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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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대하여
이 책은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의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Patterns of Japanese Culture(Houghton Mifflin Company,1946)을 번역한 것이다.
이 저서의 저자는 일본 문화의 특성을 ‘국화’와 ‘칼’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저서는 그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문화의 틀을 탐구하고 있다. 그것은 미국에서 크게 발달한 문화인류학이라는 학문적 방법론에 의거한 것이며, 따라서 매우 전문적이다. 여기서 ‘전문적’이라 함은 단순한 일본 기행문이나 견문기가 아니라 엄밀한 학문적 노작勞作이라는 뜻이다. 저자가 목적으로 삼은 것은 평균적인 일본인(average Japanese)의 행동과 사고思考의 틀(Pattern)을 탐구하는 것이다. p4
특히 이 저서의 정수는 계층 제도(hierarchy)에 대한 분석에 있다. 그 계층 제도가 근대 사회로 넘어올 때 어떠한 질서와 충동을 일으키는가의 고찰은 제3장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속에 선명히 드러나 있다.
저자인 베테딕트 여사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909년 바사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어학 교사와 시인으로 활동하다 생화학자인 스탠리 베네딕트와 결혼, 1919년 인류학에 접하게 되고 2년 후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절대적인 스승 프란츠 보아스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인 인류학 연구에 빠져들게 된다. 현지를 답사하며 아메리칸 인디언 종족들의 민화와 종교를 연구하여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녀는 1930년부터 모교에서 인류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베네딕트의 대표작은 <문화의 패턴(Patterns of Culture)>(1934), <종족(Race: Science and Politics)>(1940) 등으로 알려져 있다. 만년의 명작인 이 <국화와 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 6월 미국무부의 위촉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자 자신은 일본을 방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학문의 연구에서 그 대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보다 엄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 저서는 입증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부분적 체험은 전체적인 방법론을 망쳐 놓기 쉬운 것이다. 이 저서가 허다한 나름대로의 기행문이나 그것에 준하는 저널리스틱한 일본 인상기와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으리라. p5
2. 내 마음속에 들어온 글귀
제 1장 연구과제 / 일본
일본인은 미국이 지금까지 전력을 기울여 싸운 적 가운데 가장 낯선 적이었다. 대국大國을 적으로 하는 전쟁에서 이처럼 현격히 이질적인 행동과 사상의 습관을 고려해야 할 필연성에 직면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p9
일본인은 서양 여러 나라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전시관례戰時慣例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태평양에서의 전쟁은 섬 해안에서의 일련의 상륙 작전이나 병참술에 극히 어려운 문제들보다도 그 이상의 것, 즉 적의 성질을 알 필요성이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적의 행동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적의 행동을 이해해야 했다. -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知彼知己, 百戰百勝 p10
일본인은 최고도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는 범죄의 유혹에 빠지고 만다. 그들의 병사는 철저히 훈련되지만 또한 반항적이다. p11-일본인의 특징*****
국민적 차이의 체계적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정신과 함께 어느 정도의 관용이 필요하다. 종교의 비교연구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 매우 관대하였을 때에만 활기를 띠었다. 그들은 예수회 신도, 혹은 아라비아인 학자, 혹은 신앙이 없는 자일 수도 있었지만, 결코 열광적인 신자는 아니었다. 문화의 비교 연구도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생활양식을 세계에서 유일한 해결법으로 믿고 그것의 방어에만 급급해 하는 한 도저히 큰 성과를 거둘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들은 다른 생활 양식을 알게 됨으로써 자기 자신의 문화를 더 깊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즐겁고 풍부한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있다. p26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제 2장 전쟁중의 일본인
일본인의 병력 소모의 이론을 가장 극단까지 이르게 한 것은 그들의 무항복주의 였다. 서양의 군인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중과부적이란 점을 알면 항복을 한다. 그들은 항복한 뒤에도 여전히 자기들을 명예로운 군인이라 생각하며, 그들이 살아 있음을 가족에게 알리기 위해 명단이 본국으로 통지된다. 그들은 군인으로서도 국민으로서도 또 그들 자신의 가정에서도 모욕을 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경우 일본인은 사태를 전혀 다른 식으로 규정한다. 일본인에게 명예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절망적 상황에 몰렸을 때에는 일본군은 최후의 수류탄 하나로 자살하든가, 무기 없이 적진으로 돌격하여 집단적 자살을 하든가 해야지 절대로 항복해서는 안 된다. 만일 부상당했다든가 기절하여 포로가 된 경우조차도 그는 “일본에 돌아가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고 여긴다. 그는 명예를 잃었다. 그 이전의 생활에서 본다면 그는 ‘죽은 자’였다. p53
일본인에게는 포로가 된 미군은 단지 항복하였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체면을 떨어뜨린 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부상이나 말라리아나 이질로 해서 ‘완전한 인간’의 부류에서 제외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폐물’ 취급을 하였다. p54
공공연히 권위에 도전하면 설령 그것이 단순한 ‘말대꾸’일지라도 심하게 처벌되었다. 일본인은 일상생활에서도 말대꾸하는 것은 아주 엄격히 규제한다. 그러므로 말대꾸에 엄벌을 가하는 것이 일본 군대의 관습이었던 것이다. p55
제 3장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take one's proper station)”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관한 일본인의 견해를 알아야 한다. 질서와 계층 제도에 대한 그들의 신뢰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우리의 신념은 전혀 다른 것이다. p59
일본은 근래 두드러지게 서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귀족주의적인 사회다. 사람들과 인사하고 접촉할 때는 반드시 서로간의 사회적 간격의 성질과 정도를 암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에게도 가는 많은 태평양 여러 민족과 같이 ‘경어’가 있다. p64
왜곡된 시선일까? 정확한 표현 같다.*****
여태까지 친족회의의 결정에 승복해 온 경험을 가진 연장자들은 그들의 손아랫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결정에 따를 것을 완강하게 요구한다. p73
이에야스의 의도 속에는 서민과 무사 계급간에 상호 의존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의 정책은 엄중한 계층적 규제에 입각해 있었다. 서민 계급도 사무라이 계급도 모두 다이묘에게 통솔되어 각각 다이묘와 직접적으로 교섭을 가졌다. 두 계급은 말하자면 각각 별개의 계단 위에 놓여진 것이다. 각 계단에서는 위에서 아래까지 일관하여 법령과 규칙, 지배와 상호 의무가 행해졌다. 다만 두 계급에 속한 사람들간에 간격이 있을 따름이었다. 두 계급 사이의 간격은 때때로 그때의 사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다리가 놓여지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체제의 한 부분은 아니었다. p83
제 4장 메이지유신
전문적으로 종교적 고행에 몸을 바친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본에서 종교란 결코 위압감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은 즐겨 먼 곳의 신사나 절에 참배하러 가지만 이것 역시 휴일을 즐기려는 것이다. *****일상화된 그들만의 정신세계
이와 같이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정치에서는 국가의 기능이 미치는 영역을, 종교에서는 국가신토의 영역을 신중히 구획하였다. p114
계층 제도는 도저히 수출될 수 없는 상품이다. 다른 나라들은 일본의 일방적 주장을 건방진 것으로, 아니 그보다 더 나쁜 것으로 여기고 분개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장교나 사병들은 각 점령군에서 주민들이 자기들을 환영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계속 놀랐다. 일본은 그들에게 비록 낮은 위치이기는 하나 어쨌든 계층제 속에 하나의 위치를 부여하려고 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계층제란 것은 낮은 계층에 놓여진 자에게도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 그들의 의문이었다.
