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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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인용
1. 서론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는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되며(不忍人之心),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溫故知新)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 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
동양학에서 자연이란 자원(資源)이 아닐뿐더러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對象)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무궁한 시공으로 열려있는 질서입니다. 우주(宇宙)라는 개념도 우(宇)와 주(宙)의 복합적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宇)는 물론 공간개념입니다. 상하(上下)사방(四方) 이 있는 유한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주(宙)는 고금(古今)왕래(往來)의 의미입니다. 시간적 개념입니다. 무궁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생기(生氣)의 장(場)’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생성과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입니다. 모든 것은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생주이멸(生住移滅)의 순환과정 속에 놓여있는 것이지요.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근대사회의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人本主義)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코 중심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존재하고 있는 것 중의 최고(最高), 최량(最良)의 어떤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은 최고의 질서입니다. (0321)
2. 오래된 시詩와 언言
우리가 <시경>의 국풍 부분을 읽는 이유는 시(詩)의 정수(精髓)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眞正性)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은 정(鄭)나라에서 수집한 시입니다. 정풍(鄭風)입니다. 음탕하다고 할 정도로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子惠思我 褰裳涉溱 子不我思 豈無他人 狂之狂也且
子惠思我 褰裳涉洧 子不我思 豈無他士 狂之狂也且
- 鄭風, [褰裳]
당신이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치마 걷고 진수라도 건너가리라.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남자가 그대뿐이랴.
바보 같은 사나이 멍청이 같은 사나이.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치마 걷고 유수라도 건너가리라.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내가 그대뿐이랴.
바보 같은 사나이 멍청이 같은 사나이. - <치마를 걷고>
『시경』의 세계가 충성의 세계가 아니라는 반증이 되기도 합니다. 거짓 없는 정한(情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을 살아가는 거짓 없는 애환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매몰되고 있는 허구성입니다. 미적 정서의 허구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시경』의 정신은 이처럼 땅을 밟고 걸어가듯 확실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우리는「무일(無逸)」편을 통해 생산 노동과 유리된 신세대문화의 비생산적 정서와 소비주의를 재조명하는 예시문으로 읽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무일(無逸)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 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3 주역의 관계론
『주역』에 담겨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歸納知)이면서 동시에 연역지(演繹知)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주역』은 사회 경제적으로 농경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는 유한공간(有限空間) 사상이며 사계(四季)가 분명한 곳에서 발전될 수 있는 사상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의 반복적 경험의 축적과 시간 관념의 발달 위에서 성립할 수 있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1년 내내 겨울이 지속되는 극지나 반대로 상하(常夏)의 열대 지역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주역>은 변화에 관한 사상이고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九三 无平不陂 无往不復 艱貞无咎 勿恤其孚 于食有福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식복이 있으리라.
‘무평불피 무왕불복 无平不陂 无往不復’은 어려움은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한번 겪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어느 한 단계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는 그에 따른 어려움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럴수록 마음을 곧게 가지고 최초의 뜻, 즉 믿음을 회의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역』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이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객관 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역』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것이지요. (0322)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
“옛 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는 까닭은 먼저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재조명하려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과거란 흘러가 버린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리고 과거는 추억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영원히 지나가고 다시 오지 않는 과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구절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온고(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지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옛것 속에는 새로운 것을 위한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완고한 장애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신의 방법으로서의 온은 생환(生還)과 척결(剔抉)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子夏問曰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已矣 -「八佾」
자하가 (『시경』 위풍衛風 「석인」碩人 구절의 뜻을 공자에게) 질문했다.
“’아리따운 웃음과 예쁜 보조개, 아름다운 눈과 검은 눈동자, 소素가 곧 아름다움이로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림은 소素를 한 다음에 그리는 법이지 않는가.”
자하가 말했다. “예를 갖춘 다음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네가 나를 깨우치는 구나!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이 대화의 핵심은 이를 테면 미(美)의 형식과 내용에 관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소와 보조개와 검은 눈동자 같은 미의 외적인 형식보다는 인간적인 바탕이 참된 아름다움이라는 선언입니다.
미(美)는 글자 그대로 양(羊)자와 대(大)자의 회의(會意)입니다. 양이 큰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양은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양은 물질적 토대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 대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 흐뭇한 마음, 안도의 마음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子路」
‘논어’의 이 화동론(和同論)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론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인간과 관련이 없는 지식이 과연 존재하는가? 없습니다. 자연과학적 지식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적 당파성에 기포해 있는 것이지요. 모든 지식은 사람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는 법입니다.
