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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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대하여
두 저자가 어떤 분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이번에 새로 시작한 변경연 팟캐스트를 들어 보았다. 사회자께서 첫 번째 게스트로 초대된 두 분의 작가를 ‘변경연의 환상의 듀오’, ‘공저 전문가’ 등으로 소개를 했을 만큼 두 사람은 이미 여러 권의 책을 함께 펴내기도 했다. 이번 책 ‘위대한 멈춤’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처럼 두꺼운 책을 함께 작업할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도 있었는데, 그만큼 그들이 함께 고민하며 생각을 나눠온 기간이 깊고 길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홍승완
변경연 1기 연구원. 현재 자신의 성소인 회심재에서 책쓰기 작업과 연구에 매진하고 있고 기회가 있을 때 외부강연도 진행하고 있다. 200일 조금 넘은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도 매우 중요한 일상 중 하나이다. 생전의 구본형 선생님은 마음편지를 통해 그를 “대한민국 최고의 여성전문 강사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청중과의 교감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배우자와의 인연도 강연을 통해 이뤄졌다고 얘기하는 저자는 예전에는 여성 청중이 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성별에 관계없이 강연하는 것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박승오
변경연 3기 연구원. 7세, 5세의 아이의 아빠이고 현재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인문고전을 교육하는 성천문화재단에서 교육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공과대학 대학원까지 공부하며 엔지니어의 길을 걷던 저자는 어느 순간 삶의 시련을 겪게 되었고 존경하는 스승을 만나면서 인생의 항로를 변경했다고 한다. 전환기를 통해 ‘깨달음을 통해 타인과 나누라’는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 글쓰기와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울보, 옹박, 왕밥 등 여러 가지 별명을 갖고 있다고 한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6. 모험을 위해서나 보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발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이다. 실제로 전 세계 신화 속 영웅들의 모험은 영웅의 내면에 본래부터 잠재해 있던 신적인 능력을 육화하는 재발견의 여정이다.
8. 여러 인물들을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근본적인 변화는 삶의 목소리, 곧 자기 운명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수용>에서 출발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삶을 어떻게든 이끌어 가려던 적극성에서, 삶이 나를 이끌도록 내맡기는 <적극적 수동성>의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는 필시 주객의 전도다. 삶의 주체로 거듭나려면 역설적으로 <나>는 잠시 내려놓은 채 삶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13. 한순간의 사건은 인생을 바꾸지 못한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 이면의 숨은 의미를 스스로 깨달아 가는 과정을 통해 서서히 도약하는 것이다.
14. 자칫 전환점이라는 개념은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 진실은 어느 누구의 삶도 통렬한 한 방으로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때로 사람들은 삶이 단조로운 원인을 중대한 사건의 부재 탓으로 돌리고, 큰 사건을 가져다주지 않는 삶을 불평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에 기회는 하나둘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될 수 있었던 하루하루는 복권이 허비한 푼돈처럼 사라져 간다.
15. 전환기 = 실험과 성찰을 통해 내면의 가치관과 방향성이 달라지는 과정
15. 우선 전환기는 삶을 <실험>하는 시기이다...오히려 자신의 잠재력을 찾아서 살려 내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시험의 의미에 가깝다.
17. 오히려 전환기에는 홀로 방황하며 갖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러나 이런 비효율의 방황들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며 궁극적으로 자신을 키우는 최고의 투자가 된다.
18. 전환기는 경쟁, 효율, 속도, 성취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멈춤의 시간>이자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가 꿈꾸는 삶을 발견하기 위한 <탐험의 시기>이다.
22. 다른 삶을 바라보는 것과 다른 삶을 직접 살아 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전환자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일 뿐임을 이해해야 한다. 결국 문을 열고 자신의 이야길를 만드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28. 여러 부름의 유형 중 특히 분리의 경험은 처음에는 과소평가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이 극대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커다란 전환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삶의 복선이다.
29. 그러나 이러한 역할의 상실은 사실 새로운 역할을 향한 모험으로의 부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옭아 매는 과거로부터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 줄 필요가 있다. 가면을 벗어 던지는 순간 홀가분하게 자신의 민낯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도 한다.
30. 삶이 고통을 통해 우리를 부를 때, 상황을 타개하고자 더 열심히 노력하며 발버둥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방황을 할 때에는 깊이 방황하는 것이 낫다.
32. 아래로, 땅으로 내려서는 것이 완전함의 방향이라는 것이다. 우울증이 신의 손길일 수도 있다는 이 통찰이 그를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소명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왔다.
32. 우리는 흔히 등 뒤에서 길이 닫힐 때 단지 그것을 노력 부족이나 실수에서 빚어진 결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길이 닫히는 것은 길이 열리는 것만큼이나 많은 교훈이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33. 실패하는 것 역시 삶이 우리를 준비된 길로 이끌어 주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열림은 우리의 능력을 보여 주고 닫힘은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 개의 길이 닫히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경험을 <안전한 땅으로 내려서게 하려는 신의 손길>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그 고통스러운 사건이 내포하는 의미와 상징을 해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32. 전환기의 실험은 ‘아주 많은 우연한 사건들’ 속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인생은 결국 크고 작은 사건들로 촘촘히 짜여 있다. 계획대로 되어 기쁜 일도 있고, 오래 준비하고 바라던 일이 무산되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결과가 어떻든 삶을 바꾸는 것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다.
32. 다시 말해, 경험의 크기가 아니라 ‘깨달음의 크기’가 삶을 바꾼다.
34. 사건 이면의 삶의 부름을 해석하지 못하거나 부름을 거부하는 경우와 달리, 기존의 세계를 확실하게 끝맺지 못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달성하지 못한 목표, 헤어진 연인, 버리지 못하는 추억 등 미련이나 망설임에 발목을 잡혀 앞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것이다.
