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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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대담, 이끌리오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은 1904년 가톨릭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심층 정서는 평생 동안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캠벨은 고집이 무척 셌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자신이 하고자 하는대로만 했다고 한다. 부모님이 그걸 허락해 주었고 감사히 여긴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인디언 문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때의 호기심이 청년 시절까지 이어져 비교신화학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에서는 신화학과 무관한 전공을 공부했다. 기회가 생겨 유럽의 파리와 뮌헨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황금 같은 시절에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괴테, 슈펭글러, 프로베니우스, 카를 융, 피카소 등 현대의 정신문화를 일군 인물들의 책과 조우하게 됐다. 청년 시절 만난 이들은 캠벨의 평생에 걸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영문학 대신 인도 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원했으나 학교에서는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오?”라고 외치며 캠벨은 대학을 떠났다. 그리고 그 유명한 ‘우드스톡에서의 5년’을 맞게 된다. 대공황 시절이라 취업하기도 힘든 시절이기도 해 그렇게 됐다. 그곳에서 그는 평소 읽고 싶었던 수많은 책들을 섭렵하며 평생 연구의 기틀을 잡게 된다. 그 후 캔터베리 스쿨에서 어학 교사를 거쳐, 중산층 여학생들이 다닌다는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38년간 학생들을 가리키는 일을 했다.
캠벨은 공부하며 전 세계의 신화가 그 내용을 같이 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 그를 바탕으로 40대에 들어 그의 첫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쓰게 됐다. 이 책은 전문 학자들 사이에서 아주 중요한 책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저술하며 자신이 살아오며 가져온 믿음이 맞다는 걸 재확인하게 되었다는 그의 주저(主著) <신의 가면> 4부작을 발표한다. 그리고 말년에 ‘신화’의 대중화에 기여하게 된 <신화의 힘>이란 책을 내게 되었다. 그의 저작을 지켜보면 처음에는 전문이자 잡학가로 출발하여, 자기 평생의 연구를 정리하는 연구가가 되었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신화의 중요성을 알리는 안내자로 생을 마쳤다.
캠벨의 중요성을 보자. 그는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다르지 않다는 걸 알려주었다. 카를 융 식으로 말하면 ‘집단무의식’인데 캠벨은 인간의 영적이고 심층 내면의 모습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발견하고 인류에게 강한 확신을 주었다. 또한 현대 사회가 ‘의례’를 잃어가면서 사람들이 분열되고 병들어간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또한 영웅 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알려주었다. 신화의 영웅적인 인물들을 빌어 현대의 각 개인들도 자신만의 영웅 여정을 마쳐야한다는 점을 이야기해 준다. 캠벨과 기독교의 관계성도 빼놓을 수 없다. 서양의 뼈대를 이루는 축의 하나여서 그는 그리스도의 이야기도 많이 했다.
캠벨은 현대 사회가 살아 생동하게 했다. 옛날에는 집단에 생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샤먼들이 맡았다. 현대 사회에서는 신화적 영감을 지닌 예술가들이 그 역할을 한다. 지금 시대는 ‘창조성’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있다. 그것은 ‘개인성’에서 나온다고 많은 연구 결과 밝혀지고 있는데, 이 부분을 캠벨은 예전부터 알려주고 있다. 또한 캠벨은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천복’을 따라 나서라며 용기를 주었다. 현실적 제약으로 많은 젊은이들의 현실에 안주하는 결정을 내리는데, 캠벨은 영웅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기 내면의 소리에 깊이 귀를 기울이라며 젊은이들을 지지해 주었다.
캠벨은 또한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 등 현대 문학의 문제아와 총아의 작품이 지닌 깊은 의미를 해설해 주었다. 조이스는 현대 사회의 모습이 결코 옛날 신화적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훌륭히 밝혀냈다. 인생이란 슬픈 것이고, 삶은 죽음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 것이라는 매우 분명한 점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의 자비를 알려면, 우리는 순종하지 않고 죄를 지어보라고 그는 지적한다. 생의 충동을 억제하지 마라. 죽음이 생명을 태어나게 한다. 그러므로 삶을 두려워하지 마라. 토마스 만은 기성의 기계적인 삶의 모습은 태초 인류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고 쓰고 있다. 현실적인 제약에 따라 현대의 많은 젊은이들도 기성의 사회에 편입된다. 그는 생이 충만한 밝은 대로로 그들을 이끈다. 거짓된 모습을 버리고 진실에 진실한 삶의 모습을 이야기 한다. 그것이 이들 작가들이 신화에 빗대어 글을 쓰고 있는 점이라고 캠벨은 전해준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옮긴이의 말
7.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는 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고 이것을 분석하면서 신화와 종교에 관해 무수한 질문을 제기하던 그가,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뒤에 펴내는 이 <신화의 힘>에서는 바로 그 신화와 종교에서, 궁극적인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모습을 읽어내고는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휩쓸리면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빌 모이어스의 서문
8. 그가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의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經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침을 마련한 일이었다. 조이스가 말한, ‘참으로 엄연하고 항시적인’ 인간의 고뇌에서 캠벨은 바로 고대 신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읽었다.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언젠가 고통이라는 주제를 놓고 대담할 때 그는 조이스의 이름과 함께 ‘이그쥬가르쥬크(Igjugarjuk)’라는 말을 꺼냈다.
“이그쥬가르쥬크가 뭡니까?”
