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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0일 10시 56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헤로도토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역사가로 흔히 ‘역사의 아버지(키케로)’라 불리며, 그의 저술인 ‘역사’는 현존하는 지중해세계 최초의 역사서로 꼽힌다. ‘역사’에 언급된 헤로도토스의 신상은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os) 출신이며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기록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와 여러 해외지역을 직접 여행했다는 것 정도이다. 자주 지중해 세계의 여러 곳을 여행했다는 것과 그리스어로 저술할 만큼 그의 교육수준이 높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부유하고 영향력이 큰 상류계급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조국인 할리카르나소스은 외교에서 친페르시아적 입장과 반페르시아적 입장을 오가는 유동적인 행보를 보였다. 할리카르나소스는 참주 지배 하에서 페르시아 편을 들었다가 기원전 5세기 중엽에는 페르시아에 반대해 델로스 동맹에 참여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조국의 현실과 외유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스 인과 페르시아 인의 대립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인식하게 되었고 이러한 점이 그의 역사관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부 문헌에서는 헤로도토스를 투리(Thurii)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투리의 식민 사업에 참여하여 투리의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출생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겔리우스(A.Gellius)가 그의 출생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겔리우스가 전하는 전승에 따르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한 해에 헤로도토스의 나이는 53세였다고 한다(아티카의 밤 15.23.). 이를 근거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기원전 432년을 기점으로 계산할 경우, 그는 기원전 484에 태어난 것이 된다. 헤로도토스의 가문에 대해서는 수이다스 사전의 언급이 유일한 근거이다. 이 사전의 ‘헤로도토스’ 항목에서는 헤로도토스가 릭세스와 드리오의 아들이며 참주 릭다미스 때문에 사모스로 갔고 사모스에서 이오니아 방언을 익혀 9권의 ‘역사’를 저술한 후 귀국하여 참주를 축출했으며 그 뒤 시민들과의 불화로 인해 자진 출국하여 투리에 가서 머물다가 그곳 혹은 마케도니아의 펠라에서 사망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렇게 헤로도토스는 추방과 복귀, 재출국, 오랜 해외체류와 여행으로 점철되는 복잡다단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는 기본적으로 삶 속에서 좌절과 시련을 많이 겪음으로써 할 말이 많은 사람이며, 인생의 좌절을 체험하고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과거사를 탐구한다고 보았을 때, 헤로도토스는 역사가가 될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환경이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역사가가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첫 번째 이유는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 규명’이라는 주제를 명확히 제시하고 탐구를 통해『역사』를 저술했다는 것이다. 김봉철은 ‘지중해 세계 최초의 역사서, 헤로도토스의 역사, 서양사학회’ 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역사』는 그리스어 ‘히스토리아이’를 번역한 용어인데, 이는 ‘히스토리아’의 복수형이다. 당시 ‘히스토이아’는 ‘탐구, 추구’, ‘탐구를 통해 얻은 지식’, ‘탐구 결과에 대한 서술’이라는 지닌 말이었다. ~ 그는 그리스 인과 이방인의 전쟁에 대해 그 경과뿐 아니라 전쟁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점들이 그의 저술이 당시 그리스의 탐구 전통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위와 같은 사실은 ‘역사’의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헤로토도스는 ‘역사’에서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 규명’과 관련된 내용 이외에도 자신이 보고 들은 여러 민족 및 국가의 풍습, 역사, 신화 등 백과사전 적인 내용을 함께 싣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헤로도토스가『역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비교적 균형잡힌 역사관을 들 수 있다. 그 자신이 그리스인임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를 비롯한 이방인 민족 및 국가의 풍습과 역사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는 독자로서 『역사』를 읽는 내내 인지했던 사실이다. 『역사』를 읽기 전에는 사실 기원전에 쓰여진 역사서에서 객관적인 시각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으니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통해 내가 오히려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마지막 이유는 헤로도토스가 ‘발로 뛰는’ 역사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확인한 것은 확인한 것이라고, 구전을 통해 수집한 것은 그 출처를 밝혔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에 두 가지 이상의 유래나 원인이 있을 때는 모두 기록하고 그 진의에 대한 판단을 독자에게 맡겼다. 『역사』가 아우르고 있는 방대한 지역과 민족들로 판단컨대 헤로도토스가 얼마나 부지런하고 이 저서에 열정과 책임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세 가지 이유로 나는 헤로도토스에 대한 여러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대한’ 역사의 아버지라 평가하겠다.

 

* 저자의 정보에 대한 출처:

  1)  ‘지중해 세계 최초의 역사서, 헤로도토스의 역사', 김봉철, 서양사학회(2011)

  2)  ' 역사의 탄생 : 헤로도토스와 사마천', 김기봉, (2007)

  3) 위키백과 '헤로도토스' - 국문 및 영문

 

 

[내가 저자라면-『역사』평설]

헤로도토스의 주제는 그리스인과 이방인들, 즉 페르시아인 사이의 전쟁이었다. 그는 자신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그 전쟁의 경과 뿐 아니라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도 설명하고자 했다는 것을 서문에서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다음은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가 그의 탐구 결과를 발표하는 것인데, 이는 인간에 의해 이룩된 일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고, 또 헬라스 인들과 이방인들이 수행한 중대하고 놀라운 행적들 및 특히 그들이 서로 전쟁을 벌였던 원인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헤로도토스는 우선 그리스인과 이방인의 대립과 전쟁의 역사를 그 시원부터 밝혀내야 했다. 그는 1권에서 먼저 그 대립에 관한 신화적 사례들을 소개한 후, 이어서 자신이 규명한 역사상의 사례를 설명한다. 그는 그리스인과 이방인의 대립이 시작된 역사상 최초의 사례를 리디아의 크로이소스(Kroisos)의 군사원정에서 찾는다. 크로이소스는 ‘그리스인들에게 맨 처음으로 해악을 저지른 자’ 였고 ‘이방인들 중에서 최초로 그리스인들을 정복하여 조세를 내도록 한’자였던 것이다(역사 1.5-6)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의 키로스(Kyros)에게 패해 몰락한(기원전 546년) 이후부터, 그리스인과의 전쟁을 주도한 이방인은 단연 페르시아 인이었다. 이후부터 『역사』는 페르시아 왕들의 치세를 기준으로 페르시아 왕국의 팽창과 정목에 관해 다룬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권: 키로스(기원전 559~530년)에 의한 메디아 멸망과 페르시아 건설/ 리디아, 이오니아 및 바빌론 정복

-> 2~3권: 캄비세스(Kambyses, 기원전 530~522년) 치세하의 이집트 정복 및 에티오피아 원정,

-> 3권 마지막~6권: 다레이오스(Dareios, 기원전 521~486년) 치세하의 바빌론 재정복, 스키타이 원정, 리비아와 트라키아 정복,

     이오니아 봉기와 진압, 마르도니오스의 그리스 원정(기원전 492년), 다티스의 그리스원정(기원전 490년),

-> 7~9권: 크세르크세스(Xerxes, 기원전 486~479년)의 그리스 원정(기원전 480년)

 

살펴본 바와 같이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키로스에서 크세르크세스 때까지 즉 기원전 559년에서 479년까지의 약 80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주제인 페르시아의 군사적 원정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페르시아 왕들의 원정 지역과 종족들의 지리, 관습, 종교, 역사를 서술하는데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기 때문에 지리적 및 민속학적 정보를 풍부하게 제공해 주었다.

김봉철*에 따르면 현재의 텍스트들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모두 9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헤로도토스의 원문에는 현재 텍스트처럼 권과 장의 구분이 없었고 또 구두점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의 구분방식과 부호사용은 책의 인용과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후대에 도입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역사』전체의 내용을 검토해 본 결과 두 가지의 보완점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첫 번째로는 주제인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 규명’에 충실한 전개이다. 독자가 흐름을 잃지 않고 글의 전개를 따라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필요하다는 말이다.『역사』를 읽으면서 가슴 두근거리며 가장 속도감 있게 읽은 부분은 7~9권으로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따로 떼어내 출판해도 좋을 만큼 그 구성이 탄탄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1~7장은 페르시아 전쟁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각 민족과 국가의 풍습, 역사, 법률 등 글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들이 너무 길게 삽입되면서 독자의 집중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이는 그들을『역사』의 백미인 7~9장까지 가지 못하게 만드는 안타까운 상황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때문에 주제에 충실한 전개를 위한 해결책이 필요한데 바로 이 해결책이 두 번째 보완점이다. 만일 내가 작가라면 통일성 있는 글의 흐름과 속도감 있는 전개를 위해 각 민족 및 국가의 풍습 지리, 특징들에 대한 설명은 따로 떼어내 구성할 것이다. 즉,『역사』를 I,II 로 나누어 한 권은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주제로, 다른 한 권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국가와 민족을 주제로 하여 구성 및 편집하여 책을 출판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형식으로『역사』가 구성된다면 독자들은『역사』를 두께로 먼저 제압당하는 재미없는 고전으로 보지 않고 재밌는 역사소설로 느끼며 읽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 ‘지중해 세계 최초의 역사서, 헤로도토스의 역사', 김봉철, 서양사학회(2011)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헤로도토스 역사’]

   

제1권 Kleio (클레이오)

 

P.82

메디아군의 참담한 궤멸 소실을 접한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 놈을 그대로 두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우선 키루스를 놓아주라고 했던 해몽가 마고스들을 찔러 죽인 뒤, 도시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노소를 막론하고 무장을 시켰다. 아스티아게스는 이들을 데리고 출격하여 페르시아군과 싸웠으나 패하여 아스티아게스 자신은 붙잡히고 휘하의 메디아군도 잃고 말았다.

