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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2일 11시 01분 등록
1.작가에 대하여M



20세기 부르크하르트라고 일컬어지는 호이징하는 1872년 12월 17일 네덜란드의 북쪽 대학 도시인 흐로닝헨(Groningen)의 평범한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대학의 생리학 교수였다. 호로닝헨 대학에 입학한 호이징하는 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특히 동양의 언어인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산스크리스트어의 연구에 심취하였고 점차 비교 언어학으로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1895-96년의 겨울 학기에는 라이프치히(Leipzig)에 유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비교 언어학에만 대학 생활을 전적으로 바쳤던 것은 아니었다.「호모 루덴스」가 그 좋은 증거가 되겠지만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조예는 그가 이러한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그는 1897년에 학위를 받은 뒤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하를렘(Haarlem) 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서 생계를 꾸렸다. 그 뒤 그로닝겐 대학에서 고대 인도 문화사와 종교사 연구로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그리고 역사학으로 기울어져서 연구 무대를 서구 중세사로 옮기게 되었다. 1905년에는 은사이며 역사학자인 블로크(P. J. Blok)의 도움으로 흐로닝헨 대학의 네덜란드 역사 교수가 되었다. 1915년에는 라이덴 대학의 일반 역사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40년 독일군의 점령으로 그 대학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독일 점령 치하에서 독일을 비판함으로써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42년 석방되어 가족의 면회조차 금지된 채 겔데른(Gledern)의 작은 시골집에서 1945년 2월 1일에 72세로 영면했다.


그는 강단 생활을 하며 1916년부터 32년까지 한 문화잡지의 편집을 맡았고 네덜란드 왕립 학술원의 회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라이덴 대학에서 1919년 그 유명한「중세의 가을」을 발표하여 유럽 인문 과학자 중에서 발군의 존재가 되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부르크하르트를 잇는 문화사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들은 공통적인 역사 감각을 가지고 문화사가를 지향했던 것이다. 호이징하는 인류의 문화 발전을 하나의 보편적인 개념으로써 분석, 설명하고, 도식화, 유형화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며 한 시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이런 역사학 방법을 문화사(Kultur-Geschichte)라고 하는데 호이징하는 그 자신은 몰론 부르크하르트를 문화사가의 범주에 넣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저자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와 중세를 명확하게 대비시킨 데에 대해서「중세의 가을」의 저자 호이징하는 저서의 제목 그대로 르네상스를 중세와 연결되는 곧 중세의 수확기로서 파악하였다. 물론 두 사람의 중세와 르네상스에 대한 이러한 해석 차이는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50년의 시간적 거리에 의한 학문적 성과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고 호이징하는 중세야말로 그가 현대에서 꿈꾸고, 자신의 이론과 저술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유럽 공동 사회가 실현되었던 시대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드디어 현대의 고전이라고 하는「호모 루덴스」가 그의 문화사 연구의 자연적인 귀결로서 집필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주제는 문화속에서 놀이였다. 나찌에게 잡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던 그는 생각과 자료를 정리하여 호모루덴스를 집필하였다.호모루덴스는 재미있ㄱ 흥미로운 분야였지만, 실제로 책은 딱딱하고 이론위주의 책으로 발간되었다.

주요저서로는
1919년-「중세의 가을-네덜란드의 14세기와 15세기의 생활양식과 정신형태에 관한 연구」
1924년 -「에라스무스」
1933년 -「17세기 네덜란드의 문화 - 사회적 토대와 국가적 특성」
1935년 -「내일의 그늘에서 - 우리 시대의 문화적 고민에 대한 진단」
1938년 -「호모 루덴스 - 문화의 놀이 요소의 규정에 대한 시도」
1945년 -「더럽혀진 세계 - 우리 문화의 치유 가망에 대한 고찰」 등이 있다.

2 나에게 다가온 책>


가. 일에 대하여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들어온 생각은 조안 시울라의 일의 발견이었다. 개미처럼 일하고 베짱이처럼 소비하라는 말이 다시 생각이 난다. “살기 위하여 일을 한다”에서 일을 하기 위하여 산다는 존재로 변한 현대의 세태를 잘 표현했다. 일과 놀이, 우리는 이 두 가지 개념에 대하여 어떤 거부할 수 없는 단단한 그물 속에 넣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시울라는 삶의 질 측면에서 일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였다. 이에 비하여 호이징 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다. 원래부터 사람은 놀기 위해서 태어났고 놀이 속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시도, 그리도, 조각도, 심지어는 전쟁도 모두 놀이에서 출발하였다고 정의한다. 우리는 왜 옛날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을까? 또 최근에는 WLB(Work-Life Balance)라고 하여 일과 생활의 균형이라는 교육 프로그램도 있다. 어쩌면 인구가 증가하고 문명의 발달하여 인간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오히려 잃은 것이 더 많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사는 현재를 호이징 하가 다시 와서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일이 주된 시대, 경쟁과 실적이 난무하는 시대에 아직도 놀이적 인간이 설 자리가 있어질까?


