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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8일 14시 00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신화의 힘>에서 조셉 캠벨에 대한 소개를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이 책과 조셉 캠벨의 연관성 내지 책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먼저 이 책은 집단의 무의식과 원형에 대해 탐구하는 융 학파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의 영혼과 심상은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그 모습과 결을 같이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여러 신화나 옛이야기, 동화, 민담에서 발견한 수많은 주제들을 모아놓고 스스로 그것이 밝혀지게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이라면 거치게 되는 우리 인생의 모습을 간극과 행간을 뛰어넘는 시적 언어로 살려내고 있다. 토마스 만은 시인적 본성은 심리학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고, 심리학적 관심은 신화에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조셉 캠벨은 시인의 마음을 갖고 현대인의 마음속 모습을 신화를 빌어 생생하게 이 책에서 살려낸다.

 

이 책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책에는 옛날이야기가 가득하지만 그것은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삶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이야기 될 수없는 영역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수많은 이야기가 펼쳐진 숲을 걷다보면 저절로 ‘온전한 삶’이 떠오를 것이라고 여기며 이 책을 저술했다. 책 속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최신형 오이디푸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 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우리가 읽은 동화 속 내용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인류의 삶은 태초부터 그 뿌리를 같이 한다. 이 책은 삶의 신비로 가득하고,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는 이야기로 넘쳐흐른다.

 

인간의 삶은 문턱 넘기의 과정이다. 우리는 출생하고, 성인식을 거쳐 취업이란 것을 하고, 이성을 만나 결혼하며 그 후 장년과 노년의 삶을 맞는다. 이 책은 삶을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 거치게 되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삶이 원활하지 않을 때 우리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성인식을 제대로 거치지 못 하고 어른이 된 남자가 있고, 이성과의 만남에서 온전한 기쁨을 맛보지 못 하는 청춘이 있다. 그리고 인생의 묘미가 체화되지 못한 장년과 이승에서의 삶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노년이 있다. 삶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적절한 때에 요구되는 인생의 과업을 해결하지 못해서이다이 책은 온전한 삶의 원형을 우리에게 선사하니, 인생이 힘들다고 여겨질 때 읽으면 좋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저마다 자기 인생의 영웅들이다. 이 책은 사람들에게 문제에 머무르지 말고 용기를 내어 삶의 중심으로 뛰어들 것을 당부한다. 지금의 삶이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이다. 생명은 매순간 그대를 부르고 있다. 거부하지 말고 뛰어들어 살아있음의 황홀을 체험하라. 기꺼이 죽임을 당하고 영광스럽게 재생하라. 나와 네가 둘이 아님을 깨달아라. 그리하여 삶과 온전한 화해를 하라. 저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를 선동하며 나서고, 이 과정이 바로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신화가 현대의 정신분석에 많이 기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신분석 장면에서 참여자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두려운 용과 대면하게 된다. 이어서 욕지기가 나는 갖은 시련에 빠지게 되고, 호부와 액막이를 지니고 혼란 끝에 보편성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편견을 바로 잡고, 넓은 관계성의 마당으로 나와 평온한 일상을 살아낸다. 결국 이 과정은 자기 의식의 확장이고, 의식의 확장이 바로 삶이라고 저자는 결론짓고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6.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이 말을 금과옥조로 삼지 않고는 정신분석학의 안내를 받기 어렵다. 다음 단계는,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곳에 모아놓고 상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는 일일 듯하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면 그 유사성이 한눈에 두드러져 보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오랜 세월 삶의 길잡이로 삼아온, 방대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일정한 상태로 보존된, 바탕되는 진리와 만나게 된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프롤로그 원질신화

 

1 신화의 꿈

 

15. 그러나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정신 의학에서 떠오른 뜻밖의 새로운 사실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의 대담하고도 획기적인 저술은 신화학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료다. 왜냐하면, 세부적인 데 이르면 견해가 다소 다를 수 있고, 특정 사례나 문제에 대한 해석이 서로 상반되는 경우도 있지만,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22. 원시 사회 생활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른바 통과 제의(通過祭儀, rites of passage: 출생, 명명, 성인, 결혼, 장례 의식 등)는 이런 단계의 마음가짐이나, 애착이나, 생활 패턴으로부터 심적으로 단절된다는 의미에서 형식상으로 특이하고 극히 가혹한 단절의 체험이 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한 차례의 통과 제의가 있은 다음에는 다소 느슨한 휴지 기간이 뒤따르는데, 이 기간에는 인생을 살아갈 당사자를 새로운 시대의 형식과 적절한 감정 상태로 유도하는 절차가 있다. 그래서 마침내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아올 때가 되었을 때 입문자initate를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22.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 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있는 타락의 길을 버리고 영험적인 정신의 도움을 따르게 하는 우리 내부의 고차원적인 신경증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있는 유아기의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 있고, 따라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좆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전후가 도착(倒錯)된 슬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삶의 목표가 어른이 되는 데 있지 않고,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 데 있으며,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데 있지 않고, 어머니와 유착되는 데 있다고 믿는 현상이 그것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소년 시절이라는 이름의 신전에서, 아들에 대한 부모의 소원이던 법률가, 실업가, 혹은 지도자를 섬기고 있는가 하면, 아내들은 결혼한 지 14, 두 아이를 낳아 길러놓고도 여전히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다.

 

29.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는 융성하는 그리스 문명의 상징과 권화(權化)로 외부에서 크레타로 들어왔다. 그 상징은 새롭고도 싱싱하게 살아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것은 재생의 원리를 통해서 폭군의 제국 안에서도 찾아질 수 있을 존재다. 창조 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 데 <해탈de-tachment><변용transfigu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이 영역이 바로 유아기의 무의식이다. 우리가 잠잘 때 들어가는 곳이 바로 이 영역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영역을 평생토록 우리 내부에 간직한다. 우리 유아기의 도깨비들과 은밀한 협력자들, 어린 시절의 마법이 모두 여기에 있다. 뿐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되어도 의식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 우리들 자신의 또 한 부분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 황금의 씨앗은 마르는 법은 없다. 우리가 상실해 버린 이 전체성의 일부라도 나날의 현실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놀라운 수준까지 신장될 것이며, 아울러 생기 넘치는 재생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는 더 높이 솟아야 한다.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세대, 나아가서는 우리의 문명 시대가 잊어버리고 있던 것들을 얼마간이라도 건져 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저 위대한 천품(天品)의 시혜자(施惠者), 시대의 문화 영웅(한 나라뿐만이 아닌 세계 역사상의 귀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영웅이 첫 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因果)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 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 융의 소위 <원형 심상(原型心象, Archetypal images)>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33.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따라서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그런 사람의 상상력과 이상과 영감은 태고적부터 인간의 생명과 사상의 원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 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 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토인비가 주장하고, 인류의 모든 신화가 보여 주듯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35. 꿈을 꾼 사람은 유명한 오페라 여가수인데, 이정표가 있는 대낮의 고속도로뿐만 아니라, 귀가 안팎으로 열린 사람에게만 들리는 희미한 소명(召命)의 모험길로도 들어설 뜻을 세운 사람답게, 예사롭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초라하고 질척한 거리>를 홀로가야 한다. 이 여가수는 영혼의 어두운 밤, 단테의 <우리 삶의 도정에 도사린 어두운 숲> 그리고 지옥과 같은 구렁텅이의 비애도 알고 있었다.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35. 놀라운 것은 이 꿈에는, 영웅이 체험하는 모험이 지닌 보편적 신화 양식의 기본적인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의미심장한 위험과 장애와 도정에서 겪는 행운의 모티프는 갖가지 양태로 굴절하게 되는데, 바로 이 책에서 우리는 수백 가지로 굴절된 모티프와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입구가 보이는 하수도, 그 다음에는 풀 위로 흐르는 맑은 강의 횡단, 결정적인 순간의 조력자 출현, 강줄기 건너편에 있는, 높고 탄탄한 땅(요단 강 건너편에 있는 지상의 낙원) ……. 이 모든 것은 영혼의 고귀한 모험을 다룬 경탄할 만한 노래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제다. 은밀한 부름에 귀를 기울이고, 그 길을 따르려 했던 사람들은 모두 위험하고 외로운 횡단 여행,

 

건너기 어려운 날카로운 칼날

시인은 노래했거니, 이것이 험로라고

 

2 비극과 희극

 

39.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3 영웅과 신

 

45. 영웅 과업의 어려움, 계획이 원대하고, 수행이 신성할 경우 이 영웅 과업의 숭고한 의미를 장엄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부처의 고행에 대한 전설에 잘 나타나 있다.

 

4 세계의 배꼽

 

62.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하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고 했다. 세계의 사원에서 섬김을 받는 대상은 늘 아름다운 것도, 늘 자비로운 것도 아니며, 덕이 높을 필요도 없다. (...............)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또 시인 블레이크 Blake도 비슷한 말을 한다.

