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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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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6일 05시 07분 등록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Nietzsche, Thousands of eyes…
고병권 저, 소명출판


1. 저자에 대하여

고병권

서울대 화학과 졸업.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연구공간 '수유+너머'> 의 공동대표.
지은 책으로는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한 권으로 읽는 니체> 등이 있다.

"니체를 해석하는 일은 그를 재현하는 일이 아니다. 또한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 그 진정성을 찾아내는 일도 아니다. 니체를 해석하는 일은 니체를 창조하는 일이다."

나는 그가 흥미롭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다가, 사회과학으로 발을 돌려 박사학위를 받았고, 다시 니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니 니체라는 구덩이에 빠져버리다니. 그 또한 니체처럼 ‘끊임없이 스스로를 불싸지르고 그 재 위에서 새로워지려고 한 사람’이 아닐까?

뼈대부터 구성하고 거기에 내용을 붙여 책을 만들어내는 것.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를 자기 식대로 배열하는 것.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다듬어야 가능한 작업일까. 나도 이 사람처럼, 무엇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고 공부한다면 다른 이의 사상의 뼈대에 나만의 해석을 붙여 능수능란 자유자재로 책을 써낼 수 있을까.

그가 대표로 있는 연구공간<수유+너머>는 지식공동체이며 생활공동체이다. 관심사에 따라 이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홈페이지 www.transs.pe.kr


-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 中 발췌 -

“니체는 인류문화의 목적이 천재의 산출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과연 니체가 말하는 천재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요. 오른다고 하더라도 그 삶은 정말 피곤하지 않을까요.”

“니체는 개인의 결단이나 의지로 천재가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천재야말로 누적된 시대의 산물 아닐까요.”

“니체는 우리 모두 내면에 천재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천재가 피곤할 것이라 말했지만 니체에게는 피로야말로 가장 큰 적입니다. …니체에게 A에서 A'로 바뀌는 것은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인 채 그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니체가 말한 천재는 반시대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시대를 열어가는 사람이죠.”


프리드리히 니체

독일의 시인•철학자.

독일 레켄 출생.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목사인 아버지를 5세 때 사별하고 어머니•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자라났다. 14세 때 프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교육을 받고 1864년 20세 때 본대학에 입학하여 F.리츨 밑에서 고전문헌학에 몰두하였다. 다음 해, 전임하는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대학에 있을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또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1869년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28세 때 처녀작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odie》(1872)을 간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悲劇)의 탄생과 완성을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해명하고, 이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主知主義)에 의거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이미 그 몰락을 보았으며, 다시 그 재흥(再興)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기대 •확인하는 이 저서는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에 쌓아 올린 것이다.

1873~1876년에 간행된 4개의 《반시대적 고찰 Unzeitgemasse Betrachtungen》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天才)를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 이상은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1878∼1880)에서 더욱 명확해져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偶像)이라 하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의도하였다. 이미 고독에 빠지기 시작한 니체는 이 저술로 하여 바그너와도 결별하였고, 1879년 이래 건강의 악화, 특히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위해 주로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에 체재하면서 저작에 전념하였다.

《여명(黎明) Morgenrote》(1881) 《환희의 지혜 Die frohiliche Wissenschaft》(1882)의 뒤를 이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1883∼1885)로 그의 성숙기(成熟期)가 시작된다. 신의 죽음으로 지상(地上)의 의의를 설파하였고, 영겁회귀(永劫回歸)에 의해 삶의 긍정(肯定)의 최고 형식을 밝혔으며 초인(超人)의 이상을 가르쳤다. 《선악의 피안(彼岸) Jenseits von Gut und Bose》(1886)에서는 위의 사상에 부연하여 근대를 형성해 온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여 생긍정(生肯定)의 새로운 가치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도덕의 계보학(系譜學) Zur Genealogie der Moral》(1887)에서는 약자(弱者)의 도덕에 대하여 삶의 통일을 부여하는 강자(强者)의 도덕 수립을 시도하였으며, 미완의 역작 《권력에의 의지(意志) Wille zur Macht》(1884∼1888)에서는 삶의 원리, 즉 존재의 근본적 본질을 해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다음해 1월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하였다. 그 이후 정신착란인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니체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극복이다. 그는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에 의해 자라온 유럽 문명의 몰락과 니힐리즘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득하였다.

사람들은 지고(至高)의 가치나 목표를 잃어 이미 세계의 통일을 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소화(矮小化)되고 노예화하여 대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근대의 극복을 위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피안적(彼岸的)인 것에 대신하여 차안적(此岸的)•지상적인 것을, 즉 권력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는 니힐리즘의 철저화에 의해 모든 것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려 하였다. ‘초인•영겁회귀•군주도덕’ 등의 여러 사상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2.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7)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7)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7)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잘 추다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8)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19)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27) 니체의 철학은 진리를 문제 삼기보다는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는다. 왜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 왜 그들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찾는 철학 자체를 하나의 문제를 삼았다.