나. 논다는 의미

그래도 아직 한국에서는 논다는 의미의 말이 제법 많은 것 같다. “놀고 있네”, “어쭈 좀 노는데”, “좀 제대로 놀아봐”, “젊어서 놀자, 늙어서는 못 노다니” 노래로부터 시작하여 일상적인 말까지 아직도 다양하게에 쓰이고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은 바로 “신명나게 놀자” 영화 왕의 남자에서도 잔치판에서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하는 말이 바로 신명나게 라는 말이었다. 놀이에 대하여 우리 민족이 가진 애착도 눈이 부시게 멋지다. 고등학교 때 들었던 논다는 말은 공부를 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한다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왜 이렇게 ‘논다’ 라는 말이 점점 사회에서 부정적인 말로 인식이 되고 있을까?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더욱 더 사람들을 일에 대한 노예로 만들고 분배의 악화로 인한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져서 인가? 가끔 시골에서 자랄 때 이금쯤이면 타작하는 발동기 소리에 막걸리 한잔씩 걸치고 노래를 부르며 놀던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과연 지금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다. K-1의 화려함

호이징 하의 스포츠에 대한 분석도 참 흥미로웠다.


놀이 집단이, 경기가 이제 더 이상 놀이가 아닌 사람들을 분리시켜서 그들에게 경기능력으로는 우월하지만 그 지위로는 진정한 놀이꾼보다 낮은 등급을 매기는 것이다. 프로페셔널의 정신은 이제 진정한 놀이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과 내키는 대로 하는 태평스러움을 상실하고 있다. (294p)

호이징 하가 지금의 K-1 경기를 보면 어떠할까? 고대 투사들의 종합격투기 같은 종류, 잔인학 대리 폭력이 난무하는 장면을 안방에서 편안히 앉아서 볼 수 있는 시대이다. 그래도 K-1은 오직 강자만 존재할 뿐, 인종차별이나 국가, 민족에 대한 경쟁요인은 덜하다. 오히려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보여주는 민족성과 국가에 대한 우월주의는 극에 다르다. 근래 들어 축구, 야구, 골프 등 스포츠가 보여주는 탈 국적화와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커다란 변신을 하고 있다. 우리가 제대로 놀고는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것도 우리 문명이 만들어 가는 새로움을 찾는 하나의 유형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가슴을 치는 구절

<머리말>
(7) 인간이나 동물에게 다 같이 적용할 수 있으면서도, 생각하는 것이나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제 3의 기능이 있으니, 이것이 “놀이하는 것” 이다. “만드는 인간”과 이웃하는 그러나 “생각하는 인간”과는 같은 차원에 속하는 술어로서 취급해야 할 것이 “놀이하는 인간”이라고 생각된다.

(8) 그 이유는 나의 목적이 모든 문화현상들 중에서 놀이의 위치를 정의하교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얼마나 놀이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를 이야기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1. 문화현상으로서의 몰이의 본질과 의미>

(9) 놀이는 하나의 의미기능이다. 즉 놀이에는 뜻이 있다는 말이다. 놀이 속에는 생활의 직접적인 욕구를 초월하고 동시에 생활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놀고 있는” 어떤 것이 있다.

(13) 그러나 놀이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정신”을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놀이도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15) 인생을 무대에 비유하는 유행을 좀더 면밀히 검토하면 그것은 그 당시 유행하던 도덕중심의 신 플라톤주의의 메아리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만사가 허무하다는, 고대 이래의 주제의 한 변형이었을 뿐이다. 놀이와 문화가 실제로 함께 엮어져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인식되지도 않았고 표현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관점은 지정한 의미의 순수한 놀이가 문명의 주된 기초중의 하나라는 것을 보이고자 할 뿐이다.

(18) 이것이 더욱 발전된 형태에는 인간에게 알려진 미적 지각의 가장 고귀한 선물인 운율과 조화가 충만하여 있다. 놀이와 아름다움의 연관관계는 많고 또 밀접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아름다움이 놀이의 고유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19)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이 놀이는 자연의 진행과정과 구분된다.