포로가 된 아스티아게스에게로 하르파고스가 와서 보기 좋게 나무랐다. 그는 이전에 아스티아게스가 자기에게 친 아들의 살코기를 먹게 한 그 연회에 대해 언급하고, 국왕의 몸에서 노예의 처지로 떨어지니 어떤 기분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스티아게스는 하르파고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키루스가 한 일을 너의 공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하르파고스는 키루스에게 편지를 쓴 것은 자기이므로, 이번 일은 당연히 자기의 공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아스티아게스는, 너는 세상에 둘도 없는 어리석을 인간이자 더없는 악인이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세상에 둘도 없이 어리석다는 것은, 만약에 현재의 사태가 실제로 그의 힘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고 한다면 자기가 왕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양보했기 때문이다. 더없이 악인이라고 한 것은 예전의 연회를 빌미로 해서 메디아 국민을 노예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자기가 왕위에 오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야 했다면, 이 영예를 페르시아인보다도 메디아인 중에서 누군가를 골라주는 것이 정당했을 것이다. 그 결과, 그 일에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메디아 백성이 지배자로부터 노예의 처지로 떨어지고, 이제까지 메디아인의 노예였던 페르시아인이 이제 주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스티아게스가 하고 싶은 말의 요지였다.

이렇게 해서 아스티아게스는 재위 35년으로 왕위를 잃고, 메디아는 아스티아게스의 가혹함으로 인해 화를 불러 페르시아에 굴복하게 되었는데, 할리스 강 위쪽(동쪽)의 아시아 일대에 대한 메디아의 지배는 스키타이인의 지배 기간도 포함해서 128년에 이르렀다. 훗날 메디아인은 이전의 행동을 후회하여 다레이오스 시대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싸움에 져서 다시 굴복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훗날의 이야기이고, 이 때에는 아스티아게스에게 대항해 키루스가 이끄는 페르시아인이 메디아에 반기를 들었고, 그 이래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키루스는 아스티아게스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자기 곁에 두었다.

P.86

페르시아인들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인데, 페르시아에서는 남 앞에서 토하거나 방뇨를 한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엄중히 지켜지고 있다. 페르시아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을 술을 마시면서 상의하는 습관이 있다. 그 상담에서 모두가 찬성한 일을 상담의 화장이 되었던 집 중인이 이튿날 술이 깬 상태로 있는 모두에게 제기하고, 이때에도 여전히 찬성을 하게 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폐기한다. 또 술에 취하지 않는 상태로 예비상담을 한 일은 술자리에서 다시 결정을 하게 된다.

P.111

그 여러 왕 중에는 두 여성이 섞여 있었다. 둘 중 처음 여성은 뒤의 여성보다도 5세대 전의여왕으로, 그 이르을 세미라미스라고 했다. 바빌론의 평야를 관통하는, 실로 놀라울만한 제방을 구축한 것은 이 여왕이다. 그때까지는 유프라테스 강이 모든 평야에 범람하여, 마치 바다처럼 되어 버리는 것이 상례였던 것이다.

※ 세미라미스는 오히려 그리스인에게 친숙했던 전설상의 인물이었다. 역사적으로는 기어원전 9세기경의 바빌론의 영왕 삼마무라마트였다고 여져지는데, 디오도로스가 전하는 세미라미스 상은 거의 전설적인 세계에 속한다. 전해지고 있는 수많은 놀라은 업적 가운데에서 오늘날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그녀가 만들었다는 ‘공중정원’이다. 세미라미스의 이름은 종종 여신 이시타르와 동일시된다. 이시타르는 그리스의 아프로디테에 해당하는 사랑의 여신이다.

세미라미스에 이어 두 번째 여왕이 된 여성은 그 이름을 니토크리스라고 하였는데 먼저의 여왕보다도 훨씬 총명했다. 그녀는, 내가 지금부터 기술하려는 것과 같은 여러 기념물을 남겼다. 또 메디아의 강대한 세력이 끊임없이 확장을 계속하여, 도시가 차례로 점령되어 마침내는 니노스(니네베)까지 함락되는 것을 눈앞에 보고 최대한의 방어책을 강구하였다. 우선 이제까지 도시 한가운데를 지나 똑바로 흐르고 있던 유프라테스 강을 도시 위쪽에 여러 깨의 운하를 파서 굽이굽이 흐르게 만들어, 그 결과 강의 흐름이 아시리아의 어느 부락에서는 세 번이나 지나게 되었던 것이다. 유프라테스 강이 세 번이나 지나가는 이 부락의 이름은 아르데리카라고 한다. 오늘날에도 이 쪽 바다(에게 해)에서 바빌론으로 가는 사람은 유프라테스 강을 내려갈 때, 3일 동안에 세 번이나 같은 부락을 지나는 것이다.

우선 이와 같은 일을 하고 난 뒤, 영왕은 이어 강 양쪽에 길이로 보나 높이로 보나 매우 놀랄만 한 제방을 쌓았다. 바빌론의 훨씬 위쪽에 호수 대신에 연못을 파게 하였는데, 이 연못은 얼마 안 되는 거리를 두고 강에 평행으로 만들어졌고, 깊이는 어디에서나 지하수에 닿을 때까지 파고, 넓이는 그 둘레가 420스타디온(약 75km)이나 되게 하였다. 이 연못의 개간이 끝나자 돌을 날라 연못 주위에 안벽을 쌓았다. 니토크리스의 이 두 가지 일(강을 구절시키는 일과 연못을 파서 전면적인 늪지대로 한 일-은 강이 여러 차례 굴절을 해야 하는 데다가 배 여행이 끝난 뒤에도 호수를 멀리 우회해야만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공사가 이루어진 곳은 메디아로부터의 입국로가 있고 더욱이 최단 거리에 해당되는 지구로, 메디아인이 겄여 들어와서 이 나라의 사정을 자세히 아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이었다.

여왕은 위와 같은 여러 개간 공사로 도시의 방비를 강화할 것인데, 이들 공사를 이용해서 다음과 같은 부차적인 공사도 수행할 수가 있었다. 이전에는 강이 도시 한가운데를 흘러 도시가 두 지구로 나뉘기 때문에, 한쪽 지구에서 다른 지구로 건너가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배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생각건대 이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을 것이다. 여왕은 이에 대한 대책도 생각하였다. 즉, 호수 대신에 연못을 팠을 때 이 공사를 이용해서 또 하나 기념할 만한 업적을 후세에 남긴 것이다.

그녀는 거대한 돌을 잘라내게 하여 돌이 모두 갖추어져 연못 개간이 완료 되자 강의 흐름을 모두 새로 판 장소로 돌렸다. 연못에 물이 차감에 따라 애초의 강바닥을 말라갔는데, 그 사이에 도시를 따라 흘러가는 양쪽 물가와, 작은 문에서 강으로 통하는 입구를, 성벽을 만들었을 때와 구운 벽돌로 굳힌 것이다. 한쪽 또는 거의 도시의 중앙부에, 파낸 돌을 철과 납으로 접착해서 다리를 놓았다. 다리에는 낮 동안에만 네모진 판자를 놓고 바빌론인이 건너 갈 수 있도록 하였다. 밤에는 이 판은 걷어내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두 지구의 주민이 밤에 이 다리를 건너 서로 도둑질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개간한 연못이 강물로 채워지고 또 다리공사도 완료되었을 때, 여왕은 유프라테스 강을 다시 애초의 강바닥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해서 판 곳은 늪이 되어 소기의 목적을 다하게 되었고, 한편 시민들에게는 다리가 생긴 것이다.

이 여왕은 다음과 같은 장난을 꾸며낸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도시에서 사람의 왕래가 가장 많은 문 위에 자기 묘를 만들게 한 것이다. 묘는 바로 문 위에 있는데 이 묘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새기게 하였다.

‘나 이후의 바빌론 왕으로서 돈에 궁한 사람이 있으면 이 묘를 열로 원하는 대로 돈을 가져라. 그러나 궁하지 않은데 함부로 열지 말 것. 흉사가 있을 것이다.’

이 묘는 다레이오스의 지배가 될 때까지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다레이오스는 이 문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도, 재보가 들어 있고 열라는 문구ㅠ까지 있는데 r 재보를 취하지 않는 것도 꺼림직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이 문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이 문을 지난 때 시체가 바로 머리 위에 오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를 열어보니 재보는 없고 있는 것이란 시체와 다음과 같은 문구뿐이었다.

‘네가 한없이 탐욕스럽고 이익을 쫒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가 아니라면 죽은 자의 관을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여왕은 이런 인물이었다고 전승은 말하고 있다.

 

제2권 Euterpe(에우테르페)

 

P.131

인간 세계에 한정해서 그들이 하는 말 중 일치하는 것은, 1년이라는 단위를 발명한 것과 1년을 계절에 따라 열두 부분으로 나눈 것은 이집트인이 최초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별을 관찰하여 발견했다고 말하였다. 나는 달력을 계산하는 방법은 이집트인쪽이 그리스인보다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리스인은 계절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격년으로 윤달을 1개월 삽입하는데, 이집트에서는 30일 한 달을 12개월 동안 계산하고 그 정수 외에 1년에 5일은 더함으로써 계절의 순환이 달력과 일치해서 운행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의 말로는, 열두 신의 호칭을 정한 것도 이집트인이 처음이고, 그리스인은 이집트인으로부터 그것을 배웠다고 한다. 또 신들의 제단이나 신상이나 신전을 세우는 것도, 돌에 모양을 조각하는 것도 이집트인이 창시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같은 사항에 대해서 사제들은 새부분 실례를 제시해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P.139(나일의 범람과 미풍에 대한 의문 제기)

나일의 물이 높아질 때에는 델타 지대뿐만 아니라 이른바 리비아령이나 아라비아령 여기저기에서 실로 이튼 길의 거리에 걸쳐-때로는 그 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고 또 이에 미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범람한다. 이강의 성질에 관해서 나는 사제로부터나 그 누구로부터도 지식을 얻을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나일이 하지를 기준으로 해서 100일 도앙ㄴ에 걸쳐 물이 불어나 범람하고, 이 일수가 차면 수위가 내려가 다시 하지가 찾아올 때 까지 겨울 동안에 감수된 채 그대로 있는 이유를 그들로부터 RHr 듣고 싶었다. 그러나 나일이 다른 하천과 반대의 현상을 나타내는 것은 도대체 이 강에 어떤 특성이 있어서 그러한지를 물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어느 이집트으로부터도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또 내가 호기심을 가지고 이집트인에게 물은 것은 또 하나, 어느 강에서도 일어나는 미풍이 어째서 나일 강에서만은 일어나지 않는가 하는 것도 있었다.