(27) 모험가들은 ‘어떤 곳’을 뒤지지만 철학자들은 ‘모든 곳’을 뒤진다. 모험가들에게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무가치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떤 곳’에만 있는 것이 무가치하다. 만약 모험가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특정한 곳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전체를 본다면 그것은 “개개의 요소들에 전체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52)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다. 다시 말해서 ‘미쳤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53)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계속 중이며 방황 중이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번개와 뇌성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행위들, 그것이 비록 완성된 것일지라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54) 사실 시간으로 따져서 가장 늦게 연회에 참석한 사람이 가장 말석에 앉듯이 현재는 과거의 뒷자락에 앉아 마땅하다. 그러나 현재가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 현재가 상석에 앉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현재가 미래를 건축하고자 할 때이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에게 과거는 훌륭한 자원들의 보고이다.

(56)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사랑의 학문이다. 필로-소포스. ‘지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다.

(56) 사랑은 숭배하는 것도 아니고 예속되는 것도 아니다.

(58)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적 행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사랑하는 철학은 변화하는 건강상태를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다. 그리고 건강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획득하고 계속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59) 그가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63) “일반화 할 수 없는 것 까지 일반화 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84)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

(90) 신은 아담의 능력에 맞추어, 그 과일은 다른 짐승에게는 좋은 과일일 수 있지만 지금 아담의 몸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말한 셈이다. 그러나 아담은 어린애처럼 이것을 도덕적 금지로 이해했던 것이다.

(96) 니체는 ‘거리의 열정’을 강조한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강한 인간들은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며, 차이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다양성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103)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108)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109) 우리가 해석을 ‘진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두는 한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석이 진리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한 쪽씩을 막고 있는 형국이 되지만, 진리가 해석 위에서 논의된다면 길은 누구도 다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과잉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110) 사실 어떤 것이 진리로 주장되는 것은 진리 자체가 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힘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더 이상 해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기는 커녕 힘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할 때 소멸해 버리는 것이 진리이다. 니체의 해석학은 진리의 족쇄로부터 해석을 구하는 것이다.

(111)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

(120)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또는 경영)’을 알지 못한다.

(123)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127)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인정되었던 것 또는 그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가치도 찾지 못한다.

(138) 니체는 “서구 전체가 그 제도(민주주의)를 낳고 미래를 낳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에서 존재하는 다양성은 어떤 힘으로도 작동하지 못하고 모래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가축 떼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이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142) “문명(길들임)의 과정은 무시무시한 맹수 같은 본성에 대항하여 철퇴와 고문을 필요로 한다.”

(142) 노동이 칭찬받고 노동의 축복에 관하여 지치는 일도 없이 이야기 되는 경우…나는 저의를 본다. …노동을 바라볼 때, 현재 실제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노동이 최고의 경찰이라는 것, 노동은 각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방해할 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노동을 통해 보다 안전해질 것이다.

(144) 길들이기의 주요한 수단이 군대였다면, 길러내기의 주요한 수단은 학교이다.

(166)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169) 니체는 힘들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내면의지가 바로 권력의지라고 말하고 있다.

(171) 의지는 욕구나 갈망, (무엇보다도) 결핍과는 다른 것이다. 의지는 명령하는 것이다. 힘이 다른 힘에 자신의 영향을 강제할 때 표현되는 것이 의지이다.

(173)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자체는 권력의지다.”

(17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186)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192) 삶은 죽음과 반대말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잇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성하지 않은 것’, ‘의욕하지 않는 것’이다.

(205)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

(210) 지구는 자신의 나이에 비하면 ‘방금’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인간이라는 동물의 탄생을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을 준비해온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혹성이다.

(212) 어떤 사람이 물건 하나를 덤불 뒤에 숨겨 놓은 다음 그것을 바로 그 자리에서 찾아낸다면, 이것을 칭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소위 이성이라는 것을 통해 벌이고 있는 일이 바로 그와 같다.) 내가 포유동물을 정의하고, 낙타 한 마리를 보고 난 뒤 ‘봐라, 포유동물이다’고 말한다면 이는 매우 제한된 가치만이 있는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본 진리일 뿐이다. 그것은 진리 자체와는 상관없으며, 세계를 인간과 같은 종류의 사물로 이해하고 하는 기껏해야 동화의 감정을 쟁취하는 것일 뿐이다.

(215) 니체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사이에 끼여 있는 ‘과’자를 바라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들이 자연이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과 대등하게 나열될 수 있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한 욕망이 그 한 글자를 통해서 들통났기 때문이다.

(216)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

(221) 인간이 몰락하고 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신이 죽었다”는 복음의 형태로 전달된다.