(21) 놀이는 장소와 지속성에 의해 “일상적인” 삶과는 구분된다. 이것이 놀이의 적극적인 제 3 특성이다. 그것은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이다.

(27) 놀이라는 형식의 특성을 간략하게 종합해보면 그것은 어떤 자유로운 행위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행위는 진심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일상 생활 밖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이하는 사람을 강렬하게 그리고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다. 이 자유로운 행위는 어떤 물질적인 이해관계도 없고, 어떠한 이익도 얻을 수 없으며, 또한 그 행위는 질서정연한 어떤 고유의 고정된 법칙에 따라 고유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이루어진다.

(38) 놀이 분위기는 그것의 기본 성질상 “가변적이다.” 놀이를 방해하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혹은 법칙을 어김으로써 그리고 내부로부터 놀이의 정신이 무너져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냉정함을 되찾게 되면 “일상생활”은 언제라도 다시 권리를 주장할지 모른다.

(39) 축제와 놀이의 관계는 그 근본 성질상 매우 가깝다. 둘 다 일상생활의 정지를 요구한다. 두 다 유쾌함과 즐거움이절대적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축제도 마찬가지로 진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축제도 마찬가지로 진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 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둘 다 엄한 법칙과 진정한 자유를 융합시킨다.

(43)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간단한 질문인 것 같지만, 놀이란 참으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를 종교적인 개념의 성질과 근원에 대한 문제에까지 깊게 이끌어간다.

(45) 오늘날 문화인들이 볼 때에도 가면은 아직까지 무엇인가 위압적인 힘을 니니고 있다. 거기에 어떤 종교적인 감동이 길 들여져서 그런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가면을 쓴 모습을 본다는 순수한 미적체험만으로도 우리는 “일상생활”을 넘어서, 일광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이 지배하는 세계로 이끌려간다. 우리는 미개인과 어린이와 그리고 시인의 세계, 즉 놀이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2. 놀이 개념의 언어에서의 표현>

(48) 모든 민족들이 놀이를 하며, 또 한 그 노는 모습은 놀랄 만큼 비슷하다. 그러나 그들의 제각기의 언어들은 놀이 개념에서 크게 다르며, 또한 놀이를 근대 유럽의 언어들만큼 명확하고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49) 갖가지 징후를 볼 때, 어떤 문화에서 일반적인 놀이 개념의 추상화가 더디고 부차적이면 그만큼 놀이 기능 자체도 기초적이며 원초적이라는 사실은 납득이 간다. 그 점에서 내게 지극히 의미심장해 보이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떠한 신화들 중에서도, 놀이를 신의 모습이나 악마의 모습으로 구체화시킨 신화는 없었으며, 그 반면 신들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흔히 있다는 사실이다.

(66) 이러한 모든 개념들, 즉 도전, 위험, 경기 등의 놀이 영역에 밀접해 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놀이(play)와 위험, 모험, 우연, 묘기 - 이것들은 모두 성패가 걸려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행동영역에 속한다. 이제 play와 pflegen은 그 파생어와 함께 형식뿐만 아니라 그 의미에서도 동일하다는 결론을 맺고 싶다.

(70) 더욱이 “놀다”라는 용어가 노래한다는 뜻으로 결코 사용되지 않으며 또한 단지 특정 언어들 속에서만 “연주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놀이와 연주기술 사이의 연관관계는 악기를 다루는 날렵하고 질서 정연한 손가락의 움직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71) 성 행위 자체를 사랑놀이로서 놀이 영역에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이다. 교합이라는 생물학적 과정은 우리가 상징한 놀이의 형식적 성격에 상응하지 않는다.

(74) “진지함”의 의미는 “놀이”의 부정에 의해 정의되고 “진지하지 않음” 이라는 말로는 결코 정의될 수 없으며 그 뜻을 다할 수도 없다. 놀이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이다. 놀이 개념 그 자체는 진지함보다 한층 더 높은 질서에 속한다. 왜냐하면 진지함은 놀이를 전혀 허용하지 않지만, 반면 놀이는 진지함을 자주 적절히 포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문화를 창조하는 기능으로서의 놀이와 경기>


(75) 놀이와 문화라는 복합체에서는 놀이가 일차적이다. 놀이가 객관적으로 알아 볼 수 있고,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사실인데 반하여, 문화는 우리의 역사적 판단이 특정한 사례에 붙이는 명칭일 뿐이다.

