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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2일 14시 49분 등록
호모 루덴스
놀이와 문화에 관한 한 연구
J. 호이징하 / 김윤수 번역/ 도서출판 까치/1981년 5월


1. 저자에 대하여
J. 호이징하

1872년 12월 17일 네덜란드 부쪽 대학 도시인 그로닝켄의 평범한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대학의 생리학 교수였다.
그로닝겐 대학에 입학한 호이징하는 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측히 동영의 언어인 히브리어, 아리비어아, 산스트리스 연구에 심취하였고 점차 비교 언어학으로 기울어졌다.
1897년 학위를 받은 후 하아렘 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를 가르쳤다.
그뒤 그로닝겐 대학에서 고대 인도 문화사와 종교사 연구로 교수 자격을 획득한다. 그리고 역사학으로 기울어져 서구 중세사를 연구한다.
1905년 은사이며 역사학자읜 브룩(P.J.Block)의 도움으로 그로닝겐의 대학의 역사교수가 되었다.
1915년 라이든 대학의 일반 역사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40년 독일군의 점령으로 대학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서 강의하였다. 그는 독일 치하에서 독일을 비판함으로써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42년 석방되어 가족의 면회도 금지쵠체 겔데른의 작은 시골집에서 살다가 1945년 2월 1일 72세로 사망하였다.

라이든 대학에서 1919년 [중세의 가을]을 발표하여 유럽 인문 과학자 중에서 발군의 존재가 되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브르크하르트를 잇는 문화사가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호이징하는 중세를 그가 현대에서 꿈꾸고, 자신의 이론과 저술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유럽 공동사회가 실현되었던 시대로 생각했다.

호이징하는 인류의 문화 발전을 하나의 보편적인 개념으로 분석, 설명하여, 도식화하고 유형화하려는 시도를 거부하고 한 시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하였다. 이런 역사학 방법을 문화라고 하는 데 호이징하는 그 자신은 물론 부르크하르트를 문화사가의 범주에 넣었다.

주요 저서
1919 - [중세의 가을.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14세기와 15세기의 생활 양식과 정신 형태에 관한 연구]
1924 - [에라스무스]
1933 - [17세기 네덜란드의 문화. 사회적 토대와 국가적 특성]
1935 - [내일의 그늘에서. 우리 시대의 문화적 고민애 대한 진단]
1938 - [호모 루덴스. 문화의 놀이 요소의 규정에 관한 시도]
1945 - [더렵혀진 세계. 우리 문화의 치유 가망에 대한 고찰]

2. 책에 밑은 그은 부분들 (인용)

[10] 독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말 하나하나에 대해 상세한 증거 문헌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문화의 일반적인 문제를 다룰 때에는, 공격자 자신이 충분히 탐사해보지 않은 부분이라도 항상 과감하게 공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미리 내 지식의 미흡한 점을 보충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지금 쓰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쓰질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쓰기로 결정하였다.

1장. 문화현성으로서의 놀이의 본질과 의미

[13] 놀이에 이렇게 열광하거나 몰두하는 것, 즉 미치게 만드는 힘 속에 놀이의 본질, 원초적인 성질이 깃들어 있다.

[13] 놀이의 마지막 요소로 든 ‘재미’라는 요소는 어떠한 분석이나 논리적인 해석도 거부한다.

[14] 놀이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정신’을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놀이도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15] 말과 글을 사용함으로써 정신은 물질과 마음 사이에서 계속 "방전(sparking)"을 일으키는데, 말하자면 이것은 정신이 그 훌륭한 명명 능력과 더불어 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여러 추상적인 표현의 뒷면에는 항상 가장 대담한 은유들이 있게 마련인데, 은유는 모두 낱말에 기초한 놀이다. 결국 인간은 삶을 표현함으로써 자연 세계 바깥에 시적詩的인 제2의 세계를 창조한다.

[18] 놀이는 지혜와 어리석음과의 대립을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참과 거짓, 선과 악과의 대립을 벗어나 있다. 놀이는 비물리적인 행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적적인 기능도 아니다. 따라서 덕이냐 악이냐 하는 식의 평가는 여기에 적용될 수가 없다.

