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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0일 11시 53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헤로도토스의 이름은 ‘헤라 여신이 보내준 사람’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것은 결혼기념일마다 밥퍼 목사님네 밥차에서 밥을 푸고, 전세를 살면서도 제3세계 아이들과 결연을 맺어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을 기르는 선행으로 유명한 정혜영씨 부부가 ‘하나님의 00’라는 뜻으로 ‘하’자 돌림자로 아이 넷의 이름을 짓는 것과 작명법이 비슷하다. 예은이, 예찬이도 사촌격의 이름이다. 헤로도토스 가족은 종교적으로 좀 특별했다고 추측한다.

 

그는 그리스 사람이다? 아니다! 올림픽에서 그리스 국기를 들고 나오는 단일국가 그리스는 1829년에 독립을 했다. 헤로도토스가 살았던 때 그 땅에는 여러 개의 도시국가가 있었다. 귀에 익은 이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런 도시국가 중 하나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서양전쟁의 이름, 페르시아전쟁과 펠로폰네소스전쟁이 이 지역에서 있었다. 펠로폰네소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간 전쟁이고, 페르시아전쟁은 침공해온 페르시아 대군과 이를테면 범그리스연합 간 전쟁이다. 헤로토토스 <역사>에서 페르시아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근육질 무사의 포스터 영화 <300>은 크세르크세스 왕의 페르시아 대군을 테살리아 지방의 페르모필레 협곡에서 물리치던 스파르타군의 이야기다. 그 영화의 배경이 된 시대가 헤르도토스가 살았던 시대와 얼추 비슷하다.

 

할리카르나소스에서 태어나 투리오이로 이주해 그곳 시민이 되었다는 점은 헤르도토스의 생애 가운데 핵심적인 사실인 듯 하다(<역사> 767쪽) 또 고대인이 알고 있던 것은 오히려 출생연도와 성년(활동 당시 40세)이었고, 페르시아 전쟁을 크세르크세스의 원정(기원전 480년)으로 본다면 헤르도토스 출생연도는 기원전 484년 정도라고 추정할 수 있다. 아버지 이름은 릭세스고 어머니 이름은 도리아인 귀족가문 출신이다. 종교적인 분위기가 강한 가족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헤로도토스는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전조나 신의 섭리를 믿고 있었다. 기원전 480년 경에 태어나서 40살 되었던 BC 440년 경에 이 책 <역사>를 서술하기 시작했다. 그는 역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나는 도대체 이 시대 개념이 실감이 안난다. 기원은 예수님이 태어난 걸 기준 삼는 달력이랬지. 그러니까 터번을 쓴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가 말구유에 누워 빵끗 웃던 사랑스런 아기 예수님을 배알했던 때보다 480년이나 전에 태어났다. 지금은 2012년이고, 밀레니엄 베이비는 2000년생이고 이 아이들이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된다. 국사 문제를 풀기 위해 외웠던 연도를 꿰어 맞춰본다. 을사보호조약은 1895년, 임진왜란은 15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은 1392년, 원나라가 쳐들어와서 고려 왕실이 강화도로 피신해서 대장경을 판 때는 1200년대이고, 고려건국 900년대, 오줌바다에 경주를 잠기게 하는 꿈을 꾼 김유신의 누이가 김춘추와 결혼했던 즈음 삼국통일은 668년이고, 스님인 오라버니와 함께 쪽배를 타고 왔던 불교 선교사 인도 여자가 가야로 가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청년 김수로왕을 만난 것은 가야 멸망이 500년대니까 그 이전의 일이다. 고주몽이 어머니께 “어머니, 저는 제 아버지를 찾아가겠습니다” 하직인사를 하고 나가 고구려를 세운 것은 거의 기원과 비슷하다. 내게 익은 BC 480년에서 440년 사이에 있었던 일은, 물건은 무엇일까? 어디서 이걸 찾아봐야할 지도 잘 모르겠는 나는 역사책을 잘 읽고 연표 보길 좋아하는 이한테 전화를 걸어 물어본다. 그 때 한반도는 철기시대란다. 고조선은 BC 108년에 멸망하고 한사군 설치되었고, BC 50몇년에 신라가 건국을 했다고 한다. 그 때 이 땅에는 나라가 없었겠다. 붉은 악마 응원 깃발에 그려지는 있는 천왕의 시대였을까? 어이쿠야 그럼 헤로도토스가 여행하면서 <역사>를 쓴 건 엄청나게 엄청나게 오래 전이구나. 우와 대단하다. 나는 운이 좋다면 우리집 여자들 평균수명을 고려할 때 팔십몇 살에 죽을 거고, 2500년을 살아 있는 나무는 없다. 그 때 만든 쇠로 된 화살촉과 그릇, 장신구 일부가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겠구나. 헤로도토스 시대에 바다 이 쪽에서 같이 있던 그릇 하나라도 알현하고 싶구나. 이렇게 따져보니, 그 오래 전 옛날에 10년 넘는 동안 이곳 저곳을 직접 다니면서 관찰하고 물어서 저술을 해서 긴 역사를 통해 전해진 이 책이, 이것을 저술한 이 할아버지가, 이런 계기를 통해 내가 읽을 수 있음이 소중하고 고맙다.

 

헤로도토스는 망명자이며 거의 만성적인 여행자였다고 한다. 외국어를 거의 몰랐기 때문에 그리스 세계 안에서 조사활동이 주요했었다. 그가 망명자, 여행자였기 때문에 타고난 것에 더 종교성이 더해졌다. 평범한 시민이라면 전통적인 가족종교(조상숭배)나 국가종교의 테두리 안에 머물며, 나아가서는 정치활동 동에 몰두하며 정신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테두리를 벗어난 사람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793) 또한 리스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정치기관에 출입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헤로도토스가 자세히 조사하고 견학한 것은 주로 신전이었고 여러 가지 설명을 들려준 이들도 신관들이었다. (794)

 

결혼을 몇 명의 여자와 했는지, 귀족이라는 것 말고 직업은 무엇이었는지,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 궁금하다. 책 뒷표지에 나와 있는 그의 흉상을 한참 들여다본다. 미간 가로주름이 선명하고, 좀 강직해 보이는 수염 기른 초로의 남자가 나를 본다. 그 시대 그리스에서는 책을 쓰면서 구술도 했다니 그를 찾아온 이들에게 이 책에 나오는 것에 대해 조용하지만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해 주고 있을 것 같다. 뒤에 에게해의 에메랄드빛의 바다가 있을 것 같다. 

 

나의 '저자에 대해서'는 다른 자료를 찾아보지 못하고 동서문화사 <헤로도토스 역사> 뒤의 해설에 의존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제 1권 클레이오 (Kleio)


전설 시대의 동서 항쟁


인간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망각되기 마련이다. 그리스인이나 이방인이 이룩한 위대하고 놀라운 갖가지 업적, 특히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게 되었는가에 대한 사정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갈 것이다. 이 책은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이 헤르도토스가 이 망각을 염려하여 직접 연구, 조사한 것을 적은 것이다. - 13


그 중에는 왕의 딸도 있었다....이것이 계기가 되어 갖가지 폭거가 행해지게 되었다. 즉 이 일이 있은 뒤,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지만 몇 명의 그리스인이 페니키아의 티로스에 침입하여 왕의 딸 에우로페를 납치해 간 것이다. (14)...여기까지는 서로 여자를 납치한 데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에는 그리스인 쪽에 크게 죄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유럽으로 진격하기에 앞서 아시아로 군을 진격했기 때문이다. (14)


리디아의 옛 역사


문 옆에 여자가 있는데 왕비는 몸에 지닌 것을 하나 벗어 그 위에 놓는다. 따라서 자네는 여유있게 바라볼 수가 있을 것이다. 왕비가 의자를 떠나 침대로 걸어가며 자네에게 등을 돌리면 그 때 왕비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서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17) ...마음속으로 칸다울레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모른 체 하고 있었다....앞으로는 칸다올레스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해서 그대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볼 수 없도록 말이다. 이와 같은 일을 꾸민 그분이나 나의 살결을 보는 용서할 수 없을 짓을 저지른 그대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18)...이리하여 기게스는 왕의 자리를 손에 넣었고, 그 지위는 델포이의 신탁에 의해 더욱 굳건해졌다. (19)

====>자기 아내를 자랑하고픈 칸다울레스와 기게스 이야기를 상상하다 나는 이런 영화 장면은 굉장히 에로틱한 침 꼴깍 장면이겠다 싶다. 아, 야한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이걸 읽으면 좋겠다. 그는 경솔했고 아내는 매우 대범했다.


먼저 논밭에 곡식이 여무는 시기를 골라 군세를 적의 영내로 진격시켰다. 플루트, 하프, 그리고 고음과 저음의 피리 소리 곡조에 맞추어 진격하였다. 밀레토스의 영토 내에 도착해 농지에 있는 오두막을 부수거나 불을 지르거나 문을 파괴하거나 하지 않고 모두 그대로 두었다. 다만 과수와 논밭의 곡물을 산산히 짓밟고는 철수하였다. 왜냐하면 밀레토인이 해상을 제압하고 있기 때문에 육군에 대한 봉쇄는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 20


크로이소스와 솔론


이들 여러 민족이 리디아에 병합되자 번영의 정점에 이른 사르데스로, 그리스의 현자들이 모두 번갈아 찾아왔다. 유명한 아테네 사람 솔론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솔론은 아테네 시민의 요청에 따라 법률을 제정한 뒤 여러 나라를 구경한다는 명목 하에 10년 동안 예정으로 외국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자기가 제정한 법률을 하나라도 폐기해야만 할 처지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 25


그대는 누군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소? - 25


하루라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크로이소스 왕이시여, 인간의 생애는 모두가 우연입니다. - 27


인간은 누군가가 죽을 때까지 행운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지언정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가 없는 법인데 될 수 있는 대로 부족한 것이 적은 상태로 지낼 수가 있고, 게다가 보람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 왕이시여,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마땅한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 28


크로이소스와 아드라스토스


크로이소스는 잠이 깬 뒤 혼자 곰곰이 생각하니 그 꿈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아내를 얻어주기로 하였다...무기류는 모두 남자 방에서 여자 방으로 옮겨 쌓아두게 하였다. 벽에 걸어두었다가 아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배려에서다. - 29


크로이소스와 신탁


나는 안다. 잔모래의 수도, 바다의 넓이도,

벙어리의 마음을 깨달으며, 말하지 않는 자의 소리를 듣는다. - 34


신탁은 모두 같은 대답을 하였다. 즉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로 출병하면 대제국을 멸망시키게 될 것이며, 그리스 중에 가장 강한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를 조사하여 이를 동맹국으로 하도록 권고한 것이다. - 36


크로이소스와 그리스


스파르타인은 테게아와 싸우면 언제나 지기 때문에 델포이에 사자를 보내어 어떠한 신의 비호를 받으면 테게아인을 무찌를 수 있을 지 신의 뜻을 물었다. 그러자 무녀는 아가멤논의 아들 오르스테스의 유골을 사파르타로 가지고 돌아가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탁을 내렸다.