(77) 긴장과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은 여러 집단들 사이의 놀이에서 대립적 요소가 실제로 경쟁이 될 때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이겨야 한다는 열정은 놀이 특유의 가벼운 기분을 말살해 버린다.

(78) 놀이가 객인이나 집단의 생활의 강도를 높일수록 더욱 손쉽게 그 놀이는 문명 그 자체의 구성요서가 되는 것이다. 문명이 놀이로서 또 놀이 속에서 성장하면서 취하는 두개의 영원한 반복적인 형태는 신성한 행사와 축제적 경기이다.

(80) 성공은 놀이하는 사람에게 만족감을 가져다주며, 그러한 만족감은 꼭 관중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관중들이 있으면 더욱 고조된다. 모든 경기에서 중요한 것은 선수가 자신의 성공을 다른 사람에게 뽐낼 수 있어야 하다는 사실이다.

(81) 경쟁 “본능”은 우선 권력욕이라든가 지배 의지가 아니며, 제 1차적인 것은 다른 사람을 능가하여 첫째가 되고 그 덕분으로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결국 개인이나 집단의 힘이 확대되는가, 안되는가? 의 문제는 제 2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일은 “이겼다.”라는 점이다. 승리에 관한한, 볼 수도 없고, 즐길 것도 없이 단지 이겼다는 사실만을 남기는 가장 순수한 승리의 예는 체스놀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83) 경쟁은 어떤 것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것 “에서” 그리고 어떤 것“으로써”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힘이나 재치, 지식이나 재산, 화려함, 자유, 고상함, 그리고 자녀의 수“에서” 제1인자가 되기 위해 경쟁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체력 혹은 무기를 가지고 혹은 그들의 이성이나 주먹을 가지고 싸우며, 엄청난 과시와 호언장담과 욕설과 마지막으로 책략과 사기“로써” 서로 겨룬다.

(88) 그나레는 “남자들의 결사와 형제애에 활기를 주고 겨울 축제동안에 춤과 노래의 시합에서 결사간의 대립을 격화시킨 경쟁심은 국가의 형태와 제도로 이르는 발전선상에서 출발점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98) 포틀래치라는 용어를 딱딱하고 형식적인 말로 만들지 말고, 포틀래치 그 자체를 인간의 어떤 기본적인 욕구를 나타내는 고도로 발전된 명확한 형태로 여기는 것이 더 옳고 문제를 단순화할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나는 그것을 명예와 영광을 얻기 위한 놀이라고 부르겠지만, 포틀래치와 같은 전문적인 용어는 일단 과학적인 용어로 받아들여지고 나면, 마침내 모든 것이 다 정리되고 논의가 끝난 것처럼 치부되어 하나의 딱지로 급속히 전락하고 만다.

(119) 문화란 놀이로서 시작되는 것도, 놀이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아니며, 다만 놀이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문화의 대립적이고 투기적인 기반은 처음부터 놀이 안에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놀이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20) 그 문화는 놀이에 단지 부차적인 역할만을 부여한다. 영웅적인 시대는 끝났고, 이제 투기의 단계 역시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4. 놀이와 법률>

(125) 여기서 우리는 신탁과 신의 심판과 시련과 운수와 그리고 또한 놀이에 인한 결정이라는 관념이 법적인 판결에 의한 결정이라는 관념과 더불어 단 하나의 복합적인 사고 속에 용해되어 있는 한 세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재판은 그 재판이라는 놀이의 규칙에 따르도록 만들어졌다.

(126) 더욱이 주목할 만한 것은 달란트는 원래 “저울”을 의미하였다는 사실이다.

(138)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이 법률적인 진술과 욕 싸움이 거의 구분되자 않던 단계를 완전히 벗어날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139) 스토아 철학파가 득세함에 따라 비로소 법정의 웅변에서 놀이 특질을 떼어 버리고 스토아 철학파가 주장했던 진리와 위엄이라는 엄격한 기준에 의해 소송을 정화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신념을 실제로 실현시키고자 했던 최초의 인물인 기원전 2세기경의 로마 장군 루틸리우수루푸스는 자신의 소송에서 패배하여 어쩔 수 없이 유배 생활로 물러나야 했다.

<5. 놀이와 전쟁>

(141) 우리가 전쟁을 문화적 기능으로서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전쟁의 양편이 서로를 똑같은 권리를 가진 동등자 혹은 경쟁자로 여기는 범위 안에서 그 전쟁이 수행될 때뿐이다. 다시 말하면 전쟁의 문화적 기능은 그것의 놀이적 성격에 의존하는 것이다.

