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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9일 07시 37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신동엽(申東曄.1930.8.18∼1969.4.7)
시인. 충남 부여(扶餘) 출생. 1966년 단국대학 사학과를 거쳐 건국대학 대학원을 수료하고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長詩)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가 당선되어 데뷔하였다. 그 후 아사녀(阿斯女)의 사랑을 그린 장시 <아사녀>, 동학혁명을 주제로 한 서사시 <금강(錦江)> 등 강렬한 민중의 저항의식을 시화(詩化)하였다. 시론(詩論)과 시극(詩劇) 운동에도 참여하며, 시론으로는 <시인정신론(詩人精神論)> 등이 있고,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시극동인회에 의해 상연되었다. 시는 주로 장시(長詩)에 주력하였다.

1961년 명성여자고등학교 교사 부임 재직 중 1969년 작고. 묘는 부여읍 능산리 고분 근처 야산에, 시비(詩碑)는 1993년에 단국대 중앙도서관 앞과 충남 부여의 백마강가 백제대교 인근에 세워져 있으며, 충남 부여 동남리 294번지에는 생가 터가 있다.

충청남도 부여(扶餘)읍 동남리에서 농사를 짓던 부친 신연순과 김영희 사이에서 1남 4녀중 장남으로 출생. 부여초등학교 졸업(1943) 후 가계형편으로 국가에서 숙식과 학비를 지원한 전주사범학교 입학. 졸업반이던 1948년 동맹휴학으로 학교가 쉬자 고향으로 가 있다 곧 고향 부여 부근의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음. 부임 3일만에 그만두고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1949).

1950년 6ㆍ25전쟁 발발 후 고향으로 가 9월말까지 부여 민족청년회 선전부장으로 일하다 국민방위군에 징집됨. 대학 졸업(1953) 후 제1차 공군 학도간부후보생에 지원 합격 후 발령을 받지 못한 채 고향에서 대기하다 환도령과 함께 서울로 감.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 돈암동 네거리에서 헌 책방을 열어 생활. 이 때 이화여고 3년이던 부인 인병선(부친 인정식은 농촌경제학 권위자이자 동국대교수로 전쟁 때 납북됨)을 만남.

결혼(1957) 후 고향으로 낙향, 부인이 부여읍내에 양장점을 열어 생활하다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 1958년말 각혈 후 폐결핵을 앓아 학교를 사직하고 서울 돈암동 처가에 아내와 자녀를 올려보낸 뒤 고향 부여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문학습작에 몰두하며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를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1959), 입선됨. 1960년 건강을 회복하고 서울로 와 '교육평론사'에 취업한 뒤 성북구 동선동에 터를 잡음. 1960년 4ㆍ19의거를 체험하고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ㆍ19 혁명에 동참. 1961년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교편생활을 하며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 이수(1964). 간암으로 사망(1969. 4. 7). 부여읍 능산리 고분근처 야산에 묻침. 부여읍 백제대교 부근에 신동엽시비(산에 언덕에)가 건립됨.

조선일보 신춘문예(1959)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가 입선(가작)되면서 본격적인 활동 시작. 1966년 시극 <그 입술에 파인 하늘>이 국립극장에서 상연됨. 시집 <아사녀>(1963), 서사시 <금강(錦江)>(1967)을 발표. 아사녀(阿斯女)의 사랑을 그린 첫 시집 <아사녀(阿斯女)>에 <그 가을>, <내 고향은 아니었었네> 등을 발표하였는데, 민족의 전통적인 삶의 양식이 역사의 격변으로 붕괴되고 있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고 있다.

그의 언어는 역사와 현실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민중적 이념을 구현하는 데에 모아진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시적 신념이 장시 <금강(錦江)>에서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강렬한 민중의 저항의식을 동학혁명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통해 형상화 한 <금강(錦江)>은 동학혁명에서 그 시적 주제를 찾고 있으며 동학 이후의 민족의 수난사를 내용으로 삼고 있는 장시이다. 시적 진술 자체가 허구적인 서술자의 존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이 작품은 그 내용의 역사성과 서사적 요건으로 인하여 서사시적 골격을 지니게 된다. 서정적 세계에서 서사적 세계로의 전환을 모색한 신동엽은 역사적 현실성에 대한 인식을 구체화하기 위해 동학혁명의 방대한 내용을 시적 형식으로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역사의식과 현실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내용의 역사성과 서사적인 요건으로서의 객관적인 거리의 문제, 시적 주제의 전개방식의 불균형, 어조의 변화문제 등을 드러내는 미숙함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을 민중혁명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보]