35. 끝 단계에서 놓아 버려야 할 것은 삶이나 직업, 인간관계 같은 것이 아니라 집착하는 욕망과 소모적인 두려움, 고착화된 습관과 스스로를 가두는 한계 같은 내면적인 것들이다. 외적인 것들만 다루려고 하는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고,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도시에 이주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다시 반복된다. 아인슈타인이 지적했듯이 문제를 만들어 낸 의식 수준으로는 그 문제를 풀 수 없다. 과거의 자신과 확실한 끝맺음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내적인 전환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외부적인 변화를 교묘하게 이용하곤 한다.
35. 과거의 삶, 어제의 나를 과감히 놓아 버리고 매듭을 지을 때, 우리는 자신이 이전과 다른 새로운 길로 들어섰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전환기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놓아 버릴 때인가?’하는 의문을 갖는 것이다.
39. 대개는 이런 공허감을 제대로 평가할 줄 모른다. 공허감을 무언가 잃어버린 ‘상실의 상태’라고 느끼며 가능한 한 빨리 다른 것으로 채울 방법을 찾는다. 그러나 사실, 공허감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바닥까지 비우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결국 중간에서 변화를 멈추고 일상으로 복귀하고 만다.
39. 필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신호를 들을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고독’이다. 사람은 고독할 때 비로소 자신과 삶을 돌아보기 때문이다.
39. “사람들을 통해 영감을 얻고, 정보를 통해 아이디어를 구하며, 연습을 통해 실력이 향상된다. 하지만 현 상황을 파악하고 새로운 발견을 이끌어 내며 자신만의 고유한 해답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
40.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보다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간절히 추구하는 의지다. 닥쳐올 공허감과 고독, 숱한 시련을 모른 척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고 정면으로 똑바로 응시하고 걸어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내면의 영웅성과 마주하게 된다.
41. 우리는 지금껏 어려움이 닥쳤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침착하게 전환을 알리는 신호를 듣고 조용히 내면을 응시하는 것이 어려움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다.
42. 그럼에도 전환기는 밥보다는 존재를 우선하는 시기가 되어야 한다. 의식적으로 밥의 문제에서 거리를 두지 않으면 존재는 늘 뒷전이 된다. 성공해서 유명해지려는 마음을 잠시 멈추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삶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멈춤’으로써 새 길을 발견하고, ‘비움’으로써 새 삶을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다.
42. 이 시기에 열매를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계획과 의지를 내려놓은 채,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봄으로써 자기 안의 비범성의 씨앗을 확인할 수 있다. 삶을 바꾸는 ‘위대한 멈춤’의 시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47. 전환기에는 평상시에 비해 동시성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사소해 보이는 우연한 사건들의 의미를 유심히 살펴야 하는 이유다.
48. 인생의 커다란 전환은 부지불식간에 다가온다. 그러므로 전환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라는 부름에 민감해져야 한다.
50. 즉, 전환기의 도구는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내 마음을 열고 삶이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듣기 위한 통로’로써 사용된다.
53. ‘도약’에 초점을 둔다고 해서 전환의 목적이 비범함은 아니다...카를 융은 ‘진정한 치유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늘 내 속에 있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한 ‘깊은 나’를 깨닫고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도약의 정수다.
56. 조지프 캠벨은 말한다. “그대는 숲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가장 어두운 곳을 골라서, 그곳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 만약 그곳에 어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길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길이 아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의 길을 따라 간다면, 그대는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66.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68. 블리스란 온전하게 현재에 존재하는 느낌,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을 하고 있을 때 느끼는 희열감, 곧 ‘살아 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만일, 이 블리스를 따라간다면 필연적으로 갖은 시련을 경험하게 된다.
80. 그녀는 여러 종교 경전과 신학 서적을 읽으며 ‘공감’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인 동시에 긍정적 변화를 일으키는 마음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81. 그녀는 구도라는 것이 거창한 진리나 삶의 근본을 구하기에 앞서 지금 여기서 얼마나 충실하게 사는가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대자나 천국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어떻게 스스로 온전히 인간답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83. 그는 정신을 고양시키고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장난감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자신의 장난감으로 ‘읽을 때는 재미있지만 어떤 결론을 내려 주지 않는 책’을 꼽았다.
87. 좋은 책은, 한마디로 ‘깊은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좋은 책은 우리 스스로 질문을 잉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그동안 삶에 잡아먹힌 탓에 돌보지 못했던 중요한 가치들은 새로운 질문으로 말미암아 삶의 중심으로 솟아난다.
90. 한 저자를 심도 있게 연구하면, 깊이 내려갈수록 범위가 넓어지는 나무의 뿌리처럼 그 사상의 큰 줄거리를 잡게 되어 이해의 폭이 확연히 넓어진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저자에게 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람의 책을 모조리 읽는 과정을 거듭하다 보면,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 본질적인 차원에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익숙한 것을 참신한 관점에서 볼 수 있고,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을 새롭게 결합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91. 인물이든 분야든 출발점은 하나를 깊이 파고 드는 것이다. 저자와 저자를 연결하고 분야와 분야를 결합하는 것은 나중 일이다.
94. 책 역시 하나의 뗏목이다. 강을 건너면 곧바로 버리고 길을 떠나야 한다. 이것을 잊을 때 독서는 지적 허영으로 전락하고 독서가는 ‘가분수’로 뒤뚱거리게 된다.
94. 독서가 실천으로 뒷받침될 때 비로소 삶이 바뀐다.
