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1530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20년 1월 13일 03시 53분 등록



[1]


오은



1월은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엔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을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이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6월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7월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봅니다

그간 못 쓴 사족이

찬물에 융해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8월은 무던히도 덥습니다

온갖 몹쓸 감정들이

땀으로 액화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살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9월엔 마음을 다잡아보려 하지만,

다 잡아도 마음만은 못 잡겠더군요


10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책은 읽지 않고 있습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밤만 되면 꾸역꾸역 치밀어오릅니다

어제의 밥이, 그제의 욕심이, 그끄제의 생각이라는 것이


12월엔 한숨만 푹푹 내쉽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추위가 매섭습니다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몰라보게

주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잔고가 바닥났습니다

지난 1월의 결심이 까마득합니다

다가올 새 1월은 아마 더 까말 겁니다


다시 1,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1년만큼 더 늙은 내가

또 한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월에 있을 다섯 번의 일요일을 생각하면

각하(脚下)는 행복합니다


나는 감히 작년을 승화시켰습니다


 

오은 시집,『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문학동네, 2013


 20180804_180812.jpg




IP *.174.136.4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24 [시인은 말한다] 빗방울 하나가 5 / 강은교 정야 2022.01.03 1640
223 [리멤버 구사부]삶은 죽음을 먹는 것 정야 2017.10.28 1640
222 [시인은 말한다]허공에 스민 적 없는 날개는 다스릴 바람이 없다 / 이은규 정야 2021.12.13 1629
221 [시인은 말한다] 오래 말하는 사이 / 신달자 정야 2021.11.15 1625
220 [시인은 말한다] 제도 / 김승희 정야 2021.09.27 1622
219 [리멤버 구사부]오늘, 눈부신 하루를 맞은 당신에게 [2] 정야 2017.01.09 1613
218 [시인은 말한다] 깨달음의 깨달음 / 박재화 정야 2021.10.11 1587
» [시인은 말한다] 1년 / 오은 file 정야 2020.01.13 1530
216 [리멤버 구사부] 실재와 가상 정야 2021.12.31 1528
215 [리멤버 구사부] 한잠을 자고 일어나면 정야 2021.10.11 1525
214 [시인은 말한다] 작은 것을 위하여 / 이기철 정야 2021.10.25 1521
213 [리멤버 구사부] 자기 설득 file 정야 2020.11.09 1514
212 [리멤버 구사부] 삶에 대한 자각 정야 2021.11.15 1511
211 [시인은 말한다] 밖에 더 많다 / 이문재 file 정야 2020.11.30 1507
210 [리멤버 구사부] 나는 트리맨(treeman)이다 정야 2022.02.28 1506
209 [리멤버 구사부] 삶의 긍정, 그것은 이렇다 정야 2021.11.01 1499
208 [리멤버 구사부]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 file 정야 2020.07.20 1498
207 [시인은 말한다] 낯선 곳 / 고은 file 정야 2020.06.15 1479
206 [리멤버 구사부] 이해관계 없는 호기심 정야 2021.10.18 1476
205 [시인은 말한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정야 2021.01.25 14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