나는 발음을 겨우 시늉하면서 물었다. 캠벨이 대답했다.
“아, 이그쥬가르쥬크 말이오? 북부 캐나다 카리부 에스키모의 샤먼이었소. 이 사람은 유럽 손님들에게,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隱居)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을 했지요.”
12. 조셉 캠벨은 인생을 모험이라고 확신한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오?”
봉직하던 대학의 이사진이 좁으장한 학교의 커리큘럼으로 자기를 잡아두려 했을 때 캠벨이 내뱉은 말이다. 그는 박사 과정을 밟아 박사가 되는 것도 마다하고 책의 숲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그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양을 읽으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문화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역사, 종교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며칠 뒤 나는, 아주 중요한 잡지를 편집하고 있다는 그의 옛 제자에게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그 옛 제자는 나와 캠벨이 만든 텔레비전 시리즈물을 보고는, 문득 나에게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실에서 ‘숨을 죽이고 강의를 듣던 학생’에게 쏟아지던, ‘지적 가능성을 강타하는 에너지의 폭풍’을 상기시키고 싶어서 편지를 썼노라고 했다.
13. 그는 뉴욕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인디언의 토템 기둥과 가면에 매료당한다. 소년은 그런 것들을 보면서 상념에 잠긴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무슨 뜻일까?
14. 그는, 큰 스승들이 그러하듯 예증을 통하여 가르친다. 말을 통하여 믿음으로 이끄는 일은 그가 좋아하는 방법이 아니다.(아내 진에게 구혼할 때 이 방법을 쓴 것을 보면 딱 한 번은 예외를 허용한 모양이다.) 그는 나에게 가르침의 방법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 텐데 말이오.”
17. 그러면서 그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를 인용하거나, 『코란』에 나오는 말, “너희는, 선인(先人)이 겪은 것과 같은 시련을 겪지도 아니하고 지복(至福)의 낙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를 인용하고는 한다.
17. 캠벨은 이 이야기 끝에, “여기에 종교의 귀한 메시지가 있지요. 즉 ‘너희가 참으로 하찮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이 곧 신에 대한 대접이 되느니라’ 라는 메시지가 그것이랍니다” 하고 덧붙였다.
18. 그는 세계의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신들이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까닭을, 이 수많은 문화의 가지에서 서로 비슷한 이야기ㅡ창세, 처녀 수태, 신자 성육(神者成肉), 죽음과 부활, 재림 그리고 최후의 심판 이야기ㅡ가 생겨나는 까닭을 알고자 한다. 그는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18.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그러나 이 신화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다른 까닭은 각 문화권에 따라 마땅히 자각하여야 할 삶 자체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20. 그러나 나는 조셉 캠벨을 만나고 나서야, 우리가 토요일에 마티니를 마시면서 시청하는 서부극이 사실은 그 이야기를 고대의 이야기에서 차용한 것이라는 점, 우리가 주일 학교에서 들은 이야기가 사실은 고도로 영적인 모험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던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 필명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 하느님이라는 궁극적인 실체를 깨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이야기와 동일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20. 그가, 신화를 지나치게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해석한다, 신화를 당대적 역할을 지나치게 이념적·치료적 기능에 국한시키는 듯하다는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반대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가르치는 일,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다.
21. “글쎄요, 우리에게 종교적 이념 같은 게 있는 것 같지 않군요. 신학도 없고요. 우리는 춤을 출 뿐이지요.”
그렇다. 캠벨도 춤을 추었다.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다.
제1장 신화와 현대 세계
25.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옛날에는 대학의 캠퍼스 하면 일종의 철저하게 열린 사회였지요. 그래서 나날의 내면적 삶이, 우리가 전통으로 물려받은 분들, 말하자면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불릴 수 있는 분들인 플라톤, 공자, 석가, 괴테 등 우리 삶의 중심과 관련된 영원한 가치를 좇으라고 한 분들에 대한 관심과 상충되지 않았어요.
28. 이어서 토니오는 “작가는 진실에 진실해야 한다”고 씁니다. 그런데 토니오가 진실에 진실하면서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왜냐,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세상을 떠날 즈음의 석가가 어떠했습니까? 석가의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한 모습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토마스 만의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28.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데다, 몸은 조그만데 머리는 터무니없이 크니, 사랑스럽지 않은가요? 일곱 난쟁이를 그려낸 월트 디즈니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집에서 기르는 우스꽝스런 강아지를 보세요. 불완전해서 사랑스러운 겁니다.
29. ……거기에 그런 삶에 관한 지혜를 터득하는 젊은이가 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됩니다.
30. 자, 결혼을 예로 들어볼까요? 결혼이 뭐지요? 신화는 결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연애 같은 것과는 달라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오랫동안 연애하던 사람이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결혼하고 나서는 얼마 되지 않아서 갈라서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왜 갈라설까요? 이른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정말과 함께 끝나는 것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만일 상대의 관능적 관심에 이끌려 결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번지수를 틀리게 찾은 거예요. 상대를 잘못 짚은 거지요.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32. 그건 결혼이 아니라니까요. 감히 말합니다만,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가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둘은 실제로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33.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젊은이의 결혼은 어느 대목에 이르면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드는데, 이것이 내가 바로 ‘연금술적 단계’라고 이름붙인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단계에서 부부는 내가 앞서 말한 희생의 의미를 서로 아름답게 깨닫게 됩니다.