[19]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19] 아이와 동물은 놀이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논다. 그리고 거기에 바로 그들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19] 놀이에 대한 욕구는 놀이로 인한 즐거움이 놀이를 욕구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20] * 놀이의 특징
1. 자유 2. 일상에서 벗어남 3. 장소의 격리성, 시간의 한계성

[21] 놀이는 시작되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 “끝나게” 된다. 놀이는 저절로 진행되고 저절로 끝난다.

[23] 놀이 행위가 선악의 영역 밖이긴 하지만, 긴자의 요소는 그 놀이 행위에 대해 윤리적 s용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긴장 소게서 놀이하는 사람의 능력이 시험되기 때문이다. 즉 놀이하는 사람에게는 꼭 이겨야겠다는 욕망에도 불구하고 경기의 법칙만은 따라야 하기 때문에 용기, 끈기, 역량과 함께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인 ‘공정성’위 정신이 욕구된다.

[23] 놀의 규칙이 위반되면 그 순간 놀의 세계는 무너진다. 그리고 놀이는 다 망쳐지게 된다.

[24] 놀이의 공동체는 놀이가 끝난 뒤에도 지속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25] 놀이가 가진 ‘특이성’과 그 비밀은 ‘가장假葬을 한다’는 점에서 생생하게 나타난다. 바로 여기에서 놀이의 ‘탈일상성脫日常性’이 완성된다.

[35] 놀이하는 사람은 그의 심신을 다 바쳐 그 놀이에 삐질 수 있고, 그것이 ‘단지’ 놀이라는 생각도 뒤편으로 물리칠 수 있다. 놀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즐거움은 긴장으로 변할 뿐 아니라 정신의 고양으로 변한다. 놀이는 자유분방함과 무아경의 두 근간 사이에서 움직이다.

[35] 놀이의 분위기는 그것의 기본 성질상 ‘가변적’이다.


2장. 놀이의 개념에서의 표현

[43] 그 낱말에 표현되어 있는 개념을 분석하고 정의하려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개념은 그 개념에 사용되는 낱말에 의하여 정의되고 따라서 어쩌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54] 놀이는 동물이건 사람이건 어린 것들의 ‘도약’의 욕구에서 유래한다는 플라톤의 가정을 상기하게 된다.

[63] 한 말의 개념적 가치는 항상 그것의 반대를 나타내는 말에 의해 규정된다.
* ‘진지함이라는 말과 그 개념’이란 파트에서의 놀이의 반대어 ‘진지함’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된 문장

[65] 놀이는 적극적 가치이고 ‘진지함’은 소극적 가치이다. ‘진지함’의 의미는 ‘놀이’의 부정에 의해 정의되고 그 뜻을 다할 수 있다. 반면에 ‘놀이’의 의미는 ‘진지하지 않는 것’, ‘진지하지 않음’이라는 말로는 결코 정의될 수 없으며 그 듯을 다할 수도 없다. 놀이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이다. 왜냐하면 진지함은 놀이를 전혀 허용하지 않지만, 반면 놀이는 진지함을 아주 적절히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장. 문화를 창조하는 기능으로서의 놀이와 경기

[67] 놀이로서의 문화 - 놀이가 변하여 문화가 된 것은 아니다.

[69] 놀이가 개인이나 집단의 생활의 강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더욱 손쉽게 그 놀이는 문명 그 자체의 구성 요소가 되는 것이다.

[71] 어느 놀이나 경기-물론 금전상의 이득을 위해 싸우는 것을 제외하고-의 결과는, 참가자 또는 구경꾼으로서, 현장에서 몸소 보는 구경꾼이건 라디오의 청취자건 텔레비전의 시청자이나간에, 그 놀이 혹은 경기에 참가한 사람에게만, 그리고 그 경기의 규칙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흥미있는 것이다.

[71] 성공은 놀이자에게 행복감을 가져다 주며 그러한 만족감은 경우에 따라 짧게 혹은 오래 지속된다.

[71] 모든 경기에서 중요한 것은, 선수가 자신의 성공을 자른 사람에게 뽐낼 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72] 이긴다는 것은 놀이의 결과에서 한 사람의 우월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72] 전쟁 본능은 우선 권력욕이나 지배 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며, 제일차적은 것은 다른 사람을 능가하여 첫째가 되고 힘이 확대되는가, 안 되는가의 문제는 제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75] 속임수를 쓰는 놀이자는, 놀이 파괴자가 아니다. 그는 놀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적어도 놀이 규칙을 지키는 턱하며 놀이에 참여하여 그리고 끝내는 규칙 위반이 들통나는 것이다.