(142) 고대로부터 현대까지의 대침략 전쟁들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설명은 경제적인 힘과 정치역학이라는 합리적 주지적 이론보다는 누구나 다 납득할 수 있는 명예라는 관념에서 찾을 서 있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대의 폭발적 전쟁 예찬은 전쟁을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 다른 민족을 섬멸시키라는 신의 명령으로 파악했던 바빌로니아 사람과 앗시리아 사람의 전쟁관을 상기시켜 준다.

(160) 간단히 말해서 모든 위대한 민족은 그들 언어의 진실성, 사상의 힘을 전쟁에서 배웠다. 그들은 전쟁에서 자양을 얻었으며, 평화로 인해 파멸했다. 전쟁으로 인해 단련되었고 평화로 인해 배반당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전쟁에서 태어났고, 평화 속에서 죽었다.

<6. 놀이와 지식>

(163) 모든 분야에서 투기적 관습으로 특징지어지는 놀라운 유사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바로 인간정신의 영역, 즉 지식과 지혜의 분야이다. 고대인에게는 행동과 용기가 바로 힘이었다. 그러나 지식(안다는 것)은 마술적 힘이었다.

(171) 수수께끼는 원초적으로 성스러운 게임이었다고 결론 지울 수 있다. 따라서 수수께끼는 놀이와 진지함 사이의 어떤 가능한 경계선이라도 무너뜨리고 만다.

(173) 상대편을 “잡도록” 계산된 질문을 딜레마라고 부른다.

(173) 사물의 기원에 관한 성스러운 수수께끼 시합은 서서히 변해서 명예, 소유물, 심지어는 귀중한 생명까지 걸고 하는 함정이 있는 질문 시합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논쟁으로 발전했다.

(180) 이러한 모든 예에서 보이듯 고대 철학에는 모두 우주의 경쟁적 구조에 대한 강한 인식이 스며있다. 삶과 우주의 모든 현상이 중국의 음양과 같이 존재의 기본원리인 영원한 대립적 투쟁으로 인식되고 있다.

<7. 놀이와 시>

(183) ‘시를 짓는 것’은 사실상 놀이 기능이다. 그것은 정신의 놀이터 즉 정신이 그것을 위해 창조해 주는 그 독자의 세계 속에서 진행된다. 이 속에서 사물은 “일상생활”에서 갖는 외관과는 매우 다른 외관을 갖는다. 또 논리와 인과라는 유대와는 다른 유대로 상호 연관된다.

(187) 그 원초적 문화 창조 능력에서 볼 때, 시는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탄생한다. 그 놀이는 분명히 성스러운 놀이지만 그러나 항상 그 신성함에도 불구하고 쾌활한 탐닉, 환락, 흥겨움과 접해있다. 거기에는 아직 미적 충동의 충족이라는 문제는 나타나 있지 않다.

(194) 순수한 미적 욕구의 만족과는 멀리 떨어진 시라는 형식이 공동 사회의 생활을 위해 필수적이고 중요한 것들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상태는 오늘날의 진보된 문화속애서도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197) 모든 시는 놀이에서 태어난다. 신앙에 기초한 성스러운 놀이, 구애라는 축제적 놀이, 경기라는 투기적 놀이, 자랑, 조롱, 욕설에 기초한 논쟁적 놀이, 임기응변과 재치의 날랜 놀이……. 이런 놀이들이 시가 태어나는 모태이다. 그러나 문명이 보다 복잡해질 때 시의 놀이적 특질은 어느 정도나 보존되는가?


(202) 오랜 옛날의 전설에서든 또 현대 소설이든, 저자의 목적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독자를 “매혹시키고” 흘리게 할 긴장을 창조하는데 있다. 모든 창조적 글의 밑바닥에는 이 긴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인간적 또는 정서적 상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이 바로 문제이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그런 상황은 투쟁과 사랑 혹은 이 둘을 겸한 것으로부터 생겨난다.

<8. 신화적 시의 요소>

(218) 내가 보기에는, 끝없는 과장이나 부조리한 것으로 놀라게 하려는 욕구는 그것이 어떤 신앙 체계에 속하는 신화이건 순수한 문학작품이건 간에 또는 아이들의 환상 속에서 발견되든 되지 않든 간에 똑같이, 결코 완전히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우리는 언제나 고대인이 창조한 신화 속에 나타나는 그들의 믿음을 우리 자신의 과학, 철학 또는 종교적의 기준에 의하여 판단하고 있다. 믿는 척하는 믿음과 거의 비슷한 반 농담적인 요소를 진정한 신화로부터 분리시킬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이 말한 “시의 마술적인 부분” 과 맞닥뜨리게 된다.

