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 조회 수 1130
- 댓글 수 0
- 추천 수 0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시집『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다산책방, 2014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64 | [시인은 말한다] 꿈, 견디기 힘든 / 황동규 | 정야 | 2019.05.20 | 1382 |
163 | [시인은 말한다] 잎 . 눈[雪] . 바람 속에서 / 기형도 | 정야 | 2020.12.14 | 1378 |
162 | [시인은 말한다] 수면 / 권혁웅 | 정야 | 2020.06.29 | 1373 |
161 | [리멤버 구사부] 인생은 불공평하다 | 정야 | 2019.04.01 | 1370 |
160 | [리멤버 구사부] 나보다 더한 그리움으로 | 정야 | 2021.12.13 | 1367 |
159 | [리멤버 구사부] 우연한 운명 | 정야 | 2020.11.23 | 1367 |
158 | [리멤버 구사부] 언제나 시작 | 정야 | 2020.07.06 | 1363 |
157 | [시인은 말한다] 시간들 / 안현미 | 정야 | 2019.12.02 | 1361 |
156 | [시인은 말한다] 오늘의 결심 / 김경미 | 정야 | 2019.12.16 | 1360 |
155 | [시인은 말한다] 동질(同質) / 조은 | 정야 | 2021.02.22 | 1355 |
154 | [리멥버 구사부] 인문학적 감수성을 키워라 [1] | 정야 | 2017.07.14 | 1354 |
153 | [시인은 말한다] 넥타이 / 나해철 | 정야 | 2020.01.28 | 1353 |
152 | [시인은 말한다]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 이진명 | 정야 | 2019.11.04 | 1352 |
151 | [시인은 말한다] 나는 새록새록 / 박순원 | 정야 | 2021.02.08 | 1350 |
150 | [시인은 말한다] 밀생 / 박정대 | 정야 | 2021.04.19 | 1347 |
149 | [리멤버 구사부] 가치관에 부합하게 | 정야 | 2020.10.11 | 1346 |
148 | [시인은 말한다]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 정야 | 2019.11.18 | 1343 |
147 | [리멤버 구사부] 실천의 재구성 | 정야 | 2021.03.02 | 1342 |
146 | [리멤버 구사부] 체리향기 [4] | 정야 | 2017.01.16 | 1342 |
145 | [시인은 말한다] 자유 / 김남주 | 정야 | 2019.08.20 | 13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