(222)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231)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233)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23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춤추는 것을 이해하는 신만을 믿겠다.” 차라투수트라의 신은 디오니소스다. 초인을 ‘의욕하는 자’ 차라투스트라가 영웅의 모델이라면, 초인으로 ‘존재하는 자’ 디오니소스는 생성의 신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놀고 싶어하는 자이고, 웃고 싶어하는 자이고, 춤추고 싶어하는 자라면, 디오니소스는 놀이 속에 존재하는 자이고, 웃음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춤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디오니소스는 “생성 속으로 뛰어든 존재의 혼”이다.

(239)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44) “우리는 이미 배를 불태워 버렸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용감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247) 니체의 오랜 좌우명 “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250)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253)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휴.. 책을 덮는 순간 한숨이 난다. 어려웠다. 이 책을 읽기 전, 사부의 책 곳곳에서 인용되는 니체의 짤막한 글들이 너무나 좋았기에 나름 기대하고 보았다. 읽은 곳을 또 읽고, 몇 번을 고민고민해 보아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다. 게다가 일주일이란 시간은 너무 짧다.

책의 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한 듯 한데, 저자 입장이 되어 이야기하기 힘들다. 이번 주는 책을 읽으며 잠시잠시 스친 생각의 단편들을 모아두는 것으로 대신해야겠다. 사부님 말씀대로 2년차에 다시 한번 도전할 때 참고하기 위하여-.

* 고병권의 문체는 니체의 그것과 닮아 있다. 니체와 고병권을 구별한 것은 따옴표를 통해서였다. 니체의 연구분야에 나름의 제목을 붙여 새롭게 포장한 것도 좋아 보였다. 그만큼 니체를 사랑해서였을 것이고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의 모든 저작을 수 차례 연구하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 2부의 두 편의 논문은 1부와 문체의 흐름이 맞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를 생각해 달라고 하기엔 너무 다른 느낌이지 않은가. 적어도 문체라도 닮아 있다면 속아 넘어가기라도 할 텐데 말이다. 2부로 하지 말고 부록으로 하는 것은 어떨까.

* 예전에 사부님의 어느 책(아마도 ‘익숙한 것과의 결별’인듯)에서 니체에 대해서 한챕터로 요약해 둔 것이 기억나 인터넷에 ‘구본형 니체’ 라고 검색해 보았다. 사부님이 쓰신 ‘천개의 눈 천개의 길’ 서평이 있었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은 니체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는 변신의 힘이며, 가장 극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이곳에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라는 단호한 유혹에 따라 늘 “떠나야할 곳은 알지만 도착할 곳을 모르는 배”를 타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니체로 남은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헤겔과 닮아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현존에 지독한 부정을 가했던’ 쇼페하우어가 되었고 또 바그너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떠났다. 이윽고 자기 개념을 창조해 낸 바로 그 니체가 되었지만, 그는 다시 남들이 알고 있는 ‘니체씨’를 떠나갔다. 그는 ‘다이너마이트’였으며, ‘광대’였으며, “모든 금지된 곳을 찾아나서는” 유목민이었으며 외부인이었고 방랑자였다. 늘 “떠나는 사람이었으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을 잃어버리고 부정함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니체를 읽는 것은 그러므로 피끓는 방랑의 유혹이지만, 그를 알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잡았다고 생각하는 그 곳에 허물만 남기고 이미 빠져나가버리고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과거의 그 니체가 아니었다.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기 때문에”, 니체라는 이름은 어떤 정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스스로를 불싸지르고 그 재 위에서 새로워지려고 한 사람이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p 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 저자 고병권 역시 적어도 두 번은 스스로를 떠난 듯 하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다가, 사회과학으로 발을 돌렸고, 다시 니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지금까지 그를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는 니체가 말한대로, “책을 짓눌러 사상을 더듬는 일당”이 아니었다. 그는 ‘문 밖에서 사유하는 사람’ 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공부도 공부지만 아마 북한산 기슭에서 꽤 많은 산책을 하지 않았을까.

* 철학자들의 사상을 받아쓰는 ‘철학적 노동자’가 되지 말고 그 철학자를 화살로 삼아 진리를 향해 쏘는 ‘미래의 철학자’가 되라는 고병권의 말이 멋지다. 진리의 노예가 되지 말고, 지혜의 친구가 되자.

* “인간이란 결국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에 불과하다”는 니체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게다가 초인의 특징 세 가지를 “놀이와 웃음과 춤” 으로 꼽다니! 다음 주 책인 호모 루덴스와 합쳐져 아마도 이 구절들이 빡빡한 현실에 지쳐있는 나에게 하나의 구원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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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0.21 00:52:46 *.72.153.12
철학자 2명을 골라서 '그 분'이 '그 놈'이 되게 하라는 말씀에 니체가 끼면 어떨까.
잡은 듯 한데 놓쳐버린, 그리고서 부인하면 어느새 다가와 있는 '그놈'이 되면. 이러다가 니체 광팬이 많아지겠다. 먼저 그를 사랑해야 하는데, 네 말대로 일주일은 너무 짧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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