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비12기_이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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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구본형
저자 소개
"우리는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 극적인 삶의 귀환 이후 펼쳐졌던 아름다운 십 몇년의 세월을 뒤로 그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와 한번도 만난적이 없지만 난 그와의 재회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의 책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는 묵직한 도끼가 되어 내 머리를 강타했고, 그의 이야기는 한자루 비수보다 날카롭게 나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지금 그는 없지만, 나는 이제 그를 내 스승으로 사숙하고자 한다. 이 책은 그런 나의 마음을 다지게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그는 나를 비롯하여 많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부지깽이였다. 불쏘시개였다.
"구본형은 평범하게 이십 년의 직장생활을 보냈지만 시시하게 밥벌이에 매여서만 살 수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는 더 이상 남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시간을 주도하면서 살고 싶었다. 마흔 여섯, 작가와 강연가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제자들을 키웠다. 내향적인 성격이었지만 여행과 사람을 좋아하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몰입하고 즐길 줄 아는 쾌락주의자였다. 스승님을 안 지 8년, 나는 살면서 해마다 이렇게 멋있게 변화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애정 어린 관심으로 맞춤형 조언과 영감을 주는 스승이었다. 타인에게는 한없이 관대했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하였고 조화와 중용을 중시하였다. 말년의 그는 변화경영사상가로 도약하면서 더 깊은 인생을 사신 것 같다. 삶의 현자, 치유자, 시인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한때는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비범한 인물로 도약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 산 증인이었으며, 그리하여 내 꽃도 한번은 피리라라는 희망을 피워주고 간 불쏘시개였다."
- 변화경영연구소 1기 연구원 오병곤
"저는 성직자로서, 세속인 구본형 바오로 선생을 만났지만, 그의 삶 안에는 성과 속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거룩함을 자기 삶 안으로 끌고 들어가고, 세속적인 것을 거룩함으로 변화시키는 그런 신비로운 일을 우리 가운데에서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선생이라 부릅니다."
- 구본형 장례미사 중 강순건 신부
아름다운 자기경영의 혁명가
1954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1980년 IBM에 입사하여 경영혁신업무를 담당했고, 1998년 첫 책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출간했다. IMF 시절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책은 큰 인기를 끌게 되고, 이후 그는 두권의 책을 더 출간한 후 직장을 나와 1인 기업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2002년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를 설립해서 연구원 양성 및 여러 프로그램을 통한 변화 전도사의 길을 걷게 된다. 1년마다 책을 출간했고, 주 3회 강연으로 청중과의 접점을 끊임없이 유지하던 그는 2013년 4월 13일, 59세의 나이로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자신의 바램대로 일생을 시처럼 살다 간 그는 진정 어제보다 아름다운 오늘을 산 자기 혁명가였다. 2005년 KBS 라디오는 ‘구본형의 성공시대’를 12부작 드라마로 제작하여 방송했다.
그의 첫번째 저서인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전문가가 뽑은 '90년대의 책 100선'에 선정되었다. 또다른 저서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는 직장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동아일보가 뽑은 '2001년 전반기 읽어야 할 책 10선'에 선정 되었고, 동시에 중앙일보 선정 '2001년 좋은 책 100선'에 올랐다. 그 밖에도 수많은 명저를 남겼으면 그의 저술한 모든 책의 판매부수는 백만부를 훌쩍 뛰어넘었다. 2011년 '깊은 인생'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한 도약을 다룸과 동시에 그의 인생 또한 깊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2013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며 남긴 그의 유고집 '마지막 편지'는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는 사람들을 돕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쓰고자 했던 그의 바램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변화경영전문가에서 변화경영사상가로, 그리고 변화경영시인으로
변화경영전문가에서 시작한 그의 귀환의 여정은 변화경영사상가를 거쳐 변화경영시인의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만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한편의 시와 다르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그는 언어 너머에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것이 그가 시인으로 그의 삶을 마무리하고 싶은 이유였을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내면에 숨겨져 있는 근본적인 감정이나 깨달음 같은 것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가 결국 노래하고자 하는 삶의 이야기는 시로 표현이 될 수 밖에 없었으리라.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는 '변화경영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죽고 싶다. 시는 젊음의 그 반짝임과 도약이 필요한 것이므로 아마도 그 빛나는 활공과 창조성을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시처럼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시처럼 아름답게 살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의 꿈은 이루어졌다. 그는 나무가 되고 싶다 했다. 한 곳에 뿌리박고 우뚝히 서서 그늘을 만들고 열매를 퍼뜨려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는 나무가 되었다. 살아서 나무가 되었고, 죽어서도 나무가 되었다. 먼 곳에서 그의 과실을 맛보며 모험을 꿈꾸었던 젊은이는 어느덧 중년이 되어 나무에 이르렀다. 너무 늦게 온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중년의 눈에는 나무 그늘 아래 이미 자리 잡은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 또한 자신만의 나무를 심고 있는 사람들이다. 구본형은 세상에 없지만, 그의 생각과 책, 그리고 그의 사람들은 여전히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 자리에 서있다. 변화경영연구소는 여전히 건재하다. 부드러운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가지들, '솨아' 소리를 내며 바람에 실려 떨어지는 나뭇잎들과 그 사이로 비치는 눈부신 햇살,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들 - 그가 만들어낸 바로 지금의 풍광이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을 펴내며
p8
이 책의 부제는 그래서 평범한 인간의 결코 평범치 않은 이야기라 불러 마땅하다
p9
평범한 사람들의 '밑으로부터의 이야기', 이것이 위대한 인물과 힘있는 자들의 역사와 함께 또 다른 역사의 시건이 되어야 한다.
역사는 기록된다. 기록되지 않으면 잊혀진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나의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평범한 개인에게 있어 개인사의 편찬은 본인의 과제다.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이 책은 바로 그 프로젝트이다.