[83] 포틀랏치를 통해 그들은 흥청망청 아낌없이 선물을 줌으로써 뿐 아니라, 더욱 놀라운 것은 단지 재산이 없어도 살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 재산을 완전히 파괴해 버림으로써, 자신들의 우월성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재산 파괴 역시 극적인 한 제의를 통해 수행되며 거기에는 교만한 도전이 동반되는 것이다.

[88] 아이들이 생활에서부터 최고의 문화 활동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사회적 완성을 위한 가장 강한 충동 중의 하나가 자신의 우월성을 찬양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찬양하면서 서로 자기를 칭찬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덕으로 인하여 존경받기를 원한다.
* 놀이에서의 명예와 덕

[89] 덕이라는 남성적 이상은, 명예는 공적인 인정을 받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우격다짐으로라도 보존되어야 한다는 신념과 항상 결부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리스에게서조차도 명예는 “미덕에 대한 상”으로 불려지고 있다.

[92] 다른 사람에 대한 정중함을 나타내는 이유에는 그 자신의 명예에 대한 깊은 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98] “저에게 유고(Hugo) 왕의 나팔을 빌려주십시오. 그러면 그 도시 밖에 서서 그 나탈을 세게 불어젖혀 도시의 성문들을 모조리 날려 버리겠습니다. 만일 그 왕이 저를 공격한다면 왕을 뱅글뱅글 아주 빠르게 맴을 돌려 모피 망토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콧수염엔 불이 붙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4장. 놀이와 법

[107] 그것은 문자 그래도 네 개의 밧줄에 의해, 혹은 또 다른 견해에 따르면 네 개의 긴 의자에 의해서 분리된 공간이다. 그러나 원형이든 사각형이든 그것은 여전히 마법의 원이고, 계굽적 별의 관습이 일시적으로 페지되는 놀이터이다.
* 법정이나 사각의 링에 관한, 특정한 놀이 장소에 대하여

[109] 고대인의 정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옳음과 그름의 추상적 문제라기 보다는 이김과 짐의 구체적인 문제이다.

5장 놀이와 전쟁

[122] 질서를 지킨 투쟁은 놀이이다.

[128] 한 개인의 명예는 모든 사람에게 현시되어야 하며 만약 명예에 대한 인정이 위협받는다면 고적인 투기 행위에 의해 그 명예를 주장하고 옹호해야 한다.

[139] 그(러스킨)는 인간은 애초부터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진다고 보았다. 하나는 일꾼의 부류이고 또 하나는 놀이꾼들의 부류이다. 한쪽은 땅을 갈고 물건을 만들며 집을 짓는 등 여러 가지 생활의 필수품들을 조달한다. 또 다른 부류는 거만하고 게으른 자들로서 끊임없이 리크리에이션을 필요로 한다.

6장 놀이와 지식

[142] 첫째가 되려는 충동은 사회가 그 충동에 대해서 기회를 제공하는 만큼 많은 형태로 표현된다. 사람들이 우월성을 다투는 방식은 걸려 있는 상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결정은 우연, 신체적인 힘, 능숙함, 또는 유혈의 싸움에 의해 내려질 것이다. 또는 용기와 인내력, 기술, 지식, 자만과 재치를 다투는 경쟁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힘의 시험이 요구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고, 기술의 견본이 요구되는 수도 있을 것이다. 칼을 버려내야 하는 수도 있고 훌륭한 싯귀를 지어야 하는 수도 있다. 질문을 던져 해담을 교구하는 수도 있다. 경쟁은 또한 신탁, 내기, 재판, 맹세, 수수께끼의 형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모양을 취하든 상관없이 그 본질은 항상 놀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경재의 문화적 기능을 해석해야만 한다.