1930년 8월 18일 충청남도 부여읍 동남리에서 출생. 부여초등학교, 전주사범학교, 단국대 사학과 졸업.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입선(여러 우여곡절 끝에 20여 행을 삭제하고 그나마 당선도 아닌 입선이었다.)
1961년 명성여고 국어교사로 취임(작고시까지 재직)
1963년 <산에 언덕에>, <아니오> 등을 담은 시집 <아사녀> 출간
1966년 시극(詩劇)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을 최일수 연출로 국립극장에서 상연
1967년 펜클럽 작가기금으로 장편서사시 <금강(錦江)> 발표
1968년 오페레타 <석가탑>(백병동 작곡)을 드라마센터에서 상연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별세. 경기도 파주군 월롱산 기슭에 안장
1970년 4월 18일 부여읍 동남리 백마강 기슭에 시비(詩碑)를 세움
1975년 <신동엽전집>이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었으나 내용이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이유로 판매 금지당함.
1979년 유고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발간.
1980년 증보판 <신동엽 전집>이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됨
1982년 유족과 [창작과비평사]가 공동으로 '신동엽 창작기금'을 제정, 첫 지원대상자로 소설가 이문구가 선정됨.
1985년 5월 유족과 문인들에 의해 '신동엽 생가' 복원
1988년 미발표 시집 <꽃같이 그대 쓰러진>, 미발표 시집 <젊은 시인의 사랑>이 실천문학사에서 간행
1989년 시 <산에 언덕에>가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
1993년 11월 20일 부여읍 능산리 왕릉 앞 산으로 이장


2. 내 마음 속에 들어온 글귀

[ 나의 나 ]

사양들 마시고
지나 오가시라
없는 듯 비워 둔 나의 자리.

와, 춤 노래 니겨
싶으신 대로 디뎌 사시라.

한물 웃음 떼 돌아가면
나 죽은 채로 눈망울 열어
갈겨진 이마 가슴과 허리
황량한 겨울 벌판 돌아보련다.

해와 눈보라와 사랑과 주문呪文,
이 자리 못 물고
굴러 떨어져 갔음은
아직도 내 봉峰우리 치솟은 탓이었노니.

글면 또 허물으련다
세상보다,
백지장 하나 만큼 낮은 자리에

나의 나
없는 듯 누워.

고이 천만년 내어 주련마.
사랑과 미움 어울려 물 익도록.
바람에 바람이 섞여 살도록. <新思潮, 1962년 6월 호> p26

[ 미 쳤 던 ]

스카아트 밑으로
江 뚝에, 바람은
나부끼고 있었다.

안경을 낀
내 초여름
고샹 같은 女人이여.

허리 아래로 대낮,
꽃 구렝인
눙치고,

깊은 ?뇌 감춘
미쳤던,
미쳤던,
꽃 사발이여.

스카아트 밑으로
天才는 흰 久遠 빛내며.

한낮 꿀벌 뒤집혔다. <詩集 阿斯女, 1963년> p36

[ 눈 내리는 날 ]

지금은
어디 갔을가.

눈은 날리고
아흔아홉 굽이 넘어
바람은 부는데
상엿집 양달 아래
콧물 흘리며
국수 팔던 할멈.

그 논 길을 타고
한 달을 가면, 지금도
일곱의 우는 딸들
걸레에 싸안고
大寒의 문 앞에 서서 있을
바람 소리여

하늘은 狂亂 ....... .
까치도 쉬어 넘던
동해 마루턱
보이는 건 눈에 묻은 나,
나와 빠알간 까치밥.

아랫도리 걷어올린
바람아,
머릿다발 이겨 붙여 山幕 뒷곁
다숩던
얼음꽃
입술의 맛이여.

눈은 날리고
아흔아홉 굽이 넘어
恨,
恨은 쫒기는 데

상엿집 양달아래
트렁크 끌으며
쉐탈 갈아입던 女人....... <詩集 阿斯女, 1963년> p38

[ 山에 언덕에 ]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行人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 지네
바람 비었거든 人情 담을 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詩集 阿斯女, 1963년> p42

[ 초 가 을 ]

그녀는 안다
이 서러운
가을
무엇하러
또 오는 것인가....... .

기다리고 있었다
네모진 机上앞
초가을 金風이
살며시
선보일 때,

그녀의 등허리선
풀 멕인
광목 날
앉아 있었다.

아, 어느새
이 가을은
그녀의 마음 안
들여다보았는가.

