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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6일 11시 38분 등록

‘위대한 멈춤’      박승오, 홍승완 지음 



1. ‘저자에 대하여’ 

 저자 박승오는 카이스트 4학년에 재학 중 무리한 학업으로 인해 시력을 잃었다. 방황하던 중 우연히 읽은 책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를 통해 스승 구본형을 만나고 2년간의 전환기를 거친다. 이 전환기 기간 동안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가장 나다운 것에 대해 질문하고 스스로 자신의 공학 공부에 대한 열망과 노력이 자신 내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형에 대한 부러움과 열등감에 인해 생겨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전환기 이 후 <깨달음을 얻고 타인과 나누라>는 소명을 위해 공학자의 길을 버리고 교육자 전문가 이자 작가로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저자 홍승완은 대학 시절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첫번째 전환기를 거치고, 삼십 대 초반에 교육 전문가로서 회사 일과 세 권의 책쓰기를 동시에 하는 동안 탈진을 경험하며 두번째 전환기를 거친다. 첫번 째 전환기에는 스스로 <개인 대학>을 만들어 4년 동안 독학을 하였고, 두번 째 전환기에는 내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꿈에 대한 탐구를 하고  <회심 재>라는 개인 서재를 만들어 5년 간 독립적으로 독서과 글쓰기를 자기 탐구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러한 전환기들을 거친 후 현재 인문학과 자기경영에 관한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고 저술과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박승오와 홍승완 두 저자는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함께 나침반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나침반을 세우는 방법과 참나의 재능을 일깨우는 방법에 대한 책 <나의 방식으로 세상을 여는 법>, 구본형 선생님과 그의 6명의 제자들이‘어떻게 나의 강점을 깨울 수 있는지’에 대해 각각 연구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6가지 각자의 생각들을 엮은 책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 그리고 <시계를 멈추고 나침반을 보라>를 공저한 바 있다. 


박승오와 홍승완은 어떻게 참 나를 발견 하고 삶을 새롭게 일깨울 수 있는가에 대해 본인들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연구하고 책을 쓰며 강연을 하는 것을 본인들의 삶의 소명이자 직업으로 삼고 있다. 2016년 함께 집필한 책 <위대한 멈춤>을 통해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부름에 따라 전환에 성공한 18명의 전환자들을 소개하고 집요하게 그들이 삶을 바꾸는 방법으로 활용한 전환도구들을 추적, 연구하며 이를 소개한다. 이러한 전환 도구를 통해 과연 어떠한 과정을 거치며 거듭남에 성공하고 다시 삶으로 귀환할 수 있는지 분석적인 방식을 통해 접근하며 그 흐름에 대해 파고든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여러 인물들을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근본적인 변화는 삶의 목소리, 곧 자기 운명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수용>에서 출발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삶을 어떻게든 이끌어 가려던 적극성에서, 삶이 나를 이끌도록 내맡기는 <적극적 수동성>의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다. p8.


삶의 주체로 거듭나려면 역설적으로 <나>는 잠시 내려놓은 채 삶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드러나고 촛불이 꺼지면 달빛이 빛나듯, 나를 흐릿하게 비울 때 더 깊은 곳의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삶을 조종하려는 마음을 멈추고 삶이 앞장서도록 자리를 비켜 주는 것, 삶이 말하고 내가 듣는 것, 삶이 요구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라면 그대, 믿을 수 있겠는가? p8.


세계적인 컨설턴트 윌리엄 브리지스William Bridges는 변화change는 외부적-환경적인데 비해 전환transition은 내면적-심리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전환은 외적인 변화를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겪어야 하는 내적인 과정이다. 내면의 깊숙한 전환을 무시한 채 외적인 변화에만 신경 쓰면 본질적인 변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P16.


겉으로는 전환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환이 아닌 유사전환도 존재한다. 앞서 언급했던 직업적 수련이나 목표 준비 또는 직업 전환 등의 의도적인 외적 변화가 이에 해당한다. 더불어 전환기는 특성상 불확실성이 커지는  만큼, <효율성>이나 <속도>는 전환기와는 거리가 멀다.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전환기를 빨리 통과하고자 하는 태도로는 결국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P17.  

– 개인적으로 현재 여러가지 일과 관련한 어려움들을 학업을 지속하는 것으로 해법을 찾아보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결국 또다시 그렇게 시스템에 들어가 근본적인 질문 없이 과제를 수행하다보면 훗날 지금과 같은 고민을 똑같이 또다시 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스스로의 질문을 하게 되었다. 전환기의 불확실성을 환경의 변화에 기대어 타개하거나 그에 의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근원적인 내면의 전환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다짐을 되새겨 본다. 


내적인 변화는 내적 도약의 결과다. 그리고 내적 도약은 삶에 대한 실험과 성찰, 곧 <탐험>의 결과임을 앞으로 여러 사례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자기 자시능ㄹ 연구 대상으로 철저히 탐구하고, 실험을 통해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과정이 전환의 포인트이다. 실험과 성찰이 축적되어 임계점을 돌파할 때 본질적인 변화가 이뤄진다. 의식은 넓고 깊게 확장되고, 내면의 가치관은 튼실하게 자리 잡으며, 실현해야 할 소명이 뚜렷해진다. 새로운 시선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되어 비로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P18. 


여러 부름의 유형 중 특히 분리의 경험은 처음에는 과소평가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이 극대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커다란 전환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삶의 복선이다. P.28. 


지금까지 충실하게 써왔던 가면을 벗고 민낯으로 세상을 대하는 고통은 결코 가볍지 않다. 특히 과거의 역할이 자신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경우 고통은 배가된다. P.28.


<끝>은 청소의 과정이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과거의 먼지를 훌훌 털어 내야 한다. 하지만 보통 우리는 과거를 청산하는 것보다 새로운 시작을 더 가치 있게 여긴다. 예컨대 연애에 힘들어하는 젊은 이는 연인과으 ㅣ관계에 있어 자신의 반복적인 나쁜 습관을 포기하는 대신 그 연인과의 관계 자체를 포기하고 헤어져 버린다. 그리고 다른 연인을 만나 같은 패턴으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이유로 헤어진다. 성공을 푸구하는 사람은 과거에 성공을 가로막았던 자신의 마음가짐이나 행동을 검토하고 내려놓기보다는 새로운 직장이나 일을 찾는다. 이 모든 경우의 공통점은 과거를 놓아 버릴 생각은 하지 않은 채 표층의 변화만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P35. 


 끝 단계에서 놓아 버려야 할 것은 삶이나 직업, 인간관계 같은 것이 아니라 집착하는 욕망과 소모적인 두려움, 고착화된 습관과 스스로를 가두는 한계 같은 내면적인 것들이다. … 아인슈타인이 지적했듯이 문제를 만들어 낸 의식 수준으로는 그 문제를 풀 수 없다. 과거의 자신과 확실한 끝맺음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부지불식한에 내적인 전환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외부적인 변화를 교묘하게 이용하곤 한다. 과거의 삶, 어제의 나를 과감히 놓아 버리고 매듭을 지을 때, 우리는 자신이 이전과 다른 새로운 길로 들어섰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전환기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놓아 버릴 때인가?>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통해 우리는 삶의 다음 단계를 위해 필요한 신호와 단서를 얻게 된다. P35. 

- 환경을 바꿈으로써 처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던 시도들을 생각해 본다. 하지만, 환경이 바뀌어도 내가 가진 고질적인 사고 방식의 한계는 나로 하여금 같은 문제들을 대면하게 하였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대한 두려움, 성취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생겨난 게으름, 자기비난과 무기력함. 수동적이며 부정적이고 불평하는 태도. 이러한 사고방식과 습관들은 환경을 바꾸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일의 형식을 바꾸어도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와 같은 문제들을 직면하게 했다.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일이 나와 맞지 않는 걸까라는 고민을 했었으나 일을 바꾸어도 어느 직종의 일을 한다 해도 결국은 이 내면의 태도와 습관을 이겨내지 않는다면 같은 문제에 당면할 것이다. 결국 내가 놓아버려야 하는 것은 이러한 고착화된 습관-두려움과 부정적인 태도-일 것이다. 


불확실성은 모험의 본질이다. 모험이 필연적으로 <두려움의 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두운 풀숲에는 막연함과 적막감, 외로움이 서려 있다. 그래서 오래도록 그 길을 쳐다보기만 할 뿐 선뜻 나서지 못한다. 안전하다는 이유로, 시야가 확보된다는 이유로 여전히 엿 영광의 불빛 아래에서 스스로를 희망 고문하며 남아 있기도 한다. 어두운 숲에서 우리는 철저히 혼자일 것이고, 완전히 공허할 것이며, 길을 잃고 때로 회복하지 못할 만큼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지의 세계가 우리를 위협할 것임은 자명하다. P38. 


그러나 사실, 공허감은 새로운 갊을 받아들이기 위해 바닥까지 비우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결국 중간에서 변화를 멈추고 일상으로 복귀하고 만다. P.38. 

 - 이리저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였던 나의 지난 3년. 사실 알맹이는 텅 비어있는데 포장지를 알록달록 꾸미는데 애를 썼던 것 같다. 역량의 성숙과 내면의 강화 및 전환이 필요했던 시점에 공허감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고, 그 고독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 남들이 어떻게 볼지에만 더 신경을 썼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 없이 바쁘게 왔다 뭔가 프로젝트를 하고 경력을 채워 고립감과 공허감을 가리려 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영웅은 거듭되는 시련을 견디며 괴로워하는 동시에 그 시련을 통해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한다. 그리고 절체절명의 위기, 즉 심연의 바닥에서 비로소 자신이 간절히 찾고 있는 보물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 그렇다고 영웅이 두려움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속으로는 두려워하면서도 어둠을 향해 떨리는 한 발짝을 내딛는 사람이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보다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간절히 추구하는 의지다. 닥쳐올 공허감과 고독, 숱한 시련을 모른 척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고 정면으로 똑바로 응시하고 걸어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내면의 영웅성과 마주하게 된다. P40. 