7장 놀이와 시

[159] 시는 진지함 너머에, 즉 어린이, 동물, 미개인, 예언자가 속하는 보다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수준, 꿈, 매혹, 엑스타시, 웃음의 영역에 존재한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법의 망토 같은 어린이의 영혼을 지닐 수 있어야 하며 어른의 지혜를 버리고 어린이의 지혜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161] 고대 시인의 진정한 명칭은 라틴어로는 바테스(예언시인), 곧 악마에게 홀린 사람, 신들린 사람, 헛소리하는 사람이다.

[168] 책이 없던 사회에서는 시 형식을 취해야만 그 본문을 알기가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고대 사회 자체가 사실상 그 구조에 있어 운율적, 시적이었다는 점이다.

[171] 신화 속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과 전혀 불가능한 것간의 경계선이 아직 분명히 그어져 있지 않다.

8장 신화적 시의 요소

[180] 형체도 생명도 없는 어떤 것을 한 인격체로서 묘사한다는 일은 모든 신화 형성의, 그리고 대부분 모든 시작의 정수이다.

[181] 최초의 존재 부루샤(즉, 사람)는 우주 창조의 질료로 생각되었다. “날짐승도, 들짐승도, 가축들도” 곧 모든 만물이 그의 몸으로부터 형성되었다. “그의 정신에서 달이, 그의 눈에서 태양이, 그이 입에서 인타라(우뢰)와 아그니(불)가, 그의 숨결에서 바람이, 그의 배꼽에서 허공이, 그의 머리에서 하늘이, 그이 발에서 땅이, 그리고 그의 귀에서 동서남북이 나왔다. 그리하여 그들(신들)이 세계를 꾸몄다.” 마지막으로 신들은 푸루샤를 제물로서 태웠다.
* 리그 베다 제10 찬가의 글귀 : 표현이 너무나 아름답다. 환상적이다.

[186] 신에게 동물의 형체를 부여하는 형상화 작용이 토테미즘의 전체적 구조의 바탕에 깔려 있다. 한 부족이 두 파로 갈라져 각기 자신을 캉가루 혹은 거북이라고 부를 뿐 아니라 실제로 캉가루이고 거북이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186] 「소노라 에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토른 신과 그의 동료는 매우 큰 침실에 달린 작은 곁방을 발견하고 거기서 밤을 지냈다. 그 다음날 보니 그들은 거인 스크리미르의 장감 엄지 손가락 속에서 잔 것이었다.

[192] “진실한 시인이란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희극적이어야 하며 인간의 삶 전체는 비극과 희극이 혼합된 것으로 느껴져야만 한다.”
- 플라톤의 향연 중에서

9장 철학에서의 놀이 형식

[197] “이러한 것들은 사물의 본성에 관해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미묘함과 애매모호함으로써 사람들을 골리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딴죽을 걸어 누군가를 넘어뜨리거나 그가 앉으려 하는 찰나에 의자를 치워버리는 행위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 궤변의 인위성에 대해서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를 경멸한 말, 플라톤의 [에우디테모스]의 한 구절

[197] 전체의 논술을 뒤집고 또 뒤집었으며 다 또 한번 뒤집었다. 논술은 마치 베틀의 북처럼 왔다갔다 하며 나는 가운데, 인식론은 한 고상한 게임 형태를 취했다. 장난을 치는 것은 소피스트들뿐만이 아니었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202] “당신은 뿔을 가지고 있다. 웬고하니 아직도 뿔을 잃어버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아직도 뿔을 가지고 있다.”
* 궤변

[204] 칼 대제의 아들 피핀이 묻자 알쿠인이 대답한다.
“글이란 무엇인가?” - “지식의 보관자.”
“말은 무엇인가?” - “생각의 배반자.”
“누가 말을 낳았는가?” - “혀가.”
“혀란 무엇인가?” - “공기의 채찍.”
“공기란 무엇인가?” - “생명의 보호자.”
“생명은 무엇인가?” - “행복한 자의 기쁨, 슬픈 자의 독毒, 죽음의 노예, 한 장소의 손님, 지나가는 나그네.”
* 글과 말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에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10장 예술에서의 놀이 형식

[211] 우리가 놀이 또는 리크리에이션을 위해 음악을 원한다는 것은, 우리가 잠이나 술 마시기를 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왜냐하면 잠이나 술 마시기 역시, 똑같이 그 자체로소는 중요한 것도 진지한 것도 아니지만 근심을 쫓을 만큼 힘차고 유쾌한 것이니까 밀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데서 음악의 효용을 찾는 것은 분명하다. 이 세 가지 -음악, 술마시기, 잠에 또 하나 추가되는 것이 춤이다. 아니면 음악이나 운동이나 마찬가지로 신체에 도움을 주고 어떤 품성을 기르며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올바르게 즐길 수 있게 하는 한에서는 음악은 덕에 공헌한다고 말해야 될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악이 정신의 휴식과 지식의 획득에 공헌한다고는 할 수 없을까?