일본은 그들 스스로에게 요구한 일을 다른 나라에도 요구할 수는 없었다.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들은 ‘각자 알맞은 지위를 받아들이는’ 일본의 도덕 자체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다른 나라들에는 그러한 도덕률이 없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일본만의 산물인 것이다. 일본의 저술가들은 이 윤리 체계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기술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앞서 먼저 그 도덕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p121
제 5장 과거와 세상에 빚을 진 사람
온의 여러 가지 용법 전부를 통과하는 의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짊어질 수 있는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일본인이 “나는 누구에게 온을 입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누구에 대하여 의무의 부담을 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들은 채권자나 은혜 입힌 사람을 그들의 온진恩人이라고 부른다. p125
옥쇄玉碎 : 구슬이 아름답게 부서지듯이 명예나 충의를 위해 서슴없이 죽는 것. p128
자식에 대한 의무는 ‘부모의 온’속에 포섭되고 만다.
일본인은 또한, 교사와 주인主에 대해서도 특수한 온을 느낀다. 그들은 모두 무사히 세상살이를 할 수 있도록 원조해 준 은인들이기 때문에, 장래 언젠가 그들이 어려워져서 무엇이고 부탁하면 원하는 것을 듣고 해결해 주어야 하고, 또한 그들이 죽은 후에라도 어린아이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 사람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하며, 시간이 지나 갔다고 해서 부채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해가 갈수록 이자가 붙는 것처럼 더욱 불어난다. 어떤 사람에게서 온을 받는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 일본인이 잘 쓰는 표현에도 나타나듯이 “사람은 온의 만분의 일도 갚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짐이다. 또한 ‘온의 힘’은 항상 단순한 개인적인 기호를 짓밟을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와 같은 채무의 윤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각자가 지고 있는 의무를 이행하는 데 큰 불쾌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이 큰 빚을 지고 있는 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p129 결국 위만 있지 아래는 없는 안하무인?***** 인간이 정이 안 가네.
사람이 일단 누구에게, 설령 그것이 자신의 자식들일지라도 과도하게 무거운 온을 입히려는 길을 택하였다면, 상당한 장애에 부딪힐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방침을 변경할 수 없다. 그는 그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자식에게 온을 베풀기 위해 설령 아무리 큰 희생을 치렀다 해도, 그것을 이용해서 후일에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온을 ‘현재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p141
제 6장 만분의 일의 은혜갚음
일본인에게는 온이라고 불리는 중요하고도 결코 소멸할 수 없는 채무와, 일련의 다른 개념에 의해 이름 지어진 적극적이고도 지체할 수 없는 변제와는 전혀 다른 세계인 것이다. 사람의 채무(온)은 덕행이 아니다. 변제가 덕행인 것이다. 덕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보답 행위에 몸을 바칠 때 시작된다. p144
우리에게 애정은 마음의 문제로서, 어떤 약속도 없이 자유로이 주어진 사랑이 최상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애국심도 우리나라의 이익을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는 의미에서는, 미국이 적국의 무력에 의해 공격받지 않는 한 오히려 동키호테적인 것, 또는 분명히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인간의 본성과는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일본인의 기본적인 가정인 모든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큰 채무를 진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누구나 가난한 양친을 불쌍히 여겨 도와야 하며, 아내를 때려선 안 되고, 자식들을 부양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금전상의 부채처럼 양으로 계산되지 않으며, 또 사업상의 성공처럼 보상받지도 못한다. p144
일본에서의 그것은 미국에서의 채무 변제와 아주 흡사하게 여겨진다. 그리하여 그 배후에 있는 강제력은 미국에서 청구서나 저당 이자 지불의 배후에 있는 강제력처럼 강력하다.
자기가 누구에게 온을 받았을 때 자기에게 온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온진恩人이 된다. p145
기무義務 :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코 그 전부를 같을 수 없고 또 시간적으로도 한계가 없는 의무(obligation)이다.
기리義理 : 자신이 받은 은혜와 같은 수량만을 갚으면 되고, 또 시간적으로도 제한된 부채.
이름名에 대한 기리 : 이 말은, ‘die Ehre’(명예)의 일본식 변형이다. p146
일본인은 양에서나 기한에서나 무제한적인 온에 대한 보답과, 받은 분량과 똑같이 갚고 특정한 기한에 끝나는 보답을, 각기 다른 규칙을 가진 별개의 범주로 나누고 있다.
7세기 이래 중국의 윤리 체계가 일본에 들어왔다. 따라서 주忠와 고孝는 원래 중국어였다. 중국인은 이들 덕을 무조건적인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은 충성과 효성의 조건이자, 충효 위에 서는 하나의 덕을 요청한다. 이것은 런仁으로 benevolence(자애ㆍ박애)라 번역되는데, 이 말은 서양인에게는 사람간의 좋은 관계 일체를 의미한다. p147
런은 충성의 기초가 되는 조건이다. 천자의 제위를 유지하는 것도 관료가 관직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런을 베푸는 데서 비롯된다. 중국인의 윤리는 모든 인간관계에 이 런이라는 시금석을 둔다.