P.141(나일강의 범감과 미풍에 대한 자신의 탐구)

겨울 동안 태양은 겨울의 악천후 때문에 전규 궤도에서 벗어나 상부 리비아 쪽으로 이동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의 설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태양신이 가장 가까이 접근해서 통과하는 지역이 가장 심하게물이 결핍되므로, 그 지역의 하천이 가장 많이 고갈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상부 리비아를 통과하는 태양은 이 지방 일대의 대기가 언제나 맑고 토지의 기후는 더워서 찬바람이 불지 않기 때문에, 여름철의 중천을 지날 때와 똑같은 작용을 한다. 즉, 태양은 수분을 끌어당기고, 그 수분을 상부(남쪽) 지방에 방출한다. 그러면 바람이 그 수분을 받아서 흐트러뜨려 증발시키고 만다. 따라서 당연히 이 지방에서 부는 남풍과 남서풍이 어느 바람보다도 훨씬 많은 비를 품게 된다. 그러나 태양은 해마다 나일로부터 끌어당긴 수분을 그때마다 모두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위에도 남겨둔다고 나는 생각한다. 겨울의 한기가 느슨해지면 태양은 다시 중천으로 돌아가는데, 그때부터도 여전히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하천에서 수분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하천은 태양이 되돌아올 때까지는 이 지방에 비가 오고 세찬 물줄기가 산지를 종횡으로 흐르기 때문에, 여기에 빗물을 대량으로 보태서 대하를 이루어 도도히 흐르지만, 여름 동안은 빗물이 끊어지는데다가 태양이 수분을 빨아올려 수량이 적어진다. 그러나 나일만은 다른 하천과 달라서 겨울 동안 비는 오지않고 태양에게 수분을 빼앗기기도 하기 때문에, 당연히 여름에 비해서 본래의 수위보다 그 수위가 훨씬 낮아진다. 즉, 나일도 여름에는 다른 모든 하천과 마찬가지로 수분을 빼앗기게 되지만, 겨울에는 나일만이 수분을 빼앗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들 현상의 원인은 태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개인적인 의견에 따르면, 이 지망의 공기가 건조한 원인도 마찬가지로 태양에 있다. 태양이 자기가 통과하는 길을 건조시켜 사는 것이다. 리비아가 언제나 더운 것도 그 때문이다. 가령, 방위(남북)가 반대가 되어 현재 북풍과 겨울이 있는 하늘의 위치에 남풍과 남쪽의 배치가 오고, 현재 남풍이 있는 곳에 북풍이 오게 된다면 어떠할 것인가? 태양은 겨울과 북풍에 의해서 중천에서 쫓겨나 마치 현재 리비아의 오지로 옮겨가는 거처럼 유럽의 상부(북부)로 이동하여, 유럽 전토를 통과해서 현재 나일에 미치고 있는 거소가 똑같은 작용을 이스트로스 강(도나우 강)에 미칠 것임에 틀림없다.

또 나는 나일에 미풍이 불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생각한다. 즉 미풍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선선한 곳에서 불어오는 것이므로, 매우 더운 지역에서 불어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하고.

P.147(이집트의 풍습 중)

이 나라 독특한 풍토와 다른 하천과는 그 성격이 다른 자기 나라 강에 사응하기라도 하듯이, 이집트인은 거의 모든 점에서 다른 민족과는 정반대의 풍속과 습관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여자는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는데, 남자는 집에서 베를 짠다. 베를 짜는 것도 다른 나라에서는 씨실을 아래에서 위로 밀어 올리는데, 이집트인은 위에서 아래로 민다. 또 짐을 나를 때 남자는 모리에 이고 여자는 어깨에 멘다. 오줌을 눌때 여자는 서서 누고 남자는 쪼그리고 앉아서 눈다. 일반적으로 배변은 옥내에서 하지만, 식사는 집 밖의 길바닥에서 한다. 꼭 해야 하는 일이라도 부끄러운 일은 남몰래 할 필요가 있으나, 부끄럽지 않은 일은 공공연하게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대답이다. 여자는 결코 성직에 앉지 않는다. 신이 남신이건 여신이건 상관없다. 어느 경우나 사제의 일을 맡는 것은 남자이다. 부모의 부양에 대해서는 아들은 그럴 마음이 없으면 강요당하기 않지만, 딸은 그럴 의지가 없어도 절대적으로 이의를 져야 한다.

신들의 사제는 다른 나라에서는 머리를 길게 기르지만 이집트에서는 머리를 짧게 깎는다. 또 다른 나라에서는 죽은 사람의 근친은 머리를 까까고 상복을 입지만, 이집트인은 사람이 죽으면 그때까지 짧게 자르고 있던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둔다. 그리고 다른 민족은 가축과 따로 생활 하지만, 이집트인은 가축과 같이 산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보리와 밀을 주식으로 하지만, 이집트에서는 이들을 주식으로 한다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오리라라고도 하고 제이아라고도 불리는 곡식을 주식으로 삼는다. 이집트인은 곡식 가루를 발로 반죽하고 진흙은 손으로 갠다. 또 인분 비료를 모으는 데도 손을 사용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이집트인의 풍습을 배운 사람은 예외이지만-음부를 태어난 그대로 두지만, 이집트인은 할례를 한다. 남자는 누구나 옷을 두 장 겹쳐 입지만, 여자는 한 장만 입는다. 또 타국인은 배의 돛을 조작하기 위한 밧줄과 밧줄을 꿰는 고리를 선체 바깥쪽에 달지만, 이집트인은 안쪽에 단다. 그리스인은 글자를 쓰거나 계산을 할 때 손을 좌에서 우로 옮기지만, 이집트인은 우에서 좌로 옮긴다. 그러면서도 이집트인은 자기들은 오른쪽으로 쓰고, 그리스인은 왼쪽으로 쓴다고 말한다. 이집트인은 두 가지 문자를 사용하는데, 하나는 신성문자이고 다른 하나는 통속문자이다.

P.207(미궁과 모이리스호의 축조)

또 열두 왕들은 공동으로 기념물을 남기기로 하고 모이리스 호 약간 남쪽, ‘악어의 도시’kf고 일컬어지는 도시와 거의 같은 선상에 ‘미궁’을 세웠다. 나는 내 눈으로 이 미궁을 보았는데, 그것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리스인의 손으로 만든 성벽이나 여러 건조물을 모두 모아도 이 미궁에 비하면, 거기에 소요된 노력이나 비용 등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에페소스나 사모스의 신전이 훌륭한 건조물이라고 하는 데에는 물론 동의하지만, 물론 피라미드도 그 규모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그 하나하나가 그리스의 거대한 건조물을 많이 모아놓은 것에 필적하는 것이었으나, 미궁은 그 피라미드도 능가하는 것이다.

미궁에는 지붕이 있는 안마당이 12개 있는데, 6개가 북향 나머지 6개가 남향이다. 정면 입구는 서로 마주보고 이어져 있으며, 같은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건물은 이층을 이루어 지하와 그 위에 방이 각각 1500개, 두 층을 모두 합해서 3000개나 된다. 나는 그것을 한 번 둘러보았는데, 다음에 말하는 것은위층에 관한 한 내가 본 대로 보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담당 이집트인이, 지하에는 이 미궁을 세운 여러 왕과 성스러운 악어를 묻은 방이 있다고 해서 한사코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지하의 방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을 적을 수밖에 없으나,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위층의 장관은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안마당에서 각 방으로, 거기에서 주랑으로, 주랑에서 또 다른 방으로, 다시 거기에서 다른 안마당으로 돌아가면, 방에서 방으로 나 통로에서 보이는 것도, 안마당에서 안마당으로 돌아가며 보이는 것도 모두 한없는 경탄의 대상이었다. 이들 건물의 지붕은 모두 담과 마찬가지로 돌로 되어 있고, 돌담에는 전면이 조각이 되어 있고, 안마당은 어느 것이나 빈틈없이 열 맞추어 세운 기둥들로 둘러져 있었다. 미궁의 건물이 끝나는 수것에는 40오르기아(약 71미터)의 피라미드가 서 있고, 여기에는 거대한 동물의 모양이 여러 개 조각되어 있었다. 또 이 피라미드에 이르는 지하도도 만들어 져 있었다.

이러한 미궁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모이리스 호’라고 하는 호수인데, 미궁은 이 호수 근처에 세워져 있다. 이 호수의 주위는 3600스타이온(약 640킬로미터), 스코이노스로 환산하면 60스코이노스로 이집트의 해안선과 같은 길이이다. 호수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고, 수심은 가장 깊은 곳에서 50오르기아(약 89미터)이다. 이것이 만들어진 인공 호수라고 하는 것은 후수 자체가 잘 나타내고 있다. 호수 거의 중앙에 두 기의 피라미드가 서 있는데 어느 것이나 수면위의 높이가 50오르기아(약 89미터), 수면 아래도 마찬가지로 50오르기아이며, 둘 다 그 위에 옥좌에 앉은 돌의 거상이 놓여 있다. 따라서 피라미드 전체의 높이는 100오르기아가 되는데, 1오르기아는 6피트(약 2미터), 또는 4페키스에 해당된다. 1피트는 4팔라스테, 1페키스는 6팔라스테이므로 100오르기아는 바로 1스타디온 또는 6플레드론이 된다.

호수의 물은 이 지방이 매우 물이 귀한 곳이라는 점만으로도 분명하겠지만, 자연스럽게 솟아나온 것이 아니라 운하로 나일에서 끌어온 것이다. 일 년 중 6개원 동안은 후수로 흘러들고, 나머지 6개월 동안은 아일로 흘러나간다. 물이 빠져나갈 때의 6개원 동안은 어획 수익이 은 1탄란톤에 달하여 매일 국고를 풍성하게 만들지만, 물이 들어올 때에는 20믐나에 지나지 않는다.