[212] 여가는 그 자체 안에 삶의 모든 기쁨과 쾌락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행복 즉 가지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노력을 정지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사물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것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최상의 인간들이고 그들의 취미가 가상 고상할 때에 최상의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디아고게(휴식, 여가)를 보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교육시키고 또 어떤 일들을 배워야 한다.

[213]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이들이에게는 아직 디아고게 능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디아고게는 최종목적은, 하나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미완성의 존재가 완성에 접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음악을 즐기는 것은 그런 완성 해우이의 최종 목적에 근접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음악일ㄴ 미래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214] 모방자, 즉 창조적 예술가나 모사적 예술가들은 모두 자기가 모방하는 사물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른다. 모방은 그에게 단순한 놀이일 뿐 진지한 작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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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놀이의 아종으로서의 서구 문명

[227] 문명은 아기가 자궁에서 떨어져 나오듯 놀이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다. 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 생겨나며 놀이는 떠나는 법이 전혀 없다.

[232] 로마의 놀이 요소는 “빵과 관람놀이”라는 구로에서 가장 명백히 표현되어 있다.

[249] 지성의 이와 같은 착각의 결과로 경제적 힘과 물질적 관심이 세계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시즘의 어처구니없는 견해가 제기되고 신봉괴기에까지 이르렀다. 경제적 요인의 이와 같은 기이한 과대평가는 우리가 기술적 진보를 숭앙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고 기술적 진보에 대한 숭앙 그 자체는 합리주의와 공리주의가 신비를 살해하고 인간의 죄를 사한 후에 열린 열매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인간을 어리석음과 근시안에서 자유롭게 하지는 않았고 인간은 자신의 법용의 틀에 맞춰 세계를 주형할 줄 밖에는 모르는 것 같았다.
* ‘진지함이 지배하던 19세기’라는 파트에서 19세기를 묘사한 저자의 말

12장. 현대 문명에서의 놀이 요소

[253] 서로 다른 시간감각(time sense)은 어떤 사람이 속하게 된 세대에 좌우된다가 보다는 그 사람이 옛것과 새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에 좌우된다. 역사에 초점이 맞춰진 정신은 순간의 근시안 속에서 살고 있는 정신보다 ‘현대’ 혹은 ‘오늘날’이라는 개념 속에 훨씬 많은 부분의 과거를 포함하게 될 것이다.

[255] 스포츠는 놀이 영역으로부터 떠났다.

[256] 놀이 집단이, 경기가 어제 더 이상 놀이가 아닌 사람들을 분리시켜 경기 능력으로는 우월하지만, 그 지위로는 진정한 놀이꾼보다 낮은 등급을 매기는 것이다. 프로페쇼날의 정신은 이제 진정한 놀이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과 내키는 대로 하는 태평스러움을 상실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또한 아마추어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아무추어들은 열등 콤플렉스에 시달리기 시작하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스포츠를 점점 진정한 놀이 영역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만들어서 마침내 스포츠는 ‘독립적인’ 것이 되고 만다.

[258] 브릿지에 더 능숙하다는 우월함은 헛된 우월함이다. 그것은 지적 기능을 매우 편향적으로 날카롭게 할 뿐 영혼을 유용하게 하지는 않는다. 또 더 훌륭하게 사용될 수도 있을 상당한 양의 지적 에너지를 소비할 뿐이다. 그 에너지는 잘못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 브릿지가 이와 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겉모습으로 보자면 오늘날 놀이 요소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좋은 예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겉모습은 거짓이다. 진정으로 놀기 위해서는 인간은 어린애처럼 놀아야 한다. 브릿지와 같은 정교한 게임의 경우에도 그러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이 게임의 가치는 사라져 버린다.