34.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검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 아닙니까?
35. 바로 그겁니다. 사춘기 의례가 필요한 까닭이 거기에 있지요. 원시 사회에서는 이빨을 쪼아낸다거나 몸에 상처를 낸다거나 할례(割禮)를 베풀거나 하는 사춘기 의례가 있었어요. 이러한 의례를 거치면 어린이의 몸은 더 이상 어린이의 몸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36.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37. 그런데 대학에서는 작은 강의실밖에는 배정해주지 않아요. 왜 이렇게 작은 강의실을 배정해주는지 아세요? 학교 당국자들이 학생들의 내부에 충만해 있는 열기를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38. 그런 전문가가 이로쿼이즈 인디언과 알곤퀸 인디언의 차이가 뭐냐고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가 있겠어요?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볼 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학자들을 이렇게 부르면 큰일납니다만)는 전문화한 문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41. 젊은 사람들은 덥석 집더군요.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42. 그래서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44. 우리의 어린 세대는 앞 세대에게서 배운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고, 정작 들여다보아야 할 내면은 무시한 채 엉뚱한 내면만 기웃거리고 있어요.
45. 이 임무야말로 신비 여행처럼 보입니다. 이 임무에는 신비 여행의 전형적인 요소가 모두 고루 들어 있어요. 첫째, 거기에는 세속적인 삶과 유리되는 단계가 있어요. 이 여행을 떠는 사람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기가 실제 생활에서 저지른 과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백해야 한답니다. 고백하지 않으면? 신비 여행은 영험이 없어지지요. 과실을 빠짐없이 고백한 다음에야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47.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48.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56. 만일 어떤 종교에 진정으로 몸을 담고, 진정으로 그 종교를 통하여 삶을 지어나가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그래요, 아주 잘 가지고 놀지요) 나 같은 작자는 성인들의 경험에 견줄 수 있을 만한 경험은 평생 해보지 못하고 말 겁니다.
58. 각기 새로운 신화가 필요하지요. 원수를 사랑하라, 열어라, 남을 평론하지 말라! 이것은 모두 불교에 있는 겁니다. 신화에 있는 겁니다.옛날부터 있어 왔어요.
모이어스 : 언젠가 한 밀림의 토인들 이야기를 하셨지요? 토인들은 선교사에게 “당신네 신은 문을 꽁꽁 처닫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늙어서 병이라도 든 것처럼. 그러나 우리 신은 밀림에도 있고, 벌판에도 있고, 산꼭대기에도 있다, 비가 올 때도 있다”, 이렇게 말했다지요? 사실인 것 같습니다만.
60. 신화의 뼈대가 되는 모티프는 같아요. 옛날부터 그래왔어요. 우리의 신화학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자기가 사회의 어떤 동아리에 속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요. 모든 신화학은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 자라납니다. 그런 신화학이 밖으로 나오면서 충돌하고, 충돌을 거쳐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여기에서 혼효(混淆)를 거치면서 더욱 복잡다단한 신화학이 됩니다.
64.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 미합중국이 좋은 예입니다. 애초에 미합중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열세 개의 조그만 식민지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은 무시하고 오로지 상호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을 함께할 것을 결의하면서 태동합니다.
71. 그렇지요. 인류는 기원전 5백 년경에 큰 전기(轉機)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만일에 ‘노자’가 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설이 옮다면)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천체 운행의 아날로지를 길잡이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는 이성을 길잡이로 했던 것이지요.
75. 도덕률을 말하는 겁니다. 좋은 사회라면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고 믿어지는 우리 삶의 법 같은 것 말이지요.
78. 달에서 지구를 보면 국경 같은 게 안 보이잖아요? 이것은 미래 신화를 위한 대단히 중요한 상징 같습니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나라가 이러한 나라이고, 우리가 한 겨레가 되어야 하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인 것이지요.
제2장 내면으로의 여행
85.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89.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89. 그들은 모두 자기네의 방패막이가 되는 사회에서 뛰쳐나와 미지의 어두운 숲으로, 불의 세계로, 원초적인 경험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이지요.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해석되어 있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에 범접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은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96.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100. 모이어스 : 타락의 책임을 물어 이브를 쫓아냄으로써 여성을 몹쓸 것으로 치부하는 것 같은 것이요? 타락의 책임을 왜 여자가 지게 된 것입니까?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對極)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102. 최상의 것은 생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표(言表)될 수 없습니다. 차상(次上)은 오해됩니다. 왜냐,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이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좋은 것이 바로 우리가 언표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언표되는 장(場)이랍니다.
104. 즉 밀교에 따르면, 한 개인이 일련의 입문 의례를 통하여 자기의 깊은 곳을 하나 하나씩 드러내다 보면, 이윽고 자기는 영생불사하는 존재인 동시에 필멸의 팔자를 타고난 인간이며,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106. 『구약성서』를 보아도 하느님은 하나의 금제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113. 우리는 이 영극 마당에서 영극 놀이를 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우리가 지닌 극성(極性)의 측면을 조종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원수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다른 각도에서 보이는 우리의 다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114. 모이어스 : 저는 신화를 읽을 때마다 신화가 지니는 신비에 경이를 느끼고는 합니다. 우리가 신화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지언정 꿰뚫어볼 수는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캠벨 : 중요한 지적이군요.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는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시 중에 자주 인용되는 시가 있는데, 이게 중국의 『도덕경』에도 나옵니다. 이렇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 여자는 남자보다 스스로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자들이 실은 잘 아는 것이다
115. 아시다시피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117.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119. 그렇지는 않아요. 삶을 하나의 시련으로 보는 관념, 이 시련을 겪어야 세속적 의미의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관념은 고등 종교의 관념입니다. 나는 원시 신화에서는 이런 관념을 접한 적이 없어요.