 

사자의 포효, 이리의 울부짖음, 성난 바다의 광란, 그리고 피를 부르는 칼은 인간의 눈에는 과분한 영원의 편린들이다.

 

1부 영웅의 모험

 

1장 출발 Departure

 

1 영웅에의 소명

 

71. 이 동화는, 모험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다.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긴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이 동화에서 황금 공이 사라진 사건은, 공주에게 닥칠 어떤 운명의 첫 번째 조짐이고, 개구리는 두 번째, 무심결에 한 약속은 세 번째 조짐이다.

 

72. 비의(秘儀)에서 알 수 있듯이, 전령관의 등장은, <자아의 각성 the awakening of the self>이라고 불리는 단계를 암시하고 있다. 동화에 나오는 공주의 경우, 전령관의 등장은 사춘기의 도래를 뜻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크든 작든, 삶의 단계나 정도가 어디에 이르러 있든, 이러한 소명은 언제나 변용의 신비mystery of transfiguration, 완성되면 곧 죽음과 탄생에 이르는, 정신적 통과 의례 혹은 순간을 개막(開幕)한다. 지금까지의 삶의 지평은 이제 너무 웃자라, 낡은 개념과 정서 패턴은 몸에 맞지 않는다. 바야흐로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소명을 받는 장소로 전형적인 곳은 깊은 숲속, 큰 나무 아래, 샘가……. 운명의 힘을 전하는 전령관은 혐오감을 주는, 참으로 하찮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불안한 순간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때의 고통(탄생하는 순간의 숨이 막히고, 피가 응어리지는 등의)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한 바 있다. 거꾸로 말하면,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 시킨다. 부왕(父王)과 함께 누리던 특권과 행복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는 왕의 자식의 경우든, 에덴동산의 낙원을 떠날 만큼 성숙한 신의 딸 이브의 경우든, 사바세계의 마지막 지평을 뛰어넘는 순간의 전심전력하는 미래 부처의 경우든 위험, 안심입명, 시련과 극복, 그리고 탄생이라는 신비의 기이한 신성(神性)을 상징하는 원형 이미지는 똑같다.

 

..............따라서 모험에의 소명을 알리는 전령과, 혹은 고지자(告知者)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길을 따르면, 길은 낮의 벽을 통해 보석이 빛나는 밤으로 열린다. 혹 전령관은 우리 내부의 억압된 본능적 다산성(多産性)의 상징인 야수(동화에서처럼), 또는 미지의 베일에 가려진 신비스러운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75. * 이 수사슴의 추적과 <야수>의 목격은, 성배(聖杯)의 탐색과 관련된 불가사의한 사건의 시작을 암시하고 있다....................그러나 고슴도치를 잡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는데도 땅에서 너무 높이 올라간 게 무서워 소녀는 내려올 생각은 못하고 자꾸만 올라갔다. 아래서 보면 조그만 점 하나로 보일만한 높이까지 올라간 소녀는 고슴도치와 함께 마침내 하늘에 이르렀다.

 

80. * 이 절에서도 그랬지만, 필자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이러한 예를 다양하게 소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가령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그랬듯이) 필자는 이 책의 각 장을 풍부하게 꾸밀 수 있었다. 그러나 원질 신화의 주류를 건드리는 대신 각 절마다 이 세계 여러 곳에서 채집되는 대표적인 구전 중에서 놀라운 예를 실으려고 했다. 이 책을 쓰면서 필자가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니만큼 독자 여러분은 다양한 유형의, 갖가지 독특한 예화들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 이르면, 독자 여러분은 방대한 양의 산화를 읽게 될 것이다. 독자는 모든 신화가 각 원질 신화를 인증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싶겠지만 필자가 바라기로는, 각주에 실린 책들을 일별하면서, 방대한 이야기 중의 일부를 한가하게 즐겨주었으면 한다.

 

2 소명의 거부

 

84.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태양이며, 시간과 성숙의 신인 아폴로는 더 이상 이 겁에 질린 사랑의 상대를 다그치는 대신 이 나무를 월계수로 명명하고 그 잎으로 관을 만들어 승리자의 이마에 걸어주게 했다. 처녀는 부모의 상(像)으로 후퇴하여 거기에서 보호를 받았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꿈 덕분에 아내와의 생활을 청산하게 된 불운한 가장의 경우와 같다.

정신분석학 보고서에는 이런 위험한 유아기 고착desperate fixation의 사례가 얼마든지 나온다. 이러한 사례들은, 당사자가 유아기적 자아 그리고 유아기적 정서 관계 및 이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당사자는 유아기의 벽에 갇혀 있다. 이 경우 아버지나 어머니는 문턱을 지키는 사람으로 버티고 있어서, 그들의 징벌을 두려워하는 소심한 영혼은 문을 열고 외부 세계로 나오는, 재생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87. 주저한다고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많은 비밀을 여축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비밀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명의 거부에 따르는 부정적인 상태가 뜻밖의 해방의 원리에 대한 행운의 계시일 수도 있다.

실제로 고의적인 내향성은 창조적인 정신의 고전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고, 이를 효율적인 장치로 응용할 수도 있다. 이 방편은 심적 에너지를 심층으로 몰아 무의식적 유아기의 이미지 및 원형적 심상이라는 잃어버린 대륙을 활성화시킨다. 그 결과 의식의 분열이 다소간 일어날 수 있음도 물론이다(신경증, 정신병, 겁을 집어먹은 다프네의 혼비백산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격이 이 새로운 힘을 흡수하고 통합할 수 있으면 당사자는 자기 의식의 초인간적인 단계 및 완전한 통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3 초자연적인 조력

 

93. 소명을 거부하지 않은 모험 당사자는 영웅적인 편력 도중 첫 번째 보호자를 만난다. 노파나 노인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 보호자는 모험 당사자가 곧 만나게 되는 용과 맞설 호부(護符)를 준다.

 

94............. 그렇구나, 너희 아버지 태양의 집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도중에는 괴물도 많이 있을뿐더러 너희가 가도 너희 아버지는 달가워하지 않을 게다. 어쩌면 찾아왔다고 너희를 벌할지도 모르겠구나. 게다가 너희는 위험한 네 고비를 넘겨야 한다. 여행자들을 덮치는 바위, 여행자를 베어버리는 갈대, 여행자를 갈가리 찢는 선인장, 여행자를 괴롭히는 끓는 모래밭을 지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너희에게, 이러한 장애를 이기고 능히 목숨을 보전할 선물을 주마

 

96. 이러한 약속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러 단계에 이르는 삶의 문턱을 넘으면서, 그리고 삶을 자각하면서 무산의 위기를 겪지만 보호 세력은 항상 영혼의 지성소에, 심지어는 이 세상의 낯선 사건에 내재하거나 그 배후에 존재한다.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대자연Mother Na-ture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98.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남성 안내자로 메피스토펠레스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 경우처럼 사자적(使者的), 혹은 메르쿠리우스적 인물의 위험한 측면이 강조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 사자가 순진한 영혼을 꼬여 시련을 받게 하는 유혹자여서 위험한 것이다.

 

4 첫 관문의 통과

 

103. 거기에서 나는 왕의 딸을 보았습니다. 알라 신계서는 그 공주보다 더 아름다운 인간은 만들지 않았습니다그는 부두르 공주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공주님 코는 잘 갈아놓은 면도날 같고 뺨의 빛깔은 포도주 빛, 아니면 핏빛 아네모네 같습니다. 입술은 산호나 빛나는 홍옥수(紅玉髓) 같고, 그 입술 안에 고이는 침은 오래된 포도주보다 감미롭습니다. 이를 마시면 지옥의 고통도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혀는 움직였다 하면 기지와 현답(賢答)이 물처럼 흘러나옵니다. 가슴은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넉넉합니다(이 가슴을 빚은 분에게 영광 있을진저!). 이 가슴 위로 매끄랍고 보드라운 두 팔이 뻗어나와 있습니다. 시인 알 왈라한도 그녀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팔찌 없는 그 손목

가랑비에 젖은 채 소매에서 나와 있네

 

105.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위 아래까지)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다. 부모의 감시 밖이 아이들에겐 위험 지역이고, 사회의 보호 밖이 종족의 구성원들에겐 위험 지역인 것과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이면 여기에서 만족한다. 심지어는 표시된 경계선 안에 안주하는 데 만족하기까지 한다. 집단의 보편적 믿음이, 미지의 땅으로 첫 발을 내딛으려 하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따라서 중세기적 인식의 지평을 깨뜨린 대담한 콜롬부스 선단의 지도자들은 선원들(제 꼬리를 제가 물고 있는 신화의 뱀처럼 우주를 감싸고 있는, 불멸의 존재인 끝없는 바다로 항해한다고 생각한)을 어린아이 다루듯이 어르거나 윽박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까닭인즉, 그들이 우화에 나오는 레비아단, 인어, 용왕, 그리고 그 밖의 심해 괴물의 존재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6. 중앙 아프리카에서는 이런 반인 반수 괴물이 조우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네가 나를 만났으니 마땅히 싸워야 한다.만약 사람에게 지면, 이 괴물은 나를 죽이지 마십시오. 의술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하고 애원한다. 이렇게 되면 이 괴물과 싸워 이긴 사람은 용한 의사가 된다. 그러나 이 반인 반수의 괴물(<이상한 것>이란 뜻인 <치루위>라고 불리어진다)이 이기면, 진 사람은 죽음을 당한다.

