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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9일 09시 5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 에이미 추아(Amy Chua)는 필리핀에서 이민온 중국계 미국인 2세이다. 1984년 하버드에서 경제학 전공으로 최우등졸업(Magna Cum Laude)했으며 1987년 하버드 법대에서 국제법 박사학위(J.D.)를 받을 때도 우등졸업(Cum Laude)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편집장을 해 많은 이들에게 친숙해진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에서 수석편집장(Executive Editor)를 지내기도 했다. 몇 년간의 로펌 생활을 거쳐 1994년부터 1999년까지 듀크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1999년부터 2001년까지는 컬럼비아, 스탠포드, 뉴욕대 등에서 방문교수로 일했다. 2001년 예일대 법대로 옮겨와 국제법과 국제통상을 가르치고 있으며, 2002-2003년 예일법대 우수강의상(Distinguished Teaching Award)을 받았다. 2003년 출간한 처녀작 <불타는 세계 World on fire>는 이코노미스트지가 선정한 ‘2003 올해의 책’으로 선정될 정도로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불타는 세계> 서문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필리핀 출신 중국계 이민자임을 숨기지 않으며 필리핀에서의 경험담을 풀어나가고 있다. 또한 5년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2007년 <제국의 미래 Day of Empire>를 내놓았는데, 미국에 대한 회의와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전세계 식자층에게 널리 읽혔다. 저자가 역사 비전공자임에도 역사학자들에게 극찬을 받았는데 폴 케네디(Paul Kennedy)는 “거시사(big history)의 고전으로 남을 것”이라고,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고대 페르시아제국으로부터 현대 미국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흥망성쇠를 독창적인 이론으로 흥미진진하게 다룬 교양서”라고 호평했다.

 그녀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그녀의 가족, 특히 아버지를 빼놓을 수 없다. 저자는 책에서 “나는 특별한 가족 안에서 힘과 자신감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아버지 레온 추아는 미국에 가려는 필사적인 노력 끝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입학허가를 받아 1961년 도미에 성공한다. 이후 2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불과 서른한 살에 종신교수로 임용됐다. 공학 부분의 카오스 이론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쳐 가족들과 함께 세계를 둘러볼 수 있었으며, 딸들은 런던과 뮌헨, 로잔 등에서 공부했다. 그의 네 딸은 하버드와 예일 등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은 의사, 변호사로 성장했고 큰 딸은 단행본 두 권으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 저술가가 됐다. 유대인이긴 하지만 대학 교수인 사위를 뒀다. 이 정도면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미국인의 단면이다. 그는 성공했는가? 내 생각엔 그렇다. 예일대 법대 교수에 미모까지 갖춘 똑똑한 딸이 중국민족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이 책을 저술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부부 저술가’를 동경하는 나에게 남편인 제드 러번펠드(Jed Rubenfeld) 역시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사실 또한 흥미로웠다. 그는 1980년 프린스턴을 졸업했는데, 졸업논문으로 프로이트를 택했고, 이후 줄리아드 연극원에서 셰익스피어를 전공한 뒤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해 1986년 법학박사(J.D.) 학위를 받았다. 추아와는 하버드 법대에서 선후배로 만난 셈이다. 그도 역시 예일대 로스쿨에서 헌법학과 프라이버시 등을 가르치고 있다. 법률과는 동떨어진 것 같지만 그가 문학에 대한 열정을 잊지 못해 조금씩 소설을 쓰기 시작해 내놓은 책이 <살인의 해석 (The) interpretation of murder>이다. 이 책은 출간되기 전부터 화제가 되었는데, 작가의 처녀작인 이 책의 판권을 사기 위해 선인세 100만 달러를 지급한 출판사가 있었는가 하면, 초판을 18만 5000부나 찍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여러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얻었으며 전세계 32개국에 판권이 팔렸고, 우리나라에서도 2007년 2월에 번역본이 발간된 이후 베스트셀러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부부가 각자의 관심분야를 깊이 파들어가며 집필하고 토론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부부가 식탁에서, 아이들과 어떤 대화를 나눌지를 그려 보는 것만 해도 무척 부럽다. 자유로운 저술 활동을 해나가는데 예일 법대의 굴레가 버거워진다면, 인세로도 충분히 생활을 감당할 수준이니, 그들이 얻은 이 자유 또한 부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책에서 자신의 개인사를 늘어놓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극도의 객관성을 지향하는 미국에서, 그것도 법대 교수가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솔직히 의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그녀의 전략이라고 본다. 미국 신문들은 대통령 선거철이 되면 자신들의 지지후보를 밝힌다. ‘우리는 이런 논조를 가지고 있으니, 그런 점을 감안해 우리 기사를 읽어 달라’고 선언하는 셈이다. 그녀 역시, ‘나는 이런 배경을 가졌고, 그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그런 점을 잘 살피며 책을 읽어 달라’고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쉽진 않겠지만 하버드 출신의 예일 법대 교수라는 그녀의 이력에 경외감부터 갖고 무조건 수용하기보다, 그녀가 미국과 중국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어떤 실수를 범하는 것은 아닐지 긴장감 있게 쫓아가는 편이 독자로서 더 나은 방법인 것 같아, 그런 방식으로 읽어 보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곳곳에 넣음으로써 작가가 얻는 이득과 손해가 있다고 한다. 내 이야기를 빼놓고는 글을 쓰지 못해 고민인 나에게 그녀는 역할 모델이 되어줄 것 같다. 또한 그녀의 뿌리 찾기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참으로 공감이 많이 간다. 뿌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은 누구나 어느 정도 가지고 있겠지만, 미국에서 자란 천재소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느라 얼마나 고민했을지는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다. 성인이 되어 수 차례 중국에 찾아가 자신의 뿌리를 찾는 모습에서 ‘콤플렉스’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그녀의 깊은 고민과 그에 따른 용기 있는 실천을 읽을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책에서 “나는 증조부뿐 아니라, 중국에 사시던 먼 조상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109페이지)”고, “멸망한 제국(중국, 그리스, 페르시아, 터키, 로마 등)에서 핏줄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는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역사와 문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바닷가를 늘 서성이고 있다. (110페이지)”고 고백한다. 게다가 그녀는 “선택적 편견을 피해가기 위해 패권국가의 위상에 부합하는 역사 속의 사회들을 모두 고찰했다. (21페이지)”고 했다. 혹여 자신의 성장배경이 오해를 살까 두려워하는 감정이 아직도 그녀를 지배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곳곳에 나오는 과도하게 잔인한 사례들에 중국과 관련한 것이 해당되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중국 부분에서 파룬궁과 티베트 사태도 서방 언론이 줄기차게 읊어대고 있다고 한 줄만 걸칠 뿐 지나치게 상세한 표현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유달리 중국 민족, 한족만 고상하게 잔인함 없이 성장해올 수 있었을까? 140페이지 위구르족에 대한 설명 부분, 189페이지의 외설스러운 의식, 262페이지의 명나라 해군력과 기술 부분, 263페이지 약탈도 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는 저자가 중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 객관성을 잃은 것이 아닐까 심히 의심이 들었다. 또한 (그녀 남편의 배경인) 유대인들에 대한 묘사도 일방적으로 ‘피해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유대 민족의 수천 년 간의 수난의 역사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부정적인 표현은 일체 없는 것이 이상하다. 나치 때도 유대인보다 많은 수의 러시아, 동유럽 인들의 학살이 있었지만 유독 유대인들의 학살만 기억하게 된 것은 미국의 요직에 오른 경제계, 문화계 인사들 덕분이라는 것을 익히 배운 터라, 개운치 않았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수많은 단어의 나열 뒤에 진정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아채게 되기도 한다. 읽으며 내내 ‘중국(한족)이 지금까지 극도의 폐쇄성을 지켜와서 그렇지, 앞으로 좀 더 노력한다면 미국을 능가할 세계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민족이긴 하다’는 것이 저자의 진정한 목소리라고 느낀 것은 나 혼자 뿐일까? 중국이 초강대국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저자의 목소리에는 진한 아쉬움이 배어 있는 듯하다.

 서평을 찾아보다가 <로마인이야기>를 저술한 시오노 나나미와 에이미 추아를 비교하려는 시도를 보았다. 로마 시대를 너무도 사랑해 역사에 남을 집필활동을 해나가고 있는 일본 여성 시오노 나나미, 자신의 뿌리를 찾다 미국과 중국 양쪽에 대한 사랑의 마음에서 이런 책까지 풀어낼 수 있는 중국계 여성 에이미 추아를 보면서, 한국에서도 이런 여성 작가 한 명쯤 나오면 어떨까, 그게 나라면, 그게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을 거친 누군가 라면 어떨까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3. ‘내가 저자라면’ -

 500페이지가 넘는 책 한 권을, 지금까지의 존재했던 모든 제국, 또는 제국으로 불릴 수 있을 만한 나라의 역사를 모두 ‘관용’과 ‘불관용’이라는 코드로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방대한 역사를 이 한 단어에 끼어 맞추기 위해 ‘상대적인 관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중간중간 넣으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관용은 초강대국의 부상에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도 그녀의 주요한 주장 중의 하나다.