중국 윤리 체계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런은 일본에서는 윤리 체계 밖으로 추방된 덕이 되었다.
‘진기를 행한다’는 말은 또 ‘법의 범위 밖’이란 또 하나의 의미, 즉 무법자 사이의 덕을 말할 때 쓰인다. p148
“고는 때때로 다른 덕과 충돌한다. 만일 주인공이 매우 현명하였다면, 자존심을 잃지 않고서도 서로 모순되는 덕을 융화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서나마 자기 어머니를 책망하는 결과가 된다면 자존심을 앞세우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p150
좋은 며느리를 선택하는 데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그 집의 가족이다. 그것은 단순히 금전상의 거래가 걸려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며느리는 그 집의 계보 속에 편입되어 아들을 낳아 가계를 영속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령 아들이 아내와 금실이 좋아 어떻게든 함께 살고 싶어 할 때에도 결혼을 취소해 버린다. p151
여러 가지 일들이 효행 속에 포함되지만, 그 모든 일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채무에 대해 자식이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보은이다. 미국에서는 이와 같은 이야기는 개인의 정당한 행복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간섭의 사례라고 여겨지고 있다. 일본인은 은혜의 요청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이 간섭을 ‘외부로부터’의 간섭으로 보지 않는다. p152
효행은 중국의 경우처럼 몇 세기 동안의 역대 조상이나 그 조상의 후손인 번성하는 현재의 넓은 종족을 포괄하지 않는다. 일본의 조상 숭배는 최근의 조상에 한정되어 있다.
일본인은 생생하게 기억되는 사람 이외의 조상에 대한 효행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지금 여기에 있는 자에게 집중한다.
이 효행관의 가장 큰 실제적 중요성은 고의 의무를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에 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p153
‘찬밥친척’冷飯親戚 그들은 누구든 그 집안사람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그들의 신상에 관한 어떠한 결정에도 아주 순종해야 한다. p155
어느 일본인 저자는, “일본인은 집家을 대단히 존중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가족 개개의 성원과 그 상호간의 가족적 유대를 그리 크게 존중하지 않는다”고 썼다. 물론 이 말은 언제나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일반적인 형편을 말해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의무와 부채의 갚음이며, 연장자가 중대한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책임 가운데 하나는 아랫사람에게 필요한 희생을 반드시 치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 희생에 불복한다 해도 큰 변함이 없다. 그들은 연장자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기무를 태만히 한 것이 된다. p156
써니: 이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나의 결혼이 바로 이러했으니까. 아이고~ 내 팔자야~
천황은 책임 있는 국가의 원수로서가 아니라 일본 국민 통합의 최고의 상징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p156
단지 메이지의 정치가들이 해결해야 했던 것은, 모든 일본인이 마음속에서 무조건적인 최고의 덕인 주를 천왕에 대하여 바치도록 하는 일이었다.
봉건 시대의 일본에서 주는 세속적 수장인 쇼군(將軍)에 대한 의무였다. 이러한 긴 역사가 메이지의 정치가들에게 그들의 목적으로 삼은 일본의 정신적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었다. p157
주가 이처럼 쉽게 천황에게로 옮겨진 것은 황실을 태양의 여신의 후예라고 하는 옛 민간 신화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p158
‘가미神’는 ‘god’로 번역되었지만,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머리頭’, 즉 계층 제도의 정점이다. 일본인은 인간과 신 사이에 서양인처럼 큰 차이를 두지 않는다. 일본인은 누구든 죽으면 가미가 된다. 사실 봉건 시대에 주는 전혀 신적 자격을 지니지 않았던 계층제의 우두머리에 바쳐졌다. p158
일본은 이제까지 여러 가지 변천을 거쳐 왔지만 그 어떤 변혁에서도 결코 사회 조직이 지리멸렬하게 파괴된 일이 없이 항상 불변의 형태로 지켜져 왔던 나라였다.
유신 이전 100년 동안 반도쿠가와 反德川 세력이 이용했던 것은 이러한 근거에 있었지, 천황 후예설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계층제의 정점에 서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주는 천황에게만 바쳐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천황을 국민의 최고 사제로 받들어 올렸지만 그 역할이 반드시 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여신의 후예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p159
천황은 이처럼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하여 국내의 정쟁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에 놓여진 상징이 되어 있었다. 성조기에 대한 충성이 일체의 정당 정치를 초월한 영역에 있는 것과 같이, 천황은 ‘침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인은 더 없는 상징성을 지닌 인간을 철저하게 활용하였다. p160 천황의 존재의미는 치외법권적?*****
훈련중인 교사가 만일 인간 최고의 의무가 조국애라고 말한다면 낙제였다. 그것은 천황에 대한 보은이라고 말해야 했다. p160
주는 신하와 천황의 관계에 이중적 체계를 부여한다. 신하는 위를 향해서는 중간자를 거치지 않고 직접 천황을 우러러본다. 그러나 신하가 천황의 명령을 받을 때는 그 명령은 그와 천황 사이에 기재하는 여러 중간자의 손을 거쳐서 중계된 것을 귀에 담는다. ‘이것은 천황의 명령이다’라는 표현은 주를 환기하는 표현으로서, 아마도 다른 어떤 근대 국가도 환기할 수 없는 강한 강제력을 지니고 있다. p161
일반 행정에서는 주는 죽음에서부터 납세에 이르는 모든 의무를 수행시키는 강제력이 되었다. 징세관, 경찰관, 지방 징병관은 신민이 바치는 주를 매개하는 기관이다.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법률에 복종하는 것은 그들의 최고 의무, 즉 고온皇恩을 갚는 일이다. p161
일본은 서구 여러 나라의 최후 방법인 혁명을 이용하지 않았다. 일본은 또한 적국의 점령군에게 불복종 사보타주를 하지 않았다. 일본은 일본 고유의 강점, 즉 아직 전투력이 분쇄되지 않았는데도 무조건 항복을 수락한다는 막대한 대가를 주로서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능력을 사용하였다. 일본인의 편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히 막대한 지불임에도 틀림없었으나, 그 대신 일본인은 무엇보다 높이 평가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즉, 일본인은 비록 그것이 항복의 명령이긴 했지만 명령을 내린 것은 천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것이었다. 패전에 있어서도 최고의 법은 여전히 주였다. p164
써니: 단지 한사람의 천황의 개인적 실패로 패전을 돌리고 다시 응결할 수 있는 힘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
대의 명분을 천황의 명령에 둔다. 실리를 추구하지 않고 온의 사고에서 오는 주를 선택하고 그들만의 가족/나라를 유지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초월적 의지가 있다. 이 초월성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죽어서는 누구나가 다 신이 된다는 것이다.
