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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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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8일 10시 57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제레미 리프킨은 1945년 미국의 중산층 유대가정에서 태어났다. 67년에는 펜실베니아주 와튼 스쿨에서 경제학 학사를, 69년에는 터프츠 대학에서 국제관계학 석사를 취득한다. 그의 학력은 경제, 외교안보 등 사회과학 분야의 학위가 대부분이지만, 그의 저작에서 우리는 매우 다양한 그의 학문적 관심사를 확인할 수 있다. <육식의 종말>, <노동의 종말>, <수소 경제>, <유러피안 드림> 등 그의 저작은 사회과학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필요하다면 인문학, 더 나아가 자연과학의 패러다임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여러 학문을 넘나드는 이러한 독특성 때문인지 그의 저서 <육식의 종말>, <노동의 종말>은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꽤 높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20세기 말, 21세기 초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과 불안이 고조되어 있던 시기에, 인구에 자주 회자되던 저작 중 하나가 아니었다 하는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다른 나라에서 이렇듯 리프킨은 성공한 저술가로 평가 받고 있지만, 사실 학계의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은 것 같다. 과학자들은 무엇보다, 리프킨의 주장에 이론적 엄밀함과 정확한 정보가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국립 보건연구소의 French Anderson 박사에 따르면, “사실 그와 나는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다만 차이는, 제레미 리프킨이 전문 활동가이고, 그는 주의를 끌기 위해 무엇이라고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제레미 리프킨 스스로도 이러한 비판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리프킨은 내가 비판받는다는 것 자체가, 내가 옳은 길(on the right track)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내 역할은 새로운 기술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기술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소상히 알려야 하고, 과학자들이 아닌 사회에서 그 기술을 사용할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본인의 과학적 배경이 전무한 탓도 있겠지만, 나는 그의 저작을 보면서 그의 주장에 특별히 근거가 부족하다거나, 비약이 심하다거나 하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학계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를 알고 나서는, 학자이면서도 현실 정책에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그의 용기와 소신이 인상적이었다. 만약 그에게 학자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다면, 그가 이토록 소신껏 행동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 사회에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서, 그가 더욱 인상 깊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학자이자 행동가인 그의 배경을 알고 그의 저작을 읽으면, 그에게는 사회/세상이 단순히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애정을 가지고 개선시켜나가야 할 모두의 것임을 알게 된다. <육식의 종말>,<노동의 종말>, 그리고 이번 <공감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떻게 하면 모두가 사는 지구를 보호하고, 환경을 살리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을지에 근본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 저자로서의 나는, (굳이 양자택일을 하라면) 탁월한 이론가보다는, 현실세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변화모색가가 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분명 제레미 리프킨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내가 닮고 싶은 저자이자, 선배이자, 본적은 없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멘토이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Jeremy_Rifkin

http://www.aladin.co.kr/artist/wprofile_author_detail.aspx?AID=40561

“The Most Hated Man in Science: 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959181,00.html

http://joopid.blog.me/40122636645

http://www.huffingtonpost.com/jeremy-rifkin/the-empathic-civilization_b_416589.html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8 자아의식의 개발은 공감 의식과 단단히 얽혀 있기 때문에, 공감이라는 용어가 하나의 어휘로 자리잡게 된 시기도 1909, 즉 근대심리학이 의식과 무의식의 내적 역학 원리를 탐구하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다시 말해, 그들이 공감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토론할 적절한 은유를 발견하고 깊이 감추어진 복합적 의미를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은 마음의 이론이 정립될 만큼 자의식이 발달했을 때였다

 

53 다른 사람의 곤란한 처지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가 공감하고 지지해 주려는 것은 바로 그들의 살고자 하는 의지이다. 열역학법칙, 특히 엔트로피 법칙은 살아 있는 매순간이 유일한 것이며 반복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54 공감의 확장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접착제이다.(중략) 사회가 복잡할수록 자아의식은 확실해야 하고, 다양한 종류의 다른 사람들과 접촉이 많아야 하며 공감이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져야 한다. (중략) 하지만 여기에도 역설은 있다. 엔트로피의 증가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다. (중략)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엔트로피의 보복과 정비례해서 공감을 가능하게 해 주는 우리의 관심과 감성도 커져간다.

