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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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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14일 23시 15분 등록

<1> 저자소개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5살 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나움부르크로 이사하였다.
포르타 김나지움 시절에는 음악과 그리스·로마 문화에 심취하였고, 1864년 본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古典文獻學)을 배웠으나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시절 동안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고, 바그너와 음악을 통해 깊은 관계를 맺었다.
1869년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스승 리츨의 추천을 받아 24세에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니체의 삶은 연대기적 시간이 아니라, 그가 변신한 시간에 맞추어 기술되어야 한다.
1872년 첫 저작인 <비극의 탄생>과 <반시대적 고찰, 1873-1876>에 이르기까지 니체는 부르주아 문화를 죽음의 문화로 보고 비판한다. 근대 유럽인들은 자기 삶에 필요한 가치들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으며, 기독교는 천국이 ‘오직 저 세계’에만 있다고 말했다.

니체는 부르주아 문화의 피상성과 위선을 넘어서는 진정한 가치를 예술에서 발견했다.
“예술이야말로 삶의 최고 과제이며, 진정한 형이상학적 행위이다.”
그는 특히 음악에서 삶의 위안을 받았다. 그에게 음악은 언어나 몸짓보다 깊은 곳에 있는 의지 그 자체, 사물 그 자체였다. 그는 한동안 바그너에게 심취하였다.

한동안 바그너를 독일적 미덕에 항거하는 저항의 화신으로 여겨 존경해 오다가, 독일 제국의 정신을 대변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결별한 후, 니체는 매우 급진적으로 되었다.

“모든 가치를 뒤바꿔 버릴 수는 없을까? 혹시 선이란 악이 아닐까? 신이란 단지 악마의 발명품이거나 악마를 더욱 정교하게 해 놓은 것은 아닐까?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거짓이 아닐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서문

니체는 마치 쟁기를 든 사람처럼 자신이 믿어왔고, 교육받았던 모든 가치들의 토대를 파헤쳐 갔다. 선과 악에 대한 도덕적 판단, 신에 대한 종교적 믿음, 영원성에 대한 예술적 갈망, 국가에 대한 숭배, 이상적인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찬양 등 어느 것 하나 예외를 두지 않았다.

그리고는 너무 자명해 보였던 보편적 가치들이 실제로는 어떤 토대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무언가 확고한 도덕, 확실한 진리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사리 이상을 믿어버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떠받들고 있는 모든 형이상학적 가치에 대한 냉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든 것들에 대한 염증!

그러나 니체는 허무적인 부정에 머물지 않고, 긍정의 정신을 획득했다. 바로 이 점이 그를 다른 어떤 철학자보다 위대하게 만들었다. 1877년에서 1881년 사이에, 긍정의 권력의지, 영원회귀, 위버멘쉬 같은 개념을 생산하고, 인류에게 가장 특이한 존재로서의 니체를 선사하기 시작한다.

니체는 평생동안 두통과 근시로 시달려야 했으며 신체상의 통증이 없었다해도 자주 우울증을 겪곤 했다. 질병과 치유를 반복하면서 니체는 새로운 감각을 자주 경험했다. 병은 자신에게 익숙했던 영토를 낯설게 만든다.

“병은 내 모든 습속을 바꿀 권리를 나에게 부여했다. 병은 나에게 망각을 허용했고 또 그것을 명령했다. 나는 내 생애에서 병 속에서 시달리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보다 더 큰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다.”
-이 사람을 보라-

병은 우리 안에 있던 정서들 사이의 전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더욱이 그 전쟁이 니체의 경우에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된 인류의 습속에 대한 것이었다. 니체는 우리 안에 있는 힘들의 전쟁에 따라 자아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단지 단일한 자아, 단일한 주체에 대한 도덕적 의지를 갖고 있을 뿐이라고.

1882년에 출간된 -즐거운 지식-에서는 그의 병이 끝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난기와 자유로움이 묻어난다. 이 책에서 신의 죽음을 선포하였고, 영원회귀가 나타나고, 긍정의 권력의지와 부정의 권력의지가 선명하게 대비되며,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이 등장한다.
질병과 치유의 반복, 그리고 영원회귀의 깨우침은 그에게 세계와 삶에 대한 긍정을 가르쳤다. 이제 병이 나타나지 않는다. 고통과 치유의 반복을 끝낸 후 니체는 놀이의 반복, 유희의 반복을 시작한다.