[259] 사업적 경쟁은, 각자가 자기 이웃을 앞서고 속여 넘겨야 하는 활동 분야를 교역이 장조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 상업적 경쟁은 곧 절대적인 제한 규칙을 만들어 내는 데 이 규칙이 바로 교역 관습이다.

[259] “내가 업계에 처음 투신했던 때부터 사업은 항상 기술자들과 판매 부서간의 경주였다. 기술자들은 판매부에서 결코 팔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생산량을 올리려 했고, 한편 판매부에서는 기술자들이 보조를 맞출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산품을 팔려고 했다. 이 경주는 항상 계속되었다. 어떤 때는 이쪽이 앞서고 어떤 때는 저 쪽이 앞섰다. 나의 형도, 나 자신도 결코 사업을 하나의 과업으로 생각해 오지 않았다. 항상 하나의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정신을 우리는 우리의 젊은 스텝진에게 심어주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 주객이 전도된 예

[262] 예술이 스스로를 의식할 때,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장점을 의식할 때, 예술은 그 영원한 어린애 같은 무구성無垢性의 일부를 상실하기 쉽다.

[268] 다수 투표에 의한 후보 지명, 즉 가장 큰 갈채를 받는 사람이 후보가 되는 제도가 1860년에 처음 시작되어 링컨을 권좌에 앉혔다.
* 정치의 놀이 내용

[270] 놀이와 진지함의 파악하기 어려운 대조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서서히 문명이 고상한 놀이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 또 문명은 그것이 완전한 위엄과 양식을 간직한 채 전개되려면 결코 놀이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놀이 규칙의 준수는 국가들간의 관계에서 가장 필수적이다.

[271] 어떤 행동을 진지하게 만드는 것은 그 행동의 ‘도덕적’ 내용이다. 전투가 윤리적 가치를 지닐 때 그것은 이미 놀이가 아니다. 윤리적 기준의 객관적 가치와 그 타당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만은, 전쟁이 놀이인가 아닌가하는 이 괴로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이 닫혀 있을 것이다.

[272] 꾸불꾸불 우회한 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즉 진정한 문명은 어떤 놀이 요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명은 자체와 극기를 전제로 하며, 또한 그 자신의 경향을 궁극적이고 최고 목표와 혼동하지 않는 능력, 그리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어떤 일정한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어떤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놀이이며, 진정한 문명은 항상 페어플레이를 요구할 것이다.
페어플레이란 놀이의 용어들로 표현된 훌륭한 믿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속임수나 놀이를 망치는 훼방은 분명 문명 자체를 파괴한다. 건전한 문명 창조의 힘이 되려면 이 놀이 요수는 순수해야 한다. 그것은 이성, 믿음, 인간성에 의해 설정된 기준을 은폐하거나 격하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겉모양만 그럴 듯하게 꾸민 가짜. 진정한 놀이 형식이라는 환상 뒤에 숨은 정치적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놀이는 선전을 알지 못한다. 그 목적은 그 차제 안에 있으며 일반적 놀이 정신은 행복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272] “인간사는 굉장한 진지함을 필요로 할 만한 가치가 없지만 그래도 진지할 필요는 있다. 행복은 또 다른 문제이다. ...... 나는 인간은 진지한 것에 대해서는 진지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 때해서까지 진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다. 신만이 최고의 진지함을 가지고 대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이간은 신의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인간의 가장 좋은 부분이다. 따라서 모든 남녀 인간은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들은 고상한 게임을 해야 하며 현재의 그들과는 다른 정신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전쟁을 진지한 일로 생각하지만 전재 d속에는 놀이도 문화도 들어 잇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을 가장 진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가능한 한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어떤 게임을 하면서, 봉헌식을 거행하면서, 춤추고 노려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인간은 신들을 기쁘게 하고 적에게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으며 또 시합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 플라톤

[273] 인간의 정신은 궁극적인 것으로 주의를 돌림으로써만이 놀이의 마술적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

[273] “모든 것은 헛되다”는 옛속담 대신에 “모든 것은 놀이다.”라는 보다 적극적인 결론이 우리에게 강요되어 온다.

