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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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毛詩. 毛亨의 시경 주해서)에서는
‘위정자(爲政者)는 이로써 백성을 풍화(風化)하고
백성은 위정자를 풍자(諷刺)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초상지풍초필언(草上之風草必偃),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것이지요.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草上之風草必偃 구절 다음에 誰知風中草復立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이라는
구절을 첨부하는 것이지요.
시경에는 그러한 풍자와 비판과 저항의 의지가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석서(碩鼠)의 구절입니다.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보리 먹지 마라. 오랫동안 너를 섬겼건만
너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구나, 맹세코 너를 떠나
저 행복한 나라로 가리라. 착취가 없는 행복한 나라여.
이제 우리의 정의를 찾으리라.“
매우 직설적이고 저항적입니다.
그러나 ‘伐檀’(박달나무 베며)은 고도의 문학성과 저항성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절만 소개하지요.
“영차 영차 박달나무 찍어내어 물가로 옮기세.
아! 황하는 맑고 물결은 잔잔한데 심지도 거두지도 않으면서
어찌 곡식은 많은 몫을 차지하는가.
애써 사냥도 않건만 어찌하여 뜨락엔 담비가 걸렸는가.
여보시오 군자님들 공밥일랑 먹지마소,“
‘중국역대시가선집’의 서문에서 밝혔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중국시가의 전통이 잘못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배계층인 양반의 시각과 계급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시가
선별적으로 소개되어 왔었다는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음풍영월이 시의 본령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전통과 선입관 때문에 우리는 매우 귀중한 정신세계를 잃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세계와 시적 정서, 나아가 시적 관점은 최고의 정신적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경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삶과 정서의 공감을 기초로 하는 진정성에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시와 시경에 대한 재조명은 당연히 이러한
사실성과 진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을 통하여 현대사회의 분열된 정서가 반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삶과
유리된 정서에 매몰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미학, 가상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소외이며 분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지평(認識地平)을
넓히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시적 관점이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視角)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동서남북의 각각 다른 공간에서 바라보게 하고 춘하추동의 각각 다른
시간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결코 즉물적(卽物的)이지 않습니다. 시적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다이내믹한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關係網)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란 시가 있습니다. 연탄이란 하나의 대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를 여러분이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연탄이란 대상을 여러분은 어떤 시각에서 바라봅니까?
제가 정확한 시구를 암기하고 있지는 못합니다만, 이러한 내용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정호승의 시에 ‘종이학‘이 있습니다. 비에 젖은 종이는 내려놓고 학만 날아간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시각을 우리가 연마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실 나는 소설 읽을 시간은 없는 편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읽어야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요. 그러나 솔직히 “물배 차서“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 많은 글들을 읽고 나서 생각하면 핵심적인 요지는 시 한 편과 맞먹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시는 읽는 시간도 적게 들고 시집은 값도 비싸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시를 읽도록 권합니다.
물론 오늘의 현대시는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한 둘이 아니지요.
시인이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을 기초로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감수성이 주로 도시정서에 국한되어 있는 협소한 것이라는 것도 문제이지요.
문학인이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잘 모르는 시인입니다만 해방정국에서 대단한 문명을 떨친
임화라는 시인이 있었지요. ‘네거리 순이‘라는 시로 유명합니다만
임화는 항상 두보 시집을 가지고 다녔다고 전해지지요.
임화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부분의 시인들은 문학적으로 호흡하는 세계가
매우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까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모시서(毛詩序)의 구절을
소개하였습니다만 이 구절이 김수영의 시에 계승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김수영의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의 이미지가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마 잘 아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입니다. 그 시의 핵심은 바로 한 송이 국화가 피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서리가 내리고, 천둥이 친다는 광활한 시공간적
연관성에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시상이 백낙천(白樂天)의 ‘국화(菊花)‘에 있지요.
간밤에 지붕에 무서리 내려 파초잎새 이울었는데도 추위를 이기고
동쪽 울타리에 금빛 꽃술 환히 열고 해맑게 피어난다
(一夜新霜著瓦輕 芭蕉新折敗荷傾 耐寒唯有東籬菊 金粟花開曉更淸)는
내용입니다.
시상의 핵심은 미당이 여기서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누가 누구를 모방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시 세계를 열어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부단히 열어나가고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시경의 세계는 그 시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절한 애환을 보여줍니다.
거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매몰되고 있는 허구성입니다.
미적 정서의 허구성입니다. 시경은 황하유역의 북방문학입니다.
북방문학의 특징은 4언체(言體)라는 것입니다. 4언체의 보행리듬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노동이나 생활의 리듬으로서 춤의 리듬이 6언체인 것과 대조를
보입니다. 시경의 정신은 이처럼 땅을 밟고 걸어가는 듯이 확실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땅을 밟고 있는 확실함,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삶의 실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실상은 물 속에서 발이 땅으로부터 떠있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 자신이 지향해야 할 확실한
방향을 잃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경의 정서가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P *.42.252.158
‘위정자(爲政者)는 이로써 백성을 풍화(風化)하고
백성은 위정자를 풍자(諷刺)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초상지풍초필언(草上之風草必偃),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것이지요.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草上之風草必偃 구절 다음에 誰知風中草復立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이라는
구절을 첨부하는 것이지요.
