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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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찾아낸 것만을 쓰렴. 어머니가 말했다." - 존 버거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고향을 향했습니다. 밤중에 급히 떠나느라 예매를 해놓지 못해 먼 길을 돌아갑니다. 갑자기 한 편의 낯선 로드무비 속으로 발을 들여놓은 듯 합니다. 어두운 차창 밖으로 시간을 길게 늘여놓은 듯한 풍경들이 흘러가고, 잠이 들었다 깨면, 어느새 공간을 훌쩍 뛰어 넘어 있습니다.
'바쁘다, 바쁘다'는 버릇 같은 혼잣말과 함께 시간은 저 풍경들처럼 스쳐 지나가고, 소중한 사람들과 아플 때 함께 하지 못하고, 힘들 때 도와 주지 못하는 씁쓸한 어른이 되어갑니다. 잠결에 뒤척이며,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그런 상념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며, 낯선 도시의 익숙한 패스트푸드점에서 커피와 함께 이른 새벽을 한 잔 들이킵니다. 몽롱한 기분과는 달리, 식당 밖의 도시는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또 다른 하루를 위해 어딘가로 열심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존 버거의 어느 소설* 에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건 죽음으로부터 시작됐어. … 탄생이 일어난 건 - 그게 탄생이 있는 이유인데 - 더도 덜도 아닌 처음에, 그러니까 죽음이 있은 후에, 손상된 것들을 고칠 기회를 제공받았기 때문이야. 그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란다. … 우리는 망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고치기 위해 여기 있는 거란다. 우리가 생겨난 이유는 바로 그거야."
그러네요. 모든 것의 시작은 탄생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우리의 탄생은 죽음 이후에 따라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조금이라도 고치기 위해' 우리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이 당신이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줄 때입니다.

다시 차를 타고 고향에 도착하니 어느새 아침이 되었습니다. 이제 밤에서 시작해서 아침까지 이어진 짧은 여행을 마무리해야 할 때입니다. 같은 소설 속에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희망에 대해 이렇게 덧붙입니다. "네가 할 수 없는 건 모든 것을 희망하는 거야. … 이룰 가능성이 있는 것만을 희망하자꾸나! 조금이라도 고쳐 보자고. 조금도 많아. 하나를 고치면 다른 수천 가지를 변화시키니까."
새로운 하루입니다. 단 하나를 시작해야 하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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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2008년 4월 17일, 열여섯 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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