 

110. 이것은 최초의, 혹은 보호적인 관문 수호자의 정체를 밝혀주는 꿈이다. 모험 당사자는 특정 구역의 수호자에게 도전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살아서든 죽어서든 새로운 경험역(經驗歷)을 지나려면 같은 세력의 파괴적 측면을 극복하고 이 특정 구역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안다만 제도의 피그미 족 언어에서 <오쿠주무okojumu(<꿈꾸는 자, 꿈을 통해서 말하는 자>)라는 단어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동류들과는 달리 대단한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를 일컫는다. 이들이 가진 초자연적인 능력은 정글에서나 꿈속에서 정령을 만나거나 죽음과 재생의 체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다.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112. 그러나 이 뱀, 즉 메는 참으로 무서운 존재다. 섬 사람들은 이 뱀을 자기를 본 사람의 친척으로 변한다고 믿는다. 자기 생활권이라는 벽에서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영웅은 반드시 이런 괴물(몹시 위험하면서도 때로는 마법의 권능을 베푸는)과 만나야 한다.

 

117. 도깨비는 감히 잡아먹을 생각은 못하고 태자에게 물어보았다.

젊은이여, 왜 드려워하지 않는가? 죽음이 목전에 이르렀는데 어찌해서 겁을 먹지 않는 것인가?

태자가 이 물음에 대답했다.

도깨비여, 왜 내가 두려워하겠는가? 태어나면 어차피 한번은 죽게 되어 잇는데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내 뱃속에는 벼락이라는 무기가 하나 더 있다. 그대가 나를 먹는다고 하더라도 벼락은 삭이지 못할 것이다. 이 벼락은 그대 뱃속에서 그대를 갈가리 찢어 필경은 그대 목숨을 빼앗을 것이다. 결국 그대가 나를 먹으면 우리는 둘 다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이제 독자들도, 다섯 가지 무기를 지닌 태자의 말 뜻을 헤아렸으리라. 그가 자기 뱃속에 있다고 한 무기는 다름아닌 <지혜>라는 무기였다. 실제로 이 젊은 영웅은 전생의 부처, 바로 그분이었다.

질겁을 한 도깨비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젊은이가 하는 말은 사실이구나. 이 사자 같은 사내의 몸이라면, 내 위장이 아무리 튼튼하다고는 하나 강낭콩만한 살 한 점도 삭이지 못할 터. 그러니 보내주어야겠다.)

그는 오무기 태자를 보내주었다. 미래의 부처는 그에게 법을 가르쳐 조복(調伏)시키고, 스스로를 부정하게 한 다음, 숲에서 보시를 받는 정령으로 화신케 했다. 도깨비를 깨우친 태자는 숲을 빠져나와 숲 어귀의 인간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가던 길로 걸음을 재촉했다.

 

120. 한 짝을 이루는 대립물(즉 존재와 비존재, 생과 사, 미와 추, 선과 악, 희망과 공포의 기능을 통합하고 방어와 습득 행위를 일으키는 기관을 연계시키는 그 밖의 양극성)은 여행자를 향해 서로 부딪쳐 오는 바위Symplegades이며, 영웅은 항상 이 길을 지난다. 이것은 세계 전역을 통해 익히 알려진 모티프다............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5 고래의 배

 

122. 세계 도처에서 채집되는 이러한 모티프는, 관문의 통과가 자기적멸(自己寂滅)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교훈은 쉼폴레가데스(충돌하는 바위 섬)의 모험에 이르러 한층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들어감은 신도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일치한다.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신전 안, 고래의 배, 세계라는 한정된 공간 건너 위, 아래로 보이는 천상적 공간은 결국 하나다. 모두가 같은 것이다. 신전에 접근하거나 들어가는 자들이 기괴한 괴수, 즉 용, 사자, 마검을 든 괴물 살해자, 욕지기나는 난장이, 날개 달린 소에 의해 보호를 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괴수들은, 한 차원 심화된 내적 침묵과 만날 준비가 되지 않는 자들을 지켜주는 관문의 수호자들이다. 이들은, 인습 세계를 특징짓는 신화적 도깨비, 혹은 두 줄로 난 고래의 이빨과 일치하는 존재들로서 존재의 위험한 측면을 보여주는 예비적인 경고의 화신이다. 이들은, 신자가 신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변형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인다. 이 순간 신도의 세속적 성격은 사라진다. 그는 뱀이 허물로 싸여 있듯이 이 신전을 허물로 삼는다. 신전 안에서 신도는, 시간적으로는 이미 죽어 세계의 자궁, 세계의 배꼽, 지상의 낙원으로 돌아갔다는 암시를 받는 수도 있다............. 그렇다면 비유적으로 보아,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즉 회화적 언어로 말하면 둘 다 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썼다............. 나바호족의 쌍둥이 영웅은 쏟아져 내리는 바위 사이분만 아니라, 여행자의 살을 베는 갈대 사이, 여행자의 살을 찢는 선인장 사이, 여행자를 괴롭히는 끓는 모래밭까지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아에의 집착을 끊은 영웅은 왕이 자기 궁궐에서 방방을 드나들 듯이, 삶의 지평을 넘나들거나 용의 뱃속을 드나들 수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과 회귀는, 모든 현상계의 대립물이 창조되지 않은 불멸의 존재임을 드러내는데 여기에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2장 입문 Initation

 

1 시련의 길

 

128.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와 모험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루는 부분도 바로 이 극면이다. 이 국면은, 기적적인 시험과 시련을 다룬 세계의 문학을 창출해 왔다. 영웅은 거듭나는 데 필요한 충고와 호부(액막이), 그리고 이 영역에 이르기 전에 만났던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밀사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어쩌면 모험 당사자가 자신의 초인간적 여행 도정의 도처에 자비로운 권능이 있어서 자기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지도 모른다.

<어려운 임무>라는 모티프의 실례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가장 매력적인 것은 잃어버린 애인 쿠피도(에로스)를 찾는 프쉬케의 경우일 것이다.

 

132. 게자 로하임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모든 원시 종족에서 주술사가 사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주술사가 신경증적, 혹은 정신병적이거나, 아니면 그의 주술이 신경증이나 정신병과 같은 메카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확인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理想)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용될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대libidinal tie를 강화하고 있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집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주술사는, 그 사회 성인들의 심성에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 환상 체계를 출몰시키는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주술사란, 이러한 유아적 놀이를 주도하고, 공통의 근심거리를 밝혀내는 지도자인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방에서 성공하고 현실적인 어려움과 사워 이길 수 있도록 잡귀와 대리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 The Origin and Function of Culture

그러니까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든지, 고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자기 정신의 미궁이라는 미로로 내려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저 시베리아의 <푸닥>과 성산에 못지않는 상징적인 것들(능히 여행 당사자를 삼켜버릴 수도 있는)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비주의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 정화>에 이르는 길의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즉 감각이 <정화되고, 스스로를 낮추어> 모든 에너지와 관심이 <초월적인 것에 집중될> 때인 것이다. 굳이 현대적인 의미의 어휘를 쓰자면, 우리 개인이 가진 과거의 유아적 심상이 분리, 초월, 변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의 꿈에는 아직까지도 시대를 초월한 위험, 괴물, 시련, 정체불명의 조력자,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한 인물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들의 형태에서 우리는 현재 상태의 모든 현상뿐만 아니라, 그 현상을 이기기 위해 우리가 취할 행동의 단서도 굴절되고 있음을 본다.

 

139. 우리의 선조들이 신화적 종교적 유산의 상징적 정신적 의식에 힘입어 극복해 왔던 심리학적 위험들을 오늘날 우리가(비신자인 경우, 아니면 신자라고 하더라도 계승받은 믿음으로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납득할 수 없을 경우) 혼자서 혹은 시험적, 즉흥적으로, 더러는 도움이 될 만한 지침도 없이 맞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신들과 악마들의 존재를 이성의 이름으로 부정한 <개화된> 현대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어받고 있고, 세계 각처에서 수집된 신화와 전설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직은 인간임을 보여주는 조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감청하기 위해서는 자기 정화를 감수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다.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 코란, 2: 214.