『논어』는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의 보고입니다. 『논어』는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붕(朋)이건 예(禮)건 인(仁)이건 사회는 사람과 사람이 맺는 인간관계가 근본이라는 덕치(德治)의 논리입니다. 바로 이점이 다른 사상에 비하여 『논어』가 갖는 진보성의 근거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5. 맹자의 의義
맹자의 성선설은 공자의 천명론(天命論)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천명을 본성으로 받아들이는 구조입니다. 맹자는 공자의 천명론과 예론(禮論)을 계승하되 천명을 인간의 본성으로 내재화하여 극기(克己)에 의한 본성의 회복에서 예(禮)를 구합니다. 천명 -> 본성 -> 사회적 질서라는 체계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공자의 천명은 맹자의 천성으로 이어지고 다시 송대(宋代)의 신유학(新儒學)에 이르러서는 천성이 곧 천리(天理)라는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으로 계승됩니다.
맹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見), 만나고(友), 서로 안다(知)는 것입니다. 즉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인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0323)
6. 노자의 도와 자연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註1)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도道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유有는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도(道)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 법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 의미의 도라는 것은 노자가 의미하는 참된 의미의 법칙, 즉 불변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못됨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경우지요.
*註1)도올 김용옥은 그의 저서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이 부분을, "If Tao can be conceptualized in words, it is not the constant Tao. If Name can be named, it is not the constant Name."이라고 영어로 번역한다. 즉, “도(道, Tao)를 말로써 개념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도(道)가 아니며, 이름(名, Name)을 이름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름(名)이 아니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을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자 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이 경우 최고의 선은 현덕(玄德)이며 도(道)입니다.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노자의 철학은 귀본(歸本)의 철학입니다. 본本은 도道이며 자연입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7. 장자의 소요
장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장자』 제1편 「소요유」逍遙遊입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逍遙)는 보행(步行)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인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道)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合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적이라거나, 사회적 의미가 박약하다거나, 실천적 의미가 제거되어 있다는 비판은 『장자』를 잘못 읽거나 좁게 읽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지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전쟁이야말로 흉물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묵자가 오늘의 세계를 눈앞에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군사적 패권주의가 당장은 부강의 방책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곧 패망의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묵자의 준엄한 반전 선언이 살아 있는 언어로 다가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울에 비추지 마라”는 묵자의 금언은 비단 반전의 메시지로만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가 실종된 물신주의적 문화와 의식을 반성하는 귀중한 금언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하늘에는 사시(四時)의 운행이 있고, 땅에는 자원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다스림이 있다. 이 다스림을 능참能參이라고 한다. 사람이 (천지와 동등한 자격으로 나란히) 참여할 수 있는 소지를 버리고(舍), 천지와 동등한 자격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바란다는 것은 환상(惑)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실천적 노력이라는 것이지요. 순자의 ‘능참’은 ‘실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를 제어하여 활용할 것을 강조합니다. ‘자연은 만물을 만들었지만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인본주의적 관점입니다.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人定勝天)이 바로 순자의 사상체계입니다. 능참, 즉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이든 순자의 성악설이든 우리는 본성론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선악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담론 환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만나는 것이 바로 인간 본성 문제입니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것이지요. 시장 원리를 뒷받침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제도가 바로 ‘역사의 종말’이라는 주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말’이라는 어감에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만 종말은 최고라는 의미입니다. 자본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등식화하고, 그것이 인류가 도달하였고 앞으로 도달할 수 있는 사회 제도의 최고 형태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인간 본성론 위에 구축하는 것이지요.
거슬러 올라가면 이기적 인간본성론은 근대사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 논리이고, 자본의 자기 증식 논리이고, 자본 축적 논리입니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담론이지요.
10. 법가와 천하 통일
나는 법가의 법치(法治)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공개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법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막연한 생각을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법치란 무엇보다 권력의 자의성(恣意性)을 제한하고 성문법에 근거하여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앙이 강조한 행제야천(行制也天)입니다. 법제를 행함에 있어서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법가의 차별성을 개혁성에서만 찾는 것은 법가의 일면만을 부각시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법의 공개성이야말로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 강의를 마치며
불교 사상의 핵심은 연기론과 깨달음입니다.
불교 철학의 최고봉은 화엄華嚴 사상입니다. 화엄이란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로, 갖가지의 꽃으로 차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화엄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엄이라는 의미에서 불교철학의 핵심을 읽을 수 있으며 또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엄이란 꽃(華)이 엄숙하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꽃으로 장식된 세계를 화엄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화엄은 세계에 대한 설명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無邊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은 미물微物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한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고전을 읽어온 기본적 관점이 바로 관계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입니다. 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 즉 각覺이란 이 연기의 망網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있는 분별지分別智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있는 집합표상集合表象, 즉 업業을 깨닫는 일입니다.