“나는 유희보다 위대한 과업을 연상시키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유희는 하나의 위대함의 징후이며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즐거운 지식-의 마지막을 ‘위대한 건강’이라는 제목의 글로 맺고 있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끝맺음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을 찾는 고단한 수행의 과정이 아니라 수백 개의 건강을 즐겁게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위대한 건강을 지닌 자는 자기 안에 수백 개의 힘들을 갖는, 이른바 ‘힘들의 과잉 상태’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는 항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함으로써 낡은 가치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낡은 세계를 소멸시키는 사람이다.

니체가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를 함께 이해하고, 그들의 이름으로 자신의 서명을 대신했을 때, 그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것이 아니라 위대한 건강을 획득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여러 작품 속에서 니체의 분신처럼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그는 니체이면서 동시에 니체가 아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자부심은 그 어떤 책보다 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나왔을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는 거의 없었다. 니체는 결국 제4부를 자비로 40부 출판하였다. 그의 고독은 일곱 겹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친구들을 기다렸다.
“최소한 300년을 기다리지 못한다면 내 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의 출현은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았다.” 니체는 자신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자신만큼 풍성한 정신의 소유자가 출현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계속해서 무덤 속에 누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백 년 동안 니체는 우리에게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서로 심각한 모순 관계에 있는 것들도 있었다.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자로서 혹은 비판자로서, 여성 혐오주의자로서 혹은 여성주의 철학자로서, 여전히 니체의 초상화는 모순적이다.

니체의 말처럼 어떤 사람은 죽어서야 태어난다. 오늘날 니체에 관한 논의는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풍성해졌다. 진리에 대한 그의 견해는 형이상학이나 해석학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사회학자 베버는 “우리 자신이 정신적으로 실존하고 있는 세계는 대체로 맑스와 니체로부터 각인된 세계다”라고까지 말했다.

정신분석학자들 역시 니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프로이트와 융은 니체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융은 그 사실을 직접 밝혔다. 작가들은 니체가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는 중심축으로 삼았던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에게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파편화된 현재 세계에서 잊혀진 생명력 같은 것이었다.

화가들은 니체의 투시법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다. 원근법에 대한 니체의 비판 이후 하나의 소실점이 그림에서 차지하는 패권적 성격을 제거하려는 여러 움직임이 있었다.
가령 피카소는 한 시점에서 동시에 볼 수 없는 여려 면들을 한 화면에 등장시켰다.

니체의 영향을 받은 개인이나 사조를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별 의미가 있어보이지도 않는다. 니체주의라는 말 속에는 무엇을 연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사상가들의 책을 정리하고 주석이나 붙이는 철학자들을 경멸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누구의 생각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만드는 것이며, 누구의 삶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자는 니체를 읽지 않은 채 니체의 독자가 될 수 있다.

_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발췌함.



<2> 소감

책좀 읽는다는 사람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폼으로라도 니체의 글을 한번쯤 읽는다고 한다. 그러나 고병권은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해서야 니체를 만났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읽으며 강력하게 감전되었다고 한다. 한창 맑스의 원전을 읽던 중이었고, 니체로 인해 시간도 바뀌고 건강도 바뀐 지금, 다시 맑스를 찾아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고병권은 말한다. 맑스를 찾아가던 길에 니체를 감추어 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고.
이 대목은 고미숙의 연암에 대한 열애를 떠올리게 한다. 대저 책깨나 읽고, 글깨나 쓴다는 사람들은 상대가 누구든 운명같은 조우를 경험하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도 뒤늦게나마, 인구에 회자하는 <니체라는 거대한 구조물>에 입문해 볼 생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감전까지는 되지 않았다. 대단하다, 바닥과 너비를 짐작할 수 없는 스케일, 오늘은 여기까지 읽지만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느낌. 과대망상에 가까운 니체의 자만심이 현실이 된 오늘, 무덤 속의 니체는 행복할까.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번개와 뇌성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 224쪽

내가 니체에 감전되지 않은 까닭은 이 책이 니체의 전반적인 사상체계를 소개하는 백과사전식의 개괄서이기 때문이다. 해석학이나 계보학, 근대정치에 대한 사상에 빠지기는 어렵지 않은가. 게다가 용어도 해석도 상당히 어려웠다.

