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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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떠도는 것은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어령
우연히 에밀리 킁와레예(Emily Kame Kngwarreye)라는, 이름도 낯선 호주 작가의 작품을 만났습니다. 약속 시간이 정해져 있던 터이라 재빨리 전시장을 둘러보고 빠져나올 참이었습니다. 물론 작품을 보면서도 저는 작가에 대한 어떤 사전 정보도 없었죠. 다만 원색적이고 강렬한 추상 작품들 앞에서 숨을 멈추고 잠깐씩 멈추어 섰을 뿐입니다. 그런데 전시장을 빠져 나올 무렵,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주의 원주민이었던 그녀는 아주 늦게 예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염색을 배워, 천을 물들이거나 다른 주민들의 몸에 그림을 그려주던 그녀는 서양 미술의 전통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던 그가 80세 되던 해에 처음으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죽기 전, 1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고향(Utopia community)의 지형과 색깔을 닮은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그녀의 작품 '큰 야생감자 꿈(Big Yam Dreaming)'을 떠올리며 아주 작은 낙서를 해보았습니다. 검은 바탕에 그냥 흰색으로 선을 긋는 게 전부입니다.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하얀 선을 그리고, 그 선을 이어가다 보면 어느새 검은 화면은 흰색의 선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시작하기에 늦은 때란 결코 없습니다. 마음 속 불씨만 고이 간직한다면, 언젠가 우연히 행운의 순간을 만났을 때 당신은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끊임없이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툴더라도, 삐뚤거리더라도, 두렵더라도 자신의 선을 그려나가야 합니다. 하나의 선이 없다면 또 다른 선을 이을 수 없습니다. 방황이 없다면 사랑도 없습니다.
창 밖 가득 뿌옇게 비가 내리는 아침입니다. 당신에게 다가올 세렌디피티(serendipity)의 순간을 꿈꾸며, 잠시 김서린 창에 야생감자 뿌리 같은 어지러운 낙서를 해봐도 좋을 것 같은 하루입니다.
(2008년 7월 3일, 스물 일곱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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