[274]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놀았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놀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 잠언

[274] 놀이는 도덕적 규범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위지가 명하는 어떤 행동이 진지한 의무인가 또는 놀이로서 적법한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그때엔 우리의 도덕적 양심이 즉각 그 시금석을 제공할 것이다.

[274] 행동하려는 우리의 결심 속에 진실, 정의, 동정, 용서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행동이 놀이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우리의 걱정스런 의문은 곧 무의미해지고 만다. 우리의 행동이 지적인 판단을 초월하는 데에는 한 방물의 동정이면 족하다. 우리의 양심이 정의와 고상한 자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하더라고, 도덕적 인식인 양심은 항상 우리는 미망시키는 의문, 그 행동이 놀이적인가, 진지한 것인가 의문을 압도하여 영원히 침묵시킬 것이다.

[276] “인간은 놀이를 하는 곳에서만 인간이다.” - 쉴러

3. 내가 저자라면
1) 책 읽는 어려움 - 가이드 라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읽기 전부터 어려운 책으로 보였다. 선배 연구원들의 리뷰를 찾아봤다. 없었다. 인터넷에서 리뷰를 몇 개 찾긴 했는데, 그것은 참고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실수 인 것 같다.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
먼저 목차를 훌터보며 어떻게 읽을지 구상했다. 이 책을 읽은 순서는 차례를 보면서 정했다. 우선 차례에 장의 소제목들을 열거해 주어서 그것을 보고는 저자 호이징하에 대해서 읽고, ‘[호모 루덴스]에 대해서’라는 부분을 읽었다.
‘[호모 루덴스]에 대해서’에 책의 특징과 구성을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을 끝까지 기억하고 있어야 했는데, 그만 책 읽는 동안 까먹었다. 책이 너무 어려워서 ‘왜 이 부분을 다루었을까’,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중심어는 뭐야?’라는 것 속에서 헤맸다. 맨 끝장에 이르러서야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를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그럼 앞부분에서 여러 분야의 연구는 대체 뭘 건졌지’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결론부터 먼저 읽고나서 앞에서부터 볼걸하는 마음이었다.
이런 분야의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지 모르는 사람을 위한 역자의 안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활용하지 못한 나의 탓이 크겠지만, 이 책은 그만큼 ‘안내’가 절실한 책이다. 정말 어렵다.

2) 백과사전이 필요해.
상식의 부족을 절감했다.
저자가 언어, 문화, 놀이 전쟁, 지식, 시, 철학, 신화, 예술이라는 영역을 나누어서 각각이 놀이의 요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각각의 분야들은 다양했고, 또한 생소했다.
‘베다’, ‘우파니 샤드’, ‘포트랏치’ 등 처음 접하는 단어와, 들어보기는 했지만 무엇인지 모르는 것들이 인터넷 백과사전을 찾게했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수많은 신들의 이름과 그들이 가진 상징들 또한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했고, 정치 부분에서의 유럽사에 대한 무지도 생소하다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예로 들어준 것들이 내겐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3) ‘~가 아닌 것은 아니다.’
‘~가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식의 문장 끝맺음이 많아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야 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반대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식의 표현을 피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용 파악도 어려운데 뒤죽박죽으로 만들 요소까지 있다니..... 원래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그 속성이 들어간 번역 때문에 그런 것일까, 원래 저자가 이런 문장을 쓴 걸까?

4) 학자들은 이렇게 어렵게 놀아도 되는 거야?
시비가 걸고 싶어졌다. 원래 역량이 모자른 사람이 연장 탓하고 남의 탓 하는 법이다. 내용 이해 못하겠으니 실껏 딴지라도 걸고 싶은 마음 가득하지만, 모르는 것에 대해서 뭘 어찌 말하랴.

그래도 한소리 한다면 ‘학자들은 이렇게 노나? 다른 이들이(그 영역을 연구하지 않는 사람들, 학자가 아닌 사람들....) 못 알아듣게 우월성을 과시해도 되는 것인가?’

일반 독자를 위해 쓰여진 책은 아니고, 학자들을 위해 쓰여진 연구서일 것같다.
책에 대해 읽어야 한다는 이성보다는 보다는 몸이 먼저 반응한다. 몸이 말한다. 책이 어려워서 너무나 졸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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