다. 취직을 하기 어려웠고, 어렵게 들어간 대학교에서 중요 관직에서 처음부터 배제되었다. 재즈를 사랑했지만 재즈의 본원지인 미국땅을 밟을 수 없었다. 그는 최고의 마르크스 학자였지만 그의 저서는 소련에서 판매금지되었고 유럽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별종 취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개인으로서는 이러한 왕따 생활이 고달팠지만 역사가에게 그것은 각별한 자산이었다”고 말한다. 홉스봄은 냉전시대에 왕따가 아닌 ‘창조적 별종’으로서, (그의 표현대로)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한 세기를 색깔 있게 살아 낸 사람이다.

홉스봄의 괴짜 근성은 그의 직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늦깎이 학자였다. 인생을 지연시킨 것은 전쟁이었다. 마흔이 넘어서야 책을 펴내기 시작했고, 50대 중반에 가서야 ‘정교수’라는 직함을 달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 나이를 먹으면 영광은 앞날 이 아니라 옛날에서 찾게 되고 과거에 이루어 놓은 업적에서 보람을 찾는다. 나는 세계대전과 냉전 덕분에 중년까지 청년처럼 앞날을 바라보면서 살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학자였지만 책을 짓눌러 사상을 더듬지 않았다. 그는 다양한 정치 활동을 통해, 사람들의 관찰을 통해, 적극적 취미였던 재즈를 통해, 무엇보다 열악한 상황에서 오는 고통을 통해 배웠다.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핵무기 확산 반대 시위를 벌였으며, 체 게바라를 위해 통역을 해주었고, 부다페스트에서 소련의 스파이와 크리스마스 저녁을 함께 보냈고, 런던에서는 가짜 이름으로 재즈 비평가 노릇을 했다. 닐 퍼커슨은 “역사가들의 삶은 대체로 지루하지만 홉스봄은 완벽한 예외다.”라고 지적한 것처럼, 그는 별스럽고 끔찍한 삶을 살았고 그 속에서 지칠 줄 모르고 배우며 성장했다. 홉스봄은 현재 90세가 넘는 나이에도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2.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구절

<머리말>
지식인의 자서전은 그 사람의 생각, 태도, 행동에 대한 기록을 담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한낱 변호로써 끝나서는 안된다.(11)

나는 인간이 살아온 역사 중에서도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한 세기를 거의 다 살았다. 나는 여러나라에서 살았고 세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도 많다. 이 기나긴 삶을 살아오는 동안 종이에다 글자만 많이 남기고 세상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을지는 모르지만, 열여섯살 때 역사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이후로 나는 세상을 관찰하고 세상이 내는 소리를 귀담아 들으려고 애썼고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12)

어떤 면에서는 이 책은 개인의 경험으로 그려낸 세계사가 아니라 세계사가 경험의 내용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그렸다(12)

역사는 일어난 일을 밖에서 기록하는 것이고, 회고록은 일어난 일을 안에서 기록하는 것이다. (13)

<1장 프롤로그>
자서전을 쓰는 역사가의 임무는 단순히 옛날로 다시 가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지도에 담는 것이다. 지도가 없이 어떻게 그 굴곡 많은 일생의 여정을 쫓아갈 수 있고, 언제 그리고 왜 우리가 머뭇거리고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는지, 또 우리가 기댔고 얽혀 들었던 사람들 속에서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것들은 개개인의 삶에만 빛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전체에 빛을 던진다.(28)

<2장 빈과 유대인 소년>

그 시대가 얼마나 격동기였는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는 아이들에게는 정신없이 바뀌는 우표였다,우표 말고 또 하나의 직접적 증거는 경제 혼란을 겪던 시기에 여러 번 바뀌었던 동전과 지폐다.(30,31)

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학교와 가족이라는 두 개의 관계망 중에서 훨씬 항구적인 쪽을 꼽으라면 단연코 가족이다 (39)

어릴때부터 나는 구체적 현실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어차피 나는 현실과 책에서 배운 것과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41)

우리(유대인)는 “흩어진 민족”이다. 만일 우리가 사고 실험을 통해서 헤르츨의 염원이 이루어져서 모든 유대인이 유대인 어머니한테서 태어난 자식에게만 완전한 시민권을 주는 독립된 영토를 가진 작은 나라 안에 모여 산다면 그것은 인류 전체에게도, 유대인 스스로에게도 안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55)