> 자서전은 출세하고 나서야 쓸수 있는 가진 자의 특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도 성공해서 연륜이 쌓이고 누군가에게 지혜랍시고 떠들수 있는 뭔가가 생기면 그때 나의 책을 써야지하고 막연한 꿈을 꾸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연구원 지원을 위한 Me-story를 쓰면서 나도 할 얘기가 참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나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으면, 누가 내 역사를 기억해주겠는가.
p10
자신에 대해 쓰다보면, 해보지 못해 안타까운 일들이 밝혀지고 절실해진다. 이때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은 그 일들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기회로 전환된다.
> 위에 쓴 내용에 이어서 얘기하면, 개인사를 쓰면서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듯이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더 잘 알게 되는 것이리라.
p11
무엇이 되었든 개인의 역사는 스스로에 의해 편찬되어야 한다. 이것이 군중 속에서, 군중으로, 흔적 없이 매몰되는 자신을 잊지 않는 길이다.
p15
한 곳에서 햇빛이 사라질 때, 나는 아침이 시작되는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새로운 날을 다시 시작하며 후회가 있으면 고칠 것이고, 아쉬움이 있으면 채울 것이며, 해보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해볼 것이다.
p16
이 책은 (...) 자전적 소설이고, 소설적 자전이다.
p17
과거는 늘 엄격하고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적 감옥이기도 했다. 과거가 날 만들었으니, 과거를 버리고 벗어나는 것이 또한 내 미래의 과제다. 죽어야 할 자리에는 늘 혁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였다. 살면서 나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 번 다시 태어나야 한다.
p21
마흔 살은 오래 끓어 걸쭉해지기 시작한 매운탕이다. 바야흐로 인생의 뼛속 진국이 우러나오는 시기다.
p22
마흔이 되어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 내 마음을 흔들고 불안하게 하며 허무하게 하는 감정들이 있었다. (...) 묵직한 몸과 휑한 머리로 자신 없는 하루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비대해진 육체와 달리 정신은 알 수 없는 불안을 감지한다. 내게 마흔은 그런 모습으로 다가왔다.
> 구구절절 나의 이야기이다. 불면증으로 시달리던 마흔 초반, 하루를 어떻게 버텨야 할지 아침마다 막막하게 집을 나서던 기억이 아련하다.
p24
마흔은 가끔 불면증과의 동행과 동침을 의미했다.
> 내게 마흔은 그냥 불면증이었다.
p25
고독은 비같은 것이다. 식물을 밤 사이에 자라게 하는 그런 것이다.
> 이제 그 비를 외롭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 비를 맞으며 춤도 출 수 있는 내공을 만들고자 한다.
불면이 찾아오면 맞아줄 뿐이다. 나는 자신이 있다. 동물은 자신의 신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은 반드시 자도록 만들어졌으니까. 이것 역시 마흔이 넘어가면서 터득하게 된 불면에 대한 내 식의 처방이다.
> 불면증이 최고조에 달했을 시기에 내 몸은 딱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수면만을 내게 허락했다. 그 시간은 일주일에 서너시간에 불과할 때도 있었다. 그런 시기도 있었는데, 지금은 사는게 그냥 축복이다.
p26
지식은 지식에 적용됨으로써 증식된다. 그리고 지식을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체험한다.
> 지식은 사유로서 체득되고, 그 사유는 내 안의 것들에 기반해야 한다. 체득된 지식은 다시 경험을 통해 구체화되고 다른 지식의 밑거름이 된다.
p31
훌륭한 작품은 그것이 어떤 표현 방식을 가졌든 인생에 대한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현실보다 극적이고, 현실보다 교훈적이며,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자제와 절제를 현명함으로 불렀던 그 어리석음은 또 어떻게 하랴.
p32
공자에게는 불혹의 나이였던 것이 2,500년이 지나 유혹의 나이가 되었다.
분명한 것은 마흔 살은 성취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라는 점이다.
> 그 먼 옛날에는 나이 마흔이면 손주를 보는 늙은 나이였지만, 이 시대의 마흔은 이제 고작 어른의 사춘기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나이 마흔에 모든 의혹이 다 없어질 만큼 현명한 사람은 없다. 신영복 선생님은 저서 <담론>에서 불혹에서 혹은 의혹이 아니라 미혹이고 환상인데, 가망없는 환상을 더 이상 갖지 않는 것이 불혹이라고 말한다.
p37
과거가 사라진 상태에서 미래조차 만들어낼 수 없다면 갈 곳이 없다. 이것이 어쩌면 내 불면의 원인이었는지 모른다.
> 맞다. 그것이 내 불면의 원인이었다. 이런 대박 싱크로율을 봤나!
40대는 이제 특별한 사회적 상징을 담은 단어가 되었다. 그것은 가장 정력적인 나이에 버려진 나이다.
> 40대가 되기전, 가능한 젊을때 자신이 추구하는 직업과 가치관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심각하게 다루어야만 정력적인 나이에 버려지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반면에 그때 고민은 그때의 고민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을 것 같기도 하다. 모든 것의 제자리가 있듯이 모든 일에도 때가 있는 법이니까. 그 때가 조금 이를수도, 늦을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항상 치열하게 고민하고 진심을 다해 그 순간을 살려는 태도가 아닐까.
p45
누군가의 칭찬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무엇인가 정말 괜찮은 것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에 조바심내고, 고민하던 시간들을 다 합치면 도대체 얼마나 될까? 그 시간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다면 나도 뭔가 정말 괜찮은 것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제였던가, 그제였던가, 그토록 나는 저 강 건너의 불빛들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던 것이구나
(...)
굽이굽이 흘러온 길도 어느 한 굽이에서 끝난다. 폭포, 여기까지 흘러온 것들이 그 질긴 숨의 끈을 한꺼번에 탁 놓아버린다.
다시 네게 묻는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꽂힐 수 있느냐.
p46
나는 창조적 주체가 아니였다. 그저 짜여진 일과 속에 놓여 있었을 뿐이다.