선행중이란 스파르타의 시민으로 기사단을 그만두기로 되어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연장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러한 사람은 해마다 다섯 명씩 있었다. 그들은 기사를 그만두는 해의 1년동안 끊임없이 여러 방면으로 파견되어 스파르타의 국가에 봉사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다. - 46


크로이소스와 키루스의 대결


리디아 메디아 두 군은 다 같이 낮이 밤으로 변한 것을 보고 싸움을 그만 두도 할 수 없이 화평을 서두르기 시작하였다....화평의 서약을 하게 하고 혼인 교환을 하기로 정했다....협정이라고 하는 것은 혼인관계의 강력한 유대가 없고서는 좀처럼 견고하게 유지되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민족은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서약을 하고 더 나아가서 팔의 핍를 갈라 피를 낸 다음 서로 마셨던 것이다. - 51


크로이소스는 이전에 아테네 사람 솔론이 자기에게로 와서 자기의 재물을 모두 보고도 이러이러한 말을 하면서 전혀 감동하지 않았다는 것, 자기 신상은 솔론이 한 말 그대로 되었다는 것, 솔론은 자신의 일을 말했다고 하느니보다는 일반적인 인간사에 대해서 말한 것으로 특히 자기 멋대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에 대해서 말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 등을 이야기 하였다....키루스는  통역으로부터 크로이소스가 한 말을 듣고 마음이 변하였다. 자기도 같은 인간이면서 한때는 자기 못지 않게 부귀영화를 누린 한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워죽이려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 응보를 두려워하고 인간 세상의 무상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그는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꺼서 크로이소스와 아이들을 내려오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미 타오른 불길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 59


클로이소스가 눈물을 흘리며 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 때 맑게 개이고 바람 한 점 없던 하늘에서 갑자기 구름이 모여 폭풍우가 일어났다. 차축을 쓰러 내릴 정도로 비가 세차게 쏟아져 장작불은 꺼지고 말았다. - 60


메디아의 역사와 키루스의 성장


아시티아게스에게는 만다네라는 딸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는 이 딸이 오줌을 싸서 시중이 넘치고, 또 아시아 전토에 범람하는 꿈을 꾸었다....그런데 만네스가 캄비세스에게 시집을 간 첫해에 아스티아게스는 또 꿈을 꾸었다. 이 딸의 음부에서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자라 그 나무가 아시아 전토를 뒤덮는 꿈이었다. 그는 이미 임신 중인 딸을 페르시아에서 불러 엄중하게 감시하였다. 딸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를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마고스의 해몽가들이 그의 딸이 낳는 아이가 그를 대신해서 왕이 될 것이라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 71


소치기는 이 이야기를 듣고 어린아이를 안고 자기가 사는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소치기의 아내도 만삭의 몸으로 분만을 오늘 내일하고 있던 참인데 신의에 의해서였는지 마침 소치기가 도시로 나간 사이에 출산을 한 것이다. - 73


이 아이를 버린 증거를 보여야 한다면 이렇게 하세요. 나는 아이를 낳았지만 사산이었어요. 그러니 내 아이를 가져다 버리세요. 만다네 공주님의 아이는 우리 아이라고 해서 길러요. 그러면 당신도 주인님에게 나쁜 짓을 했다는 꼬리도 잡히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입장에서도 더 좋은 일이 있을 거에요. 왜냐하면 죽은 아이는 왕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장사 지낼 수도 있고, 살아 있는 아이의 목숨은 건질 수 있으니까 말이예요. - 74


임금님, 제가 이 아이에게 한 일은 정당한 일입니다. 마을의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때 저를 모두의 왕으로 만들었습니다. 모두 제가 왕이 되기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제가 명령한 일을 제대로 잘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말을 듣지 않고 모르는 체하고 있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제가 벌을 받아야 한다면 이렇게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겠습니다.  - 75


아스티아게스는 하르파고스의 아들이 오자 그를 죽이고 손발을 잘라, 고기를 굽거나 삶거나 해서 요리를 만든 뒤 연회가 시작되는 것을 기다렸다...하르파고스에게는 자기 아들의 머리와 손발 이외의 고기가 그대로 제공되었다....아스티아게스가 먹은 고기가 무슨 짐승의 고기인지 아냐고 물었다. 하르파고스는 안다고 대답한 다음, 왕께서 하시는 일은 그 어떤 일도 만족한다고 말하였다. 하르파고스는 남은 고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유해를 모아 묻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 77

===>아들의 고기를 먹게 하다니...이건 범죄드라마보다 더 무섭고 잔인하네. 참 ...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딸을 버리고, 손자를 죽여가면서까지 발버둥을 치다니...무섭고 안타깝다.


이렇게 말하는 본인은 신의 뜻에 따라 이 세상에서 생을 받고 이 큰 사업을 맡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또 싸움이나 다른 점에도 여러분은 메디아인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한시라도 빨리 아스티아게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 - 81


포로가 된 아스티아게스에게로 하르파고스가 와서 보기좋게 나무랐다. 그는 이전에 아스티아게스가 자기에게 친 아들의 살코기를 먹게 한 그의 연회에 대해 언급하고, 국왕의 몸에서 노예의 처지로 떨어지니 어떤 기분이냐고 물었다. - 83


페르시아의 풍속


페르시아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을 술을 마시면서 상의하는 습관이 있다. 그 상담에서 모두가 찬성한 일을 상담의 회장이 되었던 집주인이 이튿날 술이 깬 상태로 있는 모두에게 제기하고, 이때에도 여전히 찬성을 하게 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폐기된다. 또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로 예비상담을 한 일은 술자리에서 다시 결정을 하게 된다. - 86


페르시아인은 누구나 많은 정처를 거느리고 또 다수의 첩을 사들인다. 페르시아에서는 전장에서 용감하다는 것 다음으로 많은 아이를 두는 것이 남자의 미덕이 되어 있다. - 87


지금 말한 좋은 풍습과 더불어 또 내가 추천하고 싶은 것이 있다. 아무리 국왕이라도 단 한 번의 죄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다는 것, 그 밖에 일반 페르시아인도 자기 하인에게 한 번만의 과실로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 87


소아시아의 그리스 여러 도시


‘트리오피온의 아폴론‘ 경기에서 이전에는 우승자에게 청동 세발솥을 상품으로 주었는데 상품을 받은 자는 그것을 성지로부터 가지고 가서는 안되고, 그 자리에서 신에게 봉납하도록 되어 있었다. - 91


이오니아인 중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을 자랑하는 한 무리가 있는데, 그들은 이주 때 여자를 데리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손에 부모를 잃은 카리아의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 살육 때문에 이들 여자들은 결코 남편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고 남편의 이름도 부르지 않는다는 규칙을 만들어 그것을 지킨다는 맹세를 서로 교환하고 딸에게도 전하였다. 현재는 남편이 자기들의 아버지나 남편, 아이들을 죽이고 그러면서도 자기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원한 때문이었다. - 92

===>이 원한을 가진 채 여자들은 또 그 정복자 남편과 살면서 아이들을 낳아 길렀을 테니 나면서부터 아이들은 원한을 가진 채 성장했겠구나.


리다아의 반란과 그 진압


이는 모든 그리스인을 두고 한 말로, 그리스인들이 시장을 열고 물건을 매매하는 것에 대해서 한 말이었다. 실제로 페르시아인은 시장을 열고 물건을 매매하는 관습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시장이라고 하는 것이 페르시아에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 95

===> 모든 변화에는 저항이 따르는군. 시장이 생겨나는 것에 대한 저항.


크로이소스는 키루스가 사르데스를 파괴할까 두려워하여 이렇게 대답하였다. “...왕이시여...이전의 일이나 현재의 일에도 아무런 허물이 없는 유서 있는 도시를 단지 화가 나신다고 해서 파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전의 일은 제가 저지른 일이고, 그 허물은 이 이마에 받고서 속죄를 하고 있습니다....사자를 보내어 그들에게 무기의 소지를 금지시켜주십시오. 또 겉옷 아래에 내의를 입을 것, 굽이 높은 신발을 신을 것, 그리고 어린이에게는 칠현금이나 그 밖의 현악기 연주와 장사를 가르치도록 포교를 내리시옵소서. 왕이시여 그러먼 남자들은 여자같이 변하여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고 반란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96


히스파고스의 소아시아 정복


한 때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의 인륜에 어긋난 식사를 대접 받은 것도, 또 키루스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협력한 것도 바로 이 인물이다. - 99


그중에서 아길라인은 다른 도시에 비해 훨씬 많은 포로를 얻어 이를 도시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서 처형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뒤 아길라에서는 포카이아인이 돌에 맞아 파묻힌 장소를 지나간 자는 가축, 수레를 끄는 짐승, 인간을 막론하고 손발이 비틀어지거나 불구자가 된 것이다. - 102


리키아인은 자기 이름을 아버지 쪽이 아니라 어머니 쪽에서 따온다는 것이다...또 시민권을 가진 여자가 노예와 동거해서 낳은 아이는 적자로 인정되지만 남자 시민의 경우는 비록 도시의 유력자라 할지라도 외국인 아내 도는 첩에서 낳은 아이는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 105


싸움에 패하여 시내에 몰리자 처자, 가재, 노예를 아크로폴리스에 모아놓고 불을 질러 모두 태워버렸다. 그렇게 하고나서 서로 결사의 맹세를 하고 출격해서 싸웠다. 이리하여 크산토스의 주민은 한 명도 남은 사람없이 모두 전사하였다. - 107


바빌론 정복


이 여왕은 다음과 같은 장난을 꾸며낸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도시에서 사람의 왕래가 가장 많은 문 위에 자기 묘를 만들게 한 것이다......그런데 묘를 열어보니 재보는 없고 있는 것이란 시체와 다음과 같은 문구 뿐이었다. ‘네가 한없이 탐욕스럽고 이익을 쫒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가 아니라면 죽은 자의 관을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 113


아시리아의 땅은 비가 적어 곡류의 성장이 신통치가 않았다. 그럼에도 작물이 자라 곡물의 수확량이 올라가는 것은 강을 통한 관개 덕분이다....인력을 사용하여 두레박으로 물을 밭으로 대는 것이다. 바빌론은 온 지역에 걸쳐서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많은 운하로 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 116


이 나라의 모든 것 중에서 도시 자체 다음으로 최대의 경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한다. ...배는 둥근 모양이고 모두 가죽으로 되어 있다. (117)


매년 1회 다음과 같은 행사를 한다. 시집갈 나이가 된 아가씨들을 모두 모아 한곳으로 데리고 가서 그 둘레를 많은 남자들이 둘러싼다. 그러면 호출인이 아가씨를 한 사람씩 세워서 판다. 우선 그 중에서 기량이 좋은 아가씨부터 시작하는데 이 아가씨가 좋은 값으로 팔리면 다음으로 두 번째로 기량이 좋은 아가씨를 호명한다. 아가씨들은 결혼을 위해 팔리는 것이다. 신부를 맞이할 적령기가 된 바빌론의 청년 중에서도 유복한 사람은 서로 값을 롤려서 기량이 가장 좋은 아가씨를 얻으려고 한다.- 118 ... 비록 자기 딸이라도 자기가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상대에게 시집보내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 -119


이 나라에는 의사가 없기 때문에 환자는 집에 두지 않고 광장으로 데리고 간다. 지나가는 사람은 자기가 그 환자와 같은 병을 앓은 적이 있거나, 또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아픈 것을 본 일이 있으면 환자 옆으로 가서 병에 대한 지혜를 가르쳐준다. - 119


바빌론의 풍습 중에서 가장 파렴치한 것은 이 나라의 여자는 누구나 평생에 한 번은 아프로디테의 신전에 앉아서 낯모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 - 120


마사게타이 원정


그 무렵 마사게타이에서는 남편을 여읜 코미리스라고 하는 이름의 여자가 왕이었다. 키루스는 사자를 통해서 자기 아내로 삼고 싶다며 이 여왕에게 구혼하였다. 그러나 토미리스는 키루스가 구하고 있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마사게타이의 왕위라는 것을 간파하고 그의 내방을 거절하였다. 