죽는 것은 영광이다. 살아서는 계급이 있었지만 죽으면 계급이 사라지고 동등해 지는 것이니 평화가 절로 깃드는 것이다. 죽으면서 영웅이 되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삶이란 왔다가 가는 것, 벌 받는 죽음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예로운 세계가 누구나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의 단죄가 없다. 그러니 구차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수치일 뿐, 이것은 아프가니스탄 등의 종교전쟁과 다르지 않다는 맥락에서 관점을 잡아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제 7장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
일본인이 잘 쓰는 말에 “기리義理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란 기무義務를 갚아야 하는 것처럼 기리를 갚아야 한다. 그러나 기리는 기무와는 종류가 다른 일련의 의무다. p165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법률상의 가족 관계에 앞서서 생각하는 중대한 전통적 기리는 가신의 영주에 대한 또는 전우에 대한 관계이다. 그것은 명예를 생명으로 하는 인간이 그의 윗사람과 그와 계급을 같이하는 동료에 대하여 짊어지는 충절이다. 이 기리의 의무는 수많은 전통적 문예 작품 속에서 칭송되고 있다. 이것은 사무라이의 덕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p170
‘기리를 갚는다’는 것은 자기가 일체의 신세를 지고 있는 주군에게 생명까지도 바친다는 것이었다.
주군이 가신에게 무엇인가 치욕을 주었을 때에는 가신은 당연히, 또는 관례에 따라 자기의 봉직을 버리고, 또 적과 손을 잡은 일조차 있었다. 일본인은 복수의 주제를 죽음을 건 충절과 마찬가지로 흔쾌히 찬양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모두 기리였다. 충절은 주군에 대한 기리였고, 모욕에 대한 복수는 자기 명예에 대한 기리였다. 일본에서 이 두 가지는 동일한 방패의 양면이었다. p173
기리의 규칙은 엄밀히는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하는 갚음의 규칙이다.
일본인은 사람들이 진심에서 자발적으로 관대한 행위를 하는 것을 요구치 않는다. 그들은 사람이 지켜야 하는 까닭을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기리를 모르는 인간’이라 불리고, 세상사람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기리를 따라야 하는 것은 세상의 소문이 무섭기 때문이다. p174
기리는 기무義務와 반드시 구별되어 진다. 기무는 가령 어떤 일을 하더라도 도저히 완전하게는, 아니 완전에 가까운 정도까지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리는 무한정한 것이 아니다. p175
축하연의 경우에도 대체로 손님은 술잔치를 위하여 약간의 술을 지참한다. 그것이 생일 잔치이건 장례식이건, 또는 모내기이건 가옥 건축이건 친목회이건 어떤 경우에도 기리의 교환은 장래의 변제에 대비하여 세밀하게 기록된다. p177
제 8장 오명을 씻는다
이름名에 대한 기리義理란 자기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이다. 그것은 일련의 여러 가지 덕으로 되어 있다. p179
‘분수에 맞는 위치’가 요구하는 잡다한 모든 예절을 계속 지키고, 고통에 임해서는 태연자약한 태도를 나타내며, 전문 직업이나 기능에서는 자기의 명성을 옹호하는 일을 포함한다.
또한 이름에 대한 기리는 비방이나 모욕을 제거하는 행위를 요구한다. p180
타인의 호의에 반응하는 경우와 타인의 경멸이나 악의에 반발하는 경우의 행동이 왜 하나의 덕으로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일본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훌륭한 사람은 모욕에 대해서도 그가 받은 은혜만큼이나 강하게 느낀다. 어느 쪽도 그것에 보답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위이다. 그들은 서구인처럼 이 두 가지를 구별하여 한쪽은 침해 행위, 다른 한쪽은 비침해 행위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어떤 행위가 침해로 인정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기리의 세계’ 밖에서 행해지는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다. p180
보복은 인간의 덕행이지, 인간의 본질적인 약점에 기초한 피할 수 없는 악덕이 아니다. p181
살인자까지도 사정에 따라서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조소만은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고의적인 불성실이 아니고서야 죄 없는 인간을 조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살인자-그는 타인의 육체를 살해한 인간이다. 조소자-그는 타인의 혼과 마음을 살해한 인간이다.
일본인은 항상 별로 상대방에게 싸움을 걸 생각도 없으면서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을 성실치 못한 인간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조소는 무례한 것이며 ‘불성실’의 증거이다.
복수는 누구에게서 모욕이나 패배를 당했을 경우에는 ‘바람직한 대응’으로, 일본의 전통 속에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p198
일본의 윤리에서 기리란 가신이 그의 주군이 죽을 때까지 충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가신이 주군에게 모욕당하였다고 느끼게 되면 갑자기 터무니없는 증오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p201
일본인은 실패나 비방, 배척 때문에 상처받기 쉽다. 따라서 타인을 괴롭히기보다는 너무도 쉽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많다. p202
일본인은 중대한 사명을 꿈꿀 때 권태를 잊는다. 그들은 그 목표가 아무리 원대한 것일지라도 완전히 자취도 없이 권태를 잊어버린다. p203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만일 적절한 방법으로 행해지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하는 구실을 한다. p204 *****자살을 존경하는 일본인
일본인의 영원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쓰여지는 수단은 그때의 사정에 따라 취해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도구들일 뿐이다. 사태가 변하면 일본인은 태도의 변경을 서구인처럼 도덕의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 p211
제 9장 인정의 세계
극단적인 의무의 변제와 철저한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일본의 도덕률은, 당연히 개인적 욕망은 인간의 가슴속에서 제거해야 할 죄악이라고 낙인찍을 것같이 생각된다. 전통적인 불교의 가르침이 그러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의 도덕률이 그처럼 관대하게 오관五官의 쾌락을 허용하고 있는 이중성은 의외라는 느낌을 준다. 일본은 세계 유수의 불교국가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윤리는 이런 점에서 석가 및 불교 경전의 가르침과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일본인은 자기 욕망의 만족을 죄악이라고는 생가가지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이지 않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은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쾌락은 추구되고 존경받는다. 그렇지만 쾌락은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물게 해두어야 한다. 쾌락은 인생의 중대한 사항의 영역을 침입해서는 안 된다. p217
일본인이 가장 즐기는 소박한 육체적 쾌락의 하나는 온욕溫浴이다. p218
잠 또한 일본인이 애호하는 즐거움이다. p221
먹는 것 또한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나 잠자는 것과 마찬가지로 즐거움으로서 크게 향락되는 휴식인 동시에 훈련을 위해 과해지는 수업이기도 하다. 여가 생활로 일본인은 잇따라 요리가 나오는 식사를 즐긴다. p223
일본인은 가족적 의무와 ‘인정’을 공간적으로 구별한다. p227
‘자유의사에 의한 첩’은 가장 무방비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대게는 상대 남자와 연애에 의해 맺어진 관계이지만, 그녀들은 일체의 공인된 의무 세계의 바깥에 놓여 있다.