98. 1년에 50권을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5권을 읽더라도 가슴을 무찔러 들어온 문장이 몇 줄인지가 중요하다. 책장에 몇 권의 책이 꽃혀 있는지보다, 가슴에 박힌 한 문장 때문에 지새운 ‘잠 못 드는 밤’이 몇 번인지가 훨씬 중요하다. 독서의 기쁨을 만끽하려면 의무감이나 목표가 아니라 강하게 끌리는 책, 지금 자신의 상황과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야 한다. 그리고 한 문장 한 문장 꾹꾹 눌러 읽어야 한다. 한 줄의 명문장이 마음을 깊어지게 하며, 마음이 깊어질수록 삶이 충만해진다.
100. 독서는 꽁공 얼어붙은 나의 편견과 감수성을 깨는 ‘도끼’다. 우리는 책을 통해 스스로 몰랐던 내면의 선입견을 부수고, 마음을 열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확장할 수 있다.
101. 책을 깊이 읽는다는 것은 자기 안의 편협함과 치졸함을 발견하고 반성하며 새로운 시각을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105. 내 호기심을 강하게 촉발하는 책이야말로 최고의 책이다.
106. 생각은 분명한 질문을 품고 답을 탐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즉 생각은 ‘질문과 답의 결정체’이다.
107. 좋은 문장은 내 마음속에 이미 있었던 것, 그러나 콕 집어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의식의 표면 위로 환하게 드러낸다. 그때 가슴이 뛰는 이유는 암묵의 생각이 적절한 표현을 얻었기 때문이고, 한순간 환해지는 이유는 꺼져 있던 마음의 심지에 불이 댕겨졌기 때문이다. 영혼에 흔적을 남기는 문장과의 만남은 인생의 스승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삶의 축복이다. 언제 어디서든 삶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독서가 주는 큰 기쁨이다.
124. 그에 따르면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자각한 사람, 즉 ‘삶의 의미’를 믿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잘 살아남았다. 요컨대 ‘나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목적 의식이 강할수록 무자비한 시련을 잘 견뎌 냈다.
134. 내가 직접 체험한 ‘내 이야기’를 간절하게 써내려 갈 때 비로소 나의 역사, 나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글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실험함으로써 서서히 ‘나를 넘어선 그 무언가’에 도달할 수 있다.
134. 자기변화는 다른 무엇이 아닌 자신을 대상으로 부지런히 실험하고, 학습한 것을 자기 삶에 적용하는 활동이다. 이것이 임계점을 넘으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된다.
138.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내 인생이 한 권의 책이고 내가 그 책의 저자라면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141. 글을 쓰다 보면 글이 자신을 앞질러 갈 때가 있다. 내가 글을 쓴 게 아니라 무의식 혹은 ‘그 무언가’에 의해서 글이 쏟아져 나온다. 글쓴이는 그 무언가를 밝혀 내려 애쓰고 글 쓴 과정을 살펴보며 완성한 글을 숙고한다. 이런 과정이 배움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이 쓴 글의 첫 번째 독자이다.
149. 초서와 필서를 하는 이유는 그저 글을 발췌하거나 베끼기 위해서가 아니다. 좋은 글을 읽고 옮겨 적으며 마음을 비추어 보고 음미하는 것이다.
150. 무엇을 쓰든 성실하게 써야 한다. 그리고 성실함은 매일 쓰는 것을 의미한다. 매일 혹은 정기적으로 되풀이하는 활동은 나란 존재를 형성하고 삶에 영향을 미친다...글쓰기를 전환의 방편으로 삼았다면 거기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한다. 매일매일 정성을 들여야 한다.
160. “우리가 삶의 모든 가능성에 마음을 열고 삶의 다음 단계를 주어지는 그대로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 중요한 도움을 주는 훌륭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이는 특정인과의 만남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영혼의 결합 같은 것이다. 마음을 연 상태에서 이런 만남이 한 번 일어나면 나중에 또 일어나게 마련이다.”
163. 자신에게 다가온 소명을 믿고 커다란 전체의 일부라는 믿음 안에서 노력할 때,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온갖 종류의 우연한 사건과 만남을 경험할 수 있고, 물질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으며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믿음이다.
174. 진정한 나를 알고 싶은 사람은 떠나야 한다.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그 답을 모색하려는 자,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길 위에 서야 한다. 익숙한 곳은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고, 낯선 곳은 내가 모르는 곳이다. 이 모험이 내면의 길이든, 외부에 존재하든, 혹은 그 둘 다든 ‘호모 비아토르’, 즉 ‘여행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175. 바깥세상을 향해 떠나는 여행에는 목적지가 있지만 전환기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밖에 있지 않다. 자기 자신이 곧 여행의 목적지다. 전환기의 여행은 자기탐구의 여정이다. 우리는 자기를 되찾기 위해, 숨겨져 있는 자기와 조우하기 위해 여행한다. 여행은 새로운 나로 나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175. 그러니까 여행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라앉아 있던 나의 여러 모습을 수면 위로 더올리는 과정인 것이다. 여행은 잃어버렸던 나를 다시 찾는 과정이다.
177. 우리는 흔히 여행을 외부를 향해 떠나고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여행의 절반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나를 찾는 여행은 밖에서 시작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과정이다. 저 밖 낯선 공간에서 사람과 사물, 그리고 우연히 벌어지는 사건에 나를 비추어 보는 것이야말로 전환기 여행의 핵심이다.
179. 전환기의 여행자는 여행의 대상이 아닌 여행의 주체로서, 능동적인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니체가 최고의 여행자로 꼽은, ‘관찰한 것을 모두 체험하고 동화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것을 여러 가지 행위와 작업 속에서 실천하고 다시 살려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81. 전환기의 여행은 정해진 경로를 따라 가는 게 아니라 중요한 질문을 품고 떠나는 탐색이다. 질문question 안에 이미 탐색quest이 들어가 있다. 질문은 탐색을 촉발하고, 탐색은 질문을 풀어내는 과정이다. 질문이 없으면 탐색할 이유가 없고, 탐색 없이는 질문을 풀 수 없다.
