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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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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3일 02시 58분 등록





[자작나무]



로버트 프로스트


 


꼿꼿하고 검푸른 나무 줄기 사이로 자작나무가


좌우로 휘어져 있는 걸 보면


나는 어떤 아이가 그걸 흔들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흔들어서는 눈보라가 그렇게 하듯 나무들을 아주 휘어져 있게는 못한다.


비가 온 뒤 개인 겨울 날 아침


나뭇가지에 얼음이 잔뜩 쌓여 있는 걸 본 일이 있었을 것이다.


바람이 불면 흔들어 딸그락거리고


그 얼음 에나멜이 갈라지고 금이 가면서


 오색 찬란하게 빛난다.


 어느새 따뜻한 햇빛은 그것들을 녹여


 굳어진 눈 위에 수정 비늘처럼 쏟아져 내리게 한다.


 그 부서진 유리 더미를 쓸어 치운다면


 당신은 하늘 속 천정이 허물어져 내렸다고 생각할런지도 모른다.


 나무들은 얼음 무게에 못 이겨 말라 붙은 고사리에 끝이 닿도록 휘어지지만,


 부러지지는 않을 것 같다. 한 번 휜 채


 오래 있으면 다시 꼿꼿이 서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리하여 세월이 지나면


 소녀들이 햇빛에 머리를 말리려고


 무릎과 손을 바닥에 대고 몸을 구부려


 머리칼을 앞으로 내리고 있듯이


 잎사귀들을 땅 위에 끌며


 몸통이 휘어진 나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얼음 사태라는 사실로


 진실이 드러났을 때 내가 말하려고 했으나


 어떤 아이가 소들을 데리러 나갔다 오니


 나는 그 애가 나무들을 휘어지게 하지 않았을까 했다.


 -아주 구석진 시골에서 야구도 배우지 못하고


 놀이라곤 혼자 생각해낸 것뿐이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혼자서 놀았을 어떤 소년.


 그는 아버지가 키우는 나무들을 하나씩


 가지가 휠 때까지


 나무들이 모두 축 늘어질 때까지


 되풀이해 타고 오르내리며 정복했다.


 그는 나무에 너무 급히 오르지 않는 법을


 그리고 나무를 뿌리채 뽑아버리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는 언제나 나무 꼭대기에 오르는 자세를 취하고


 우리가 잔을 채워 막 넘치게 할 때처럼


 조심스레 기어올랐다.


 그리고 몸을 날려 먼저 발을 내려 딛고


 휘익 바람을 가르며 땅으로 뛰어 내렸다.


 한 때 나 자신도 그렇게 자작나무를 휘어잡는 소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한다.


 걱정이 많아지고


 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과 같아서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근질거릴 때,


 그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


 한 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


 나는 이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또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러나 운명의 신이 고의적으로 나를 오해하지 않기를,


 내가 바라는 것을 절반만 들어 주어 나를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하게 아주 데려가 버리지 않기를.


 세상은 사랑하기에 좋은 곳,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자작나무를 타며 가고 싶다,


 눈 같이 흰 나무의 몸통 위 검은 가지들에 오르고 싶다,


 나무가 더 견디지 못할 때까지 하늘 높이 올라


 나무 꼭대기를 늘어뜨려 내가 다시 내려오도록.


 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좋은 일이리라.


 자작나무 흔드는 이보다 더 나쁘게 될 수 있으니.


 


R.프로스트 『불과 얼음』,정현종 역, 민음사, 1997


 20180804_17430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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