고장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 호수는 멤피스 남쪽의 산맥을 따라 서쪽 내륙을 향하여 지하를 지나 리비아의 시르티스로 흘러가고 있다고도 한다. 이 호수를 만들 때 파냈을 흙을 어디에서도 볼 숭가 없어서, 나는 호수 가장 가까우 srht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파낸 흙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들ㅇ튼 륵을 날라서 버린 장소를 일러주었는데 나는 그것을 듣고 쉽게 납득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아시리아의 니노스(니네베)에서도 이와 같은 이링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노스 왕 사르다나파로스의 막대한 재보가 지하의 보고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어느 도둑들이 훔치려고 생각하였다. 도둑들은 자기 집에서 왕궁까지의 거리와 방향을 재서 지하도를 팠는데, 파낸 흙은 매일 밤 티그리스 강으로 운반해서 버리고, 마침내 소원했던 대로 일을 끝마쳤다. 나는 이집트의 호수를 팠을 때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던 것인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밤을 틈타서 한 것이 아니라 대낮에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집트인이 파낸 흙을 나일로 운반하면, 강은 이것을 휩쓸어 가는 구조였던 것이다.

이 후수는위와 같이 해서 탄생했다고 한다.

P.218

아프리에스를 타도한 뒤 아마시스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사이스 주 출신으로, 태어난 고을은 시우프라고 했다. 처음에 이집트인은 본디 평민으로서 이름 있는 집안의 출신이 아닌 아마시스를 얕잡아보고 그다지 경의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윽고 아마시스는 성급하게 일을 서둘지 않고 현명한 방법으로 이집트인의 민심을 수중에 넣었다. 아마시스가 소장한 수많은 재보 중에 발을 씻는 데에 사용하는 황금으로 만든 대야가 있었다. 아마시스 자신도 그와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도 언제나 이 대야로 발을 씻었다. 아마시스는 이 대야를 녹인 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도시의 가장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장소에 안치하게 하였다. 그러자 이집트인은 이 신상을 크게 수상하며 절했던 것이다. 도시 사람들의 행동을 안 아마시스는 이집트인을 불러 모아 신상은 발을 씻는 대야로 만들었다는 것, 이전에 그들이 그 곳에 토하기도 하고 오줌을 누기도 하고 발을 넣고 씻었던 것을 지금은 매우 숭상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진상을 폭로해 보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자기의 경우도 이 대야와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한 평민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왕이므로 자기를 중히 여기고 숭배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아마시스는 이렇게 해서 이집트의 민심을 다스려 자기에게 복종하도록 납득시켰다.

P.219

아마시스의 정무를 집행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았다. 아침동안에 광장에 사람들이 나올 무렵까지는 그에게로 올라온 정무를 열심히 처리하지만, 그 이후에는 술을 마시고 함께 자리한 상대를 놀리면서 하찮은 일로 시간을 보냈다. 왕과 친한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에 마음 아파하여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왕이시여, 지나치게 천한 행동을 하시는 것은 국왕으로서 올바른 처신이 아닐 것입니다. 옥좌에 엄하게 앉으셔서 온종일 정무를 맡아보시는 것이 전하에게 어울리는 일이며, 그렇게 한으로써만이 이집트 국민도 위대한 통치자를 추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전하의 평판도 틀림없이 좋아질 것입니다. 현재와 같은 무습은 결코 제왕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옵니다.”

아마시스는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활을 가진 자는 이것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 때 당기지만, 사용하고 나면 늦추어 둔다. 활이라고 하는 것은 어제나 당긴 상태로 두면 부러져서 막상 필요할 때 쓸모가 없게 된다. 인가 취할 자세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근엄해야 한다는 데에만 마음을 쓰고 때로는 편안한 마음으로 논다는 기분이 없다면, 본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이 어지러워지거나 멍청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치를 알기 때문에 이 둘을 적당히 나누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제3권 Thaleia(탈레이아)

 

P.247

다레이오스가 그의 치세 동안에 측근인 그리스인을 불러서, 어느 정도의 돈을 받으면 죽은 아버지의 살을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들겠는가 물은 적이 있었다. 그리스인은 제아무리 많은 돈을 받아도 그와 같은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다레이오스는 이번에는 칼라티아이인이라고 하는, 부모의 고기를 먹는 관습이 있는 인도의 부족을 불렀다. 그리고 앞서의 그리스인을 입회시켜, 통역을 통해서 그들도 대화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해놓고, 어느 정도의 돈을 받으면 죽은 아버지를 화장하는 데에 동의하는가 하고 그 인도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칼라티아이인들은 큰소리로 왕에게 말을 삼가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관습의 힘은 이와 같은 것으로, 나로서는 필다로스가 ‘관습이야말로 만물의 왕’이라고 노래한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P. 271

소란도 진정되고 5일이 지났을 때, 마고스들에게 반기를 든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이 대해 회의를 열었다. 이 석상에서 말한 여러 가지 논의를 일부 그리스인들은 믿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그와 같은 논의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오타네스는 페르시아인 전체에게 국사의 처리를 맡겨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독재자가 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좋은 일도 아니므로, 이제 그와 같은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오. 여러분은 캄비세스 왕이 어떻게 포악한 정치를 했는지 알고 있고, 또 마고스의 폭정도 몸소 겪었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독재제가 어떻게 질서 있는 나라의 체제가 될 수 있단 말이오? 이러한 정체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조차도 한번 군주의 자리에 앉으면 이전의 마음은 잊어버리고 마오. 현재의 영화로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때문인데, 여기에 또 타고난 질투심이라는 것이 있소. 이 두 가지 약점 때문에 독재자는 갖는 악덕을 몸에 지니게 되는 것이오. 다시 말해 그에게 각가지 비행이 생기게 되는 것은, 하나는 영화에 싫증이 나서 교만한 마음을 품기 때문이고, 다른 하는 질투심이 저지른 결과. 본디 독재자는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지니게 되므로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 따위는 가질 리가 없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의 국민에 대한 태도는 그와는 정반대가 된다오. 그는 살아있는 한 요직에 있는 자들을 질투하고, 시민들 중 가장 천한 사람들을 즐겨 총애하고, 또 그 참소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소. 이 세상에 독재자보다도 그 말과 행동이 다른 자는 없소. 그는 적당히 칭찬하면 부족하다 화를 내고, 귀히 받들면 아첨꾼이라 해서 기분이 상했다 하니 말이오.

그런, 가장 중대한 일은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이오. 독재자란 조상 전래의 풍습을 파괴하고, 여자를 범하고, 재판을 거치지 않고 사람의 목숨을 빼앗소. 이에 반해 대중에 의한 통치는 먼저, 만민평등권이라는 아름다운 명목을 갖추고 있고, 다음으로는 독재자가 하는 것과 같은 일은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오. 직무의 관장은 추첨에 따르고, 관리는 책임을 가지고 직무에 임하며, 모든 국책은 공론에 의해 결정되오.

따라서 나로서는 독재제를 단념하고 대중의 주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의견을 여기에 제출하는 바요. 모든 일은 다수 의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오.”

오타네스가 이와 같은 의견을 만한 데 반하여, 메가비조스는 다나 일을 소수자의 통치(과두정치)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타네스가 독재제를 폐지한다고 하는 데에는 나도 전적으로 같은 의견이지만, 주권을 민중에게 밑기하고 하는 것은 최선의 견해라고 말할 수 없소. 아무런 쓸모가 없는 대중만큼 우열하고 교활한 자는 없소. 따라서 독재자의 학정을 벗어나려고 광폿한 민중의 손에 빠지는 일 따위는 절대로 참을 수 있는 결과가 아니오. 한쪽은 일을 행할 때 행하는 까닭을 스스로 알지만, 다른 쪽은 그와 같은 자각조차도 없소. 무엇이 정당한가를 배운 일도 없고 스스로 깨닫는 능력이 없는 자가 어떻게 그와 같은 자각을 할 수 있겠고? 마치 세차게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턱대고 나라 일을 밀고 갈 뿐이오. 따라서 페르시아에 해를 끼치려는 마음을 품은 사람은 민주정치를 위하면 될 것이요. 그러나 우리는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주권을 부여합시다. 우리 자신도 그 안데 들 것이고, 가장 뛰어난 정책이 가장 뛰어난 인간에 의해 실시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니오.”

메가비조스가 이렇게 말하자 세 번째로 다레이옷가 자기 생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메가비조스가 대중에 대해서 한 말은 옳다고 생각하지만, 과두 정치에 대한 발언에는 동의할 수 없소. 즉, 여기에 제기된 세 가지 체제-민주제, 과두제, 독재제가 각기 가장 좋은 모습에 있다고 할 때, 나는 마지막 것이 다른 둘보다도 훨씬 뛰어나다고 단언하는 바요. 가장 뛰어난 단 한 사람의 통치보다도 뛰어난 체제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오. 그와 같은 인물이라면 그의 탁월한 식견을 발휘해서 민중을 훌륭하게 통치할 것이고, 또 적에 대한 모략도 이와 같은 체제하에서 그 비밀이 가장 잘 유지될 것이오.

그러나, 과두제에서는 공익을 위해 공적을 오리려고 하는 몇몇 사람들 사이에 자칫 개인적인 격렬한 적대관계가 생기기 쉽소. 저마다 자기가 수뇌자가 되어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고 하는 나머지 서로 반목하게 되고 거기에서 내분이 생기고, 내분은 유혈을 부르고 유혈을 거쳐 독재제에 이르게 되오. 이것으로 보아도 독재제가 가장 좋다는 것을 알 수가 있소.