 

115 다윈이 살았던 시대는 심리학적 인식이 전성기를 맞기 전이고 공감이라는 용어도 없던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감적 유대의 중요성을 눈치채고 있었다. 불에 뛰어드는 사람은 불에 갇힌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도우려고 덤벼든다. 이것이 다윈이 말하는 사회적 본능이다. 훗날 박애주의가 사회적 본능과 동정적 충동을 확산시키는 시대가 오지만, 그 시절에 이미 사회적 본능은 더 세심해지고 더 널리 확산되어 결국 모든 감각적 존재에까지 이른다고 지적한 다윈의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136 그린스펀은 자의식을 갖춘 정체성의 발달은 전적으로 몇 년 동안 친밀감을 통해 양육된아이와 부모 사이의 공감적 관계에 달려있다고 단언한다. (중략) 아이의 몸은 감각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는 한편, 돌봐주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 형성된 친밀한 관계와 정서적 경험은 아이의 신경 체계에 의해 추상화되어 기호화된다. 다시말해 생리적 구조는 경험을 조직하고 그 경험이 다시 생리적 구조를 조직하는 지속적인 상호교류를 통해 인식은 발달한다. (중략) 정신건강은 인간성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필요로 하며인간성은 잘 발달된 공감인식을 필요로 한다고 그린스펀은 지적한다.

 

177 종교에서, 특히 아브라함 신앙에서 육체는 타락한 것이고 악의 원천이다. 육체의 존재는 인간 본성의 악행을 부추긴다. 이성적 과학과 합리주의 철학에서 육체는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단수한 발판, 즉 감각적 인식, 영양, 운동을 제공해 주는 필요한 불편일 뿐이다. 육체는 정신이 자신의 의지를 세상에 인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기계이다. 무엇보다도 육체는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중에도 외부세계와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반응할 때 나오는 감정은 믿을 수 없다.(중략) 감정은 너무 세속적이고 동물적인 열정이어서 진지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179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들은 공감 인식의 틀을 넓혀 가는 과정에서 신앙과 이성이 갖는 주요 특징들의 의미를 다시 자리매김해 주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활동이 실체적 경험, 즉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고 전제하면서, 그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공감능력, 즉 다른 사람이 자신인 것처럼 그의 마음을 읽고 반응하는 능력은 인간이 세계에 참여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만들고, 언어를 발전시키고, 설득하는 법을 배우고, 사회적이 되고, 현실과 존재를 정의하는 방법의 핵심요소라고 주장한다.(중략) 실체적 경험은 인간을 매료시켰던 종전 세계관의 특징은 버리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신앙의 시대이성의 시대에서 빼내어 공감의 시대로 데려간다.

 

182 실체적 경험의 육체성을 외면함으로써, 데카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존재의 진정한 사멸성을 간단히 제거해버렸다. 살아 있다는 것은 유한하며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의 나약함과 죽음의 불가항력을 깨닫는 것이다. (중략) 우리 존재의 진정한 육체성을 억누르고 세계와 우리를 진정한 물리적 방법으로 묶어주는 감정을 솎아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즉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있게 하는 핵심을 잃어버리는 셈이다.

 

184 사고 작용은 감각, 감정, 느낌, 추상적 논리 등을 실체적인 방법으로 결합한다. , ‘나는 참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는 저 높이 뚝 떨어진 곳 위에서 생각하며 경험의 신체성에 의해 훼손되는 법이 없는, 데카르트의 편견 없는 자율적 정신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명제이다.