<3장 힘들었던 시절>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고 아주 힘든 일이 아니고 그저 평범한 직장에 다녔다면 그리고 그 직장이 운동과 음악에 대한 약간의 소양, 구김살 없는 성격으로 알아주는 곳이었다면 아버지는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63)

어떻게 사는가? : 조용히.
나의 기질과 성향 : 빗나간 이상주의자, 몽상가.
좌우명 : 오늘 먹을 것이 있으면 충분하다. 조금 더 있으면 좋겠고.
아버지는 이런 소박한 꿈도 이루지 못했다. (65)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어머니가 일급 작가라는 생각은 안든다. 10대 때 어머니의 시를 읽고 내가 그레틀 이모한테 별로라고 이야기했더니 이모가 펄쩍 뛰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내 인생에서 소중한 사람이나 대상에 대해서도 나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고 그때부터 생각한 모양이다.(77)

이제 나는 서른 여섯의 나이로 죽은 여자의 할아버지가 되기에도 충분할 만큼 나이를 먹었지만 만일 저승의 문턱에 가로놓인 강 어딘가에서 우리가 재회한다 하더라도 내가 그 여인을 나보다 젊게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분은 여전히 나의 어머니일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살면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당연히 물을 것이고 나는 어머니의 소원중에서 적어도 몇 가지는 그런 대로 이루었고 어머니가 기뻐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상징하는 몇 가지 직위도 받아들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77)

병원에 침대에 앉아서 성숙을 준비하던 나와 죽음을 준비하던 어머니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지금도 생각난다. 어머니는 살고 싶어 했다.(79)

<4장 베를린 : 바이마르의 종식>

지금도 나는 중국 공산당한테서는 못 느끼는 너그러움과 따뜻함으로 소련의 기억과 전통을 대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10월 혁명이 세계의 희망이었던 세대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 소련의 망치와 낫은 그 꿈을 상징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베를린에서 멀쩡히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공산주의자가 된 걸까?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이다. 내 경우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세기의 4분의 3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지질학적 퇴적물을 벗겨내 그 속에 묻혀 있던 낯선 사람을 드러내거나 찾아내서 다시 뜯어 맞추는 것을 뜻한다. (103)

<5장 베를린 : 갈색과 빨간색>

실업이 늘어나니까 과격한 혁명적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세력의 목소리가 커졌다. 오른쪽에서는 국가사회주의가 맹위를 떨쳤고 왼쪽에서는 공산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91)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이다. 내 경우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한 세기의 4분의 3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쌓인 지질학적 퇴적물을 벗겨내 그 속에 묻혀 있던 낯선 사람을 드러내거나 찾아내서 다시 뜯어맞추는 것을 뜻한다. 이 너무나 멀고 낯설어 보이는 아이를 되돌아 보고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나는 만약 그 아이가 다른 시대에 살았더라면 지적 활동에 종사했으리라는 예측은 누구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103)

<6장 섬나라에서>

첫사랑을 느낄만한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 살 무렵에 나는 이렇게 음악의 계시를 받았다. 내 경우에는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외모가 워낙 자신이 없다 보니 나는 보나 마나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육체적 관능과 성욕을 억눌렀다. 지적 유희와 말에 온통 점령 당한 나의 삶에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절대적 감성을 심어준 것은 바로 재즈 였다.(140)

3년 동안 멜릴레본은 나에게는 배움의 전당이었다. 학교 말고도 학교 바로 옆에 있던 그 당시의 런던 시청 안에 훌륭한 공립도서관이 있었다. 나는 쉬는 시간에는 주로 거기서 죽치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빌렸다. 특히 마지막 학년(1935~1936)에는 학교는 그저 나 혼자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는 서재나 다를 바 없었다.(163)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를 꼼꼼히 분석하여 그 바탕 위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점쳤다. 모든 정황, 모든 연결고리와 관계를 빠짐없이 고려하여 자본주의 문확을 꼼꼼히 분석하면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해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열일곱 살 때 나 스스로에게 던졌던 역사적 질문은 내가 역사가로서 나의 연구 방향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167)변증법적 유물론은 삼라만상의 이론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삼라만상을 보는 틀은 제공했다. 무기체와 유기체의 본성을 인간세계와 연결하고 집단과 개인을 연결하고 끝없이 유동하는 세계에서도 모든 상호작용의 기본 이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었다.(166)