한편 민주제에서는 악의 만연을 피하기가 어렵소. 공공의 일에 악이 만연될 경우, 악인들 사이에 생기는 것은 적대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강력한 우애감인데, 그도 그럴 것이 국가에 나쁜 일을 꾸미는 자들은 결탁해서 이를 행하기 때문이오. 이와 같은 사태가 일어나면 결국 누군가가 국민의 선두에 서서 악인들은 처치하게 되오. 그 결과, 그 자가 국민이 찬미하는 대상이 되어 마침내는 독재자로서 숭배를 받게 될 것이오. 이런 사례를 보아서도 독재제가 최고의 정체라는 것은 분명하지 않소?

이것은 요컨대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자유는 도대체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가, 누가 주는가요, 민중으로부터인가, 과두제로부터인가, 그렇지 않으면 조재제로부터인가. 따라서 내 견해는, 우리는 단 한 인물에 의해서 자유의 몸이 된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이 체제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은 별도로 치고라도 이 훌륭한 조상 전래의 관슴을 파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그러한 일을 해서 좋았던 적은 없었소.”

위와 같은 세 가지 의견이 나왔는데, 7명 중 네 사람이 마지막 설에 가담하였다.

 

제5권 Terpsichore(테릅시코레)

 

P. 435(식민정책)

내가 생각하기에 클레이스테네스는 그의 모계 쪽 조부이자 시키온의 독재자였던 클레이스테네스의 정책을 모방했을 것이다. 이 클레이스테네스는 아르고스와 싸울 ?때 먼저 시키온에서 서사시 경연을 못하게 했다. 호메러스의 시에서는 아르고스인과 아르고서의 도시가 찬미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싴온의 아고라에는 타라옷으의 아들 아드라스토스의 영웅 묘가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현존하는데 클레이스테네스는 아드라스토스가 아르고서의 영웅이란 이유로 자국에서 말살하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델포이로 가 아드라스토(의 신앙)을 폐기해도 좋은지 신탁을 청했다. 그런데 델포이의 무녀는 이런 신탁을 내렸다.

“아드라스토스야말로 시키온의 왕, 하지만 그대는 단지 학살자가 아닌가?”

신의 허락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클레이스테네스는 귀국해서 아드라스토스(의 영)을 자발적으로 물러가게 할 방책이 없을까 생각에 잠겼다. 드디어 그 방책을 발견했다고 믿은 그는 보이오티아의 테베로 사자를 보내 아스타코스의 아들인 영웅 멜라니포스(의 영)을 시키온에 맞아들이고 싶다는 뜻을 전하게 했다 이 요청을 테베인이 승낙했기 때문에, 클레이스테네스는 시공회당의 구내에 신역을 정해 가장 견고한 곳에 메라니포스의 영을 모신 것이다. 여기에서 빠뜨리면 안 될 점이 있다. 클레이스테네스가 메라니포스의 영을 모셔온 이유는, 이 영웅이 아드라스토스의 형제 메키스테우스와 그의 사위였던 티테우스를 살해한 인물로 아드라스토스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멜라니포스의 성역을 정하자 이제까지 아드라스토스에게 바치던 희생과 축제를 멜라니포스에게로 옮기고 말았다.

시키온인이 아드라스토스를 숭배하는 마음은 예로부터 매우 깊었다. 이 나라는 본디 폴리보스의 영토이고 아드라스토스의 외손자였다. 폴리보스에게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죽기 전에 왕위를 아드라스토스에게 넘긴 것이다. 시키온인이 아드라스토스를 숭배해서 행한 수많은 행사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은, 그의 수난을 기념해 비극적 가무를 상연한 것이다. 즉 여기에서는 아드라스토스가 디오니소스를 대신해 숭배된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이 가무 상연을 다시 디오니소스의 축제로 돌리고, 나머지 희생과 축제는 모두 메라니포스에게올렸던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또 도리스족의 부락 이름을 바꾸었다. 시키온과 아르고스에서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때 클레이스테네스의 처사는 시키온 인을 매우 모욕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속하는 부족을 뺀 나머지 부족에게는 돼지(히스), 당나귀(오노스), 돼지새끼(코이로스) 등의 말을 단지 어미만 바꾸어 히아타이(돼지족), 오네아타이(당나귀족), 코이레아타이(돼지새끼족)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부족에게는 자기가 지배자라는 것에 연관을 지어 아프켈라오이(지배족)란 이름을 붙였다.

시키온에서는 이들 부족의 이름이 클레이스테네스가 통치한 기간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사후에도 60년간에 걸쳐서 쓰였다. 그 뒤 시민들이 협의한 결과 힐레이스, 팜필로이, 디마니타이로 각각 이름을 바꾸고 네 번째 부족의 이름은 아드라스토스의 아들 아이기알레우스의 이름을 따 아이기알레이스로 했다.

시키온에서 클레이스테네스가 한 일은 이와 같다. 그런데 그의 외손자이고 그와 이름이 같았던 아테네의 클레이스테네스도 이오니아인을 경명하는 미음에서 아테네와 이오니아에서 같은 부족이 존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외할아버지의 정책을 모방한 것같다. 왜냐하면 클레이스테네스는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평민을 이때가 되어 완전히 자파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자 부족 이름을 바꾸고 더욱 그 수를 늘린 것이다. 즉 종래 4명이었던 부족장을 10명으로 늘리고 구를 10개 군으로 나누어 부족에게 각각 배분했다. 이렇게 평민을 자기편으로 만든 클레이스테네스는 반대파보다 훨씬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P.446(코린토스인의 독재반대 연설)

이들 계시를 손에 넣은 스파르타인은 아테네가 날로 강대해져 이젠 스파르타의 뜻에 따르지 않으려는 것을 보았다. 아티카민족은 독재체제 하에 묶여 있는 한 무력하여 잘 따르는데 해방되는 바로 스파르타민족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스파르타인은 헬레스폰토스의 시게이온으로 사자를 보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를 소환했다. 히피아스가 소환에 응해 스파르타로 오자 스파르타인은 다른 동맹 제구의 사절까지도 초청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동맹제국 여러분, 우리 스파르타가 취한 정책이 타당하지 않았음을 인정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거짓 계시에 놀아나 우리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이고 아테네를 우리 지배하에 두는 것을 약속해준 인물을 그 조국에서 추방해 결과적으로 아테네를 배은망덕한 미중의 손에 맡겨버리고 마았기 때문이오. 아테네국민은 우리의 힘으로 해방되어 억눌렸던 고개를 겨우 쳐들 수 있게 되자, 괘씸하게도 우리 군과 왕을 추방했소. 그 때문에 그 명성은 올라가소 그 세력은 더욱 더 강대해지고 있소. 그것은 아테네의 이웃인 보이오티아 및 칼키스가 뼈져리게 느낀 것인데, 그 밖에도 또 자신의 오산을 깨닫게 될 나라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오. 우리는 위와 같은 과오를 범했으므로 이제부터는 여러분과 힘을 합쳐 이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소. 여기에 계신 히피아스, 또 제국의 대표인 여러분을 모신 것은 그 때문이오. 우리 연합군을 편성하고 공동의 작전을 세워 히피아스를 아테네로 복귀시키고, 그가 빼앗긴 것을 우리의 손으로 되찾아 줍시다.”

그러나 동맹제국 대표의 대부분은 스파르타의 제안에 찬성하지 않았다. 달느 대표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오직 한 사람, 코린토스의 소클레스만이 아래와 같은 발언을 했다.

“정말로 천지가 뒤바뀌어 하늘이 지하로 숨고 땅이 하늘에 걸릴지 뉘 알겠소. 또 인간이 바다 속에 살고 물고기가 땅으로 올라올지도 모르겠소. 스파르타 여러분이여, 만일 그대들이 만민 동권의 원칙을 파기하고 그리스 국가들에 독재제를 펴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이처럼 부당하고 잔인한 행위는 없을 것이오. 국가의 정치는 독재제가 좋다고 진실로 생각하신다면 귀국이 솔선해서 자국 내에 독재자를 세우고, 그런 연후에 다른 나라에게도 또같이 시도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오. 독재정치의 경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스파르타에 그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엄중하게 경계를 하고 있는 귀국이, 부당하게도 동맹국에 그것을 시행하려 하다니요. 만일 귀국이 우리처럼 독재제의 경험이 있다면 이 체제에 대해서 지금보다 더욱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이오.

( 중략- 코린토스의 국가체제 및 과거의 예를 들어 독제재의 폐해 강조)

아시겠소, 스파르타 여러분? 독재 정치란 이런 것이오. 독재자가 하는 일이란 이런 짓이오. 우리 코린토스인은 처음에 귀국이 히피아스를 불렀다는 소식에 크게 놀랐소. 그러나 지금 그대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더욱 놀랐소. 그리스의 신에게 맹세코 말하는데, 그리스의 나라들에게 독재제를 펼 생각일랑 아예 생각도 마시오. 그래도 그대들은 정의로 돌아가 히피아스의 복귀를 굳이 시도할 생각이오? 다른 나라는 몰라도 코린토스는 귀국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을 것임을 명심히 주길 바라오.”

코린토스의 사절 소클레스는 위와 같이 말했다. 이에 대해서 히피아스는 소클레스가 외친 것과 같은 신들의 이름을 외치고 그에게 응수해, 아테네에 의해서 고배를 마실 숙명의 날이 도래했을 때 코린토스야말로 어느 나라보다도 페이시스트라토스 일족의 실각을 아쉬워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히피아스란 사내는 신탁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정확한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응수하 것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침묵을 지켰던 다른 동맹국의 사절들이 소클레스가 아무 거리낌 없이 논하는 것을 듣자 한 사람도 남김없이 발언을 해 소클레스를 지지했다. 그리고 스파르타에 대해서 자신들은 그리스의 어느 도시에도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일은 단연코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제6권 Erato(에라토)

 

P.466

한편 키오스인은 야망이 좌절된 히스티아이오스를 그 자신의 희망에 따라서 밀레토스로 귀국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밀레토스인은 아리스타고라스의 전제로부터 겨우 해방되어 안도하던 차였다. 한번 자유의 진가를 알게 된 이상 아시 다른 독재자를 맞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히스티아이오스가 야음을 틈타 밀레토스로 복귀를 강행하려고 했을 때, 어느 밀레토스인이 그의 허벅지에 부상을 입혔다.