> 회사생활이 보통 그러하다. 회사에서 창조적 주체는 대개 사장이다. 그 외 사람들은 대부분 수동적 객체이다. 쨔여진 일과 속에서 벗어나길 원하지만, 정작 벗어날 기회가 생기면 그 자리를 붙들고 놓질 않는 종놈들이다. 그들은 종 신세를 한탄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잣집 종놈들을 부러워한다. 가끔은 더 가난한 집 종놈들로부터 우월감을 얻기도 한다. 비록 종의 신분은 당분간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창조적 객체 내지는 수동적 주체 정도는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어디선가 추노들이 달려와 나를 옭아매려 할지라도 끝없이 자유를 갈구하며 스스로 나를 고용하는 자가 되어야겠다.
p48
마흔이 되면 (...)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을 수용한다. 따라서 개념의 깊이를 희생하는 대신 명료하고 구체적인 일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 현실과의 타협을 이렇게 우아하게 표현하다니.
p52
여성의 마흔살은 남자와는 성격이 다르다. 남자는 마치 지는 해처럼 시들지만 여자들은 뜨는 보름달처럼 절정을 향해 달린다.
> 남성들은 신체변화에 둔감해서, 어느날 중년의 변화가 갑자기 찾아온 것처럼 놀라지만, 여자들은 신체변화에 민감해서 그 변화를 점진적으로 받아들이기에 남성들에 비해 중년의 변화에 대한 타격이 적다고 한다.
p54
마흔이 넘으면 불운과 실수에 대하여 스스로를 용서하게 된다. 실패와 무능력과 비겁함은 비난받아야 할 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 한계와 비극의 문제로 전환된다.
마흔 살은 융통성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동시에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보는 긍정적 지혜가 위로가 되는 시절이다.
p55
마흔이 넘어 나타나는 창조성은 '발작적 불꽃'이 진화하고 성숙하여 하나의 습관과 태도로 변한 일종의 믿음직한 기술로 바뀌게 된다.
마흔의 나이에는 철학조차 실용적인 것이 된다. 이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삶의 지혜다. 지혜란 '숭고하고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삶을 위해 필요한 실제적인 통찰력을 의미한다.
p56
마흔이 되면 단순한 이분법과 전통은 더 이상 등불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해석한 세상을 가지게 된다.
> 나의 세계가 생기는 것이다.
p57
융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이 쓰고 있던 사회적 가면, 즉 페르소나는 중년이 되면 붕괴한다. 그리고 내면을 향해 들어가도록 강요한다. 중년의 과제는 각 개인의 내면에서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p58
마흔이 되면 한계에 대한 자각이 젊은 시절의 끝없는 희망을 대신한다.
두 개의 시건, 자신을 바깥에서 보는 시선과 안에서 보는 시건을 공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다시 말해 스스로를 주관적으로 보는 시선과 객관적으로 보는 두 가지 시선을 모두 가져야 한다는 얘기인 것 같다. 이상은 주관적으로 품고, 현실은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
p59
마흔 살은 게임의 후반부나 연극의 2막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마흔 살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 내게 지금부터 펼쳐질 삶은 시간적으로는 두번째 인생 내지는 후반전, 연극의 2막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볼때 연습게임이나 리허설을 마친 본 게임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실력을 가지고 후반전을 뛰어본들 또 한 번의 고배와 비웃음을 자초할 뿐이다. 1막에서 엑스트라였던 사람이 2막에서 돌연 주연으로 바뀌는 연극을 본 적이 있는가?
> 대부분 이 사실을 알지만, 대부분 같은 실력으로 후반전을 맞이한다. 경기의 판을 완전히 뒤엎어야 한다. 똑같은 실력으로 후반전에 임해본들 똑같은 결과만 얻을 뿐이다.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
p60
연극이 삶이 아니듯 개념 또한 살은 아니다. 우리는 극장 밖으로 나와야 한다.
> 나 역시, 그리고 많은 작가들 역시 책 속에서, 글 속에서 삶을 이야기하고 개념화한다. 밖으로 뛰쳐나와야 한다, 그리하여 구본형 사부처럼, 간디처럼, 카렌 암스트롱처럼 삶으로 삶을 이야기해야 한다.
p61
전환과 변곡, 이 두 단어야말로 40대를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언어이다.
p62
위대한 하루가 없이는 위대한 인생도 없건만 하루하루는 잃어도 아까울 것이 없는 푼돈처럼 낭비되었다.
> 오호, 통재라. 스승의 죽비가 내 어깨를 때리는구나.
마흔 살은 가진 것을 다 걸어서 전환에 성공해야 한다.
p69
변화는 한가한 사람들의 과제였을 뿐이다. 변화는 바쁘지 않은 사람들의 일이었다. 변화는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진 불행한 자들, 또는 불행을 인식하는 자들의 과제였다.
p77
지금의 하기 싫은 일을 버리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 일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 직장 속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어도 80퍼센트는 되어 보였다.
> 과거의 나, 그리고 어쩌면 현재까지의 내가 그 80%에 속한다. 일과 직장의 어렵고 힘든 부분들은 항상 지금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고, 내가 성취와 즐거움을 느끼는 부분들은 간과되기 일쑤였다. 이제 이 일을 잃을까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또다른 문을 열고 나오면 그 앞에 광대무변한 세상이 펼쳐질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나의 전환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변화와 나다움을 찾아내는 것부터 시작되기를 바란다.
p84
나는 수동성을 강점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말하자면 수동성을 적극적 수동성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극적 수동성, 즉 유혹은 늘 설득의 강력한 수단이 되어왔다는 것을 알아냈다. 경영학은 '유혹'이라는 싱싱한 단어를 죽은 단어, 즉 마케팅이라고 불러왔다.