에릭 존 어니스트 홉스바움. 호리호리하고 젓가락 같고 구부정하고 못생기고 머리는 금발인 열여덟 살 반 먹은 녀석, 이해력이 빠르고 피상적이지만 일반 상식이 대단히 많고 이론적이고 보편적인 영역에서 남다른 아이디어도 풍부하다. 거드름을 피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데 문제는 본인도 이것을 믿기 때문에 그만큼 더 위험하고 또 때로는 먹혀들 때가 있다는 것. 사랑에 빠지는 적은 없고 욕정을 승화하는 데 상당한 재주가 있어 보이는데, 자주 그런 건 아니지만 자연이나 예술을 감상하면서 맛보는 희열로 표현되기도 함. 도덕심은 전혀 없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쳤음. 어떤 사람은 그를 몸시 역겨워하고 어떤 사람은 좋아하지만 대다수는 그냥 우습게 봄. 혁명가가 되고 싶어 하지만 아직까지는 신통한 지도력을 보이지 못했음. 작가가 되고 싶어 하지만 자룔를 주무를 수 있는 역량과 끈기가 모자람. 태산을 옮겼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만 하지 신념은 없음. 허영과 자만에 빠져 있음. 겁이 많음. 자연을 정말로 사랑함. 독일어를 까먹고 있음.(169)

<7장 케임브리지>

나와 함께 대학을 다닌 학생들은 케임브리지 역사상 가장 빨갛고 급진적이었는데, 나는 그 한복판에 서있었다.(171)

실력이 있는 학생은 한 시간 동안 따분한 강의를 듣는 것보다 근사한 칼리지 도서관, 학과 도서관, 중앙 도서관에서 한 시간 동안 책을 읽을 때 더 얻을 것이 많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우리는 다른 실력있는 학생들과 토론을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8장 반파시즘과 반전투쟁>

1930년대에 영국의 명문 대학에 다니던 아주 똑똑한 학생들은 대거 좌파로 기울었다. (199)

<9장 공산주의자가 되다>

공산주의가 우리 세대의 가장 똑똑한 남녀를 왜 그렇게 많이 빨아들였는가 하는 물음과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우리한테 어떤 뜻이 있었는가 하는 물음은 20세기 역사에서 핵심주제가 되어야 한다. 내 친구 안토니오폴리토는 20세기에 가장 위력을 떨친 악마의 하나는 정치적 열정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처럼 20세기를 잘 나타내는 말은 없다. 그리고 그런 열정의 핵심을 꿰찬 것이 공산주의였다. (215)

공산주의는 사민주의를 거부했다. 노동당을 지지한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개인의 정치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깨닫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것은 어차피 공적 함의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217)

공산당에 남아 있다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쉽게 떠날 수 있는 공산당을 떠나지 않겠다는 선택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했기 때문이다.
.(218)

죽어가는 당원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이 당과 스탈린과 동지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당에 인생을 걸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당에 바쳤다. 그 대가로 우리는 당으로부터 승리한다는 확신과 형제애를 경험할 수 있었다.(226)

성배를 포기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한 것이다. 어디 포기하는 것이 우리뿐이겠는가?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없이 자유와 정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 없이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20세기에 실제로 그렇게 살다간 사람들을 기억조차 해주지 않고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254)

<10장 전쟁>

전쟁은 내 인생에서 6년 반을 앗아가 버렸다는 말로 가장 잘 요약된다. 나는 영국 군대에서 6년을 보냈다. 나한테는“좋은전쟁”도 “나쁜전쟁”도 아니었고 그저 “허망한 전쟁”이었다.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시기였다. (258)

<11장 냉전>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 온 사람들은 수용소에 있었던 티를 내지 않았다.살아남은 사람의 하루하루는 다른 누군가의 죽음으로 사들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295)