 5년에 걸쳐 저술했다고 하는데, 저자의 성실한 자료수집과 논리를 꿰는 능력에 먼저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저자는 무척 친절하다. 두꺼운 책을 시작해가기 전에, 서문에서 요약을 잘 해 놓아 책의 구성을 엉성한 얼개로나마 독자의 머릿속에 그려주려 했으며 각 장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한 ‘접착제’ 구실을 할 문장들을 많이 배치해 놓았다. 작은 배려이지만 이런 노력을 하지 않은 책을 너무 많이 봐온 탓인지, 무척 반가운 부분이었다.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고 다음 내용이 궁금해져 책을 잡은 손을 쉽게 떼지 못하게 하는 묘미를 가졌다. 이런 책을 쓰기 위해서는 노력에 더불어 천부적인 재능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제국의 부상의 이유를 관용, 쇠퇴의 이유를 불관용으로만 풀어내다 보니 처음 한두 장을 지나면 내용이 빙빙 도는 느낌이다. 케이스 스터디에 강한 법대교수다운 풍성하고 흥미진진한 사례가 읽는 재미를 더하기는 하지만, 내용은 빼다 박은 듯 같다. ‘관용’(또는 상대적 관용) 덕분에 흥하고, ‘불관용’이 만연하면서 망해간다. 미국 내 한 리뷰는 “추아는 그녀의 케이스를 잘 방어하고 있다(Chua defends her case well)”고 썼는데, 이렇게 많은 케이스를 하나로 꿰어내는 그녀를 보며 ‘참 머리가 좋은 사람은 맞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굳이 이렇게 길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이렇게 쓸데없이 잔인한 장면을 왜 삽입했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곳도 많았다. ‘나 이만큼 많이 아는 사람이니, 그냥 잠자코 내 말을 들어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 뿐일까? 그러나 그녀의 핵심 주장인 ‘관용’과 ‘불관용’에 끼워맞추기 위한 사례들 일색이다 보니 읽다 보면 ‘또 그 얘긴가?’하고 지루하게 늘어지는 부분이 참 많았다.

 번역가의 실수인지는 몰라도 ‘주목해야 할 점(사실)은’ 이라는 구절이 너무 많아 뒤로 갈수록 거슬리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길게 구구절절 늘어놓다 보니 핵심을 잃지 않도록 이런 구절을 남용한 것 같은데, 주목해야 할 점을 짚기 전에, 충분한 만큼 추려내고 핵심만을 남긴 책을 저술하려 노력했는지 묻고 싶다.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압축하고 절제하여 핵심만을 전달하는 것 또한 능력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서문 : 세계 제패의 비결

그러나 초강대국이라는 매우 희귀한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책은 아직까지는 찾아볼 수 없다. (6페이지)

한 사회는 어떤 경로를 거쳐서 단순한 대국이 아니라 세계적인 패권을 휘두르는 강국이 되는 걸까? 한 사회가 그런 패권을 손에 넣었다면, 무엇이 그 패권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6~7페이지)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초강대국들은 서로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적어도 해당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절대적인 우위에 오르기까지는 하나같이 대단히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나라들이었다. (7페이지)

제국의 쇠퇴는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쇠퇴의 씨앗을 뿌린 것 역시 관용이었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의 경우 관용은 결국에는 극적인 변화 지점을 건드려서 반목과 폭력을 유발했다. (7페이지)

한 사회가 한 지방이나 지역이 아닌, 전 세계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군사적 경제적 면에서 세계의 최첨단에 서 있어야만 한다. (9페이지)

한 사회가 세계적인 차원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인종, 종교, 배경을 따지지 않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능력과 지혜를 갖춘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야만 한다. (9페이지)

그들이 이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의지해온 것이 바로 관용이었다. (9페이지)

내가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권과 관련된 현대적인 의미의 관용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관용은 정치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의미한다. (중략) 아주 이질적인 사람들이 특정한 사회에서 생활하고 일을 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좀더 명확하게 이야기하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종, 종교, 민족, 언어 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회에 참여하고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일컫는 것이다. (10페이지)

요컨대 이 책의 핵심적인 개념은 ‘상대적인’ 관용이다. (중략) 경쟁자들과 비교해서 더 관용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10페이지)

관용이 세계 제패에 이르는 충분조건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중략) 지리, 인구, 천연자원, 그리고 지도력 등의 추가적인 요소들이 반드시 합쳐져야만 세계적인 패권 국가라는 희귀한 존재가 출현한다. 물론 운도 작용한다. (11페이지)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관용이 세계 제패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 그리고 역으로 말하면, 불관용은 초강대국의 쇠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12페이지)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종주의, 종교적 광신, 혹은 인종 청소를 토대로 한 사회가 세계적인 패권 국가가 된 사례는 없었다. (12페이지)

미국은 관용을 통해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성장한 전형적인 사례일 것이다. (12페이지)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것은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한 것과도 관계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이 급격히 성장하는 컴퓨터 시대에 기술적, 경제적 측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 것과도 관계가 있다. (13페이지)

미국은 과거의 초강대국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미국은 보편선거권을 인정하는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서는 최초의 초강대국이고, 인권과 모든 민족의 자결권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시대에 등장한 최초의 초강대국이다. (13~14페이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안팎의 많은 사람들은 순진하게 세계의 새로운 초강대국은 제국 건설이라는 팽창주의적인 목적을 위해서 군대를 공격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4~15페이지)

미국은 제국이 아닌 세계 최초의 초강대국이자, 군사 제국주의의 목적으로 가지지 않은 최초의 초강대국이었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모든 것이 바뀌었다. (15페이지)

지금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비록 새로운 형태이기는 하지만, ‘제국’의 연륜만큼이나 오랜 연륜을 가진 문제, 즉 과거의 세계적인 패권 국가들 대부분을 무너뜨린 근본적인 문제이다. 나는 더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 문제를 ‘접착제’라고 부를 것이다. (17페이지)

미국은 (중략) 공통점이 거의 혹은 전혀 없는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정치적 집단들의 느슨한 연합으로 진화”할 수도 있다고 헌팅턴은 경고한다. (18페이지)

미국의 참된 정체성을 WASP 문화와 WASP의 시민적 가치관이라고 규정하는 헌팅턴의 태도야말로 미국의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언행이다. (19페이지)

미국은 미국인들에게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경쟁 상대가 없는 군사력과 엄청난 경제력, 세게 곳곳에 퍼져 있는 다국적기업들, 소비재브랜드들, 그리고 문화를 통해서, 미국의 패권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감지된다. (19페이지)

로마는 고대의 제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멀리 떨어져 있고 몹시 이질적인 민족들에게 엄청난 흡입력을 발산하는 정치적 동맹과 문화 상품을 제공했다. 현재의 미국 역시 세계 전역의 수십억까지는 아니라도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겨냥하여 엄청난 매력을 뿜어대는 문화 상품을 제공하고 있다. (20페이지)

대부분 가난한 그들은 미국인이 되고는 싶지만 미국의 지배를 받기는 싫어한다. 그들은 미국인처럼 옷을 입고 미국인처럼 살고 싶어 하지만,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을 수 없는 처지이다. (21페이지)

현대의 미국은 안타깝게도 미국의 지배를 받는 세계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로마보다는 ‘야만적인’ 몽골제국에 훨씬 가깝다. (21페이지)

나는 선택의 영역을 최대한 넓혀서 세계적인 패권 국가의 위상에 부합하는 역사 속의 사회들을 모두 고찰하는 방식으로 선택적 편견을 피해가려고 노력했다. (21페이지)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고대의 종교들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불관용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22페이지)

평등권, 기본권, 개인의 자유라는 원칙을 가진 계몽주의는 미래의 모든 제국들에게 심각한 골칫거리를 안겨주었다. (23페이지)

스페인은 중세의 거대한 유럽 국가들이 기독교의 불관용 때문에 세계적인 패권을 장악하지 못하게 된 과정을 생생하게 입증하는 사례이다. (23페이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종교적 광신에 휩쓸려 있던 1579년 건국 헌장에 종교의 자유를 포함시켰다. (23페이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그 덕분에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고, 당시로서는 가장 앞서가는 이동성을 확보함으로써 “생산, 상업, 금융에서의 우위”와 세계적인 “패권”이라는 “희귀한 조건”을 장악했다.