먼저 양군은 거리를 두고 서로 화살로 응수하였으나, 이윽고 화살을 다 쏘아버리자 창과 단검으로 격돌하여 혼전이 되었다. 장기간에 걸쳐 싸웠는데 어느 쪽도 양복하거나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마침내 마사게타이군이 승리를 얻고 페르시아군의 대부분은 섬멸되었다. 여기에서 키루스 자신도 전사하였다. 그의 재위는 통산 29년이었다.

===> 영화 장면을 상상한다. 재위 29년 된 늙은 왕이 화살이 떨어져 창과 단검으로 육탄전을 벌이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장면이다. 멋지다. 싸우다 전사하는 것도 멋지 최후다.


전투 때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는 기병도 보병도 있는 것이다. 또 궁병, 창병도 있고, 전투용 양날 도끼를 휴대하는 것이 이 나라의 관습이 되어 있다. - 127


매우 높은 연령에 이르면 연고자들이 모여 그 남자를 죽이고, 그와 함께 가축도 죽여 고기를 삶아서 다 같이 먹는다. 이렇게 되는 것이 이 나라에서는 가장 행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 128

===>식인 의례는 영혼과 몸을 자손에게 계속 살게 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아아아 9장 중 1장을 읽었는데 인용문이 7쪽이라니 7*9=63 아아아 뭔가 책을 잘 못 읽고 있는 게 아닐까?



제 2권 에우테르페 (Euterpe)


이집트의 국토

나는 달력을 계산하는 방법은 이집트인 쪽이 그리스인보다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 131


내 생각에는 이집트도 이와 비슷한 만이었을 것이다. ...나는 1만년으로도 충분히 메워지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먼 과거에 이보다도 훨씬 큰 만이 이 정도로 거대하고 활동적인 퇴적물로 메워진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 135


나는 사제로부터나 그 누구로부터도 지식을 얻을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나일이 하지를 기준으로 해서 100일 동안에 걸쳐 물이 불어나 범람하고 이 일수가 차면 수위가 내려가 다시 하지가 찾아올 때까지 겨울 동안에 감수된 채 그대로 있는 이유를 그들로부터 꼭 듣고 싶었다. - 139


이제까지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나일의 수원을 알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142


이집트의 풍습


여자는 나가서 장사를 하는데 남자는 집에서 베를 짠다...어느 경우나 사제의 일을 맡는 것은 남자이다. 부모의 부양에 대해서는 아들은 그럴 마음이 없으면 강요당하지 않지만 딸은 그럴 의지가 없어도 절대적으로 이 의무를 져야한다. - 147


이집트인은 희생식을 거행할 때에는 미리 단식을 한다. 희생 동물이 불에 x는 동안 모두는 자기의 몸을 치면서 애도의 뜻을 나타낸다. 그러고 나면 희생 동물의 남은 부분으로 연회를 연다. - 150


디오니소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신의 이름은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들어갔다. 그리스의 신들이 그리스 이외의 나라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직접 주사해서 확인한 것이다. - 157


그들이 이들을 신리라고 부른 것은 삼라만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 기능을 따라 만물을 배분하고 장학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158


이들 동물 중 어떤 것을 죽이는 일이 있으면 고의로 죽인 경우에는 사형이고, 고의가 아닌 경우에는 사제가 부과한 벌을 받는다. 그러나 이비스(따오기) 또는 매를 죽인 자는 고의든 아니든 사형을 면치 못한다. - 163


암고양이는 새끼를 낳으면 더 이상 수고양이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다. 수컷은 암컷과 교미를 하려고 하지만 뜻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계책을 짜낸다. 암고양이로부터 새끼 고양이를 빼앗거나 훔쳐서 죽여 버리는 것이다. 죽이기만 할 뿐 먹지는 않는다. 새끼를 빼앗긴 암고양이는 다시 새끼를 낳고 싶어서 수고양이에게로 오게 되는데 그 정도로 고양이는 모성애가 강한 동물인 것이다. - 164


다른 새나 동물은 악어가 무서워서 접근하지 않지만 악어새만은 악어에게 쓸모가 있기 때문에 악어와 사이가 좋다. 악어가 물에서 나와 육지에 올라가 입을 벌리면 악어새는 그 입속으로 들어가서 거머리를 먹어버리는 것이다. 악어는 자기를 평안하게 해 주어서 기뻐하고 새에게는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는다. - 165


이집트의 생활양식


술은 보리로 만든 것을 마신다. 이 나라에서는 포도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생선은 햇볕에 말려 소금으로 절였다가 날것 그대로 먹는다. - 168


성인의 날을 보지 못하고 요절한 왕의 외아들을 이집트인들은 예의 만가를 불러 애도하는데 이 노래가 이집트의 최초이자 유일한 가요가 되었다고 한다. - 170


이집트에는 미라 가공을 직업으로 삼고 개업을 하고 있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장인이 있다. 장인들은 유체가 운반되어 오면 그림물감을 가지고 실물과 비슷한 목제 미라의 견본을 운반해 온 사람들에게 보인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가장 정교한 세공을 한 것은 어떤 존귀한 모습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이보다도 세공이 조잡하고 값이 싼 것이 두 번째 세 번째는 값이 가장 싼 것 하는 식으로 견본이 제시된다. 미라 장인은 이와 같은 설명을 하면서 어떤 모양으로 미라를 만들면 좋은지 의뢰자의 희망을 묻는다. 가격이 결정되면 의뢰자는 돌아가고 장인은 작업장에 남아서 미라 제작에 착수한다. 먼저 굽은 연장으로 콧구멍에서 뇌수를 꺼내는데 이때 약품도 주입한다. 그러고 나서 예리한 에티오피아 돌로 옆구리를 다라 절개하여 장부를 모두 꺼내고 꺼낸 장부는 야자유로 깨끗이 씻은 뒤 다시 가아서 으깬 향로로 깨끗이 한다.....- 170

===>미라는 죽음과 관련되어 나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장인의 작업 과정’을 세밀히 묘사한 걸 읽으니 재미가 있다. 중급과, 재력이 가장 없는 사람의 경우까지 읽으며 이것은 다양한 장례문화 중 하나일 뿐이구나 싶다. 


이집트의 역사


세소스트리스의 아내는 여섯 명 있는 아이 중 두 아이를 불타는 장작 위에 뉘어 불의 바다를 건너는 다리로 삼아 자기들은  탈출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세소스트리스는 아내가 말한 대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아들은 타죽었으나 나머지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난을 피했다고 한다. - 181


어느 해 나일강이 이상한 범람을 일으켰다...그 때 왕이 무모하게도 손에 창을 들어 소용돌이치는 물 한가운데로 던졌는데 이내 눈에 병이 걸려 장님이 되었다. 10년 동안 장님인 채로 있었는데 11년 째 푸토 시에서 신탁이 왔다. 그의 처벌 기간이 지났다는 것, 남편만 접하고 다른 남자를 모르는 여자의 오줌으로 눈을 씻으면 다시 빛을 찾으리라는 것이었다....시력을 회복하는데 효과가 있었던 우줌을 눈 여자를 제외하고는 시도했던 모든 여자를 태워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시력을 회복하는데 효과가 있었던 오줌의 주인공을 왕비로 삼은 것이다.-183

===>순결이데올로기로 마녀 사냥을 해서 학살을 자행했군. 


<람프시니토 왕의 재물을 훔친 목수의 아들>


목수가 죽자 아들들은 곧 일에 착수, 밤을 틈타서 왕궁으로 스며들어 건물 안에서 예전의 그 돌을 쉽게 배내고 많은 재보를 가지고나왔다....곧 동생에게 소리를 질러 사정을 이야기하고 지체 없이 빨리 들어와서 자기 목을 자르라고 말했다. 얼굴이 알려지면 동생도 동반자가 될 염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동생은 하라는 대로 형의 목을 자르고 돌을 예전대로 해놓고 형의 목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둑을 지체를 담에 매달고 망을 보게 해서 시체를 보고 슬퍼하는 바람이 발견되면 곧 잡아서 자기에게로 데려오라고 명령한 것이다. 시체가 매달리자 도둑의 어머니는 매우 슬퍼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형의 시체를 내려서 가져오도록 살아남은 아들에게 일렀다...파수꾼들은 술을 마시고 취해서 잠이 들고 말았다. 밤이 깊어지자 사나이는 형의 시체를 내린 뒤 파수꾼들에게 모욕을 줄 요량으로 오른쪽 뺨을 칼로 그은 다음에 돌아왔다.... 왕은 자기 딸을 사창가로 보내어 얻너 남자라도 차별하지 말고 손님으로 맞아 반드시 몸을 허락하기 전에, 이제까지 해온 일 중에서 가장 교묘하면서도 악한 짓이 무엇이었던가 이야기하게 하라고 타일러두었다....왕녀가 그 이야기를 듣고 그를 잡으려 하자 도둑은 어둠 속에서 시체의 팔을 여자 쪽으로 내밀었다. 왕녀는 그 사나이의 팔을 잡고 있다 생각하며 그 팔을 놓지 않았다....람프니시토스는 그를 칭찬하고 세계에서 비할 자가 없이 지혜로운 자라고 하여 왕녀를 아내로 주었다고 한다. - 192

===>아, 재미있다. 아라비안 나이트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네


피라미드 시대의 여러 왕들


피라미드에는 이집트 문자로 노무자들에게 무, 양파, 마늘을 지급하기 위해 쓴 금액이 기록되어 있다.....만약에 기록된 대로라고 하면 공사용 철제품이나 노무자들의 주식이나 의복을 위해 지출한 기타의 비용은 도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또 위의 건조물을 세우는 데에는 앞서 말한 시간이 소요된 것 외에, 돌을 잘라내어 운반하고 또 지하실을 파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들었을 것이다. - 195

==>나도 이게 궁금하다. 


내가 직접 계측했으므로 틀림없다. 이 피라미드에는 지하에 묘실도 없고, 케오프스의 피라미드처럼 나일강의 물이 수로에 의해서 내부까지 들어오는 일도 없다. - 195

===>헤로도토스가 직접 이집트로 가서 피라미드의 크기를 쟀구나. 그 열정이 대단하다.