동성애 또한 전통적인 ‘인정’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p229
일본인은 특히 미국에서 버젓한 남자가 동성애의 수동역을 한다는 데 놀라움을 느낀다. 일본의 성인 남자는 소년을 상대로 선택한다. 성인이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자기들의 위엄에 관계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p229
써니: 이 부분에서 왕짜증 나는 일본 문화
그들은 근엄한 생활 속에서 그것을 하위의 지위로 규정하여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p230
이상과 같은 일본인의 ‘인정’관은 육체와 정신이라는 두 개의 힘이 각자의 생활에서 패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서구의 철학을 근본적으로 뒤엎는다. p231
불교의 철학은 일본에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철저하여,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도덕률은 경전 속에서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청정무구한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견하는 것에 있다고 설명한다. p234
기리. 의무를 벗어나는 해탈에 들어서는 것이다. 자살이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비유럽인 일본과 전쟁을 하면서 일본인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 <국화와 칼>의 집필 배경이 되었다. p396
[해설/ 죄의 문화와 수치의 문화 ]
국화는 일본의 황실을 상징한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을 통해 일본 사람들의 이중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일본 사람들 스스로도 자신들은 앞에 내세우는 얼굴과 속마음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 <국화와 칼>은 그것을 서양인이 썼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저작임에 분명하다. 또한 일본에 대해 상당히 대담하게 이야기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p396
일본 사람들은 충과 효를 같은 의식선상에 둔다. 충과 효가 대치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일본인들은 충을 선택하지만, 우리는 효를 선택한다. 일본인의 강점은 단결을 잘하고 우리는 국가라는 공적인 개념에 충성하지 못한다. p398
고아가 되어버린 우리문화p400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은 단독 상속이다. 모든 재산은 큰 아들에게 집중된다.
일본의 가족제도는 대나무 같이 한 가닥, 한 가닥으로 내려가고 우리는 소나무같이 줄기와 가지가 있다. p402
상속 제도에서 일본과 우리는 큰 차이가 있다. 일본은 아들들이 시원치 않으면 아들 이외에 ‘아토토리’를 결정한다. 사위나 조카 혹은 친인척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아토토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엄청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근대 사회와 봉건 사회의 차이점은 생득지위와 성취지위라는 점이다. p402
일본은 일단 ‘아토토리’가 되면 자신의 본가와는 관계를 끊어버린다. p403
3. 내가 저자라면
1. 캐세키문화/ 무서운 똥과 더러운 똥에 대한 단상
저자는 일본을 대국이라고 했다. 나는 일본이 부자 나라고 무기가 많으며 경제적 동물인 강국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대국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다. 이런 생각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내 의식의 저변에는 이러한 생각들이 깊게 깔려 있는 듯하다.
일본은 엄연히 우리나라를 짓밟고 사죄할 줄 모르는 야만적인 나라이다. 한마디로 병신 같으니까 당했지 않느냐고 치부해 버린다. “누가 당하래?”라는 식의 이 따위의 논조가 나는 정말 싫고 납득되지 않는다. 그들의 봉건적 문화와 사상적 계급체계는 뭐가 그리 잘나서 사람이 사람 위에 서고 보려 했던 것인지가 나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책을 읽는 내내 니들이 이런 사상을 갖고 있으니까 우리를 침략하고 말살하고 그랬던 것이지 하고 울분이 치민다. 하다못해 그들이 연장자를 내세우며 절대 복종을 외치는 모습에서는 어이가 없다. 물론 그것은 이들만의 문화는 아니다. 그러나 그 족적이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공산주의와는 합쳐도 일본과는 손잡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제고 자기들은 항상 예외의 족속들이라고 우겨댈 테니까. 얄미운 나라 일본.
이들은 강력한 통치를 빙자해서 자기보다 아래거나 부족한 상대에게는 절대 복종의 개가 되면 밥은 먹여주겠다는 식이지 않은가? 춤을 추어 웃겨주면 팁을 주겠다는 속셈이 아닌가? 죽어도 영웅대접을 받고 죽겠다는 개수작이 아니냐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속으로 “뭐 이런 개**들이 다 있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거지 같은 문화가 우리들에게도 강요된 것이야, 동양의 한 사상인가를 의심을 하면서 읽어야 했다. 문득 드는 생각은 중국이 무서운 똥이라면 일본은 더러운 똥이라는 느낌이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속담을 예로 들면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피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오늘날 과연 무서운 것과 피하는 것의 차이를 다르게 설명 할 수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적잖이 의문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차근히 생각해 보면, 이 책은 다분히 미국적인 시야의 견지에서 판단하며 쓰여졌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따라서 이 한권의 책을 읽고 오늘날의 일본을 가타부타할 수 없을 성 싶다. 왜? 우리보다 많은 면에서 잘난 것이 확실하다고 여겨지니까.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우리보다 잘났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흔히들 말하는 경제대국이라는 점을 무시 못 해서 일 것이다. 잘사니까. 그들의 도덕성이야 어떻든 지금 잘 살아서 세계를 주름잡고 있으니까, 그렇지 못한 우리는 TV 게그 프로 에서나 처럼 “아, 네에....... .”하고 입을 꼭 다물고 그들에게 따지기는커녕, 연신 굽신거려야만 하는 것인지 답답하다.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20여 년 전 이어령씨가 쓴 축소지향인의 일본인 이후 나는 일본에 관한 책은 처음이다. 무지스럽게도 시시껄렁한 영화나 몇 편 보았을까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별로 감동적인 기억이 없다. 여행은 엔화가 너무 비싸서 가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언젠가 가볼 생각은 있다. 얼마나 잘났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 보다 잘난 점들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 나의 양심이다.
