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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9일 11시 51분 등록

배불뚝이 TV 사용설명서


  이번 여름에도 끝내 배불뚝이 TV를 버리지 못했다. 

  새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자, 이사짐 아저씨를 포함한 숱한 사람들이 텔레비전 좀 새로 사라, 간섭 아닌 참견을 했다.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다는, 구색이 안 맞는다는 말이다. 요즘 이런 불룩하니 뚱뚱한 TV를 보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그들의 말은 어느정도 사실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새로 이사를 하면서는 말이다.
  이사를 좀 일찍 한 탓에 온갖 이사짐 차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다리차가 윙하고 올라가는 것을 신기해하는 아이들과 함께 이사구경을 하다 보니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된다. 우리 동네 전자제품 대리점들은 아마 대박이었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커다란 대형 TV와 노트북, 냉장고가 그려져 있는 무진동 탑차들이 아파트 단지안을 누빈다. 
 
  사실은 우리도 이사를 하며 텔레비전을 놓고 꽤 고민했다. 이참에 다시 없애버릴까? 아님 안방에 대충 들여놓을까? 어자피 대출도 받는데 이 기회에 멋진 평면 TV를 새로 장만할까?
  아직 멀쩡한 TV를 바꾼다는 일말의 죄책감 탓인지, 아이들의 온갖 장난에도 튼튼한 TV에 얽힌 여러 사연들이 기억이 났는지, 결국은 돈 때문이었는지 어쨌든 우리는 그냥 배불뚝이 TV를 들고 이사를 왔다. 
그 TV를 계속 사용하기 위해 받침대를 새로 사야했고 적당한 물건을 찾기 위해 한참을 애써야 했다. 결국 거실 탁자를 받침대로 대용해서 텔레비전을 놓고 나니, 이번에 벽걸이형 TV 단자가 떡하니 눈앞에 보기 싫다.  

  아무튼 우리집 구식TV는 이런 주변 분위기에 아량곳하지 않고 떡하니 거실 한쪽에 자리를 차지했다. 결혼 5년 만에 구입한 배불뚝이TV와의 동거는 이렇게 계속되었다.  

  

  결혼할 때 무슨 큰 결심으로 TV를 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워낙 돈이 없어서 ‘꼭 필요한 것만 우선 사자’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살림 장만을 의논하던 그때, 누군가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했다. 결혼해서 한 달간 TV를 보지 않으면 일 년치 유대가 쌓이고 일 년간 보지 않으면 십 년치 유대가 쌓인다나. 충분히 가능성이 있음직한 이야기였다. 둘 다 흔쾌히 텔레비전 구입을 미루기로 합의했다. 한 달 정도 지나고 천천히 사자는 것이 그때의 생각이었다.


  TV도 없고 컴퓨터도 없는 신혼살림을 시작하자, 길고긴 저녁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심심해서 어떻게 지냈을까 싶지만 그땐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심심할 틈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회사가 멀기도 하여 매일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 귀가하는 신랑과 역시 9시나 돼서 집에 돌아오는 나나 텔레비전을 켤 시간도 기운도 없었다. 대신 우리는 자연스럽게 작은 식탁 앞에 앉게 되었다. 라디오나 CD를 나지막히 틀어놓고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앉는다. 특별한 주제도 없이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주로 내가 이야기를 하고 신랑이 듣는 편이었지만, 종종 하루 종일 회의를 하거나 행사를 치르고 온 날, 피곤한 내 입은 다물어졌고 드문드문 신랑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달 두달, 일년 이년, 시간이 흐르면서 난 신랑과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의 일을 그의 눈으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조각조각 파편 같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침묵을 느끼며 나는 그의 낮 시간을 떠올릴 수 있었고 그의 생각과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6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그’라는 사람을 알고 있었고 게다가 2년 넘게 연애를 했지만 그 긴 세월동안 내가 알았던 것은 과연 얼마만큼의, 무엇이었을까?

  아마 처음에는 그가 보통의 주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들과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 후에는 그가 좋아하는 이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을 보았다. 나 또한 그에게 좋은 모습, 예쁜 모습,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무던히도 노력했던 시간이었으니까. 가끔 다툴 때조차 나는 그에게 멋진 여자이고 싶었으니까.