철학자 니체는 <춤추는 별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내면에 카오스를 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암중모색의 시기는 때로 의미 없는 시간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때가 자신에 관한 결정적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기다. P41


전환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때에 무언가를 하려 하지 말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 우리는 지금껏 어려움이 닥쳤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침착하게 전환을 알리는 신호를 듣고 조용히 내면을 응시하는 것이 어려움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다. P41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들은 이 단계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목표 자체를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인위적인 목표 설정은 가장 중요한 것을 방해하고 가리기 때문이다. P41


시간이 지날수록 <의무>가 <소망>의 ㅅ간을 조금싹 갉아먹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나는 어느새 부지런히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다니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 인생은 결국 우선 순위의 문제다. … 그럼에도 전환기는 밥보다는 존재를 우선하는 시기가 되어야 한다. 의식적으로 밥의 문제에서 거리를 두지 않으면 존재는 늘 뒷전이 된다. 성공해서 유명해지려는 마음을 잠시 멈추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삶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멈춤>으로써 새 길을 발견하고, <비움>으로써 새 삶을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다. P42.

- 불안함을 이겨내야 한다. 빈 공간이 있음을, 당장 작업이나 일의 스케쥴이 잡혀 있지 않다고 해도 불안해서 이리저리 작은 일들을 벌이고 일시적으로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히 내면을 응시하고 전환을 이루어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전환자들은 전환기 동안 자신을 외부로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썼다. 아무도 열어 보지 않는 일기와 개인사, 습작 노트 등을 통해 스스로를 깊이 탐구했던 것이다. … 전환자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확장하고 보강하는 <창고>로써가 아니라, 자기 내면에 고착화된 인식의 틀을 깨는 <도끼>로써 책을 읽었던 것이다. 속도보다는 깊이에 초점을 둔 이런 독서는 사실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다. .. 즉, 전환기의 도구는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내 마음을 열고 삶이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듣기 위한 통로>로써 사용된다. P50


<도약>에 초점을 둔다고 해서 전환의 목적이 비범함은 아니다. 본질적인 목적은 따로 있다. 카를 융은 <진정한 치유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전환자들의 연구를 통해 발견한 전환의 귀착점은 융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늘 내 속에 있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한 <깊은 나>를 깨닫고 잠재력은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도약의 정수다. P.53

- 깊은 나. 내가 현재 나 스스로에게 혹은 내 삶에 불만인 부분은 외면적인 부분도 물론 있지만, 그보다 내가 가진 잠재력과 나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잠재력을 꽃피게 할 여러가지 심리적으로 고착된 자기 습관을 걷어내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된다면, <깊은 나>가 수면으로 끌어져 나올 수 있다면 정말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대는 숲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가장 어두운 곳을 골라서. 그곳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 만약 그곳에 어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길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길이 아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의 길을 따라 간다면, 그대는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 조지프 캠벨 p.56


우리는 그가 완벽한 삶을 산 것 같다는 고백 앞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이라는 단서를 붙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또 다른 책에서도 이 시기를 회상하며 <가끔은 나도 <<젠장, 차라리 누가 나보고 뭘 해야 한다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분명 그는 방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과절하기보다는 그가 좋아하는 것을 붙들고 늘어졌다. P. 65

 - 자기로서의 삶에 주도권을 갖는 것. 


그대가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그대는 다음 두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그대 스스로 <나의>자리 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 그저 <그들만의> 생각일 뿐이니까. P67

 -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보여지는 것에만 집중했다. 이리 저리 이동하고 시간을 버렸다. 진정 내면의 나를 만날 시간은 없었고 사람들에게 보여질 것을 찾느라 지쳐갔던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그들만의> 생각과는 상관없는 <나의>자리에 대해 다시금 환기해 본다. 


전 세계의 영웅신화들은 공통적으로 사람들에게 익숙한 공간과 존재를 떠나 모험으로 향하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 외적인 모험이든 내면적인 모험이든, 모험을 통해 삶이 더욱 깊어지고 충만한 존재감을 느낀다. 그래서 캠벨은 <영웅적인 삶은 각자만의 모험을 실행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 p68

- 지난 몇 년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이동하며 일을 했던 시간들이 후회되기도 하고 조금 더 똑똑하게 나의 성장에 관한 문제에 집중했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모험의 경험들, 방황의 경험들이 있었기에 지금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는 이러한 신화적 모험에서 <블리스bliss>를 따라가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블리스란 온전하게 현재에 존재하는 느낌,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을 하고 있을 때 느끼는 희열감, 곧 <살아 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만일 이 블리스를 따라간다면 필연적으로 갖은 시련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 또한 자신의 블리스로 지혜롭게 이겨 낼 수 있으며, 마침내 새로운 삶을 펼칠 수 있게 된다. P68

- Bliss의 경험: 힘들었지만, 온 힘을 다해 학업을 준비할 때, 졸업 후 홀로 작업할 때. 현재에 존재하고 진정 내 길을 찾은 듯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들을 상기하게 되었다. 


(엘리엇의) 시는 내 안에 깊숙이 박혀 있는 무언가를 건드렸다. 그런 능력은 이제 영영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도 있었던 것이었다. 안과 밖이 조금도 겉돌지 않고 하나로 맞물렸다. 차분하고 너무나 적확한 표현이 인상에 남는 그 시는 나의 상태를 완벽히 표현했고 두둔했고 내가 생사의 투쟁에서 맥없이 물러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조건과 세상살이의 진실과 우연히 맞닥뜨린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P75


이후로 그녀는 이따금씩 문학 작품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영적인 반응을 느꼈다. 글을 쓰다가 저절로 생각과 논거가 떠오르면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고… P76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이용해서 이력을 꾸미거나 평판을 높이려는 셍각을 포기하니까 마음의 빗장이 열리며서 글이 쏙쏙 들어왔다. … 문자 그대로 나를 넘어서는 그런 느낌을 맛보았다. P.77

-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을 때 겪게 되는 내면의 싸움인 것 같다. 나도 내 일을 좋아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이 일이 나의 직업이 되었을 때, 그에 대한 평가와 사람들의 호불호가 나의 일 뿐 아니라 나의 작가로써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은 작업 생산에 하나의 굴레가 되었다. 작업이 재미 없고 부담스럽고 두렵고 심지어 회피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떤 의무나 목적 의식 없이 책을 읽어 나가다 보니 오히려 마음이 풀리고 할 말이 많아지고 영감이 샘솟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녀는 문학을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과 다시 마주했고, 심신도 회복해 나갔다. P77


가끔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혹은 도서관에 먼지가 쌓인 두꺼운 책을 읽다가 내가 연구하던 신학자나 신비론자의 마음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싶은 초월과 외경, 경이의 순간을 잠깐씩 체험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음악회나 극장에 와 있는 것처럼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나 자신을 넘어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P78


나는 독학으로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였지만 아마추어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아마추어는 어차피 자기가 좋아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 아닌가. 나는 고독한 나날을 말없이 나의 주제에만 몰두하면서 보냈다. 매일 아침 어서 빨리 책상으로 달려가서 책을 펼치고 펜을 쥐고 싶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P79


대화 때문에 자꾸 끊기는 일이 없어지니까 책에 적힌 단어들이 내면의 자아로 직접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 단어들은 단순히 머리로만 흥미로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갈망과 당혹에 곧바로 말을 걸었다. P80


그녀는 구도라는 것이 거창한 진리나 삶의 근본을 구하기에 앞에 지금 여기서 얼마나 충실하게 사는가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대자나 천국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어떻게 스스로 온전히 인간답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었다.  … 그것은 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처럼 <지금 여기>에서 거룩해 질 수 있음을 의미했다. 신이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무작정 기다리지 말고, 자기 내면에서 신성을 발견하고 닦아야 하는 것이었다. P81-82


깊이 파려면 처음부터 너무 넓게 시작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깊이 파내려 가다 보면 넓은 지하수와 만나듯 거대하고 근원적인 맥락을 단숨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P91


그때 그는 자신의 손이 저절로 배낭 속의 책으로 뻗치는 것을 보았다. 순간, 그는 그 행동이 <힘든 생각을 회피하여는 수작>임을 알아차렸다. 이런 식이라면 그는 진정한 학자가 될 수 없을 테고, 그것은 받아들이기 불쾌한 발견이었다. 그는 곧바로 책을 집어서 발마 속으로 던져 버렸다. P92

- 지금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에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의미와 무게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읽고 쓰는 것의 기쁨과 깨달음과 생각들의 만남이 나를 깨우치게 하는 엄청난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현장으로부터의 회피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겠다. 


석가모니는 제자들에게 <나의 가르침은 뗏목이다.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 역시 하나의 뗏목이다. 강을 건너면 곧바로 버리고 길을 떠나야 한다. 이것을 잊을 때 독서는 지적 허영으로 전락하고 독서가는 <가분수>로 뒤뚱거리게 된다.  P94

- 모험과 실천의 중요성, 독서는 실천을 기획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는 의무나 목적 의식 없이 읽으니 오히려 책에 흠뻑 빠져들었고, 수녀원에서 듣지 못한 <신의 목소리>까지 듣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책읽기의 정수는 몰입과 황홀이다. 책 읽기에서 <즐거움>이 사라지는 순간 진정한 의미의 독서는 멈춘다.  P97

- 논문을 쓸 때 혹은 전공 서적을 읽을 때, 잘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짓누르고 즐거움이 사라졌었다. 일에서 목적의식과 의무가 나를 짓누를 때,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는 초심을 기억하고 부담감에 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일을 즐거움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첫 책의 독자는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변화를 꿈꾸면서도 두려워하고 있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책을 썼다. 동시에 이 책은 그와 유사한 문제에 직면한 독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매일 새벽 두시간씩 책을 쓰는 일은 그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직장도 업무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신과 하루가 달라졌다. 자신의 모든 일상을 책의 주제인 <변화>라는 렌즈로 들여다보났다. 분명한 키워드를 가지니 회사 일은 물론이고 책과 영화, 시와 소설, 산과 바다 등 모든 것이 전과 다르게 보였다. 만물은 변화하고, 변화는 생명의 근본적인 존재 방식임을 새삼 깨달았다. P113

- 나의 삶에 이러한 씨줄이 결여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첫 책 쓰기는 새로운 인생을 위한 통쾌한 시작이 되어 주었다. 글쓰기에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고 글을 쓰며 살아 있음을 느꼈다. P114


글과 나 사이에는 어떤 울림이 있었다. 어떤 공명 같은 것 말이다. 그쪽에서 북을 치면 내 마음 속에서 떨림이 느껴지는 이런 일체감이 나를 휩쓸고 지나가곤 했다. P114


나는 이 책으로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책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스스로에게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자산을 끌어다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P115


글을 쓰는 새벽 2시간은 무엇에도 양보할 수 없는 시간으로 자리 잡았다. … 새벽은 변화가 일어나는 경계의 시간이다. 꿈에서 현실이 태어나듯이, 결심을 하면 그 결심을 이룰 수 있는 하루의 시간이 주어지는 때이니 미래가 탄생하는 축복받는 시간이다. 나는 이때 쓴다. 나는 글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내 글은 다가올 하루를 맞이하기 위한 의식이다. 그 때의 내 정신, 그때의 내 각오, 그때의 내 희망을 담고 있으므로, 그 기분 그 느낌으로 내 하루를 살게 된다. 그러므로 글을 써야 비로소 내 하루가 시작된다. P116

-  그 기분 그 느낌으로 내 하루를 살게 된다는 말을 기억하고 싶다. 습관을 만들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긍정적인 변화에 대한 책을 읽는 시간이 나에겐 이러한 시간이었다. 이 30분의 시간이 나의 하루를 긍정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걱정, 두려움이 몰려오기 전에 책을 읽음으로써 나를 건강한 생각들로 채우는 것은 나에게 큰 힘을 주었다. 