 

143. 고대의 상징 체계에 따르면 빛과 어둠을 표상하는 자매, 즉 이난나와 에레쉬키갈은 두 얼굴의 한 여신이다. 그리고 그들의 반목은 어려운 시련의 길을 의미한다. 신이든 여신이든, 남자든 여자든, 신화의 등장인물이든 꿈을 꾸는 사람이든, 영웅은 적대자를 발견하고 삼키거나 그에게 삼켜짐으로써 이 적대자(뜻밖에도 그 자신의 자아)를 동화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 혹은, 제임스 조이스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자연력이나 정신력의 양극적 현상에 대한 유일의 조건 및 수단으로서, 동일한 자연력이나 정신력에서 전개되고, 저들 반대 감정을 가진 것들을 연결함으로써 재결합하기 위해 분극화된 동등한 대립자들.>(Finnegans Wake, p. 92)

 

시련은 첫 관문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질문은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자아가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주위에 있는 것은 머리가 많은 휘드라(水蛇)이기 때문이다. 절단한 곳에다 비방을 쓰지 않는 한 하나를 자르면 두 개의 머리가 나타난다. 원래 시련의 나라를 향한 출발은 초보적인 정복과 예언의 힘을 얻기 위한 길고 험한 여로만을 표상했다. 이제 영웅은 용을 죽여야 하고 몇 번이고 위험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그 동안 영웅은 몇 차례의 예비적인 승리를 거두고, 일시적이긴 하나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며, 이상향을 엿보게 된다.

 

2 여신과의 만남

 

153. 고도의 이해력을 갖춘 천재만이 이 숭고한 여신의 계시를 읽을 수 있다. 이해의 정도가 낮은 사람을 위해 여신은 그 신통력의 정도를 낮추어, 그들의 지진한 능력에 알맞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여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일 수 있다. 수사슴이 된 악타이온의 에에서 우리는 이미 이런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악타이온은 성자가 아니었다. 정상적인(유치한) 욕망이나, 놀라움이나, 공포에 반응하는 인간으로서 엿보아서는 안 될 계시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일개 사냥꾼에 지나지 않았다.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영웅이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따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여신은 항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영웅의 능력이 여신에 미치면 이 양자, 즉 아는 존재와 알려지는 존재는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된다.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156. 나는 왕도(王道, Royal Rule)라고 합니다. 타라(아일랜드)의 왕이시여! 내가 바로 왕도입니다. 가십시오. 물을 떠서 형제들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대와 그대의 자손에게 왕위와 왕권이 영원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왕도가 그렇다니? 아니, 인생이 그렇다는 뜻이다. 마르지 않는 샘을 지키는 수호 여신(퍼거스나 악타이온, 그리고 외로운 섬의 왕자도 이 여신을 발견한다) 영웅에게, 저 중세의 음유 시인이나 궁정가인(宮庭歌人)이 말하던 이른바 <온유한 마음>을 요구한다. 여신은, 악타이온의 동물적 욕망으로도, 퍼거스의 결벽에 가까운 도사람으로도 파악되지 않았다. 오직 니알의 부드러에 의해서만 그 정체가 드러났다. 이 부드러움이 일본의 10-12세기의 낭만적인 궁정시에서는 <아와레(憐憫, gentle sympathy)>라고 했다.

 

새들이 초록빛 숲 그늘에 깃들이듯

사랑은 온유한 마음속에 깃들인다.

이치로 보면

사랑 이전에 온유한 마음이 없었고,

온유한 마음 이전에 사랑도 없었다.

태양이 솟을 때 빛도 발할지니

태양에 앞서 빛은 있을 수 없다.

불길 속이 가장 뜨겁듯

사랑은 부드러움 속에서만 뜨겁게 타오른다.

 

여신(모든 여성에게 현현되는)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자비, 즉 운명에의 사랑)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다. 이 사랑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보면, 모험 당사자가 청년이 아닌 처녀일 경우에는, 그 재능이나 아름다움이나 욕망으로 보아 불사신의 배우자가 되기에 마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천상의 남편은 그녀에게 하강하여,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를 자기와 동침하게 한다. 만일 여자가 이 배우자를 싫어하면,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 그녀의 편견은 바로잡히게 되고, 그녀가 바라던 존재라고 생각되는 경우 그녀의 욕망은 평화를 성취한다.

 

158. 개구리는, 공주가 자기를 싫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개구리는 식탁 앞 의자로 다가와 공주와 함께 조그만 황금 접시와 황금 잔에 든 음식을 함께 먹었고, 심지어는 공주의 조그만 비단 이부자리 안에서 함께 자야한다고 졸라대기까지 했다. 짜증이 못비 났던 공주는 개구리를 집어 벽에다 메치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 개구리가 아니라 왕자였다. 눈길이 다정하고 아름다운 왕자였다.

 

3 유혹자로서의 여성

 

159.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적인 결혼은 영웅의 삶 전체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즉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웅의 궁극적인 체험과 행위의 예비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의 시련은, 자각의 위기를 상징한다. 이 자각의 위기를 통해 영웅의 의식은 증폭되고, 어머니 상의 파괴자, 즉 천생연분의 신부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련을 받는 당사자는 자기와 아버지가 동일하다는 사실과, 자기가 곧 아버지의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용어가 일반인에게 생소해서 영웅의 문제는 일반인의 삶과 무관해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삶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대한 실패는 결국 의식의 제약으로 나타나는 수밖에 없다.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세계 도처에 널린 영웅 신화에 나오는 영웅의 모험은 일반적인 양식으로, 어떤 계층에 속하는 사람에게든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여기에 광의의 술어로 공식화시켜 본 것이다. 우리는 이 일반적인 유형과의 비교에서 우리 자신의 입장을 밝혀내야 하고 이것을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는 제약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데 필요한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 도깨비란 대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도깨비들이란, 자기 인간성의 미해결 수수께끼가 투영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상(理想)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개인이 자기 삶을 파악하는 징후인 것이다.

현대의 정신분석가 진료실에서는, 영웅 모험의 각 단계가 환자의 꿈과 환각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정신분석가는 조력자, 즉 입문식의 사제가 되어 환자의 무의식의 바닥의 깊이를 잰다. 그리고 최초의 단계가 끝나면 환자의 모험은 항상 어둡고, 무섭고, 욕지기나고, 마술 환등 속에서 보는 듯한 공포의 여행으로 진행되게 마련이다.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이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행하는 것에는 어차피 육욕의 냄새가 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깨우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외 없이 낭패의 순간을 경험한다. , 사는 행위, 삶의 구조, 특히 삶의 괄목할 만한 상징인 여성은 더없이 순수한 영혼을 차마 상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170. 두려워 말라, 모두가 신 안에 거하리니. 오고 가는 형상(그리고 육신 역시)은 춤추는 내 팔다리의 한순간 휘저음이다. 나를 아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성사(聖事)의 불가사의(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혹은 부처의 명상이라는 미덕에 의해 괄목할 만한 효력을 내는), 원시적인 호부나 액막이의 보호력, 신화나 동화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조력자는 화살이나, 불꽃이나, 홍수가 사실은 보기보다는 무섭지 않은 것임을 알려주는 인간의 자위 수단이다.

아버지의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피해자의 에고가 투영된 것이다. 즉 지난날 존재했던 예민한 유아기의 장면이 전면으로 투사됨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교육적으로 백해무익한 이러한 우상 숭배에 집착한다는 것은 당사자를 죄의식에 빠지게 하고, 잠재적인 성인의 정신을 아버지,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온전하고 현실적인 견해로부터 당사자를 봉쇄하게 된다. <화해atonment>, <하나되기at-one-ment>란 스스로 만들어낸 두 마리의 괴물((초자아)으로 보이는 용과 죄악(억압된 이드))으로 보이는 용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자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이게 예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는 아버지가 자비로우며, 이 자비를 믿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믿음의 중심은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신의 족쇄 바깥으로 이동하고, 믿음의 중심이 이동하면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사라진다.

영웅이, 조력자인 여성에게서 희망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다. 여성의 마법(꽃가루라는 호부, 중재의 능력) 덕분에 영웅은, 자아가 송두리째 흔드리게 하는 아버지의 무서운 입문 의식 경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영웅은, 아버지의 끔찍한 얼굴을 믿을 수 없으며 그 믿음을 다른 곳에다 기울인다(즉 지주녀, 혹은 성모). 지원을 보장받은 영웅은 위기를 견디어 나가고, 결국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투영하고 있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77.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 준다. 한 아이가 자라, 어머니 품속의 목적인 자장가를 떠나 어른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될 때, 이 아기는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어머니가 그때까지 <><>을 표상하고 있었듯이, 지금부터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이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여기엔 새로운 경쟁자적 요소가 틈입한다. 즉 아들은 세계를 섭렵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를 경쟁 상대로 삼고 딸은 설렵된 세계 자체가 되는데 있어서 어머니를 경쟁자로 삼는 것이다.