모이어스 : 어디에서 이런 것이 생겨났을까요?
모르기는 하지만, 영적인 힘과 깊이가 있어서, 세속적인 삶은 영적인 측면, 혹은 존재의 차원을 두루 경험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군요.
120.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先見者)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그래서 샤먼이나 선견자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구성원들은 서로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아니,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해낼 수 없어서 못하던 내 이야기가 아니냐?” 이렇게 되자면 샤먼이나 선견자와 그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상호 작용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사회의 구성원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듣는 선견자는 선견자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선견자는 사회에서 추방당하기도 하지요.
126. 초월자는 사유의 모든 카테고리르 초월합니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ㅡ이것은 카테고리입니다. ‘하느님’이라는 말은 모든 사유를 초월해 있는 존재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하느님’이라는 말 역시 사유를 통해서 생긴 것입니다.
133.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모이어스 : 조르바는 인생에 대하여, “말썽?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말썽 아닌가?” 하고 있습니다.
캠벨 :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이에요.............
133.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이것은 석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으니까요.
모이어스 : 선생님도 정말 그렇게 믿습니까?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나는 누가 이런 식으로 되기를 의도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제임스 조이스의 한마디가 기억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사상(事象)의 끝은 늘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고통 또한 세상이 존재하는 까닭의 일부입니다.
135.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고 옳고 의로우나, 인간에게는 어떤 것은 옳아 보이고 어떤 것은 옳아 보이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의 이 인간은 시간의 장, 결정의 장에 놓입니다. 삶의 여러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 『우파니샤드』에서는, “남성도 아니요, 여성도 아니요, 그렇다고 중성도 아닌, 즉 어떤 몸을 받든지 그 몸을 통하여 드러날 뿐”이라고 말하지요. 결국 우파니샤드적 관념이군요.
캠벨 : 그렇지요. 그래서 예수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던 겁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선악을 논하기 전에, 천국에서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겁니다. 하지만 육준강대의(六逡講臺床)에 선 사람들에게서 이 말을 듣기는 대단히 어렵지요. 우리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일 중 하나는, 속으로는 구역질이 나는 타인, 혹은 타인의 행동, 혹은 타인의 조건에 대해서도 ‘옳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137. ‘키르티무카’는 ‘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시바 신전이나 불교 사원에 가보면 시바나 부처의 대좌(臺座)에서 이 가면 같은 것, 즉 영광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시바 신은 이 영광의 얼굴을 향하여, “누구든 너를 예배하지 않는 자는 나에게 올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정한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 삶의 기적 앞에서 고개를 끄덕거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138.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만물을 긍정한다는 주제를 놓고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우리가 누구를 비판한단 말인가, 하는 확신이 생깁니다. 예수의 위대한 가르침도 이것이 아니었던가 싶군요.............. 내가 하는 말의 뜻이 바로 그겁니다.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至福)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 직관에서 끊임없는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경험에는 인생의 그런 기능이 있어요.
제3장 태초의 이야기꾼들
141.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들어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있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모이어스 : 그래서 이런 신화와 옛 이야기가 우리 안에 살아남아 있는 것이군요.
캠벨 : 그렇지요. 인간의 발달 단계는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 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147. 우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 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니까 사냥은 의례인 것이지요.
모이어스 : 그렇다면 의례는 영적인 현실을 표현하는 것이겠군요.
캠벨 : 의례는, 나의 개인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다,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지요.
151. 그렇고 말고요. 사람을 죽여 그 사람을 먹는다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겠지요? 대초원 사냥꾼들이 짐승을 보는 시각은 짐승을 하등(下等)하게 보는 오늘날의 우리 시각과는 다릅니다. 이들에게 짐승은 적어도 동등한 존재, 때로는 우월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짐승에게는, 사람에게는 없는 힘이 있지요. 가령 샤먼은 자주, 짐승의 영을 수호령(守護靈)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샤먼이 특정 짐승의 혼령을 자기의 보호자,혹은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155. 들소들은 놀라고 맙니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처녀에게 말합니다.
“왜 우리를 위해서는 이렇게 해주지 않았는가? 우리가 들소춤을 가르쳐줄 터이니, 우리 일족을 죽이거든 그 들소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다오.그러면 우리가 다시 살아나게 될 테니.”
자, 바로 이겁니다. 바로 그 의례를 통해 삶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이 새로운 차원에서 생명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 들어간 곳을 통해 나올 수도 있게 됩니다.
162.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 사회의 삶 속에는 이런 게 없습니다. 마흔 다섯이 되었는데도 아버지에게 여전히 고분고분한 남자가 있다고 칩시다. 이 사람은 정신분석의를 찾아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분석의가 처방을 내려줄 테지요.
168.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神話化)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75. 수많은 철학자에 의해 되풀이된 신에 관한 정의가 있습니다.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구체(球體)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바로 모이어스 씨가 앉아 있는 그 의자입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 둘 다 이 신비의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화적 자각일 수 있습니다.