187. 얼마나 멀리,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깨어 있었는가가 중요하다...여행을 어디로 떠나느냐보다 여행을 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188. 여행의 목적은 여행 그 자체다. 여정이 곧 보상이다. 이 말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것과 같다. 여행은 늘 지금 여기라는 현재 진행형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다.
189. ᄒᆞᆫ비야는 세계의 오지뿐만 아니라 국내 국토 순례도 홀로 했다. 그녀는 최고로 좋은 여행으로 혼자 걷는 여행을 권하며 그 이유로 ‘혼자 다니면서 부딪히는 사람들과 사건 사고를 통해 마음에 드는 나, 또는 꼴 보기 싫은 나를 만나면서 조금씩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게 된다’고 말한다.
192. 이렇듯 독서와 글쓰기와 여행은 삼총사처럼 잘 어울린다. 독서가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이 ‘걸으면서 하는 독서’라면 글쓰기는 ‘손으로 하는 여행’이다. 셋이 결합될 때 상승 효과를 얻을 수 있다.
221. 이렇듯 자신에게 맞는 취미는 세 가지 수준을 모두 충족시킨다. 여기서 꼭 기억할 점은 세 가지 취미 수준의 모든 장점의 바탕에 ‘몰입’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회복과 충전을 포함해 즐거움과 맥락 전환, 변화와 영감 모두 몰입의 나무에서 열리는 꽃과 열매다.
221. 긍정 심리학의 대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사람들은 뭔가에 몰입할 때 가장 행복해 한다.
222. 흥미로운 점은 취미를 통한 몰입감이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에 대한 완충 장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취미 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은 스트레스를 주는 문제 자체를 잊을 수 있다. 그럼으로써 다시 그 문제에 뛰어들 때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반면 취미에 몰입할 때는 마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건 자체가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몰입해 있을 때 생각과 걱정으로 가득 찼던 머릿속은 텅 비게 되며, 이런 ‘심리적 여백’이 문제를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223. 취미가 창조적 여백을 주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몰입하는 과정에서 ‘자아’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모든 고통의 중심에는 자아가 있다. 문제에 직면하고 스트레스를 느끼며 고통에 시달리는 대상은 바로 ‘나’이다. ‘나’가 없으면 문제도 고통도 스트레스도 없다. 그런데 자아가 사라진 만큼 여백이 생기며, 이 여백은 그저 빈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채워진다.
224. 창조적 여백, 희열, 절정 경험, 진공묘유, 텅 빈 충만 등 표현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뭐라 부르건 고통받는 ‘작은 나’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무언가 거대한 것과 하나가 되며 살아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225. 관련 학위가 무용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학위는 ‘사회적 인증’으로서 수단은 되지만 평범과 비범을 가르는 기준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227. 대다수의 사람들은 쉬는 동안 몰두할 ‘진정으로 가치 있는 활동’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쉬는 기간이 길수록 몰입할 활동이 더욱 분명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내가 원하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과감히 휴식에 돌입하지 못하는 것이다.
231. 무엇이든 자신에게 몰입을 통한 안식과 활력, 즐거움과 영감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최상의 취미다.
231. 내가 머지않아 죽게 된다고 생각하고 원하는 바를 바라보면 진짜 원하는 것이 드러난다. 평생 동안 죽음에 대해 연구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죽음이 오히려 훌륭한 스승으로 삶을 밝힐 수 있다고 강조한 이유는, 죽음 앞에서 삶의 우선 순위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231. 하이데거는 평소에 갈망하던 것이라도 얼마 후 죽게 된다고 생각하면 의미가 없어지거나 급격히 가치가 퇴색하는 것들을 ‘욕망’이라 불렀다. 그러나 ‘소망’은 오히려 정반대다. 머지않아 죽게 된다고 생각하면 더욱 간절하게 이루고 싶어지는 것이 소망이다.
232. 여기, 욕망과 소망을 구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질문이 있다. 만일 그대가 10년 후에 죽는다면 무엇을 하며 여생을 보낼 것인가? 10년은 충분히 긴 시간이다. 마냥 쉬기만 할 수도, 그렇다고 여행만 하며 돌아다닐 수도 없다. 오히려 매일매일 그대에게 기쁨을 주는 일상적인 활동이 중요하다. 큰 결과를 얻었을 때의 성취감이 아닌, 하루하루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그대가 순수하게 희열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깊이 고민할 때 우리는 비로소 반짝 취미가 아닌 평생의 취미를 시작할 수 있다.
234. 취미가 직업을 보완하는 균형추가 된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취미가 ‘놀이’의 성격을 띠는 이유를 설명한다. 직업 세계의 온갖 규율과 ‘밥벌이의 진지함’에서 벗어나 놀이를 통해 삶을 풀어 놓음으로써 평형을 맞추는 것이다.
237. 이들의 특징은 취미를 통해 절정 체험을 한다는 것이다. 절정감을 경험한 사람은 그 일의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의 몰입 그 자체가 순수한 기쁨임을 이해한다. 또한 무언가에 푹 빠져들어야만 비로소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있으며, 깊은 몰입 속에서만 눈뜰 수 있는 시선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런 ‘초월적 시선’에 눈을 뜬 마니아만이 취미를 통해 삶을 근본적으로 전환할 수 있다.
241.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246. 소로가 말하는 이상적인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간소하게 생활하고 스스로를 완성해 나가는 삶’이다.