..이 자서전의 제목은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이다. 마흔세 살은 그가 처음으로 새벽에 글을 쓰기 시작한 나이다. P118


삶에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체념하려는 순간, 이 기도문이 그에게 묻고 있었다. <이것은 글로 쓰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는 이 끔찍한 상황속에서도 삶의 임무와 책임이 있음을 깨달았다. P122


프랭클은 그런 일보다는 미래 목표를 세우고 집중하는 것이 고된 상황을 견딜 수 있는 더 큰 힘을 준다고 생각했다. P123


그에 따르면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자각한 사람, 즉 <삶의 의미>를 믿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잘 살아남았다. 요컨대 <나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목적 의식이 강할수록 무자비한 시련을 잘 견뎌냈다. P124


우선, 강제수용소에서 피할 수 없는 곤경을 견디기 위해 일종의 심상 훈련을 활용했다. 이를테면 상상 속에서 고향 빈으로 돌아가 <강제수용소의 심리학>을 강연하는 자신을 그려보고, 그리운 아내가 마치 곁에 있는 듯 그녀와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훗날 이 방법은 <로고드라마>라는 방법론으로 체계화되었다. P124

-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주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방법을 찾게 하는지 다시금 생각한다. 


*빅터 프랭클에게 글을 쓰는 것은 세 가지의 구원을 의미했다. 먼저, 글쓰기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 즉 <삶의 의미>이자 실현해야 할 <소명>이 되어 주었다. 두 번째로, 글쓰기는 <자기 객관화>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글을 쓰며 자기 자신과 온갖 고통으로 점철된 상황 사이에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었다. … 마지막으로 글쓰기는 <자아 초월>의 장을 제공했다. 프랭클에 따르면 사람은 도전적인 과제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며, 온갖 시련으로 상처받은 자아 또한 극복할 수 있다. 행복을 좇을수록 행복에서 멀어지듯이 자아에 집착할 수록 스스로를 계발할 수 없다. 프랭클은 진정한 자기실현은 자아 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P132

- 소명을 가지고 거대한 과제를 이루는데 집중하다보면 나라는 자아가 겪는 힘듦, 외로움,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위인들이 타인을 위한 숭고한 삶, 혹은 사회를 위한 큰 의미를 위해 목숨을 내걸기도 하고 어떤 고초도 마다하지 않고 겪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 것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전환기 글쓰기의 본질은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이야기>에 국한된다. 자기 삶을 자신의 언어로 솔직하게 기술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P133


흔히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고 말한다. 인생이 어떤 책이든 그것은 완성되지 않은 책이다. 그렇다. 인생은 온전히 내가 한 단어 한 문장 한 페이지씩 써나가야 하는 책이다. 저자는 직업 글을 쓰는 사람이고, 작가는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우리 각자는 자기 삶의 저자이자 작가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내 인생이 한 권의 책이고 내가 그 책의 저자라면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P138 

- 스스로 자신의 삶의 저자가 되는 것. 나는 과연 이러한 개념을 생각해 본 적이 있던가? 아니면 오로지 주어진 환경에서 감정과 기분에 따라 흐르는 대로 살고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할 때 그저 불평만 했던 것은 아닐까 반성했다. 내 인생의 저자라는 말, 내가 쓰는 대로 내 책이 쓰여질 거라는 말은 정말 나의 미래에 대해 기대감이 가득해지고 힘이 솟아나는 개념인 것 같다.  


 글을 쓰다보면 글이 자신을 앞질러 갈 때가 있다. 내가 글을 쓴 게 아니라 무의식 혹은 <그 무언가>에 의해서 글이 쏟아져 나온다. 글쓴이는 그 무언가를 밝혀 내려 애쓰고 글 쓴 과정을 살펴보며 완성한 글을 숙고한다. 이런 과정이 배움이다. P141

- 글쓰기만이 가진 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생각은 생각안에 머물러 있을 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처럼 그 생김이 어떤지 뚜렷하지 않다. 타인과 대화를 통해 생각이 자라나고 아이디어가 확고해지는 것처럼, 글쓰기도 종이 위에 옮겨졌을 때 마음속에 머물던 태아와도 같은 생각들이 태어나 그 형체를 갖추는 것인가 보다. 


 철학자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직접적인 자기관찰도 자신을 알기에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역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과거란 수많은 물결 속에서 우리에게 계속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사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많은 사람이 활용할 수 있는 자기 성찰 방법으로 <자서전 쓰기>를 추천했다. 그는 자서전의 작성의 장점으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릴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꼽았다. 

- 변경연 연구원 지원을 위해 10장의 개인사를 쓰면서 느꼈던 점이 있다. 과거에 내가 성취했던 세 가지 일 들을 기억을 더듬어 적어 내려가면서 나는 그 세 가지 일 들에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너무나 익숙했던 내 삶의 일부이기에 그렇게 거리를 두고 마음 속에 꼽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세가지 성취와 그 시기의 내 태도들에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나니 왜 내가 지금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태도로 이 시기를 극복하고 또 다른 성취를 이뤄낼 수 있을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역사학자 카를 베커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은 가가기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의 역사가이다. 자신의 개인사를 작성하는 사람은 자기 삶의 역사가가 될 수 있다. 물론 개인사 작성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지금껏 살아온 삶을 정리하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 하지만 효과가 검증된 확실한 방법이다. 특히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P144

- 미래의 지향점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게 도와준다. 과거를 통해 자신에 대해 배우고 미래의 환경이나 상황이 달라질 지라도 나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 


일기를 쓸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매일 하루를 완전히 기록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다. 선뜻 일기를 시작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 역시 이런 부담감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이를 타개하는 한 가지 방법은 <한 문단 일기>이다. … 흥미롭게도 한 문단을 쓰다 보면 종종 한 페이지를 쓰게 된다. 일종의 <스몰 빅(큰 변화를 일으키는 작은 시도)>효과다. P147 

- 부담감이 내면의 생각과 느낌을 밖으로 풀어낼 때 부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호흡을 단절시키는 방법을 훈련해야 겠다. 


매일 아침, 하루를 여는 의식으로써 일기를 쓰는 것이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을 적는 것이다. 물론 매일 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으로 써도 좋다. 이 때는 오늘 하루의 소감을 쓰되 지나치게 반성문조로 흐르지 않도록 한다. P147 


* 매일 혹은 정기적으로 되풀이하는 활동은 나랑 존재를 형성하고 삶에 영향을 미친다. … 글쓰기를 전환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면 거기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한다. 매일매일 정성을 들여야 한다. 어떤 식으로 글을 쓰든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이다.  P150 

- 성실함의 힘. 매일 매일 하는 것의 힘. 



첫 번째 자유는 <벗어나는 자유>였다. 말하자면 환경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였다. … 하지만 이즈음 또 다른 개념의 자유가 깊은 심연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전심전력을 다해 삶의 목표를 좇아가는 자유, 동시에 통제하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지 않고> 삶의 창조적 기운이 자신을 통과하여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는 자유였다. P156


황홀한 경험이었다. 그곳 출발선에는 무언가 특별한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다.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한 경험과도 묘하게 비슷했다. 그는 당시에는 몰랐지만 여행을 통해 조금씩 <동시성>에 눈뜨고 있었다. P158


이는 믿음과 인내심을 가지고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에 나를 맡겨 보는 실험이기도 했다. 서두르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다음 단계를 기다리고, 호기가 오면 붙잡는 그런 실험이었다. P 159


우리가 삶의 모든 가능성에 마음을 열고 삶의 다음 단계를 주어지는 그대로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 중요한 도움을 주는 훌륭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 이는 특정인과의 만남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영혼의 결합 같은 것이다. 마음을 연 상태에서 이런 만남이 한 번 일어나면 나중에 또 일어나게 마련이다. P160


서로 눈 이 맞닿은 순간 버나데트도, 산족제비도 어 이상 타자가 아니었다. 자보르스키는타인과 나, 나아가 자연과 내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절절히 체험했다. 그 자신이 우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사건이었다. P161


 이후에도 그의 여행은 계속되었으며, 동시에 <나>의 경계가 사라지는 유사한 경험도 거듭했다. 비슷한 체험이 반복되면서 그런 <무경계>의 상태가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 즉 동시성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조그만 우연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런 흐름에 자신을 맡기기 시작했다. P161


 이런 <의미있는 우연>들이 그를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다. 그는 더 이상 삶을 통제하려 하지 않고 삶이 자신을 통과하여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P163


그는 과거에 무언가에 최선을 다하는 능력, 즉 목표를 세우고 추진하는 능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인생의 정점에서 이혼을 경험하며 순식간에 추라했고, 혼란스런 암흑기를 거치고 여행과 만남을 통해 인생을 재편하면서 다른 종류의 헌신, 즉 <소명에의 헌신>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다가온 소명을 믿고 커다란 전체의 일부라는 믿음 안에서 노력할 때,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온갖 종류의 우연한 사건과 만남을 경험할 수 있고, 물질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으며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믿음이다. P163


두려움의 해독제는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잡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사라지고 두려움도 없어질 터였다. P167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흑해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 나의 흑해를 향해 배를 띄우기 시작하고부터 두려움과 망설임은 내게서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P172

- 나에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래도록 미루었던 일을 시작했을 때, 그 경험은 엄청난 자신감을 가져다 주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경험으로 인해 세상이 두렵지 않게 된다. 