> 적극적 수동성, 꽃과 과실과 그늘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사람들이 저절로 다가오게 만드는 나무 - 어쩌면 모든 작가들이 지향해야 하는 길이 아닐까.
p86
나의 존재, 나의 콘텐츠, 그리고 나의 가능성을 알려야 했다. 어떻게? 이것이 고민의 핵심이었다.
p89
과거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그물로 된 항아리 속에 물을 담으려는 발상이다. 반대로 미래를 가지고 평가하는 것은 바닷물 속에서 식수를 찾는 것과 같다. 온통 가능성의 물로 채워져 있지만, 아직 한 컵의 마실 물도 되지 못한다.
무엇을 하든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만이 전문가로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p115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늘 쩨쩨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범상치 않은 이야기, 나는 이것을 인류의 미시적 역사라고 생각한다.
p117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은 어설픔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스러움과 긍정의 표상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달라야 한다. 자기경영의 근간이 되는 것은 실천의 철학이다. 바로 자신의 과거와 경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p147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지고 인생의 길을 가고 있다. 친구들끼리 나눌 수 있는 것은 짐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혼자 그 긴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짐을 각자 지고 함께 가는 것이다. 외로움은 함께 있으면 훨씬 낫다.
p160
우리가 왜 변화해야 하느냐고?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작은 세포가 아이가 되고 젊은이가 되고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고, 그리고 죽는 것이 삶이다. (...) 변화 자체가 우리의 일상이고 삶이다. (...)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왜 변화해야 하는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 이번엔 스승이 죽비로 내 가슴을 찔러댄다. 왜 아직도 넌 거기 있냐고, 당장 떠나라고 호통이시다.
p161
왜 변해야 하느냐고? 흐르는 강물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하늘의 구름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바다의 물결에게 물어봐라. 그것이 존재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 아! 변화가 존재의 양식이라니. 이건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존재가 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에너지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p163
곽박의 시에 "숲에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없고, 냇물에는 멈춰선 물결이 없다."라고 했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변화에 대한 묘사는 찾기 어렵다. "밖으로 자연의 조화를 본받고, 안으로 마음의 근원을 체득해야 한다."는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둘 충고이다.
p164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삶을 시작하지 못하는 바보들이기도 하다. 모든 꽃은 '그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스스로를 축복하며' 피어난다.
p166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을 오래된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새로운 시도가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하는 것도 수없이 보아왔다.
> 나 역시 항상 그래왔던 것 같다. 항상 더 나은 삶을 고민하고, 목표를 정하고 게획을 세웠지만, 그 모든 것의 바탕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저기 내가 가고 싶은 그곳을 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쳇바퀴안에서 열심히 발을 구르는 가련한 한마리 다람쥐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p167
나는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나와 나무가 쓸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우리 사이에 있었다는 것을 믿고 싶었다.
나는 나무다. 스스로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 나의 모든 힘은 어두운 내면으로부터 온다. 어두운 곳은 언제나 비옥한 토지였다.
p168
내 내면을 뒤지고 곳곳에서 흐르는 에너지의 샘들에 깊고 굵으며 튼튼한 뿌리를 젼실하게 박아두어야 한다. 이 힘들만이 나를 키울 수 있다.
> 난 불과 얼마전부터 내 내면을 뒤지는 작업을 시작한 셈이다. 곳곳에서 흐르는 에너지의 샘들과 막혀있지만 미래를 향해 분출할 분화구를 찾아야 한다. 그 곳들을 찾은 후 나의 뿌리를 조금씩 조금씩 내릴 것이다. 내 뿌리는 양분을 맘껏 흡수해서 굵어질 것이며 잔뿌리는 또다른 에너지를 찾아 대지에 깊이 뿌리박힐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는 대지를 뚫고 하나의 작은 새싹을 틔울 것이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싹 틔운 풀 한포기는 작은 나무가 되어 우주의 별빛을 온몸으로 받고 더 큰 나무로 자랄 것이다.
p169
나무는 또한 해마다 새로운 자신을 분만시킨다. 수없이 자신을 탄생시킨다. 사는 법은 죽는 법에 있다. 자라는 방법은 스스로를 죽이고 다시 탄생하는 과정이다.
낙엽은 나무의 지혜다. 혹독한 겨울에 살아남기 위한 창조적 해결책이 바로 버리는 것이다. (...) 나무는 매년 죽는다. 이 상징적 의식이 나무가 자라는 방법이다.
p173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하나의 씨앗처럼 날려보내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생각인지, 나의 생각을 가장한 다른 사람의 생각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오리진이 어디에 있든지, 분명한 진실은 나의 것이 된 생각들, 즉 이미 '내게 귀화한 생각'들이라는 점이다.
> 나 역시도 거인들의 지혜와 생각들을 내게 귀화시키려고 한다. 그것들을 내 안으로 갈무리해서 나의 언어로 일단 표현해보자. 북리뷰는 훌륭한 연습수단이 될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 귀화를 마친 것들을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도록 체득화하고 정리해두자. 언젠가 내안에서 터져나올 거인들의 언어의 오리진이 나인지 그들인지 구분하는 것이 의미없게 될 때, 바로 그 때가 나의 생각이 완성되는 시점이다.
p175
세상을 향해 많은 시그널을 보내야 누군가 대답하게 된다. 씨앗이 적절한 곳에서 쉽게 발아할 수 있도록 늘 더 나은 방법을 연구하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싹이 나고 푸른 잎을 단 아름다운 줄기로 자라나도록 늘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라. 그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이 행동할 수 있게 하며, 그들이 실천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과 색깔과 맛을 담은 향기로운 과육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유행에 따르지 말라. 자연의 맛은 독특하고 차별적이다. 자신만의 맛과 향기를 가진 품종을 만들어 내라.