273. 자신의 성소를 직접 만들건 발품을 팔아 발견하건 그 과정 자체가 기쁨이며 놀이다. 전환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삶을 즐기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작은 세상’ 하나가 없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공간을 발견하고 만드는 과정은 나의 작은 세상 하나를 창조하는 것이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 그에 걸맞는 자신의 공간을 갖추는 것이다.
277. 이렇게 성소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모든 성소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성소 안의 내가 성소 밖의 나보다 더 ‘나답다’는 것이다. 각자의 성소에 있을 때 사람은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몰입한다. 그때 그 공간은 살아 있는 나의 세상이자 우주가 된다.
284. 이 글을 쓰며 깨달았다. 회심재를 만드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만드는 것이고, 이 공간 자체가 나의 새로운 인생을 함축하고 있음을. 또한 이 공간에서 하는 모든 활동의 본질은 거듭남을 위한 내적 힘을 키우는 작업임을 말이다.
302. “훌륭한 선생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좋은 선생님이란 황금보다도 더 값어치가 있다. 좋은 선생님을 발견했으면 아주 강력하게 그에게 달라붙어야 한다”
309. 50년 넘게 상징을 연구한 카를 융은 상징의 중요한 역할은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캠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중요한 문제의 상징적 성격을 이해하고 해석해 낼 수 있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310. 상징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 알아내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생명력 있는 존재로 다가온다. 상징은 자신에게 마음을 흠뻑 쏟는 사람에게만 품고 있는 비밀을 열어 준다. 그러므로 의미심장한 상징을 발견한 사람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상징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경험하고 있는가? 이것은 과연 무엇의 은유일까?”
313. 상징은 우리의 무의식을 반영한다. 그래서 카를 융은 ‘상징은 무의식의 언어’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의식은 말이나 글을 통해 소통할 수 있지만, 우리 마음 깊은 곳의 무의식은 언어가 아닌 꿈이나 신화 등의 상징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여기서 무의식은 내가 모르고 있는 ‘깊은 곳의 내 마음’, 즉 마음의 심층부에 해당한다. 내가 저 밖에서 발견한 강력한 상징은 마음의 심층부로 침투해 들어가 삶을 변화시킨다.
315. 그는 평균 잡아 일 년에 한 권씩 책을 출간했는데 여기에는 상징적인 이유가 있다. 꽃과 나뭇잎, 열매가 나무의 일 년의 삶이듯이 그는 책 집필을 일년간의 삶의 기록이자 결실로 여겼다. 그는 수시로 자신에게 나무라는 상징성을 부여하고, 나무에 비추어 스스로를 점검했다.
“자연은 아주 많은 낭비를 즐긴다. 이것이 자연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이유다. 따라서 1년에 적어도 한 권은 책을 써라. 이것이 열심히 일을 한 기준이다. 세상을 향해 많은 시그널을 보내야 누군가 대답하게 된다.”
326. ‘나무가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듣는 사람은 더 이상 나무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작 이외의 무엇이기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상징을 통해 자신의 본 모습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나무이고 나무가 곧 자신이기 때문이다. 상징은 한 인간의 본질을 보다 깊이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 중요한 개인적 상징은 다른 수단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나’의 심오한 모습을 밝혀 주는 동시에 그 자신의 삶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의미를 알려 준다...조금 다르게 말하면 상징은 나의 무의식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는지 넌지시 알려 준다.
317. 캠벨은 신화와 꿈을 견주어 ‘꿈은 개인의 신화이고 신화는 집단의 꿈’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한 집단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신화가 그 집단의 구성원의 꿈에 등장하곤 한다.
318. 인도의 미술사가 아난다 쿠마라스와미는 지극한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데 신화의 언어가 거기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역설했다.
318. 이러한 의례의 본래 기능은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캠벨에 따르면 ‘의례의 기능이란 오로지 여러분의 마음을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의 의미에 집중케 하는 것’이다.
318. 꿈과 신화와 의례는 관찰자 혹은 참가자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데, 특히 내적 에너지를 활성화시킨다.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잡아 끄는 상징적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그런 의례를 따를 때 생동감과 경건함을 느낄 수 있다.
319. 카잔차키스는 나비가 되려고 노력하는 유충에서 ‘차원이 달라지는 존재’를 보았고, 자신이 살 수 없는 곳을 향해 목숨을 걸고 뛰어오르는 물고기를 통해 자유를 향해 ‘투쟁하는 불굴의 정신’을 느꼈으며, 뽕잎을 먹고 비단실을 만들어 내는 누에에게서 ‘창조하는 영혼’을 보았다. 그는 이런 상징을 ‘성스럽고 예언적인 상징’이라고 불렀다. 한 사람을 사로잡고, 앞으로의 삶을 운명적으로 예고하기 때문이다.
320. 그러니깐 바깥세상의 골목길 탐험은 내가 모르는 나를 탐험하는 일과 상징적으로 연결된다. 내가 처음 가본 낯선 골목길에서 마치 그리워하던 고향에 온 듯 느끼는 향수는, 내 안에 있음에도 발견하지 못한 것, 이를테면 본래의 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대응한다. 내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골목길은 내 안에 있음에도 모르고 있는 거대한 마음, 즉 무의식과 일맥상통한다...내게 MBTI와 분석심리학은 마음의 골목길을 탐험하는 도구이다.
321. 구본형은 ‘상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장 어려운 곳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모멸당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322. 상징은 거울인 동시에 다층적이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자신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상징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신중하게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것이다.