모이어스 : 그게 곧 메타포, 현실의 이미지라는 것이군요.
캠벨 : 그럼요.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제4장 희생과 천복(天福)
177. 사는 곳을 성화(聖化)시키는 것,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우리는 나바호 인디언에게서 이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79.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朝刊)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186. 그게 바로 신화에 속하는 일입니다. 왜 우리가 새삼스럽게 신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까?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잡아줍니다.
모이어스 :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죠.
캠벨 : 그런 종류의 관심에서는 멀어졌지요. 옛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항상 영적인 원리를 의식하고 사는 삶이었어요.
191. 사냥꾼들은 개인적이거든요. 농사꾼은 그렇지 않지만 사냥꾼은 개별적으로 행동합니다. 벌판에서 자연 조건과 악전고투하면서 자연의(언제 어느 방향으로 가라는) 메시지를 기다리는 사냥꾼에게, 평생을 해도 사냥에서 같은 상황을 두 번 경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상황이 때마다 다르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사냥꾼들은 특별한 재주와 능력을 요하는 개인기(個人技)도 익혀야 합니다.
201. 구세주 성격을 지닌 주인공의 죽음과 부활은 이런 전설의 공통적인 모티프로 등장하지요. 가령 옥수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만 해도 그래요. 소년의 꿈속에 나타나는 잘생긴 젊은이는, 죽어서 소년이 속한 민족에게 옥수수를 주지요? 옥수수는 그의 주검에서 자라나니까요.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204.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善)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다시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포와 욕망이라는 이 한 쌍의 대극을 극복해야 합니다.
207. 그런데 이와 아주 흡사한 광경이 요한이 쓴 『경외 사도행전』에서 벌어집니다. 때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이지요. 기독교 문학 중에서 백미로 꼽힐 만한 대목입니다.
209. 신화에 관해 이해하는 가운데, 우리도 이렇게 신의 모습으로 죽을 수 있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지요. 그런데 슬퍼할 게 뭐가 있겠어요? 우리는 죽음을, 원래 그런 대로 굉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어요. 죽음은 축복해야 할 일 아닌가요?
모이어스 : 죽음의 신은 춤의 신이던가요?
캠벨 : 죽음의 신은 춤의 신인 동시에 섹스의 신이기도 하지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죽음 없이 새 생명이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지요.
211. 『신곡』 끄트머리에서 단테는, 하느님의 사랑은 지옥의 바닥에 이르도록 온 우주에 사무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거의 같은 이미지입니다. 보살은 자비의 원리를 상징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치유(治癒)의 원리에 다름아닙니다.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자비가 있기 때문에 계속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불사(不死)를 획득한 존재이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의 슬픔에 참가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자진해서 이 세상에 참가한다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는 근본이 하느님의 본체이시나 하느님과 동등하게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음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이 말의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삶이라는 분열된 현장에 대한 자발적인 참여인 것이지요.
218.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passion)’이 ‘연민(compassion)’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성배 전설에 나오는, 상처 입은 성배왕에 대한 사람들의 연민이 바로 이러한 변모를 드러냅니다. 바로 여기에서 아벨라르적 관념이 태동합니다. 아벨라르는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지요. 즉 인자(人子)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이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연민 쪽으로 열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인간의 추잡한 관심을, 고통을 나누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인간만이 지닌 가치의 세계 쪽으로 쏠리게 하기 위함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배 전설에 나오는 상처 입은 왕은 그리스도와 대응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는 이 상처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연민 쪽으로 열리게 하고, 이로써 죽은 자를 황무지에서 이 땅의 생명으로 되돌아오게 합니다. 이 세상에는, 고통의 영적인 기능이라고 하는 신비스러운 관념이 있어요. 그리스도처럼 고통을 받는 자는 인간을 조잡한 육식동물에서 참 인간으로 바꾸어놓을 만한 어떤 본을 보이기 위해 우리에게 옵니다. 이 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연민입니다.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즈』에서 채용하고 발전시키는 테마가 바로 이 연민입니다. 그래서 스티븐 디달러스는 자기의 영웅을 자각하고, 레오폴드 블룸과 연민을 나눔으로써 어른이 됩니다. 이 깨달음은 자기에서 사랑할 힘이 나오고, 이로써 길을 열 수 있다는 깨달음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220. 그런데 비교종교학 야간 수업 준비를 하던 어느 날, 나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다시 읽다가 조이스가 『피네간의 경야』를 쓰면서 했을 법한 생각을 요약해놓은 듯한 이상한 구절을 발견했어요. 즉 “하느님이 순종치 아니 하는 모든 사람을 거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는 이 대목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아야 하느님의 자비가 소용에 닿게 됩니다. 순종하면 하느님에게 찬스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 루터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거든 “용감하게 죄를 지어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큰 죄인은 연민하는 하느님을 크게 깨달은 자인 셈입니다. 이것은 도덕의 역설과 삶의 가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아주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래, 조이스라는 양반이 진짜 하고 싶어하던 말이 이것이었구나” 하고는, 조이스 관련 강의록에다 ‘<로마서> 11장 32절,’ 이렇게 메모하는데……! 그때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지 상상할 수 있겠어요? 바로 성서에, 똑같은 숫자 ‘1132’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조이스는 자기 걸작의 노른자위를 기독교 신앙 체계의 역설에서 빌렸던 겁니다. 조이스는 죄 많은 역사를 거치면서, 인류의 삶을 통해 이루어진, 실로 공적·사적으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의식의 심층을 무자비하게 파헤친 것입니다. 다 그 안에 있어요. 조이스는 인간에게 애정을 가지고 썼을 테지요.
