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 구본형
  • 조회 수 533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6년 9월 8일 06시 42분 등록

요즘 며칠이야 말로 한국의 가을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날씨입니다. 이런 날은 도저히 방안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런 생각이 물밀듯 밀려오면, 나는 얼른 커다란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옵니다. 나에게 작은 뜰이 하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가능한 만큼 모두 옷을 벗어 버립니다. 그리고 바람이 나를 스쳐가게 만듭니다. 햇빛을 내 몸으로 담아 보려 애를 씁니다. 책을 한 권 들고 나오 긴 하지만, 내가 그 책을 찾을 때는 그 한가한 무료함에 지칠 때 뿐입니다.

언젠가 어느 성당에서 신부님을 한 분 뵌 적이 있습니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신부님인데 참 좋은 분입니다. 그 분은 이런 날에는 창문을 열고 커튼을 걷고 햇빛이 최대한 방안으로 밀려들도록 해 둔답니다. 그리고 옷을 모두 벗고 방안을 어슬렁거립니다. 그러면 영혼이 얼마나 자유로워지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 신부님 방에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쓰여진 액자가 하나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어떤 외국인 신부가 한국말로 개발새발 쓴 액자랍니다. 그 액자 속의 글귀와 발가벗고, 깊게 방안을 무찔러 들어오는 가을 햇빛 속을 천천히 걸어다니는 배불뚝이 신부님을 함께 연상하는 것은 참 재미있는 그림입니다. 나도 그 기분을 압니다. 나도 가끔 해보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햇빛이 꽝꽝 쏟아져 버리는 날에는 내 영혼이 어디 있는 지 물어 봐야 합니다. 너 어떻게 살래 물어 봐야 합니다. 그러다가 ‘냅 둬. 나 이대로 살래‘ 하고 외쳐야 합니다. 이렇게 좋은 날엔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입니다.

내 살갗 한 쪽을 스쳐가는 태양의 입자 하나와 내가 만났다는 경이로움에 취하면 됩니다. 질문도 없고 대답도 없습니다. 존재만 있습니다. 이런 날엔 갑자기 칠흑 어둠 속에서 ’응애‘하고 햇살 속으로 쑥 태어난 기분입니다.

오늘은 걸치고 있던 모든 어두운 것들 다 집어 던지고 바람과 햇빛으로 몸을 씻는 날이면 좋겠습니다.
IP *.189.235.111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16 아까운 가을 변화경영연구소-김용규 2006.10.11 4706
115 신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 변화경영연구소-문요한 2006.10.10 4278
114 나의 장례식 변화경영연구소-홍승완 2006.10.09 4790
113 조금 웃기는 가을 독서술 다섯가지 구본형 2006.10.06 4706
112 기질 탐험 변화경영연구소-홍승완 2006.10.04 4422
111 신념의 과잉 변화경영연구소-문요한 2006.10.03 4360
110 문득 마음이 붉어지고 [3] 구본형 2006.09.29 4377
109 자주 숲에 드십시오. [1] 변화경영연구소-김용규 2006.09.27 4469
108 인간이 저지르기 쉬운 일곱 가지 실수 변화경영연구소-문요한 2006.09.26 4926
107 요즘 품고 있는 단어들 [1] 변화경영연구소-홍승완 2006.09.25 4034
106 하루를 똑 같이 다루는 것처럼 부당한 일은 없다 구본형 2006.09.22 4802
105 이 시대에 부족한 것 한 가지 변화경영연구소-김용규 2006.09.20 4740
104 어깨가 쳐진 벗에게 변화경영연구소-문요한 2006.09.19 4651
103 나는 떠난다 [1] 변화경영연구소-홍승완 2006.09.18 4135
102 귀자 구본형 2006.09.15 5237
101 어둠이 깊어질 때... [2] 변화경영연구소-김용규 2006.09.14 4536
100 태교하는 마음으로 변화경영연구소-문요한 2006.09.12 4589
99 마음과 존중과 사랑으로 만나라 [2] 변화경영연구소-홍승완 2006.09.11 4708
» 바람과 햇빛으로 몸을 씻는 날이면 구본형 2006.09.08 5331
97 그림 잘 그리는 방법 변화경영연구소 2006.09.06 7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