대영제국의 영역은 영국 해군이 지배하던 대양을 포함하면 지표면의 70퍼센트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관용은 아프리카인들과 아시아인들을 비롯한 유색인들과 마주치는 순간, 그 한계를 드러냈다. (24페이지)

12장에서는 21세기에 시사점을 던져주는 과거의 교훈들을 따져보고, 특히 미국제국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살펴본다. 2500년간, 역사상의 모든 초강대국은 하나같이 똑 같은 두가지 도전에 직면해왔다. 그 한 가지는 자국의 성장에 연료를 공급했던 관용을 유지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자국의 지배를 받는 민족들에게서 충성심, 아니면 하다못해 묵인이라도 확보할 수 있는 공통의 결속력을 형성하는 문제이다. (중략) 참으로 모순된 이야기 같지만,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것뿐이다. (25페이지)

 

1부 고대 제국의 관용

1장 최초의 패권 국가, 페르시아 - 아케메네스

아케메네스 왕조는 대략 기원전 559년부터 330년까지 강력한 페르시아제국을 통치했다. (33페이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은 로마제국은 물론이고 고대의 그 어떤 제국보다 큰 영토를 다스렸던 역사상 최초의 패권 국가였다. (34페이지)

페르시아 왕국은 수많은 부족과 씨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아카메네스도 그중 하나였다. (36페이지)

기원전 550년 키루스는 아스티아게스를 무찔러 메디아 왕국을 차지했고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카파도키아에 대한 권리를 넘겨받았으며, 기원전 539년에는 리디아 왕국(지금의 터키에 있었던 왕국이다)과 강력한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정복했다. (39페이지)

키루스는 새로운 왕국을 정복하면, 그곳의 통치자를 내쫓되 그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장해주고, 그 대신 주 혹은 군을 다스리는 총독인 사트라프를 세웠다. (중략) 백성들에게는 거의 간섭하지 않고 그들이 고유의 신과 다양한 문화를 누릴 수 있게 했다. (39페이지)

가장 놀라운 것은 키루스의 종교적 관용일 것이다. (39페이지)

<이사야서>는 키루스를 여호와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묘사하고 있다. (42페이지)

키루스는 해당 지역의 신(바빌로니아의 마르두크, 유대의 여호와)을 포용함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고, 해당 지역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함으로써 피정복민의 저항과 반란 가능성을 줄였다. (43~44페이지)

아케메네스 왕조에서 관용은 그저 효과적인 전략이었을 뿐이다. (44페이지)

다리우스는 야심찬 계획을 뒷받침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 세금 제도와 조공 제도를 마련했다. (46페이지)

그는 제국의 다언어 문화를 존중했다. (47페이지)

다리우스가 키루스와 마찬가지로 피정복민에게 페르시아의 신들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47페이지)

다리우스가 이런 관용적인 정책으로 얻은 이득은 엄청난 것이었다. (48페이지)

그리스의 자료에 따르면, 아케메니스의 왕들은 엄청난 보수를 제시하며 뛰어난 그리스 사상가들을 유혹했다. (49페이지)

관용이야말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단을 꾸릴 수 있었던 유일한 비결이었다는 점이다. (49페이지)

아케메네스 왕조의 관용은 현대적인 의미의 평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아케메네스 왕조 치세의 페르시아는 신분 사회였고, 그 정점은 예외 없이 페르시아인들의 차지였다. (52페이지)

아케메네스 왕조는 해당 지역의 법률과 전통을 포용하고 해당 지역의 언어, 종교, 예식을 용인하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피정복민의 반항과 반란을 최소화했다. (52페이지)

아케메네스 왕조가 권력을 확실하게 과시하기 위해서 썼던 전략은 피정복민을 균질화하고 ‘페르시아화’ 하는 전략이 아니라, 민족과 문화적인 측면에서 제국이 가진 막대한 다양성을 보존하고 통합하고 개발하는 전략이었다. (54페이지)

그리스의 자료들은 크세르크세스가 제국을 ‘페르시아적인’ 방향으로 더욱 강력하게 몰아붙였다고 주장한다. (55페이지)

고대 그리스인들은 후기로 접어들면서 아케메네스 왕들의 잔혹성과 억압이 강화된 것이 피정복민의 반란과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지지를 유발했다고 설명한다. (57페이지)

아케메네스 왕조 후기가 불관용, 불안, 폭력의 증대라는 특징을 보인 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다. (57페이지)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 덕분에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 강화해왔던 각각의 민족들은 페르시아제국에 대한 반감을 쌓아가다가 결국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이질적인 민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관념 체계ideology가 존재하기 않았기 때문에, 집중되어 있던 권력은 결국 지배력을 잃게 되었다. (59페이지)

“알렉산드로스는 우리의 양극화된 현대적인 범주 구분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야심만만한 천재였다.” (60페이지)

병사들을 비롯한 많은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드로스 왕이 이방인들에게 의지하고 여봐란듯이 이방의 풍습을 따르는 것을 비웃고 원망했다. (64페이지)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덕분에 그리스의 언어, 문학, 미술, 건축, 철학은 지중해를 건너 여러 대륙,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중략) ‘야만인’의 사상이 그리스어로 옮겨져 제국에 흡수되었고, 이를 통해 혼성 문화가 탄생했다. 헬레니즘이라고 알려진 이 문화는 이후 기독교와 서구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략)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페르시아 왕들은 결코 이룩하지 못했던, 대륙을 가로질러 형성된 고도의 문화적 통일체였다. (65~66페이지)


2장 팍스로마나, 세계인의 탄생 - 로마

페르시아제국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전쟁 조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로마제국은 하나의 관념idea이었다. 로마제국의 외떨어진 변방에 사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로마인’이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도 그들은 로마인이 되었다. (68페이지)

로마는 과학, 문학, 예술의 절정을 이루었으며, 1000년이 넘도록 이 분야에서 로마를 앞지르는 나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69페이지)

이 시기에는 ‘팍스로마나 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가 이어지고,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서아프리카의 농경 지역에 이르는 로마의 여러 속주들 사이에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중략) “세계가 이렇게 오래도록 질서정연하게 통치된 적은 없었다” (70페이지)

“로마가 아닌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황제가 나올 수 있었다.” (71페이지)

‘영원한 도시’ 로마에는 온갖 피부색과 배경, 그리고 온갖 문화적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았다. (72페이지)

“로마인들이 자국의 힘을 전 세계로 확장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주민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 (73페이지)

로마는 아무지 작은 액수라도 세금을 내는 지역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고유의 관습을 유지하게 했다. (74페이지)

로마 황제들은 직접 통치를 하면서도, 급격한 경제적, 사회적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주민들의 생활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77페이지)

로마에는 현대적인 의미의 인종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83페이지)

로마제국의 가장 흥미로운 면모는 사람들이 로마제국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86페이지)

로마는 정복된 민족의 지도 계층을 멸시하거나 억압하는 대신 로마 문화를 권력과 특권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도록 유혹했다. (87페이지)

로마인들은 또한 유용하다는 판단이 서기만 하면 서슴없이 다른 민족들의 전통과 지식, 관습을 받아들였다. (87페이지)

그리스의 문학, 미술, 조각, 건축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것을 빨아들였을 뿐 아니라, 검투사 경기와 사냥 경기 따위의, 대중이 좋아할 만한 고유의 문화를 고안해냈다. (87~88페이지)

로마 문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로마 시민권이라는 유혹이었다. (88페이지)

25년 동안 비전투 부대에 복무하면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방법으로 시민이 되는 사람이 해마다 1만 명에 이르렀다. (90페이지)

목적은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여 다양성을 고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91페이지)

제국으로 흘러드는 새로운 민족들의 끝없는 대열을 통합시키고 동화시키는 로마의 적극성과 능력, 이것이야말로 로마가 위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93페이지)

로마가 각 지역의 종교에 대해서 요구한 유일한 조건은 로마 당국과 공식적인 의식을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94페이지)

유대인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로마제국을 괴롭혔다. (96페이지)

로마가 전성기일 때에는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98페이지)

관용은 로마가 세계적인 대국으로 발전하고 팍스로마나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땅에 뿌려진 궁극적인 붕괴의 씨앗이었다. (99페이지)

4세기에 들어서자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쪽 지역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쪽 지역 사이의 불화는 갈수록 깊어졌고, 395년에 제국은 완전히 두 개로 갈라졌다. (100페이지)

훨씬 고약한 문제는 전성기가 지난 로마에서 종교적 박해와 인종적 불관용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100페이지)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가 대제국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 썼던 방법은 전성기의 로마의 가치관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101페이지)

로마 몰락의 원인은 로마가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치명적인 불관용 정책을 펼침으로써 제국의 다양한 주민들을 성공적으로 통합시켜왔던 동화 및 통합 전략을 훼손시킨 데 있다. (101~102페이지)

4세기 말 로마는 처음으로 피지배민족들에 대한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104페이지)

로마의 붕괴는 로마가 도저히 동화시킬 수 없는 민족들, 혹은 로마가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문화와 습관을 가지고 있는 민족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동화시키는 데 실패하면서 시작되었다. (106페이지)


3장 중국의 황금기 - 당

나는 증조부뿐 아니라, 중국에 사시던 먼 조상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109페이지)

멸망한 제국(중국, 그리스, 페르시아, 터키, 로마 등)에서 핏줄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는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역사와 문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바닷가를 늘 서성이고 있다. (110페이지)

당 왕조는 또한 당대의 그 어떤 제국보다, 중국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개방적이고 세계주의적인 나라, 인종적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나라였다. (110페이지)

중국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당 왕조는 야만인의 피가 섞인 조상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에 의해 창건되었으면서도, 세계주의,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외개방이라는 두드러진 특징을 보였으니, 참으로 모순되는 일이라 할 만하다. (114페이지)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합쳐지면서, 이방의 문화와 종교, 그리고 영향력에 대해 중국 역사상 가장 관용적인 왕조가 탄생했다. (116페이지)

태종의 꿈은 중국의 황제이자 돌궐족의 칸으로서 중국인과 야만인을 동시에 다스리면서, 중국인과 야만인이 동등한 자격을 가지는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118페이지)

당 왕조는 300개가 넘는 나라 및 지역들과 공식적으로 교류했다. (120페이지)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외래 문물을 좋아하면서도 외국인들을 늘 미워하고 의심했다. (121페이지)

태종은 외국의 종교에 대해서도 대단히 개방적이었다. (122페이지)

도의 이름은 하나만이 아니고, 현인 역시 하나만이 아니다. (123페이지)