 

 

제7권 Polymnia(폴림니아)

 

P. 539(히스타스페스의 아들 아르타바노스의 크세르크세스에의 진언 중)

.... 그리스 원정을 반대하는 의견제시 후

이렇게 말씀드리는 까닭은, 충분히 고려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조심스럽게 생각하여 계획을 잘 세운 자는 설사 일이 생각대로 잘 진행되지 않고 불운 탓으로 그 계획이 좌정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아리 때문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섣부른 계획만으로 실행한 자는, 일이 운좋게 성사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주운 것이 나 같기 때문에 준비가 충실치 못했음을 부끄러워 할 것입니다.

전하계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둥물 중에서 신의 번개에 맞아 죽는 것은 오직 눈에 띄게 큰 것들뿐입니다. 신께서는 그렇게 해서 그들이 지나치게 우쭐거리지 않도록 하십니다(작은 동물은 신께 불손한 행위를 조금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집이나 나무들도 번개를 맞는 것은 언제 가장 큰 것 들 뿐이므로, 뛰어난 것을 깎아내리는 것이 신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대군이 얼마 안 되는 군대에게 패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예컨대 신께서 대부대의 위세를 질투하여 병사들의 마음에 공포감을 불어넣거나 천둥을 울려 위협하시면, 아무리 대군이라 할지라도 여지없이 궤멸되고 맙니다. 신께서는 그분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교만한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무슨 일이든 성급히 일을 처리하면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실패로 우리는 커다란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참고 견디는 데 복이 있습니다. 그러한 복덕은 곧 나타나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깨닫게 됩니다.

P.627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장군과 300)

레오니다스는 아들이 있는 자들 중에서만 친히 선발한 전통의 ‘3백인대’를 이끌고 테르모필라이로 왔다. 또한 앞서 내가 그리스군의 병력수를 거론할 때 언급했던 테베군도 이끌고 왔는데, 테베군의 지휘자는 에우리마코스의 아들 레온티아데스였다. 레오니다스가 그리스 제국 중에서 특히 테베 부대를 이끌고 오는 일에 열의를 보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테베인의 친 페르시아적인 태도에 강한 의혹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과연 테베가 다른 나라와 함께 군대를 파견할 것인지, 아니면 드러내 놓고 그리스 제국간의 동맹 관계에서 이탈할 것인지를 이번 일로 알아보려 했다. 그리고 테베는 딴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병력을 보냈던 것이다. 스타르타가 페오니다스 휘하 부대를 먼저 파견한 것을 그를 통해 다른 동맹 제국의 출격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스파르타가 머뭇거리고 있음을 다른 동맹국들이 알게 되다면 그들도 페르시아 측에 가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태를 미리 막으려 했던 것이다. 스파르타에서는 카르네이아 제가 출진을 방해하고 있어, 이 제례 행사가 끝난 뒤 수비대만 스파르타에 남겨 둔 채 전 병력을 동원하여 서둘러 구원하러 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다른 동맹 제국도 스파르타와 비슷한 행동을 위하려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올림피아 제례가 이 사태와 겹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리스 제국은 테르모필라이 전투가 그렇게 빨리 결정될 줄 모르고 선발 부대만 보냈던 것이다. 한편 테르모필라이의 그리스군은 페르시아 왕의 군대가 점점 산마루 쪽으로 접근해 오자, 갑자기 겁을 집어먹고 회의를 열러 철수를 논의 했다. 스파르타를 제외한 다른 펠로폰네소스군은 펠로폰네소스로 철수하여 지협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포키스인과 로크리스인이 이 의견에 분노를 표시하자, 레오니다스는 이곳에 머무르는 동시에 그리스의 모든 도시에 사자를 보내 현재의 병력을 가지고는 도저히 페르시아군을 격퇴하기 어렵다는 실정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스군이 한창 협의를 거듭하고 있을 때,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군의 병력 수와 그 의도를 탐색키 위해 척후 기명 한 병을 보냈다. 그는 이미 테살리아에 있을 때 이곳에 소병력의 부대가 집결해 있다는 것과, 그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헤라클레스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레오니다스 휘하에 있는 스파르타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기마병은 진지로 다가가 낱낱이 살펴보았지만 그리스군의 진지 전체를 볼 수는 없었다. 배치된 부대가 그리스군이 복구한 성벽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척후병은 단지 성벽 앞쪽에 포진해 있는 부대의 동정만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성벽 바깥에 배치되어 있던 부대는 스파르타군이였는데, 마침 병사들이 웃통을 벗어 던지고 운동을 하거나 머리를 빗고 있었다. 척후병은 이 모습을 바라보고 기이하게 생각하며, 그 부대의 병력 수와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을 빠짐없이 조사한 뒤 무사히 되돌아 갔다. 그를 추격하려는 자도, 그에게 주목하는 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귀환하자마자 자신이 보고 온 바를 낱낱이 크세르크세스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를 들은 크세르크세스는 그 진의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스파르타군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을 눈앞에 두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에게는 스파르타인들의 행동이 가소롭게만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크세르크세스는 스파르타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어, 그의 진중에 있던 아리스톤의 아들 데마라토스를 불러 척후변의 보고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나 데마라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 원정을 시작할 무렵 이미 전하께 이자들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번 작전의 결과에 대한 견해를 말씀드렸을 때, 전하께서는 그 말을 듣고 비웃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전하, 전하의 어전에서는 언제나 진실을 말씀드리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저의 임무이오니, 부디 다시 한 번 더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저자들은 이 진입로를 지키기 위해 왔기 때문에 그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생사를 건 모험을 시도하기 전에 머리칼을 손질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전하, 만약 전하께서 이자드로가 아직 스파르타 본국에 머물러 있는 나머지 부대를 격파하면, 전하의 진격로 앞에서 저항할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하께서 맞이하는 상대야말로 그리스의 수많은 나라 중에서 가장 훌륭한 나라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용감한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는 이러한 데마라토스의 말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스파르타군이 그러한 소수의 병력으로 어떻게 자신의 군대와 싸울 수 있겠냐고 거듭 물었다. 그러자 데마라토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전하, 만일 한 가지라도 제가 말씀드린 대로 되지 않는다면 저는 거짓말쟁이로 취급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데마라토스가 이렇게 말했음에도 크세르크세스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크세르크세스는 4일을 기다리며, 그동안 끊임없이 그리스 부대가 도주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5일째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철수하지 않자 크세르크세스느 그들이 건방지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 생각하고, 노여움을 터뜨리며 메디아이노가 키시아인 부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여 자기 앞으로 생포해 오라 명했다. 메디아군이 공격을 가해 오자 스파르타군은 많은 전사자를 냈지만 차례로 신병으로 교체하며 후퇴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페르시아 왕에세는 실로 병력 수는 많더라도 참된 병사는 매우 적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 전투는 온종일 계속됐다. 메디아인 부대가 호된 곤욕을 치르고 마침내 후퇴하자 이번에는 페르시아인 부대가 대신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이 부대는 페르시아 왕이 늘 불사부대(아타나토이)라 부르던 부대로, 히다르네스가 지휘를 맡고 있었다. 이 부대라면 쉽사리 그들을 격퇴하리라 확신했지만, 이 부대조차 그리스군과 접전하게 되자 메디아인 부대 이상의 전과를 거둘 수 없었다. 전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좁고 제한된 지역에서의 전투였고, 또한 페르시아군의 창은 그리스군의 창에 비해 짧았기 때문에 수적인 우세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편 스파르타인의 분전은 실로 후세에 전할 만한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스파르타인은 전투경험이 없는 적들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를 잘 알았다. 그들이 사용한 전법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적에게 등을 보이며 언뜻 패주하는 듯이 집단을 이루며 후퇴하는 것이었다. 페르시아 군은 적이 도주하자 함성과 말굽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추격해 갔다. 그러면 스파르타군은 적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적을 공격했다. 이 후퇴전술을 이용하여 스파르타군은 수많은 페르시아 병사를 쓰러뜨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그파르타군 또한 많은 전사자를 냈다. 페르시아 군은 관문 탈취를 시도하여 차례로 부대를 투입하고, 기타 모든 전법을 구사하면서 공격을 감행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공격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관전하던 페르시아 왕은 자군은 염려한 나머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세 번이나 벌떡 일어섰다고 한다.

다음날도 페르시아군은 조금도 전과를 올릴 수 없었다. 상대군 수가 적고 이미 많은 상처를 입었으니 이제 저항하지 못할 것이라 얕보고 돌격을 감행했지만, 그리스 측은 나라별로 진형을 갖춘 다음 교대로 싸웠다. 단 포키스인 부대만은 예외로, 샛길을 수비하기 위해 산중에 배치되어 있었다.

페르시아군은 상황이 전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되자 다시 후퇴했다.

페르시아와이 대책 마련이 고심하고 있을 때, 말리스 지방 출신 에우리데모스의 아들인 에피알테스가 왕을 찾아왔다. 그는 왕으로부터 막대한 포상을 받으리라 기대하여, 테르모필라이로 가는 샛길이 산속에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이 관문을 죽음을 무릅쓰고 지키던 그리스군이 파멸에 이르렀던 것이다. 후일담이지만 이자는 스파르타인의 보복이 두려워 테살리아로 도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보동맹 제국이 필라이의 연례 회의에 참석했을 때, 대의원회(필라고로이)는 이자의 목에 상금을 걸기로 결정하고 이것을 공표했다. 그 뒤 얼마쯤 세월이 흘러 에피알테스는 안티키라로 돌아왔다가 트라키스인 아타나데스에게 살해됐다. 아테나데스가 에피알테스를 살해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서술할 예정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깊은 경의를 표했다.