에티오피아인의 이집트 지배, 12인의 왕, 미궁에 대하여


이집트군이 이곳에 도착한 뒤 밤이 되자 큰 들쥐 데가 적진을 덮기라도 하듯이 밀어닥쳐 화살통, 활, 더 나아가서는 가죽 손잡이까지 갉아먹었다. 이튿날 빈 몸으로 도망을 갔기 때문에 많은 전사자를 내게 되었다. -203


프산메티코스의 통치와 그의 후계자


제례 마지막날 헌주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12명의 마지막에 있던 프산메티코스는 자기 잔이 없었기 때문에 청동 투구를 벗어서 내밀어 그것으로 헌주를 끝마쳤다... 그들 중에서 청동 잔으로 헌주를 한 사람이 이집트의 왕이 되리라는 신탁을 기억에 되살렸던 것이다. - 209


아마시스


아마시스가 소장한 수많은 재보 중에 발을 씻는 데에 사용하는 황금으로 만든 대야가 있었다. 아마시스 자신도 그와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도 언제나 이 대야로 발을 씻었다. 아마시스는 이 대야를 녹인 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도시의 가장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장소에 안치하게 하였다 그러자 이집트인은 이 신상을 크게 숭사하며 절했던 것이다. 도시 사람들의 행동을 안 아마시스는 이집트인을 불러 모아 신상은 발을 씻는 대야로 만들었다는 것, 이전에 그들이 그 속에 토하기도 하고 오줌을 누기도 하고 발을 넣고 씻었던 것을 지금은 매우 숭상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진상을 폭로해 보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자기의 경우도 이 대야와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한 평민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왕이므로 자기를 중히 여기고 숭배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 219



제 3권 탈레이아 Thaleia


캄비세스의 이집트 공략


페르시아의 국력을 두려워한 아마시스는 딸을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절할 결심도 서지 않았다. 캄비세스가 딸을 요구한 것은 왕비가 아니라 첩으로 삼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225


하지만 저는 저 사나이가 이집트군과 함께 모반을 일으켜 살해한 그 남자의 주군이었던 아프리에스의 딸입니다. - 226


니타티스의 이 말과 그 속에 깃든 아마시스의 악행에 대한 호소가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를 격분시켜 이집트 원정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 226


“어머니 제가 어른이 되면 반드시 이집트가 뒤집힐 만한 일을 당하게 하겠습니다.” 그 무렵 10살 정도였던 캄비세스는 이렇게 말하며 그 자리에 있던 여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 226


용병들은 이 아이들을 아버지의 눈이 닿는 진영 내로 끌고 온 뒤 두 군의 진지 중간에 혼주기를 가져다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을 한 사람씩 끌어내어 목을 따서 그 피를 혼주기로 받은 것이다. 아이들을 모두 처치하자 혼주기 안에 술과 물을 붓고 용병들은 한사람 남김없이 이 피를 마시고 나서 싸움으로 들어갔다. - 230 


프산메니토스여, 그대의 주군인 캄비세스께서 물으신다. 딸이 학대받고 아들이 형장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소리도 지르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았던 그대가 그대와는 아무런 혈연도 없는 저 거지를 소중히 여김은 무엇 때문인가?


키루스의 아드님이시여, 우리 집안에 일어난 불행은 슬퍼 울기에는 너무나도 큰 불행입니다. 그러나 유복한 신분에서 거지로까지 전락하여, 더욱이 노경에 이른 저 친구의 불운은 울어 주어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232 

===>이 말은 정말 슬프고 눈물이 난다.


에피오피아인과 암몬인에 대한 원정과 그 좌절


병사들은 땅에 풀이 나 있을 때는 그것을 먹고 연명하였으나, 마침내 사막지대로 들어가자 그들 안에서 전율할만한 행동으로 나오는 사람이 나타났다. 10인 1조로 심지를 뽑아 당첨된 사람을 한 사람씩 먹은 것이다. - 239


캄비세스의 어지러운 마음


모든 점으로 보아 캄비세스가 극도의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246

===>어느 나라, 시대에나 미친 왕이 있었군.


사모스와 스파르타의 항쟁


그대에게 무엇보다도 귀중하여 잃으면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하셔서, 그것을 결코 인간의 눈에 띄는 일이 없도록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했는데도 행운과 불운이 번갈아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말씀드린 방법을 되풀이해서 사태를 개선하도록 하시는 편이 현명할 것입니다. - 249


“너의 어머니를 죽인 사람은 누구냐? 너희는 알고 있느냐?”

형은 할아버지의 이 말을 듣고 전혀 개의치 않았으나 동생 리코프론은 상심한 나머지 코린토스로 돌아와서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가 말을 걸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또 이유를 물어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 253


재앙을 또 다른 재앙을 또 다른 재앙으로 치유하려고 하면 안돼. 쓸데없이 엄격한 정의를 내셍는 것보다도 공정한 분별 족을 존중하는 사람들도 많단다. 또 어머니의 권리를 추구한 나머지, 아버지로부터 당연히 이어받을 것을 잃은 사람도 이제까지 적지 않았단다. - 255


마고스 사제 계급에 속하는 두 형제가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더욱이 그 중 한 사람은 캄비세스가 출발할 때 왕가를 돌보도록 남겨둔 인물이었다. - 260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독재자가 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좋은 일도 아니므로 이제 그와 같은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요. 여러분은 캄비세스 왕이 어떻게 포악한 정치를 했는지 알고 있고 또 마고스의 폭정도 몸소 겪었소.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고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독재제가 어떻게 질서 있는 나라의 체제가 될 수 있단 말이요? 이러한 정체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조차도 한 번 군주의 자리에 앉으면 이전의 마음은 잊어버리고 마오. 현재의 영화로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때문인데 여기에 또 타고난 질투심이라는 것이 있고. 이 두 가지 약점 때문에 독재자는 갖은 악덕을 몸에 지니게 되는 것이요.... 이에 반해 대중에 의한 통치는 먼저 만민 평등권이라는 아름다운 명목을 갖추고 있고, 다음으로는 독재자가 하는 것과 같은 일은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오. 직무의 관장은 추첨에 따르고 관리는 책임을 가지고 직무에 임하며, 모근 국책은 공론에 의해 결정되어. 따라서 나로서는 독재제를 단념하고 대중의 주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의견을 여기에 제출하는 바요. 모든 일은 다수 의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오. - 272


캄비세스의 죽음과 다레이오스의 등극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다레이오스, 말(여기에 그 이름을 듣고)과 마부의 공적으로 페르시아의 왕위를 얻었노라 - 277


왕국을 징세구로 구분


수낙타는 암낙타보다 발이 느리기 때문에 가는 동중에 분리되는데 두 마리를 동시에 푸는 일은 없다. 암낙타는 뒤에 남겨둔 새끼를 생각하여 결코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고 한다. - 285


수컷은 이렇게 해서 죽는데 암컷도 수컷에게 범한 죄의 댓가를 다음과 같이 받는다. 아직 어머니의 태내에 있는 새끼 뱀이 아버지의 원수인 양 어머니의 몸을 먹고 나서 이를 찢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 286


인타프레네스와 오로이테스


전하께 말씀드리오만 신의 뜻이 계시면 저는 다른 남편도 맞을 수 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아들을 잃어도 또 아들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 세상에 없는 지금 또 한 사람의 형제를 가질 수는 도저히 없는 일입니다. - 291


다레이오스의 사모스 공략


다레이오스가 외투에 대단한 집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 실로손은 어떤 영감으로 움직였다고나 할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그 어떤 값으로도 팔 생각이 없으나 어던 일이 있어도 당신의 것이 되야 한다면 그냥 드리겠습니다. - 303


오 내가 아직 아무런 힘이 없었던 시절에 선물을 주었던 사람이란 말인가? 참 세상에도 드문 마음씨가 넓은 사람이었지. 그 때 그대가 준 것은 작은 호의였지만 그 호의는 현재 내가 그 누구로부터 막대한 선물을 받은 경우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 303


왕이시여, 저는 금이나 은도 소용없습니다. 제발 조국 사모스를 저의 손에 되돌려주십시오. 사모스는 형 폴리크로케스가 오로이케스의 손에 살해되어 세상을 떠난 지금 우리가 부리고 있었던 노예의 수중에 들어가 있습니다. 제발 이 사모스를 유혈의 참극도 일어나지 않고 시민을 노에로 삼는 일도 없이 저에게 주십시오 - 304

===> 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 베푼 호의로 인해 나라를 구하고 있다.


바빌론의 반란과 진압


조피로스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자기 몸을 다시 원상태로 복귀시킬 수 없을 정도로 무참하게 상처를 입혔다. 자기 코와 귀를 잘라내고 머리를 보기 흉하게 민 다음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가하여 다레이오스를 찾아간 것이다. - 309


우선 저는 이 모습으로 탈주자처럼 가장하여 적의 성 안으로 들어가 제가 전하로부터 이런 꼴을 당했다고 그들에게 말할 것입니다....전하께서 잃어도 아깝지 않다고 여기시는 부대 중에서 1000명을 골라 세상에서 말하는 세미라미스 문 앞에 배치하여 주십시오 - 310


제 4권 멜포메네 Melpomene


스키타이 원정


스키타이인은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28년에 걸쳐 상아시아를 지배하였다. - 313


스키타이의 고대사


헤라클레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내가 이제부터 말하는 대로 하시오. 아이들 가운데 이 활을 이처럼 힘껏 잡아당기고 또 이 허리띠를 매는 자가 있다면 그 아이는 이 나라에 살게 하시오, 그러나 이런 일을 하지 못하는 아이는 이 나라에서 추방하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내가 명하는 바를 수행하게 되고 도 그대 자신도 기뻐하게 될 것이오”- 317


스키타이 북방 여러 민족


어느 집의 부친이 사망하면 친인척이 모두 가축을 데리고 모여 그것을 잡아서 고기를 썰고 더불어 그 사망한 부친의 살도 썰어서 그것을 섞어 요리로 해 연회를 베푸는 것이다. - 325


그런데 여기서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 여담이 되지만 본서는 여담이 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므로 ...- 326

===>크하하하하, 헤로도토스의 재미난 말이다.


세계의 형태와 구조


다레이오스는 세계의 하천 가운데 다른 한 강을 제외하고 악어가 서식하는 유일한 강인 인더스강이 어느 지점에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지를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진실한 보고를 할만한 자들을 배로 파견하였는데 - 333


스키타이의 하천


단 하나 그것도 인간과 연관이 있는 사항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어떤 민족보다도 휼륭하게 해결하는 것이다. 한 가지란 다름이 아니고 그들을 공격하는 자는 한 사람도 도망을 가지 못하고, 또 그들이 적에게 발견되지 않으려고 하면 아무도 그들을 사로잡을 수 없게 하는 방법을 짜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도 성체도 구축하지 않고, 말 위에서 활을 쏘며, 생활은 농사에 의존하지 않고, 짐승이 끄는 수레를 집으로 삼는 그들을 어떻게 싸워서 이기며 접촉조차 할 수 있을까? -335

===>스키타이인은 기마민족, 유랑민족이었나 보다.



