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1907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21년 9월 27일 02시 07분 등록


제도

 

                            김승희

 

아이는 하루 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깔이 나갈까 봐 두려워한다.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

금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

 

엄마, 엄마,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되지? 그렇지?

아이의 상냥한 눈동자엔 겁이 흐른다.

온순하고 우아한 나의 아이는

책머리의 지시대로 종일 금 안에서만 칠한다.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 이렇게, 말해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게뭉게 꽃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나 그토록 제도를 증오했건만

엄마는 제도다.

나를 묶었던 그것으로 너를 묶다니!

내가 그 여자이고 총독부다.

엄마를 죽여라! 랄라.



 

김승희 시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1995



IP *.37.189.73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04 [리멤버 구사부] 나보다 더한 그리움으로 정야 2021.12.13 1608
203 [리멤버 구사부]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 file 정야 2020.07.20 1602
202 [시인은 말한다] 밖에 더 많다 / 이문재 file 정야 2020.11.30 1598
201 [시인은 말한다] 간절 / 이재무 정야 2021.03.08 1568
200 [시인은 말한다] 낯선 곳 / 고은 file 정야 2020.06.15 1566
199 [시인은 말한다] 따뜻한 외면 / 복효근 file 정야 2020.08.10 1564
198 [시인은 말한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정야 2021.01.25 1563
197 [리멤버 구사부] 관계의 맛 file 정야 2020.10.26 1560
196 [시인은 말한다]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따라가는 삶의 사소한 선택들 혹은 소금과 별들의 순환 이동 경로 / 박정대 file 정야 2020.07.27 1555
195 [리멤버 구사부] 나를 혁명하자 file 정야 2021.01.04 1551
194 [시인은 말한다] 첫 꿈 / 빌리 콜린스 file 정야 2019.10.21 1551
193 [리멤버 구사부] 잃어버린 열정을 찾아서 file 정야 2020.12.07 1550
192 [시인은 말한다]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file 정야 2019.12.30 1549
191 [시인은 말한다] 눈풀꽃 / 루이스 글릭 file 정야 2020.10.19 1548
190 [리멤버 구사부] 고독의 인연 file 정야 2020.08.18 1546
189 [시인은 말한다] 나무들 / 필립 라킨 정야 2021.05.03 1533
188 [리멤버 구사부] 스스로의 역사가 file [3] 정야 2020.08.31 1532
187 [시인은 말한다]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정야 2021.04.05 1528
186 [시인은 말한다] 대추 한 알 / 장석주 file 정야 2020.08.24 1525
185 [리멤버 구사부] 괜찮은 사람 되기 정야 2021.07.26 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