 

197 이성적 양식으로 볼 때 자유는 부정적인 자유, 즉 배제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하고, 혼자 고립될 수 있는 자유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냉정하고자족적인 것이다. 자유에 대한 실체적 접근은 이들과는 상반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자유는 인생의 충만한 잠재력을 최대할 수 있는 것이고 충만한 삶이란 우정과 애정과 소속감의 삶이며 보다 깊고 보다 의미 있는 개인적 경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해 가능성을 찾는 삶이다. 공감적 기회를 보장해 주고 격려하는 사회에서 양육되고 성장할 때 인간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199 자유의 진정한 토대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다. 합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자유는 결코 혼자서 해결하는 일이 아니다. 서부 영화의 영웅의 활약이 아니라, 자유는 함께 나누는 깊은 경험이다. 서로를 믿고 마음을 열고 같이 누리고 번창하려 애쓰는 투지를 공유할 때 우리는 진정 자유로워진다.

 

201 확장된 공감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평등한 위치에 올려놓는 유일한 인간적 표현이다. 다른 사람과 공감할 때 구별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고군분투를 자신의 것처럼 동일시하는 바로 그런 행동이 평등 의식의 표현이다. (중략) 공감을 하는 순간에는 내 것네 것이 없고 오직 만 있을 뿐이다. 공감은 같은 영혼이라는 공동의식이며 그것은 사회적 신분의 구별을 초월하는 시공에서 이루어진다. (중략) 복합적이고 구분이 잘되어 있으며 자아의식이 잘 발달된 사회, 일상의 안락을 맛보기 시작한 사회, 그러면서도 수입의 격차가 크지 않은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남을 부러워하지 않고 더 행복해하고 더 관대하며 더 많이 공감한다.

 

210 성숙한 공감은 살아있고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만이 겪을 수 있는 현상이다. 그래서 신에게 순종하고 예배드리지만, 우리는 성령을 완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령과 공감하기는 불가능하다. (중략) 공감의식은 천국이나 유토피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유한한 자의 고통이 없는 곳에 공감적 유대감은 없다.

 

233 아이들은 이야기를 하며 사람마다 사회적 상호작용을 약간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느낌이 자신의 느낌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같은 사건을 각자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은 관점의 차이를 이해할 뿐 아니라 공통의 느낌을 찾는다. 이것은 자의식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겪는 중요한 학습 경험이다. 자의식은 자신의 느낌과 자신의 관점과 자신의 스토리로 다른 사람을 고유한 개인으로 경험하고 공통의 정서적 기반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275 붓다는 자율적 자아라는 개념은 절대로 채울 수 없는 욕망으로 이끄는 착각이라고 가르쳤다. 우리의 정체성은 늘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290 초기 도시 기독교 공동체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신도들 사이의 정서적 열성, 애정이 남달랐따는 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으며 그래서 집단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집회에 모였지만, 한편으로는 소규모 공동체를 통해 유대감을 가지고 남다른 교우를 나누었다.

 

291 예수의 권세는 야수 같은 힘을 휘둘러 나온 것이 아니라 나약함을 드러내는 가운데 나왔다. 예수 안에서 인간은 직계 혈족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 심지어 가장 비천한 존재들까지 같은 인간에게 의식적으로 공감하기로 작정한 개인과 마주하게 된다. (중략) 예수의 공감 본능은 당시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294 나약함은 모든 존재를 평준화시킨다. 우리는 서로를 구별하고 차별해 가며 살지만, 언젠가 죽을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나약함을 인정하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처럼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295 하지만 불행하게도, 공감은 모든 인간에게 확대되어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수세기를 지나는 동안 인간사에 악마가 개입하면서 공감은 점차 조건적이 되어갔다. 사실 유대교에서는 악마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존재였다. 혼란을 조장하고 속임수를 쓰고 하나님과 대적하는 존재로서의 악마는 기독교와 창작품이었다. (중략) 사탄은 아무리 좋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나타나도 영원한 타자이자 외계인이며, 사악한 존재이다. ‘우리 대 그들은 인류가 지상에 존재한 순간부터 따라다는 대립 개념이지만 기독교의 편견은 그런 구별을 보편화시켰다.