한편 다른 설에 따르면, 왕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페르시아군으로 하여금 산중으로 우회하도록 유도한 것은 바로 카리스토스인 파나고라스의 다르 오네테스와 안티키라의 주민 코리달로스 두 사람이었다 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것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 처음 설이 옳다고 주장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 인보동맹의 대의원회가 목에 상금을 건 것은 오네테스와 코리달로스가 아니라 트라키스인 에피알테스였다는 것이다. 대의원회는 이 일에 관해 가장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알다시피 에피알테스가 이 배반으로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도주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오네테스가 말리스 지방 출신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 지역에 여러 번 와보았다면 샛길에 대해 알 수도 있다. 그래도 샛길을 가르쳐 주려고 페르시아군을 산중으로 유도한 것은 에피알테스가 맞다. 그리하여 나는 배반자로 그의 이름을 기록에 남겨 둔다.

에피알테스의 제안에 크세르크세스는 크게 기뻐하며 곧 히다르네스와 그의 부대에 출동을 명했다. 그리하여 부대는 불을 켤 무렵에 진지를 떠났다. 이 샛길을 본디 이 분근에 거주하는 말리스인이 처음 발견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중에 이 길을 통해 테살리아인이 포키스군을 공격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포키스인이 성벽을 축조하여 진입로를 봉쇄하고 전화를 면하던 때의 일이었다. 그 뒤 오랜 새월에 걸쳐 이 샛길은 말리스인에 의해 쓸모없는 땅이 되어왔다.

이 샛길은 좁은 산골짜기를 지나며 흐르는 아소포스 강변에서 시작되는데, 이 산과 샛길은 똑같이 아노파이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아노파이아 샛길은 산등성이를 따라 계속 달려 말리스 측에서 가장 가까운 로크리스 도시인 아페노스 부근에서 끝난다. 그리고 흔히 ‘털투성이 엉덩이 사내의 바위’라 알려진 바위와 케르코페스의 거처가 있는 부근에서 가장 좁아진다.

페르시아인 부대는 아소포스 강을 건너 오른쪽으로 오이테 산맥을, 왼쪽으로 트라키스의 산악 지대를 바라보며 밤새 이 샛길로 행군했다. 그리고 날이 밝을 무렵 사등성이 가장 뫂은 부근에 이르렀다. 이미 말했듯이 바로 이 지점에서 포키스의 중무장병 1000명이 수비를 하고 있었다. 아래쪽 길은 앞서 말한 부대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키스인 부대는 스스고 이 산중의 샛길을 방어하겠다고 레오니다스에게 제안하고 그곳을 수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산은 온통 떡갈나무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에 페스시아군은 조금도 눈에 띄지 않고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바람이 없어 발밑에 깔린 나뭇잎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는 바람에, 놀란 포키스인들이 벌떡 일어나 무장을 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군은 무장을 갖춘 병사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적군이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는데, 한 부대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히다르네스는 이 포키스군이 스파르타인 부대는 아닌가 두려워하며 에피알테스에게 어느 나라 군대냐고 물었다. 그는 사실을 알게 되자 페르시아군에게 전투 태세를 갖추게 했다. 페르시아군이 소낙비처럼 화살을 쏘아 대자, 포키스 부대는 페르시아 군이 자기들을 목표로 공격하는 줄로 생각하고 재빨리 산정상으로 후퇴한 다음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에피알테스와 히다르네스의 휘하 페르시아군은 그들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은 채 전속력으로 산을 내려갔다.

한편 테르모필라이에 포진해 있던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운명을 읽은 점술사 메기스티아스로부터, 새벽과 함께 죽음이 찾아오고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리고 또한 투항자들로부터도 페르시아군이 우회 작전을 펴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날이 밝자마자 마지막으로 고지로부터 달려 내려온 경계병들이 소식을 가져왔다. 이에 그리스군은 곧 토의에 들어갔는데,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한쪽은 전선을 떠나서는 안 된다 주장했고, 다른 한쪽은 이 주장에 맞섰다. 결국 부대를 해체하기로 결의하고 일부는 별로 철수하여 각가가 귀국길에 올랐고, 나머지 부대는 레오니다스와 함께 이곳에 머무를 준비를 했다.

그들을 살리고 싶다는 레오니다스의 배려가 그들을 철수 시켰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레오니다스와 현지 스파르타인 부대만은 그곳의 수비를 위해 전선을 지켜야 했다. 나도 이설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레오니다스는 동맹군들에게 싸울 의사도, 끈까지 자신들과 생가를 같이 할 뜻도 없음을 간타하고 그들에게 철수를 명했을 것이다. 그리고 명예를 위해서라도 자신은 이 땅에 남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이 땅에 머무른다면 그 영예는 만세에 길이 전해질 것이며 스파르타도 그 번영을 계속하리하고 믿었던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전쟁의 발발 초기에 스파르타인이 전쟁에 대해서 신탁을 구했을 때, 델포이의 무녀가 스파르타의 국토가 이국군에 의해 유린되든지 그렇지 않으며 스파르타의 왕이 살해되든지 어트 한쪽으로 끝나게 되리라 예언했기 때문이다. 무녀가 육각운의 운율로 스파르타인에게 내린 신탁은 아래와 같다.

오, 광활한 스파르타의 주민들아, 너희의 운명을 들으라.

너희의 명예롭고 커다란 도시가

페르세우스의 후예들에 의해 약탈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헤라클레스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의 죽음을 라케다이몬 온 국토가 애도하게 되리라.

공격해 오는 자는 제우스의 힘을 지니고 있나니

황소의 힘, 사자의 힘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에 맞설 수 없으리라.

적이 그 둘 중 어느 하나를 먹을 때까지는

그 세력을 막을 수 없으리라.

(중략)

크세르크세스는 아침이 되자 떠오르는 해를 향해 헌주의 예를 행했다. 그러고 나서 시장에 사람들이 들끓을 시각이 될 때까지 잠시 여유를 둔 뒤 사에서 내려가는 길을 택해 공격을 개시했다. 여기에는 에피알테스의 조언디 있었다. 사에서 내려가는 길 쪽은 멀리 돌아가는 당반로에 비해 시간도 훨씬 덜걸렸고 거리도 짧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크세르크세스 휘하의 페르시아군이 전진하자,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그리스군은 죽음의 길로 떠날 각오를 하고 도로의 폭이 넓어지는 지점까지 출격했다. 지난 수일 동안은 서벽 수비에 주력했기 때문에 좁은 지점으로 물러나서 싸웠지만, 이때는 넓은 지역으로 나와 맞섰던 것이다. 페르시아군의 전사자 수는 다수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부대장들이 그들 뒤에서 닥치는 대로 채찍으로 내려치면서 앞으로 몰아 댔기 때문이다. 바다 속에 떨어져 죽는 자도 적지 않았지만, 산 채로 자기 동료들의 발에 짓밟혀 죽는 자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은 자들을 둘아불 여우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산지를 우회해 오고있는 부대에 의해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잘 알고 있던 그리스군이 페르시아군을 맞아 죽을 각오로 싸웠기 때문이다.

이 부렵에 그리스군의 창은 대부분 이미 부러져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칼을 휘두르며 페르시아군을 쓰러뜨렸다. 레어니다스는 이 격전의 와중에서 실로 용감하게 싸우다가 쓰러졌고, 다른 이름있는 스파르타인들도 그와 운명을 같이 했다. 나는 용명을 휘날린 이들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다. 나아가 전군 300명의 이름도 들어 알고 있다.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이름 있는 인물도 여럿 전사했는데, 그 중에는 다레이오스의 두 아들 아브로코메스와 히페란테스도 끼여 있었다. 이 두 사람 은 아르타네스의 딸 프라타구네와 다레이오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르타네스는 다레이오스왕은 동생으로, 아버지는 하스타스페스, 할아버지는 아르사메스였다. 이 아르타네스는 자신의 유일한 자식을 다레이오스에게 시집보낼 때 재산을 모두 주어 보냈었다.

한편 레오니다스의 유체를 둘러싸고 페르시아와 스타르타 두 군 사이에서 격전이 계속되었다. 그리스군은 네 차례에 걸쳐 적을 격퇴하고 마침내 유체를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이 격전은 에피알테스가 이끈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새로운 부대가 도착하자 전투 양상이 바뀌었다. 그리스군은 재차 좁은 지대로 퇴각하여 성벽 너머에 있는 작은 언덕에 이르렀다. 여기서 테베인 부대를 제외하고 모두 한덩어리로 진을 쳤다. 언덕은 도로 입구 부근에 있었다. 현재 언덕 위에는 레오니다스를 기념하여 세운 석조 사자상이 서 있다. 그리스 군은 여기에서 아직 손에 단건을 든 자는 단검으로, 무기가 없는 자는 손과 이빨로 싸웠다. 페르시아군이 이곳에 활살을 소낙비같이 퍼부어 대며 주력 부대는 앞쪽에서 무너진 성벽을 넘어 공격해 오고 우회 부대는 사바에서 포위 공격해 올때까지, 그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다.

스파르타와 테스피아이 두 부대의 분전은 참으로 눈부신 것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스파르타인 디에네케스의 용맹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리스 군이 메디아군과 교전하기 전의 일인데, 그는 어느 트라니스인으로부터 페르시아군이 화살을 쏠 때는 그 수가 하도 많아 태양이 가려질 정도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트라키스에서 온 손님이여, 그대는 우리에게 즐거운 소식을 전해 주었소. 메디아군이 태양을 가려 준다면 우리는 그늘에서 까울 수 있지 않겠소.”

스파르타인 디에네케스는 이 밖에도 이와 비슷한 몇 가지 말을 후세에 남겼다고 전해진다. 디에네케스 다음으로 그 무용을 과시한 것을 오르시판토스를 아버지로 하는 스파르타의 두 형제 알페오스와 마론이었다. 그리고 테스피아이인으로서는 하르마티데스의 아들 디티람보스가 가장 용명을 떨쳤다.

페르시아군과 싸우다가 전사함 자들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명이 새겨져 있다.