낯선 곳을 떠돌고 탐사해야 숨겨져 있던 나의 진면목을 찾을 수 있다. 모험과 시련의 들판을 걷는 사람, 그곳에서 빛과 어둠의 경험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P175


여행을 하다 보면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우선 타인의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역할과 책임에서 벗어나 남들 모르게 꽁꽁 감춰 두었던 <나>, 자기도 모르게 꾹꾹 눌러 두었던 <나>를 마음껏 꺼내 볼 수 있다.  P175

- 타인의 시선, 특히 수십년간 고정된 주변의 가족과 친구들, 사회 생활로 얽혀 있는 관계들… 그로 인해 고정된 나에 대한 이미지를 나 스스로도 내면화 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새롭게 나 자신을 발견하였고 그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다만 영원히 낯선 곳, 길 위에 있지 않는 이상 새롭게 발견한 나와 다시금 만나는 타인의 시선들은 그 이후에 남겨진 숙제인 것 같다. 


그런데 여행중에 그는 자신이 이 여행을 갑갑한 현실의 도피처로 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도피성 여행은 나를 찾아 떠나는 게 아니라 나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다시 말해, 융은 밖으로 바삐 돌아다니는 여행이 내면 탐험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 또한 바쁜 여행 일정이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P176

- 단순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지난 3년간 많은 장소들을 이동하며 일을 했다. 작업의 내부적 한계와 역량의 부족을 느꼈지만 그 문제를 향해 파고 드는 것이 아닌 단지 <어디 어디에서 이러이러한 일정이 있다>라는 사실로 외면을 포장하며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위안을 삼은 것은 아닐까? 깊이있게 내 일과 일의 내부적 성과를 등한시 한채 진짜의 문제를 대면하는 순간을 회피하기 위해 바쁘게 이동하는 것을 그 수단으로 삼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하다. 


그것은 <세상의 바다를 헤쳐 나가는 내 인생이라는 배의 선장은 바로 나라는 것,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대신하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살이가 순탄할 때나 험난할 때나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이 삶의 중심을 단단히 잡고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P178

 - 누구에게 의존해서도 누구에게 내 인생의 선장이 될 권한을 내어주어서도 안된다. 


한비야의 말은 자기 삶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는 뜻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당연한 것을 중요한 깨달음으로 거듭 강조한 걸까? 인생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긴 항해와 같기 때문이다. 큰 바다를 건너자면 폭풍에 휩싸이고 풍랑에 시달리고 암초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두려워 배를 띄우지 않으면 진정한 인생을 시작할 수 없다. 거친 물살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 자기 배의 방향키를 타인에게 넘겨 버리면 조금 편할지는 모르지만 자기 삶에서 한없이 멀어진다. 물론 자신 안에 잠들어 있는 가능성도 계발할 수 없다. 잔잔한 바다는 건실한 선장을 길러 낼 수 없고, 유능한 선장이 아니라면 인생을 마음껏 탐험할 수 없다. P179


전환기의 여행은 정해진 경로를 따라 가는 게 아니라 중요한 질문을 품고 떠나는 탐색이다. 질문 안에 이미 탐색이 들어가 있다. 질문은 탐색을 촉발하고, 탐색은 질문을 풀어내는 과정이다. 질문이 없으면 탐색할 이유가 없고, 탐색이 없이는 질문을 풀 수 없다. P181


언젠가 카를 융이 <밖에서 찾아 헤메던 경이로움을 우리는 스스로 지니고 다닌다. 아프리카의 모든 것, 그리고 아프리카의 경이로움이 우리 안에 다 있다>는 영국의 작가 토머스 브라우니 경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동의하며 이렇게 말했다. P181


장기를 직접 둘 때는 보이지 않던 묘수가 훈수 둘 때는 잘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한 걸음 떨어져서 큰 그림을 파악하며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은 내가 나에게 두는 훈수와 같다. 떠나 보면 내가 머물던 자리가 안팎으로 잘 보인다. P181

 - 이것이 바로 멈춤의 힘인 것 같다. 흐름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그 간의 삶을 바라볼 때, 새로운 시각에서 그 상태를 바라볼 수 있는 것 같다. 나 자신과 거리를 갖는 것의 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 


그리고 여행 중에 또 하나의 자유를 깨닫게 된다. <본연의 내가 될 자유, 가장 고귀한 자아가 될 자유>이다. 그는 <이런 자유는 찾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있다. 방법은 우리의 의식 수준을 바꾸고, 스스로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 여행을 거듭하며 몸과 정신은 상호작용하며 심화와 상승을 거듭한다. P182


그는 여행을 하는 내내 스스로에게 1인 기업가의 길을 갈 수 있는지 묻고 또 물었다. 결정을 번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묻고 물어서 자기 안에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P182


종교학자 폴 틸리히가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라고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 둘째, 고립과 자립을 통찰했다. 내가 전환을 위해 진정 원한 것은 자립이었지만 실제로는 고립을 자초했다. … 고립이 단절과 회피와 같은 성격이라면 자립은 자율과 자유와 관련이 깊다. 자립은 자유와 자율의 땅에서 성장하는 것인데, 나는 고립과 자립을 혼동한 탓에 단절과 회피를 통해 자립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내가 종종 불안감과 막막함에 빠져 허우적거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다시 말해 홀로 하는 여행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여행이다. 노예나 포로, 피해자의 마음으로는 홀로 여행할 수 없다. 주인정신과 자율성, 자립적 태도가 있어야 혼자 여행할 수 있으며, 여행은 이런 마음의 힘을 키우는 최적의 훈련이다. P186

- 자율성이 얼마나 내 삶에 있어서 중요한지, 자율적인 상태에서의 결정과 자기 주도적인 상태가 나에게 얼마나 힘을 많이 가져다 주는지 생각해본다. 20대에 여행을 많이 사랑하고 여행할 때면 늘 새로운 에너지가 넘쳐 흘렀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을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독립적으로 해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 큰 것 같다. 물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여행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으니 어떤 부담감과 성취에 대한 스트레스를 가질 필요도 없었지만, 동시에 나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진다는 것은 엄청난 생명력을 가져다 주었기에 이 부분에 깊이 공감이 간다. 


구본형은 회사를 나오며 떠난 여행 중에 남도 지방을 하루에 20킬로미터 정도씩 걸어 다녔다. 생각하기 위해 걷고, 쉬기 위해 걸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홀로 서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걸었다. P191


 송관사 불일암과 쌍계사 탑전 등 스님이 머물렀던 공간에서 <무소유>를 펼쳐 몇 꼭지씩 읽었다. P191- 192

- 오래 전에 무소유를 읽으면서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스님은 이렇게 열심히 글을 써서 성취를 이루시고는 왜 사람들에게 소유하지 말고 느리게 살라고 하시나요… 어린 마음에 이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자기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나를 성장시키고 그 빛이 밖으로 나와 세상을 비추는 나 자신의 성취와, 외부적으로 성공이라 불리우는 것을 맹목적으로 쫒아가는 삶을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지금도 그런 사회적 잣대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자신은 없다. 성취에 대해 늘 두렵고 무서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인게 아닐까. 내가 나 자신의 본 모습에 귀기울이고 내 스스로에게 진솔하게 성장하고 있었다면 타인의 인정을 받고 받지 않고가 왜 그리 중요하고, 인정받지 못할까봐 두려움에 지배당하지도 않았겠지… 조금이나마 그 두개의 서로 다른 성취를 이해하고 어떻게 삶에서 다르게 드러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즉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종종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발견했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는 중요치 않다. 내게 있어 그것은 문학이 내게 주지 못했던 예술의 위안 속에 새롭게 침잠하는 것이다. P209


헤세는 성공한 작가로서 글을 쓸 때 느꼈던 긴장과는 달리 그림을 그리면서 진정한 해방감을 느꼈다.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그림과 자연을 통해 내 마음과 대화를 나눈다>는 소박한 느낌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 헤세는 그림을 그리며 지금까지 억압되어 온 감정과 화해하는 법을 점차 터득하게 된다. P210


그런 의미에서 헤세의 밝고 단순한 그림은 어둡고 복잡한 그의 소설과 삶을 보완하고 통합하는 무의식적인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설 쓰기가 현실과의 투쟁이자 진지한 성찰의 과정이었다면 그림 그리기는 그것을 보완할 휴식이며 놀이였다. 그는 소설로 자기 안의 여러 층위의 존재를 살려 내고자 했고, 그림을 그리며 자기 내면을 여러 색깔로 표현해 보고자 했다. P211

- 취미가 가진 힘. 그것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취미 활동을 함으로써 삶이 보완되고 완성되는 것. 그 취미 활동을 하기에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사로잡았던 걸까? 어쩌면 <직업이란 언제나 불행이요, 제한이며, 체념이다>는 헤세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한때 그는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것에 대해 <나는 재능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재능과 직업이 같아지면 여유는 사라지고 끊임없이 일에 몰두하게 된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재능을 힘겹게 단련시켜야 한다. 그러나 취미로 시작한 그림은 그런 부담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을 때, 그 무게와 부담감이 나를 짓눌러 즐기기 보다 힘들어 지는 상황. 취미가 일에 대한 힘든 상황에 대한 맹목적 회피가 되어 나의 관심과 시간을 다 빼앗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조화를 이뤄 내 삶을 보완하도록 할 수 있을까? 


글쓰기는 내게 더는 진정한 기쁨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은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P212


오랫동안 자신이 어떤 깨달음에 일찍 도달한 사람인 양 행세해 왔음을 알았다. 너무 일찍 맛본 성공의 그늘이었다. 자신은 늘 <순전한 선의, 고상함과 순수>를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진짜 삶은 없는 거세당한 천사>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현재 지점을 확인하자, 지금껏 고수해 혼 가치와 생각들을 버리고 혼돈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P214


여가를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고, 에너지를 충전하지 않는 사람은 연료 없이 달리는 자동차에 비유할 수 있다. P219

- 일에 의한 탈진의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오로지 성공, 살아남기 위해 작업을 하면서 삶이 일로만 점철되었고 이 후에 꽤 오랫동안 일에 대한 열정을 회복할 수 없었다. 인생의 즐거움이 사라지고 삶의 행복을 맛 볼 수 없었다. 일과 취미가 가진 삶의 조화를 잊지 말아야 겠다. 