 

330 프로테스탄트의 집은 교회이자 성역이 되었다. 기도하는 기간이면 사람들은 대량으로 제작된 독학할 수 있는 개인용종교 지침서와 소책자를 들고 다녔다. 이들 책자는 16세기 판 자기분석의 도구였다 .현대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 책자의 목적이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지 아니면 이교도에 어울릴지를 알기 위한 것이라는 점뿐이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하게 해 주는 새로운 매체를 제공한 것은 바로 인쇄술이었다.

 

332 인쇄 혁명은 전혀 다른 의미있는 방법으로 개인성과 자아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인쇄는 원작자라는 중요한 개념을 낳았다. (중략)원작자는 창조력을 가진 인물로서의 개인을 의미했다. 개인의 창조성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개념이었다. (중략) 334 원작자라는 관념은 자기만의 언어를 가능하게 했다.

 

335 인쇄된 문헌은 자율성과 불가침성을 지닌다. 커뮤니케이션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인쇄지향적 환경에서 개인의 자율성이 성장하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읽는 것은 혼자서 하는 경험이고 대단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중략) 인쇄 커뮤니케이션은 오래된 공동체의 결속을 해체시키는 대가를 치르며 의식을 강화했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광범위한 시간과 공간으로 확대되는 새로운 종류의 제휴와 관계 속에서 개인을 이어주는 효과도 있었다. 인쇄는 미국, 유럽, 그 밖의 지역에서 새롭고 점점 더 복잡해지는 도시 상업 문화의 에너지 처리량을 관리하는 지휘통제 매커니즘이 되었다.

우선 새로운 인쇄 매체는 지식을 체계화하는 방법을 다시 정의하게 했다. 구두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불확실한 기억이, 그리고 중세 필사본에서는 도가 넘는 주관의 개입이 문제가 되었지만, 인쇄 매체의 등장으로 보다 이성적이고 빈틈없고 분석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다루는 것이 가능해졌다.

 

338 인쇄 커뮤니케이션이 비활성적인 에너지원으로 모아지면서 인간의 의식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중세 말과 근대 초에는 새로운 세계주의가 탄생하면서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인문 시대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바야흐로 거대한 공감의 물결로 특징지워지는 시기였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휴머니즘이 본격적으로 개화한 것은 16세기였다.  이 시기는 북유럽 르네상스라고 불린다. (중략) 이 시기는 중세 기독교 세계관이 교리와 결별하는 시기였다.

 

343 공개적인 생활이 의미를 잃어가고 사생활이 보호받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이었다. 개인 생활의 비중이 커지면서 대외적 페르소나는 불확실하고 성가신 것이 되었다. 본 모습과 페르소나 중 어떤 것을 내세우느냐 하는 문제도 골칫거리였다. 결혼과 양육에 대한 태도 역시 많이 달라졌다. (중략) 처음으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와 마주했다. ‘나는 누구인가?’는 공개적 토론의 주제일뿐 아니라 개인이 자신과 나누는 내면의 대화가 되었다. 앞선 세대들은 개인적 신앙과 명예에 관심이 더 많았다. 이는 그들의 생활이 교회와 봉건 질서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지만, 신흥 부르주아는 신앙과 명예보다는 진실성의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346 다른 사람이 될 자유가 생기면 다른 사람의 곤경을 자신의 것처럼 경험하고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세계주의적 행동의 의미이며, 그런 개방적 태도를 통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다른 환경과 다른 장소에서 다른 역할에 편하게 적응할 수 있다.

 

376 신흥민족국가들은 지리적으로 확장된 영토에서 공동의 설화와 공통의 정체성을 만들어 냄으로써, 지역적 혈연 집단을 구성했던 무수히 많은 다양한 종족을 심리적으로 통합시켜 공간의 범위를 넓혔다(중략)민족국가는 결함도 많았지만 공감의 감수성을 크게 확장할 수 있는 온실이 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역사와 운명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같은 시민들은, 애국심이 요구되는 순간이면 언제든지 우리저들을 가르는 선을 분명히 긋고 국경 안에서 공감을 확장시켰다.