과거제도 발전에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비범한 측천무후測天武后였다. (124페이지)

660년 고종이 중풍에 걸리자, 그녀는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중략) 측천제라는 황제의 직함을 달고 새로 주周 왕조를 열었다. (125페이지)

측천제는 더 나아가 중국의 전통적인 사회구조를 변화시켰다. (중략) 측천제는 또한 과거제도를 체계화하고 확대하여, 혈통이 아니라 경쟁에 의해서 관리를 선발했다. (126페이지)

712년 당 왕조가 복원되었다. 새로운 황제는 현명한 군주라는 뜻으로 명황明皇이라고 불렸는데, 그의 치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의 개화기였다. (127페이지)

명황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군사적 정복 사업과 활발한 외교정책을 병행했다. (127페이지)

명황의 치세에 문학과 예술, 역사 이론과 미학 이론, 그리고 특히 시가 그 어느 때보다 융성했다.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이백, 왕유, 두보 등의 시인들은 모두 이 시대 사람들이었다. (128페이지)

당시 주요한 제국이었던 우마이야 왕조와 비잔틴제국이 종교적으로 몹시 편협했던 것과 비교하면, 당의 관용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129페이지)

부정확하고 서투르기는 하지만, 비잔틴제국과 이슬람교에 대한 그들의 설명에서는 당 왕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담한 호기심과 외국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드러난다. (133페이지)

당은 동시대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놀라우리만큼 강력했다. (135페이지)

관용은 당 제국의 엄청난 영토 확장과 영향력 강화에 필수적인 요소였던 동시에 제국 쇠퇴의 씨앗이었다. (135페이지)

당 제국이 쇠퇴의 길에 접어드는 순간부터 불관용이 시작되었다. (136페이지)

문제는, 당 제국이 ‘야만인들’과 중국인들을 한데 묶어줄 공통된 정치적, 언어적, 문화적 ‘접착제’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136페이지)

명황은 제국 전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외국의 병사들, 특히 돌궐족 병사들에 대한 의존도를 점차 높여나갔다. (136페이지)

돌궐, 티베트, 몽골 출신 병사들은 중국인들에게 이용되고 있음을 자각하자 재빨리 당에 반기를 들었다. (136페이지)

안녹산의 난은 당의 쇠퇴를 알리는 전환점이었다. (138페이디)

8세기 후반에 이르러 불관용이라는 병이 당에 침투하여 암처럼 퍼져나갔다. (139페이디)

제국 안에서 균열이 나타나고 위구르족, 티베트족 등 비중국 민족이 점차 위협을 가하자, 중국인들의 타고난 불관용이 급격하게 끓어올랐다. (140페이지)

외국인들의 영향력과 사상이 사악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길들이 완전히 폐쇄되었다. 역사적으로 여러 번 되풀이되었던 일이지만, 중국은 스스로를 갉아먹을 만큼 폐쇄적인 태도를 취했고, ‘순수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외국의 요소들을 걷어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141페이지)

그러나 불교의 뿌리를 뽑아내려던 무종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불교에 호의적인 제국 전역의 수많은 관리들이 은밀한 방법으로 황제의 명령에 저항했다. (142페이지)


4장 유럽을 삼킨 초원의 지배자 - 몽골

몽골의 칸들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면서도, 로마제국보다 훨씬 넓은 제국을 다스렸다. (145페이지)

몽골족이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고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잔혹함이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관용에 있었다. (147페이지)

카르피니는 교황으로부터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공포로 몰아넣은 몽골족에 대한 정보를 얻어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147페이지)

공적과 충성도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체제를 도입했다. (148페이지)

테무친은 승리를 거둘 때마다 늘 똑 같은 기본 전략을 사용했다, 그는 패배한 부족의 지도자와 대부분의 남자 ‘귀족’들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가 아니라 동등한 성원을 자신의 수하에 편입시켰다. (150페이지)

1203년 테무친은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을 개혁을 단행했다. (150페이지)

1만 명의 병사가 소속된 투멘의 지휘관은 테무친이 직접 임명했다. 부족을 초월한 십진제는 군대뿐 아니라 몽골의 모든 사회조직의 구성 원칙이 되었다. (151페이지)

장군 선발에 대한 테무친의 판단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을 뿐 아니라 기가 막힐 정도로 정교했다. (151페이지)

“그는 오랜 행군을 해도 지치지 않고 허기와 갈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거느리는 장교들과 병사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급 지휘권을 맡을 만한 적임자가 아니다.” (152페이지)

출신 부족도 가지가지, 종교도 가지가지이면서 형제의 맹세를 한 이들은 테무친이 칭기즈칸이 되어 얼마 후 건설하게 될 새로운 사회를 상징했다. (153페이지)

테무친은 여느 때와 같이 완 칸의 추종자들 가운데 배신 전력이 없는 사람들만 골라서 받아들였다. (154페이지)

칭기즈칸은 새로운 새로운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급진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155페이지)

주목해야 할 점은 칭기즈칸이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정령신앙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절대적인 자유를 선포했다는 사실이다. (155페이지)

다른 부족의 재능 있는 자들을 데려다가 몽골족이 지니고 있지 못한 재능과 기술을 전파하게 했다. (155페이지)

그는 위구르문자를 몽골어에 맞도록 다듬어 새로운 문자 체계를 창안하게 했다. (156페이지)

칭기즈칸의 백성들은 사냥꾼 아니면 몰이꾼이었지만, 중국에는 고급 관리, 학자, 시인, 서예가, 교량 건축가, 거지, 청동 주물공, 귀족, 왕자, 그리고 황제가 있었다. (157페이지)

두 황제는 서로 다투느라 몽골의 유목민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57페이지)

몽골 군대는 전통적인 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몽골 군대는 보병이 업고 전원이 기마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기동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기습 공격을 감행할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158페이지)

승리를 거듭할 때마다, 몽골의 무기는 점점 정교해지고 치명적인 위력을 갖추게 되었다. (159페이지)

더 중요한 전리품은 바로 인적 자원이었다. (161페이지)

칭기즈칸의 종교적인 관용 정책은 계속 유지되어, 제국 건설의 강력한 수단으로 기능했다. (161페이지)

수만 명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을 칭기즈칸 군대의 중앙아시아 횡단은 오늘날까지도 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단한 군사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163페이지)

몽골의 기마대는 전통적인 군대와는 달리 이동을 지체시키는 무거운 장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대신 필요한 공격 장비가 있으면 당장에 만들어낼 수 있는 외국인 기술자 부대를 데리고 다녔다. (163페이지)

포위전을 펼 때 칭기즈칸은 늘 똑 같은 기본 전략을 구사했다. (중략) 먼저 방어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성 주변 농촌 마을을 공격하고 불을 지른 후 포로를 잡아들이고 수많은 주민을 학살했다. 그리하여 공포에 질린 피난민들이 물밀듯이 도시로 몰려들어 혼란, 기아, 그리고 두려운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165페이지)

그러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칭기즈칸의 보호를 받았고, (중략) 어떤 기술이라도 가진 주민은 적극적으로 채용되었다. (165페이지)

노년이 되자 그는 “세계를 통일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167페이지)

수보타이는 다른 사람들은 거의 들어본 적도 없는 유럽을 정벌하자고 주장했다. (168페이지)

칭기즈칸이 살아 있었다면 기겁했을 결정을 내렸다. 몽골 군대를 둘로 나눠서 유럽과 중국을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던 것이다. (169페이지)

몽골 군대에는 선진적인 이슬람권과 중국의 기술을 흡수하여 제작한, 유럽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가공할 무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169~170페이지)

몽골의 공격을 받자, 기독교권인 유럽에서는 극심한 불관용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171페이지)

유럽의 분열과 불관용은 몽골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71페이지)

합스부르크 왕조의 병사들은 전투에 패하기 직전에 몽골 장교 하나를 잡았다가, 그가 수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잉글랜드 사람인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 (172페이지)

칭기즈칸의 손자들은 아들들보다 훨씬 유능했다. (172페이지)

몽골 군대는 이런 종교 간, 분파 간 분열을 기민하게 이용했다. (173~174페이지)

몽케 대칸은 토론자들이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는 진지한 종교 토론회를 주재하고, 토론자들이 공통된 입장을 찾아가도록 권장했다. (중략) 토론회는 “말다툼을 일으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1의 원칙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175페이지)

“알코올의 효력이 점점 강해지면, 기독교도들은 논리적인 주장으로 남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노래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슬람교도들은 노래를 부르는 기독교인들을 압도하기 위해서 큰 소리로 코란을 암송했고, 불교도들은 고요히 명상에 잠겼다.” (176페이지)

물론 몽골인들은 교만했다, 몽케칸은 칭기즈칸과 마찬가지로 신과 자연이 전 지구를 정복할 민족으로 몽골인들을 선택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술, 과학, 학문, 그리고 행정 능력이 취약했던 몽골인들은 편견 없는 태도로 자신들이 정복한 문명 민족들에게서 쓸모 있어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얻어냈다. (177페이지)

쿠빌라이는 황실 전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중국 남부를 정복하고 중화 왕국을 재통일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179페이지)

군사적인 정복이라기보다는 중국인들의 마음을 정복한 것이었다. (180페이지)

몽골제국은 분열되어 있었지만, 칭기즈칸의 자손들은 문명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다스렸다. (181페이지)

