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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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지 않은지 4년이 넘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1년 동안 세 권의 책을 쓴 적도 있었음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입니다. 그 동안 일부러 책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책을 쓰기 위해 몇 번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억지로 쓰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직 때가 아닌가 보다 생각했고, 책 출간에 대한 마음을 접었습니다. 5년 전 회사를 그만두며 계획했던 실험기 혹은 축적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이 다가오면서 요즘 문득문득 책 쓰기에 관한 생각이 떠오르곤 합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는 편지>에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 지망생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로부터 자신의 시를 평가해달라고, 또 시 쓰기에 관해 조언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릴케는 먼저 잡지사나 편집자 등 외부의 평가에 신경 쓰는 일을 그만두고 외부에 쏠려 있는 태도를 거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당신에겐 단 한 가지 길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이것을 무엇보다 당신이 맞이하는 밤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글을 꼭 써야 하는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답을 얻으려면 당신의 가슴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십시오. 만약 이에 대한 답이 긍정적으로 나오면, 즉 이 더없이 진지한 질문에 대해 당신이 ‘나는 써야만 해’라는 강력하고도 짤막한 말로 답할 수 있으면, 당신의 삶을 이 필연성에 의거하여 만들어 가십시오. 당신의 삶은 당신의 정말 무심하고 하찮은 시간까지도 이 같은 열망에 대한 표시오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이 구절을 보고 뜨끔 했습니다. 그 동안 내 고민은 ‘무엇을 써야 하는가?’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정작 중요한 질문은 놓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책을 꼭 써야 하는가?” 그냥 묻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진실한 답을 얻기 위해 ‘가슴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아니다”라는 답을 얻으면 아직 때가 아님을 받아들여야 하고, “써야만 해”라는 답이 나오면 나는 그 답에 헌신할 작정입니다. 릴케는 이어서 말합니다.
“당신이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은 것에 대해서 마치 이 세상의 맨 처음 사람처럼 말해보십시오. (...) 당신의 일상생활이 제공하는 주제들을 구하십시오. 당신의 슬픔과 소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편린들과 아름다움에 대한 당신 나름의 믿음 따위를 묘사하도록 해보십시오. 이 모든 것들을 다정하고 차분하고 겸손한 솔직함으로 묘사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당신 주변에 있는 사물들이나 당신의 꿈속에 나타나는 영상들과 당신의 기억 속의 대상들을 이용하십시오.”
이번에도 뜨끔 했습니다. 그 동안 책으로 써볼까 하는 주제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이미 이 주제로 책을 쓴 이들이 수십 명인데 내가 이들보다 더 좋은 책을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나의 글쓰기를 가로 막았습니다. 그런데 릴케는 일상이 제공하는 주제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거기서 주제를 찾고 글감을 발견하여 묘사해보라고 합니다. 그림이든 사진이든 글이든 모든 묘사는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이자 모색입니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일상 역시 그러합니다. 과연 나의 일상에서 책으로 쓸 만한 주제 혹은 소재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릴케는 이런 내 마음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의 일상이 너무 보잘 것 없어 보인다고 당신의 일상을 탓하지는 마십시오. 오히려 당신 스스로를 질책하십시오. 당시의 일상의 풍요로움을 말로써 불러낼 만큼 아직 당신이 충분한 시인이 되지 못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십시오. 왜냐하면 진정한 창조자에게는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보잘 것 없어 보이지 않으며 감흥을 주지 않는 장소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당신의 귀에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감방에 당신이 갇혀 있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당신의 어린 시절을, 왕이나 가질 수 있는 그 소중한 재산을, 그 기억의 보물창고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곳으로 당신의 관심을 돌리십시오. 까마득히 머나먼 옛날의 가라앉아버린 감동들을 건져 올리려고 애써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개성은 더욱 확고해질 것이고, 당신의 고독은 더욱 넓어질 것이며, 당신의 고독은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리 비껴가는, 어둠에 잠기기 시작한 집과 같이 될 것입니다.”
릴케는 ‘내면으로의 전향(轉向)’과 ‘자신의 고유한 세계로의 침잠’, 그리고 깊이 있는 일상과 관찰을 강조합니다. 앞의 두 가지는 존재의 무게중심을 내면에 두는 것으로, 뒤의 두 가지는 외부 세계에 대해 경외심을 갖는 것으로 나는 이해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의지를 가지고 성실히 임한다면 말입니다. 110년 전에 어느 젊은 시인에게 건넨 릴케의 조언이 오늘 내 가슴을 때립니다. 고전의 울림은 시공을 초월함을 느낍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 김재혁 역,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년
* 안내1 : ‘인문학 아카데미’ 4월 강좌 - ‘유쾌하고 활달한 장자(莊子)’
변화경영연구소의 오프라인 카페 ‘크리에이티브 살롱 9에서 ‘인문학 아카데미’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2014년 4월 강좌는 ‘유쾌하고 활달한 장자(莊子) - 장자를 통해 얻는 마음의 실용’을 주제로 <장자, 마음을 열어주는 위대한 우화>의 저자 · 철학박사 정용선 선생이 진행합니다. 커리큘럼과 장소 등 자세한 내용은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 강좌 소개 : http://www.bhgoo.com/2011/620242
* 안내2 : ‘문요한 연구원의 신간 <스스로 살아가는 힘> 출간
문요한 연구원의 신간 <스스로 살아가는 힘>이 출간 되었습니다. 이 책의 주제는 ‘자율성’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 책 소개 : http://www.bhgoo.com/2011/624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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