221. 민주주의이지요. 민주주의가 뭡니까? 다수의 의견은 정치는 물론 사고에서도 효과적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는 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그러나 사고의 경우, 다수는 항상 그릅니다.
모이어스 : 항상 그릅니까?
캠벨 : 이런 종류의 사고라면 그르지요. 영적인 문제에 관한 한 다수라는 것은 항상, 먹을 것, 살 데, 자식들, 재물 이상의 경험을 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요.
222. 나는 학생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모이어스 : 이 천복을 좇으면 어떻게 됩니까?
캠벨 : 천복에 이르는 거지요. 중세의 필사본에, 여러 문맥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가 바로 행운의 바퀴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성혼 서약(成婚誓約)에도, 성할 때나 아플 때나, 넉넉할 때나 가난할 때나,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나 …(중략)… 나는 그대를 중심으로 맞아들이고 그대를 천복으로 좇는다, 그대가 나에게 줄 재물도 아니요, 그대가 나에게 줄 사회적 지위도 아닌 오직 그대만 좇으리다……. 뭐 이런 대목이 있지요. 이게 바로 천복을 좇는 것입니다.
223.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225.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226. …이 말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처방에 영험이 있었던 것 같군요.
227. 늘 하지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 모이어스 :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캠벨 :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제5장 영웅의 모험
229. 모이어스 : 신화에는 왜 그렇게 영웅 이야기가 많습니까?
캠벨 : 많은 가치가 있으니까요. 심지어 대중 소설에서도 남자든 여자든, 주인공은 보통 사람의 성취와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을 발견하거나 이루어낸 영웅입니다.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229. 그렇지요. 사람의 행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며,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에 일종의 주기가 있지요.
230.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233. 모이어스 : 영웅의 시련, 시험, 난관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캠벨 : 굳이 말하자면, 이 사람이 정말 영웅인지 아닌지, 이 사람이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여부, 정말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지 여부,용기, 지식,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누군가가 예비해놓은 어떤 관문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233. 여기에서 핵심은,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 의식은 어떻게 변모합니까?
캠벨 :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239.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252. 원시인들의 입문 의례는 신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소년이든 소녀든, 입문 의례는 유아기의 자아를 죽이고 성인으로 거듭나는 모티프와 관계가 있어요. 소년에게 가해지는 입문의 시련은 소녀에게 가해지는 것보다 훨씬 가혹합니다. 왜냐하면, 삶이라는 것이 여성을 편애하기 때문이지요. 소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여자가 됩니다. 그러나 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의도해야 합니다. 초경을 경험하면 소녀는 벌써 어른이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것은 알고, 아기를 배고, 어머니가 되는 일뿐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먼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야 하고, 삶의 에너지 전부를 자기에게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이 됩니다. (=> 영웅체험을 남자가 하는 이유와도 연결되겠다.)
262. 나에게는 하나의 이론이 있어요. 어떤 젊은이가 모종의 장벽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특정 신화 대응물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이의 경우는, 문턱 넘기 의례와 관련된 신화 대응물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263. 모이어스 : ‘자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자기’와 우리가 잘 모르는 또 하나의 ‘자기’ 즉 진짜 ‘자기’가 있을 수 있겠는데요. 신화는 어떻게 하면 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캠벨 :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신화나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이것은 운동선수가 코치를 찾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좋은 코치는 선수에게, 팔은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 다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는 등의 구체적인 지시는 하지 않아요. 좋은 코치는 선수가 달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선수의 천성적인 동작 양식만 조금 수정해줍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명령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예술가들도 제자를 이런 식으로 가르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게 좋은 스승이 되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들려줄 스승이 없으면 스스로 창안한 방법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자기에게 어울리는 바퀴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이 두 사람은 기초적인 신화 테마를, 현대 젊은이들이 경험하는 개인적인 문제, 어려움, 깨달음, 관심의 해석에다 응용하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문제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소설가의 작품에서 신화 모티프를 선택해서 길잡이로 삼는 것도 좋겠지요.
269. 이런 종류의 모험의 첫째 단계에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자기에게 버릇 들어 있는 곳, 일정한 수준의 힘을 행사하던 곳을 떠나 한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의 문턱에 이릅니다. 이 문턱이 말하자면 호수나 바다의 가장자리이지요. 이 문턱에서 심연의 괴물이 영웅을 기다립니다. 여기에서부터 두 가능성이 생깁니다. …… 여기에서부터 영웅은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련을 겪으면서 무서운 밤바다를 여행해야 합니다. 이 무서운 밤바다 여행에서 이 어둠의 에너지를 극복할 방법을 깨닫게 되면 마침내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이지요.
270. 모이어스 : 그런데 누군가가 제게, “그래, 조지 루카스의 상상력도 좋고, 조셉 캠벨의신화학도 좋아. 하지만 그게 내 인생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이런 말을 합니다.