시경에는 그러한 풍자와 비판과 저항의 의지가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석서(碩鼠)의 구절입니다.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보리 먹지 마라. 오랫동안 너를 섬겼건만
너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구나, 맹세코 너를 떠나
저 행복한 나라로 가리라. 착취가 없는 행복한 나라여.
이제 우리의 정의를 찾으리라.“
매우 직설적이고 저항적입니다.
그러나 ‘伐檀’(박달나무 베며)은 고도의 문학성과 저항성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절만 소개하지요.
“영차 영차 박달나무 찍어내어 물가로 옮기세.
아! 황하는 맑고 물결은 잔잔한데 심지도 거두지도 않으면서
어찌 곡식은 많은 몫을 차지하는가.
애써 사냥도 않건만 어찌하여 뜨락엔 담비가 걸렸는가.
여보시오 군자님들 공밥일랑 먹지마소,“
‘중국역대시가선집’의 서문에서 밝혔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중국시가의 전통이 잘못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배계층인 양반의 시각과 계급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시가
선별적으로 소개되어 왔었다는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음풍영월이 시의 본령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전통과 선입관 때문에 우리는 매우 귀중한 정신세계를 잃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세계와 시적 정서, 나아가 시적 관점은 최고의 정신적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경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삶과 정서의 공감을 기초로 하는 진정성에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시와 시경에 대한 재조명은 당연히 이러한
사실성과 진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을 통하여 현대사회의 분열된 정서가 반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삶과
유리된 정서에 매몰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미학, 가상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소외이며 분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지평(認識地平)을
넓히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시적 관점이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視角)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동서남북의 각각 다른 공간에서 바라보게 하고 춘하추동의 각각 다른
시간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결코 즉물적(卽物的)이지 않습니다. 시적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다이내믹한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關係網)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란 시가 있습니다. 연탄이란 하나의 대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를 여러분이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연탄이란 대상을 여러분은 어떤 시각에서 바라봅니까?
제가 정확한 시구를 암기하고 있지는 못합니다만, 이러한 내용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정호승의 시에 ‘종이학‘이 있습니다. 비에 젖은 종이는 내려놓고 학만 날아간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시각을 우리가 연마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실 나는 소설 읽을 시간은 없는 편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읽어야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요. 그러나 솔직히 “물배 차서“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 많은 글들을 읽고 나서 생각하면 핵심적인 요지는 시 한 편과 맞먹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시는 읽는 시간도 적게 들고 시집은 값도 비싸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시를 읽도록 권합니다.
물론 오늘의 현대시는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한 둘이 아니지요.
시인이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을 기초로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감수성이 주로 도시정서에 국한되어 있는 협소한 것이라는 것도 문제이지요.
문학인이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잘 모르는 시인입니다만 해방정국에서 대단한 문명을 떨친
임화라는 시인이 있었지요. ‘네거리 순이‘라는 시로 유명합니다만
임화는 항상 두보 시집을 가지고 다녔다고 전해지지요.
임화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부분의 시인들은 문학적으로 호흡하는 세계가
매우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까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모시서(毛詩序)의 구절을
소개하였습니다만 이 구절이 김수영의 시에 계승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김수영의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의 이미지가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마 잘 아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입니다. 그 시의 핵심은 바로 한 송이 국화가 피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서리가 내리고, 천둥이 친다는 광활한 시공간적
연관성에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시상이 백낙천(白樂天)의 ‘국화(菊花)‘에 있지요.
간밤에 지붕에 무서리 내려 파초잎새 이울었는데도 추위를 이기고
동쪽 울타리에 금빛 꽃술 환히 열고 해맑게 피어난다
(一夜新霜著瓦輕 芭蕉新折敗荷傾 耐寒唯有東籬菊 金粟花開曉更淸)는
내용입니다.
시상의 핵심은 미당이 여기서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누가 누구를 모방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시 세계를 열어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부단히 열어나가고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시경의 세계는 그 시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절한 애환을 보여줍니다.
거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매몰되고 있는 허구성입니다.
미적 정서의 허구성입니다. 시경은 황하유역의 북방문학입니다.
북방문학의 특징은 4언체(言體)라는 것입니다. 4언체의 보행리듬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노동이나 생활의 리듬으로서 춤의 리듬이 6언체인 것과 대조를
보입니다. 시경의 정신은 이처럼 땅을 밟고 걸어가는 듯이 확실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땅을 밟고 있는 확실함,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삶의 실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실상은 물 속에서 발이 땅으로부터 떠있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 자신이 지향해야 할 확실한
방향을 잃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경의 정서가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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