스키타이의 풍습


스키타이에서는 가장 중요한 맹세를 할 때는 왕실의 화덕에 걸고 맹세를 하는 관습이기 때문이다. - 343 


스키타이인은 누군가와 서약을 교환할 때 아래와 같이 한다. 흙으로 만든 큰 잔에 술을 붓고 여기에 서약을 교환하는 당사자의 피를 섞는다. 피는 송곳으로 찌르든가 작은 칼로 재거나 해서 몸에 작은 상처를 내 흘린다. 그런 다음 단검과 화살과 전투용 도끼, 창을 잔 속에 담근다. 그렇게 해둔 다음 긴 기원의 구절을 외우고 난 뒤 서약을 교환하는 자 뿐만 아니라 수행한 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들이 잔에 든 것을 마신다. - 344


다레이오스의 원정


아마존족도 청년들이 해칠 뜻이 없음을 알게 되자 그들에게 개의치 않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 그들의 야영지는 가까워졌다. - 363


우리는 활을 당기고 창을 던지며 말을 탈 줄 아는데 여자가 하는 일은 배우지 못했어요...만약 당신네가 우리를 아내로 삼고 싶다면 그리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하길 원한다면 부모에게로 가서 재산을 분배받으세요. 그런 다음 이 곳에 와서 우리끼리만 살아요 - 363


어느 처녀나 적을 한 사람 무찌르기 전에는 시집을 가지 않는 것이다. 개중에는 이 규정을 지키지 못해 시집을 가기 전에 늙어 죽는 사람도 있었다. - 364


리비아 공격의 이전 역사


여자들은 안으로 들어가자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남편에게 주고 자신들은 남편이 입고 있던 것을 몸에 걸쳤다. 미니아이인들은 여자 옷을 입고 여자처럼 보이면서 옥사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해서 도망쳐 나온 그들은 다시 카이케토스 산중에 틀어박혀 살았다. - 377


키레네 식민의 유래

리비아


아직 시집가지 않은 딸을 왕에게 제공하는 것도 이 종족에게만 있는 풍습이다. 그리고 왕의 마음에 든 딸은 왕에 의해서 처녀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 388


점을 칠 때는 선조의 묘로 가서 기원을 담아서 묘 위에 잔다. 그리고 꾼 꿈으로 점을 치는 것이다. - 390


바르케 점령



제5권 테릅시코레 Terpsichore


크라키아 및 마케도니아 공략


유해를 화장 또는 매장하고 무덤을 만든 다음 온갖 종류의 경기를 개최한다. 그 경기에서는 일 대 일 승부에 그 난이도에 따라 걸게 되는 상품이 많다. - 406


히스티아이오스와 아리스타고라스


그들은 밀레토스의 국토를 모두 둘러보고 싶다고 제의해 황폐한 국토를 다니다 때때로 경작이 잘 된 밭이 눈에 띄면 그때마다 그 밭의 소유자 이름을 기입해 두었다. 온 국토를 돌아도 이와 같은 밭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도시로 돌아오면 곧바로 민회를 소집해 손질이 잘 된 밭의 소유자들에게 국정을 맡기기로 했다. 이런 사람이라면 공공의 일도 내 일처럼 잘 돌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415


노예 가운데 가장 신뢰할 만한 사내의 두발을 밀어버리고 머리에 문신을 한 다음 두 발이 다시 자라길 기다렸다. 그리고 곧바로 그 사내를 밀레토스로 파견했는데 이 사내에게는 밀토스에 닿으면 아리스타고라스에게 다른 말을 하지 말고 자기 머리를 깎아서 머리를 봐달라고만 부탁하도록 일러두었다. 문신의 내용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페르시아에 대한 배반을 지령한 것이다. - 419


스파르타의 정세-클레오메네스와 도리에우스

아리스타고라스, 스파르타의 지원요청


그 때 아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바마마 이제 그만 자리를 뜨시지요. 그러지 않으면 이 외국인에게 매수되고 맙니다.” 클레오메네스는 딸의 충언을 갸륵하게 생각해 별실로 물러가고.. - 427


아테네인의 말에 따르면 알크메온가의 일족이 델포이 체류 중에 무녀를 매수해 스파르타인이 사용이건 공무이건 신의 계시를 물으러 왔을 때에는 반드시 아테네를 해방시키라는 계시를 주도록 조용했다고 한다. - 433


수사에 이르는 ‘왕도’의 서술

케이시스트라토스의 흥망


이오니아인은 예로부터 종이를 가죽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옛날에 종이가 귀했던 시절 산양이나 양 가죽을 종이 대신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오늘 날에도 이와 같이 가축의 가죽에 필사를 하는 이민족이 적지 않다. - 430


클레이스테네스와 이사고라스

클레오메네스

아테네와 아이기나

크린토스인의 독재반대 연설


만일 그대들이 만민 동권의 원칙을 파기하고 그리스 국가들에 독재제를 펴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이처럼 부당하고 잔인한 행위는 없을 것이요. 국가의 정치는 독재제가 좋다고 진실로 생각하신다면 귀국이 솔선해서 자국 내에 독재자를 세우고 그런 연후에 다른 나라에게도 똑같이 시도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오. - 446


그들 사이에서는 누구든 아이를 먼저 안은 자가 아이를 바닥에 떨어뜨려 죽이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오. 그런데 바브다가 아기를 안고 와 건넸을 때 알 수 없는 우연이라고 할까 받아든 사내에게 그 갓난아기가 빵긋 웃었던 것이요. - 449


시게이온의 싸움

사르데스의 파괴


사르데스의 인가는 대부분이 갈대로 만들어지고 벽돌로 지어진 집도 그 지붕은 갈대로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한 병사가 집 한 채에 불을 지르자 불은 삽시간에 집에서 집으로 옮겨 붙어 온 도시가 맹렬한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 455

===>나는 불타는 도시의 이미지를 상상한다.


키프로스의 배반과 그 진압


본디 왕이나 장군이 되는 분들은 그 싸우는 상대도 왕이나 장군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전하가 적의 대장을 베어버리시면 대단히 공훈이 될 것이고 또 이와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나 만약 전하가 상대의 손에 베이게 되어도 명성이 있는 자의 손에 의해 최후를 마친다면 그 불운이 반감될 것입니다. - 460


이오니아인의 패배, 아리스타고라스의 죽음


제 6권 에라토 Errato


히스티아이오스의 활약


키오스의 경우도 이 재난을 당하기에 앞서 무언가 전조가 보였다. 그 하나는 델포이에 가무를 봉납하기 위해서 키오스에서 100명의 청년으로 편성한 가무대를 파견한 결과, 그 가운데 무사히 귀국한 자는 불과 2명뿐이고 나머지 98명은 역병에 걸려 사망하고 만 사건이다....읽기 쓰기를 배우고 있는 아이들 머리 위로 천정이 무너져 내려 120명의 아이 가운데 단 한 명만 화를 면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 475

===>이런 식으로 전조를 삼아 신비화할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어떤 안전불감증을 알게 할만한 일들이 일어나면 그것에 대해 대비를 해야 하는 건 맞는 일이지 싶다. 범죄나 사건사고, 또는 환경파괴로 인한 여러 가지 일들, 더 많은 인류와 생태계의 위험을 경고하는 일들이 많이 있지 않겠나?


에게 해와 헬레스폰토스 연안 도시 공략


페르시아군은 이들 섬을 점령할 때마다 그 주민을 예인망식으로 소탕했다. 예인망식은 아래와 같이 행하는 것이다. 병사들이 손을 잡고 북쪽 해안에서 남쪽 해안까지 이동해 가면 주민들을 몰아내 온 섬을 소탕하는 것이다. - 476

===> 이 속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소탕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학살과 비극이었겠나?


마르도니오스의 그리스 본토 공략

타소스의 굴복


타소스인은 일찍이 밀레토스인과 히스타이아오스의 포위공격을 받은 경험에 비추어 막대한 수입이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국부를 이용해 군선의 건조와 종래보다 견고한 성벽구축에 나서고 있었다. 이 수입원은 본토에 있는 타소스의 영토와 광산 두 가지였다. - 483


스파르타의 정정


그것은 바로 그 어머니에게 주목을 해 그녀가 어느 아이를 먼저 목욕시키고 젖을 물리는지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녀가 언제나 같은 차례로 하는 것이 명확해지면...486


출진할 때 왕은 군대의 선두에 서고 전장에서 철수할 때는 최후까지 남아야 한다. - 487


왕은 어느 음식이나 다른 회식자의 두 배의 양이 제공된다. 왕은 헌주를 할 때도 최초로 잔을 받을 권리가 있고, 또 희생짐승의 가죽이 주어진다. ...온갖 종류의 경기 대 왕은 맨 앞줄의 특별석에서 관람할 수가 있다. .-488

===>오늘날 1등석 표는 옛날에는 왕의 권리였군.

9개월째에도 7개월째에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아들아 나는 너를 7개월만에 낳은 것뿐이다. 아리스톤도 뒤에 자신이 그러한 일에 무지했음을 깨달으셨다. - 495

===>이런 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해 속에서 괴로움을 당했을까?


아이기나와 아테네의 싸움


이 자는 전에 아이기나 섬에서 추방된 일 때문에 아이기나인에게 원한이 있었다. 그래서 아테네인이 아이기나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자 조국을 배신하고 아이기나를 아테네인에게 맡기는 협정을 맺었다. - 505


뒤쫒아 온 자들을 그를 잡아떼려고 했으나 그것이 안 되자 그의 팔을 잘라 겨우 연행했는데 잘린 두 팔은 문의 손잡이에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 506

===>신전 문에 매달린 팔들을 상상하니 신성모독으로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아주 흉했을 것 같다.


페르시아 원정군, 여러 섬에 거쳐 마라톤에 이르다

마라톤전투


전날 밤 히스피아는 자다가 친어머니와 함께 자는 꿈을 꾸었다. 히피아스는 이 꿈을 자신이 아테네로 복귀해 주권을 회복하고 모국에서 장수를 할 것으로 풀었다. - 513


마라톤전투에서 전사자는 페르시아 쪽이 6400명, 아테네는 192명이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기괴한 사건이 있었다. 쿠파고라스의 아들 아테네인이 적과 몸으로 맞붙는 전투에서 잘 싸웠는데 칼이나 창 등에 의한 부상을 하나도 입지 않았음에도 두 눈의 시력을 잃고 평생 장님으로 지내야 했던 것이다. - 518


헐렁한 옷을 입고 주머니를 깊게 한 다음 가능한 한 긴 장화를 신고 안내를 따라서 부물창고로 들어간 것이다. 그는 사금산더미 가운데 앉자 먼저 사금을 다리와 장화의 틈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채우고 이어서 품속 가득히 집어넣고 머리카락에 뿌리고는 입에까지 넣은 다음 가까스로 장화를 질질 끌면서 보물창고에서 나왔다. 그 모습은 도저히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두 볼이 잔뜩 불거진 데다가 온 몸이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크로이소스는 무심코 웃음을 터트리고...- 521

===>아 재미있다.


밀티아데스의 일


그녀는 아리프론의 아들 크산티포스에게 출가하여 임신 중 사자를 낳는 꿈을 꾸었다. - 525


제7권 폴림니아 Polymnia


크세르크세르의 원정준비


페르시아 관습상 왕은 후계자를 지명한 다음 출정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 531


스파르타에도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에 태어난 자식과 왕이 된 두에 태어난 자식이 있을 경우 왕위는 뒤에 태어난 자식이 계승하는 것이 관습이라는 것이다. - 532


페르시아인이 들어서 좋지 않게 생각할 내용은 모두 생략해 버리고 상대가 들어 기분 좋을 신탁만을 자신의 신탁집에서 뽑아 들려주었다. - 534

==>가짜 무당이네. 신탁에 의지해 출군을 결정하기도 하는 이 시대에 이런 가짜 신탁은  참 맹랑하다.


원정의 결의를 굳힌 뒤 크세르크세스는 세 번에 걸쳐 꿈을 꾸었다. 그 꿈이야기를 들은 마고스들은 그것이 온 세계의 운명과 관계된 것으로 모든 인류가 크세르크세스에게 예속될 전조라고 해석했다.

===> 그런데 왜 졌지? 신의 뜻이 함께 한다고 믿으며 다들 이런 일을 한 건데.