> 참 어려운 일일 것이다. 세상의 유행에 따르지 않고, 사람들을 유혹할 수 있는 향기와 과즙을 가진다는 것은. 내 안에서 터져나오는 나만의 고유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p183
영원히 스승의 빛에 가려진 제자는 결국 스승을 욕보이게 한다
> 스승님, 기대하십시오. 당신의 빛을 잘 갈무리해서 또다른 빛으로 세상에 내보이겠습니다.
p187
철학은 의학을 선도한다. 생각이 늘 기술을 선도한다.
p199
마흔은 죽음이 삶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영적인 나이의 시작이다.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 또 다른 방식의 이해력이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게 되는 시기라는 뜻이다.
p206
추억과 꿈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마흔아홉이 되어 지나온 삶을 되새겨보니 실제로 일어난 것과 상상 속에 존재했던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모두 한 줌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 나도 마흔 아홉이 되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까. 뒤돌아본 삶에 추억과 꿈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 그만큼 잘 살아온 인생이 어디 있을까.
p207
내 말은 미래의 꿈 그 자체가 믿음을 통해 추억만큼 분명한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갇히는 것만큼 미래에 갇힌다. 추억으로서의 역사와 꿈이라는 소설은 둘 다 인생에 중요한 것이다.
> 나 또한 미래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큰 비석 하나 세워두고 그곳으로 달려가야만 한다고 나를 옥죄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p210
추억과 꿈은 같은 것이다. 하나는 일어났다고 믿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꿈이다. 하나는 이미 깨어난 꿈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꿀 꿈이다. 둘 다 지금이라는 현실을 속박한다. 또는 지금을 구원해준다. 때때로 그 역할을 바꾸기도 한다.
> 꿈이 현실을 속박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꿈은 지금을 구원해줘야 꿈이라고 불릴 수 있다.
p221
다른 사람이란 결국 왜곡된 거울에 불과하다. 늘 자신에게 비추어 자신을 발견하려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 이제 미미하게나마 조금씩 깨닫고 있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에게 비춘 나의 모습은 행복할 수 없다는 것, 나의 모습은 나에게 비추어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p223
오늘 새롭게 주어진 하루가 또 하나의 멋진 세상이 되지 못한다면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변화란 불행한 자의 행복 찾기 아니겠는가.
p231
살다 보면 관성을 이기지 못하는 때도 있다. 이 방은 어제와 결별하는 방이며 특별한 오늘을 부여받는 곳이다. 매일 이 방에 들어와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
> 일탈(?)의 관성을 이기기 위해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자기만의 의식이 필요한 법이다.
p243
나도 늦게 인생을 시작한 사람이다. (...) 무엇인지 정체를 잘 모르는 식물이 자라나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하자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처럼, 나도 잎만 가지고는 내가 어떤 나무인지 판별하기 어려웠다. 이때부터 나는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p263
성공은 채찍이다., 쉬지 못하게 날카롭게 살을 파고들어 찢어놓는 주마가편의 바로 그 채찍이다. 채찍을 잊은 성공은 반복과 진부함 속에서 퇴락하게 된다.
나는 읽고 쓰는 것이 의무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했으며, 이것이 가장 재미있는 놀이가 되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취미가 여전히 취미일 수 있도록 애를 썼다.
> 즐거운 의무라고 한다면 어떨까? 자신의 아이를 돌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읽고 쓴다면 즐거운 의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한 인생사, 말초를 자극하는 온갖 것들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에게 어느 정도 의무감은 심어줘야 한다고 본다.
p264
나는 어느 책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와 느낌과 생각을 내 일상 속에서 매일 조금씩 찾아내고 표현해보려고 했다. 그것은 늘 살아 있다는 느낌을 선사했다.
> 나는 어떤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나의 일상에서 어떤 것들을 찾아내야 할까? 아직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스쳐가는 모든 것들에 마음을 열어두어야 할 듯 싶다.
p265
바쁘다는 것은 지우개와 같다. 모든 기억을 지우고 그리움을 지우며 의미를 지우고 생각을 지운다. 바쁘다는 것은 사람을 그저 움직이게 한다. (...) 똑같이, 이 지겨운 반복적 소모를 '일한다'라고 부른다.
p267
밥 한사발에 즐거워하고 산속을 걷는다는 것 때문에 털 하나까지 긴장하고 살아 있는 개 ..... 그 개를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의 삶의 모토는 '개같이 살자'라고 한다. 밥먹을때는 아무 생각하지 않고 개같이 밥만 먹고, 놀때는 거기에 흠뻑 빠져서 꼬리 휘둘러 대며 개같이 놀고, 그렇게 하루를 개같이 살겠다는 것이다. 어릴적 보았던 영화 -'개같은 내 인생'는 다른 내용으로 새롭게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p268
나는 어떠한 줄거리도 없이 쓰기 시작한다. 그저 방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책을 구성하는 지도 같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 쓰다 보면 묘한 곳에 이르게 된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곳으로, 예기치 않았던 모습으로 다가든다. 그러면 신이 난다. 글은 글에 연하여 새로운 세계로, 새로운 언어로 파고든다.
p269
미래는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은 세계다. 그저 내적으로 감응하는 나침반 하나 달랑 들고 떠난다. 이때는 내 발자국이 곧 지도이다. (...) 그리고 그것이 곧 내가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책을 쓰는 일은 내가 가장 잘 배우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 회사에서 후배사원들을 위한 교육자료를 만들다보면 이미 알았던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더욱 명료해지고, 잘 몰랐던 것들에 대해서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책을 쓰는 일,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 모두 타인에게 내 것을 내 언어로 보여주는 일이고, 스스로도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된다.
p270
나는 내가 읽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의 지식은 나라는 특별한 여과기를 거쳐 새로운 표현법을 얻게 된다.
독자는 작가와 같다. 그들 역시 책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책을 쓴다.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과 사유의 한계 속에서만 저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 권의 책이 읽힐 때마다 다시 한 권의 책이 독자에 의해 쓰여'진다. (...) 그래서 모든 독자는 자신이 읽은 책의 또 다른 저자이기도 하다.
