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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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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3일 07시 17분 등록



허공에 스민 적 없는 날개는 다스릴 바람이 없다



                                       이은규



문득 놓치고, 알은 깨진다


깨지는 순간 혈흔의 기억을 풀어놓는 것들이 있다

점점의 붉음

어느 철학자는 그 혈흔을

날개를 갖지 못한 새의 심장이 아닐까 물었다

이미 흔적인 몇 점의 혈흔에서 심장 소리를 듣다니

모든 가설은 시적일 수밖에 없고

시간은 어떻게 그 가설들로 추상을 견디길 요구할까

시적인 철학자의 귀는 밝고, 밝고


날개를 갖지 못한 알 속의 새는 새일까, 새의 지나간 후생後生일까


경계도 없이 수많은 가설들로 붐비고

깨져버린 알이나 지난봄처럼

문득 있다가, 문득 없는 것들을 뭐라 불러야 하나


깨진 알에서 혈흔의 기억을 보거나

혹은 가는 봄날의 등에 얼굴을 묻거나

없는 새에게서 심장 소리 들려올 때

없는 봄에게서 꽃의 목소리 들려올 때

그 시간들을 살기 위해 견딤의 가설을 내놓는다

새가 되어보지 못한 저 알의 미지는 바람일 것

허공에 스민 적 없는 날개는 다스릴 바람도 없다

이음새가 없는 새의 몸

바람으로 머물던 흔적이 곧 몸이다

너무 멀리 날아가서 다스릴 수 없는 기억처럼

, 바람이 되지 못한 것들의 배후는 허공이 알맞다


새의 심장이 보내온

먼 곳의 안부를 깨진 알의 혈흔에서 듣는다


 

이은규 시집『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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