일찍이 이 땅에서 300만 명의 군대와 맞서 싸운

필로폰네소스 4000명의 병사

이 비명은 모든 군대를 위해 새겨진 것이고, 한편 스파르타군만을 위한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여행자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들의 명을 수행하고 여기에 누워 있다고.

(중략)

테르모필라이에서 그리스군은 이렇게 페르시아군에 맞서 분전했다.

 

제8권 Urania(우라니아)

 

P.704(페르시아와 스파르타 사절에 대한 자유를 중시하는 아테네인의 답변)

-페르시아 사절의 메시지

마르도니오시의 명을 받은 아민타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아테네에 도착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테네인 여러분, 마르도니오스가 보낸 전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게 왕으로부터 지시가 있었소. 왕께서는 아테네인이 저지른 과실은 모두 용서하기로 했다면서 내게 다음과 같이 하라고 하셨소.

아테네인에게는 그 국토를 반환하고 그에 덧붙여 그들이 원하는 지역을 선정케 하여 그들을 독립국으로 대우하라 하셨소. 또한 아테네인에게 평화협정을 맺을 의사가 있을 경우에는 그 분이 불태워 버린 신역을 모두 재건해 주라 하셨오. 이러한 지시가 있었으므로 나로서는귀국에 다른 뜻이 없는 한 명령대로 실행할 수밖에 없소. 내가 귀국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오. 대체 무슨 까닭으로 대왕에게 싸움을 거는 미친 짓을 하는 것이오? 귀국은 대왕을 이길 승산이 없고, 또한 언제까지나 버틸 수도 없을 것이오. 크세르크세스왕이 거느리는 군대의 규모와 활동상은 그대들이 직접 목격한 바이고, 내 휘하의 병력도 그대들이 알고 있는 바 그대로요. 그렇다면 설사 귀국이 우리 군대를 쳐부수고 승리를 거둔다고 가정하더라고-적어도 그대들에게 양식이 있다면 그러한 희망은 가지지는 않을 것이지만-지금보다 몇 배 더 되는 새로운 군대가 나타날 것이오. 그러니 대왕에게 저항하여 국토를 빼앗기거나, 나라의 흥망을 거는 위험한 승부를 내려는 마음은 먹지 말고 강화하도록 하시오. 대왕이 위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귀국은 가장 유리한 강화를 맺을 수 있소. 귀국은 이제 모든 기만과 술책을 버리고 우리 나라와 동맹을 맺고 독립을 유지해야 할 것이오.’

아테네인 여러분, 마르도니오스는 위와 같이 그대들에게 고하라고 내게 명했소. 나로서는 귀국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우호적인 감정을 여기서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것은 여러분들이 이미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오. 나는 다만 그대들에게 부디 마르도니오스의 제안을 따르기를 부탁하오. 내가 보기로 귀국에는 크세르크세스 전하와 오랜 싸움을 계속할 힘이 없소. 본디 귀국에 그러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가지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오. 페르시아 왕이 가진 힘은 인간의 정도를 훨씬 넘는 것이며, 그 팔의 길이도 심사치 않소. 만약 저쪽에서 매우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고 화의를 맺으려 하는데 귀국이 즉각 화평을 강구하려 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귀국을 위해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왜냐하면 귀국의 국토는 동맹 제국 중에서 가장 적군이 공격해오기 쉽고, 또한 두 진영 사이에 끼여 알맞은 전쟁터가 되는 장소에 국토가 놓여 있기 때문이오. 귀국은 언제 피해만 입게 될 것이오.

부디 내가 이야기 하는대로 따라 주기 바라오. 적어도 페르시아 대왕이 그리스 제국 중에서 귀국에 대해서만은 이때까지의 잘못을 용서하고 우의를 맺자 제안했다면, 결코 이를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오.”

알렉산드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에 앞서, 알렉산드로스가 아테네와 페르시아를 화해시키기 위해 아테네에 왔다는 것을 안 스파르타인들은 자신들이 다른 도리스인들과 함께 페르시아와 아테네 때문에 펠로폰네소스로부터 추방될 운명에 있다고 예언했던 신탁을 떠올렸다. 그래서 아테네가 페르시아 왕과 화의를 맺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즉각 아테네에 사절을 보내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아테네인은 두 나라 사절의 접견이 동시에 행해지도록 했다. 왜냐하면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평화 교섭을 위해 사절이 왔다는 것을 스파르타 측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면 급히 사절을 파견하리라 예상하고, 이를 기다려 시간을 지연시키려 했다. 아테네인은 자국의 견해를 스파르타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고의로 그런 행동을 취했던 것이다.

(스타르타 사절단의 메시지)

알렉산드로스가 입을 닫자, 그 뒤를 이어 스파르타 사절단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스파르타의 명을 받아, 귀국이 온 그리스를 배반하는 그러한 행동을 결코 취하지 말아 달라 요청하기 위해 왔소. 그러한 행위는 귀국이외의 다른 그리스 제국이 하더라도 물론 도리에 어긋나고 불명예스런 일이지만, 어느 나라보다도 특히 귀국에게는 더욱 그러하오. 본디 우리는 이번 전쟁을 바라지 않았는데 귀국이 도발한 것이며, 싸움 동기는 귀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였소, 그것이 그리스 전역에 파급된 것이오. 설사 이러한 일들은 모두 묻어 두더라도, 예로부터 종종 해방자로서 알려져 있는 귀국 아테네가 그리스를 노예화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서 작용한다면 그것은 우리로서는 참기 어려운 일일 것이오. 물론 우리도 귀국이 두 번씩이나 수확물을ㄹ 약탈당하고, 또한 장기간에 걸쳐 집과 재산이 파괴되는 어려운 처지에 빠진 걸 안타깝게 여기고 있소. 스파르타와 그 동맹 제국은 전쟁이 계속될 때까지 귀국의 부녀자와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가족들은 모두 부양하기로 약속하오. 부디 귀국이 마르도니오스의 제안을 그럴듯하게 꾸며 수락시키려 하는 마케도니아인 알렉산드로스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길 바라오. 그로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소. 독재자인 알레산드로스가 독재자 편에 드는 것은 당연하오. 그러나 귀국이 양식을 잃지 않는 한 저들에게는 신뢰도 진실도 존재하지 않음을 반드시 알으리라 믿소.”

(아테네의 답변)

스파르타 사절단이 이렇게 말하자, 아테네 측은 먼저 알렉산드로스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페르시아 왕에게 우리의 수배에 달하는 힘이 있음은 우리도 잘 알고 있으니 그렇게 되풀이 할 필요는 없소. 그러나 우리는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들로서, 힘이 닿는 데까지 방어할 작정이오. 따라서 그대가 페르시아 왕과의 강화를 설득하려고 애써 보았자 쓸데없소. 우리는 결코 그대에게 설득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오. 자, 마르도니오스에게 전하도록 하시오. 태양이 지금의 궤도를 달리는 한, 우리는 크세르크세스와 손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오.

반대로, 우리는 적왕이 한 번도 신중히 생각해 보지 않고 불태워 버린 신들이나 영웅들의 후원을 믿고, 그를 맞아 끝까지 항전할 생각이오. 그러니 이후로는 이러한 제안을 가지고 아테네인 앞에 나타나지 말도록 하시오. 또한 상대를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다 생각하면서 실은 그릇된 행동을 권유하는 그러한 짓을 하지 말기 바라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며 친구이기도 한 그대가 아테네인 때문에 불쾌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사태를 만들고 싶지 않으니 말이오.“

아테네인은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이렇게 답변하는 한편, 스파르타 사절단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나라가 페르사아 왕과 강화를 맺지 않을까 하고 스파르타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매우 당연한 인이오. 그렇지만 아테네인의 정신을 모르고 그대들이 그러한 의심을 품었다는 것은 실로 서운하오. 세계의 모든 황금을 가져와도, 또한 경관이 아름답고 비옥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을 옮겨와도, 우리가 공동의 적인 페르시아와 곤을 잡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더욱이 우리가 그렇게 하려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할 중대한 이유가 몇 가지 있소.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상과 신전이 불태워지고 파괴되어 이제는 잿더미가 되었다는 것이오. 우리는 이런 짓을 한 적에게 어떻게든 보복을 해야만 할 것인데, 하물며 그와 강화를 맺겠소? 두 번째로 우리는 모두 똑같이 그리스 민족이라는 점이오. 우리는 같은 피, 같은 언어를 가졌고 같은 신들을 모셔 같은 의식을 행하며 같은 양식으로 생활하고 있소. 그러므로 아테네인이 동포들을 적에게 팔아 넘긴다는 것을 절대 있을 수 없소. 지금이야말로 잘 알아 두시오. 아테네인이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는 한 결코 크세르크세스와 화친하는 일은 없으리란 점을.

그럼에도 재산과 집을 잃은 우리를 생각하여 우리 가족들 부양을 제의한 귀국의 호의는 실로 고맙기 짝이 없소. 호의는 감사하지만, 우리는 귀국에 신세를 지지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할 생각이오.

이것이 우리의 결심이니 먼저 하루 빨리 군대를 파견해 주기 바라오. 이국의 왕은 머지않아, 아니, 우리가 요구에 따르지 않는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곧 우리 국토로 침입해 올 것이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그가 도착하기에 앞서 우리가 보이오티아로 출격할 절호의 기회요.“

스파르타 사절단은 이러한 아테네 측의 회답을 듣고 스파르타로 돌아갔다.

IP *.196.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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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1 13:09:37 *.216.38.18

정나라님, <단군의 후예> 6기 하시느라 연구원 레이스 하시느라 정신이 없으시겠네요. 전 2기 연구언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단 한가지, 저자에 대한 부분의 인용 출처를 밝히시면 더 좋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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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1 17:51:06 *.187.211.82

뫼르소님,

관심 감사드립니다. 단군의 후예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보고

참 부지런한 분이시다 생각했었는데  여기서도 뵙게되네요 ^^

조언해주신 인용출처 보완해 놓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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