 

379 기번은 개인사도 하나로 모으면 인간의 집단적 역사가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전적 의미로나 집단적, 역사적 의미로나 새로운 길을 개척해 가며 살아간다. 인간은 개인의 스토리와 장대한 우주론적 설화를 만들고, 각자는 인간 역사 그 자체인 진화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주고받는다.

 

385 괴테는 자연에서든 사회에서든 한 사람의 개별성은 그를 둘러싼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우리 각자는 고유한 개인이지만, 그 고유성 을 자율성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우리 주변을 채워주는 특정한 관계와 만남을 통해 삶을 꾸려간다는 사실이 우리를 고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중략) 괴테는 모든 피조물이 고유하면서도 하나의 통일체 안에서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에 전율했다.

 

391 과거의 영웅들은 행동을 통해 자신을 입증했지만, 그들 내면의 삶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행동이 곧 그들이었다. 그들의 행위와 행적이 용감하고, 그래서 고결하긴 해도, 독자들은 그들의 기분을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중략) 반대로 20세기로 갈수록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갈수록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띠어 갔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주인공들의 감정과 사고와 행동의 세계를 따라 여행할 것을 요구하며, 그들이 마치 우리 자신인 것처럼 동일시하도록 만든다.

 

 

422 낭만주의 운동은 이성을 맹신하는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중략)낭만주의는 사실상 이성의 시대를 지배했던 모든 권위에 도전하는 운동이었다. 영국의 역사가 홉스봄은 1789년부터 1848년까지의 낭만적 시대를 관통하는 전반적 경향은 공감의 세속화였다고 지적한다.

계몽철학자들은 세계를 기계론적 관점에서 보았고, 인간이 천성적으로 탐욕적이라ㅗ 믿었으며, 진보를 물질적 형편이 나아지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낭만주의는 세계를 유기적 관계에서 바라보았고 인간은 천성적으로 인정이 많고 사회적이라고 믿었으며, 진보란 상상력을 풀어헤치고 자기 만족과 공동체 의식을 배양하는 인간의 창조력이라고 정의했다.

 

429 다른 사람과 상상력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은 공감의 낭만적 표현이다. 다른 사람을 상상하는 능력이 없으면 공감도 있을 수 없고 지상의 초월을 위한 낭만적 탐구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낭만주의 운동은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상상하는 것을 중요시했다는 이유로 공감 의식의 진화라는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에 위치한다. (중략) 그러나 낭만주의는 곧 지독한 자기모순에 빠진다. 이 운동은 루소의 원시적 자연을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략)도시화되고 세련된 대중을 옛날의 농부와 동일시하는 생각은 이 운동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자각도 부족하고, 개성도 없는 시골 농부들의 문화는 원시적인 공감적 고통이야 가능할지 몰라도 낭만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성숙한 종류의 공감적 감수성을 표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433 일부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자연을 유토피아라고 치켜세우는 바람에, 인간이 생성 과정과 맺게 되는 깊은 연관성을 근본에서부터 도려내버렸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깐 살면서 각자의 의식의 작은 지류를 자연 자체라는 보다 더 큰의식으로 흘려보낸다. 우리가 흘려보낸 의식은 자연의 여정에 보태지지만 그것이 우리 자신의 불멸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436 쇼펜하우어는 당대 모든 주류사상에 맞서, 도덕성의 기초는 순수이성이 아니라 동정심이며 감정과 느낌이 동정적 본능을 활성화한다는, 당시로선 대담한 주장을 내놓았다.(중략)439 그는 동정심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도덕적 소질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동정을 윤리학의 거대한 불가사의라고 말했다.

 

449 어린 시절을 부모가 애정을 표현하고 아이가 애착과 영양에 대한 자연적 본능을 드러내는 특별한 시기로 생각함으로써, 낭만주의자들은 이후 세대들이 공감 의식을 개발하고 키워주는 육아 관습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지만 단지 방향을 잘못잡은 문명 때문에 타락했다면, 사회부터 개혁하여 사람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아이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자기만의 어린 시절을 가질 권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452 낭만주의 개혁 중에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바로 잔인한 관습의 문제를 정식으로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대중은 인간은 누구나 비슷한 육체적 약점이 있고, 고통과 불편을 싫어하는 공통점이 있으며, 무엇보다 본래의 성향은 선하다고 확신했다.