내가 억장이 무너졌던 것은 1950년대 중반에도 서평 두세 개의 원고료밖에 안되는 푼돈을 위로금이라고 던져주는 데 분개해서가 아니라 십중팔구 주제로 미루어보아 노동당 지지자로 보이는 원로학자의 조언으로 내 책이 퇴짜를 맞았다는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때문이었다(304)

<12장 스탈린과 그 후>
이념을 잃어버리는 아픔과 이념에 매달리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친구였던 사람들이 혹은 뭉치고 혹은 철천지원수로 갈라져서 반목하고 돌이킬 수 없이 불가항력으로 암벽을 향해 자갈길을 따라 내달리고 있다는 절박감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구속할 말과 행동의 내용을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견디기 어려운 긴장 속에서 버텨야 했던 그 몇 달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338)

그들은 공산주의라는 실패한 신을 섬기는 데서 해방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자기들이 해방되기 위해 그 신을 사탄으로 몰아붙였다. 냉전시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357)

나는 냉전의 한복판에서 그런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공산주의자로 성공함으로써 자신에게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자부심이 잘 났다는 것은 아니지만 못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았다. (357)

<13장 40대에 맞는 전환기>

지진이라든가 화산 폭발처럼 한눈에 재앙처럼 보이는 순간이 역사에도 있다. 한 사람의 인생살이에도 그와 비슷한 순간이 있다. 지리적 비유를 좀 더 쓰자면 분수령이라는 말이 참으로 적절해 보이는 순간도 있다. ...4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접어 들었던 1960년에 그런 분수령이 나의 삶에 찾아들었다.
(359)

나는 1970년대가 되어서야 그러니까 내 나이 쉰 줄로 접어들어서야 교수로서 정년도 보장받았고 학술원에도 들어갔고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378)

<14장 웨일스의 크니흐트 기슭>

클러프. 그가 만들거나 매만지려고 햇던 것은 건물이 아니라 석공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과 손길이 닿은 자연, 전망, 상징과 기념물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공간에서 살아가고 일하는 사람들의 소우주였다. 클러프가 생각한 환경은 “아름다운”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388)

<15장 1960년대>

1960년대에 제3세계는 혁명의 희망을 제1세계에게 다시 심어주었다. 국제사회를 열광시킨 두 주역은 쿠바와 베트남이었다. 혁명이 성공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마치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하듯이 약자가 최강자를 상대로 따낸 승리라는 데서 더 큰 뜻이 있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게릴라”라는 말은 세계 변혁의 열쇠로 인식되었다. (419)

20세기 후반의 역사에서 일어난 정말로 기념비적인 사건은 이념도 아니고 학생들의 대학 점거도 아니고 노동자들의 작업복이었던 청바지의 힘찬 진군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어디까지나 원칙의 문제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젊은 옷을 안 입기로 결심했고 또 실제로 안 입었다. 1960년대를 산 역사가에게 그것은 불리한 조건이었다. 국외자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1960년대에 대해 쓴 것은 청바지를 한번도 입은 적인 없는 자서전 집필자가 딱 쓸 수 있는 내용이다.(432)

<16장 정치 관람자>

마르크스주의자이든 아니든 혁명파든 개혁파든 우리는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바람직한 삶의 조건을 만들어줄 수 없는 체제라고 믿었다. 자본주의는 정의롭지도 않았고 장기적으로는 존립 가능하지도 않았다.(451)

산호초로 다가가는 망가진 거대한 유조선처럼 방향타를 잃은 소련은 해체의 길로 나아갔다. 그리고 결국은 침몰했다. 그리고 중단기적으로는 단순히 옛 소련에 살았던 민족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그 피해를 입었다.(458)

<17장 역사가들 속에서>

게다가 실력 있는 역사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역사가는 아무리 먼 과거를 다룬다 하더라도 과거를 탐구하다 보면 결국 현재와 눈앞의 사안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또 현재와 눈앞의 사안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477)


인간의 역사는 지구의 진화, 아니 우주의 진화라는 큰 틀 안으로 다시 끼워 넣어졌다. 우리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진정한 지구사의 틀을 갖게 되었다. 올바르게 중심의 자리를 되찾은 지구사는 인문학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연과학과 수학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런 지구사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에서 모두 필수적 역할을 하며 그 안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따로 놀지 않는다. 내가 다시 젊어져서 그런 지구사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482)

