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 조회 수 1898
- 댓글 수 0
- 추천 수 0
제도
김승희
아이는 하루 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깔이 나갈까 봐 두려워한다.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
금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
엄마, 엄마,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되지? 그렇지?
아이의 상냥한 눈동자엔 겁이 흐른다.
온순하고 우아한 나의 아이는
책머리의 지시대로 종일 금 안에서만 칠한다.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나, 이렇게, 말해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게뭉게 꽃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나 그토록 제도를 증오했건만
엄마는 제도다.
나를 묶었던 그것으로 너를 묶다니!
내가 그 여자이고 총독부다.
엄마를 죽여라! 랄라.
김승희 시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1995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04 | [리멤버 구사부]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 | 정야 | 2020.07.20 | 1595 |
203 | [리멤버 구사부] 나보다 더한 그리움으로 | 정야 | 2021.12.13 | 1592 |
202 | [시인은 말한다] 밖에 더 많다 / 이문재 | 정야 | 2020.11.30 | 1591 |
201 | [시인은 말한다] 간절 / 이재무 | 정야 | 2021.03.08 | 1563 |
200 | [시인은 말한다] 따뜻한 외면 / 복효근 | 정야 | 2020.08.10 | 1562 |
199 | [시인은 말한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 정야 | 2021.01.25 | 1561 |
198 | [시인은 말한다] 낯선 곳 / 고은 | 정야 | 2020.06.15 | 1561 |
197 | [리멤버 구사부] 관계의 맛 | 정야 | 2020.10.26 | 1557 |
196 | [시인은 말한다]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따라가는 삶의 사소한 선택들 혹은 소금과 별들의 순환 이동 경로 / 박정대 | 정야 | 2020.07.27 | 1552 |
195 | [리멤버 구사부] 잃어버린 열정을 찾아서 | 정야 | 2020.12.07 | 1549 |
194 | [시인은 말한다] 눈풀꽃 / 루이스 글릭 | 정야 | 2020.10.19 | 1546 |
193 | [시인은 말한다]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 정야 | 2019.12.30 | 1546 |
192 | [리멤버 구사부] 나를 혁명하자 | 정야 | 2021.01.04 | 1545 |
191 | [시인은 말한다] 첫 꿈 / 빌리 콜린스 | 정야 | 2019.10.21 | 1542 |
190 | [리멤버 구사부] 고독의 인연 | 정야 | 2020.08.18 | 1537 |
189 | [시인은 말한다] 나무들 / 필립 라킨 | 정야 | 2021.05.03 | 1532 |
188 | [리멤버 구사부] 스스로의 역사가 [3] | 정야 | 2020.08.31 | 1530 |
187 | [시인은 말한다]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 정야 | 2021.04.05 | 1524 |
186 | [시인은 말한다] 대추 한 알 / 장석주 | 정야 | 2020.08.24 | 1519 |
185 | [리멤버 구사부] 좋은 얼굴 | 정야 | 2021.09.13 | 1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