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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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김승희
아이는 하루 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깔이 나갈까 봐 두려워한다.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
금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
엄마, 엄마,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되지? 그렇지?
아이의 상냥한 눈동자엔 겁이 흐른다.
온순하고 우아한 나의 아이는
책머리의 지시대로 종일 금 안에서만 칠한다.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나, 이렇게, 말해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게뭉게 꽃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나 그토록 제도를 증오했건만
엄마는 제도다.
나를 묶었던 그것으로 너를 묶다니!
내가 그 여자이고 총독부다.
엄마를 죽여라! 랄라.
김승희 시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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