니체의 주된 개념으로 보이는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를 예로 들더라도, 일개 독자인 나뿐만 아니라 직업적인 학자들조차 오해와 논란이 잦은 모양이니, 그 개념을 이해하기도 빠듯한데 애정을 가질 수는 없었다.

“Macht가 능력을 의미하고 Wille가 명령을 의미한다면, 권력의지-Wille zur Macht-는 사실상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자, 능력을 실현하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권력의지’가 개념들의 조합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라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권력의지’는 ‘권력’과 ‘의지’가 결합한 개념이 아니다. 171쪽

권력의지가 아닌 존재라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 다시 말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173쪽

허무주의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174쪽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는 와중에도 언뜻언뜻 무엇인가 말해줄 듯 아름다운 경구들도 많았다.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176쪽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오히려 감각과 정신이야말로 육체의 도구이며 노리개임을 모른다. 육체는 자아보다도 큰 자기 자신이며, 제압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그것은 힘센 명령자이다. 179쪽

생성과 소멸, 건축과 파괴는 아무런 도덕적 책임도 없이 영원히 동일한 무구의 상태에 있으며, 이 세계에는 오직 예술가와 어린아이의 유희만이 있을 뿐이다. 185쪽

니체가 운명애-amor fati-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자기 자신의 생성이었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라! 208쪽

영원회귀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209쪽



여기저기서 인용되던 그 매혹적인 니체의 아포리즘은 어디에 모여 있단 말인가? 내게는 7장과 8장이 그중 선명하게 다가왔다. 아마 이런 저술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 책이라면 내가 좀 더 정열적으로 니체에게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초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즉 놀이와 웃음과 춤을 몰랐다.”

“그들은 지상에서 웃어야 할 근거를 못 찾는다. 어린아이도 발견하는 것을. 그들은 춤추는 법도 모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춤추는 자이고 가벼운 자이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서는 자는 춤을 춘다.”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

“디오니소스는 가벼움과 기쁨 자체이다. 그의 춤은 생성과 생성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고, 웃음은 다수성과 다수성의 단일성에 대한 긍정이며... ” 232-233쪽


차라투스트라의 여행 경로를 보면 고도 차가 매우 크다는 걸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높은 곳에 있는 동굴과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인간 세계를 왕복한다.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할까? 그것은 세상을 얼마나 다양한 높이에서 보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닌 가치와 가치 감각의 모든 영역을 꿰뚫어보기 위해, 그리고 여러 관점과 판단을 가지고서 높은 곳에서 사방을 보고, 낮은 곳에서 모든 봉우리를 보며, 한 구석에서 천하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스스로 비판자나 회의주의자, 독단론자, 역사가, 시인, 수집가, 여행자, 수수께끼 해독자, 도덕주의자, 예언자, 자유주의자 등등의 거의 모든 유형의 인간이 되어보아야 한다. <선악을 넘어서>

높낮이를 자유롭게 조절하는 무공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공력을 쌓기 위해 차라투스트라 역시 ‘산정과 심연이 하나인 위대한 길’을 여러 번 걸어야 했다.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 248쪽


이제 겨우 한 권의 책을 읽은 것으로 감히 니체를 인용할 수조차 없음을 안다. 그만큼 그는 광범위하고 심오하며 아름답다. 조만간 다시 니체를 읽어, 내가 뒤집어 쓸 수 있는 가면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지금은 조금 지겹기도 하고, 또 한 명의 니체 매니아인 장석주의 산문집-노자를 벗하여 시골에 살다-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이만 줄이고자 한다.


<3> 내가 저자라면

같은 저자의 책을 시차를 두고 읽다보면 고무적인 현상을 발견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저자들의 글쓰기 공력이 향상되고 있음이 훤히 보인다. 누구나 써 나가면서 크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가, 니체의 전모를 조금이라도 더 파악해야 할 것같아서 고병권의 다른 책,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살펴보았다.

땡기는 챕터만 뽑아 보았지만, 문장 자체가 훨씬 쉽고 부드러워 읽기가 너무 편했다. 필독서를 펴낸 지 1년 반만의 저술이다. 깊어지지 않으면 쉬워질 수 없다고 한 것은 누구더라?
첫번 째 책에는 다분히 난해하고 다소 폼잡은듯한 표현들이 있었다.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자, 추론하기보다는 제 방식대로 소화시키는 괴물! - 239쪽- 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너무 딱딱하였다. 그것은 저자 고병권의 문제라기 보다, 니체의 사상 전체를 소개하는 입문서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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