 

455 낭만 시대가 공감 의식의 혁명적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루소를 비롯하여 워즈워스와 휘트먼 등이 존재의 감정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존재의 핵심에는 본래 순수한 진정한 자아가 있으나 사회에 의해 타락했다는 것이 낭만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라이오넬 트릴링은 진정성과 사회적 자아에 해당하는 성실성을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루소와 낭만주의자들에게 진정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스스로 고통스러운 삶을 겪어보고 아울러 다른 사람의 곤경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관심과 동정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소외된 사람들만이 이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486 제임스 조이스와 마사 누스바움은 불완전하고 곤궁해도 생활의 평범함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공감할 정서적 수단과 공통의 인간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낭만주의자들은 초월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불완전함을 용납하기 힘든 것으로, 심지어 역겨운 것으로 폄하했다. 조이스는 이를 비판했다. ‘인생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을 만나도 현실세계에서 만나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492 심리학적 여명기인 18900년대에 이미 착한 성격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했고, 그보다는 개성을 가꾸는 문제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중략) 개성의 등장은 사람들의 의식이 갑자기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사람들은 도덕적 고매함보다는 남에게 호감을 주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중략)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499 자존감은 1960년대 인본주의 심리학 운동의 핵심주제가 된다. 나중에 여러 세대의 학생들이 자존감을 개발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서, 자존감의 개발은 전세계 학교에서 정식교과과목으로 편성된다. 윌리엄 제임스는 자존감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그는 자존감을 일으켜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존감을 자존감=성공/허세라고 주장했다.

 

506 야코프 모레노는 낭만주의자들처럼 인간의 본성은 창의성이어서 무엇보다 창의적인 삶을 살 때 인간은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믿었다. 창의성은 사회적 교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모레노는 공감적 참여를 통해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공감을 창의적 영감을 자극하는 도구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공감이야말로 의식을 가진 책임있는 인간의 핵심요소라고 생각했다.

 

518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을 의도성을 가지고 사는 존재로 이해한다. 즉 목적을 가지고 산다는 말이다. 목적은 인생을 보다 더 큰 맥락에서 해석함으로써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개인은 자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보다 더 큰 맥락에서 가치를 창출하고 싶어한다. 롤로 메이는 누구나 핵심을 들여다보면 인생의 의미와 실존적 본질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관심이 없어질 때 사람은 감정이 둔해지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다고 주장했다.

 

524 의식에서의 지각변동은 60년대 신좌파 운동의 출현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운동권 학생으로 구성된 신세대는 기존의 좌파를 구좌파로 몰아세우며 결별을 선언했다. 그들이 말하는 구좌파는 사회와 제도를 변혁한답시고 권력투쟁이나 일삼는,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정당과 사회운동을 의미했다. 젊은 급진파들은 개인적 인간 의식과 상호간 인간관계를 개조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중략) 프랑스의 신좌파는 수단, 목적, 후손의 문제를 보다 간단하게 요약했다. 그것을 위해 당신에게 희생을 기대하는 혁명은 어디까지나 구세대의 혁명일 뿐이다.

 

526 전문가들 가운데는 젊은이의 자유정신 속에서 공감적 감수성이 아닌 대책없는 자아도취만을 발견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중략) 그런 비판적 냉소주의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시어도어 로작은 저항 문화의 역사적 중요성을 이렇게 요약한다. 현실과 정신 상태와 인간의 목적의 진정한 의미를 파헤쳐 가며 그렇게 철학적 깊이를 간직한 이슈를 제기한 저항은 일찍이 없었다.”