> 책읽기는 저자와 독자의 컨텍스트가 공명할 때 최고의 효과를 발휘한다. 저자의 컨텍스트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행간을 읽어야 한다. 아직 저자와의 만남이 준비되어 있지 않는 독자의 컨텍스트는 책의 품격만 떨어뜨릴 뿐이다.
p272
물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도약을 만들어놓은 책을 애써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나는 나의 눈으로 책을 본다. 이미 마흔이 넘은 사람이다. 이미 삶의 왠만한 구석들은 혀로 핥아본 사람이다. 저자의 권위에 눌려 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해한 것을 생활 속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것도 바쁜 일인데, 언제 그들의 중언부언을 들어줄 시간이 있겠는가?
> 한때는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칭하는 모든 양서를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나의 책꽂이에는 아직도 다 읽지 못 한 불멸의 고전과 대가들의 책들이 즐비하다. 이제는 지식적 허영에 사로잡혀 그 책들을 읽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내가 이공계 출신이라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완독할 필요는 없다. 서울대 추천도서라고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를 붙들고 있을 하등의 이유는 없다. 무슨 말인지 이해도 되지 않는 칸트의 책들을 읽느라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 필요는 없다. 하물며 온갖 잡서들은 두말한 필요가 없다.
p273
단칼에 내 심장을 찌르지 못하는 자들은 나와 인연이 없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다시 그들의 책을 펼쳤을 때 운명처럼 심장을 찔리게 되면 그때가 그들과 다시 만나는 시간이다.
명성이 자자한 책이라도 그 명성 때문에 보지는 않는다. 흘러간 시대의 흘러간 흔적이 지금 나를 깨우지 못한다면 나와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이다.
> 사람들이 양서라고 해서, 명성있는 저자가 썼다고 해서, 무조건 사다 보는 것은 명품쇼핑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명품이 대부분 좋기는 하다는 것 또한 생각해볼 대목이다. 여하튼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나는 배움이란, 이해와 인식으로부터 시작할지 모르지만, 그 너머에 있는 다른 차원의 무엇인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게 바로 하나를 듣고 열을 깨닫는 신공인가?
p274
배우고 또 익히다가 결국 자신을 그 바람결에 실을 수 있는 사람들만이 하늘을 날 수 있다.
> 니체의 위버멘쉬 - 하늘을 나는 내 안의 슈퍼맨.
p275
깨달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알레톄이아(aletheia)'의 어원은 '촛불을 끈다'라는 뜻이다.
p276
이성의 작은 촛불을 끄지 않고는 대우주의 별빛을 볼 수 없다.
어둠이 가장 짙을 때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 - 노자
p279
나는 그가 이질적인 것들, 다른 삶들을 받아들여 자신이 뒤에서 덮친 모든 사람의 삶을 자신 속에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사생아를 만들어냄으로써 그들 속으로 확장해가고, 동시에 자신 속에 그들을 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p280
'미래란 과거와 현재에 이어지는 다음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서 우리 곁에 있지만 감지되지 않거나 오해받고 있는 시간'이다.
>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미래라는 것!
p283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혁명도 없다.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없다.
'새로운 장르의 일상적 삶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약속한 실천적 개혁이고 혁명이었다.
> '어떻게'가 참 중요한 대목이다. 새로운 장르는 뭐가 되는 걸까? 뮤직비디오? 서정시? 모노드라마?
p288
자제와 절제라는 방법보다는 내 마음이 흐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Let it go! Let it go! 둑을 세워 마음의 흐름을 모아두지 않고 그것이 흐르도록 하고 싶었다
첫 번째 도전은 실패를 이기는 것이다. 두 번째 도전은 실패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세번재 도전은 매일 실험을 즐기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실패도 성공도 사라진다.
p295
물결은 무수한 반복이 아닌 무수한 변화이다.
p300
얼마나 많이 모방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감동하느냐가 중요하다. 사업이든 글쓰기든 가슴이 설득당하지 않고는 자신의 철학이나 깨달음으로 전환하기 어렵다.
> 북리뷰에서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들을 보고 감탄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감탄을 내재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득은 감정의 폭우를 필요로 한다. 감정을 담지 못하면 설득에 성공하기 어렵다.
모방의 또 하나의 요령은 '한 작품을 모방하면 표절이고, 여러 작품을 모방하면 연구이다.'라는 노회한 충고를 기억하는 것이다. 많이 보고 많이 감동하는 것은 사업이든 글쓰기든 훌륭한 성과를 내기 위한 근면한 배움의 요결이다.
p304
글을 쓰기 위해서는 늘 읽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정리해야 한다. 정리된 강력한 핵심 개념들을 연결함으로써 미래를 현실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해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일상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일상의 이야기가 되어야 실천할 수 있다.
> "글을 쓰기 위해서는 늘 읽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정리해야 한다" - 상투적인 말이지만 이만큼 좋은 글쓰기를 위한 적확한 표현이 어디 있을까.
강점은 꿈을 이루는 도구와 같은 것이다. 어떤 꿈이든 그것을 현실의 세계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적절한 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사나운 괴물을 퇴치해야 하는 영웅들이 신으로부터 빌린 날개 달린 신발이며, 뚫리지 않는 방패이며, 잘 드는 칼과 같은 것이다.
p313
누구든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인물을 얻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 자신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살려내지 않고는 내면에 숨어 있는 영웅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는 것, 이것이 가장 처음 해야 할 일이다.
p315
나는 말보다는 문자가 지니는 조용한 설득력을 더 좋아했다. 그들이 남겨놓은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는 재미를 즐기곤 했다. 나는 그들을 읽는다기보다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사유를 기초로 내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좋았다. 나는 옷을 사서 치장하는 대신 조금 묵직한 정신적 허영을 즐겼다.
p318
삶에 대한 하나의 사례로서 나는 내 삶 자체가 매혹적이기를 바란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나는 매혹적인 삶이라고 부른다.
p321
'좋은 말'은 강연장이라는 무균식에서만 살아 있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것에 불과했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여지없이 부서지며 다시 어제의 관성으로 합류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괴감이 많았다.