원정군의 출발


이 소식을 들은 크세르크세스는 헬레스폰토스에게 크게 노하여 가신들에게 바다에 300대의 채찍형을 가하고 또한 족쇄 한 쌍을 바다 속에 던져 넣으라고 말했다. - 551

===>자연 앞에서도 인간의 교만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


원정군은 이다 산 기슭에서 야영 중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의 습격을 받아 많은 병사를 잃었다. - 556

헬레스폰토스 도착과 바다를 건너다


전하 제가 꾼 꿈이 저나 전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그날 밤 이래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특히 이 세상에서 가장 위력있는 두 가지가 전하께 적의를 품고 있음을 깨닫고 마음을 주체치 못할 정도로 두려웠습니다...그 두 가지란 바로 육지와 바다를 가리킵니다. ...육지가 전하께 적의를 품고 있다는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즉 설사 전하의 전군을 저지하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계속해서 진군하시면 하실수록..나날이 늘어가는 거리 때문에 반드시 식량난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 559


그 전도란 말이 토끼를 낳은 것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처음에는 위풍당당하게 자신감을 갖고 그리스로 병력을 진격시켰지만 마침내는 겨우 목숨을 건진 채 본래의 장소로 도망쳐 돌아가게 되리라는 암시였다. - 562


원정군의 병력 점검


육상부대의 총인원이 70만에 이르렀던 것만은 확실하다. 병력의 점검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행해졌다. 우선 1만명을 될 수 있는 대로 한 곳으로 밀집시켜 모은 다음 그 둘레에 원릉ㄹ 그렸다 그러고 나서 그 1만명을 빼낸 다음 원을 따라 배꼽 높이로 돌담을 쌓아올렸다. 이렇게 한 다음 차례로 남은 병력을 돌담 안으로 집어넣는 식으로 하여 모든 병력의 수를 헤아렸던 것이다. 병력 수의 점검이 끝난 뒤에는 민족별로 편성을 마쳤다. - 563


말의 머리 가죽을 귀와 갈기만 붙여둔 채 벗긴 것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갈기는 투구의 장식털 대용이었으며, 말의 귀는 위로 쑥 솟아 있었다. 또한 몸을 보호하는 데도 방패 대신에 학의 가죽을 쓰고 있었다. - 568


미시아인은 머리에 그 나라 특유의 투구를 쓰고 작은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창끝을 단련한 투창을 썼다. - 569


트라키아인은 머리에 여우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몸에는 속옷 위에 제이라라는 형형색색의 웃옷을 걸치고 발과 정강이에는 새끼 사슴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투창과 가벼운 방패, 게다가 소형 단검까지 지니고 있었다. - 569

===>나는 이 부분이 제일 재미있다. 이들의 차림 하나하나를 상상해보면 매우 즐겁다.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만들어낸 컴퓨터 CG 화면의 소스들이 이런 고전일지도 모르겠다.


소의 생가죽을 펼쳐 만든 작은 방패를 지나고, 한 사람마다 리키아제 수렵용 창을 두 개씩 갖고 머리에는 청동제 투구를 쓰고 있었다. 투구에는 청동제 소 귀와 뿔이 달려 이었고, 맨 위에는 장식털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강이에는 붉은 띠로 각반을 두르고 있었다.  -569


페르시아 기병대는 보병과 같은 장비를 갖추었는데 그중 일부는 청동이나 쇠를 두드려 펴서 만든 투구를 썼다. - 571


그리고 그 밖에 가죽 띠로 엮어 만든 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싸울 때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바로 이 망인데 전투 방식은 이랬다. 즉 적군과 만나게 되면 끝을 둥글게 묶은 망을 던져 말이든 사람이든 망에 걸린 것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긴다. - 572


빅트리아인은 모두 전차를 몰았다. ..아리비아인 부대도 보병과 같은 장비를 갖추었는데 모두 속도 면에서는 말에 못지않는 낙타를 몰았다. -572


리키아인은 50척을 냈다. 그들은 갑옷을 두르고 정강이 받이를 댔다. 그리고 산수유나무로 만든 활과 등으로 만들과 깃털이 없는 화살과 투창을 지녔다. 또한 어깨에는 산양 가죽을 걸치고 머리에는 깃털로 테두리를 장식한 펠트 모자를 썼다. 그리고 단도와 낫 모양의 검을 가졌다. - 574


그들은 대장이라 하더라도 실제적인 명령권자는 아니었으며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노예 신분으로 종군한 데 불과했던 것이다. - 576


삼십노선, 오십노선, 소함정, 그리고 소형의 말 수송선을 합하면 그 총수는 3천에 이르렀다. - 576


남편이 죽은 뒤 스스로 독재권을 장악했던 이 여성은 그 때 이미 청년기에 이른 자식도 있었다. 무슨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 아니라 기상이 천부적으로 담대하고 용맹하기 때문에 원정에 참가했던 것이다. - 576


스파르타인은 일대일 결투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고, 더구나 단결할 경우에는 세계 최강의 부대가 됩니다. - 579


그들은 이 왕이 명하는 대로 행동하는데 이 왕이 명하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 즉 어떠한 대군을 맞이하더라도 결코 적에게 뒷모습을 보이지 말고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적을 제압하든지 자신이 죽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580


트라키아에서 테살리아까지


한편 도리스코스를 떠나 그리스로 향하던 크세르크세스는 도중에 차례로 지나는 나라의 국민들을 모두 강제로 종군시켰다. 왜냐하면...처음에는 메가바조스에 의해 뒤에는 마르도니오스에 의해 모두 평정되어 페르시아 왕에게 조공을 바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 581

==> 사람들은 죽어나겠구나. 힘들어서. 왜 이런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는지


시민들은 크세르크세스가 지난다는 소식을 왕의 전령으로부터 듣게 되자 도시 안에 있는 곡물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분배하고 수개월에 걸쳐 보리와 밀을 빻아 가루로 만들었다. 또한 군대를 맞기 위해 되도록 품질 좋은 가축을 사들여 사육하는 동시에 여러 가지 가축과 물새들을 우리와 연못에서 길렀으며 금은제 술잔과 그 밖에 식탁용 집기 모두를 준비했을 것이다....접대받는 쪽은 실컷 먹고 그 자리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 날 아침 천막을 거두고 가져갈 수 있는 집기까지 깨끗이 챙긴 뒤 떠나는 것이다. - 585 


이 부근을 행군하던 도중 사자떼가 식량 수송을 담당하고 있던 낙타 부대를 습격해 왔다. - 587


아테네와 스파르타


노예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시지만, 자유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경험한 일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것이 단지 쓴지 모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각하께서도 한 번 자유의 맛을 알게 되신다면 자유를 위해서는 창 분만 아니라 손도끼라도 들고 싸워야 한다고 우리에게 권하실 것입니다. - 592


페르시아 왕의 출정은 아테네를 토벌하는 것이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그리스 정복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 593


첩자와 사절 파견


신탁을 꺼림직하게 생각했지만 30년간의 평화 기간 동안 자식들에게 성인으로 성장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 600


내가 확신하는 바는 단지 만일 인간이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의 불행과 맞바꾸고자 저마다 불행을 들고 모인다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는 반드시 누구나 가져온 자신의 불행을 그대로 갖고 돌아가라는 것이다. -601


그리스 전체가 결속한다면 강대한 세력이 되어 침입자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중에서 배반자나 구원을 거부하는 자가 나온다면 그리스 전역은 적의 수중에 떨어직 될 것입니다. - 605


아테네에서 온 객이여, 아무래도 그대들은 지휘할 수 있는 인재는 충분한데 지휘받아야 할 군대는 전혀 없는 듯싶구려. 그대들은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것은 다 요구하다니 - 608


페르모필라이로의 진군


그리스군이 둘로 나뉘어 서둘러 출격하는 동안 델포이인은 자국과 그리스 전역의 안부를  우려하여 신탁을 구했다. 그랬더니 사방의 바람에게 기원하라는 신탁이 내렸다. 바람이 그리스의 유력한 동맹자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 617


위에 산출된 전 부대의 병력 수에다 유럽에서 징용된 부대의 병력 수도 가산되어야 한다. ...전투 부대의 총병력 수는 264만 1610명이나 된다. 전투부대의 수는 이와 같았는데 종군한 종복이나 식량 수송용 소형 선박 및 원정군을 수행한 그 밖의 승선 인원 수도 전투 부대 수에 못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그보다 많지 않았을까 생각한다....-619


이 조난에서 페르시아군은 최소한 400척 이상의 함선과 수많은 병사, 그리고 막대한 재산을 상실했다고 전해진다. - 621


페르모필라이 전투


그들은 생사를 건 모험을 시도하기 전에 머리칼을 손질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 629


제8권 우라니아 Urania


아르테미시온 해전


내가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에우보이아인이 바키스의 신탁을 가벼이 여기고 주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여 가재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거나 식량을 비축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파국을 자초했던 것이다. - 651


아테네 점령과 그리스의 해전 준비


시체들은 다음과 같이 처리됐다. 테르코필아이에서 전사한 페르시아군의 수는 실로 2만 명에 달했는데 그 중 1000명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호를 파 여기에 집어넣은 다음 그 위에 흙을 덮고 나뭇잎을 흩뿌려 해상 부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놓았다. - 653


그는 포키스군 중에서 500명의 정예을 선발한 다음 그들에게 온몸을 비롯해 무장 도구에 석고를 칠하게 했다. 그리고 미리 병사들에게 흰 칠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보면 닥치는 대로 죽이라 명해 두고 밤을 틈타 테살리아군을 습격하도록 했던 것이다. - 654


히암폴리스 부근 진입로에 깊은 구덩이를 파고 여기에 커다란 빈 항아리들을 묻은 다음 그 위에 흙을 살짝 덮고 테살리아군이 침입해 오기를 기다렸다. 테살리아 기병대는 포키스군을 섬멸하고자 세차게 달려들다가 이 곳을 딛고 말과 함께 항아리로 빠져들었고 말들은 다리를 다쳤다. - 655


아테네를 완전히 점령한 크세르크세스는 수사로 기마병을 보내 자군의 성공을 아르타바노스에게 알렸다. 사자를 보낸 다음날 크세르크세스는 꿈 때문에 그랬는지 아니면 신전을 불태운 것에 양심을 가책을 느꼈는지 자신을 수행하고 있던 아테네의 망명자들을 불러 모으고 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가 아테네 관습에 따라 희생을 바치라고 지시했다. - 664

살라미스 해전


그리스군은 질서 정연하게 전투에 임한데 반해 페르시아군은 이미 전열이 흐트러져 더 이상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페르시아 군은 이날 최선을 다해 싸웠다. 에우보이아 난바다의 해전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페르시아군 병사들은 누구나 대왕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운 나머지 사력을 다했던 것이다. - 679


아테네군 함장들에게는 아르테미시아를 생포하는 자에게 상금 1만 드라크마를 준다는 특별 명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낱 여자 몸으로 아테네 군대에 대항했다는 사실에 아테네인은 분노를 금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앞서 말했듯이 무사히 도피했고, 함선의 파괴를 면한 다른 부대로 팔레론으로 들어갔다. - 682


크세르크세르의 퇴각


이 헤르모티모스는 우리가 아는 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무서운 복수를 행하여 옛 원한을 푼 자이다. ...헤르모티모스는 사르데스에서 다른 진상품과 함께 왕에게로 보내어져 이윽고 크세르크세스 측근 환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헤르모티모스는 파니오니오스의 자식들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고는 그로 하여금 자식들 음부를 직접 절단하게 해다. 그 일이 끝나자 이번에는 그 자식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거세하게 했다. 이리하여 헤르모티모스는 원한을 풀었던 것이다. - 688


지금 해전에 패한 페르시아 왕은 유럽에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도망쳐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현명한 계책이다. -689 싸움에 패해 궁지에 몰린 인간은 재차 사움을 시도하여 앞서의 시패를 만회하려는 경향이 있고, 우리가 저 구음과 같이 바다를 새까맣게 뒤덮었던 대군을 몰아내고 우리나라와 온 그리스를 구해 낼 수 있었던 것을 실로 뜻밖의 요행이었소. 그러니 도망치는 적을 쫒지 말도록 합시다. - 690


그의 휘하에는 비정규군 소수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행군 도중, 지나는 곳 주민에게 닥치는 대로 그 수확을 빼앗아 식량으로 충당했다. 곡류가 보이지 않을 때는 땅에서 자라는 들풀이나 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또한 행군 도중 역병과 이질이 군을 휩쓸어 사망자가 속출했다. - 693

===>불쌍하다.