불교 철학의 관계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 이미지는 인드라의 그물입니다. 제석천의 궁전에 걸려 있는 그물에는 그물코마다 한 개의 보석이 있습니다. 그 보석에는 다른 그물코에 붙어 있는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습니다.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는 이들 모든 영상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영상도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또 다른 보석에 비치고, 당연히 그 속에는 자신의 모습도 비치고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영상이 다중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창신創新의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지적 관심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적 과제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창신이 어려운 까닭은 그 정신의 실천 현장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현실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요. 과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을 창신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과거란 지나간 것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의 모든 실천은 무인지경無人之境에서 새집을 짓는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창신은 결과적으로 온고창신溫故創新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곡선의 형태로 수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조와 우상을 과감히 타파하는 동시에 현실과 전통을 발견하고 계승하는 부단한 자기 성찰의 자세와 상생의 정서를 요구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heart)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심에 있다는 의미는 사상을 결정하는 부분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지요.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의 장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0324)
Ⅱ. 요약(Summary)
자본주의체제가 양산하는 물질의 낭비와 인간의 소외, 그리고 인간관계의 황폐화라는 모순과 위기구조 상태에서 벗어나 희망을 찾기 위해, 그리고 현 시점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과 사회를 성찰하고 더 나은 사회로 개혁하기 위한 근본 담론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판단, 과거를 재조명하고 현재를 재해석하며 미래를 모색하고자 동양고전을 강독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하고 있다.
저자가 걸어놓은 화두는 ‘관계론(關係論)’이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며, 이러한 관계론적 사고를 재조명할 수 있는 주제들로 이 책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고,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고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성찰한다.
이러한 성찰은 개인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며, 고전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 이러한 성찰적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고, 그러한 관점을 얻었다면 마치 강을 건넌 사람이 배를 버리듯이 고전의 모든 언술(言述)을 버려도 상관없다고 얘기한다.
이러한 관점이 새로운 인식을 길러내는 창신創新의 장이 시작되는 지점에 설수 있도록 해 주는 것으로 창신이 대단히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오늘의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며, 동시에 내일의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창신(創新), 저자는 이것을 원한다. 창신을 위해 자유로움 속에서 창의적 사고를 발휘하길 원하며, 개념과 논리가 아닌 ‘가슴’의 이야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이야기가 전개되기를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다.
또한 개인의 정체성은 타인과 칼 같이 단절되고 구분되는 배타적 정체성이 아니라 내가 만나고 경험한 것의 총체적 합이라고 말한다. 즉, 개인의 정체성(identity)은 개인만의 것이 아닌 사회성(sociality)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의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關係網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Ⅲ. 내가 읽은 강의(저자의 입장에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감탄하는 마음으로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해 준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양서(良書)란 이런 책을 말하는 것이다. 시경(詩經)에서부터 신유학(新儒學)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동양고전들을 알기 쉽게 축약한 것은 물론이고, 독자들이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간 저자의 능력과 혜안, 통찰력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이다. 또한 책의 마지막 부분까지 한치의 소홀함이 없이 진실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간 성실함은 읽는 이를 숙연케 한다. 이 책은 아마도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될 것이다.
이 책을 두고 저자의 입장에서 뭘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은 난감한 노릇이다. 거의 완벽해 보이는 책을 두고 무엇을 어떻게 더 말할 것인가? 분명 고역이 아닐 수 없지만, 시도는 해보려 한다.
저자는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과 이러한 개혁을 사회화하기 위한 거대 담론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상황이라는 인식과 함께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 담론을 재구성하는 과제를 전제하고, 동양고전들을 통해 현대 사회를 재해석하고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러한 근본적 담론이 동양고전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일까?
동양적, 서양적이라는 말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온 구분이고 문화적 유형의 차이이다. 동양적 가치와 서양적 가치는 궁극적으로 제각기 특수성과 일반성을 가지고 현재의 우리들 삶 속에서 종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에서 동양적인 가치에 관한 한 가지 담론만을 재구성하고 성찰하면서 현재와 미래를 향해 나아갈 길을 모색해 본다는 것은 한편 편향된 것이며 한편 위태하게 느껴진다.
인간은 기질적 차이를 지닐 수 있어도 인간성이라는 보편성을 벗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관념적 분별을 떠나 살아 있는 인간의 구체적 삶에 눈을 돌려 본다면 다름을 전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저자를 오독하는 위험은 있지만, 가치의 일방향성만 강조한다면 다른 모든 가치의 특수성과 우수성은 무시되고 버려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어느 일방에 대한 것만을 재해석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충분히 경계해야 할 일인 것이다.
모든 사상은 다른 모든 사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파란만장한 역사적 전개 과정의 일환으로 출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은 현재 이 땅에 뿌리내리고 있는 주도적인 사상과 현상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즉, 동양고전의 내용을 읽고 성찰적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그러한 성찰적 관점을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면, 저자의 말처럼 마치 강을 건넌 사람이 배를 버리듯이 고전의 모든 언술(言述)을 버려도 상관없을 것이다.
’생기(生氣)의 장(場)’으로서 생성과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이고, 모든 것이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생주이멸(生住移滅)의 순환과정 속에 놓여있는, 그런 최고질서인 자연自然에 몸과 마음을 맡긴 채, 방향을 제시하는 목소리를 내기 보다는 독자들이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끌려올 수 있도록 좀 더 재미있는 내용 풀이와 정감있는 가르침을 더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감히 어줍잖은 언설을 더한 것을 부끄러워한다.
“말은 뜻을 전하는 것인데,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 <장자>「외물」外物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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