> 그만큼 어제의 관성은 거부하기 어려운 탄성을 가지고 있다. 목표와 의지만으로는 '좋은 말'대로 살기 힘든 것이다. 해돋이를 보고 온 이후 관념으로 삶을 움직이는 것은 찰나에 불과하다. 이럴때 우리는 작심삼일이라는 말을 일상의 언어로 사용하게 된다.
p333
그들의 불행은 행복이라는 초콜릿으로 살짝 덮여 있었다. 그들은 그 초콜릿 덮개가 벗겨지는 것에 분개한다.
p334
불행한 사람들만이 변화에 관심이 있다. 행복한 사람들은 지금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행복을 가장한 사람들 역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로 때때로 변화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뼛속 깊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
> 행복을 가장한 사람들은 사실 더 불행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들이 불행하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아가니 말이다. 불행한 사람들은 변화의 문턱에서 좌절하더라도 최소한 행복을 찾아 떠날 일말의 동기가 있다.
p336
혁명은 언제나 기존의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만 가능하다.
p342
누구든 자신의 길을 갈 때는 내면의 등불을 밝히고 가야 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등불이나 등대가 될 수는 없다.
막막할 때, 주저앉아 있을 때, 우연히, 자신의 안에서 스스로 불을 켤 수 있도록 잠시 불을 빌려주는 예기치 않은 쏘시개 불꽃이 되는 것,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p351
나는 사람들을 찾아나서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찾아내 주기를 바랐다. 전생에 나는 아마 나무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나무 밑에서 잠시 땀을 닦듯 그렇게 주위에 앉거나, 그러기에도 너무 바쁘면 그늘에 잠시 기대서서 땀을 닦으며 쉬어가곤 했다.
나는 '트리맨(treeman)'이다. 바람이 불면 '솨아' 소리를 내며 온 잎들을 있는 대로 바람에 실어 날리는 나무이다.
> 제가 지금 그 나무 아래 서있습니다^^ 해가 뜨고 나면 더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p353
나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나왔다. 이것이 지난 10년 사이에 내게 일어난 '굉장한 일'이었다.
> 변경연 12기 연구원이 되는 것이 최근 몇 년간 있었던 일들 중 가장 큰 일이 될 것이다. 2년후 첫 책을 출간하는 과정 또한 굉장한 일이 될 것이다. 이제 나는 크로노스(kronos)의 시간을 넘어서서, 카이로스(kairos)의 세계로 들어서고자 한다.
p354
하루는 그 실험을 하기에 적합한 시간이다. 내 하루들은 바로 그 거북의 새끼들이었다. 어느 하루도 무의미한 하루는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시도 자체가 삶이기 때문이다.
p361
결과와 목적을 늘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 그러나 정말 나의 목적은 하루를 잘 사는 것이다. 하루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각성과 준비의 제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하루답게 사는 것이다. 어떤 하루도 목적을 위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하루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희생물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루 자체를 빛냄으로써 인생 전체를 빛나게 하고 싶었다.
p363
하루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생활고나 가난 때문이 아니다. 즐길 수 있는 자신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저자라면
구본형의 자아경영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는 구본형에 의해 쓰여진 그 자신과 마흔의 모든 중년에 대한 자서전이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에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10년을 위해 쓰여진 미시적 역사의 기록들이다. 이 책에는 변화경영사상가로 우뚝 솟아 바야흐로 변화경영시인으로의 길을 향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녹아 있다. 전체 구성은 프롤로그와 세개의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다음과 같이 11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1장 지난 10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 유혹의 나이, 마흔 | 결정을 지난 꽃의 아름다움 | 가장 정력적인 나이에 버려지다
불면증, 건망증,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 불혹이 아닌 미혹, 저자가 마흔에 만난 삶의 여러 모습들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입부로서 최선의 구조라고 생각된다.
2장 마흔 살
마흔에 관한 이야기들 |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나이
마흔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이다. 마흔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과 생각들을 늘어놓은 다음, 저자의 사상을 밝히고 마흔살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어서 전환에 성공해야만 함을 역설한다.
3장 직장 생활
홀로그램의 세계 속에서 | 필요한 사람들 | 돌연한 출발 | 나를 마케팅하다 | 새로운 시작
마흔이면 한창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을 나이이며 본인과 가족의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나이이기도 하다. 가장 큰 최우선 해결 난제는 일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마흔의 자기혁명의 출발지점은 직장과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맞다고 본다.
4장 얼굴 - 페르소나
머리카락, 약간의 콤플렉스 | 수염, 자연의 공평함 | 코, 나의 자부심 | 인상, 자랑할 만큼은 아니지만 | 인형에서 자유인으로
이 장에서 단순히 얼굴에 관한 얘기보다는 저자의 페르소나에 대해 더 많은 분량을 할애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얼굴에 대한 다각도(?)의 묘사가 너무 많은 것 같다. 한번도 만나지 못 했어도, 저자의 얼굴을 독자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시키고 싶었던 의도라면 다분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장의 제목을 얼굴이라고 하지 말고, '페르소나 - 얼굴'로 바꿔서 저자의 다양한 페르소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지막 꼭지인 '인형에서 자유인으로'를 두 세 꼭지로 확장 구성해서 내용을 전개하면 좋을 듯 하다.
5장 가족
부드러움이 돋보이는 아이 | 나를 닮은 아이 | 나의 별명은 '미숙이' | 늘 옆에 있는 그녀 | 삶의 우선순위 | 아내와 함께 떠나는 여행 | 늘 반갑고 그리운 친구
모두에게 가족은 빼놓을 수 없는 삶의 일부이자 전부이기도 하다. 억지로 가족이라는 것에 대한 담론을 전개하기보다는 저자와 가족의 과거와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함으로써 글이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6장 자연
산과 가까워지는 공간 | 변화의 이유 | 나는 나무다 | 나만의 씨앗
자연과 나무라는 상징은 저자에게 매우 큰 부분이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을 더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언젠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그 순간이 더 가까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삶과 변화의 이유를 찾고 죽음을 바로 쳐다볼 수 있는 지헤를 가지게 된다. 자연과 마흔, 또는 자연과 나이듬이라는 소재에 대해 다양한 인용을 통해 글의 분량이 추가된다면 또다른 맛이 날 것 같다. 물론 자연이라는 주제에 변화와 나무라는 상징을 압축하여 풀어낸 원래 글의 탁월함을 뛰어넘을수는 없을 것이다.