 

540 코스모폴리타니즘은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예찬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며, 도시의 사회구조가 원거리 통상이나 제국건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중략) 세계 각국에서 통상과 무역을 위해 모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직접 대면하고 겪으면서 상업적 유대뿐 아니라 공감적 유대까지 다졌다. 상업적 유대가 공감적 유대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역설로 들리겠지만,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공생적이다.

 

541 공감적 유대감과 상업적 유대감의 관계는 복잡하면서도 위태롭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공감의 확장은 당장이나 미래에 상대방을 위한 호혜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상업적 교환은 사회적 신뢰를 먼저 세워주는 공감의 확장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상업적 교환의 공리적이고 도구적이고 착취적인 본성은 바로 그것의 작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 자본을 고갈시킬 수 있고 실제로도 고갈시킨다.

 

542 글로벌화가 진행되는 세계는 새로운 코스모폴리탄을 낳는다. 새로운 코스모폴리탄은 다중의 정체성과 다중의 신분으로 지구 곳곳을 넘나든다. (중략) 모순이 있다면 개인이 코스모폴리탄에 가까워질수록, 지구의 에너지와 자원으로부터 받는 혜택은 점점 줄어든다는 점이다. (중략) 코스모폴리탄이야말로 엔트로피의 발자국을 가장 많이 남기는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551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은 여행과 관광 체험이 상업행위로 변질되는 역효과를 낸다고 지적한다. (중략) 관광객과 토착민의 관계는 새로운 유형의 식민적 성격을 가진 체험상업으로 전락하여 돈을 주고 경험을 사면, 주인 문화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고 토착민은 돈을 받고 연기하는 식이 된다.

552 여행이 상품회되어 간다는 비판은 계속되었지만, 여행에 대한 갈망은 탐험에 대한 열정적이고 억눌린 인간의 갈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중략) 마음의 문을 열고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은 19세기 낭만주의 정신을 반영하는 현상이었다.

 

565 그렇다면 분명하다. 공감의 물결을 타고는 잇지만 지구와 대다수 인류를 가난하게 만들고 있는 선택받은 소수의 인류가 과연 그들의 탈물질주의 가치를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작전 계획에 투입시켜, 더 늦기 전에 위기를 벗어나 그들 자신과 공동체를 지속가능하고 안정적인 미래로 향하도록 손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593 커뮤니케이션과 IT기술은 하나의 이론에 불과했던 좁은 세상 이론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준다. 전세계의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로 우리는 공감의 증식효과를 꿈꾸게 되었다. 인류를 같은 인류나 동물로부터 갈라놓았던 전통적 경계 전반에 새로운 공감이 스며들고, 그 공감이 무수히 많은 다른 존재들의 삶으로 퍼져 나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면, 모든 인류는 머지 않은 장래에 하나의 공감으로 둘러싸이게 될지 모른다.

 

631 부유한 사회에서 행복은 평준화되고, 심지어 삶의 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한계 이상으로 수입이 늘어나면 행복은 오히려 줄어든다. 동시에 상대적 부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소유 중독으로 빠지게 되어, 인간관계나 공동체 의식이나 공감의식을 확장하는 쪽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635 그러나 적어도 최소한의 안락을 보장해주는 분기점까지는 경제가 향상되어야 공감도 개발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이후에도 부가 증가하면 사람들은 물질적 생활에 갇혀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고 다른 사람의 곤경에 둔감하게 된다.

651 핵심은 재생가능한 에너지 중심의 시스템이 한 국가나 글로벌 경제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전력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을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차세대 정보 시스템 기술을 사용하면 수많은 기업의 데스크톱 컴퓨터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할 수 있기 때무에 분산된 컴퓨팅 파워를 발휘하는 것처럼, 지능적 유틸리티 네트워크에 접속하면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수많은 지역 생산자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이어주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의존하고 있는 석유, 석탄, 천연가스, 핵 등 중앙집중식 형태의 에너지보다 더 분산된 전력을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다.