너무 웃기는 리뷰가 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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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날짜가 넘어가 버렸네요. 하다보니 시간을 넘겨서요. 민선아, 10분 봐주지?^^
위에 3. 내가 저자라면이 좀 너무 짧은 것 같아서 덧붙입니다.
하나, 이 책의 탄생 배경
첫째, 노골적인 목적 :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 6월 미국무부의 위촉을 받게 된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을 방문한 적 없이 일본을 연구하여 이 책 <국화와 칼>을 저술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일본 문화의 특성을 ‘국화’와 ‘칼’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상징으로 표현하며, 평균적인 일본인(average Japanese)의 행동과 사고思考의 틀(Pattern)을 탐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일본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계층 제도(hierarchy)의 면밀한 분석을 통해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질서와 충동을 살펴보고자 하였던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인은 미국이 지금까지 전력을 기울여 싸운 적 가운데 가장 낯선 적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미국의 대의명분과 저자의 문화 인류학자로서의 학문적 접근
이 책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고 느껴진다. 미국무성은 일본을 전략적으로 해부하여 전쟁에서 이기고 싶었던 것이지만,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학문적인 노작으로 승화시켜 이 책을 완성한 점이 무엇보다 돋보인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이 약간 부실하게 느껴지고 더군다나 오늘날에 읽히기에 다소 걸맞지 않게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명실공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여성 작가 특유의 관찰력과 섬세함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의 고유성을 세계 인류학사의 측면에서 접근하여 인식시키고, 이들 문화와 사상이 갖는 다른 문화들과의 '차이'와 '다름'을 학문의 전문적인 영역에서 비교 분석하여 고찰하여 나간점이 훌륭하다고 하겠다. 더군다나 책 등의 간접적인 통로를 이용하여 행동양식 등의 직접적인 양상을 구체적으로 포착하고 모색하여 나간점은 특기할 만 하다.
『문화의 비교 연구도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생활양식을 세계에서 유일한 해결법으로 믿고 그것의 방어에만 급급해 하는 한 도저히 큰 성과를 거둘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들은 다른 생활양식을 알게 됨으로써 자기 자신의 문화를 더 깊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즐겁고 풍부한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있다.』 p26
두울, 이 책이 말하는 특이체질의 변화무쌍한 일본인들의 특징
첫째, 무항복주의의 일본인
일본인들은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그들만의 기질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전쟁에서 미국이나 서구 열강 세력들이 함부로 접근조차 할 수 없도록 철저한 무항복주의無降伏主義를 선언하며, 죽기를 무릅쓰고 전투를 벌임으로서 상대를 질려버리게 하여, 마침내 자신들의 입지는 탄탄하게 확보하고야 마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은 최고도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는 범죄의 유혹에 빠지고 만다. 그들의 병사는 철저히 훈련되지만 또한 반항적이다.』p11
* 겉 다르고 속 다른 일본인들의 탄력성과 유연성
또한 작은 일본인들이 명치유신이후 근대화를 촉진시켜가며 오늘날 경제대국, 문화 강국을 이룩하여 세계를 강타하며 선진대열에서 기엄을 토하게 된 것의 기반이, 바로 이러한 일본인 들의 탄련성있는 이중적 사고에 기반한 보편적 유연함이 아니겠나 생각하여 본다. 이 점을 우리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우리만의 흥과 멋으로 승화해서 말이다.
둘째, 귀족주의의 계층적구조로 인한 각자에게 적합한 위치 갖기
일본은 이런 계층적 신분구조를 통해 지배와 피지배를 구별하며 절대적 복종체제를 유지하였다. 나는 이 부분에서 약간의 반감을 가진다. 왜냐하면 아직도 이들 문화의 곳곳에는 이러한 사상이 깔려있는 듯 해서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예의 바르고 상냥한 일본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속으로는 항상 상대를 의식하여 도사리며 언제나 자신들의 위치를 상대보다 우위에 두려고 호심탐탐 노리거나,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아쉬울 것이 없겠다 싶으면 굴복시켜 자신들의 손아귀 안에서 놀게 하려는, 비인격적인 인관관계를 바닥에 깔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황국의 상징으로서 국화를 내세우는데, 그들의 국화로 알려진 꽃보다 강인한 의지의 상징인 국화를 자신들의 국화보다 더 사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겹겹이 싸여진 그들만의 벗겨지지 않는 정체성의 상징은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해보며 철의 장막과도 같이 철저하게 가려진 이들 문화의 이중성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일본은 근래 두드러지게 서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귀족주의적인 사회다. 사람들과 인사하고 접촉할 때는 반드시 서로간의 사회적 간격의 성질과 정도를 암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에게도 가는 많은 태평양 여러 민족과 같이 ‘경어’가 있다.』 p64
셋째, 영원한 은혜와 복종을 유도하는 “기무”와 “기리”의 표表와 리裏
* 기무義務 :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코 그 전부를 같을 수 없고 또 시간적으로도 한계가 없는 의무(obligation)이다.
* 기리義理 : 자신이 받은 은혜와 같은 수량만을 갚으면 되고, 또 시간적으로도 제한된 부채.
기리와 기무는 일본인들의 가장 일본적인 사상으로서, 일본인들을 영원히 일본이라는 나라에 충성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만이 존재의미를 부여 받는 것처럼 생각되게 하며, 모든 것에 앞서 나라에 충성함을 가장 큰 덕행으로 삼게 하여, 통치이념과 체제유지 기반의 초석이 되도록 하였다고 생각된다.