최상의 취미는 <삶을 새롭게 고양시키는> 취미다. 이것은 일상을 한층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살아 있음>을 체험하도록 돕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취미는 저 높고 멀리 있는 목표를 겨냥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집중한다. 지금 하고 있는 활동에 온 마음을 쏟아 혼연일체가 됨으로써 지금 이 시간을 특별하게 변모시키는 것이다. 몰입을 통해 우리는 참신한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전신을 쇄신하며, 보다 높은 차원의 정신으로 건너뛸 수 있다.  P220


 흥미로운 점은 취미를 통한 몰입감이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에 대한 완충 장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취미 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은 스트레스 주는 문제 자체를 잊을 수 있다. 그럼으로써 다시 그 문제에 뛰어들 때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이것은 텔레비전이나 오락에 빠지거나 술을 마시는 등 문제 상황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도피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활동들은 문제 상황에서 떠나 있다 할지라도 불안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며, 유령처럼 쫒아다닌다. P223


취미가 우리에게 심리적 여백을 주는 까닭은 두 가지다. 먼저, 실패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 반면 일에서는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운신의 폭이 적다. 취미가 창조적 여백을 주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몰입하는 과정에서 <자아>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모든 고통의 중심에는 자아가 있다. 문제에 직면하고 스트레스를 느끼며 고통에 시달리는 대상은 바로 <나>이다. <나>가 없으면 문제도 고통도 스트레스도 없다. 그런데 자아가 사라진 만큼 여백이 생기며, 이 여백은 그저 빈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채워진다. P223


법정스님은 이러한 상태를 <텅 빈 충만>을 표현한 바 있다. <마음을 비우면 오묘한 일이 일어난다>는 진공묘유 역시 같은 맥락의 표현이다. 흥미롭게도 몰입이 깊어질수록 자아는 흐릿해지는 동시에 고양된다. 사라지는 동시에 더 높이 존재하게 된다는 모순이 생겨 나는 것이다. P224

- 일을 하지 못하고 걱정만 하는 상태는 일을 하지 못했을 나를 걱정하기 때문인가 보다. 일에 막상 몰입해 있을 때 자아는 흐릿해지는 동시에 고양된다…. 


창조적 여백, 희열, 절정 경험, 진공 묘유, 텅 빈 충만 등 표현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뭐라 부르건 고통받는 <작은 나>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무언가 거대한 것과 하나가 되며 살아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P224


즉, 아마추어의 본질은 순수한 열정과 즐기는 태도다. 아마추어는 순수하게 어떤 분야나 활동에 매료되어 돈이나 명성이 아닌 과정 자체에서 기쁨을 느낀다. 대체로 어떤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거나 도그마에 빠지지 않으며, 그만큼 자유롭고 창의적이다. P225


* 고갱, 암스트롱, 켐벨, 이윤기는 모두 아마추어 정신을 유지할 줄 아는 프로페셔널이었다. 그들은 전문가가 되어서도 순수한 열정, 즐기는 태도, 자유로운 정신으로 대변되는 <아마추어 정신>을 유지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은 이런 아마추어 정신의 힘을 잘 보여준다. 고갱이 큰 난관에 부딫혔을 때 낯선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전업 화가가 되고 나서도 아마추어 정신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P226

- 아마추어 정신. 아마도 이것이 일의 성취에 대한 무게와 부담감에 짓눌리지 않고 일에 대한 즐거움과 내 일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아닐까? 부담감의 존재를 지워버릴 수는 없겠지만 일의 즐거움에 더 몰입하느냐 아니면 부담감으로 인한 괴로움에 더 집중하느냐는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휴식은 그 자체로 적극적인 활동이 되어야 한다. 심리적 이완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는 것 또한 긴장 상태만큼이나 해롭기 때문이다. 신체 마비 환자의 몸에 욕창이 생기는 것은 육체에 적정 수준의 긴장이 없기 때문이다. 정신 역시 지나치게 느슨해지면 급격하게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다. P228 


이에 비해 소망은 과정 지향적이다. 소망을 따르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 집중한다. … 가는 도중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지만 설렘과 기쁨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어려움을 넘을 수 있는 힘을 준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역경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P232


그는 <고독만큼 친해지기 쉬운 벗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홀로 지내며 고독의 의자에 앉아 성찰한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외부 세계가 아닌 정신 세계를 탐험하기를 바랐다. P246


소로는 집 짓기를 육신이 머무는 공간을 마련하는 동시에 정신의 거처를 건축하는 일로 여겼다. 그에게 월든은 외부에서 찾아낸 마음의 고향이었으며 그곳에 짓는 집은 마음의 중심을 건축하는 것과 같았다. 다시 말해 직접 집 짓는 일은 정신을 훈련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며, 그 공간은 성찰과 공부의 중심점이 될 터였다. P247


* 꿈을 응집하면 목표가 되고 행동을 반복하면 습관이 되는 것처럼 열정과 신념도 계속 강화하면 성숙한 기질이 된다. P250 


즉 사람이 자기의 꿈의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며, 자기가 그리던 바의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보통 때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때 그는 과거를 뒤로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을 것이다. 새롭고 보편적이며 보다 자유스러운 법칙이 그의 주변과 그의 내부에 확립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묵은 법칙이 확대되고 더욱 자유로운 의미에서 그에게 유리하도록 해석되어 그는 존재의 보다 높은 질서를 허가받아 살게 될 것이다. 그가 자신의 생활을 소박한 것으로 만들면 만들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더 명료해 질 것이다. 이제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빈곤도 빈곤이 아니며 연약함도 연약함이 아닐 것이다. P 250 


스콧과 헬렌이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자본가의 권력 때문에 인간의 자유가 크게 제한받고 있으며 굳건한 <자립>만이 그 속박을 끊고 자유로 가는 길이라는 점이었다. 자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체제에 익숙해지면 어쩔 수 없이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기계의 톱니바퀴가 될 것이라 경고했다. P262


성소는 성숙의 공간이다. 헤세는 몬타뇰라에 그저 패잔병으로 도망쳐 온 게 아니었다. 그에게는 확고한 목적이 있었다. 존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단계로 도약해야 했다. 외부 세계가 아닌 자기 자신을 연구하고, 세상이 준 일이 아닌 스스로의 과업을 진행하고자 했다. P270


그는 자신의 성소에서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삶의 위기를 극복하고 부활했다. P270


나의 실험은 성공을 거두었다. … 따라서 나는 파멸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창작에 몰두 할 수 있었다. P270


구본형은 자기혁명을 위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자신의 성소에서 매일 두세 시간 보내기를 꼽는다. 이 시간만큼은 속세와 격리된 명상의 시간으로 여기고, 실용적 용도를 벗어나 스스로를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성소인 서재에서 매일 새벽 글을 쓰며 이 시간을 가졌다. 그곳에는 일상이 없다. 나는 이때 이 책이 잘 팔릴까를 생각하지 않는다. 비평가들이나 독자의 생각도 고려하지 않는다. 잘 써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책상에 앉아 내가 써야 할 글들을 생각한다. 나는 나에게 충실하다. 이것이 새벽 두 시간의 성스러움이다. P271


성소는 내 피가 흐르고 가죽이 아닌 뼈와 골수를 추구하는 공간이다. 성소는 효율성이나 성공과는 상관이 없다. 성공과 효율성은 일상에서 중요할 지 모르지만 성소에 있을 때만은 희열을 따르고 탁월함을 추구한다. P272


성소 안의 내가 성소 밖의 나보다 더 <나답다>는 것이다. 각자의 성소에 있을 때 사람은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몰입한다. 그때 그 공간은 살아 있는 나의 세상이자 우주가 된다. P277

- 나만의 성소 만들기의 중요성을 되새긴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친구들의 부탁이나 가족의 요청이 늘 우선되고 나의 일을 쉽게 뒷 전으로 물려 버리곤 했다. 어떠한 방해도 허용하지 않는 나만의 성소, 우선 순위의 가장 앞에 놓아 두어야 할 나만의 시간과 장소로써의 성소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 


나란 존재의 중심을 느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성소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성소는 나보다 더 큰 존재, 이를테면 신성한 힘과 내가 공명하는 느낌을 준다. .. 성소는 내 안에 잠재 되어 있던 힘을 깨운다. 그래서 정신이 일상의 의식 수준보다 높게 고양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둘째,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다면 그곳이 성소다. 다른 공간보다 성소에서 보다 안정적으로 마음을 모을 수 있다. 어떤 공간에 있을 때 보다 더 강하게 집중할 수 있다. P282


<장자>에서 안회는 심재 이전과 심재 이후에 달라진 점으로 자아의 유무를 꼽는다. 여기서 자아는 <작은 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회심재는 작은 나를 놓아 버림으로써 <큰 나>가 드러나는 깨달음의 공간이다. P284


융은 두 번째 바아어막으로 하루 일과를 체계적으로 운영했다. 의도적으로 일상에 질서를 부여하여 내면의 혼란과 방향 상실을 상쇄하고자 했다. 그의 하루는 대체로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P292


먼저 자신을 치료하 수 있어야 타인도 치료할 수 있으며, 자신의 내적 체험이야말로 독자적인 심리이론을 만드는 요건임을 자각한 것이다. … 지금까지의 과정이 어쩔 수 없이 무의식에 빠져든 것이라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무의식에 뛰어들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능동적으로 무의식을 탐험하기로 결심한다. P295

- 융은 스스로의 고통을 마주하고 책으로 쓰고 자신의 무의식을 탐험할 수 있는 힘을 키웠다. 나도 괴로움에 감정적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의 나의 문제에 뛰어들어 그 괴로움을 연구하고 탐험해 나갈 수 있을까?