덜 여문 사람은
익어가는 때,
익은 사람은
서러워하는 때,

그녀는 안다.
이 빛나는
가을
무엇하러
半島의 지붕밑, 또
오는 것인가....... . <사상계, 1965년 10월호> p58

[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52人詩集 , 1967년> p67

[ 水雲이 말하기를 中... ]

水雲이 말하기를,
한반도에서는
세계의 밀알이 썩었느니라. <東亞日報, 1968년 6월 27일> p74

[ 그 사람에게 ]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 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 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追憶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創作과 批評, 1968년 여름호> p80

[ 여름 고개 ]

산고개 가는 길에
개미는 집을 짓고
움막도 심심해라

풋보리 마을선
누더기 냄새
살구나무 마을선
미절 모를 졸음

산고개 가는 길엔
솔이라도 씹어야지
할멈이라도 반겨야지 < 新東亞, 1968년 8월호> p82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一生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永遠의 하늘
볼 수 없는 사람은,

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高大文化, 1969년 5월 > p85

[너 에 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두고 가진 못할
차마 소중한 사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묵은 순터
새 순 돋듯

허구 많은 自然中
너는 이 근처와 살아라. <創作과 批評, 1970년 봄호> P95

[ 江 ]

나는 나를 죽였다.
비 오는 날 새벽 솜바지 저고리를 입힌 채 나는
나의 학대받는 육신을 江가에로 내몰았다.
솜옷이 궂은비에 배어
가랑이 사이로 물이 흐르도록 육신은
비겁하게 항복을 하지 않았다.
물팡개치는 홍수 속으로 물귀신 같은
몸뚱어리를 몰아쳐 넣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거대한 산맥 같은
휩쓸려 그제사 그대로 물넝울처럼 물결에
쓰러져 버리더라 둥둥 떠내려가는 시체 물속에
주먹 같은 빗발이 학살처럼
등허리를 까뭉갠다. 이제 통쾌하게
뉘우침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너무 얌전하게 나는 나를 죽였다.
가느다란 모가지를 심줄만 남은 두 손으로
꽉 졸라맸더니 개구리처럼 삐걱! 소리를 내며
혀를 물어 내놓더라.
江물은 통쾌하게 사람을 죽였다. <創作과 批評, 1970년 봄호> p96

[ 밤은 길지라도 우리 來日은 이길 것이다 ]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옆에는 네가 네 옆에는
또 다른 가슴들이
가슴 태우며
한 가지 念願으로
行進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앞에서 사랑이 사랑 앞에서 죽음이
아우성 죽이며 億진 나날
넘어갔음을.

우리는 이길 것이다.
구두 밟힌 목덜미
生풀 뜯은 어머니
어둔 날 운 빼앗겼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五百年 漢陽
어리석은 者 떼 아즉
몰려 있음을

우리들 입은 다문다.
이 밤 함께 겪는
가난하고 서러운
안 죽을 젊은이.

눈은 鋪道 위
妙香山 기숡에도
俗離山 東學골
나려 쌓일지라도
열 사람 萬 사람의 주먹팔은
黙黙히
한 가지 念願으로
行進

고을마다 사랑방 찌개그릇 앞
우리들 두 쪽 난 祖國의 運命을 입술 깨물며

오늘은 그들의 巢窟
밤은 길지라도
우리 來日은 이길 것이다. p107

<敍事詩> 錦 江

제 12장 中...
...
제자가 물었다,

江을 흐르는 질서秩序

『선생님,
몇 날 안가 또
딴 데로 떠나셔야 할 텐데
그런 일 해
뭘 하시렵니까』

『안될 말,
한울님께서 사람을 내신 건
농사지으라고 내신 건데
농사짓지 아니하고
생산하지 아니하면
양반보다 나을게 없지 아니한가,

그리고 우리가
혹 이 멍석 쓰지 못하고
이 채소와 과일 먹지 못하고
딴 데로 가게 된다 할지라도,

이 다음날 누군가가 이곳에
와, 멍석을 쓰고
채소와 과일을 따먹게 될게 아닌가?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한다면, 어디 가나 이 지상은
과일과 곡식,
꽃밭이 만발할 것이요
모든 農場은
모든 人類의 것,
모든 천지는 모든 백성의 것
될게 아닌가. 』 p171

제 16장 中
...
『세상의
어지러움은, 그 까닭이
외부에서만 있는 거, 아닙니다,
손짓 발짓은 흘러가는 물거품
우리의 內部가 더 문제입니다,
알맹이가,
속살이,
씨알이 싱싱하면
신진대사에 의해
外形은 변질됩니다.