입문에 대한 전통적 인식은, 부모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관련성을 철저하게 바로잡아주면서 그가 살아갈 삶의 기술과 의무와 특권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수렴하고 있다. 비법 전수자(아버지 혹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람), 유아기의 부적당한 카텍시스(dathex-es, 리비도가 특수한 사람, 물건, 또는 관념을 향하여 집중 발현되는 현상)로부터 놓여난 입문자에게만 의식(儀式)의 상징을 베풀게 되어 있다. 이런 입문자라야 자기 강화라는 무의식적(혹은 의식적,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동기나 개인적인 선호나 혹은 증오 때문에 정당하고 비개인적인 힘을 오용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그는 끊임없이 삶의 싸움판에 나서야 하고 입문의 사제, 안내자, 태양을 향한 문 노릇을 해야 한다. 요컨대, 선악에 대한 유아기 환상을 떨치고, 희망과 공포에서 놓여나 평화롭게 존재의 계시를 이해하고 우주 법칙을 엄숙하게 경험하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입문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180. 이런 식으로 그들은 위대한 아버지 뱀의 몸 <안에서> 어머니를 잃는 대신에 그 보상으로 얻게 될 새로운 세상을 소개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 상상의 중심(즉 세계의 축)에다 젖가슴 이미지 대신 남근을 세운다.

 

5 신격화Apotheosis

 

196. 인간에게 알려진 신들 가운데 관세음보살만큼 많은 기도를 가납(嘉納)하는 신도 없을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즉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만 넘어서면, 이름붙여지고 경게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공()의 무량 세계가 열린다)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공()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그는 신의 은혜 안에서 중생을 돕는 존재로, 중생의 존재 안으로 삼투한다. 따라서 광대한 부처의 정신적 왕국 도처에서 그에게 하는 기도는 모두 가납된다. 그는 다양한 모습으로 일반 세계를 왕래하며, 그를 필요로 하는 중생, 기도하는 중생에게 나타난다. 그는 팔이 둘인 인간의 모습을 비롯, 팔이 넷, 여섯, 열 둘, 혹은 천 개[千手觀音]인 초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왼손에는 늘 이 세상이라는 연화(蓮花, Lotus)를 들고 있다.

부처 자신처럼, 이 신과 같은 존재는 인간적인 영웅이 마지막 무지의 공포를 초월하고 획득하는 신적인 상태divine state의 한 본보기다. <의식의 외피가 벗겨져 나가, 모든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변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 상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해탈의 상태이며, 영웅들이 됨으로써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상태다. <만물에는 불성(佛性)이 있으니>, (같은 말을 달리 하자면) <일체의 존재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206.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서 꾸어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누가 복음6:27-36

 

209. 성자이며 시인인 밀라레파Milarepa의 노래 두 편에서 가려뽑은 다음의 티베트 시구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제1차 십자군 원정을 부르짖고 있을 당시에 씌어진 것이다.

 

육계(六界) 미망의 도시 가운데

으뜸가는 소인(素因)은 악업에서 나온 죄악과 우매함이다.

여기서 중생은 좋고 싫음에 의지하니, 언제 이 좋고 싫음이 다르지 않음을 알 틈이 없다.

오호라, 좋고 싫음의 무상함이여.

만상이 본래 비었음을 알면,

그대 마음에 대자 대비가 일어나리라.

그대와 남이 다르지 않음을 알면

남을 섬길 수 있으리라.

남을 능히 섬겨 내면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나를 만나면 불성에 이르리라.

 

217. 어느 유학자(儒學者)가 불조법통(佛祖法統)28대 조사(祖師)인 달마Bodhidharma에게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하고 청했다. 달마는,

좋아, 그러마, 너의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고 대답했다. 유학자는,

그게 문젭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달마는,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고 했다. 유학자는 그 말귀를 알아먹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 Coomaraswamy, Hinduism and Buddhism, p. 74.

 

6 홍익(弘益)

 

226. 여기에서 이 모험이 쉽게 끝났다는 것은 주인공이 초인간이며, 원래가 왕의 재목이었음을 뜻하고 있다. 영웅이 모험을 쉽게 끝내는 예는, 여러 동화나 육화(肉化)한 신의 행위에 관한 전설에 자주 등장한다. 보통 영웅 같으면 모진 시련을 겪을 터인데도 선택된 자는 별 방해도 받지 않고, 또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다. 샘은 세계의 배꼽이고, 불타는 물은 파괴할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이며, 돌고 있는 침대는 세계의 축이다. 만상이 잠드는 성(), 꿈속에서 의식이 도달하는 궁극의 심연이다. 꿈은 개인의 삶이 미분화(未分化) 에너지 속으로 해소되는 지점이다. 해소되어 버리면 곧 죽음이다. 불이 꺼진다는 것 역시 죽음을 상징한다.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음식은 끊임없이 생명을 부여하고 형체를 만드는 우주적 근원의 권능을 상징한다. 이 음식의 모티프(유아기의 환상에서 나온)는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벌이는 <풍요한 잔치cornucopian ban-quet> 이미지의 동화판 이야기이다. 여신과의 만남과, 불의 도둑질이라는 두 상징적 행위의 만남은 신화 영역에서의 신인 동형 동성의 능력을 선명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불멸하는 생명의 술, , 양식, , 그리고 영광의 수호자, 권화(權化) 혹은 시혜자까지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비유적 표현은, 반드시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대체로 심리학적 관점에서 해석되어도 무방할 듯하다. 유아의 초기 발전 단계에서는, 세월의 흐름과 무관한 상태의 <신화적인 징후>가 관찰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이러한 징후는, 어머니의 품을 떠날 즈음 아이를 괴롭히는, 자기 육체가 파괴당할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대한 반작용과 끊임없는 저항으로 나타난다. 아이들은 짜증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이고, 짜증을 수반하는 환상은 어머니와 관련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찢어버린다……. 이윽고 아이는 이러한 충동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하게 된다. 자기 내부의 모든 것을 쏟아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기 몸의 고결성에 대한 갈망, 원상 회복의 환상, 내적 외적인 <나쁜> 힘에 대한 보호와 불가괴성(不可塊性)의 은밀하고도 깊은 요구가 심성을 형성시키기 시작한다. 이러한 결정적 인자는 후일 성인이 된 다음의 신경증적, 혹은 정상적인 일상의 삶, 정신적인 노력, 종교적 신념, 제의적 관습에 그대로 남게 된다.

 

249.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뜨리고, 관문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영웅의 마음은 마침내 우주의 벽을 깨뜨리고 모든 형상(모든 상징, 모든 신성(神性))의 경험을 초월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변의 공()에 대한 자각이다.

단테가 정신적 모험을 마지막 한 걸음까지 마치고 천상의 장미에 싸인 삼위 일체 신Triune God의 상징적 환상 앞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다. 성부, 성자, 성신의 형상을 두루 경험한 그에게도 아직 한 가지 경험이 더 유보되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베르나르가 내게 눈짓과 함께,

저 위를 보라는 듯 미소짓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나의 눈이 점점 밝아지면서,

저 지존의 빛줄기 속으로,

자꾸만 빨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내가 본 환상은, 말로 할 수 없었으니,

말이 그 나타난 바에 승복하고,

기억 또한 압도당했다. * “Paradiso” p. 253

 

<눈이, 말이, 마음이 하릴없다.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한다. 이를 남에게 가르칠 방도도 알지 못한다. 이는 이미 알려진 바와도 같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것까지 초월해 있다.>

 

3장 귀환 Return

 

1 귀환의 거부

 

253.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영웅에게 지혜의 시문(時文), 황금 양털, 혹은 잠자는 미녀를 인간의 왕국으로 데려오는 또 한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천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 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웅이 이 책임을 회피한 예는 너무나 많다. 심지어는 부처까지도 정각(正覺)이라는 승리를 얻은 뒤에 이 소식이 대중에게 전해질 수 있을지 여부를 의심했고, 성자들 중에는 천상적인 무아지경에서 몰()한 성자가 많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영웅들이, 불로 불사 여신의 축복받은 섬에 아예 영원히 눌러앉아 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2 불가사의한 탈출

 

257. 승리한 영웅이 여신이나 신의 축복을 획득하고, 그가 속한 사회를 구원할 불사약을 가지고 원상 복귀할 대목이 되면, 영웅 모험의 이 최종 단계에서 초자연적인 후원자에 의한 지원이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만일 전리품이 그 수호자의 의지에 반한 상태에서 영웅의 손에 들어갔거나, 영웅의 귀환 의사가 신이나 악마의 찬성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이 신화 주기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격렬한, 때로는 익살스러운 추격전이 벌어진다. 마법의 장애물이 신비스러운 것이면 신비스러운 것일수록, 영웅의 도피가 교묘하면 교묘할수록, 이 탈출과 저지의 양상은 그만큼 복잡해진다.