전환 이전에 융은 전도유망한 정신과 의사였지만 성공의 정점에서 추락했다. 그는 <상처 입은 자>로 전환기를 시작했고 그 상처는 점점 더 커졌지만, 치열한 자기분석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데 성공했다. 혹독한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영혼의 치유자>로 거듭났다. <분석심리학>이라는 자신의 심리학을 세우는 튼튼한 토대도 사실상 이때 마련했다. P296


그것은 영혼의 부름이었다. … 그녀는 천천히 낡은 문을 통과하며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새 삶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랜딘은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정신과 영혼의 깨침을 경험했다>고 훗날 고백했다. 301-302


그녀 앞에는 언제나 새로운 문들이 등장했다. 문턱을 밟고 나오는 행위는 새로운 분야로 자신을 던지는 것을 의미했다. 까마귀 둥지의 문을 통해 대학 진학에 도전했듯이, 문을 통과하는 행동은 추상적인 결정을 현실화하도록 이끌었다. … 가치가 있는 일에는 위험이 따른다는 점과 함께 자신이 규칙을 어길 만큼의 용기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p305


문을 통과하며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유리문을 통과한 일과 비슷라다는 생각을 했다. 관계를 강요하거나 함부로 밀어붙였다가는 소중한 인연이 깨질 수 있었다. 그러나 천천히, 자연스럽게 다가서면 열리지 않을 문은 없었다. P306


그녀는 자폐증을 자기 존재의 한 부분으로 여기며 자폐증의 빛과 그림자를 온전히 받아들이다.  P307


50년 넘에 상징을 연구한 카를 융은 상징의 중요한 역할은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캠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중요한 문제의 상징적 성격을 이해하고 해석해 낼 수 있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닥 강조했다. P309

- 나의 상징은 무엇일까?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 두려웠지만 마치 강물위에 흘러가는 배처럼 생각되었다. 폭포 위엣 아래로 뛰어 내리는 일은 힘들지만 결국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뛰어 내려 물줄기의 흐름에 나의 몸을 맡겨야 한다. 일에 정진하고 있을때는 배가 큰 강을 만나 순풍을 따라 순항하는 느낌을 받았다. 둑에 걸려 배가 제자리를 맴돌때, 둑을 치우고 다시 강에 배를 띄우는 모습을 상상한다. 잘 흐르는 강위를 흐르는 배는 이제 작은 파도에 뒤집히지 않고 비바람에도 굳걷히 견디며 흘러간다. 


상징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 알아내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생명력 있는 존재로 다가온다. 상징은 자신에게 마음을 흠뻑 쏟는 사람에게만 품고 있는 비밀을 열어 준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의미심장한 상징을 발견한 사람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상징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경험하고 있는가? 이것은 과연 무엇의 은유일까?> p301


관건은 <공동체의 일상과 사람들의 심신이 그때까지 견딜 수 있는가>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우제는 비가 내릴 때까지 사람들이 버틸 수 있도록 해준다. 기우제와 같은 의례의 기본 기능은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을 직시하고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서로 마음을 북돋을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p318 


나는 신의 세 가지 피조물인 나비가 되려는 벌레와, 본성을 초월하려고 물에서 뛰어오르며 나는 듯한 물고기와, 배 속에서 비단실을 뽑아내는 누에에게 늘 매혹되었다. 나는 항상 내 영혼이 가야 하는 길을 상징한다고 상상했던 그들과 언제나 신비로운 일치감을 느꼈다. P319

 - 너무나 심한 게으름과 무기력감에 휩싸여 아무 것도 하지 못하던 시간, 스스로를 벌레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자기 비난과 혐오가 뒤섞여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렸었던 것 같다. 어떤 방법으로도 그 게으름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때, 나는 스스로를 무가치가고 무익하다고 여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꽃보다 희망을>이나 <미운 오리 새끼>같은 동화책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나는 그 시간 동안 단 한번도 나비가 되려는 벌레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이 글귀는 새로운 방법들로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나의 모습을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해주었다. 고통스러운 시간들과 후회들이 단지 부정적인 시간들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이고 필요한 시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잊지말자고 다짐 해본다. 


상징은 가치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상징을 발견해야 한다. 확실한 자기 상징을 가진 사람은 난관에 직면해도 무너지지 않고, 다른 이들의 평가에 쉬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구본형은 <상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장 어려운 곳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모멸당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 어쩌면 삶이란 <영혼의 상징>을 발견하고 해석하고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나란 존재와 내 삼의 상징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P322


 이러한 개인적 의식은 지금 여기에 몰입하고 잠재력을 일깨우는 활동이다. 또한 이것은 내면을 정화하는 수련인 동시에 자신이 추구하는 꿈을 위한 주술이다. 의식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 P324


좋은 의식은 잠들어 있던 의식을 깨우고, 억제되어 있던 힘을 풀어 준다. 마음이 약해지면 존재 역시 약해지고, 마음이 강해지면 존재도 강해진다. 마음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P325


또한 좋은 의례는 두려움과 의심을 막아 준다. … 같은 이치로 오늘 글쓰기를 하는데 영감이 찾아올지 안 올지 걱정하지 않는다면 글쓰기에 한층 더 몰입할 수 있다. 의례는 마음을 <지금 여기>에 집중하게 만들어 준다. P326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의식은 일종의 알람 기능을 한다. 다시 말해 어떤 활동의 시작과 재시작의 계기를 제공한다. 예컨대 매일 새벽에 일어나 자신이 만든 기도문을 외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 작가는 늦게 일어난 날에도 자책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고 글쓰기에 몰입할 수 있다. 의식의 힘을 빌리면 큰 저항감 없이 늘 해오던 대로 펜을 다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이 글쓰기를 끌어당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P327


이 과정에서 간디는 세 차례나 투옥되었지만 어린 시절 겁쟁이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강한 신념 앞에서 투옥은 위협이 될 수 없었고, 백인들에게 폭행을 당해도 그의 기개는 꺽이지 않았다. 이 투쟁을 계기로 간디는 정세계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P345

- 신념의 힘: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 과정에서 어려움, 힘든 상황, 수고스러움이 있어도 이를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 길을 걸어갈 힘을 갖게 된다. 이는 곧 소명의식과도 연결될 테다. 


그곳에서는 흑인이 발전할 수 없는 이유를 대대로 흑인을 비하해 온 백인 문화에 흑인들 스스로 세뇌되었기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P350


 맬컴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자아를 근본적으로 재창조해야 한다고 믿었다. 클레이가 대면한 거대한 외부의 힘을 이겨낼 길은 내적인 힘을 기르는 데 있으며, 진정한 자부심은 능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같은 흑인 민중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려 주었다. P351


힘든 시기를 거치는 동안 알리가 분한 감정을 내비친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그의 내면이 크게 변모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기자들은 평온함과 단호함을 겸비한 자세로 여전히 장난기와 말장난, 초현실주의적 독백으로 일관하는 알리의 모습에 주목했다. P357


권투 세계에서 추방당한 이루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다. 오히려 이 기간 동안 그의 자유 의지와 신념은 더욱 튼튼해졌다. 그는 고통 속에서 버티고 기다리는 법을 배웠으며 불리한 조건을 뒤엎고 이길 수 있는 힘이 자기 안에 있음을 자각했다. P360 


참된 진리는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사한다. 실제로 예수와 붓다, 마호메트 등 세계의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보여 준 길은 사람들이 확실하게 믿어 왔던 것들을 재검토하며 편견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획일화된 길, 이미 설명된 관념, 강렬한 체험에 안주하지 말고 부단히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서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는 길인 것이다. P366


 심층 차원의 종교는 <작은 나>에서 벗어나 <큰 나>로 거듭나는 것을 지향하며, 궁극적으로는 내 안의 큰 나가 곧 신성임을 깨닫도록 돕는다. 즉 스스로 <나>라고 믿고 있는 것이 실재가 아님을 드러냄으로써 전체에 녹아들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마아야 할 것은 <작은 나>인 에고가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에고가 사라짐으로써 신성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지금 그릇되게 생각하고 있는 <나>를 비우는 것이 핵심이다. 불교에서 무아로 표현되는 <나로부터의 해방>, 다시 말해 자아의 소멸이 종교적 삶의 기본 태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P367


자아라는 작은 촛불을 불어 끄지 않고서는 대우주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 여기에는 더 심오한 의미, 즉 보물단지 모시듯 섬기는 이 <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종교의 기본 요건이라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는 말 역시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P368

- 비유적인 내용이지만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발표하고 토론할 때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손을 들고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무척 두려웠던 나는 그 두려움의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다 라는 표현이 영어로는 ‘self-conscious하다’라고 말한다. 자기를 의식한다는 말이다. 손을 들고 말을 할때 내가 하는 생각의 내용, 토론하고 있는 학문의 내용, 서로의 의견이 오고가는 그 내용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아’에 중심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남들이 어떻게 볼지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이 경험을 떠올려 보며 더 큰 의미, 더 큰 세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심층의 종교는 자유를 향한다. 그러나 여기서 자유란 내가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곧, <나의 자유>가 아니라 <나로부터의 자유>가 심층의 종교가 향하는 곳이다. 껍데기 자아가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비움으로써 자기 존재의 근원에 다가서게 된다. 그러므로 전환기의 종교는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비는 것에서 벗어나 나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열림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P369


자아는 의식의 중심이며,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한 전체 마음의 중심이다. 앞의 표현을 빌리면 자아는 작은 나를, 자기는 큰 나를 의미한다. P369


자기실현의 목표는 성인, 도덕적 인격자 혹은 세계의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융은 이런 것들 역시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가면, 즉 페르소나에 불과하며 자기실현은 오히려 그런 집단 인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이라 말한다. 그동안 사회의 요구에 순응하는 자아에 의해 소뢰된 그 사람의 진정한 개성을 찾아가는 가정이다. 그래서 융은 자기 실현의 과정을 <개성화>라 불렀다. P370

- 나는 이미 사회적 요구에 순응하는 자아를 한번 버렸다. 떠남은 그 과정이었고 현재는 나를 둘러싼 환경이 아닌 <나>를 비워야 할 차례가 아닐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하여 느껴 보면 우리의 감정, 감각, 생각, 느낌을 무대의 뒤에서 가만히 알아차리고 있는 근원적인 시선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시선은 마치 태풍의 중심과 가타서 주변에서 사납게 몰아치는 불안과 고통의 한가운데서 투명한 고요함을 유지한 채 그것들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신비가들은 이 초월적인 시선을 주시자라 부르기도 한다. P370

*표층의 나가 어떤 문제에 직면하든 심층의 나는 그것을 초월해서 전혀 오염되지 않은 채, 자유롭게 개방된 상태로 그런 것들을 인식할 수 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이와 같은 <초월적 주시>를 발달시키는 데 성공하면 더 이상 예민하고 이기적인 에고에 매달릴 필요 없이 보다 넓은 세계로 의식이 확장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지, 궁극적인 <나>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심신과의 관계가 외부의 다른 모든 대상들과의 관계와 동등해진다. 즉, 자연스럽게 나와 너, 나와 그것을 가르는 경계가 사라진다. p370

-  나의 심신과의 관계가 외부의 다른 모든 대상들과의 관계가 동등해진다…. 이 개념을 어렴풋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아직도 너무나 어렵다. 어떻게 내가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이 초월적 주시가 가능하다면, 나는 더이상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을 것 아닌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으로부터 심연의 나를 분리하여 고요히 바라볼 수 있다면, 나는 진정 내가 아니고 타인도 남이 아니다. 경계가 사라진다. 현실의 고통과 상처를 다 치유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성찰일 것 같다. 


