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208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9년 2월 11일 03시 54분 등록



[]


정호승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한때 벽 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 속의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

물 한잔에 빵 한조각을 먹을 뿐이다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이 짧은 시간 동안』,정호승시집, 창비, 2004


20181017_184049.jpg

 


IP *.174.136.4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4 [리멤버 구사부] 오늘을 실천하라, 내일 죽을 것처럼 정야 2019.05.27 1494
103 [시인은 말한다] 꿈, 견디기 힘든 / 황동규 정야 2019.05.20 1655
102 [리멤버 구사부] 우리가 진실로 찾는 것 정야 2019.05.20 1299
101 [시인은 말한다] 봄밤 / 김수영 file 정야 2019.05.20 2089
100 [리멤버 구사부] 부하가 상사에 미치는 영향 file 정야 2019.04.29 1504
99 [시인은 말한다]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file 정야 2019.04.22 1530
98 [리멤버 구사부] 죽음 앞에서 file 정야 2019.04.15 1472
97 [시인은 말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랜터 윌슨 스미스 file 정야 2019.04.08 2291
96 [리멤버 구사부] 인생은 불공평하다 file 정야 2019.04.01 1594
95 [시인은 말한다] 상처적 체질 / 류근 file 정야 2019.03.25 1508
94 [리멤버 구사부] 시처럼 살고 싶다 file 정야 2019.03.25 1318
93 [시인은 말한다] 꿈꾸는 사람 / 라이너 마리아 릴케 file 정야 2019.03.11 1483
92 [리멤버 구사부] 도약, 그 시적 장면 file 정야 2019.03.04 1513
91 [시인은 말한다]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 이근화 file 정야 2019.02.25 1679
90 [리멤버 구사부] 흐름에 올라타라 file 정야 2019.02.25 1198
» [시인은 말한다] 벽 / 정호승 file 정야 2019.02.11 2085
88 [리멤버 구사부] 어울리는 사랑 file 정야 2019.02.07 1515
87 [시인은 말한다] 늦게 온 소포 / 고두현 file 정야 2019.01.28 1638
86 [리멤버 구사부] 사람의 스피릿 file 정야 2019.01.21 1172
85 [시인은 말한다] 삶은 계란 / 백우선 file 정야 2019.01.21 1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