제가 보기에는 지식인의 삶은 판에 박힌 강단보다는 예술가의 삶에 더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 지적 활동의 형식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가 더할 나위없는 행복을 안겨준 활동은 사회학자라는 직업이었습니다. 사회학자 자리에 역사가만 집어넣으면 나는 이 말에 백번 동의한다. (483)

<18장 지구촌에서>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그들의 젊음과 젊음 특유의 패기, 열정, 희망, 무지, 미숙에 끌렸기 때문이지 학생들이 우르르 모여 있는 앞에서 내가 특별히 많은 것을 기대했기 때문은 아니다. (486)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전달했는지 확인하려면 천산 토론수어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나는 특수한 주제를 다루는 수업보다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수업이 더 마음에 들었다.(488)

나는 정말이지 즐겁고 편안하게 살았다. 여행도 많이 다녔고 아내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같이 다닐 때가 많았는데, 우리의 여행은 일과 발견과 휴가와 색다른 경험과 오랜 우정이 하나로 녹아든 것이었다. 아무리 가난에 찌들어도 살고 늘 재앙과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도 웃을 줄 알고 적어도 농담을 던질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로 나는 재미있게 살았다. 영웅적인 행동이나 시련도 없었고, 위험도 공포도 없는 전문지구 종사자의 삶이었다. (507)

나는 어릴 때 꾸었던 삶을 살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삶이 풀려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부질없고, 어리석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이렇게 속삭이는 작은 유령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이런 세상에서 마음 편히 지내서는 안 되지” 젊었을 때 내가 그 글을 열심히 읽었던 사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508)


<19장 마르세에즈>

프랑스는 중요한 자산이 있었다. 프랑스는 원하는 외국인 한테는 누구나 자신의 문명을 선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 문화는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가 덥석 받아들인 것이었다. (520)

나와 말이 통한 것이 마네의 올랭피아였다. 열다섯 살 먹은 사춘기 소년이 호사스럽고 느긋한 자태를 한껏 드러내면서도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관능적 쾌락에서도 벗어난 것처럼 초연해 보이는 벌거벗은 여자의 냉담하고 성숙한 시선에 압도당하여 옴짝달싹 못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작과의 만남을 내가 도저히 잊지 못하는 까닭은 관능미가 아니라 이 뛰어난 화가가 일시적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진실을 겨누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까놓고 말한다. 는 느낌이 들었다. (512)

<20장 프랑코에서 베를루스코니까지>

청춘을 넘기면 보통 사람은 웬만해서는 살아있다는 데서 순수한 희열을 맛보기가 어렵지만 이탈리아는 그 드문 기쁨의 순간을 열어주었다. 이탈리아는 또 역사가로서 탐구해 볼만한 주제를 안겨주었다.(578)

<21장 제3세계>

말을 타는 사람이 느끼는 공포를 말도 알아차리는 것처럼 사람도 상대방이 열등한 존재로 대접받으리라고 지레 짐작한다는 것을 직감으로 안다. 지배 계급과 정복자는 이렇게 알아서 기는 의식을 늘 이용해먹었다. 전쟁 전에 내가 사귄 ‘식민지’ 친구들은 자신들이 열등하다고생각하지 않았다.(592)

남미 국가들에서 첫눈에 지금도 나날이 벌어지기만 하는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보다도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남미를 찾는 외국인 학자들이 주로 어울리는 지배층이나 지식층과 보통 사람 사이의 엄청난 격차였다.(59

<22장 루스벨트에서 부시까지>

미국을 아는길로서 재즈는 다른 어떤 수단에도 꿀리지 않았다. (625)

모름지기 재즈를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미국에 관한 정보 중에서 조금이라도 재즈와 관련이 있는 내용은 죄다 우겨 넣어야 했다. (626)

미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그저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다. 미국은 줄기차게 이루어 내는 나라라야 한다. 다른 모든 나라를 합친것보다 우월하고 전 세계가 인정하는 모범으로 자리잡은 최고의 나라, 가장 위대한 나라로만 미국은 스스로를 인식한다. (652)

