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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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흥미로운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사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그맨 출신의 강연자였습니다. 20세기 말엽 그는 한 해에 열 개 가까운 광고모델로 활동을 요청받을 만큼 대중적으로 각광받았던 인물입니다. 나도 그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그는 텔레비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반 오십 년 만에 그를 강연자로 마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가 어떻게 찬란했고 어떻게 추락했으며 그 사이 어떤 고통을 겪었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금의 삶이 또 어떻게 만족스럽게 유지되고 있는지를 들려주었습니다. 그의 말솜씨는 여전했습니다. 청중을 들었다 놨다하는 언변과 청중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솜씨와 진정성으로 채워진 이야기가 결합되어 참석자들은 웃고 울고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들어보니 그가 한 순간에 텔레비전에서 사라지게 된 사건은 정치판에 초대받은 날의 코미디 때문이었습니다. 아주 거대한 정치 행사에서 주최 측이 권유한 내용의 개그를 했는데 그것이 개그가 아닌 발언으로 언론에 보도되면서 참변을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정치 행사를 주관한 사람들과 다른 정치색을 지닌 대중들로부터 아주 극심한 반격과 비난을 받아야 했고 결국 무대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후 긴 세월을 무참한 심정으로 견뎌 와야 했던 그는 강의에서 물었습니다. “화려한 시절이 더 불안할까요? 어두운 시절이 더 불안할까요?”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불안할 것 같으신지요? “화려함? 어두움?”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둘 다!” 강연자인 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삶이 그런 거라고, 화려할 땐 화려한대로 어두울 때는 어두운 대로 불안한 거라고! 둘 다의 시간을 경험한 그가 내놓은 해법은 내가 깊이 공감하고 있고 나 역시 강연 자리에서마다 역설하는 지혜였습니다. 달팽이처럼, 지렁이처럼, 혹은 뱀처럼 온 몸으로 땅을 기어 제 삶의 자국을 남긴 사람들만이 살아있는 지혜를 쏟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책 수 백 권을 삼킨다고 나오는 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온 몸으로 체득한 자만이 내놓을 수 있는 지혜, 그의 지혜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지혜의 핵심은 욕망에 흔들리지 않을 철학을 갖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나 한 놈 정도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철학! 나는 그것을 붙들고 삽니다.” 그래서 그는 충분한 돈이 있지만, 돈 벌면 다 모여든다는 서울의 어느 지역으로 이사 갈 생각 안하고 투박하지만 정든 동네를 지키며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번 산 차는 십 년을 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두가 정치를 권유해도 그곳을 결코 기웃거리지 않고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강의를 들어보니 그의 삶과 사유는 지혜로 농익어 있었습니다. 청중을 사로잡기에 그 내용이 충분했습니다.
청중 대부분은 그의 풍부한 장치들과 내용에 마음을 내어 박수를 보냈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이유로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가 형성한 바로 그 철학이 얼마나 뼈저린 직면에서 온 것인지를 알기에 보내는 박수였습니다. 그는 그 정치판에서 했던 개그를 불가피했다고 말했습니다. 서슬 퍼런 권력을 지닌 자들의 무언의 압박을 거부하지 못한 이유를 ‘책임질 것이 있는 아비라서, 남편이어서, 가난 견디고 키워주신 어머니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습니다. 나는 그 변명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그것을 당시 가졌던 ‘눈 먼 욕망’에 대한 변명으로 평가합니다. 비록 그 과거에 대한 인식이 내 철학적 기준에서 다소 부실함을 가진 것으로 평가하더라도 나는 이후 그가 키워온 ‘눈 뜬 본성’과 그 본성을 따라 사는 모습에 큰 존경을 표하고 싶었습니다. 그날 보낸 나의 박수는 후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사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핵심은 그의 표현대로 책임져야 할 그 현실적인 무엇 때문인 경우가 아마 가장 많을 것입니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고, 관계가 있으며 유지해야 할 삶이 있어서 그랬다고 변명하며 우리는 본성에서 들려오는 어떤 음성에 귀를 닫아 버립니다. 본성에서 보여주는 어떤 장면에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눈 먼 욕망’들을 집단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구조를 매일 굴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눈 먼 욕망’과 ‘눈 뜬 본성’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나는 그것을 차려진 밥상에서 숟가락을 내려놓느냐 놓지 않느냐의 차이 같은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미 적당히 음식을 먹었는데도 숟가락을 내려놓지 못하고 조금 더 음식을 먹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본성’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 뜬 본성’은 알맞게 배가 부를 때 조금 더 채워 넣으려 하지 않고 수저를 내려놓는 용기를 발휘하는 마음입니다. ‘눈 먼 욕망’은 ‘한 술만 더’를 갈구하며 계속 수저질을 하는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회갑을 훌쩍 넘긴 그는 지금 ‘눈 뜬 본성’을 따라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픈 고백처럼 당시 그는 그 요청을 지혜롭게 거부했어야 합니다. 그의 말처럼 필요하다면 고향으로 도망쳐 농사를 지으며 다른 날을 기다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 깨달음을 얻었기에 그는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만, 철학대로 사는 지금의 삶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눈 뜬 본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깊게 직면하면 누구나 그것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도 나도 경험한 부분이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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