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 조회 수 1879
- 댓글 수 0
- 추천 수 0
겨울 들판을 거닐며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_ 허영만 시집, 『비 잠시 그친 뒤』, 문학과지성사, 1999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04 |
[리멤버 구사부] 자기 설득 ![]() | 정야 | 2020.11.09 | 1983 |
203 |
[시인은 말한다] 1년 / 오은 ![]() | 정야 | 2020.01.13 | 1938 |
202 | [시인은 말한다] 간절 / 이재무 | 정야 | 2021.03.08 | 1937 |
201 |
[시인은 말한다] 잃는 것과 얻은 것 / 헨리 왜즈워스 롱펠로 ![]() | 정야 | 2019.07.15 | 1932 |
200 |
[시인은 말한다] 난독증 / 여태천 ![]() | 정야 | 2020.07.13 | 1930 |
199 |
[리멤버 구사부] 관계의 맛 ![]() | 정야 | 2020.10.26 | 1923 |
198 |
[시인은 말한다] 낯선 곳 / 고은 ![]() | 정야 | 2020.06.15 | 1922 |
197 |
[리멤버 구사부]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 ![]() | 정야 | 2020.07.20 | 1914 |
196 |
[시인은 말한다] 눈풀꽃 / 루이스 글릭 ![]() | 정야 | 2020.10.19 | 1901 |
195 |
[시인은 말한다] 따뜻한 외면 / 복효근 ![]() | 정야 | 2020.08.10 | 1896 |
194 |
[리멤버 구사부] 나를 혁명하자 ![]() | 정야 | 2021.01.04 | 1895 |
193 |
[시인은 말한다]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 | 정야 | 2019.12.30 | 1892 |
192 |
[시인은 말한다]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따라가는 삶의 사소한 선택들 혹은 소금과 별들의 순환 이동 경로 / 박정대 ![]() | 정야 | 2020.07.27 | 1887 |
191 |
[시인은 말한다] 첫 꿈 / 빌리 콜린스 ![]() | 정야 | 2019.10.21 | 1887 |
190 |
[시인은 말한다] 푸픈 힘이 은유의 길을 만든다 / 배한봉 ![]() | 정야 | 2019.08.26 | 1887 |
189 |
[시인은 말한다]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 이근화 ![]() | 정야 | 2019.02.25 | 1887 |
» | [시인은 말한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 정야 | 2021.01.25 | 1879 |
187 | [시인은 말한다] 꿈, 견디기 힘든 / 황동규 | 정야 | 2019.05.20 | 1874 |
186 | [시인은 말한다] 나무들 / 필립 라킨 | 정야 | 2021.05.03 | 1871 |
185 | [시인은 말한다]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 정야 | 2021.04.05 | 18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