우리의 문제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모른다는것, 혹은 자신의 한계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미국은 자기편에 서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몰아붙인다 “미국의 세기”가 정점에 이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고충이자. 올해로 여든다섯인 나는 그 결과를 모지 못하고 눈을 감을 것이다.(660)


<23장 에필로그>

소리와 종이에 둘러싸여 침대에 누운 몸으로 나는 2002년 세계에는 어느때 보다 역사가가, 특히 의심 많은 역사가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늙은 역사가의 평생에 걸친 편력을 읽으면 젊은 역사가가 21세기의 어두운 전망에 그에 합당한 비관주의만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더 투명한 눈, 과거를 기억하는 역사 감각, 현재의 열풍과 장사판에서 거리를 두는 능력을 가지고 맞서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663)

우리 세대의 경우와는 달리 공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을 규정짓는 사건들의 시간적 계열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잘해야 머리로 이해하는 주제가 될 뿐이고 잘못하면 “우리 시대 이전”에 벌어진 잡다한 사건들의 일부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내 또래의 역사가들은 사람들이 세상을 다르게 보았던 과거의 중요한 지점, 그 또 다른 나라로 가는 여행의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다. 거기서 살아 보았기 때문이다.(664)

인생의 대부분을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았다. 타지에서 온 이방인처럼 이집트에서 태어났지만 그것은 나의 인생살이에서 아무런 뜻도 없다. 나는 여러 나라에 마음이 끌렸고 거기서 편하게 살았으며 그밖에도 많은 나라를 조금씩 보았다.(668)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672)



3. 내가 저자라면..

홉스봄 의 경험과 사상은 학자라는 틀을 훌륭히 넘어섰지만, (적어도 ‘미완의 시대’에서의) 글쓰기는 그렇지 못한 느낌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것은 학계의 인정을 받으려는 책이 아니라 감사와 사과를 담은 책이다”라고 써 두었다. 학계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좋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러나 작가라면 ‘독자의 인정’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의미가 잘 전달 되었다는 인정을 받고자 해야한다.

‘고객 중심’은 이제 경영학에서만 언급되는 개념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인쇄하여 나누어 줄 습작이 아니라면, 출판할 의도로 쓴 모든 책은 고객을 향해 써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잘 읽히는가?’는 좋은 책의 기본 요소다. 이 책은 훌륭한 통찰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달방법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작가가 사업가의 기질을 발휘하여 달콤한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독자들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성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다.” 고등학생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쉽고 명쾌한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미완의 시대’는 인물 사전?
우선,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기록이 아쉽다. 책에는 어림잡아 이삼백명의 새로운 이름들이 등장한다. 많아도 너무 많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주 짧고 간략하다. 군더더기 없을지는 몰라도 전체 맥락에서 벗어난 사례들이 많다. 흐름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내용, 이를테면 인물들을 만났던 당시 상황, 가족 사항, 그와 관련된 사항 등을 짧은 글에 담기에는 공간이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닐까. ‘미완의 시대’처럼 관찰자의 입장에서 쓴 피터드러커의 자서전과 비교해보면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드러커는 단지 자신의 인생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열일곱명에 대해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작가라면 드러커처럼 썼을 것이다.

사실적인, 너무 사실적인
역사학자답게 그는 객관적 사실들을 나열하고 있다. 마치 홉스봄의 뒤에서 카메라가 따라다는 듯한 문체이다. 그의 경험을 들추어보면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놀라운 경험들이 많은데도 그는 아주 담담하게 풀어낼 뿐이다. 예컨대 “루이 알튀세도 우울증으로 부인을 죽이기 얼마 전 한창 조증으로 들떠 있을 때 우리집에서 지냈다.”는 투의 담담함이다. 때로는 격한 감정이 묻어나올 법도 한데 그는 시종일관 입이 무겁다. 홉스봄이 책에서 “지식인의 삶은 판에 박힌 강단보다는 예술가의 삶에 더 가까운 면이 있다”라고 인용하였듯, 그의 글 역시 예술 작품처럼 조금 더 자유롭게 감정을 담아 표현해도 좋지 않았을까? 적어도 ‘자서전’이라는 개념으로 출판되는 책이라면 말이다. ‘미완의 시대’는 담백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맛깔나진 않다. 내용은 훌륭하나 가슴을 치고 들어오지 않는다.