쿠빌라이는 최고의 인종적 관용을 베풀었다. (181페이지)

그는 중국식 칭호를 채택하고 선조들에게 중국식 이름을 붙였다. (중략) ‘원元’이라는 이름의 중국 왕조를 창시했다. (182페이지)

요컨대 쿠빌라이의 통치 원칙은 불관용이 아니라 세계주의였다. (183페이지)

소수에 불과한 몽골의 통치 계급이 어마어마한 중국 인구에 흡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고안한 정치적 방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략) 어찌 되었든, 쿠빌라이의 이런 정책 덕분에 다양한 문화, 다양한 민족, 다양한 종교가 멋지게 통합되었다. (183페이지)

‘팍스몽골리카 Pax Mongolica’ 시대에는 다양한 종교를 신봉하는 다양한 민족 출신의 상인들이 큰 재산을 모았다. (184페이지)

어떤 사람들은 몽골이 세계를 지배했던 세기를 최초로 세계화가 고조된 시기로 본다. (185페이지)

할아버지와는 딴판으로, 뛰어난 기략과 군사적 추진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훨씬 자비로왔다. (중략) 그는 피지배민족들의 지식과 재능, 그리고 문화적 업적을 거리낌 없이 칭찬하고 현명하게 이용했다. (186페이지)


쿠빌라이의 할아버지는 마음속으로는 늘 초원의 유목민이었지만, 쿠빌라이는 단일한 세계를 추구하며 세계화를 추진했다. (중략) 쿠빌라이의 가장 큰 야망은 세계의 모든 언어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알파벳을 만드는 것, 그리고 아랍의 음력, 유럽의 태양력, 중국의 12간지를 통합한 보편적인 달력을 만드는 것이었다. (187페이지)

모든 제국이 다 그렇듯이, 대몽골제국의 몰락은 지도층의 무능함과 부패, 반란, 퇴폐, 파벌 싸움, 아살, 외국의 공격, 그리고 불운을 비롯한 여러 요인에 의해서 촉진되었다. (187페이지)

제국이 쇠퇴하면서 몽골이 지배하던 지역 어디에서나 일관된 특징이 드러났다. (중략) 불관용, 특히 종교적 불관용이 전면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188페이지)

원 말기의 황제들은 갈수록 스스로를 중국의 피지배민들과 대립되는 존재로 규정했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몽골인이라는 신분을 강조하고, 중국의 말과 문화를 거부했다. (189페이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인들은 그렇지 못했지만, 칭기즈칸은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대몽골 민족, 혹은 ‘펠트 천막에 사는 민족’)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190~191페이지)

몽골의 통치자들은 광대한 제국에 몽골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대신 ‘문명화된’ 피지배민들의 문화를 점점 대폭적으로 받아들였다. (191페이지)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제국은 단기간에 네 개의 커다란 덩어리로 갈라졌고, 각 덩어리는 갈수록 편협해지고 종교적 광신에 사로잡혔다. (191페이지)

 


2부 계몽화된 관용

5장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 - 스페인

물론 스페인의 관용을 21세기의 관용이 뜻하는 ‘이질성에 대한 존중’으로 과대평가하거나 혼동해서는 안 된다. (196페이지)

개종한 유대교도를 뜻하는 콘베르소스라는 계층을 탄생시켰다. 이들은 개종을 하고도 실제로는 은밀하게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는데, 그것이 사실인 경우가 많았다. (197페이지)

중요한 것은 ‘상대적인’ 관용이었다. (197페이지)

스페인은 비기독교도 주민들 덕분에 문화적, 지적인 영역에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노동력과 돈이라는 중요한 이득도 손에 넣었다. (199페이지)

스페인이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에 나설 때 자금을 댄 것은 바로 이들 유대교도 금융업자들이었다. (200페이지)

1502년 카스티야의 이슬람교도들은 개종을 하거나 이주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거의 대부분 개종을 선택함으로써 ‘모리스코스’라는 거대한 집단이 탄생했다. (201페이지)

콘베르소스들과 유대교도들의 대거 탈출은 스페인의 막대한 재정적 공백을 초래했다. (201페이지)

공격적으로 제국주의적 팽창을 하고 있던 스페인으로서는 외국 금융업자에게 의존하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었다. (202페이지)

1557년과 1575년에 스페인 왕실은 파산하고 말았다. (203페이지)

불관용의 강도에는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지만, 스페인은 17세기 내내 광신적이며 자멸적인 불관용 정책을 지속했다. (204페이지)

“스페인에는 왜 산업이 발전하지 않았을까? 이단 심문소 때문이다. (…) 스페인 사람들은 왜 게으를까? 이단 심문소 때문이다. 스페인에는 왜 투우가 있을까? 이단 심문소 때문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왜 낮잠을 잘까? 이단 심문소 때문이다” (205페이지)

스페인의 종교 박해는 엄청난 자원 낭비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중략) 이단 심문소의 무수한 재판과 고문은 엄청난 비용을 소모했지만, 증오와 편집증만 빚어냈을 뿐 지식이나 부는 일체 창출하지 못했다. (205페이지)


6장 자본주의 경제를 제패한 최초의 제국 - 네덜란드

세계적인 규모의 사치품 무역이 엄청난 이윤을 올리자, 영국, 프랑스, 독일, 베네치아, 그리고 스페인 사람들은 사치품 무역 일체를, 혹은 일부를 장악할 욕심으로 달려들었다. (211페이지)

1588년 자기 방어 능력이 없었던 네덜란드 주연합은 프랑스와 영국에 나라를 넘기려고 했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218페이지)

작은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쫓겨난 진취적인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덕분에 17세기에 이르러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 되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동시적으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이었다. (218페이지)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엄청난 경제성장에 있었다. (219페이지)

네덜란드 주연합에는 국교가 없었다. (219페이지)

네덜란드 사람들의 관용에는 예리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221페이지)

네덜란드 경제성장에 기름을 부은 것은 대부분 합스부르크 왕조의 스페인에서 박해를 피해 빠져나온 유대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이었다. (222페이지)

유대교도들은 오래전부터 대부업을 하면서(다른 생업을 갖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담보물로 나오는 보석류를 감정하고 세공하고 판매하는 전문적인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다. (223페이지)

‘자본주의 정신’을 네덜란드에 들려오는 데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대거 유입된 개신교 상인들과 숙련 노동자들, 그리고 생산업자들이었다. (225페이지)

네덜란드 사람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대니얼 디포의 표현에 따르면) “세계의 상인이자, 무역의 중개인, 유럽의 중개인”이 되었다. (227페이지)

네덜란드의 해외 진출을 주도한 것은 종교적인 열정이 아니었다. (229페이지)

칼 5세는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고는 “보시오, 여기 당신네 종교가 있소”라고 말했다. (230페이지)

맥주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가장 일반적으로 권장되는” 아침 식사였다. (235페이지)

문제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대단한 음주가에 흡연가라는 사실이었다. (236페이지)

자본주의의 위력도 한 몫을 했다. 맥주와 담배는 네덜란드연방공화국 최고의 상품이었다. (중략) 경제적인 이익 때문에 금주, 금연에 대한 교회의 주장은 쉽게 무시되었다. (237페이지)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종교적 관용과 높은 임금은 (중략) 유럽 전역으로부터 숙련된 기술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238페이지)

네덜란드는 “철학자들의 은신처”로 알려지게 되었다. (240페이지)

중세 초기의 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끼고 있던 네덜란드는 영토의 팽창이 아니라 상업의 팽창을 꿈꾸었다는 점이다. (241페이지)

1670년경 네덜란드의 선박 용적톤수는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프러시아의 선박 용적톤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많았다. (241페이지)

사실 빌렘이 영국 왕에 취임한 사건은 세계의 패권이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넘어갔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243페이지)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연방공화국에서 영국으로 막대한 인적 자본과 금융자본이 유출되기 시작했다. (244페이지)

얼마 후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세계 최고의 해상 국가로서의 지위까지 넘겨받아, 사상 최고 규모로 세계의 상업과 식민 정책을 주무르는 제국으로 탈바꿈했다. (245페이지)

네덜란드 국내에서의 관용 정책과 해외 식민지에 대한 관용 정책 사이에는 모순이 있었다. (245페이지)


7장 불관용의 덫 - 오스만, 명, 무굴

위대한 이슬람 제국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나라가 바로 오스만제국이었다. (248페이지)

오스만제국은 철저히 계산된 관용 정책을 토대로 인종적, 종교적 구성이 매우 다양한 지역을 다스렸다. (248~249페이지)

오스만 사람들은 종교에 근거한 뚜렷한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있었고, 당연히 이슬람교가 으뜸가는 지위를 차지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251페이지)

오스만의 관용 정책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슬람교 개종자들에 대한 포용 정책이었다. (252페이지)

이슬람교의 인종적, 민족적 관용은 오스만제국의 대단한 전략적 자산이었다. (255페이지)

오스만 제국은 역사상 최초로 세계를 제패한 이슬람 국가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257페이지)

서유럽 국가들은 날이 갈수록 경제적 기술적인 우세를 보이면서, 오스만제국이 꿈도 꾸어본 적이 없는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대륙에까지 손을 뻗어가고 있었다. (259페이지)


명대의 중국은 인쇄술, 화약, 나침반을 발명하는 등 기술적인 면에서 후진적인 유럽을 훨씬 앞서 있었다. (260페이지)

