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 조회 수 1067
- 댓글 수 0
- 추천 수 0
송산서원에서 묻다
문인수
마을 뒤, 산 밑에 오래 버려진 송산서원에서
나는 폐허에게 묻는다. 이쯤에서 그만 풀썩 무너지고 싶을까.
이것 저것 캐묻는다.
찔레 덤불이 겹겹 앞을 가로 막으며 못 들어가게 한다.
돌아서고 싶을까. 찔레 가시에 찔리며 억지로 들어선 마당, 그리고 뒤꼍.
풀대들, 풀떼며 잡목들이 불학무식하다. 공부하고 싶을까. 작은 마루에 방 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까.
기둥과 기둥 사이에 줄을 쳐, 토종 강냉이 수십 다발을 주렁주렁 널어두었다.
산새 부리들, 들쥐 다람쥐 청설모… 잇자국들이 대를 이어 상세하다.
이 빠진 세월은 또 얼마나 길까. 누군가 버리고 간 한 무더기 세로쓰기 책들,
대강 넘겨보니 사법고시 준비를 한 것 같다. 그리고 취사도구 몇 잘살까.
거미줄이며 먼지가 이렇게 힘세다. 작파했을까.
이 방 저 방 마구 부서져 널려 있는 것들 중에 격자무늬문짝 몇 개가 그나마 그래도 쓸 만하다. 사방, 닫아걸고 싶을까.
마당을 다시 잘 살펴보니 풀숲에 작은 웅덩이 흔적이 두 군데, 이쪽저쪽 숨어있다.
썩은 꺾꽂이 같은 세월, 깜깜 눈감고 싶을까.
나는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과거지사란 남몰래 버티는 것, 대답하지 않는다.
문인수 시집, 『배꼽』, 창비, 2008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24 | [시인은 말한다]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 정야 | 2019.11.18 | 924 |
123 | [리멤버 구사부] 삶의 긍정, 그것은 이렇다 | 정야 | 2021.11.01 | 923 |
122 | [시인은 말한다] 동질(同質) / 조은 | 정야 | 2021.02.22 | 922 |
121 | [리멤버 구사부] 치열한 자기혁명 | 정야 | 2021.06.14 | 920 |
120 | [리멤버 구사부] 한잠을 자고 일어나면 | 정야 | 2021.10.11 | 917 |
119 | [리멤버 구사부] 변화의 이중성 | 정야 | 2020.05.11 | 916 |
118 | [리멤버 구사부] 한 달의 단식 | 정야 | 2019.09.02 | 916 |
117 | [시인은 말한다] 심봤다 / 이홍섭 | 정야 | 2020.03.23 | 907 |
116 | [리멤버 구사부]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 | 정야 | 2017.12.26 | 906 |
115 | [리멤버 구사부]내가 가지고 가는 것은 꿈과 추억이다 | 정야 | 2017.10.04 | 906 |
114 | [리멤버 구사부] 묘비명 | 정야 | 2020.04.13 | 905 |
113 | [리멤버 구사부] 흐르는 강물처럼 | 정야 | 2017.10.30 | 905 |
112 | [리멤버 구사부] 나는 트리맨(treeman)이다 | 정야 | 2022.02.28 | 898 |
111 | [리멤버 구사부] 정면으로 살아내기 | 정야 | 2019.10.14 | 897 |
110 | [리멤버 구사부] 꿈이란 [1] | 정야 | 2017.06.28 | 897 |
109 | [리멤버 구사부] 나눈다는 것 | 정야 | 2020.01.20 | 891 |
108 | [리멤버 구사부] 오늘을 실천하라, 내일 죽을 것처럼 | 정야 | 2019.05.27 | 889 |
107 | [리멤버 구사부] 어울리는 사랑 | 정야 | 2019.02.07 | 889 |
106 | [시인은 말한다] 통속 / 정끝별 | 정야 | 2020.02.24 | 886 |
105 | [시인은 말한다]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 복효근 | 정야 | 2020.02.10 | 8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