(221) 희곡이 기원한 정신적 영역에는 놀이와 진지함 사이의 구분이 없다. 에스킬루스의 경우 가장 엄숙한 진지함의 체험이 놀이의 형태를 통해 성취되고 있다. 유리피네스의 경우에는 심오한 진지함과 경박스러움 사이에서 그 격조가 동요하고 있다. 플라톤의 향연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진실한 시인이란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희극적이어야 하며, 인간의 삶 전체는 비극과 희극이 혼합된 것으로 느껴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9. 철학에서의 놀이형식>

(222) 고대 사회에서 사회적 놀이의 두 중요한 요소가 그에게 존재한다. 즉 명예를 과시하려는 태도와 투기의 욕구이다. 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소피스타라는 것 자체가 등장하기 전에 에스킬루스가 프로메테우스와 팔라메데스 등 예로부터 현명한 영웅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소피스트”라는 말로 지칭했다는 것이다.

(223) 간단히 말해 소피스트라는 직업은 스포츠와 맞먹는 직업이었다. 구경꾼들은 그의 재주에 갈채와 웃음을 보냈다. 그의 행위는 상대방을 논쟁의 올가미 속에 잡아넣거나 상대에게 넉아웃 펀지를 먹이는 순수한 놀이였다. 어떤 대답도 올바른 대답이 될 수 없다는 비꼬인 질문을 던지는 일이 그야말로 명예가 달린 문제였던 것이다.

(225) “학교(school)”라는 말은 그 배후에 기묘한 역사가 있다. 원래 “여가”라는 의미를 가졌던 이 말이, 문명이 젊은이들의 자유 시간을 점점 제한하고 또 점점 많은 수의 젊은이들을 유년기 이후에는 엄격한 생활로 몰라 넣음에 따라 현재에 와서는 체계적 작업과 훈련이라는 정반대의 뜻을 지니게 되었다.

(229) 이와 같이 철학과 과학의 불멸의 토대를 이룩한 바로 그 사상가들이 그들의 노력을 젊은 시절의 기분전환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소피스트들의 기본적 오류, 그들의 노력을 젊은 시절의 기분 전환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소피스트들의 기본적 오류, 그들의 논리적 윤리적 결점을 후세에 정립하기 위한 작업에서조차도 플라톤은 그들의 산만하고 손쉬운 대화라는 방법을 차용하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231) 소피스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모순논법 즉 이중적 추로이다. 모순 논법이라는 형식은 궤변의 측면을 자유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형식을 통해 소피스트들은 인간정신이 내리는 모든 판단의 영원한 모호성을 암시할 수 있다.

<10. 예술에서의 놀이형식>

(240) 음악을 느끼는 가운데 우리는 제의를 느낀다. 음악이 종교적 개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음악을 즐기는 가운데서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과 성스러움에 대한 감각이 하나로 합치며 이 합치 속에 놀이와 진지함의 구분이 삼켜져 버린다.

(246) 모든 음악적 행위의 기본적 본질이 놀이라고 하는 이 중요한 사실이 비록 항상 분명하게 천명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사실은 도처에서 은연중에 이해되고 있다. 보다 원시적인 문화에서는 음악의 다양한 속성을 다소 거칠고 순진하게 구분하였고 정의하였다.

(249) 놀이와 춤의 관계는 너무 밀접에서 거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춤이 그 자체 안에 어떤 놀이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놀이를 이루는 데에 절대 필요한 하나의 구성요소가 춤이라는 말이다. 둘 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인 참여의 관계이며,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춤은 특수한 형식의 놀이이며, 특별히 완벽한 형식의 놀이인 것이다.

(252) 이와 같이 조형 예술의 과정은 완전히 놀이의 영역 밖에서 진행되며 그 작품의 전시는 어떤 의식, 축제, 오락, 또는 사회적 사건 속에 단지 부차적으로만 채용될 뿐이다. 상의 제막, 초석을 놓는 일, 전시회 등은 그 자체로서는 창조적 과정의 본질적 일부가 아니며, 또 대개 최근에 생겨난 현상들이다. “음악” 예술은 같이 즐기는 분이기 속에서 존속하고 융성하지만 조형예술은 그렇지 않다.