  그 시간과 과정을 거쳐 우리는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지만 일상이 되어버린 결혼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나는 TV를 사이에 두지 않고 오롯이 함께 한 5년의 저녁 시간 덕분에 한꺼풀 안에 있는 그의 또다른 부분, 때로는 그도 알아채지 못했을 다른 그를 만나게 되었고 그 결과 결혼을 결정한 때 이상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또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적어도 나라는 사람은 말이다.   



  거실에서 TV를 몰아내는 것이 유행이 된지 꽤 되었다. 거실에서 TV를 없애고 책이 꽉 찬 책장을 놓고 책상도 놓고 가족의 서재로 꾸미는 것이다. 이 유행의 가장 큰 목적은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물론 부모도 TV를 보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책을 보고 공부를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나 부모에게 좋은 변화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가족이 모이는 거실은 모두에게 편안한 공간이 되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 자칫하면 아이들 공부시킨다는 미명하에 그렇지 않아도 적은 가족들 간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닌지 한번 더 생각해 볼 일이다. 어떤 가족에게는 책이 가득한 책장 앞에서 각자 필요한 공부를 하기보다는 서로 몸을 기대고, 다리를 겹치고 앉아 함께 TV를 보는 공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오락프로그램 하나를 같이 보면서 함께 웃고 대화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이 먼저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IP *.230.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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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12:06:32 *.230.26.16
확 당기는 첫문장을 찾고자 마감시간까지 고심했으나...
아직 '첫 문장을 채집'하는 실력과 노력이 부족함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찾아보고 기필코 다음 칼럼에는 확실한 첫문장으로 시작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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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0.11.29 12:34:24 *.10.44.47
배불뚝이던 평면명품이든
TV란 달콤한 유혹에서 페이스를 지켜내려면 대단한 자제력이 필요하죠. 
저희집에 TV가 없는 건 어른들이 특히 '엄마'가 TV를 넘 좋아하기 때문이랍니다.
아직은 내 세상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기라고 믿고 있어선지
TV의 유혹앞에 초연한 언니의 공력이 새삼 대단해보입니다.  ^^

좋은 프로그램 이야기를 들으면 TV를 놓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언제쯤되면 자기주도적(?)인 TV시청을 할 수 있게되는 공력이 생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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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22:29:52 *.230.26.16
사실은 나도 TV를 좋아해 ^^
그 재미있는 걸 어찌 싫어할 수 있으랴 ㅎㅎㅎ

내가 TV를 활용하는 방법은 '지난 프로그램 보기'야. 
정규방영시간에는 거의 보기 힘들고 대부분 밤시간 좀 피곤해서 쉬고 싶을 때 보고싶었던 프로를 찾아보곤 해.
좋은 프로그램 소개가 나오면 기록해 놓았다가 활용하지.
지금 수첩에 적혀 있는 프로그램도 하나 있네.
지난 주 월요일 방영했다는 세계의 교육현장 스웨덴 편이야. '스웨덴의 프렌디, 아빠를 말하다'
내 주제에도 어울리고 잼있을 것 같기도 하구, 꼭 보려구^^
물론 이런 교양 프로만 보는 건 절대 아니구 ^^
무르팍 도사 같은 것도 피곤할 때 보면 얼마나 잼있는데, 주로 등장인물을 보고 고르지. 
박경철, 한비야, 안철수, 윤도현, 금난새 등등 얼마전까지 본 인물편이지.

요즘 인터넷 TV 진짜 좋아졌잖아. 현명하게 활용해 보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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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김인건
2010.11.30 03:09:24 *.123.110.13
티브이만 없어도, 생활수준이 많이 올라갈 것입니다. 스티븐 킹도 이야기했지요. TV를 당장 내다버리라'고 

요즘은, TV가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너무 매체가 많기 때문이지요. 컴퓨터에, 스마트폰에, 인터넷에, TV보다 더 재미있는 콘텐츠가 많은데, 굳이 TV를 안본지요. 

개인 디바이스가 발달되다 보니, 가족끼리 모여서 함께 TV 볼 시간도 없네요. 요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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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1 09:56:11 *.230.26.16
스마트폰을 장만하고 며칠동안 소파에서 그 조그만걸 들여다보는 남편을 한심해한 적이 있었지 ㅎㅎㅎ
다행히 며칠 지나니 회복 되더군 ^^
중요한 것은 수동적인 관계가 아닌, 적극적 관계를 위해서
TV 든, 뭐든 활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따로 또 같이, 이게 가족관계의 핵심인데... 참 쉽지 않아, 그렇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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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0.11.30 15:34:55 *.236.3.241
'배불뚝이 TV 사용설명서'

제목이 신선하다^^ 이야기 흐름이 할말 다하면서 매끄럽고 잔잔한 느낌이 있네.
특히 신랑과의 관계에 대한 서술에서 아기자기한 재미가 느껴진다.