캠벨 : 내가 장담하거니와, 상관이 있어요. 이걸 깨닫지 못하면 그런 말을 한 사람도 다스 베이더 같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구체적인 프로그램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기 가슴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정신분열증적 해리(解離)의 위험이 있어요. 자기 중심에서 이탈해 있는 사람이거든요. 삶을 위한 프로그램에 맞게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육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2. 모이어스 :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을 죽일 수 있습니까? 우리 개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선생님의 이른바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란 무엇입니까?
캠벨 :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모이어스 : 우리의 일입니까, 삶입니까?
캠벨 :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 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 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273.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라도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 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275. 모이어스 : 저는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신화에 대한 선생님의 해석을 좋아합니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에게, “미궁에서 나오는 방법만 가르쳐주면 영원히 사랑하리라” 하고 말합니다.
275. 그 실이라는 게 찾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선생님 소리 듣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이 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
276. 당연하지요.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을 석가가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석가는 가령, 어떻게 하면 특정 대상에 대한 공포를 없앨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가르쳐주고는 했지요. 수련하기를 가르치는 스승도 있습니다만, 글쎄요, 수련으로는 될 것 같지 않군요.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했지요.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 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286. 캠벨 :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모이어스 : 신화는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합니까?
캠벨 : 아무리 신화라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행복을 좇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행복을 좇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러줄 뿐이지요.
287. 구혼을 거절하는 순간에,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에, 모험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이로써 주인공은 자기가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땅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바야흐로 소설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7장 사랑과 결혼 이야기
347.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353. 그렇지요. 그런데 여기에 필수적인 조건이 있어요. 신사적이어야 한다는 것, 즉 사랑을 수용할 만한 다정한 가슴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욕망은 절대로 들어설 자리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여성은 자기를 좋아하는 남성에게 사랑을 수용할 만한 가슴이 있는지, 사랑의 상대가 될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거지요.
353. 모이어스 : 사랑을 수용할 만한 다정한 가슴이라고 하시는데,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캠벨 : 사랑을 수용할 만한 다정한 가슴은 곧 ‘자비’를 수용할 만한 마음인 것이지요.
모이어스 : 어떤 의미에서의 ‘자비’를 수용하는데요?
캠벨 :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지요. ‘passion'은 곧 고통인데 이걸 ‘함께(com-)’하는 것이 곧 ‘자비(compassion)’인 것이지요. 독일어가 자비의 의미를 가장 확연하게 표현합니다. 독일어로 자비는 ‘미틀라이트(mitleid)’라고 하는데, ‘미트(mit)’는 ‘함께’라는 뜻이고, ‘라이트(leid)’는 ‘고통’, 혹은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은, 이 남자가 자기와 사랑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테스트한 겁니다. 그러므로 중세의 사랑 놀음은 욕정의 놀음이 아닌 겁니다.
364. 강요에 의해 부부가 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사랑이 자랄 수는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종류의 관계도 상당히 깊은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가족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 삶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도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영혼의 나머지 한쪽을 발견했을 때, 여기에서 생기는 사랑과는 견줄 수 없지요. 음유시인이 찬양한 사랑, 오늘날 우리의 이상이 되어 있는 사랑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 놀음이 아니에요. 사랑 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그러나 사랑 놀음은 그게 아니지요. 사랑 놀음은 쾌락을 겨냥한 관계입니다. 쾌락이 끝나면 사랑 놀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요.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345.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345. 더 정확하게는 ‘시련’의 성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다 복속시킵니다.진짜 결혼 생활, 진짜 연애는 바로 이러한 관계 안에 있어요. 우리도 바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내 말뜻을 알겠지요?
모이어스 : 글쎄요, 조금 더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캠벨 : 음양의 상징인 태극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내’가 있고, 여기에는 ‘그’가 있고, 그래서 여기에는 ‘우리’가 있는 겁니다. 가령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상대에 대한 미운 감정의 노출? 이건 번지수가 틀린 거예요.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367. 그래서 제우스는 기왕에 장님이 되어버린 테이레시아스에게 미래를 예언하는 재능을 줍니다. 재미있지 않아요? 이것은 말이지요, 눈을 감음으로써, 즉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모르폴로지, 즉 사물의 근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368. 모이어스 : 남성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여성적인 측명을 알 수 있다면, 여성들은 자신의 남성적 측면을 알 수 있다면, 우리 자신에 관한 한, 신들이 아는 수준, 혹은 신들이 아는 수준 이상의 수준으로 알기까지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가끔씩 합니다만.
캠벨 : 결혼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그런 정보에 접근할 수 있지요.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이성(異性)의 측면과의 만남이랍니다.
371. 그러나 사탄은 첫 번째 규칙에 열중했던 나머지 도저히 이것을 어길 수 없게 됩니다. 글쎄요, 사탄에게 가슴, 혹은 마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사탄은 온 마음으로 사랑하던 신에게만 절을 하지, 인간에게는 끝내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이, “내 앞에서 꺼져라!” 한 겁니다.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믿어보면, 지옥의 고통 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사랑하던 것’과 함께 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사탄에게 이 ‘사랑하던 것’은 신이었어요. 그러니 사탄에게 지옥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곳이었을 테지요. 그의 귓전에는 “지옥으로나 가거라!”라고 하던 신의 음성이 쟁쟁합니다. 그에게는 사랑의 상징 같은 것이었겠지요.
373. 모이어스 : 사랑에는 기쁨만 있는 게 아니라 슬픔도 깃들여 있다는 것이군요.