외부로부터
다스려 들어오려 하지 말고
우리들의 내부에
불을 지릅시다.』 ... p203

제 23장

벗고도 싶었으리라, 굴레,
찢고도 싶었으리라, 알살 덮은
쇠항아리.
찢어진 쇠항아리 사이로 잠깐
빛 난 하늘,

살무더기의 소망
꽃들의 기구
쌀밥 사발의 기원,

누가 꺽었나,

그러나
꺾였을까?
<밀알 한 알이 썩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한 알로 있을 뿐이나,
땅에 떨어져 썩으면
더 많은 밀알 새끼 치느니라.> p283

[ 後話 2 ]

1894년 3월
우리는
우리의, 가슴 처음
만져보고, 그 힘에
놀라,
몸뚱이, 알맹이채 발라,
내던졌느니라.
많은 피 흘렸느니라.

1919년 3월
우리는
우리 가슴 성장하고 있음 증명하기위하여
팔을 걷고, 얼굴
닦아보았느니라.
덜 많은 피 흘렸느니라.

1960년 4월
우리는
우리 넘치는 가슴덩이 흔들며
우리의 歷史밭
쟁취했느니라.
적은 피 보았느니라.

왜였을까, 그리고 놓쳤느니라.

그러나
이제 오리라,
갈고 다듬은 우리들의
푸담한 슬기와 慈悲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리 세상 쟁취해서
半島 하늘높이 나부낄 평화,
낙지발에 빼앗김 없이,

우리 사랑밭에
우리 두렛마을 심을, 아
찬란한 혁명의 날은
오리라,

겨울 속에서
봄이 싹트듯
우리 마음속에서
戀情이 잉태되듯
조국의 가슴마다에서,
혁명, 噴水 뿜을 날은
오리라.

그럼,
안녕.

언젠가
또다시 만나지리라,

무너진 석벽, 쓰다듬고 가다가
눈인사로 부딪쳤을 때 우린
십劫의 因緣,

노동하고 돌아가는 밤
열한시의 합승 속, 혹, 모르고
발등 밟을지도 몰라,
용서하세요.

그럼
안녕,
안녕,

논길,
西海岸으로 뻗은 저녁노을의
들길, 소담스럽게 결실한
붉은 수수밭 사잇길에서
우리의 입김은 혹
邂逅할지도
몰라. < 錦江 > p303

[ 오늘의 作家狀況ㆍ詩 ]
詩業家들과 歌人들과 詩人
詩人과 哲人. 무슨 業家가 아닌 詩人과 哲人들은 과연 무엇을 天賦받고 태어난 사람들일까.
哲人은 人生과 세계의 본질을 그 맑은 예지로 통찰하고 비판하는 사람이다.
詩人은 인생과 세계의 본질을 그 맑은 예지만으로써가 아니라 다스운 感性으로 통찰하여 言語로 昇華시키는 사람이다. <大學新聞, 1969. 3 24> p390

[ 鮮于煇씨의 홍두깨 ]
오늘, 우리의 現實 속에 뿌리박고 서서 우리의 實存을 아파하며 괴로워하며 슬퍼하다 돌아간 한 그루의 불굴의 精神, 영원히 끝날 줄 모르는 求道姿勢의 詩人이 있었다.
그는 文學은 鮮于煇씨가 주장하는 바와 같은 <高級의 장난>은 결코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文學을 <愛情>의 수단이오, 그 본질이라고 보았다. 人間性에의 愛情, 자기 이웃에 대한 애정, 그리고 現象과 그 內面에게로 쏟는 굽힐 줄 모르는 誠實性. <月刊文學, 1969. 4> p392


[ 新抵抗詩運動의 可能性 ]
詩란 바로 生命의 發言인 것이다.
詩란 우리 認識의 전부이며, 世界認識의 統一的 表現이며, 生命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生命의 組織인 것이다. 하여 그것은 항시 보다 광범위한 精神의 集團과 互惠的 通路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詩業家는 많아도 詩人은 드물다.
오늘의 詩人들은 政治는 정치 맹목 기능자에게, 宗敎는 종교 전문 기능자에게, 思想은 직업교수에게 위임해 버리고 자기들은 單語상자나 쏟아놓고 앉아서 핀센트 장난이나 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와 이웃과 世界, 그 인간의 久遠의 歷史밭을 갈아엎어 우리들의 內質을 통찰하여 그 永遠의 하늘을, 그 永遠의 平和를 슬프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다리. 1970. 10> p397


3. 내가 저자라면

하나, 중등부 교과서에서는 배우지 않은 참여시, 역사시, 민족시라 할 수 있는 詩이다.