마르도니오스의 아테네 교섭


그들이 여울을 반쯤 지날 무렵 일찍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맹렬한 높은 파도가 습격해 왔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자는 빠져 죽고, 수영을 할 줄 아는 자는 배를 타고 나온 포티다이아인에게 살해당했다. 포티다이아인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이 높은 파도와 잇따른 조난의 원인은 페르시아인들이 포세이돈 신전과 도시 바깥에 이는 신상에 불경스런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들의 설명이 맞다고 생각한다.


제9권 칼리오페 Calliope


마르도니오스의 아티카 침공과 철수

플라타이아 포진

페르시아군이 풍습에 따라 전사한 마시스티오스 장례에 정성을 다하고 있는 동안 그리스군은 적의 기병 부대를 격퇴하고 더욱더 사기가 올라 있었다. 그리하여 먼저 사시스티오스 사체를 수레에 싣고 진열을 따라 끌고 돌아다녔다. - 718


지금과 같은 때에 부대를 배치하는 일을 가지고 내분을 일으켜서는 안될 것이요. 스파르타인 여러분, 귀군이 어느 지점을 맡도록 명하든 우리로서는 귀군의 뜻에 따를 생각이요. 우리는 어느 곳에 배치되더라도 용감히 싸울 각오이니 부디 명령을 내려 주시오. 우리는 그에 따를 것이오 - 721


페르시아군 병력은 전에도 명백히 제시했던 것처럼 총 30만이었다. 마르도니오스에 가세한 그리스인 부대의 수는 애초부터 병력 수에 대한 조사가 한 번도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러나 내 추정으로는 총 5만에 달했으리라 생각된다. 이상 전선에 배치된 병력은 모두 보병이었고, 기병 부대는 별도로 배치되었다. - 724


플라타이아 전투


한편 잘라낸 발조각은 남아 있는데 본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으므로 스파르타인은 그 대담무쌍한 행위에 혀를 내둘렀다. ...상처를 치료하고 의족을 단 그는 이때부터 공공연히 스파르타의 적이 되었다. - 727


실은 식수 문제도 그렇지만 그들을 걱정에 빠뜨리는 다른 사정이 있었다. 그리스군의 식량이 바닥난 와중에 식량 조달을 위해 펠로폰네소스에 파견했던 병졸들이 적의 기병대에게 가로막혀 진영에 도착할 수 없었던 것이다. - 732


미칼레 전투


페르시아 병사들은 스파르타군의 긴 창 자루를 잡고 부러뜨렸다. 페르시아군은 용기와 힘은 뒤떨어지지 않았지만 무장이 견고하지 못한데다가 훈련이 미숙했고, 전술에도 매우 약했다. 그들은 혼자 도는 10인 안팎 병상들이 한 무리가 되어 스파르타군 속으로 돌진해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 738


그런데 한 번 방벽이 무너지자 이국군은 이미 통제력을 잃은 채 한 사람도 방어전을 펼치려고 하지 않았다. 수십만이 좁은 지역에 갇혀 공포에 덜며 망연자실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그리스군은 제멋대로 살육을 자행할 수 있었다. 총 30만 군대 중에서 아르타바조스가 인솔해 도망친 4만을 배고 살아남은 자가 3천명이 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 741




크세르크세스의 사련파우사니아스는 포고령을 내려 전리품에 손을 대는 것을 금하고 국가 노에에게 명하여 금품을 모으게 했다. 노예들은 진영 일대에 흩어져 수색한 끝에 금은제의 가구를 갖춘 막사나 금은 장식이 붙은 침대, 금제 혼주기, 술잔, 그 밖의 술그릇 등을 찾아냈다. 마차에서 발견한 자루 안에는 금은제 냄비가 들어있었다. 또한 땅 위에 늘어진 시체들로부터 황금제 팔찌, 목걸이 페르시아풍 단검 등을 떼어냈다. - 745

==>이런 장면이 전투 막바지에는 당연히 있겠구나. 아래의 매장 장면도.


그리스군은 플라타이아에서 전리품 분배를 끝낸 후 각국별로 자군 전사자를 매장했다. - 747


그리스군의 세스토스 공략


성벽 안에 있던 부대도 최악의 식량난에 빠져들었다. 심지어는 침대 가죽 띠를 삶아 먹기까지 했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


출생에 대하여


헤르도토스는 그의 저서에서 자신의 집안이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탈선된 이야기나 여담을 비롯해 온갖 사건들을 기록했지만 정작 그 자신의 모습은 그러한 이야기들 뒤에 가려져 그의 생애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 765


그의 저서에서는 그가 할약한 연대도 장소도 알아낼 수 없다. 즉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확정지을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도 헤로도토스는 이 시인과 후배 역사가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 766


할리카르나소스에서 태어나 투리오이로 이주해 그곳 시민이 되었다는 점은 헤르도토스의 생애 가운데 핵심적인 사실인 듯 하다. - 767


고대인이 알고 있던 것은 오히려 출생연도와 성년(활동 당시 40세)이었다. 여기서 페르시아 전쟁은 아마 크세르크세스의 원정(기원전 480년)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 768


헤르도토스 출생연도는 기원전 484년 정도가 되어 디오니시오스의 주장과도 합치된다. - 769


명문의 자손


그의 아버지 이름은 릭세스, 어머니 이름은 도리오였다. - 769


헤로도토는 명망있는 집안 자손으로 태어났다고 했는데 가계나 친척 관계가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친척들이 협력하여 참주와 항쟁하였다는 사실을 보면 이 내용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귀족들만이 이런 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770


귀족주의보다도 헤로도토스의 특징으로는 ‘특이한 종교성’을 들 수 있다. 그 종교성은 어린 시절부터의 소질과 환경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771


헤로도토스 일족은 종교적 분위기가 강한 집안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헤로도토스는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전조나 신의 섭리를 믿고 있었다. - 772

역사 탐구활동


헤로도토스는 대체로 참주정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이 여성참주에게만은 ‘나는 그녀를 절찬하노라’라고 말했다. 그때의 여러 상황을 생각해 보면 헤로도토스의 아버지 릭세스가 아르테미시아의 지휘 하에 그리스 원정에 종군했거나 아니면 일가친척이나 이웃 중에 종군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 774


헤로도토스는 투리이오에 식민으로 참가하기 전에 유럽이나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여행을 감행했는데 그 정확한 연대나 기간에 대해서는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아테네에 상당히 오랜 기간 머물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머물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페리클레서, 소포클레스 등의 명사들과 교우 관계를 맺고 아테네인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던 걸로 보인다. - 775


적어도 최종적인 구상은 그가 아테네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은 뒤에 비로소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된다. - 775


<수다사전>에 의하면 헤로도토스가 투리오이에 식민하기 전에 사모스 섬에서 저서를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플리니우 이탈리아 투리오이에서 그의 역사를 저술했다고 한다. 투리오이 창건은 기원전 444년이기 때문에 이 년대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지만 그곳에서 저술활동을 계속하여 거의 완성에 이르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 776 

여행과 저작


헤로도토스의 경탄할 만한 긴 여행은 그가 사모스에서 귀국한 뒤 투리오이로 이주할 때까지 10여년 간 몇 차례에 걸쳐 행해졌다. 그러나 이 긴 여행의 연대나 그 밖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 다만 <역사>의 서술 내용을 보고 그의 발길이 미친 지역의 범위를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그의 서술에는 단순히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그것을 답사해 보고 들은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 777


특히 당시의 교통사정을 생각하면 한 개인에 지나지 않던 헤로도토스가 이러한 대탐험 여행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실로 커다란 수수께끼이다. 경제적인 문제는 물론 언어나 생활습관의 차이에서 오는 여러 장애, 여행 도중에 일어나는 위험이나 재해 등 그 어려움이라는 것은 아마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 778


그러나 이미 창작이라는 여과과정을 거친 것이므로 이른바 다큐멘터리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 778


<역사>의 구성


오늘날 남아 있는 <역사>는 9권으로 나뉘고 권마다 뮤즈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책의 본디 모습은 아니고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교정자가 그렇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 779


그러나 <역사>의 권 구분도 전적으로 교정자의 뜻에 따른 기계적 조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권마다 그런대로 통합되어 있고, 구분 방식에서 별다른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 779


<역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기원전 499년부터 시작된 예비단계(6권에 묘사된 이오니아의 반란과 마라톤전투 포함)와 함께 기원전 480~479년의 전쟁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전반부와 페르시아제국의 성장과 조직, 지리와 사회구조 및 역사를 기록한 후반부가 그것이다. - 780


본격적인 서술은 작자에 있어서 최초의 역사적 인물인 리디아의 왕 기게스로부터 시작된다. - 780


제 7~9권에서 자세히 다루는 크세르크세스 그리스 원정은 <역사>의 중심부이다. 여기서는 서술 속도고 자연히 빨라지고 주제에서 어긋나는 설명이나 군더더기도 줄어든다. 살라미스, 플라타이아의 2대 전투로 페르시아전쟁은 실질적으로 종결되지만 마치 여운과도 같이 그 뒤에도 몇 번의 작은 전투가 벌어진다. - 781


놀랄 만큼 정밀한 계획에 따라 집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제에서 벗어난 내용이라든지 군더더기 기술도 그 자신이 말하듯이 저자가 의식해서 넣은 것이지 결코 착각을 했다거나 부주의하여 잘못 넣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역사>가 최종적인 완성을 볼 때까지 발표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곳곳에서 구연해서 명성을 얻고 수입도 확보했을 것이다. - 782


<역사>는 이런 개별적인 구연활동과는 별도로 웅대한 구상 아래 퇴고를 거듭하며 이루어낸 일대 역작인 것이다. - 782


<역사>의 서술방법


헤로도토스의 역사관이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망명자이며 거의 만성적인 여행자였음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가 외국어를 거의 몰랐던 점으로 볼 때 그의 사상 형성에 중요했던 부분은 역시 그리스 세계 내에서의 조사활동이었다고 생각된다. - 783


첫째, 그리스 북서쪽의 벽지 도도네에 있는 제우스의 신탁소를 방문하여 그 곳의 세 무녀한테서 그리스 신들에 대한 숭배의 역사에 대해 배웠다. - 783


신탁소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전설이 잔뜩 쌓여 있었으므로 적극적으로 그것에 대한 설명을 들었던 것 같다. - 784


둘째, 북동 그리스의 명승지 템페 협곡에 대해서는 그 지형을 상세하게 설명한 뒤 산악 사이의 균열은 지진의 결과로 생긴 것이라 결론내렸다. 이것은 스스로 관찰한 다음에 내린 결론이었다. - 784


셋째, 중부 그리스의 험준한 산 중턱에 있는 델포이 신탁소를 발문했다는 증거는 매우 많다. - 784


넷째, 중부 그리스의 테베를 방문했다. - 785


다섯째, 마찬가지로 중부 그리스의 옛 전장인 테르모필레도 방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785


여섯째, 역시 중부 그리스, 보이오티아 남부의 옛 전쟁터였던 플라타이아이도 방문한 것으로 생각된다. - 785


일곱째,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네게아를 방문한 증거가 있다. - 785


여덟째, 역시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스파르타를 방문한 것도 확실하다. - 786