꺠달음에 이른 성인들이 세상에 봉사하는 것은, 그들이 그것을 통해 인정을 받으려거나 자신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임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P371


이렇듯 종교는 개인에게 초월적 시선을 제공하고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를 허물어뜨림으로써 삶을 근본부터 바꾼다. 살면서 느끼는 고통이나 두려움도,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주시자로 머물러 있는 한 더 이상 자신을 위협하지 못한다. 나아가 작은 나를 넘어 이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을 머리가 아닌 체험을 통해 느낌으로써 자신의 몸을 보살피듯 자연스럽게 주변을 보살피게 된다. P372


중요한 점은 자신의 생각에 경계선을 그음과 동시에 고통이 더해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경계선은 전투 가능성이 있는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나>의 경계가 두꺼워질수록 내 몸, 내 이념, 나의 이상은 이질적인 외부로부터 위협받게 되고, 그 위협을 이기려는 생각과 고민이 거품처럼 부풀어 고통받게 된다. 사람이 고통받는 것은 어떤 사건 때문이라기보단 그 사건이 유발하는 <생각의 먹구름> 때문이다. … 그러나 <생각의 먹구름>의 더 심각한 폐해는 그 속에 있음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은혜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 생각이 현재를 잡아먹으면 기쁨은 유보된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면서 현재에 온전히 머물지 못한 채 표류한다. 그리고 이 모든 괴로움은 <나>라는 경계를 두텁게 그으면서 시작된 것이다.  P 375


그는 일시적인 절정 경험이 보다 안정되고 지속적인 체험으로 정착된 상태를 <고원 경험>이라고 불렀다. P376


무언가와 하나되는  체험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나>로 여기는 에고가 사라졌을 때에 일어난다는 점, 또 하나는 <나>의 사라짐은 자기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본래성, 즉 더 큰 나의 회복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우리 내면의 무한자, 절대자, 영원자와 대면하는 것이다. 즉, 자아의 버림은 자기 상실이 아니라 자기 확대가 된다. P376


자아를 비우고 자신의 참 존재를 만나는 과정에 대한 통찰이 그들 사상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었다.  P379


 참선은 그 바라보는 주체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이었다. 명상이 <관찰>을 중시한다면 참선은 <관찰의 주체>를 주시한다. 비유컨대 명상이 마음의 흙탕물을 가라 앉혀 맑게 하는 것이라면 참선은 흙탕물이라는 꿈 자체에서 깨어나는 것이었다. … 그런 체험을 하면서 내 안에 새로운 시선이 생긴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작은 나>를 바라보는 커다란 하나의 존재였다. P380


예컨대 절에서 기도를 올리는 많은 불자들은 부처의 핵심 사상이 <무아>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분 앞에 나아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끊임없이 되뇌이고 있으니, 대단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나의 복을 비는 행위는 결국 <나>라는 경계선을 두텁게 하며 더욱 자기중심적이 되게 한다. 오히려 종교의 본질에 역행하는 행위다. P384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단다.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하게 된다. 천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것은 어찌하나?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네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 삼근계 P400


말과 설명으로 가르치는 것이 앎의 영역에 속하고, 모범이 앎을 포괄하는 실천을 강조한다면, 영감은 스승의 존재에서 비롯되는 힘을 의미한다. P411

- 다른 작가들의 작품 전시회에 갔을 때 좋은 작업에 감동을 받기도 하고 배울점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시각적으로 취향을 만족시키기는 작품을 보기도 하지만 나로 하여금 ‘작업을 하고 싶다’ 라는 마음을 갖게 해주는 전시들이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단시 작품의 소비자로 전시회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작업을 통해 내 삶의 에너지와 동인을 깨우치는 느낌을 받게 되었던 것 같다. 그게 바로 어떤 존재만으로 스승이 되는 영감을 느꼈던 순간이 아닐까? 


물론 나는 아직 나다운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으며 찾고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스승들도 공부하고 성찰하고 실험하며 잠재력을 하나하나 실현했다. 이 사실을 알기에 나 또한 포기하지 않는다. P422


좋은 스승과의 만남이 일기이회라고 하여 막연히 기다려서는 안 된다. 소중한 인연인 만큼 적극적으로 찾아나설 줄도 알아야 한다. 그 인연을 만나기 위해 성실하게 관계를 준비해야 한다. <영혼의 공명>은 정성껏 준비하는 사람의 몫이다. P424


먼저 프랭클린은 준토를 자기계발을 위한 <수련장>으로 삼았다. P435


 좋은 공동체는 지식을 넘어서 삶의 지혜를 다룬다. … 나아가 공동체 안에서 <관계 속의 나>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다. 나의 존재감이 확장될수록 나를 괴롭히는 문제는 흥미로운 탐구 주제 또는 스스로를 계발할 수 있는 기회로 새롭게 인식되기 마련이다. P458


 우리는 공동체를 통해 심리적 동질감을 얻을 수 있다. 1부에서 밝혔듯, 전환의 모험은 필연적으로 고독을 수반한다. 이럴 때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은 큰 위안인 동시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며, 때로 평생의 지기를 여기서 만날 수도 있다. P458


최고 수준의 대화는 <생성>적 대화다.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고 함께 함여하고 창조하는 대화다. 이런 대화는 자아ego가 아닌 전체eco를 중심에 두고 진행한다. <나와너>를 비우고 <우리>라는 전체 맥락에서 대화가 이뤄진다. … 관건은 의미의 흐름이다. 여기서 의미는 동기, 의지, 가치, 철학, 아이디어와 영감을 포괄하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다. P464


사실 비판과 제안은 엄연히 다르다. 비판은 상대의 제안이 없으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수동적이고 반동적이다. 대안을 내는 적극성과는 별개인 것이다. P466


어려서부터 길들여졌으니 어떤 제안에 대해 <안된다>는 말을 먼저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한 사람의 상상력이 가진 힘은 그가 받게 되는 비판에 반비례한다. 대안이 있으면서도 침묵하는 까닭은 비판받기 싫어서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 제안보다 비판이 더 많을 때, 아이디어의 양과 질은 비판의 강도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P466


이처럼 전홙들은 전환기에 문제를 피해 샐운 시도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에 직면하고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감으로써 심층적인 자기인식에 이르고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지금 내게 가장 절실한 문제를 내면으로 끌고 들어올 수 있다면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 나가는 과정이야 말로 나를 탐색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Problem>를 나를 키우는 <과제Project>로 삼는 것이다. p475


  실험 정신의 요체는 이것이다. <실패는 없다. 실험이 있을 뿐이다.> 전환자들은 시행착오를 능력 부족이나 비효율이 아닌 학습으로 본다. 실험의 태반은 성공하지 못한다. P476


전환자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진정한 나로 사는 것이었다. 자기답게 산다는 것은 자신답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내서 덜어 내고 없애는 과정이다. P477


 *앞으로 무엇이 다가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잡은 줄의 손을 놓아야 하는 전환기는 필연적으로 혼돈의 시기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많은 전환자들이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전환기를 보낸다. … 대부분의 전환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면 상황과는 반대로 매우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질서 있는 하루 속에 심리적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들어 있는 것마냥 그들은 하루 하루를 철저하게 관리했다. P477


 하루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 그들이 사용한 방법에 주목하자. 그들은 하루가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한 기둥을 세웠다. 그 기둥이란, 가장 좋아하고 가치 있는 일을 집중적으로 하는 것이다. P478


* 혼란스러운 시기일수록 질서 있는 생활을 통해 혼란을 상쇄할 수 있다. 혼란의 시기에 거듭되는 불안과 나태함은 돌이킬 수 없는 방황이나 방탕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환자들은 잘 짜인 하루를 보냄으로써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매일 무언가에 몰입함으로써 잡념을 지우고 마음을 비워 혼란을 잠재울 수 있을을 알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결국 하루가 전환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전환은 없다.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자신의 세계 역시 요원한 것이다. 그래서 전환자들은 하루를 실험의 장으로 삼았으며 하루가 얼마나 긍정적이었는지를 성장의 근거로 삼았다. … 하루, <지금 여기>가 유일한 삶의 현장인 것이다. P479

- 하루 하루의 계획을 세워 지켜나가는 일상을 유지하다보니 작은 시간도 아깝고 시간이 얼마나 유한한 것인지를 더욱 절감하며 내가 원하는 일로의 집중이 더 명쾌해지는 것 같다. 하루가 전환의 현장이라는 말이 절감된다. 오늘 하루의 성공 없이 미래의 성공을 논하는 것은 공허한 말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하루하루 공들여 수행한 집중 활동이 쌓이며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고, 혼란이 몰입으로, 실패가 실험의 장으로, 깨지는 과정이 깨우침으로 바뀐다. 이 체험이 임계점을 넘으면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런 일련의 흐름이 전환의 골자다. P479

신화 연구가들은 <자기 안에 잠재된 영웅적 능력을 어떻게 끄집어 낼 것인지 지도하는 것>이야말로 영웅신화의 기능이라고 강조한다. P484


여기서 전환의 핵심은 양적 변화가 아닌 질적 변화이며 내적 거듭남이 정도에 따라 직업을 포함해 외적 삶도 크게 달라진다. P484


책 쓰기, 이론 정입, 창업, 공공 조직 설립 등 전환자들의 대담한 과업의 유형은 다양하지만 하나의 공통점은 지금까지 배운 모든 걸 쏟아 부어야 성공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수준이라는 사실이다. … 때로는 최종 시럼이 너무 거대한 탓에, 모든 걸 쏟아부어도 해결되지 않아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환자들은 이렇게 꽉 막혀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관점의 변화를 통해 난관을 극복하고 내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P 486


의미가 분명한 목표는 전환자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힘을 한곳으로 모아 몰입시키는 중심점 역할을 한다. P488


 그것은 오직 내가 할 수 있고 지금 해야 하는 나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 유일무이한 과업이다. P489


대담한 프로젝트는 막연한 꿈이나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도 아니다. 그러나 대담한 프로젝트는 전환자의 열정과 사명감을 총체적으로 이끌어 내어 이 모든 것(꿈, 철학, 전략)과 역동적으로 결합하낟. 이것이 대담한 프로젝트가 전환자가 준비되었는지 시험할 수 있는 최종 관문인 이유다. P490


