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134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9년 2월 11일 03시 54분 등록



[]


정호승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한때 벽 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 속의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

물 한잔에 빵 한조각을 먹을 뿐이다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이 짧은 시간 동안』,정호승시집, 창비, 2004


20181017_184049.jpg

 


IP *.174.136.4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44 [시인은 말한다] 너에게 보낸다 / 나태주 file 정야 2020.09.21 1775
243 [시인은 말한다] 새출발 / 오보영 file 정야 2019.07.05 1684
242 [시인은 말한다]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 / 다니카와 슌타로 정야 2021.11.22 1474
241 [시인은 말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랜터 윌슨 스미스 file 정야 2019.04.08 1467
240 [시인은 말한다]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file 정야 2020.10.05 1429
239 [시인은 말한다] 자작나무 / 로버트 프로스트 file 정야 2019.09.23 1347
» [시인은 말한다] 벽 / 정호승 file 정야 2019.02.11 1345
237 [시인은 말한다] 은는이가 / 정끝별 정야 2021.09.06 1327
236 [리멤버 구사부] 매일 같은 시각 한가지에 집중하라 [1] 정야 2017.07.21 1309
235 [시인은 말한다] 봄밤 / 김수영 file 정야 2019.05.20 1304
234 [리멤버 구사부]오늘, 눈부신 하루를 맞은 당신에게 [2] 정야 2017.01.09 1293
233 [시인은 말한다] 영원 / 백은선 정야 2021.07.12 1284
232 [시인은 말한다] 그대에게 물 한잔 / 박철 file 정야 2020.11.16 1274
231 [시인은 말한다] 친밀감의 이해 / 허준 file 정야 2020.11.02 1273
230 [시인은 말한다] 함께 있다는 것 / 법정 정야 2021.08.09 1257
229 [시인은 말한다] 픔 / 김은지 정야 2020.12.28 1254
228 [리멤버 구사부]삶은 죽음을 먹는 것 정야 2017.10.28 1254
227 [리멤버 구사부] 마흔이 저물 때쯤의 추석이면 file 정야 2020.09.28 1248
226 [시인은 말한다] 직소폭포 / 김진경 정야 2021.08.23 1217
225 [리멤버 구사부] 도토리의 꿈 정야 2021.08.30 1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