그러나 명 왕조는 세계 제패의 꿈을 품지 않았다. (중략) 해군을 해체하고 외국과의 무역과 외국의 사상을 거부하면서 병적이라고 할 만큼 폐쇄적인 태도를 취했다. (261페이지)

정화는 이슬람교도였고,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메카에 다녀온 경험까지 있었다. (262페이지)

정화가 거느렸던 병사들은 몽골제국의 병사들이나 포르투갈의 병사들과는 달리 전혀 약탈을 하지 않았다. (263페이지)

거대한 보물선들은 ‘창고’에 보관된 채 썩어갔다. (중략) 어이없게도 정화의 원정대가 남긴 공식적인 기록까지 폐기되고 말았다. (264페이지)

명이 ‘쇄국’으로 돌아서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락제가 죽은 뒤, 몽골이 다시 군대를 모아 중국을 침입한 데 있었다. (265페이지)

명 왕조는 또한 거대했던 해군을 방치하여 고사시키고, 해외 진출 정책을 폐기함으로써 유럽인들에게 여러 대양에 대한 패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265페이지)


영국에 앞서 인도를 통치하던 무굴제국은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이다(‘무굴’은 페르시아어로 ‘몽골’이라는 뜻이다). (266페이지)

관용 정책으로 선회하지 않았다면, 무굴제국은 그처럼 오랫동안 지속될 수도 없었고 눈부신 문화 발전을 이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무굴제국이 쇠퇴했던 시기에는 인도 역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잔혹한 인종적, 종교적 박해가 만연했다. (268페이지)

악바르가 선택한 해결책은 한편으로는 외교정책을 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문화의 결합 정책을 쓰는 것이었다. (268페이지)

힌두교와 이슬람교 내부의 바크티 운동과 수피 운동은 두 종교의 교리들을 통합하고 신의 유일성을 주창했다. (270페이지)

그는 비이슬람교도들이 자기네 성전을 보수하고 새로운 예배 장소를 건축하도록 허용하는 등 정통 이슬람 율법에 도전했다. (271페이지)

자항기르는 이슬람교에서는 금지하고 있는 돼지고기와 포도주를 유난히 즐겼는데, 신성한 달인 라마단 기간이 되면 유난히 그런 음식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273페이지)

다른 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는 연금을 지급했다. (274페이지)

아우랑제브의 불관용은 제국에 재앙을 몰고 왔다. (중략) 힌두교도들에 대한 박해로 상업이 위축된 것이었다. (중략) 게다가 아우랑제브의 이슬람교에 대한 광신은 무굴제국의 허약한 종교적, 정치적 통일성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275페이지)

“나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끔찍한 죄를 저질러온 내게 어떤 징벌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렵다.” (277페이지)


8장 세계 최대의 해상국가 - 영국

불관용을 고수하던 기독교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나라였다. (279페이지)

서로 보복을 되풀이하면서, 유혈 참사와 상호 파멸이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혀 있었다. (279페이지)

영국의 부상은 이 책의 논제를 생생하게 입증하는 사례이다. (중략) 영국이 채택한 특별한 관용 정책 덕분에, 유대교도, 위그노교도,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스코틀랜드인, 이 세 개 집단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영국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들은 금융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영국은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비상했다. (280페이지)

영국은 세계 제패를 향해 달리는 도중에 엉뚱한 복병을 만났다. 그것은 바로 계몽주의였다. (중략) 대영제국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세계적인 패권 국가와는 달리, 자유, 평등, 민주라는 되돌아나갈 수 없는 근대성의 문턱을 넘어서고 나서야 세계적인 권력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280페이지)

현대 세계에서 관용의 의미는 계속 달라지고 있다. (281페이지)

당시 프랑스 산업의 생산력은 영국의 생산력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이 어떻게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영국은 프랑스보다 훨씬 쉽게 돈을 구할 수 있었다. (283페이지)

네덜란드에서 이미 번창하고 있던 주식시장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284페이지)

엄청난 부를 긁어모은 유대교도 가문의 사례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 예외적인 것이었다. (285페이지)

영국에서 태어난 유대교도는 영국 시민으로 여겨졌고, 기독교도와 똑 같은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286페이지)

위그노교도들의 집단 탈출 이후 프랑스 경제는 후퇴기로 접어들었다. (중략) 위그노교도들은 영국에서 번영하면서 차츰 영국 사회에 동화 흡수되었다. (287페이지)

바로 영국에 엄청난 경제적, 지적 활력을 공급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었다. (288페이지)

기가 꺾이고 기근에 시달리던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의 합병 조약에 서명하면서, 대영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291페이지)

스코틀랜드인들은 다리엔 참극을 겪긴 했지만, 야심만만했고 사업 수완도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291페이지)

합병 조약 이후 영국인들은 스코틀랜드인들을 안아 일으킬 것인지, 아니면 찍어 누를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중략) 영국인들은 저자를 선택했고, 그 덕분에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292페이지)

전례 없는 팽창을 거듭하는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인력이었다. (292페이지)

잉글랜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하늘이 맺어준 연분이었다. (293페이지)

“캐나다로부터 실론, 더니든으로부터 봄베이에 이르는 영국의 여러 개척지에서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수성가한 사람들 가운데 스코틀랜드인은 잉글랜드인 한 명당 열 명꼴이다.” (294페이지)

스코틀랜드인들은 교육과 교양을 매우 중시했다. (중략) 평범한 상인들도 대부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읽을 줄 알았다. (294페이지)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추진한 원동력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295페이지)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영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경쟁 상대가 없는 해군력과 상업력, 그리고 금융력에 있었다. (295~296페이지)

유대교도들과 위그노교도들, 그리고 스코틀랜드인들의 공헌은 압도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중추적인 수준이었다. (296페이지)

잉글랜드 은행을 입안한 것은 스코틀랜드인이었고, 그 은행의 창립 자금을 댄 것은 위그노교도들이었으며, 그 은행의 대부금을 중개한 것은 유대교도들이었다. (297페이지)

19세기 대영제국의 완용은 단순한 전략적인 계산을 넘어선 것이었다. 영국은 매우 놀라운 수준으로 계몽주의적인 관용의 개념을 채택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298페이지)

19세기에 들어와 스코틀랜드인과 웨일스인은 정부의 최고위직에 올랐고, 유대교도들은 기사와 남작 작위를 받았다. (298페이지)

영국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적인 종교적 특성은 불관용의 씨앗을 키웠고, 영국은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300페이지)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대영제국이 아일랜드를 상실하게 된 것은 관용이 너무 부족해서, 그리고 적절한 대응이 너무 늦어서였다. (300페이지)

결국 100만 명의 아일랜드인(대부분 가톨릭교도)들이 굶어 죽었다. (303페이지)

아일랜드의 상실은 당황스러운 정치적 사건이었다. 영국으로서는 식민지 미국을 상실한 거이 여러 측면에서 훨씬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었다. (304페이지)

아일랜드를 제외한 이 모든 경우에, 잉글랜드인들은 편견을 뛰어넘어 충성심을 이끌어내고, 모두의 재능을 십분 이용하여 이득을 얻었다. 그러나 아일랜드에 대한 태도는 비극적일 정도로 융통성이 없었다. 한마디로 영국이 아일랜드를 상실한 것은 관용 정책의 실패 때문이었다. (304~305페이지)

가톨릭교에 대한 적대적인 편견이 아일랜드에서 영국의 관용에 한계를 지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적 인종적 오만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영토에서 영국의 관용에 한계를 지웠다.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이 ‘제국의 보석’인 인도였다. (305페이지)

계산된 관용의 원칙이 인도 내 동인도회사의 상업적, 정치적 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307페이지)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빠져나오는 대신, 제국주의를 채택하기로 했다. 동인도회사는 폐지되었고, 인도는 영국 국왕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312페이지)

한편으로 영국은 인도의 교육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 (316페이지)

한마디로 영국이 인도를 상실하게 된 것은, 아일랜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관용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319페이지)

인도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영국인이 제시하는 분명치 않은 약속들에 용기를 얻었고, 전쟁이 끝나면 캐나다를 비롯해서 ‘백인’들이 거주하는 영국의 다른 영토들이 누렸던 것과 똑같은 자치권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허황된 꿈이었다. (320페이지)

영국식 교육은 양날의 칼이었다. 갈수록 많은 인도인들이 교육과정에서 배웠거나 해외에서 직접 보았던 각종 자유를 요구했다. (320페이지)

1919년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경은 학살에 항의하는 뜻에서 기사 작위를 반납했다 (321페이지)

1920년 간디는 영국 정부에 대해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펼치자는 혁명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321페이지)

과거의 패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요인(필수적인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은 파괴적인 인종적, 종교적 난투로부터 강력한 개방과 관용의 정책(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으로의 극적인 전환, 바로 그것이었다. (325페이지)

영국인 쇠퇴한 것은 국내에 불관용적인 분위기가 만연했기 때문은 아니었다(두 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진 것도 아니다). (325페이지)

시야를 넓혀보면, 영국이 쇠퇴한 것은 해외에서 관용을 베풀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326페이지)

1931년 영국이 인도와 대등한 파트너 관계를 맺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중략)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대영제국이 유색인 피지배민들을 다른 방식으로 대했다면, 모두에게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해방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327페이지)