캠벨 :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모이어스 :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캠벨 :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제8장 영원의 가면
375. 신비를 체험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오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우주의 어떤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 <우파니샤드>중 하나에서 적절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어요.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 경험을 하지요. 즉 인간의 차원보다는 훨씬 위대한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378. 이러한 기도는 잡념을 몰아내고 한 가지에만 정신을 집중할 수 있게 합니다. 한 가지에만 정신을 집중시키면 상상력에 따라 갖가지 차원의 신비 체험이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380.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고,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입니다. 이 처녀 수태는, 건강, 자손, 권력, 향락 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간적·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몇 가지 더 다루어둘 것이 있어요. 이러한 의미에서의 자비, 화합, 타자와의 동일성, 혹은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자리 잡게 된 바람직한 자아 초월적인 원리와의 동일성 체험은, 종교적인 삶과 체험의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체험을 한 사람이라야 평생을 바쳐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완벽한 경험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이 궁극적인 존재를 경험하는 단계가 되면 이 세상의 모든 형상 허깨비로 보이게 되는 겁니다.
383. 가르쳐드리지요. 원수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뽑아내려 하지 말고,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럴 수 있으면 원수가 사는 삶의 방법을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모이어스 : 예수가 지금 이 세상에 있다면 기독교인일 것 같습니까?
캠벨 : 우리가 아는 종류의 기독교인은 아닐 겁니다. 명상을 통해서 고도로 영적인 신비와 만나는 은수사나 수녀들이 있는데, 예수도 아마 그런 기독교인이 될 겁니다.
387. ‘종교(religion)’라는 말은 ‘렐리기오(religio)’ 즉 ‘뒤로 연결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둘이서 나누어 사는 하나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삶이 있다면 내가 사는 조각난 삶은 한 삶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렐리기오’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은 종교의 이미지에 상징으로 나타나 있어요. 상호 연결되는 상태를 드러내는 것, 이것이 곧 종교인 겁니다.
모이어스 : 유명한 분석 심리학자인 융 박사는 종교의 상징 중에서 가장 강력한 상징은 원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원은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이미지이기 때문에 원의 상징을 정밀하게 검토하는 일이 곧 우리의 ‘자아’를 분석하는 일이라고 합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캠벨 : 온 세상이 원입니다. 세계에 있는 원꼴의 둥근 이미지는 모두 인간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원형의 건축 구조와 우리 정신 기능의 구조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 겁니다.
391. 반지를 보세요, 완벽한 원형이지요? 이 반지를 보고 있으면 원이라는 게 두 반원이 엮이어 하나가 되었다는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보는 결혼입니다. 둘로 이루어진 더 큰 하나, 여기에서 나의 개인적인 삶이 생겨납니다. 결혼 반지는, 우리는 원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412. 모이어스 : 우리는 모두 목적이 있는 인생을 삽니다. 선생님께서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는 걸 믿습니까?
캠벨 :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모이어스 : 그건 아닌데요, 그건 아닐 겁니다.
캠벨 : 내 말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왜?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모이어스 :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제 믿음도 이쪽으로 기웁니다.
캠벨 : 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은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있어요.
나바호 인디언에게는 소위 ‘화분(花粉)의 길’이라고 하는 놀라운 이미지가 있어요. 그들에게 화분은 곧 생명의 근원입니다. 화분의 길은 곧 중심으로 향하는 길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내 앞도 아름답고, 내 뒤도 아름답고, 내 오른편도 아름답고, 내 왼편도 아름답고, 내 위도 아름답고, 내 아래도 아름답다. 나는 화분의 길에 들었노라” 이렇게 노래한답니다.
모이어스 : 에덴은 ‘있었던’ 게 아니고 ‘있게 되는’ 것이군요.
캠벨 : ‘있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왕국은 도처에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 고통과 슬픔, 죽음과 폭력이 있는 이 세상이 에던이라고요?
캠벨 : 그렇게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이게 바로 그겁니다.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3. ‘내가 저자라면’
(1) 좋은점
이 책의 목적은 대중들에게 신화가 지금 사회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지에 대해 알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담의 형식으로 풀어간 것은 좋은 점이다.
(2) 보완점
인터뷰어 빌 모이어스의 내용이 글을 읽는데 방해가 되는 느낌이다. 빌 모이어스는 이 책의 주제와 구성을 맡고, 책에는 캠벨의 글만 실렸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3) 나중에 이 주제로 책을 쓴다면
대담 형식이라 목차대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아 전체적인 내용 파악에 어려움이 있다. 현대 사회와 신화가 필요한 이유를 주제로 잡고, 그에 맞게 펼쳐나가면 좋겠다. 좀 더 현실적인 목차를 잡았으면 어떨까 하고 아쉬움이 있다.
안녕하세요. 제 소개를 먼저 할게요.
저는 꿈벗 프로그램을 15기에 마친 김신웅인데요.
연구원 과정을 같이 따라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혼자서 책을 읽으면 쉽게 지쳤는데, 연구원분들이 공부하는 걸 지켜보며 함께 따라가면 힘을 내서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온라인에서 장외로 따라가고 싶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연구원을 지원하고 싶은데... 그건 나중이고 지금 참여하고 싶어서... 좋은 책들도 많이 읽고 싶은 마음이거든요.
이번 첫 주부터 함께 따라가 볼게요. 연구원분들에게 방해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북리뷰만 함께 따라 갈게요.
많이 배워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