 

711 우리 각자는 우리를 구성하는 관계의 한 성분이지만, 그것은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구분하는 관계적 경험의 고유한 집합체이다. 자아는 한 개인이 평생 겪는 경험의 총합으로 이루어지며, 그가 속한 관계와 그가 겪는 경험이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그런 차별성을 놓치지 않아야 공감의식은 성숙하여 글로벌 의식을 위한 정신적, 사회적 접착제로 기능할 수 있다.

 

729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순간 또다른 역설에 직면해 잇다. 새로운 인터넷 망은 인류에게 무한한 지식과 소통의 통로를 제공하지만, 인터넷이란 매체의 속성과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 때문에 이해와 의미의 공감적 유대를 높여 깊이있고 의미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줄일지도 모른다.

 

3. 내가 저자라면

 

<노동의 종말>, <육식의 종말> 등 그의 이전 저작을 통해 볼 때, 제러미 리프킨은 한 시대의 전환점, 세상을 보는 시각을 자신의 저작에서 제공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번 저서 <공감의 시대>의 서문에서도, 이제는 신앙의 시대’, ‘이성의 시대를 지나 공감의 시대라는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시대를 보는 새로운 시각의 제공처로서 저자가 <공감의 시대>를 세상에 내놓았다고 본다면, 이 책의 구성방식은 그러한 그의 문제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이성과 육체의 이분법적 사고에 아직 익숙한 사람들에게, ‘실상 인간의 본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으로 책의 1부가 시작된다. (물론,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의 일화로, 공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주장을 시작한 것은 이를 책의 시작점으로 삼은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2부에서는, 이러한 공감 특성을 토대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본다. 고대에서부터 심리학 태동기 19세기까지, 인류의 역사 발전 단계 곳곳에 인간의 공감적 특성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피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자세히 밝힌다. 3부에서는, 현대인이 동시대라고 느끼는 20세기 들어서의 현실과 여러 문제들을 진단하고 공감을 통해 그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요약하면, <공감의 시대>의 구성은 익숙하지 않은 시각을 소개하고, 그것을 적용해서 과거를 설명하며, 미래도 그러한 시각을 통해본다면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저자라도 비슷한 차례로 내용배열을 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공감이라는 새로운 시각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지나치게 노력한 나머지, 과거 역사를 공감을 통해 살펴보는 부분이 너무 길다는 점이다. 나름대로 역사 발전 단계를 나누고, 차례대로 되짚어보는 것은 좋지만 과연 그 속의 모든 설명이 공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지는 의문이 든다. 16세기 르네상스나 낭만주의 등 중요한 사조를 위주로 해서 2부를 조금 줄이고, 실제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3부를 위해 조금은 힘을 비축해두어도 좋지 않았을까?

앞서 말한 2부에 대한 아쉬움이 구성적인 부분에 대한 지적이라면, 보다 근본적인 아쉬움은 3부에서 보이는 저자의 지나친 낙관주의다.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정보통신 기술에 그가 완전히 신뢰를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공감과 분산 시대의 주도권을 쥔 자본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나 도전은 다소 부족하다. 이런 면에서는, 그가 과연 현실 정치에 왕성히 참여하는 활동가인지의구심이 정도로 그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행동양식이나 대안은 빈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끝도 의문형으로 놔 둘 수 밖에 없지 않았나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공감이라는 훌륭한 화두를 접했음에도, 이것을 구체적인 변화로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한 아쉬움을 느꼈다. 2부에서 그는 공감을 통해 역사를 관망하는 훌륭한 분석력을 보여주지만, 그러한 분석으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힘써 노력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공감과 분산의 시대를 앞둔 지금도 똑같이 필요함을 충분히 강조했어야 했다. 세상의 변화는 그렇게 쉽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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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saint laurent
2011.05.31 17:48:25 *.111.182.3
Wear your high heels in a sitting position and around the gianmarco lorenzi shoes home first. After a period of gianmarco lorenzi pumps time they will become comfortable and you gianmarco lorenzi boots will probably forget you are even wearing them.If you are giuseppe zanotti shoes planning to wear heels outdoors or at a club on the weekend, wear giuseppe zanotti boots them around the house for a few hours first until they feel nat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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