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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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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1일 01시 38분 등록



[첫 꿈]



빌리 콜린스



 

황량한 바람이 유령처럼 불어오는 밤

잠의 문전에 기대어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꿈을 꾸었던 사람을,

첫 꿈에서 깨어난 날 아침 그는 얼마나 고요해 보였을까

 

자음이 생겨나기도 오래 전

짐승의 표피를 몸에 두른 사람들이

모닥불 곁에 모여 서서

모음으로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는 아마도 슬며시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바위 위에 걸터앉아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 깊은 곳을 내려다보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떻게 가지 않고도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었단 말인가, 홀로 생각에 잠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돌로 쳐 죽인 뒤에만 만질 수 있었던

짐승의 목에 어떻게 팔을 두를 수 있었던 것일까

살아 있는 짐승의 숨결을 어찌하여 그리 생생하게

목덜미에 느낄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거기, 한 여인에게도

첫 꿈은 찾아왔으리라.

그가 그랬듯이 그녀 역시 홀로 있고 싶어

자리를 떠나 호숫가로 갔겠지

 

다른 것이 있었다면 젊은 어깨의 부드러운 곡선과

가만히 고개를 숙인 모습이 몹시도

외로워 보였을 것이라는 것 뿐, 만일 당신이

거기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녀를 보았더라면

 

당신도 그 사람처럼 호숫가로 내려갔으리라. 그리하여

타인의 슬픔과 사랑에 빠진 이 세상 첫 남자가 되었으리라.

 


『오늘의 미국 현대시』,임혜신 역, 바보새,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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