 

3 외부로부터의 구조

 

269. 영웅은 외부의 지원을 빌려 초자연적 모험에서 귀환하는 수가 있다. 말하자면 이 세계가 합세하여 그를 도울 수도 있는 것이다. 외부 세계가 이렇게 하는 것은, 지칠대로 지친 영웅에게, 힘겹게 도달한 지복의 땅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옛말마따나 <세상을 버린 자가 이 땅에 다시 돌아오려 하겠는가? ‘거기에 남아 있으려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280. 서로 멀리 떨어진 문화권에서 채집한 이 세 가지 예화(라벤, 아마데라스, 그리고 이난나)는 외부로부터의 구조 상황을 충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세 예화에서 초자연적인 힘은 주인공의 시련에 끝까지 동참하다 마지막 단계에 나타난다. 영웅은 의식을 잃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원래 그가 살던 세계로 되살아난다. <불가사의한 도망>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웅은 자아를 지키는 대신 자아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조력자의 은혜로 영웅은 자아를 되찾는다.

이제 우리는 이 여행의 마지막 고비에 이르렀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모험은 서곡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신화 영역에서 일상 현실로 귀환하는 영웅의, 역설적이고 험난한 관문 통과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뿐만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귀환 관문의 통과

 

281. 두 세계, 곧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삶과 죽음, 밤과 낮처럼 서로 다르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영웅은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 암흑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암흑의 세계에서 영웅은 그 모험을 완성할 수도 있고, 거기에 갇힘으로써 우리들로부터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엄청난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기꺼이 이 일을 맡든, 어쩔 수 없어서 맡게 되든, 우리가 영웅의 행위를 이해하자면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 생황에서 중요하게 보이던 두 세계의 가치나 차이는, 지금까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하던 <타자><자아>를 동화시키는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식인 도깨비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개인의 개성화 상실의 이 공포는, 자격 미달인 개인에게는 초월적인 경험이라는 만만치 않은 짐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영웅에 값하는 인간은 대담하게 쳐들어가 마귀 할멈이 여신이 되고, 용이 신들의 번견(番犬)이 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정상 상태로 깨어 있는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심층에서 솟아난 지혜와, 속세에서 유용한 분별 사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 그래서 미덕에서 득실 계산이 파생하고, 그 결과 인간의 존재는 타락한다. 순교는 성자나 하는 것이지만, 범인에게도 그들 나름대로 중요한 것은 있는 법인 바, 이런 것들을 들의 백합처럼 멋대로 자라게 버려둘 수는 없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계의 창조자이며 이를 보존하는 주를 지키기 위해 칼을 뽑는다. 초월의 세계에서 보내진 은총은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어 버리니, 다른 영웅이 나와 말씀을 새롭게 설명할 필요가 절실해진다.

하지만, 인류가 약삭빠르면서도 우매했던 몇천 년 세월을 통해 수십만 번 제대로 가르쳐지기도 했고, 그릇 가르쳐지기도 했던 것을 어떻게 다시 가르친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영웅의 궁극적인 숙제다. 빛이 있는 세상의 언어로, 언어가 무용한 저 암흑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2차원의 평면으로 3차원의 형상을 나타낼 것이며, 다차원의 의미를 3차원의 이미지로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한 쌍의 대립물에 대한 정의의 시도가 무의미한데, 어떻게 <그렇다><그렇지 않다>는 말로 이를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감각의 배타적 증거에만 급급하는 일반인에게 어떻게 저 만유의 근원인 공()을 설명한단 말인가?

수많은 실패의 살계가, 이 삶을 확정하는 관문의 통과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증하고 있다.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 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헛된 정열에 소진된 범상한 남자와 여자에게 왜 초월적인 은혜의 체험을 그럴싸한 것, 혹은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일까? 밤에 꿈으로 꿀 때엔 중요하게 보이다가도 밝은 대낮에 생각하면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시인이나 예언자는 맨정신으로, 전날 밤에 했던 기도를 후회한다. 사회를 악마에게 넘겨버리고, 저 자신은 천상의 바위 굴에서 문을 닫고 은거하는 편이 쉽기는 쉽다. 그러나 어느 정신적 산과의(産科醫)<시메나와>를 쳐놓고 퇴로를 차단한다 해도, 시간 속에서 영원을 표상하고, 시간 속에서 그 영원을 지각하는 작업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립 반 윙클 이야기는, 귀환하는 영웅이 처하는 미묘한 상황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이야기다. 립 반 윙클은,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 그러하듯이 무의식적으로 모험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힌두교도들은, 깊은 잠 속에서 자아는 통일되고 따라서 지복을 누린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깊은 잠을,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는 <순지상태(純知狀態, cognitional state)>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간에 근원적인 흑암의 세계 방문을 통해 우리는 원기를 얻고 정신을 충전시킨다고 해서 우리 삶 자체가 그로 인해 개혁되는 것은 아니다. 잘못하면 립 반 윙클처럼 그 경험을 증거할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수염만 텁수룩하게 길러 돌아오는 것이다.

 

285. 립 반 윙클의 경우보다 더욱 맥빠지는 것은 아일랜드의 영웅 오이신Oisin의 운명이다. <청춘의 나라> 공주와 기거하다 귀환한 영웅 오이신의 경우는 어떤가?

오이신은 립 반 윙클보다는 한 수 위였다. 그는 모험의 땅에서도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었다. 그는 의식적으로(깨어 있는 상태에서) 무의식의 왕국(깊은 잠)으로 내려갔고 잠재 의식적 경험치를 깨어 있는 자신의 인격에 통합시킬 수 있었다. 이미 그는 다른 세상에 가 있었다. 그러나 이 다른 세상의 조건이 좋은 상황 때문에 그에게 부과되는 귀환의 어려움은 그만큼 더 컸다. 그의 전인격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의 형식과 형상에 동화되어 버린 다음이어서, 시간이 존재하는 곳의 형식과 형상의 충격 때문에 좌절한 것이다.

 

290.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경은, 신에 버금가는 사람은 발로 땅을 밟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신성한 인물이나 터부가 되어 있는 인물은 이 신성성, 주술력이 방전, 고갈되지 않도록 땅과 접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인물에게 그 신성한 실체가 목구멍에 이르기까지 충만되어 있도록 하려면, 전기 용어를 빌려 말해서, 이러한 인물과 대지 사이엔 절연체(絶緣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특급 리츠호텔 로비를 서성거리는 텁석부리 예술가는 질문을 받기가 바쁘게 자기의 특이한 성벽을 설명할 것이다. 성직자 법의의 칼라는 그가 강단에 서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20세기의 수녀들은 중세기 차림 그대로 거리를 나다닌다. 아내가 낀 반지는, 다분히 그런 의미에서의 절연체다.

 

291.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립 반 윙클은 무엇을 체험하고 왔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귀환은 한낱 우스개로 끝나고 만다. 오이신은 자신의 저승 체험을 알고 있지만, 자기의 중심이 저승에 있다는 걸 잊어버렸기 때문에 역시 전락하고 만다. 카마르 알 자만은 그중에서도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 속한다. 그는 깨어 있는 채로 깊은 잠이라는 천복의 은혜를 체험했고, 믿어지지 않는 모험이라는 튼튼한 액막이를 지니고 빛의 세계로 귀환했기 때문에 일상의 엄연한 환멸에 직면하고도 자기 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293. 카마르 알 자만이 보인 반응과 부두르 공주가 보인 반응은 대조적이었다. 부드르 공주는, 누가 엿보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누가 엿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294.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런 이야기를 한 곳에 모아보면 일치하는 하나의 필연적인 공통 분모가 엿보인다. 기억 속에서 자기 영혼의 다른 부분과 만났음을 상기시키는 신비스러운 반지는 영웅이 그곳에 간 적이 있음을 시사한다. 립 반 윙클에겐 이런 반지가 없었다. 이 반지는 또, 일상의 현실은 저승의 현실을 배반하지 못한다는, 생시의 믿음을 재확인시켜 준다. 이 반지는, 두 세계를 통합하려는 영웅의 희망을 상징한다.

카마를 알 자만의 기나긴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운명이 일상의 삶으로 구체화되는 완만하면서도 놀라운 역사다. 그러나 이 운명이 모든 이에게 다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체험하고, 반지를 얻어 다시 현실로 귀환한 영웅에게만 가능하다.

 

5 두 세계의 스승

 

297.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말하자면 시간을 초월한 세계인 저승과, 일상적인 세계인 이승을 두루 돌아다니는 자유(그것도 한 세계의 원리로 다른 세계를 오염시키지 않되, 한 세계의 선으로써 다른 세계의 존재를 깨우치면서)는 거장들의 재능에나 어울리는 자유다. 니체는, 우주적인 춤의 신Cosmic Dancer, 한곳에 붙박혀 있지 않고 이곳저곳을 가볍게 떠돌아다닌다고 주장한다. 물론 한 관점에서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관점에서의 통찰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

신화는, 이미 변모한 신비의 형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굳혀 내보이지는 않는다. 이 경우 변모의 순간은, 마땅히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고구되어야 할 귀중한 상징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변모한 당시의 순간이 바로 이런 순간이다.