신동엽은 남다른 조국애와 민족애를 바탕으로 한결 같은 마음과 충정을 쏟으며 민족의 오롯한 염원을 담은 시를 썼다. 특히 역사적 사건과 관점에 준거하여 사실성과 현실감을 시의 세계에 직ㆍ간접적으로 묘사하여 그만의 시어와 시 세계를 펼치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서사적 장편 시로서 그가 느끼는 민족의 삶과 애환을 굽이굽이 녹여냈다.

두울, 이 민족의 역사와 함께 펼쳐지는 겨레의 수난과 분단된 조국 현실에 대한 암담하고도 침울한 안타까움이 시인의 애달아하는 일상에 절절히 녹아들어 투영된 시와 언어들이다.

역사적으로 거센 외세의 침략에 짓밟히고 모진 시련을 당한 조국의 짓무른 상처와, 탐관오리들의 착취와 수탈에 항거하는 민중의 봉기를 낳은 동학혁명, 이후에도 이어지는 분단된 조국의 비통한 현실에의 뼈아픈 통찰을 시인의 서정적 감수성과 서사적 차분함으로 담담히 그려낸 점이 훌륭하다. 더불어 밝은 혜안과 선지자적 견지에서의 시와 시 정신에 입각한 철학과 이념으로서 이 민족이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한 점 또한 특히 돋보이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신동엽시인으로 말하자면 더 나은 민족의 길에 대한 확고한 염원을 결코 한시도 잊은 적 없이 의롭고 올곧게 지켜간 시대가 낳고 시대가 요청한 시인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세엣, 우리의 소원은 통일, 우리의 조국은 하나라는 믿음과 신념의 시인

삼천리금수강산에 새로운 씨앗을 퍼뜨려 꿈 꽃의 염원을 삼천리 방방곡곡에 씨 뿌리고 쟁기 가는, 소박하며 투박한 토속적 열망의, 이 땅 한반도의 혈맥 속 분수와도 같이 힘찬 민중 시인이다. 그러한 시인의 사명과 시 정신과 시 철학을 지닌 참 다운 시인의 길이 되기를 오매불망 갈망하고 애써 살아간, 죽는 날 까지 깐깐하고 꼬장꼬장하게 시를 사랑한 진정한 시인이라고 하겠다.

네엣, 詩人 金洙暎과 함께 했던 신동엽 그는 김수영에 대해 이렇게 조문으로 전하고 있다.

『地脈 속의 噴水
한반도 위에 그 긴 두 다리를 버티고 우뚝 서서 외로이 주문을 외고 있던 천재시인 김수영.
그의 육성이 왕성하게 울려 퍼지던 1950년대부터 1968년 6월까지의 근 20년 간, 아시아의 한반도는 오직 그의 목소리에 의해 쓸쓸함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말장난을 미워했다. 말장난은 부패한 소비성 문화 위에 기생하는 기성벌레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존질서에 아첨하는 문화를 꾸짖었다. 창조만이 본질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육성으로, 아랫배에서부터 울려나오는 그 거칠고 육중한 육성으로, 피와 살을 내갈겼다. 그의 육성이 묻어 떨어지는 곳에 사상의 꽃이 피었다. 기독의 칼날이 번득였다. 그리고 태백의 지맥 속에서 솟는 싱싱한 분수가 무지개를 그었다.

한반도는 오직 한 사람밖에는 없는, 어두운 時代의 위대한 證人을 잃었다. 그의 죽음은 민족의 손실, 이 손실은 서양의 어느 일개 대통령 입후보자의 죽음보다 앞서 5천만 배는 더 가슴 아픈 손실로 기록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김수영은 죽지 않았다. 위대한 民族 詩人의 영광이 그의 무덤 위에 빛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민족의 알맹이들은 다 알고 있다.』p387

그 자신이 고 김수영 시인에게 받친 이 조문은 오늘날 우리가 시인에게 그대로 전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김수영 시인의 사상과 시 정신을 사랑하였듯이 그 자신 그렇게 당당히 살았고 이 나라 겨레의 앞날을 선견하고 예지한 당찬 시인이었음을 두 말할 나위 없다고 하겠으며 그의 시 정신으로 하여 오늘날 건강한 우리가 건재함을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다섯, 그래도 서사시보다 서정시가 내게는 더 마음이 평화롭다.
운동권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보지 않고 살아서 그런지 그래도 나는 약간 어렵고 무거우며 모진 시어나 시와 시인의 현실 참여보다, 감수성이 섬세하고 부드러운 그의 서정시가 더 마음에 드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에 민족의 분단과 동학혁명과 같은 민중의 고단하고 팍팍한 질곡의 역사가 아니었더라면 시인은 어떤 시를 썼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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