3부 세계 제패의 미래

9장 최첨단 과학 기술의 개척자 - 미국

미국은 제국인가? (331페이지)

과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이 그랬듯이 미국이 강한 국력을 유지하고 있는 참된 비결은 인적 자원에 있다. (331페이지)

미국은 온갖 종교에 대해서 동시대의 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332페이지)

미국은 대체로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펼치면서도,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 동안 특정한 인종 혹은 민족 집단에 대해서 극단적인 불관용의 태도를 보였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인디언, 흑인, 그 밖의 각종 ‘유색인’에 대한 불관용이다. (332페이지)

유럽에서 박해를 피해온 청교도들은 식민지 미국에서는 박해자가 되었다. (333~334페이지)

식민지 미국 내의 종교의 자유는 “우리 종교가 싫다면 다른 데 가서 살아도 좋다”라는 인색한 원칙을 따르고 있었다. (334페이지)

상업은 종교적 관용을 촉진하는 강력한 기폭제였다. (335페이지)

엄격한 매사추세츠주조차 여러 교파를 허용했다. (중략) 단 하나의 독특한 공인 교파를 세우려고 했던 청교도들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337페이지)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규제가 없는 상품 시장의 경우처럼 “종교 교파가 무수히 많으면”(200개에서 300개 이상이 바람직하다)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건전한 경쟁이 이루어져서, 광신적인 태도는 줄어들고 절제하는 태도가 늘어날 터였다. (339페이지)

그러나 종교적 관용을 인종적 관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340페이지)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흑인 노예들에게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341페이지)

그들은 새로 밀려 들어오는 이주민들의 외모와 행동이 자신들과 흡사하면 흡사할수록 더 많은 관용을 베풀었다. (341페이지)

얼마 후 미국과 유럽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유럽에서는 외국의 인력 모집을 막기 위해서 가혹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343페이지)

베네치아는 유리 제조공들을 무라노섬에 격리해놓고 다른 나라로 이주하려 할 경우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344페이지)

미국의 상황을 몹시 궁핍하게 묘사한 책자들도 출간되었다. (345페이지)

“손을 써서 하는 일이든, 기계를 가지고 하는 일이든, 무슨 기술이든 가진 사람은 부지런히 일하고 보통 사람들처럼 검약하게 생활하면 혼자서도 충분히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 (345페이지)

슐레이터는 기억을 되살려서 세계 최고 수준의 영국 직조 기술을 미국으로 이전시켰다. (346페이지)

유럽의 무수한 ‘두뇌 유출’ 덕분에 19세기의 미국은 기술의 벽지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산업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347페이지)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만든 주요한 요인은 상대적인 개방성과 다원주의였다. (347페이지)

가난하지만 진취적인 유럽인들은 조국을 떠나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중략) 미국에서는 기회가 하늘 끝까지 열려 있었다. (347페이지)

이주민의 꾸준한 유입이 없었다면, 미국은 19세기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농업 및 산업 국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349페이지)

미국인들이 항상 이주민들을 환대했던 것만은 아니다. 19세기는 심각한 외국인 혐오와 ‘토착주의’ 분출로 막을 내렸다. (350페이지)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세계의 강국으로서 첫 번째 경험을 했다. (354페이지)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의 막강한 강국들을 크게 쇠퇴시켰다고 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그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안겼다. 1945년에 등장한 세계는 더 이상 유럽 중심의 세계가 아니었다. 시체와 파편이 치워진 후 뿔뿔이 흩어진 유럽의 국가들은 미국의 무력과 부에 의존하게 되었고, 미국은 세계의 초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357페이지)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은 세계 최대의 상품 수출국이 되었고, 세계의 총제조업 생산고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게 되었다. (357페이지)

관용은 여러 측면에서 미국이 초강국으로서의 지위를 갖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57페이지)

이민자들이 이루었던 혁명적인 기술적 약진이었다. 이것은 미국을 군사적으로 월등한 지위로 끌어올렸다. (358페이지)

나치를 피해서 달아난 훌륭한 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의 면면은 대단하다. (중략) 대부분 유대인이었던 이들 과학자들의 미국 이주는 인재들이 가장 대규모로 유입된 사례였다. (358페이지)

“나는 여러분들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 여러분들이 먼저 달라지지 않으면 누가 달라지겠습니까?” (362페이지)

1966년 예일대학교 이사진 앞에 불려나간 클라크는 변화하는 나라에서는 소수 집단, 여성과 유대인, 공립학교 졸업생들을 비롯하여 종래와는 다른 환경에서 미래의 지도자들이 나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363페이지)

미국 고등교육의 변화는 훨씬 근본적인 미국 사회의 변모를 부분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1960년대 이후 정계나 재계에서 영국계 청교도 출신의 백인 남성들이 장악하던 우위는 끝이 나고, 여성과 흑인, 소수 집단 출신이 경제계, 정치계, 문화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364페이지)

미국 공군은 지구상의 그 어떤 군대보다 몇 광년光年은 앞서 있었다. (365페이지)

미국은 세계화를 통해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나라이다. (366페이지)

미국이 세계적인 패권국으로 상승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이 소련의 붕괴였다. (366페이지)

망명한 물리학자들 덕분에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정보 기술’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역시 이주한 과학자들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367페이지)

이것은 모두 미국이 이민자들의 능력과 진취성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덕분에 얻어진 결과였다. (367페이지)

벤처 자본주의는 전략적인 관용이 20세기 후반에 창출해낸 실체라고 할 수 있다. (369페이지)

그로브는 열정과 명석함, 그리고 섬세함으로 모든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370페이지)

그것은 인터넷으로 연결된 세계 경제의 폭발적인 성장과 (토머스 프리드먼에 따르면) “새로운 인재의 시대”를 가져왔다. (372페이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재산 증식은, 본토박이든 이민자이든 관계없이 어떤 배경을 가진 기업과 인재들에게도 보상을 제공하는 미국 경제의 독특한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373페이지)

미국의 기술적, 경제적 패권은 군사적 우위로 직접 연결되고 있다. (373페이지)

미국이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부상한 데에는 첨단 기술 경쟁에서의 승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01년 9월11일 과학 기술은 미국에게 등을 돌렸다. (374페이지)

 

10장 추축국의 야욕 - 독일, 일본

극단적 불관용이 무서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런 불관용을 토대로 한 사회는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주었다. (376페이지)

치욕과 고통, 억제된 분노가 한데 섞인 도가니에서 출현한 것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였다. (379페이지)

나치는 대기업과 군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산층을 아우르는 동맹 세력을 구축한 덕분에, 수상쩍은 말싸움꾼 집단에서 광범위한 운동으로 성장했다. (379~380페이지)

나치 정권은 ‘열등한’ 민족들을 제거하는 데 총력을 기울임으로써 당장 치명적인 부담을 안게 되었다. (381페이지)

뿐만 아니라 나치는 수백만 명의 피정복민과 수십만 명의 독일 국민을 살해함으로써 수많은 인력을 놓쳐버렸다. (382페이지)

독일이 잃어버린 위대한 인물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382페이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500만 명 가까이 학살했다. (383페이지)

일본 사람들은 “지배자 민족”으로서 대동아공영권 안에서 지도력을 행사할 도덕적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386페이지)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가장 “순수하고” 피부가 하얀 민족으로 묘사했다. 8세기 이후 일본에서는 하얀 피부가 높이 평가되었고, 얼굴빛이 하얀 사람은 인격이 훌륭하고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388페이지)

일본이 공영권 전역에 대해 견지했던 정책은 불관용 그 자체였다. (392페이지)

심지어 일본인 공무원들은 흰 옷을 입은 한국인들에게 잉크나 페인트를 끼얹기까지 했다. (393페이지)

1945년경 싱가포르는 대동아공영권의 중심지가 아닌, 질병과 영양실조, 잔인무도한 억압이 창궐하는 곳으로 전략하고 말았다. (395페이지)

일본 식민 당국은 유력한 포르모사인들에게 사업상의 특권을 부여하고, ‘신사’라는 계급을 수여하기도 했다. (397페이지)

만일 일본인들이 ‘대동아공영권’의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정책을 추구했다면, 제국주의적인 패권을 장악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훨씬 큰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398페이지)

사람들의 충성심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관용뿐이다. (399페이지)


11장 21세기 새로운 도전자들 - 중국, 유럽연합, 인도

이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방식의 전략적인 관용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관용의 방식은 미국이 사용하는 관용과는 크게 다르다. (401페이지)

“중국인들은 좀처럼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들은 마음속으로 21세기는 중국의 세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402페이지)

하지만 중국은 전제주의적일 뿐 아니라, 불량 국가들에 대해서 우호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404페이지)

이런 면에서 볼 때 중국은 다원적인 이민자 사회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404페이지)

바로 ‘중국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략적인 관용의 성공적인 결과라는 사실이다. (405페이지)

서양의 신문들은 중국과 관련한 기사 내용을 정치적인 반대자들과 파룬궁 같은 종교 분파, 그리고 티베트족 같은 소수 민족을 겨냥한 불관용으로 채우는 경향이 있다. (407페이지)

그렇지 못할 확률이 높다. 중국이 가진 인적 자본의 저장고는 교육 수준이 대단히 낮다. (407페이지)

그러나 중국에서는 여전히 부패가 만연하고 연줄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한, 중국의 일류 두뇌들은 중국 내에 남아 있으려(혹은 중국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은 훨씬 직접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재능을 성공으로 바꿀 수 있는 곳에 머물려 할 것이다. (409~410페이지)