326. 의례는 마음을 ‘지금 여기’에 집중하게 만들어 준다...자신에게 힘을 주는 개인 의식을 만들어 보자. 나에게 의미가 있고 효과가 있으면 어떤 방법이든 좋다. 긍정적이고 확고한 신념이 부여된 의식은 위안과 용기를 주고 의도를 행동으로 변화시킨다.
327. 흔히 기도는 절대자 혹은 신에게 소원을 비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바꿀 뿐이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이다.
328. 꿈은 바깥세상이나 타인에 대한 정보를 보여 주는 경우가 있고, 꿈을 꾼 사람의 내면에 관한 소식을 전할 수도 있다.
331. 에릭 애크로이드는 ‘꿈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무의식 세계, 즉 자아의 무의식 심층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며 ‘꿈을 무시하는 것은 곧 자기인식의 열쇠를 거절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의 무의식은 꿈을 통해 내가 직면한 삶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더 나은 존재가 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준다. 사람은 꿈을 통해 진정한 자기를 깨달을 수 있다.
341. 간디는 온 우주에는 신비로운 힘이 충만한데 이 힘이야말로 영구불변의 유일한 실재라고 보았으며, 그 힘은 선을 위한 힘, 곧 도덕률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도덕률을 때로는 ‘진리의 법’ 때로는 사티아라고 불렀는데, 이 사티아는 훗날 간디 사상의 근본 원리가 되었다.
342. 그는 인간에 대한 봉사를 통해 신을 추구해야 하며, 믿음이 아닌 행위를 토해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점은 개인적인 구원과 해탈에 중점을 두는 힌두교 정신에는 상대적으로 많이 드러나지 않는 자세였다.
346. 그는 신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나아가 민중 속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신을 찾기 위해서는 억눌린 민중과 하나가 되고, 만인에 봉사해야 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362. 근본주의자들은 종교의 뿌리가 아닌 표피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며, 모든 큰 종교가 지향하는 사랑과 자비와 반대되는 길, 즉 독선에 빠져 폭력과 테러를 자행한다.
363. “내가 다른 모든 종교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종교는 힌두교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종교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 자체를 바꾸는 종교며, 우리를 내면적 진리에 꽉 붙들어 두고 늘 정결하게 만드는 종교다.”
364. 간디는 처음에는 ‘신이 진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성이 깊어질수록 그는 ‘진리가 신’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신이 진리’라는 진술은 절대적인 복종과 경외의 대상인 신이 중심이다. 인간은 신이 창조한 피조물에 불과하며 그의 뜻에 따라 자신을 바쳐야 한다. 반면 ‘진리가 신’이라는 말에는 신조차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궁극적 실재인 진리가 그 중심에 있다. 즉 신을 믿든 안 믿든 불변하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참된 종교라는 것이다.
365. 참된 진리를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사한다. 실제로 예수와 붓다, 마호메트 등 세계의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보여 준 길은 사람들이 확실하게 믿어 왔던 것들을 재검토하며 편견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는 것이다. 획일화된 길, 이미 설명된 관념, 강렬한 체험에 안주하지 말고 부단히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서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는 길인 것이다.
366. 진리 그 자체를 최상위의 가치로 놓은 열린 종교는 그 저변의 참뜻을 깨닫고 종교가 본래 의도했던 자유와 해방을 맛보는 삶으로 인도한다.
367. 심층 차원의 종교는 ‘작은 나’에서 벗어나 ‘큰 나’로 거듭나는 것을 지향하며, 궁극적으로는 내 안의 큰 나가 곧 신성임을 깨닫도록 돕는다. 즉 스스로 ‘나’라고 믿고 있는 것이 실재가 아님을 드러냄으로써 전체에 녹아들게 하는 것이다.
368. 자아라는 작은 촛불을 불어 끄지 않고서는 대우주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369. 모든 심층의 종교는 자유를 향한다. 그러나 여기서 자유란 내가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370. 자기실현은 철저한 ‘자기인식’의 과정이다. 즉 나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감각, 사고, 욕망, 감정 등을 ‘큰 나’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370. 깨달음에 근접할수록 저 아래 근원에서는 모두가 무경계로 하나임이 명백해진다. 우리들 각자는 개별적인 파도지만 그 본질은 거대한 바다인 것과 같다.
372. 이렇듯 종교는 개인에게 초월적 시선을 제공하고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를 허물어뜨림으로써 삶을 근본부터 바꾼다.
374. 사람이 고통받는 것은 어떤 사건 때문이라기보단 그 사건이 유발하는 ‘생각의 먹구름’ 때문이다.
375. ‘생각의 먹구름’의 더 심각한 폐해는 그 속에 있음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은혜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면서 현재에 온전히 머물지 못한 채 표류한다. 그리고 이 모든 괴로움은 ‘나’라는 경계를 두텁게 그으면서 시작된 것이다.
382.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 듯 이웃 종교들이 내 종교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던 ‘천동설’의 시각을 청산하고, 지구가 다른 행성과 마찬가지로 태양을 중심으로 운행하는 것을 인정하는 ‘지동설’의 시각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384. 나의 복을 비는 행위는 결국 ‘나’라는 경계선을 두텁게 하며 더욱 자기중심적이 되게 한다. 오히려 종교의 본질에 역행하는 행위다.
385. 성숙한 기도는 말하는 기도가 아닌 ‘듣는 기도’다. 나의 뜻을 비우고 신의 뜻에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다.
386. 명상은 정신을 한곳에 집중하고 의식을 확장함으로써 작은 내가 내는 목소리를 잠재우고 삶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껍데기 나에서 벗어나 ‘참 나’와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행동할 수 있다.
408. 이렇게 유배지에서 처음 맺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스스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더 넓게 지속되었다.