조지프 켐벨은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고 말한다. P490


세 번째 장애물은 자기 확신의 부족이다. 많은 전환자들이 자신의 깨달음과 보물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 돌아오기를 주저하곤 한다. 주변의 반대와 무관심, 경제적 압박이 확신 부족을 가중시키기도 하다. … 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과 걱정, 기존 집단에서 배척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위험을 감수할 용기의 결여 등으로 나는 계속해서 주어진 운명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P492


익숙한 세계를 떠나 여러 장애물을 극복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은 커다란 용기를 요구한다. 귀환하지 않으면 전환은 미완으로 남는다. 캠벨이 지적했듯이 <숲에 들어가야 할 때가 있고 돌아와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가 언제인지는 탐험 단계를 충실히 거친 전환자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전환자들은 온갖 어려움을 마침내 극복하고 잠재력을 실현한 존재로 돌아와 세상에 기여한다. P494


이들은 당장은 시류에 맞추되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면 자기 고유의 스타일을 맘껏 발휘하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요즘 같은 변화의 시대에 <안정에의 욕망>이 <안정>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더욱이 힘겹게 일군 사회적 경력과 성취도 쉬이 무시할 수 없다. 시류에 편승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유의 스타일 역시 희미해져 결국 다시 되돌릴 수 없게 된다. P497


전환에 있어 귀환 단계의 본질은 <거듭남>과 <통합>이다. 거듭남이 전환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라면 통합은 자신의 내면적 변화를 세상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켐벨은 <이 세상에 유익한 뭔가를 가지고 돌아와서 인정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고 말한다. P498


귀환에 성공한 전환자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신을 닮은 의미 있는 <세계> 하나를 구축해서 자기답게 산다는 것이다. 굳이 <의미 있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이 세계가 전환자 개인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의미 있는 자기 세계를 창조한 사람을 흔히 <일가>를 이뤘다고 말한다. P499


귀환의 성패는 초심에 달려 있다. 전환자는 처음 시작할 때의 간절함과 <열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초심을 잃지 않는 사람, 즉 발심자는 늘 새롭게 깊어지며 넓어질 수 있다. P503


가노 지고로와 마찬가지로 귀환에 성공한 전환자들도 마음속에 늘 흰 띠를 매고 있는 태도를 유지했다.  P504


지금껏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만 이야기하고 보다 근원적인 질문, 즉 <나>는 깊이 건드리지  않은 채 지내 왔다.… 삶의 핵심 질문이 달라지면 삶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위로 이동한다. 전환자는 <높은 질문>을 통해 삶을 더 멀리, 더 넓게 조망한다. 전환 이전에는 골치 아픈 고민이었던 것이 돌아온 후에는 더 이상 고민거리가 아닌 것이다. 새로운 질문을 통해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높은 시선>을 갖는 것이야말로 전환기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이다. P507


이 책을 통해 살펴본 아홉가지 도구들은, 우리가 지금껏 외부 세계로 던져 왔던 낮은 질문들을 확인하고, 질문의 방향을 틀어 부드럽게 자신에게로 돌려주는 <나선형의 통로>와 같다. … 이 책의 전환자들이 처음부터 비범성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전환기를 거쳐 도약한 것임을 우리는 여러 차례 확인해 왔다. 비범해서 전화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전환기를 충실히 거쳤기에 비범해진 것이다. . p508


이 문은 필시 고립감과 어두움, 시련이 함께하는 모험으로 이어질 것이다. 동시에 잠재력과 희열이 충만한, 가능성의 바다로 이끌 것이다. 모험 속에서 희열만을 붙잡고 따라갈 때, 그대 자신보다 더 큰 그리움으로 그대를 기다려 온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이 길을 믿고 충실히 가면 어느 순간 삶이 던진 질문의 답 속에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P508 


앞으로 다가올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 가진 것을 놓아 버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 때 놓아 버려야 할 것은 직업이나 인간관계 같은 것이 아니라 집착하는 마음과 두려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꿈과 믿음 같은 것이다. … 중립지대에 있는 사람은 거의가 우울함과 상실감, 공허함 등 부정적인 감정에 빠진다. … 혼란스러운 방황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기 안의 에너지의 원천을 확인하고 힘을 모을 수 있다. … 큰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뭘 해야 하는지 기술적 조언을 구하려고 하지만, 먼저 고요한 상태에서 마음의 신호에 귀 기울이는 것이 어려움을 뚫는 최선의 방법이 되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중립지대에서는 혼자만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P514

-  이렇게 힘든 전환이 요구되는 시기에 나는 좀 더 쉬운 방편들을 찾거나 주변의 누군가에게 기대려는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두려움이 나를 지배해서 상황을 바꾸고 조금 더 안전한 환경을 만들려고 했지만, 사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의존한다고 해서 그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나 자신을 숨겼을 뿐. 내가 놓아버려야 할 것은 집착하는 마음과 두려움, 더 이상 유호하지 않은 꿈과 믿음이었다.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안전을 가져다 주지 않는 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모든 영웅 신화의 주인공은 시련을 겪고 고독한 시기를 거친다. … 흥미로운 점은 가장 밑바닥에서 결정적인 깨달음이 번쩍인다는 것이다. 켐벨에 따르면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깨달음을 통해 주인공은 내면에서 자기 힘의 원천을 자각하고 의식의 확장을 이룬다. 또한 영웅은 이제까지의 고난들이 궁극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신을 준비시키고 정화하는 과정이었음을 깨닫는다. 심연을 통과한 주인공은 상승기로 접어든다. P517

- 무기력하게 방황하던 시간을 보낸 후 마치 바닥을 친 것 같을 때 오히려 올라갈 힘이 생기는 듯한 느낌. 갑자기 부여잡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발차기를 시작해 물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나 스스로 오롯히 내 힘을 인지하게 되는 그 순간. 어렵게 느껴지는 시간 힘이 되는 문장이다. 


영웅의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P519

-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부정적인 생각들이 들고 자신감을 상실했을 때 의존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은 내 인생에 독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안에 존재하는 힘을 깨워 ‘자기로서의 삶’에 집중하고 경작하는 것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심지어 가장 힘겨운 슬럼프를 보내고 있을 때조차도 스승은 <고통이라 할지라도 잊어야 할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것으로 마음에 담아 두어라. 그것이 글 쓰는 사람들의 특별함이다>라며 채찍질했다. P533


이렇게 5년여의 시간을 보내며 내게 삶의 겨울이 찾아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겨울에 나무의 본체가 드러나듯이 내면의 위기는 나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힘겨운 국면에 처하자 나란 존재의 밑바닥과 어두운 측면이 뚜렷해졌다. 그것을 인정하고 살펴보는 일은 매우 힘겨운 과정이었다. … 역설적이게도 그토록 찾고자 했던 소명과 잠재력을 시련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P536




3. ‘내가 저자라면’ (A4 1 페이지 이상) 

위대한 멈춤은 전환에 대한 책이다. 전환기를 거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열 여덟 명 인물들의 삶의 여정을 소개하고 각각의 인물들이 어떻게 전환기를 극복했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각 전환자들의 사례들을 분석하고 해부하는데 이 것이 책의 기본적인 뼈대와 살이 된다. 이에 작가들의 해석과 자기 체험을 덧붙여 독서, 글쓰기 여행, 취미, 공간, 상징, 종교, 스승 그리고 공동체라는9개의 전환도구를 소개하며 <2부 탐험>의 장을 완성한다. <1부 부름>에서는 새로운 삶에 대한 부름을 깨닫고 삶의 과정을 통해 이에 응답하는 탐험의 시작에 대해 소개하고, <3부 귀환>에서는 대담한 프로젝트를 통해 전환기 이후 자기만의 세상을 창조하며 귀환하기 위한 원칙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 책은 어떤 측면에서 나로 하여금 어릴 때 읽었던 위인전들을 떠올리게 했다. 어려운 고난을 극복하고 위대한 소명에 삶을 헌신하며 세상에 기여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집약적으로 읽으면서 전환기에 임하는 태도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고 내 삶의 어려움에 대한 위로와 이를 극복해 나갈 용기도 많이 얻게 되었다.  각 장의 뒷 부분에 각각의 전환 도구들에 대한 저자들의 해석과 이전에 나왔던 다른 인물들의 사례들을 첨부하는 것 또한 나의 이해를 도왔다. 이 부분의 책의 구성과 관련해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각각의 장에서 전환 도구가 어떻게 저자들의 개인적인 삶에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부록 3>에 따로 모아 소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었다. 저자들이 경험을 소개한 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보다 현실적으로 각각의 전환 도구들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꼭 필요한 사례였고 개인적으로 공감하고 내 삶에 적용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워낙에 시대적으로 큰 성취를 남긴 유명한 인물들의 소개가 책의 주된 맥을 이끌어 가고 있기에 저자의 개인 경험들이 각각의 장에 덧붙여 지는 부분들이 전체의 책의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글의 성격을 급격히 에세이 성격으로 전환하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의 개인적 경험들은 따로 맨 마지막 부분 부록3에 있는 두 저자의 전환 이야기에 좀 더 살을 보태는 방식으로 따로 묶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부록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부록1에 나온 조지프 캠벨의 영웅의 여정 패턴과 부록2의 전환자들의 전환의 창 모음은 긴 호흡의 책을 마무리 단계에서 이전 내용들을 요약, 환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내 삶을 이 패턴과 창의 유형에 대입해 보려고 노력했다. 결국은 독자 개인이 얼마만큼 깊이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삶의 변화를 다루는 책에서 간과할 수 없다는 측면을 고려할 때, 비어있는 다이아그램과 도표 페이지를 첨부해 독자들이 자신만의 패턴과 창을 그리고 적어 보면 독자들에게 더욱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더불어,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면서 한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만약, 우리가 전환기를 거치고 새롭게 태어났는데 또 다른 위기, 혹은 전환기가 온다면 어떻게 하지? 대략적으로 이 전환기를 거친 사람들은 내면의 힘을 길러 자기로써의 삶을 통해 또 다른 위기나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는 글귀들을 기억할 수 있었지만, 또 다시 어려운 시간이 찾아왔을 때 그 새로운 전환기를 겪게 되는 사례나 전환기를 겪을 때 필요한 가이드 혹은 요구되는 태도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었으면 이 질문에 답을 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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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6 15:01:54 *.94.171.90

어마어마한 양이라서 읽는데 제일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채일권 독수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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