(258) 이와 같이 신화와 전설에는 끊임없이 기술의 경쟁이 소재로 등장하거니와 실제로 이런 경쟁은 예술과 기술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신화에 나오는 폴리테크노스와 아에돈의 기술의 경쟁과 같은 경쟁이 현실 세계에도 있었다.

(259) 세계 어디서나 진행된 오랜 옛날부터의 경쟁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오늘날 남아 있는 여러 형태의 작품들이 오로지 효용과 능률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려 할지 모른다. 시청을 짓기 위한 설계도를 현상 모집하거나 예술 학교의 가장 우수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줄 때 그 목적은 오로지 발명심을 자극하고 재능을 찾아내서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들 실용적 목적의 배후에는 항상 시합의 원초적 놀이 기능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11. 놀이의 아종으로서의 서구문명>

(261) 놀이의 경쟁적 정신은 문화 그 자체보다도 더 오래된 사회적 충동이며 마치 효소처럼 모든 생활에 스며들어 있다. 의식은 봉헌 놀이에서 자라났으며, 시 역시 놀이 속에서 탄생해서 놀이에서 자양을 얻으며 자랐다. 음악과 춤은 순수한 놀이였다. 지혜와 철학은 종교적 시합에서 유래된 언어와 형식에서 그 표현을 찾았다. 전쟁의 규칙, 귀족 생활의 관습은 놀이 패턴위에 구축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문명은 애초에는 “놀이되어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문명은 아기가 자궁에서 떨어져 나오듯이 놀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 생기며 놀이를 떠나는 법이 없었다.

(264) 국가는 결코 순수하고 단순한 공리적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창문에 핀 성에꽃처럼 시대의 표면에서 응결되며 또 성에꽃처럼 예측할 수 없고 덧없으며 갖가지 모양을 변하는 것이다.

(276) 가발 하나만으로도 의상사 뿐 아니라, 문명사의 한 장을 구성할 수 있다. 문화적 충동의 놀이적 특성을 17세기와 18세기에 사용되던 가발보다 더 적절하게 예시해 주는 물건은 아마 없을 것이다.

(283) 고대인들은 음악이 감정을 유발시킬 수 있는 성스러운 힘이라는 사실, 따라서 음악이 게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훨씬 후에야 음악은 삶의 의미 있는 추가물, 삶의 표현으로서,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쓰는 의미의 예술로서 인식되게 되었다.

(28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보기에는 18세기의 감상주의 속에는 확실히 놀이적 요소가 들어 있음을 단 한순가도 부정할 수 없다. 감상적으로 생각하고 감상적으로 살고 싶다는 욕구는 반드시 충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없다.

(287) 문화는 “놀아지는” 것이 정지되었다. 겉으로 드러난 사회의 형태도 이제 보다 고귀하고 이상적인 삶의 양식이라는 외형, 즉 픽션을 제공하려고 하지 않았다. 놀이요소 쇠퇴의 가장 뚜렷한 징후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 이후 남성들의 복장에서 상상적 환상적 요소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289) 한 때 신사의 복장에 뺄 수 없는 품목이었던 연미복은 재킷에 완전히 밀려나 웨이터들의 복장이 됨으로써 수백 년에 걸쳤던 화려한 생애를 끝 마쳤다.

(290) 18세기에 접어들 무렵이 되어서야 여성들의 패선은 진정으로 “놀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로코코 시대에는 높이 묶는 머리형이 싹텄고, 낭만주의의 정신이 화장복에 가까운 옷, 괴로워하는 표정, 매끈한 머리타래, 드러난 양팔, 발목 위까지 드러낸 복장에서 숨쉬었다.

<12> 현대 문명에서의 놀이 요소

(291)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지고자 하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은 어느 정도까지 놀이형식을 유지하고 있는가? 놀아 정신이 그 문명을 함께 누리는 사람들의 생활을 어느 정도나 지배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미 관찰한 바와 같이 19세기에는 그 이전 시대의 특성이었던 놀이 요소의 상당부분을 상실한 바 있다. 이러한 요소의 상실은 메워졌는가? 아니면 커졌는가?