409. “제 생각에는 역할 모델이라는 표현보다 영웅이란 호칭이 더 어울릴 것 같네요. 여러분의 영웅이 누구냐에 따라 앞으로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도 대강 짐작할 수 있지요.”
411. 위대한 스승은 제자에게 살의 지혜를 전하는 사람이다.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평범한 교사는 말하고, 좋은 선생은 설명하고, 훌륭한 선생은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스승은 영감을 준다고 했다.’
413. 존경은 스승을 보고 또 다시 보는 것이다. 동시에 스승을 통해 나를 재발견하고 자기 삶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422. 네 사람 모두가 자기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너의 길을 가라. 날마다 새로 시작하라. 너 자신이 되어 살아라’
425. 큰 가르침일수록 큰 그릇이 필요하며, 적절한 때 역시 중요하다. 일단 스스을 선택했다면 스승을 믿고 작은 가르침을 꾸준히 실천하며 스스로를 다듬을 줄 알아야 한다. 위대한 스승은 오직 제자가 준비되었을 때, 절묘한 방식으로 자신의 핵심을 제자의 마음에 새긴다. 그때 비로소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426. 스승에게 잘 배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푹 빠지는 것이다. 일단 스승이라는 우물에 빠지면 거기에만 집중해야 한다. 언젠가 그 깊이를 넘어 훌쩍 성장할 수 있음을 믿고, 스승을 가슴에 품어 감정 이입해야 한다.
428. 진정한 스승은 진정한 나를 만나게 한다. 제자가 스승과 자신이 일맥 상통함을 알게 되면 스스로를 존중하며 모방에서 창조의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품고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그럴 때 스승의 가르침은 제자를 따라 확장되고 제자를 통해 더울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가 함께 빛나는 길이다.
452. 죽어 가는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어떻게 죽느냐’는 문제가 삶을 의미 있게 완성하는 중요한 과제이자 단계라는 깨달음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453. 통합의 시대에서는, 이전 학교에서처럼 전체적인 맥락을 살피지 않고 문제를 자세하게 나누어 분석하는 데 치중하거나, 정해진 공식으로 푸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뒤처질 수밖에 없다.
458. 좋은 공동체는 지식을 너어서 삶의 지혜를 다룬다. 하나의 작은 지식은 구성원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함께 실험함으로써 인생을 통찰하는 지혜로 확장될 수 있다.
459. 배움의 즐거움과 삶의 지혜 이외에도 공동체는 소중한 것들을 개인에게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구성원들은 공동체 안에서 자유롭게 협력하며 ‘공동의 실험’을 해볼 수 있다.
461. 인류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생산물들의 비밀은 기저의 ‘보이지 않는 협력’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어떤 위대한 발명이나 발견도 혼자서 이뤄 낸 것은 없다.
462. 다시 말해, 공동체는 지식과 경험뿐만 아니라, 선물과 임무, 기쁨과 고난을 함께 겪으며 궁극적으로 각자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됨을 지향하는 모임이라 할 수 있다.
464. 최고 수준의 대화는 ‘생성’적 대화다.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고 함께 참여하고 창조하는 대화다. 이런 대화는 자아가 아닌 전체를 중심에 두고 진행한다. ‘나와 너’를 비우고 ‘우리’라는 전체 맥락에서 대화가 이뤄진다.
464. 즉 공동체의 가장 수준 높은 소통은 언어가 아닌 마음으로 감응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다양한 공통의 관점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466. 데이비드 봄의 표현을 빌리면 ‘대화의 목적은 사물을 분석하는 것도 논의에서 이기는 것도 의견을 교환하는 것도 아니다. 당신의 의견을 앞에 두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의미를 공유하고 ‘의미의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다.
466.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판 중심의 회의 문화는 입시 교육에 길들여진 탓이기도 하다. 사지선다형 문제에서 우리는 하나의 정답을 위해 나머지 세 개의 오답을 지우는 것을 훈련받아 왔다. 이렇게 ‘틀린 것을 제거해 나가는’ 방식의 문제 풀이는, 사람들이 먼저 비판부터 하는 습관을 몸에 배게 했다.
472. 현대 사회에서 때때로 외딴섬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가 함게 연대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삶을 바꾸는 강력한 힘이다. 고립되고 단절된 낱낱의 개인은 약하지만 개인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공동체의 에너지 장은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긍정적으로 바꾸며, 나아가 그런 공동체들이 강력한 연대의 물길을 이루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475. 이처럼 전환자들은 전환기에 문제를 피해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에 직면하고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감으로써 심층적인 자기인식에 이르고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지금 내게 가장 절실한 문제를 내면으로 끌고 들어올 수 있다면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 나가는 과정이야 말로 나를 탐색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를 나를 키우는 ‘과제’로 삼는 것이다.
476. 실험 정신의 요체는 이것이다. ‘실패는 없다. 실험이 있을 뿐이다.’ 전환자들은 시행착오를 능력 부족이나 비효율이 아닌 학습으로 본다.
477. 전환자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진정한 나로 사는 것이었다. 자기답게 산다는 것은 자신답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내서 덜어 내고 없애는 과정이다.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은 알기 어렵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은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 진정 원하는 것을 발견하는 방법의 하나는 원치 않는 것을 하나하나 제외하고, 마음이 끌리는 방향으로 더듬더듬 나아가는 것이다. 이 과정이 실험이다.
477. 대부분의 전환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면 상황과는 반대로 매우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질서 있는 하루 속에 심리적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들어 있는 것마냥 그들은 하루하루를 철저하게 관리했다.
478. 하루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 그들이 사용한 방법에 주목하자. 그들은 하루가 무너지지 않도록 다단한 기둥을 세웠다. 그 기둥이란, 가장 좋아하고 가치 있는 일을 집중적으로 하는 것이다.