 

298. 신화란 신화는 이 한순간의 이야기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예수는 안내자이며, 길이며, 초월적인 세계, 귀환의 동반자다. 제자들은 그의 비의 전수자들이다. 그러나 그 신비를 통달한 자들이 아니라, 두 세계를 일거에 수렴하는 역설적 체험으로 안내받는 자들이다.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하고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심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관심 갖는 것은 상징 체계이지 역사성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립 반 윙클, 카마르 알 자만,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해 관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 더구나 이런 이야기는 세계 도처(수많은 영웅과 함께)에 깔려 있기 때문에, 보편적 테마인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는지 여부는 부수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서 역사성을 강조하면 혼란이 생길 뿐이다. 즉 암시적 메시지를 어지럽게 할 뿐인 것이다.

 

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크리슈나는 아르쥬나가 익히 보아온 모습을 보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베다(經典)를 공부한다 하더라도, 무서운 고행을 한다 하더라도, 보시(布施)를 행한다 하더라도, 또 의식을 행한다 하더라도 네가 본 나의 이 최고의 모습은 볼 수 없느니라. 그러나 오직 믿는 마음이면 나를 알 수 있고 참답게 볼 수 있으며 내게 들어와 하나가 될 수 있느니라. 항상 나를 위해 일하고 오직 나만을 목적으로 알고, 진실로 나를 정성으로 믿으며,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악의를 품지 않는 자, 그런 자가 내게 오느니라.>

예수는 똑같은 것을 훨씬 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Law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은자의 숲에 은거하는 현자와 운수행각(雲水行却)의 탁발승은 동양의 삶과 전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신화에서 이러한 인물은 방랑하는 유태인(추방당한 무명의 존재지만 주머니 속에는 고귀한 진주가 들어 있는), 개에게 쫓기는 거지, 음악으로 듣는 자의 영혼을 위무하는 방랑 시인, 가장(假裝)한 신, 오딘, 비라코챠, 에드슈로 나타난다.

<때로는 바보로, 때로는 현자로, 때로는 왕관에 미친 자로, 때로는 방랑자로, 대로는 예언자처럼 부동(不動)하는 존재로, 때로는 자비로운 얼굴로, 때로는 귀인(貴人)으로, 때로는 폐덕자로, 때로는 무명인으로…… 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의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명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 Shankaracharya, vivekachudamani, 542 and 555.

 

6 삶의 자유

 

307. 영웅이 불가사의한 여행을 끝내고 귀환한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영웅이 지난 전장은, 모든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의 희생으로 삶을 영위하는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混在)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영원의 원리 안에 집착하지 않는 이승 세계의 인간이 만일 자기 행위의 결과에 초연해하고, 이를 살아 있는 신의 무릎에다 올려놓을 수 있다면, 그는 이 제물에 의해 죽음의 고해에서 풀려날 수 있다.

<그러므로 애착을 떠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 너의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고, 네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원망(願望)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되, 흐트러지지 말고 나가 싸우라.> * Bhagavad Gita, 2:22-24

이러한 자각을 반듯이 세우고, 행동거지가 조용하고 자유로우며 그 손을 통해 비라코챠의 은혜가 흘러내리는 경지에 이르면 영웅은, 그 하는 짓이 백정이건, 방랑 시인이건, 왕이건 간에, 저 장엄한 법륜(法輪)을 의식할 수 있다.

 

313. 이 시인의 노래 중 대부분은 자기에게 내재하는 불멸의 존재에다 바친 것이다. 자기의 개인적인 내력을 밝힌 것은 마지막 한 연에 지나지 않는다. 듣는 자들은 자기 내부에 있는 불멸의 존재에게 눈을 돌리고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탈리에신은 마귀를 두려워했지만, 바로 그 마귀에 의해 삼켜졌고, 그래서 재생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鬪士)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시간 속의 엄연한 불변성을, 존재의 영속성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변화가 영속성을 파괴할 때도, 다음 순간(혹은 <다른 사물>)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 Ovid, Metamorphoses, p, 252-255

이로써 한 순간은 다음 순간으로 이어진다. 영원이라는 완자가 세계라는 공주에게 입맞출 때 잠자던 공주의 저항은 끝난다.

 

공주는 잠을 깨어 눈을 뜨고 다정한 눈길로 왕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왕이 잠을 깨었고 왕비와 궁전의 온 시종들이 잠을 깨었다. 그들은 휘둥그래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말들이 일어나 머리를 흔들었다. 사냥개들이 잠을 깨어 꼬리를 흔들었다. 지붕 위의 비둘기들이 날개 속에서 꼬리를 꺼내어 주위를 둘러보다가 벌판 너머로 날아갔다. 벽에 앉았던 파리가 다시 걷기 시작했고, 부엌에서 불길이 다시 타면서 음식을 익히기 시작했다. 고기는 다시 지글거렸고, 요리사가 설거지하는 소년의 귀에다 대고 식기를 두드려 소년이 비명을 질렀다. 하녀는 닭털을 다 뽑은 참이었다. * Grimm, No. 50 결론 부분.

 

4 열쇠 The Keys

 

316. 영웅의 모험은 앞의 도표로 요약될 수 있다.

원래 살던 오두막이나 성에서 떠난 신화 속 영웅은 꾐에 빠지거나, 납치당하거나 자진해서 모험의 문턱에 이른다. 여기에서 영웅은 길을 아내할 그림자 같은 부정적인 존재를 만난다. 영웅은 이를 퇴치하거나 이 권능을 지닌 존재와 화해하여 산 채로 암흑의 왕국으로 들어가거나(골육상잔, 용과의 싸움: 제물 헌납, 혹은 호부에 의지하여), 적대자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의절, 고난). 이 문턱을 넘어선 영웅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친숙한 힘에 이끌려 이 세계를 여행하는데, 경우에 따라 위협을 받기도 하고(시련),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자(조력자). 신화적인 영역의 바닥에 다다르면, 영웅은 절대(絶大)한 시험을 당하고, 그 시험을 이긴 보상을 받는다. 이 승리는 세계의 어머니인 여신과의 성적 결합(신성한 결혼), 창조자인 아버지에 의한 인정(아버지와의 화해), 그 자신의 신격화(神格化), 혹은 적대적인 능력이 그의 힘에 벅찰 경우에는 전리품의 가로채기(신부 훔치기, 불 훔치기)로 나타난다. 원래 이 승리는 자기 의식의 확장이며, 존재와의 합일이다(깨달음, 변모, 자유). 마지막 단계는, 귀환이다. 영웅이 그 권능의 축복을 받은 경우 전리품은 영웅을 보호한다(使者). 그렇지 못할 경우, 영웅은 도망치고, 부정적인 세력의 추격을 받는다(모습을 바꾸며 도주하기, 장애물을 피하며 도주하기). 귀환의 관문에서 초월적인 권능의 소유자는 뒤에 남아야 한다. 영웅은 호자서 그 무서운 왕국에서 귀환한다(귀환, 부활). 그가 가져온 전리품(홍익)은 세상을 구원한다(불사약).

 

319.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오류는 성경이나, 많은 기독교 의식에 대해서도 자행되어 왔다.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 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이 빈사 상태에 빠진 성화(聖畵)는 그 영원히 인간적인 의미를 다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322. 기독교를 향한 우리들의 입문 의식이었던 이 세례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예수의 말에는 이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의 말씀에 니고데모가 물었다.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잇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가 대답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3-5.

세례에 대한 일반의 해석은 <원죄를 씻는 의식>으로 되어 있다. 즉 재생이라는 측면보다는 정화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차적인 해석이다. 또 설혹 전통적인 탄생의 이미지가 기억되고 있다 해도 이에 선행하는 결혼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화적 상징은 그 함축적인 의미 그대로 게승되어야 한다. 즉 수천 년에 걸친 영혼의 모험을 유추에 의해 표상해 온 만큼 그 대응 관계의 전 체계를 섣불리 펼쳐보이기 이전에 그것이 지닌 모든 함축적 의미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2부 우주 발생적 순환

 

1장 유출 Emanations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331.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이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탄생, , 죽음은 무의식으로의 하강 및 회귀로 볼 수 있다. 영웅은, 살아 있을 동안에, 창조 과정 중에는 지각되지 않는 초의식의 요구를 알고 이를 대리하는 자다. 영웅의 모험은, 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나타낸다. 이 순간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의 살아 있는 죽음의 어두운 벽 너머의 빛의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2 우주의 순환

 

3 허공에서 공간

 

342.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주의 끝을 헤아리고, 그 끝이 곧 시작임을 아는 자라야 현자라고 불릴 만하다.>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꿈 속에서 그런 것처럼 신화에서는 이미지가 최상의 경지에서 우스꽝스러운 상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넘나든다. 신화 속에서 마음은 정상적인 가치 체계에 안주하지 못하고 뜻밖의 각성 체험을 통하여 끊임없이 모욕을 당하거나 충격을 받는다............