7장 건강
탄생과 함께 시작되는 죽음 | 욕심이라는 이름의 암세포 | 이상 신호 | 나이 든다는 것의 의미
마흔과 중년이라는 주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의 제목을 '건강' 대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8장 길에서
정신적 여행자 | 길을 찾아서 |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깨달음 | 행복해지는 법
이 장에는 과거와 미래, 추억과 꿈이 섞여 있다. 어쩌면 이 책이나 저자의 인생을 압축한 축소판이 이 장과 같을 것이다. 내가 저자라면 이 장을 제일 뒷쪽에 배치시키고, 마지막 장인 11장의 내용 중 책의 결말에 어울리는 내용을 빼내어 이곳에 넣을 것 같다.
9장 집, 공간
내 마음의 집 | 산을 품은 집, 집을 품은 산 | 욕망이 자라는 공간 | 정원손질 | 일상의 작은 쉼터
10장 학습
놀이로서의 학습 | 나침반 하나 들고 떠나는 탐험 | 마음이 가는 대로 | 노마드 | 삶의 방식을 바꾸는 혁명
학습은 변화와 전환을 시작하고 이어나가며 성공시키는 것에 있어 필수 원동력이 되기에 일을 재정의하는 것에 앞서 다루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본다.
11장 일
내가 일하는 방법 |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 | 성공의 비결 | 유일한 사람 | 청중이 듣고싶은 강연 | 나의 역할 | 변화의 주체가 되는 길 | 꽃씨와 불씨
3장 직장생활에서 시작한 변화의 이야기는 마지막 장인 11장 일에서 그 깨달음을 고취시키며 마무리된다. 일로 시작해서 결국 일로 끝나는 셈이다. 결국 업에서 자신의 소명을 찾을 수 박에 없다는 얘기이다. 놀고 먹는 백수 건물주의 삶을 동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8장과 마찬가지로 이 장 역시 마흔 세살에 시작한 저자의 삶의 정수를 압축해놓은 것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8장의 내용을 이 장의 뒷부분으로 빼던지, 아니면 마지막 장에 8장과 11장의 내용을 함께 구성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1장의 구성은 시간의 순서라고도 볼 수 있다. 1장부터 3장까지가 과거라고 한다면 4장부터 9장까지는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어 있다. 그리고 10장과 11장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장의 내용이 좋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때는 비록 저자가 이 책이 그의 역사를 기록하는 프로젝트라고 밝혔음에도 4장의 얼굴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은 좀 당혹스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자기 얼굴 생긴 것을 이야기하는게 책의 한 챕터를 할애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구본형을 잘 알지 못하거나, 그의 다른 책을 한권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얼굴 생김새를 얘기하고, 가족들에 대해 시시콜콜한 얘기를 늘어 놓은 것에 난색을 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이 책을 펼쳐, 책과 글이 섬광이 되어 내 가슴을 감전시킨 이후 나는 책 속에서 길을 찾고 있는 마흔의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책 속의 모든 얘기들은 그대로 나에게 투영되었다. 구본형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고, 내가 곧 구본형이었다.
"변화라는 것은 나를 부정하고 바꾸는 것이 아닌 본연의 나를 찾는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 나에게 이 책은 바로 나 자신이었고 내가 살아갈 미래의 교과서가 되었다. 책과 나의 컨텍스트는 정확하게 들어맞았고 책은 나의 거울이 되었다. 나는 내가 살아가야 할 미래를 직감할 수 있었다." - 2018년 2월 나의 미스토리(Me-Story) 중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의 내용을 바꾸진 않겠다. 다만 다른 방향으로 책을 기획할 수도 있겠다.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 프로젝트, 즉 개인적인 자서전의 성격보다 일반적인 내용을 중점으로 책을 쓰는 것이 한 방향이 될 수 있겠다. 제목만으로 책을 고르는 많은 마흔의 지친 중년들은 '마흔의 심리학'이리던지 '마흔, 이렇게 살아라' 따위의 제목과 내용에 끌리는 법이다. 구본형이 자전적 에세이보다 그런 얘기들에 더 치중했더라면, 어쩌면 더 많은 책이 팔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풀어내었기에 이 책이 명작이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책을 보다 보면 군데군데 그의 사진들이 보인다. 자서전인데 본인 사진을 넣는 것이 어떠랴. 사진으로 본 구본형은 둥글둥글해보인다.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 같다. 책의 내용을 보면 코에 대한 자부심, 즉 코부심이 가득하던데, 내 코도 만만치 않다는 난데없이 뜬금없는 동질감을 느껴본다. 마흔이 되면 살아온 삶이 얼굴에 드러난다는데, 후회없이 살아온 삶이라는 것이 그의 사진을 보고 느껴진다. 저자가 좋아하는 다른 사진들도 넣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풍경사진이라던지, 그가 좋아했던 소품이나 장소에 대한 사진이라던지 말이다. 비단 사진뿐만 아니라, 저자가 좋아했던 그림 또한 넣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자서전인 측면을 많이 강조한다면, 그가 좋아했던 시나 예술과 같은 것들을 묶어서 별도의 장으로 추가 구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서투르게 추측하건데 만약 그가 죽지 않고 10년 후 다시 자서전이 출간되었다면 시와 예술을 다룬 내용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개인적으로 10년마다 내기로 했던 그의 두번째 자서전을 보지 못 한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해서 '마지막 편지'만 남기고 떠난 그가 미처 하지 못 한 얘기들은 우리 각자가 완성해야 하는 숙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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