479. 시시한 하루가 모이면 삶이 시시해진다. 하루가 활기차면 삶도 그렇게 된다. 하루, ‘지금 여기’가 유일한 삶의 현장인 것이다.
484. 신화 연구가들은 ‘자기 안에 잠재된 영웅적 능력을 어떻게 끄집어 낼 것인지 지도하는 것’이야말로 영웅신화의 기능이라고 강조한다. 전환은 잠재성을 하나하나 살려 내며 스스로를 완성하는 모험이라는 점에서 영웅신화와 통한다.
485. 어떤 경로를 취하든 전환자들의 최종 관문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크고 대담한 과업’의 형태라는 것이다.
490. 처음 출발했던 세계로 돌아왔다고 해서 귀환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전환자는 자신의 보물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
499. 귀환에 성공한 전환자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신을 닮은 의미 있는 ‘세계’하나를 구축해서 자기답게 산다는 것이다. 굳이 ‘의미 있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이 세계가 전환자 개인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귀환의 본질이 개인 차원의 거듭남과 사회적 차원의 통합임을 상기하자.
500. 자기실현은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남김없이 계발하여 ‘전체의 자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로서 자립하는, 독창적인 ‘나의 세계’가 비로소 펼쳐지는 것이다. 전환은 자기 실현을 위한 실질적인 과정이자 집중적인 노력에 다름 아니다.
503. 귀환의 성패는 초심에 달려 있다. 전환자는 처음 시작할 때의 간절함과 ‘열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초심을 잃지 않는 사람, 즉 발심자는 늘 새롭게 깊어지며 넓어질 수 있다.
507. 지금껏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만 이야기하고 보다 근원적인 질문, 즉 ‘나’는 깊이 건드리지 않은 채 지내 왔다. 전환기는 그 ‘나’를 묻는 시기다.
507. 삶의 핵심 질문이 달라지면 삶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위로 이동한다. 전환자는 ‘높은 질문’을 통해 삶을 더 멀리, 더 넓게 조망한다. 전환 이전에는 골치 아픈 고민이었던 것이 돌아온 후에는 더 이상 고민거리가 아닌 것이다. 새로운 질문을 통해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높은 시선’을 갖는 것이야말로 전환기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이다.
508. 이 책을 통해 살펴본 아홉 가지 도구들은, 우리가 지금껏 외부 세계로 던져 왔던 낮은 질문들을 확인하고, 질문의 방향을 틀어 부드럽게 자신에게로 돌려주는 ‘나선형의 통로’와 같다.
508. 모험 속에서 희열만을 붙잡고 따라갈 때, 그대 자신보다 더 큰 그리움으로 그대를 기다려 온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이 길을 믿고 충실히 가면 어느 순간 삶이 던진 질문의 답 속에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512. 통과의례의 모든 과정을 통해 개인은 의례적으로 죽고, 다시 태어나며, 단련된 후 비로소 새로운 사회적 단계에 오른다.
513.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과거의 것을 훌훌 털어내야 한다...이때 놓아 버려야 할 것은 직업이나 인간관계 같은 것이 아니라 집착하는 마음과 두려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꿈과 믿음 같은 것이다.
515. 영웅의 여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영웅 후보자는 모험을 떠나고 모험은 영웅을 키워 낸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영웅의 전제 조건은 모험이고, 모험이 영웅을 완성한다.
517. 흥미로운 점은 가장 밑바닥에서 결정적인 깨달음이 번쩍인다는 것이다. 캠벨에 따르면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519.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3. 내가 저자라면
나 또한 현재 제법 긴 공백기를 보내고 있다. 현재 흘려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을 어떻게 의미 부여 해야 할까 고민이 많던 시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위안을 받게 되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간을 ‘위대한 멈춤’으로 자리매김하고 인생의 큰 ‘전환기’로 삼으면 좋겠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이 책은 사실 독자들에게 친절한 책이 아닌 듯 하다. 작가들 스스로 구본형의 ‘깊은 인생’을 뛰어넘는 책을 쓰고 싶다고 한다. 이것으로서 존경하는 스승에 대한 최대한의 보답을 하고 싶어 했던 의지를 느낄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수년간 연구했던 이론과 생각들을 집대성해보고자 하는 패기도 보여지는 책이다.
이 책을 어떻게 두사람이 함께 썼을까? 그 흔적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중간에 사례를 보여줄 때 이름이 들어간 부분이 없다면 함께 쓴 책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두명의 작가는 철학과 가치관이 완전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까? 사례뿐만 아니라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은 전혀 없었을까? 공저를 하면서 발생했던 갈등, 생각의 차이 또는 도저히 다다를수 없는 가치관의 충돌을 흥미롭게 독자들에게 펼쳐내 보였다면 보다 흥미로운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좋은 책이란 독자로 하여금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무엇인가 규정하는 문장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자기계발서를 지극히 싫어하는 독자들 같은 경우는 이 부분에서 반감을 갖게 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또한 생의 전환기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바로 실행할수 있는 지침서, 워크북 또는 액션 플랜 같은 것도 들어가 있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책의 큰 목차는 부름, 탐험, 귀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영웅의 여정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새로운 연구원들이 1년동안 거치게 될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마치 여러권의 양서를 소화하고, 여러 낯선곳을 여행한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책이 앞으로 펼쳐질 연구원 과정에 있어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해줄 것이라 생각된다.
'내가 저자라면'이라는 코너가 있기 때문에 몇 가지 단점을 지적해 보았지만, 책의 완성도에 있어 존경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끊임 없이 지속되는 저자들의 연구와 탐험으로 더욱 더 깊어지게 될 저자들의 내공은 앞으로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