 

4 공간의 내부에서 생명

 

357. 그러나 이 결합은 남자의 행위, 그가 세상을 사는 방법의 영향을 받는다. 그가 정결하고, 그의 행동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으면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짝이었던 영혼의 여성적인 부분과 제대로 짝하게 된다.

 

5 하나에서 여럿으로

 

366. 중심적인 원인의 평화에서 말초적 결과의 소용돌이를 향한 급전직하의 예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는 대목에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은 금단의 과일을 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졌다. 낙원의 복락은 그들에게 닫혔고, 그들은 변형의 베일의 다른 쪽에서 창조된 세상을 보았다. 그로부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얻기 위해서는 수고해야 했다.

 

6 창조의 민화

 

372. 우주 역시 악의 대리자인 반항자를, 광대의 역할로 조형해 낸다. 악마(탐욕스러운 돌머리이자 예리하고 영리한 사기꾼인)는 언제나 이런 광대다. 이러한 광대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는 승리하나, 그들 자체나 그들의 업적은 무대가 초월적인 차원으로 옮겨지면 간단히 사라지고 만다. 그들은 그림자를 본질로 오해한다. 그들은 그림자 영역에서의 필연적인 불완전성을 상징하는데, 우리가 이곳에 남아 있는 이상 장막은 걷힐 수 없다.

 

2장 처녀 잉태 The virgin birth

 

1 어머니 우주

 

379. 바이나뫼이넨(타고난 영웅)이 채 해변에 오르기도 전에, 이미 또 하나의 어머니 자궁이라는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즉 절대한 우주적 바다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그는 근본적으로 비인간적인 힘을 행사하는 자연의 입문 의식을 치러야 하는 것이었다. 물과 바람이 있는 바다의 표면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신물이 나도록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었다.

 

2 운명적 모태

 

우주적 여신은, 여러 가지 가면을 쓴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창조의 결과란 다양하고 복잡한 데다, 창조된 세계의 관점에서 경험할 때면 상호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어머니는 동시에 죽음의 어머니다. 이 어머니는 기근과 질병이라는 추악한 마귀의 가면을 쓴다.

 

3 구세주를 낳는 자궁

 

389. 이제 문제는 인간이 사는 세계다. 열왕(列王)의 실제적인 심판과, 천상적 게시의 주사위인 사제들의 가르침에 주눅이 든 나머지 의식의 장()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인간의 이야기라는 대서사시는 목적이 서로 모순되는 분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인간의 시야도 이제는 좁아져 오직 가시적이고, 손에 잡히는 존재의 표피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심연을 투시할 전망은 이제 사라졌다. 인간 고뇌의 의미 심장한 형상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다. 사회는 오류와 재난 속으로 빠져든다. <소자아><대자아>의 재판석을 강탈했다.

이것은 신화에 나타나는 영원한 테마요, 선지자의 목소리로 듣는 귀에 익은 절규다. 사람들은 이 영혼과 육체가 더불어 뒤틀린 세계에서 다시 한번 화신(化身)한 심상의 시가를 읊어줄 사람을 목마르게 기다린다. 우리는 우리의 전승 신화에 버릇들어져 있다. 신화는 어느 곳에든, 갖가지 얼굴로 존재한다. 헤롯 형의 인간(失正하는, 집요한 자아의 극단적인 상징)이 인류를 정신적 굴욕의 정점에다 데려다 놓자, 순환 주기의 불가해한 힘은 스스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고만고만한 마을에서 한 처녀가 태어나는데 이 처녀는, 자기 세대의 오점이 하나도 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으로 자란다. 범용한 남성들 사이에 섞인, 바람의 신부인 우주적 여성의 축소판이다. 원초적인 심연의 휴경지(休耕地)로 남은 그녀의 자궁은, 만반의 준비가 다 된 상태에서, 일찍이 공()을 살찌웠던 근원적인 권능을 부른다.

 

4 미혼모의 민화

 

393. 처녀 잉태의 이미지는 민담이나 신화에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한 가지 실례, <멋쟁이> 시닐라우Sinilau에 관한 짤막한 통가Tonga의 민담 한 자루면 넉넉하다. 이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그 극단적인 허구성 때문이 아니고, 전형적인 영웅의 삶의 주요 모티프를 무의식적인 해학으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이야기는 처녀 잉태, 아버지를 찾기 위한 여행의 출발, 시련, 아버지와의 화해, 미혼모의 정실 확정(正室確定) 및 입적(入籍), 사칭자들이 당황하는 사이에 영웅이 친자로 확인되는 등의, 전형적 영웅의 모티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3장 영웅의 변모 Transformations of the Hero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396. 이제 우리는 두 단계를 거쳐왔다. 즉 첫째는, 비실재적 실재의 직접적인 유출에서 신화적 시대의 유동적이나 시간을 초월한 존재에 이르는 단계, 둘째는, 이 실재적 실재에서 인류 역사의 영역에 이르는 단계다. 유출은 이제 그 극점에 이르렀고 의식의 장은 이제 좁아질 대로 좁아졌다. 전에는 사상(事象)의 실체가 보였지만 이제는 그 부수 효과만 인류의 눈, 작고 현실적인 동공의 초점 앞에 모일 뿐이다. 따라서 이제 우주 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않게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의 숙명은 바로 이 영웅들을 통해 실현된다............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401. 따라서, 이 장에서는 먼저 영웅의 불가사의한 어린 시절을 다루어보려고 한다. 이 세상으로 화신한 내재적인, 신적 원리의 특수한 현현, 그리고 이어서 영웅이 자기 운명의 길을 감당하는 갖가지 삶의 양상은 바로 이 범상하지 않은 시절을 통해서 드러난다. 시대에 따라 이 양상은 다양하게 변한다.

 

3 전사로서의 영웅

 

420. 백발 청년이 날빛에 본 세계는 대강 이러했다. 그러나 혼자 있는 데 싫증이 난 그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 앞에 다가가 빌었다.

저의 나무, 제 거처의 어머니신, 고귀한 귀부인이시여, 산 것은 모두 짝으로 있어 새끼를 치는데 저만은 혼잡니다. 이제 길을 떠나 아내될 만한 동류를 찾고자 합니다. 동류들과 겨루어 제 힘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도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들과 사귀어 그들 식으로 살아보고 싶기도 합니다. 원컨대 저를 축복하소서, 저의 기도를 가납하소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아룁니다

 

422. 인간의 형상을 한 영웅의 재세 기간(在世其間)은 마을과 도시가 온 땅을 뒤덮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시작된다. 태초부터 있었던 많은 괴물들은 여전히 외곽 지대에 웅크린 채, 인간의 사회에 대해 심술을 부리거나 인간의 기를 꺾는다. 이러한 괴물들은 정복되어야 한다. 더구나 인간의 탈을 쓴 폭군들은 이웃의 선의를 짓밟고 일어서 학정을 일삼는다. 이 폭군들 역시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영웅의 기본적인 임무는, 그러한 괴물과 폭군을 퇴치하고 그 인간의 삶의 무대를 정화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1) 좋은점

 

전 세계에 있는 신화, 옛이야기, 동화, 민담 등 이야기는 모조로 모아 놨다. 이것은 저자가 그만큼 방대한 양의 독서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저자는 주제별로 적당한 이야기들을 배치하여 저절로 진리가 드러나도록 했다.

 

저자는 신화의 이야기를 영웅이라는 가슴 떨리는 주제로 잘 정했다. 그에 맞춰 보편성 있게 목차를 훌륭히 잡았다. 그리고 옛날이야기라는 케케묵은 재료를 가지고, 누구보다도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게 진수성찬을 내놨다.

 

(2) 보완점

 

2부 영웅의 모험은 제목부터가 중복된다. 그러지 말고 새로운 주제를 잡아 풀어냈으면 어떨까 한다. 같은 제목이니 2가 왜 필요한가에 의문이 들었다.

 

인용을 너무 많이 해 이 책 내용 자체가 인용인 것 같다. 이를 줄이고 자신이 얻게 된 통찰을 책 속에 넣었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3) 나중에 이 주제로 책을 쓴다면

 

이 책은 의식의 확장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관심사인 상담심리즉 사람의 내면 변화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펼쳐보면 괜찮을 것 같다.

 

1) 출발 : 삶에서 잘 안 풀리는 것,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한 인식

2) 입문 : 관찰 과정에서 혼란에 빠지기, 세상에 대한 편견이 바로 잡음

3) 귀환 :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화 성찰, 젊은 세대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기

4) 열쇠 : 삶의 시기에 따라 위의 과정을 반복, 되풀이 하며 삶을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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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6 03:31:17 *.35.66.187

일을 하며 책을 읽고 정리하는 게 많이 벅차서

이만 따라가려고 합니다...

다음에 좋은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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