아홉째, 코린토스와 그 근방의 지협도 방문했을 것이다. - 786


열째, 확실한 증거는 부족하지만 성지 올림피아를 방문하여 봉납품 등을 조사하기도 했다. - 786


<역사>의 테마


그가 글을 쓰는데 있어 정확성과 공정성을 기했다는 것은 스스로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고, 실제 서술방식에서도 충분히 간파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가 수집한 자료 중 그 자신이 직접 보고 들어서 확인한 사실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구비전설이라든지 풍문이나 전승 등에 기초를 둔 것이다. - 787


이처럼 현대인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비현실적인 신화나 전설이 헤로도토스의 작품에는 많이 소개되어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역사상의 인물에 관한 일화 역시 마찬가지다. - 788


헤로도토스는 서술 대상을 사실에 한정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헤로도토스는 조사여행에서 들은 내용, 심지어 그 자신도 사실이라고 믿지 못할 이야기조차 무조건 기록한다는 방침을 끝까지 고수했다. - 790


고대 그리스사 연구자인 야코비는 헤로도토스의 작품에 신화, 전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주목했다...그는 헤로도토스의 작품에 두 명의 헤로도토스, 즉 역사가가 되기 전의 헤로도토스와 역사가로서의 관점을 가지게 된 헤로도토스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 전체를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야코비에 따르면 여행을 자주 하던 헤로도토스는 처음엔 지리학자, 민족학자의 관점에서 글을 썼으나 아테네에 와서 아테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관찰하고는 페르시아전쟁의 의의를 깨달으면서 역사가로 성장해 갔다고 한다. - 791


<역사>의 저작특성


<역사>의 특징 중 하나는 제 2권의 이집트나 제 4권 스키타이의 풍토 및 습속에 대한 기술과 같이, 각각 독립된 저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상세한 지리적 서술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 791


앞서 헤로도토스의 자유롭고 활달한 기상은 식민지 특유의 기풍에서 유래된 것이라 했다. 그런데 같은 환경에서 만들어진 언뜻 이것과 모순 되는 듯한 그의 또 다른 특성 중 하나는 식민지 사람들을 특징짓는 독특한 보수주의다. 헤로도토스의 경우, 그것은 오히려 고풍스런 운명관이나 신앙심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 792


헤로도토스 자신이 제8권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신탁이나 예언의 진실성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던 듯 하다. 그 시대 그리스 본토의 지식인 대부분은 이러한 운명관이나 신앙을 이미 시대에 뒤진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 792


헤로도토스가 살아온 시대에는 역사 기술에 한해서가 아니라 산문체로 쓴 것 자체가 신기한 것이었다. - 792


당시 학문의 각 분야 사이에 명확한 구별이 없어, 오늘날이라면 지리학자, 인류학자, 경제학자의 연구대상이 되는 범위까지도 모두 역사의 대상이 되었다. - 792


헤로도토스의 자작을 읽고 느껴지는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작품에 어려 있는 강한 종교성, 즉 소박하고 유치하다고도 할 수 있는 저자의 신앙일 것이다. 이는 저자의 타고난 성격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나, 동시에 망명자나 여행자라는 이례적인 입장, 그리고 조사활동의 결과로서 생긴 특징이기도 하다. 평범한 시민이라면 전통적인 가족종교(조상숭배)나 국가종교의 테두리 안에 머물며, 나아가서는 정치활동 동에 몰두하며 정신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테두리를 벗어난 사람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 793


헤로도토스는 인생의 주요 부분을 여행자로서 보냈으며, 그로 인해 종교적 인간 일 수 밖에 없었으나 이러한 인과관계에 또 다른 요인이 추가된다. 망명자나 개인적인 여행자에게는 그리스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정치기관에 출입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이집트에서도 바빌론에서도 헤로도토스가 자세히 조사하고 견학한 것은 주로 신전이었고 여러 가지 설명을 들려준 이들도 신관들이었다. - 794


역사의 아버지 유래


헤로도토스의 경우에도 역사학의 창시자가 아니라 그 때까지의 무미건조한 역사 서술을 혁신하여 본격적인 역사를 창시한 인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세 사례에서 공통적인 의미를 끌어낸다면 ‘제1인자, 최고의 지도자’ 정도가 될 것이다. -798


헤로도토스 평가와 업적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특히 초기 오리엔트 연구가들의 경우, 신뢰도 문제는 불문하고 헤로도토스를 단서로 하지 않고는 작업을 진행하기가 곤란했다. - 802


물론 새로운 지식으로 <역사>의 서술이 보충 또는 수정되어야 할 경우도 적지 않겠지만 도리어 진실성이 입증되는 부분도 앞으로 더욱 증가할 것이다. - 802


그런데 펠링크는 헤로도토스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헤로도토스는 역사 자체가 아닌, 역사적 사실을 적당히 차용해서 이야기하는 일종의 말하기 기법을 발명했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펠링크의 태도는 다음에 소개한 호바르트의 입장과 비슷하다. - 804


그렇게 당황해할 필요는 없다. 어째든 헤로도토스는 자세한 것을 빠뜨리지 않는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여행가였으며 훌륭한 지리학자였다. 오늘날 헤로도토스에 대한 연구가 여러 면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 새로운 헤로도토스상이 구축되고 그에 대한 평가는 높아지고 있다. - 804

 

 

3. 내가 저자라면


내가 저자라면 이야기의 출처를 밝히겠다. 이건 어떤 신탁소의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그는 이걸 누구한테 들었다더라, 이건 내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랑 같이 조사한 거다, 직접 쟀다든가, 직접 보았다든가, 이건 책에서 본 거고, 이건 이런 정보를 근거로 내가 추측한거고, 어쩌고 저쩌고 식으로 정보의 근원이나 정보를 얻은 방법을 명시하겠다. 이왕이면 시간과 공간을 명시하면 더 좋겠다. 이건 우리 시대 사람이어서 가능한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책에서 엉뚱하고 고약한 취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민속학적인 풍습 이야기, 군인들의 차림, 무기, 잔인한 복수와 처벌법, 신탁과 꿈 얘기가 재미있었다. 어떤 것은 아라비안 나이트 만큼 황당했다. 7권의 크세르크세스군의 각 민족 병사들의 차림은 한 번 그려보거나 누군가가 그린 것을 보고 싶었다. 양 날 도끼를 허리에 차고 있는 민족 옆에 투망을 던지는 민족이 있고, 어떤 민족은 전차를 타고 어떤 민족은 낙타를 탔다. 다른 부분은 지루하고 힘들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말의 머리 가죽을 귀와 갈기만 붙여둔 채 벗긴 것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갈기는 투구의 장식털 대용이었으며, 말의 귀는 위로 쑥 솟아 있었다. 또한 몸을 보호하는 데도 방패 대신에 학의 가죽을 쓰고 있었다. - 568

미시아인은 머리에 그 나라 특유의 투구를 쓰고 작은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창끝을 단련한 투창을 썼다. - 569

트라키아인은 머리에 여우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몸에는 속옷 위에 제이라라는 형형색색의 웃옷을 걸치고 발과 정강이에는 새끼 사슴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투창과 가벼운 방패, 게다가 소형 단검까지 지니고 있었다. - 569


내가 출판사 관련 담당이라면 두 가지 생각을 해보겠다. 아, 우선 이 책의 출판사 동서문화사에 나는 존경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 값이 너무 쌌기 때문이다. 15000원, 삼겹살 두 근 값도 안되는 값으로 어마어마한 책을 샀다. 그리고 구본형선생님이 하필 이 출판사의 책을 권해주는 것은 가장 좋은 번역이고,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라 추측했다. 나는 (분명 돈은 안될 것 같은데) 이 출판사가 고전에 대한 애정과 고전 읽히기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진 게 아닐까 혼자 생각하며 뭉클해했다.

 

첫 번째는 고전을 쉽게 접하기 위한 방법, 독자에 대한 서비스다. 주방저울로도 잴 수 없는 이 무겁고 두꺼운 책을 수월히 읽게 하기 위해서 나라면 이걸 좀 더 쉽게 편하게 접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을 것 같다. 우선 아홉 뮤즈의 조각이나 그림을 찾아서 장마다 넣겠다. 나는 처음에는 이 뮤즈들의 주특기가 내용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한 뮤즈당 100페이지 남짓이니까 그 뮤즈의 그림이나 조각의 사진을 아홉 장이 시작되는 첫 머리에 독립해서 넣겠다. 그리고 그 장의 내용을 대강이라도 좀 추리거나 관련된 조각이나 돌무덤이라도 그림을 넣으면 훨씬 부담이 덜할 것 같다. 뮤즈는 헤로도토스 본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중 사람들에 의해서 편집되는 과정에서 들어갔다고도 하는데, 신탁, 민속학적, 지리학적 지식을 다채롭게 모으고 자신이 ‘나는 여담을 좋아한다’고 한 걸 보면 오히려 뮤즈들이 영감, 특별한 감흥을 주어서 이런 일의 저자라기 보담 도구가 된 듯, 겸손한 편집의 형태를 보인다고도 볼 수 있겠다 싶었다. 몇 개의 지도가 나오지만 생소한 인명과 지명, 지도는 역시 어렵다. 그림들을 보면 더 즐거울 것 같다. 이건 본래 이 책의 구성인 9장 형태를 유지하면서 즐겁게 가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참고할 만한 것, 연관된 수다꺼리, 이야기를 제공하겠다. 이 책과 관련된, 지금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좀 살아있는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가 곁들여지면 더 읽기가 즐거울 것 같다. 서양 고대사 관련 책이든 싸이트든 찾아볼 만한 걸 참고로 좀 실어주면 좋겠다. 이왕이면 쉬운 책이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고급 독자는 아닐테니까 말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같이 역사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지만 고전 어르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초급 독자를 배려해서다. 김영사에서 <어린이를 위한 헤로도토스 역사>가 나왔던데 그런 책 이름이 있으면 어떨까? 만화로 된 것,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도 좋을 것 같다. 그럼 책 만드는 돈이 많이 들래나? <헤로도토스 역사>가 다루고 있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거나, 그 지명과 인명이 나오는 영화가 미술이나 소품으로 상을 받기라도 했다면, 그 고증과정을 즐길 수 있어 좋을 것 같다. 또, <헤로도토스 역사>를 즐겁게 읽으며 거기서 삶의 지혜를 얻는다는 이가 있으면 그이의 인터뷰를 넣든지, 고전 읽기 모임이 있다면 모임 후기라도 있으면 좋겠다. 나는 역자 박현태씨의 약력을 보고 이 이가 역사와 상관없는 전공과 직업을 가졌으면서 이 책을 번역한 걸 보고 역자 후기를 읽으며 헤로도토스 역사를 아끼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어보길 원했는데 없어서 아쉬웠다. 이런 생각으로 읽어가다 보니 이전에 구본형 칼럼에서 ‘아픈 사람이 있으면 광장에 데리고 나와서 소문을 내라’는 걸 읽었던 기억이 났다. 참 재미가 있었다. 그 칼럼은.


세 번째는 전적으로 페르시아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구별하지 못하는, 그리고 BC 개념을 이해할 연표가 머릿 속에 내장되어 있지 않은 나같은 독자를 위해서 역사적인 사건의 씨줄과 날줄을 추측할 수 있는 연표를 살짝 그려 넣어주면 좋겠다. 중학생 수준의, 시험과 상관없는 역사 연표를 한국사와 세계사로 해서 뒷 쪽에 있으면 좋겠다. 그건 <헤로도토스 역사>를 즐겁게 읽기 위한 에피타이저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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