넷째, 그들만의 상징 천황제도는 바로 신적 존재의미와도 같다
* 일본인들이 단지 한사람, 천황의 개인적 명령으로 패전의 명분을 삼고 다시 응결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들은 대의명분을 천황의 명령에 두며, 실리를 추구하지 않고 혹은 실리추구를 취하기보다 온의 사고에서 오는 주를 선택하고, 그들만의 가족과 나라를 유지하는 독특한 체제방식으로 다진다. 이들에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초월적 의지가 서려있기도 하다.
* 이 초월성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죽어서는 누구나가 다 신이 된다는 것이고 신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패전이나 항복의 비굴한 삶을 선택하기보다 죽는 것이 차라리 영광일 수 있게 한다. 이들의 신사참배는 살아서는 계급이 있었지만 죽으면 계급이 사라지고 동등해 지는 것이니 평화가 절로 깃드는 것이리라 생각되게 한다. 죽으면서 영웅이 되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들의 종교관에서 일본식 불교는 삶이란 왔다가 가는 것, 벌 받는 죽음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예로운 세계가 누구나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유일 사상에서와 같은 더 이상의 단죄가 없다. 그러니 구차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수치일 뿐이 된다. 그리하여 이들은 공원에 가듯 항상 가깝고 자유롭게 그들의 종교관이 생활 속에 녹아 스며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혼란시 큰 힘을 발휘하고 이들만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이점은 아프가니스탄 등의 종교전쟁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보게도 한다.
『천황은 이처럼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하여 국내의 정쟁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에 놓여진 상징이 되어 있었다. 성조기에 대한 충성이 일체의 정당 정치를 초월한 영역에 있는 것과 같이, 천황은 ‘침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인은 더 없는 상징성을 지닌 인간을 철저하게 활용하였다.』 p160
다섯째, 강요된 무사정신의 발로인 그들의 선택 할복 혹은 자살
일본인들은 과연 자살을 존경하는 것일까?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만일 적절한 방법으로 행해지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하는 구실을 한다.』 p204
세엣, 역시 야만인, 왕짜증나게 하는 일본문화
『일본인은 특히 미국에서 버젓한 남자가 동성애의 수동역을 한다는 데 놀라움을 느낀다. 일본의 성인 남자는 소년을 상대로 선택한다. 성인이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자기들의 위엄에 관계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p229
이러한 풍속은 미국이 일본을 저속한 야만인으로 모함하여 오도된 폭로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개인적으로 문화의 차이와 다름이라고 인식하기에 힘들다.
또한 성애에 이르러서까지도 철저하게 권위를 내세우며 주종의 관계를 유지함이 몹시 얄굿다. 사랑과 성애를 철저히 구분하여 남성의 잇속만 차리려는 태도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묻지 마 관광에 참여하여 이상한 뒷골목 문화를 퍼뜨리는 것을 사절하고 싶다. 욕구와 사랑은 다른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욕구와 책임은 무관하다는 식의 인식에 동조가 안 된다. 사랑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의 향락이나 쾌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상대를 배려하는 기품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네엣, 우리는, 고아가 아니다. 우리의 숙원과 과제 “COREANITY”
우리를 대표할 우리만의 문화는 무엇인가? 동방의 작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문화와 사상은 과연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번에는 저자 장파의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을 접하며 중국문화의 위대성 같은 것에 솔직히 우리문화의 쪼그라듦 같은 것을 느꼈다면, 이번 <국화와 칼>을 읽으면서는 다른 나라나 서구에서는 과연 우리 대한민국의 문화와 사상을 무어라고 인식하고 있을 지가 자못 궁금한 가운데, 한편으로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면 다만 나의 공연한 기우가 될까?
위에 3. 내가 저자라면이 좀 너무 짧은 것 같아서 덧붙입니다.
하나, 이 책의 탄생 배경
첫째, 노골적인 목적 :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 6월 미국무부의 위촉을 받게 된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을 방문한 적 없이 일본을 연구하여 이 책 <국화와 칼>을 저술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일본 문화의 특성을 ‘국화’와 ‘칼’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상징으로 표현하며, 평균적인 일본인(average Japanese)의 행동과 사고思考의 틀(Pattern)을 탐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일본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계층 제도(hierarchy)의 면밀한 분석을 통해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질서와 충동을 살펴보고자 하였던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인은 미국이 지금까지 전력을 기울여 싸운 적 가운데 가장 낯선 적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미국의 대의명분과 저자의 문화 인류학자로서의 학문적 접근
이 책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고 느껴진다. 미국무성은 일본을 전략적으로 해부하여 전쟁에서 이기고 싶었던 것이지만,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학문적인 노작으로 승화시켜 이 책을 완성한 점이 무엇보다 돋보인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이 약간 부실하게 느껴지고 더군다나 오늘날에 읽히기에 다소 걸맞지 않게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명실공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여성 작가 특유의 관찰력과 섬세함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의 고유성을 세계 인류학사의 측면에서 접근하여 인식시키고, 이들 문화와 사상이 갖는 다른 문화들과의 '차이'와 '다름'을 학문의 전문적인 영역에서 비교 분석하여 고찰하여 나간점이 훌륭하다고 하겠다. 더군다나 책 등의 간접적인 통로를 이용하여 행동양식 등의 직접적인 양상을 구체적으로 포착하고 모색하여 나간점은 특기할 만 하다.
『문화의 비교 연구도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생활양식을 세계에서 유일한 해결법으로 믿고 그것의 방어에만 급급해 하는 한 도저히 큰 성과를 거둘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들은 다른 생활양식을 알게 됨으로써 자기 자신의 문화를 더 깊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즐겁고 풍부한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있다.』 p26
두울, 이 책이 말하는 특이체질의 변화무쌍한 일본인들의 특징
첫째, 무항복주의의 일본인
일본인들은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그들만의 기질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전쟁에서 미국이나 서구 열강 세력들이 함부로 접근조차 할 수 없도록 철저한 무항복주의無降伏主義를 선언하며, 죽기를 무릅쓰고 전투를 벌임으로서 상대를 질려버리게 하여, 마침내 자신들의 입지는 탄탄하게 확보하고야 마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은 최고도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는 범죄의 유혹에 빠지고 만다. 그들의 병사는 철저히 훈련되지만 또한 반항적이다.』p11
* 겉 다르고 속 다른 일본인들의 탄력성과 유연성
또한 작은 일본인들이 명치유신이후 근대화를 촉진시켜가며 오늘날 경제대국, 문화 강국을 이룩하여 세계를 강타하며 선진대열에서 기엄을 토하게 된 것의 기반이, 바로 이러한 일본인 들의 탄련성있는 이중적 사고에 기반한 보편적 유연함이 아니겠나 생각하여 본다. 이 점을 우리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우리만의 흥과 멋으로 승화해서 말이다.