과연 그들은 원하기만 하면 중국 국민이 될 수 있는 걸까? (412페이지)

“민족이라는 이름의 카드”를 적절히 이용하여 “해외 중국인”들의 자부심과 충성심(그리고 이윤 추구)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현재 160개국 이상에서 살고 있는 중국계 혈통은 대략 5500만 명에 이른다. (중략) 그들의 재산을 모두 합치면 대략 2조 달러에 이른다. 또한 그들은 연간 약 6000억 달러의 생산량을 창출하는데, 이는 호주의 국내총생산과 엇비슷한 규모이다. (415페이지)

중국의 해외 거주민과 그들이 가진 자원은 그 어느 나라와도 견줄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이다. (416페이지)

나의 논지를 따른다면, 중국은 초강대국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중략) 중국은 세계 제패에 수반되는 부담이나 전 세계의 분노를 떠안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419페이지) 


수십 년간의 냉전과 수백 년간의 불화로 갈라져 있던 유럽은 역사상 처음으로 평화로운 방식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 (419~420페이지)

유럽연합의 인구는 미국 인구보다 1억 5000만 명이나 많다. (421페이지)

유럽연합의 영토 확장은 군사적 정복에 의지하지 않고 자격 부여와 동의라는 수단에 의지한다. 이는 매우 새로운 형태의 전략적 관용이라고 할 수 있다. (421페이지)

유럽연합은 새로운 유형의 각종 자유와 경제적 유인책을 동원하여 ‘나라들’을 유인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럽연합은 로마와 비슷하다. (422페이지)

유럽연합은 다른 나라에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강요하지 않고, 각국이 스스로 변화하도록 유인을 제공한다. (422페이지)

재능을 가진 전 세계의 인재들은 계속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유럽은 그토록 관용적인데,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424페이지)

미국의 그린카드 제도는 국적 취득에 이르는 비교적 안정된 경로인데 반해서, 독일의 그린카드 제도는 국적 취득의 기회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 (426페이지)

세계적으로 유능하고 똑똑한 인재들을 확보하는 경쟁에서 ‘나라들’을 유인하는 유럽연합의 전략은 ‘개인들’을 유인하는 미국의 전략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426페이지)

갈수록 늘어가는 이들 소수 집단은 유럽인들의 관용적인 자세로도 상당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427페이지)

가난한 이슬람 공동체들은 격화되는 민족적, 종교적, 인종적 갈등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428페이지)

“유럽 사람들은 인종차별이 훨씬 심하다.” (432페이지)

세계의 귀중한 인적 자본이 향하는 목적지라는 미국의 위상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유럽연합은 앞으로도 미국을 초강대국의 자리에 서게 해준 기술적, 경제적 우위를 용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433페이지)


인도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해야 할 사항은 바로 인도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이다. (437페이지)

인도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도 민주주의 국가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관용의 승리를 의미한다. (437페이지)

2002년 인도는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가장 극심한 종교 폭동을 경험했다. (438페이지)

그러나 인도는 미래를 낙관할 만한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인도는 다음번 경제성장을 이끌 준비가 된 학위 보유자들을 대거 확보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주민들은 노령화되고 있지만, 인도 주민은 절반 이상이 25세 이하이다. (440페이지)

 

12장 제국의 미래

미국은 상상할 수도 없는 파괴력을 가진 사회이자 어떤 세력도 대항할 수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445페이지)

미국에 대해 “제국의 역할을 부인”하는 태도를 극복하고 지난 세기에 대영제국이 감당했던 문명화와 현대화의 짐을 감당할 것을 요청했다. (447페이지)

미국이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이다. (448~449페이지)

미국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던 접착제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449페이지)

미국이 성공을 거둔 결정적인 비결은 재능 있고 의지가 강한 진취적인 개인들을 배경에 관계없이 흡수하여 그들에게 합당한 보수를 제공한 데 있었다. (453페이지)

미국은 네덜란드를 귀감으로 삼은 초강대국이긴 하지만 네덜란드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이민자들에게 개방적인 나라였지만,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이며, 이민자들의 나라로는 처음으로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랐다. (453페이지)

“미국의 결정적인 힘”은 17세기의 네덜란드연방공화국과 마찬가지로 “군사력에 있지 않고, 부에 있다.” (454페이지)

한 사회가 세계적으로 우수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정복이 나리나 이민으로 대체되면서, 전략적인 관용의 양상 역시 달라지고 있다. (454페이지)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고 초강대국이 된 최초의 사례일 뿐 아니라, 보편 선거권을 인정하는 성숙한 민주주의국가로 초강대국이 된 최초의 사례이다. (455페이지)

미국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미국은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외국의 주민들을 자국의 국민, 자국의 시민으로 만들려는 의사도 없고, 그런 시도도 하지 않는다. (456페이지)

다시 말해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미국이 처해 있는 곤경이다. (457페이지)

미국의 그늘 아래 살고 있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과 미국을 단단히 묶어줄 정치적인 접착제는 미국의 국경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458페이지)

미국에 대한 지지도는 북한,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에 대한 지지도보다 훨씬 낮았다. (462페이지)

미국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선망과 존경심, 한편으로는 깊은 증오심과 경멸감이 뒤섞인 몹시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463페이지)

내가 반대하는 것은 미국 제국을 건설하는 것, 즉 다른 나라들의 정권을 변화시키고 미국식 제도를 강제하는 일에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쓰는 것이다. (467페이지)

미국은 200년 넘게 지켜왔던 공식을 따라가는 편이 훨씬 낫다. (467페이지)

세계를 제패한 미국은 곽의 모든 초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자국이 지배하는 외국 주민들의 협조와 기여, 호의 혹은 적어도 묵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468페이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는 최근 미국 상원위원회에서 9.11 이후 미국의 이민정책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우수하고 똑똑한 인재들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그들을 쫓아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471페이지)

오늘날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소수 집단들 가운데 일부는 100년 전에는 적응이 어려운, 우둔한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집단이었다는 점이다. (472페이지)

미국은 제국을 건설하는 자멸적인 모험을 피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나라의 협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세계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또한 발휘할 수 있다). (474페이지)

미국은 이러한 새로운 다자주의를 굴복이 아니라 기회로 여겨야 한다. (475페이지)

1997년 93세이던 나의 외할아버지께서 미국 시민이 되셨다. (475페이지)

“이 나라는 최고로 위대한 나라야! 누구나 미국인이 되고 싶어 하잖아!” (476페이지)

결국 초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역사의 이변이고, 이득과 함께 희생까지 떠안아야 하는 일이다. (476페이지)

미국이 건국 이후 성공에 성공을 거듭할 수 있었던 비결을 재발견하고 제국을 건설하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다면, 몇 십년이 지난 후에도 세계의 초강대국, 그것도 가압과 군사력에 의지하는 초강대국이 아니라 기회, 역동성, 도덕성을 갖춘 초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다. (477페이지)


저자후기

나는 특별한 나의 가족 안에서 힘과 자신감을 얻었다. 우리는 함께 국외자로 출발해서 함께 미국을 발견해가며 차츰 미국인이 되어갔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 세 시까지 공부하셨는데, 우리가 방 안에 들어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공부에 열중하셨던 기억이 난다. (479페이지)

나의 부모님은 늘 우리가 전통뿐 아니라 혈통까지 이어받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 (481페이지)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에 나는 난생처음으로 중국에 갔다. 나는 1980년 여름을 가족과 함께 쓰촨성의 수도인 청두에서 보냈다. (482페이지)

이 책은 그 무엇보다도 미국의 관용에 바치는 책이다. (483페이지)

이 책은 어떤 사회들이 손에 넣은 거대한 권력과 그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조건, 또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던 조건에 관해 연구한 것이다. (483페이지)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미국이 성공할 수 있었던 진정한 비결은 언제나 예외 없이 관용이었다는 것과 지금 그 비결을 잃어버릴지도 모를,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경고하고자 한다. (483페이지)


역자후기

중국계 미국인 2세이며 법학을 전공한 법대 교수가 왜 역사상의 여러 초강대국에 관한 책을 썼을까? (487페이지)

저자의 고찰은 너무나 자세해서, 각 나라의 생생한 과거를 실제로 체험하는 듯한 박진감이 느껴진다. (487페이지)

나머지 면모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 그러나 열정적이고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면, 따로 그 나라와 관련된 본격적인 책을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그럴 필요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488페이지)

저자가 이 책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는 방언을 하고 있는지, 혹시 자신의 처지에 지나치게 치우친 발언을 하는 경우는 없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한 가지 재미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48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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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
2009.03.09 12:26:01 *.5.21.71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 저저소개가 깊이 와닿는군요. 마음에....
<살인의 해석>도 555페이지 인데 내용은 5500페이지가 넘을 것 같아요.
비오는날 문걸어 잠그고 한번 도전봐야겠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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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부
2009.03.12 08:29:53 *.167.143.73
아인씨 글을 읽고 감탄했어요.
책을 읽으면서 느껴졌던 감정들이 이곳에 다 있군요.
그러면서 정작 글로는 풀어내질 못했어요.
그게 아마 제가 닫혀있던 부분일 것 같네요.
저자에 대하여나 내가 저자라면을 정말 잘 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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