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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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천, 나의 토익만점 수기, 웅진지식하우스, 2012
“미안하지만 거기에 있으면 내 영어가 늘지 않아.”
내가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 너처럼 영어를 잘하는 어학연수생을 본 적이 없어.”
“아냐. 부족해. 많이 부족해.”
“한국이란 나라가 정말 궁금하군.”
스티브는 말했다.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거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나의 토익만점 수기” 중에서)
잘 쓰여 진 소설을 보면 굉장히 쉽게 쓴 것 같이 느껴진다. 편한 친구를 앞에 두고 주저리주저리 수다 떤 것처럼 어려운 데가 없고 막히는 곳도 없다. 대화는 농담처럼 짧고 웃기고, 인물은 루저의 사촌처럼 엉뚱하다. 책을 읽는다는 부담이라곤 없이 줄줄 읽어 제낄 수 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무언가 아주 많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어 편치가 않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결코 쉽게 쓰여 진 것이 아닐 것이다. 한 나라의 일등국민이 되기 위해서 남의 나라 말-영어에 능통해야 하는 현실, 너무나 익숙해서 아무도 반문조차 하지 않는 영어망국병에 제대로 메스를 갖다 댄 ‘낯설게 보기’와, 수다 같고 농담 같은 글발, 간간히 숨겨놓은 ‘수치심을 유발’하는 장치들을 일컬어 문학적 재능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유명한 책이라 해도 잘 읽어지지 않으면 끝내 못 읽고 마는 내게, 가독성은 책이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다. 거기에 한 줄기 문제의식을 겸하고 있으면 소설 한 권의 의미로 충분하지 않을까. 리드미컬한 문체와 깜찍한 문제제기가 찜통 더위를 잠시라도 날려줄 것이다. 저자가 말 거는 방식을 몇 대목 맛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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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책을 나갔다. 비가 쏟아지고 있다. 우산은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왜 우리는 우산을 써야 하는가, 그런 본질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빗속으로 나갔다.
비를 맞으며 농장 주변을 걷는다.
빗줄기 하나에 “넌 영수”, 다른 빗줄기에 “넌 찰리”, 또 다른 빗줄기에 “넌 메리”라고 이름 붙였다. 정신 나간 짓이었지만, 이날만큼은 무척 창의적인 행위로 생각되었다. 빗방울 하나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야, 반갑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난 그 녀석을 안다. 빗물에서 닭고기덮밥 맛이 났다. 그 빗방울의 전신은 내가 1년 전 잠원동 분식집 앞에서 뱉은 침이다.
그날은 토익시험을 본 일요일이었다. 시험을 망쳤기 때문에 밖에 나오자마자 침을 퉤 뱉었다. 그 침이 증발되고, 수증기로 떠돌다가 이곳에서 비가 되어 내게 떨어졌다. 틀림없다. 빗물에 그런 맛이 난다. 영어 스트레스 때문에 위염을 앓는 젊은이의 침 맛이다. 그날 토익 점수는 535점이라고 기억한다.
다른 빗방울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짠맛이 난다. 보나마나 이건 아버지의 눈물.
2년 전, 앞마당에서 기도하며 흘린 눈물이라고 추정된다. 아버지가 남몰래 우셨구나, 나는 깨닫는다. 아버지의 눈물은 구름이 되어 지구를 열세 바퀴 돌다가 지금 내게 떨어졌다. 그 빗물 맛을 좀 더 음미해본다. 아버지에겐 식도염이 있구나, 나는 분석했다.
나는 빗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 빗방울은 저마다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는 건 신기했지만, 각 빗방울들이 자신의 과거를 떠들어대니 조금 피곤했다.
덜컥 겁이 났다. 곧 엄청난 고통이 닥쳐올 거란 예감이 들었다.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 고통이 오기 전에 기절하고 싶었다. 몇 번인가 졸도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쉽게 실신이 되지 않았다.
그때 오른쪽 눈에서 뭔가 쾅, 하고 터졌다. 분명 쾅, 소리였다. 얼굴 반쪽이 날아간 느낌이었다.
“아버지.” 나는 정신을 잃었다. 나의 마지막 말 ‘아버지’는 한국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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