배불뚝이 TV라는 제목에서 발동된 호기심이 유지될 수 있도록
' 배불뚝이와 끝내 이별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첫 문장을 써 보는 건 어떨까.
낚는 문장인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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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1 09:52:40 *.230.26.16
그러네요 ㅋㅋㅋ
오빠의 댓글을 읽어보니 저도 무언가 느낌이 오네요. 감사감사

오늘 다시 읽어보니 고쳐야 할 부분이 많이 있네요.
첫 문장도 그렇고 왜 배불뚝이 TV와 끝내 이별하지 못했는지, 또 배불뚝이 TV에 얽힌 또다른 이야기 등...
여전히 너무 무언가를 가르치고 싶어하는 듯 딱딱한 느낌도 들구요 ^^

좀더 많이 지적해 주세요.
부드럽게 해주셔서 더 좋구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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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0.12.01 13:24:28 *.10.44.47
이 배불뚝이 TV와의 5년째 동거이자, 우리가 결혼 5년 만에 구입한 첫 TV이다.  ??

기왕 신경쓰시는 김에 '주어 + 술어' 호응도 돌아봐주심이...
저도 잘 안되는 부분이라 감히 뭐라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우나
조금만 신경쓰면 훨씬 감칠맛나는 글이 될 것 같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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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1 13:59:46 *.230.26.16
날카로운 묘기 ^^;;
얼른 고쳤슴다 ㅎㅎㅎ
읽어줘서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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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0.12.02 09:51:12 *.42.252.67
나는 배불뚝이가와 헤어지기가 싫었다. 단지 오래 된 이유로 헤어진다면
시간이 지나며 내 곁에 남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글쎄 나는 이렇게 풀어나가며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면서 오래 된 가족이야기를 묵혀둔 묵은지처럼 깊은 맛으로 풀어나가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네.


이런저런 케이스를 읽어보며
생각을 풀어나가보면 좋을 듯 하네. ㅇ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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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2 10:44:56 *.178.131.103
ㅇㅋ!!
언니, 멋진 시작인데요! 한번 더 깊은 느낌도 나구요 ^^
감사!

보내주신 많은 성원에 깊게 감사드리며, 좀더 열심히 쓸께요. 유끼, 홧팅!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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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2 14:16:14 *.105.176.105
며칠을 두고 읽고..또..읽어보면서...
뭐라고 댓글을 달아야 할지...뱅뱅 도는데... 딱 짚히지는 않고...
글은 가벼운데...읽는 내가 무거운 걸까...
소재도 좋고,, 첫문장도 잡아끄는 힘은 있는데...
마지막까지 멱살을 잡고... 끌어가기엔 선형의 팔힘이 적었던 걸까?
잔잔한 듯 한데... 중간중간 경혈의 맥박은 약하고.. ㅎㅎ
끝내... 뭐라고 딱 잡히지 않는 맥을 짚고 난 느낌?... ㅋㅋ
(나..그래도..열심히.. 다섯번이나 읽었어... 선형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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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2 15:40:57 *.230.26.16
그렇구나...
나 팔뚝 힘 기르기 위해 열심히 운동중인거 알지, 오빠? ㅎㅎㅎ
담엔 여섯번 읽어주삼! 그리고 또 얘기해 주삼!!

땡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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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12.02 14:40:09 *.30.254.21

[이번 여름에도 끝내 배불뚝이 TV는 버리지 못했다. ]

 [끝내] 를 빼면 안될까? 
뭔가 리드미컬한 느낌이 막혀서...
그리고, [TV는] 보다는
[TV를] 이 어떤지...

[이번 여름에도 배불뚝이 TV를 버리지 못했다. ]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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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2 15:38:14 *.230.26.16
마구 식은 땀이 ^^;;
아, 유끼분들의 사랑에 어쩔줄을 몰라하는 선 ^^

'끝내' 는 근데 꼭 넣고 싶은데... ^^
긴 고민의 흔적 ㅎㅎㅎ

오빠,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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