(294) 프로페셔널의 정신은 이제 진정한 놀이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과 내키는 대로 하는 태평스러움을 상실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아마추어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아무추어들은 열등 콤플렉스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295) 이 견해는 오늘날의 대중들의 감정과는 상치될지 모른다. 스포츠가 우리 문명 속에 들어있는 최고의 놀이 요소라고 흔히들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스포츠가 지나친 지성으로 기울어졌음을 강조하면서도 또한 우리가 지적하게 되는 사실은, 그러한 진지함에 대한 지나친 경사가 체스나 카드 게임 같은 계산이 전부인 비 체육적인 게임들까지도 오염시켰다는 점이다.

(298) 교역 통계, 생산 통계는 경제생활에 스포츠 적 요소를 도입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이제 기술이나 상업의 승리에는 거의 어디에나 스포츠 적 일면이 나타나게 되었다. 가 장 많은 생산, 가장 톤수가 많은 배, 가장 빠른 횡단, 가장 높은 고도, 등을 따지는 것이 바로 그런 예이다. 순수한 놀이적 요소가 실용적 고려를 압도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과정이 더욱 진전되면 일부 대기업에서는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놀이 정신을 주입하기 까지 한다.

(307) 우리는 점차 문화속의 놀이요소가 한창 만개하였던 18세기 이래로 계속 쇠퇴해 왔다는 슬픈 결론에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된다. 오늘날의 문명은 이미 놀이를 잃었다. 놀이가 아직 남아있는 듯한 부분에서도 그것은 거짓된 놀음뿐이다. 내가 대충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문명은 거짓되게 놀기 때문에 어디서 놀이가 끝나고 어디서 놀이가 아닌 것이 시작되는지를 말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312) 여기서 놀이와 진지함의 파악하기 어려운 대조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서서히 문명이 고상한 놀이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 또 문명은 그것이 완전한 위엄과 양식을 간직한 채 전개되려면 결코 놀이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놀이 규칙 준수는 국가들 간의 관계에서 가장 필수적이다.

(313) 따라서 꾸불꾸불한 우회 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즉 진정한 문명은 어떤 놀이 요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명은 자제와 극기를 전제로 하며, 또한 그 자신의 경향을 궁극적 최고 목표와 혼동하지 않는 능력, 그리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어떤 일정한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314) “인간사는 굉장한 진지함을 필요로 할 만한 가치가 없지만, 그래도 진지할 필요는 있다. 행복은 또 다른 문제이다. 나는 인간은 진지한 것에 대해서는 진지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까지 진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신만이 최고의 진지함을 가지고 대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인간의 가장 좋은 부분이다.

(316) 우리의 행동이 지적인 판단을 초월하는 데에는 한 방울의 동정이면 족하다. 우리의 행동이 정의와 고상한 자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인식인 양심은 항상 끝까지 우리를 미망시키는 의문, 그 행동이 놀이적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압도하여 영원히 침묵시킬 것이다.


4. 내가 작가라면

놀이적 인간이라는 신조어를 보면서 책도 놀이와 비슷한 형식의 재밌는 책이라고는 선입관을 가졌다. 책 표지에 나와 있는 그림 또한 어떻게 놀이가 생겼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첫 장을 읽지 마자 기대와는 달리 굉장히 읽기가 힘들었다. 머리말과 1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2장의 놀이 개념의 언어에서의 표현 부분은 정말 어려웠다. 작가소개에서 본 호이징 하가 비교언어학을 전공하였고 그 방면에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조금 이해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책에 대한 구성은 역사적인 계보대로 놀이에 대한 개념을 책의 앞부분에 구성했으면 좋았으리라 생각했다. 2장 언어에서의 표현, 3장 놀이와 경기, 4장 놀이와 법률, 5장 놀이와 전쟁 등 각 개별 부분은 처음부터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눈에 조금씩 들어온 것은 9장의 철학과 10장의 예술에서의 놀이형식이었다. 11장의 놀이의 아종으로서 서구문명도 어느 정도 이해가 쉬웠다. 11장처럼 서구문명의 변화나 고대, 중세, 근대 등 역사연표별로 구분할 수 있는 시대별로 놀이에 대한 부분을 정리해준 다음에 각 분야별로 놀이에 대한 이론을 설명했으면 더 이해가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두렵게 까지 느껴진다. 비교언어, 문화, 미술, 법률, 신화 등 한장 한장 모두 인류의 역사를 알수 있는 많은 분량이다.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에 숙연해진다.

마지막으로 놀이에 대한 방대한 분량의 지식을 아낌없이 전해주려는 늙은 문화역사학자의 깊은 뜻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조국인 독일이 전쟁을 하고 지식인을 탄압하는 상황을 보고 평생 동안 쌓아온 지식을 책으로 풀어낸 노학자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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