둘째, 귀족주의의 계층적구조로 인한 각자에게 적합한 위치 갖기
일본은 이런 계층적 신분구조를 통해 지배와 피지배를 구별하며 절대적 복종체제를 유지하였다. 나는 이 부분에서 약간의 반감을 가진다. 왜냐하면 아직도 이들 문화의 곳곳에는 이러한 사상이 깔려있는 듯 해서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예의 바르고 상냥한 일본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속으로는 항상 상대를 의식하여 도사리며 언제나 자신들의 위치를 상대보다 우위에 두려고 호심탐탐 노리거나,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아쉬울 것이 없겠다 싶으면 굴복시켜 자신들의 손아귀 안에서 놀게 하려는, 비인격적인 인관관계를 바닥에 깔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황국의 상징으로서 국화를 내세우는데, 그들의 국화로 알려진 꽃보다 강인한 의지의 상징인 국화를 자신들의 국화보다 더 사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겹겹이 싸여진 그들만의 벗겨지지 않는 정체성의 상징은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해보며 철의 장막과도 같이 철저하게 가려진 이들 문화의 이중성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일본은 근래 두드러지게 서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귀족주의적인 사회다. 사람들과 인사하고 접촉할 때는 반드시 서로간의 사회적 간격의 성질과 정도를 암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에게도 가는 많은 태평양 여러 민족과 같이 ‘경어’가 있다.』 p64
셋째, 영원한 은혜와 복종을 유도하는 “기무”와 “기리”의 표表와 리裏
* 기무義務 :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코 그 전부를 같을 수 없고 또 시간적으로도 한계가 없는 의무(obligation)이다.
* 기리義理 : 자신이 받은 은혜와 같은 수량만을 갚으면 되고, 또 시간적으로도 제한된 부채.
기리와 기무는 일본인들의 가장 일본적인 사상으로서, 일본인들을 영원히 일본이라는 나라에 충성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만이 존재의미를 부여 받는 것처럼 생각되게 하며, 모든 것에 앞서 나라에 충성함을 가장 큰 덕행으로 삼게 하여, 통치이념과 체제유지 기반의 초석이 되도록 하였다고 생각된다.
넷째, 그들만의 상징 천황제도는 바로 신적 존재의미와도 같다
* 일본인들이 단지 한사람, 천황의 개인적 명령으로 패전의 명분을 삼고 다시 응결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들은 대의명분을 천황의 명령에 두며, 실리를 추구하지 않고 혹은 실리추구를 취하기보다 온의 사고에서 오는 주를 선택하고, 그들만의 가족과 나라를 유지하는 독특한 체제방식으로 다진다. 이들에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초월적 의지가 서려있기도 하다.
* 이 초월성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죽어서는 누구나가 다 신이 된다는 것이고 신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패전이나 항복의 비굴한 삶을 선택하기보다 죽는 것이 차라리 영광일 수 있게 한다. 이들의 신사참배는 살아서는 계급이 있었지만 죽으면 계급이 사라지고 동등해 지는 것이니 평화가 절로 깃드는 것이리라 생각되게 한다. 죽으면서 영웅이 되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들의 종교관에서 일본식 불교는 삶이란 왔다가 가는 것, 벌 받는 죽음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예로운 세계가 누구나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유일 사상에서와 같은 더 이상의 단죄가 없다. 그러니 구차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수치일 뿐이 된다. 그리하여 이들은 공원에 가듯 항상 가깝고 자유롭게 그들의 종교관이 생활 속에 녹아 스며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혼란시 큰 힘을 발휘하고 이들만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이점은 아프가니스탄 등의 종교전쟁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보게도 한다.
『천황은 이처럼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하여 국내의 정쟁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에 놓여진 상징이 되어 있었다. 성조기에 대한 충성이 일체의 정당 정치를 초월한 영역에 있는 것과 같이, 천황은 ‘침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인은 더 없는 상징성을 지닌 인간을 철저하게 활용하였다.』 p160
다섯째, 강요된 무사정신의 발로인 그들의 선택 할복 혹은 자살
일본인들은 과연 자살을 존경하는 것일까?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만일 적절한 방법으로 행해지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하는 구실을 한다.』 p204
세엣, 역시 야만인, 왕짜증나게 하는 일본문화
『일본인은 특히 미국에서 버젓한 남자가 동성애의 수동역을 한다는 데 놀라움을 느낀다. 일본의 성인 남자는 소년을 상대로 선택한다. 성인이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자기들의 위엄에 관계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p229
이러한 풍속은 미국이 일본을 저속한 야만인으로 모함하여 오도된 폭로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개인적으로 문화의 차이와 다름이라고 인식하기에 힘들다.
또한 성애에 이르러서까지도 철저하게 권위를 내세우며 주종의 관계를 유지함이 몹시 얄굿다. 사랑과 성애를 철저히 구분하여 남성의 잇속만 차리려는 태도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묻지 마 관광에 참여하여 이상한 뒷골목 문화를 퍼뜨리는 것을 사절하고 싶다. 욕구와 사랑은 다른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욕구와 책임은 무관하다는 식의 인식에 동조가 안 된다. 사랑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의 향락이나 쾌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상대를 배려하는 기품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네엣, 우리는, 고아가 아니다. 우리의 숙원과 과제 “COREANITY”
우리를 대표할 우리만의 문화는 무엇인가? 동방의 작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문화와 사상은 과연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번에는 저자 장파의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을 접하며 중국문화의 위대성 같은 것에 솔직히 우리문화의 쪼그라듦 같은 것을 느꼈다면, 이번 <국화와 칼>을 읽으면서는 다른 나라나 서구에서는 과연 우리 대한민국의 문화와 사상을 무어라고 인식하고 있을 지가 자못 궁금한 가운데, 한편으로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면 다만 나의 공연한 기우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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