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 조회 수 927
- 댓글 수 1
- 추천 수 0
지난 주말, 친정 식구들과 함께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맛있는 것도 먹고, 바다도 보며 휴가를 즐겼습니다. 제주도를 꽤 많이 왔는데 아직도
신선한 곳이 많이 있는 것을 보니, 작지만 큰 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여행 중 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곶자왈 숲이었습니다.
곶자왈
숲이 좋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는데, 그동안 동선이 안 맞아서 못 가다가 이번에 처음 가보게 되었습니다. 마치 태고의 숲에 들어선 것처럼 묘한 매력을 품은 우거진 숲길을 저희 일행은 이리저리 걸어 다녔습니다.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 자라는 콩짜개 덩굴, 묘한 색감과 모양을 가진
다양한 고사리 종류 등이 숲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특히 나무가 자라기에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무들의 다양한 전략이 돋보였습니다. 원래는 덩굴처럼 자라지 않는데 덩굴처럼 옆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꾸지뽕 나무도 있었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라는 덩굴들이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조용히 경쟁하는
나무도 보았습니다. 바위 위에서 자라기 위해 커다란 하나의 줄기 대신 나이테가 다른, 가느다란 가지 여럿으로 자라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또 영양분을
최대한 많이 얻어내기 위해 가지에서 털이 자라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어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보니, 저희 집에 있는 고무나무도 곶자왈만큼이나 척박한 저희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물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흙 속의 습기 한 방울까지 끌어당기기
위해 흙 위로도 뿌리를 뻗고, 최대한 볕이 드는 쪽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연쇄살식마(?)인 저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고무나무도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크고 있었습니다. 저는 깊이 반성하며 황급히 시원한 물을 듬뿍 주고 볕이 더 잘 들도록
화분을 옮겨주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라내고 마는 식물들을 보면서 자기만의 전략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보기엔 아름다운 숲이지만, 숲 속에는 식물들끼리 한정된 숲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을 끊임없이 벌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쟁의 과정에서 식물들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다른 식물들의 적용 방식을 분석하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자신에게 적용했을 것입니다.
생존 고민의 해결
방법이 남과 달라야 하는 것은 식물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살아남고 기억되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콘텐츠 산업에서도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생존과 직결됩니다. 특히 이런 전략을 잘 구현하고 있는
콘텐츠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하나는 ‘로드 오브 히어로즈’라는 게임으로 플레이어가 세계의 구원자가 되어서
세상의 위기를 구해내는 스토리를 갖고 있습니다. 모바일 게임이니 캐릭터의 매력도를 한껏 끌어올려 플레이어들이
현질을 하게끔 유도하는데, 이 스토리나 캐릭터가 그동안 소비했던 양상과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를 들어 엘프가 나온다고 하면, 그동안 제가 봐왔던 엘프는 숲속에
살고 자연 친화적인 이미지가 강한 반면, 이 게임의 엘프는 뛰어난 과학자들입니다. 레이저빔을 쓰는 드론과 시대를 앞서가는 연구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
그동안의 고양이 수인들이 귀여운 원피스를 입거나 애완동물 같은 성격을 가졌던 반면, 이 게임의 고양이인은
광선검을 쓰는 제다이입니다. 캐릭터들이 이렇다 보니 귀여움이나 예쁨을 보여주기 위한 과장된 상황 설정
대신 유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하는 현실성을 갖추게 되면서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순정 말고 순종’이라는
네이버 웹툰을 들 수 있습니다. 분명히 로맨스 장르지만, 캐릭터나
갈등에 어딘가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인기 배우인 남주를 조종할 수 있는 마법의 인형을 여주가 갖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서브 남주나 라이벌 캐릭터가 그동안 봐오던 전형성을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여주의 성격도 로맨스 장르라기엔 알바를 몇 개씩 뛰며 힘겹게 하루를 보내는,
근처에서 볼 법한 현실성 넘치는 K-장녀였습니다. 완전히
재해석된 캐릭터들, 미묘하고 독특한 연출, 로맨스 특유의
오글거림을 크게 줄이고 긴박한 갈등 전개가 어우러져 최근에 꽤 재미있게 읽은 웹툰이었습니다.
저는 경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을 세우거나,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쓸
때마다 저는 제 깊은 곳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 배워왔던 남의 기술을 쓰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곶자왈의 숲,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게임과 만화를 보면 배운 기술과 자신의 생각, 가치관, 개성을 담은 나만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은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일 것 같습니다. 문제를 제 식대로 다시 해석하고, 해결
방법에 저의 힘을 담을 수 있다면 그것이 저라는 식물의 생존 범위를 넓혀나가는 일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마도 경쟁의 목적이 누군가를 죽여 없애거나 무너뜨리고 차지하는 것이라면 전 오늘 여기에 있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게 있어서 경쟁은 자신의 한계를 넘기 위해 필요한 도구였으며 능력 있어 위협감을 느끼는 상대는 함께 존재해야 할 긍정적인 상대였습니다.
제가 구본형 사부님을 존경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그렇게 경쟁자가 없을 만큼 새로운 영역을 찾고 구축해서 독보적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훈련과 수양의 아침 공부를 하셨으면서도 제자들에게는 늘 부드럽고 편하게 대해 주시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절박하지도 절실하지도 않은 그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수를 가르치고 그리고 어려운 글로벌 경쟁에서 최전방에 있었던 저는 그 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길이 없는 길을 가셨으며 제자들에게 몸소 행함을 통해 언행일치를 보여 주셨던 사부님을 그리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