자꾸 길을 잃어버려..!
문장이 너무 길어 호흡이 늘어진다. 대여섯 줄을 넘는 문장이 많고 심지어 하나의 문장이 열 줄을 넘는 것도 꽤 눈에 뜨인다. 이것은 번역의 오류일까? 긴 호흡 때문에 흥미로운 주제를 따라가다가도 이내 지쳐 길을 잃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게다가 괄호()를 지나치게 남발하는 것도 흐름을 끊어놓는 주범이다.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 부연 설명인 탓에 길에서 벗어나 한걸음 내달렸다 다시 돌아와야 한다. 나라면 ‘주’로 묶던가 과감하게 빼어버렸을 것이다. 중요한 내용은 다음 문장으로 넘겨 설명한 후 부드럽게 다시 흐름으로 당기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독자를 고려하여 쉽게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독자의 접근성은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요즈음 서점에 즐비한 ‘마시멜로 이야기’같은 스토리 텔링식의 읽기 편한 책이 좋은 책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간결함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작가라면 이름을 밝히지 못하여 미안해야 할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더라도 단순하고 보편적이게 썼을 것이다. 사람 수를 줄이고,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며 독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쓸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한 줌의 소금을 얻기 위해 바다를 끓일 필요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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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2007.03.12 11:38:47 *.133.120.2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어릴때부터 나는 구체적 현실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어차피 나는 현실과 책에서 배운 것과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41)"라는 구절이 마음에 듭니다. 상상의 세계는 무엇이든지 가능하게 하는 거 같아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도 오늘의 자신을 만든 8할이 동네 도서관이라고 했었는데, 에릭 홉스봄도 다르지 않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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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3.12 21:04:11 *.167.145.5
옹박!
귀자에게 푸로포즈 할 만한 실력자다. 넌 구선생님의 레이스에 끝까지 갈것 같다. 지금은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좀 더 공격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냄새가 물신 풍기는 문장을 구사해 보아라. 그건 귀자한테 배우거라.

공부 잘한 수재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인기 작가는 학교의 성적과 반비례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구선생님 문하에서 제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도 그 선상을 뛰어넘지 못하면 독자로 부터 사랑받질 못한다.

그나 저나 요번 연구생 레이스에 떨어지면 죽을 줄 알아라. 내가 단칼에 약지를 벨 터이니 알아서 해라. 공갈이다.
지금글은 88점이다. 다음은 90점되도록, A+ 알제,
```초아의 축하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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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13 00:16:15 *.140.145.63
각 리뷰에 댓글 하나 달겠다는 순수한 생각이 이렇게도 쉬운 일이
아닐줄이야.. 이것도 장난이 아니로구먼..ㅜㅜ(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지.. 컬럼에도 댓글 달려고 했는데..)

가장 신랄하고 냉정한 비평이 눈에 띄는군. 직접 읽어보진 않았지만
여러가지 배경으로 볼 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특성이겠지..

냉전시대에 왕따가 아닌 ‘창조적 별종’이라는 말에서 '창조적
부적응자'들로 가득찬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떠오르는건
나만의 생각은 아닐듯 하이..

그나저나 초아선생님께서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시는건 거의 첨
보는 일인데 그만큼 그대와 귀자에 대한 애정이 남다름을 증명하
는게 아닐까 싶구먼.. 열심히 하시게.. 더 중요한건 즐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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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3.13 00:48:15 *.142.243.157
그러게요.. 초아선생님의 옹박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듯 하네요.

옹박, 잘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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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3.13 01:12:21 *.72.153.12
옹박, 읽기 쉽게 잘 쓰는구나. 부럽다.
그래도 홉스봄 아저씨 좋아. 덤덤하기 때문에 파란만장한 인생에 고개가 끄덕여지던걸. 자서전으로 미루어봐서 내가 보기엔 홉스봄 아저씨 정말 잘난 아저씨인데, 많이 잘난체를 안하는 것도 좋고. 덤덤하게 써서 그렇게 느껴지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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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3.13 10:40:00 *.54.31.44
초아선생님, 단칼에 약지를.. ^^;
(귀자, 댓글보고 '초아샘 파이팅!' 또 이런거 하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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