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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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대하여
나탈리 골드버그는 작가이자 글쓰기 강사이다. 1986년 자신만의 독특한 글쓰기 철학이 담긴 이 책을 내 놓은 이후 미국인들의 글쓰기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이 책은 백만부의 판매를 기록하면서 전세계 9개 국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글쓰기를 통해 '진정한 창조'가 어떤 것인지를 이론이 아닌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해 주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그의 글들은 살아있음을 느낀다. 작가의 주장처럼 살아있는 글쓰기를 몸소 보여 주는 훌륭한 선생이다.
그녀는 이 책 속에서 때로는 용맹한 전사처럼, 때로는 깊은 통찰력을 가진 현자처럼 삶과 글쓰기의 진실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지난 25년 간 선(禪)명상과 접목한 그녀만의 독특한 글쓰기 노하우를 주제로 나탈리는 수많은 세미나를 열어 왔다. 이 글쓰기 워크숍을 통해 삶의 큰 변화를 경험한 세계인들에게 그녀는 위대한 글쓰기 스승으로 명성이 높다. 나탈리가 말하는 창의력의 비밀은 글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기의 법칙'이다. 이러한 그녀만의 독특한 기술은 '비워내기' 과정을 강조하는 선 명상 체험을 통해 얻어진 결실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작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지식을 나누어 주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보다는 작가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기 위해 글을 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 차단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수용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집중력을 가져야 한다.[5]
언젠가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네가 사랑을 믿을 때만이, 사랑이 네가 가야할 길을 이끌어 주는 법이지.” 나는 여기에 조금 덧붙이고 싶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믿음을 갖고 계속해서 밀고 나갈 때만이, 그 일이 자신이 가야 할 길로 이끌어 주는 법이지.”[16]
어디서 누구를 가르치든 나는 항상 똑같은 방법론을 주장한다. 바로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이 경험한 인생에 대한 확신을 키워나가야 한다’ 는 말이다. 이 말은 아무리 반복해도 싫증이 나지 앓을뿐더러 나 자신을 더욱 높은 이해의 경지로 끌어올린다.[16]
수업을 할 때 나는 학생들에게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라’ 고 요구한다. 자기 마음의 본질적인 외침을 적으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여러분, 분명하고 아주 솔직하게 써야 해요” 라는 말만 던져 버린다면 그것은 선생이 아니다.[18]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은 긴장을 풀고, 몸과 마음 전체로 이 책을 흡수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읽는 데서 끝내지 말라. 부디 써라. 그리고 자신을 믿어라. 자신의 요구가 무엇인지 배우라.[18]
두 달 전에 꽤 괜찮은 글을 썼다고 해서 앞으로도 좋은 글을 쓴다는 보장은 없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글을 써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글쓰기는 매번 지도 없이 떠나는 새로운 여행이다.[19]
첫 생각은 에고 또는, 우리를 통제하려고 드는 논리적인 메커니즘(세상은 영구불변하며,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에 얽매이지 않은 생각이다. 세계는 불변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자신의 의식 차원을 넘어선 글을 쓸 때, 그것은 있는 그대로 사물의 진실을 나타낸 것이 된다. 그래서 이런 글은 에너지가 넘칠 수밖에 없다. 글쓰기를 가로막던 ‘에고’ 라는 짐을 벗어 던지는 순간 당신은 더 큰 조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27]
훈련은 공연에 앞서 무용수가 몸을 풀고, 시합 전 육상 선수가 스트레칭을 하는 것과 똑같다. 육상 선수라면 “난 어제 뛰었어. 그러니 오늘은 워밍업을 할 필요가 없어” 라고 말하지 않는 법이다. 그들은 달리기를 위해 매일같이 몸을 풀고 스트레칭을 한다.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글도 많이 쓰면 쓸수록 실력이 향상된다.
또, 육상 선수들은 달리기가 힘들고 지겨워져도 달리는 행위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연습을 쉬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서 계속 달리고 싶게 만드는 뜨거운 열망이 찾아올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더구나 열망은 절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거나 회피하는 사람에게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31]
만약 당신의 모든 것이 진정 글쓰기에 실려 있다면, 거기에는 글을 쓰는 사람도 없고, 종이도 없고, 펜도 없고, 생각도 없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직 글쓰는 행위만이 글을 쓰고 있게 된다.[33]
나는 한 달에 노트 한 권 정도는 채우려고 애를 쓴다. 글의 질은 따지지 않고 순전히 양만으로 내 직무를 판단한다.[54]
우리는 글이 안 써질 때도 무조건 계속해서 글을 써야만 한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죄의식과 두려움, 무력감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만 있다면, 어떤 글이든지 쓰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55]
바람직하지 않은 정신 자세로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글쓰기를 배운답시고 쓸데없이 대가들과 문학 강의를 좇아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진실은 아주 간단하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바깥에서는 어떤 배움의 길도 없다. 당신이 훌륭한 대가를 열 사람이나 만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글쓰기를 배우지 못한다.[64]
내가 만들어낸 시는 그 시를 쓰고 있을 때의 내 생각, 내 손, 나를 둘러싼 공간과 내가 느낀 감정들일 뿐이다.
스스로 속지 않도록 경계하라. 시시각각 우리는 변한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변한다는 사실, 이것처럼 좋은 기회도 없다. 우리는 한 순간에 얼어붙어 있던 자신과 자신의 이상으로부터 빠져 나와 신선하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이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우리를 동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흐르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66, 67]
은유란 논리나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그와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부터 비롯된다. 은유를 위해서는 사물을 바라보던 익숙한 시각에서 기꺼이 벗어나야 한다. 개미 한 마리와 코끼리 한 마리 안에서 공통된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거리낌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71, 72]
은유를 위한 은유를 하지 말라. 무언가를 은유하기 위해 당신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저 평소의 사고 방식에서 한발 물러서서 머릿속을 지나가는 생각들을 계속 기록해 보라. 이런 연습은 사고를 부드럽게 해 줄 뿐 아니라 창조력을 키워 준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생각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엄청난 도약을 하게 된다. 마음이란 순식간에 위대한 도약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72]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절대 자신의 에고를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대로 연출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그저 하나의 인간 존재임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나는 글쓰기가 종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당신이 쓰고 있는 딱딱한 껍질을 벗기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다가가도록 한다.[75, 76]
작가의 임무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삶을 이루는 실체들에 대해 경건하게 “네!” 라고 긍정하는 것이다.[86]
삶의 모든 세부 사항들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다정하게 접촉하라. 당신을 둘러싼 것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라. 강에 대해 쓰고 있다면 그 강에 온몸을 적시라. 그 강이 탁한 황토 빛으로 둔하게 흐른다고 적는다면 당신의 몸이 그 탁한 느낌을 그대로 느껴야 한다. 글쓰기에 깊이 빠져들면 쓰는 사람과 글은 분리되지 않는다.
카타기리 선사는 말했다.
“좌선을 할 때 당신은 사라져야 한다. 좌선이 좌선을 하도록 만들어라.”
이것이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당신은 그저 당신 속에서 흐르고 있는 생각들을 글로 적어 내고 있을 뿐이다.[88]
“아주 맛있어요, 일품이야!” 라는 말에는 에너지가 없다. 어떻게 대단한 것인가? 독자에게 그 대단함의 냄새를 맡게 하라. 바꿔 말해서 세부 묘사를 이용하라. 세부 묘사야말로 글쓰기의 기본 요소이자 단위다.[90]
작가는 인생을 두 배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먼저 첫 번째 인생이 있다. 길에서 만나는 여느 사람들처럼, 건널목을 건너고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넥타이를 매는 그런 일상생활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생활의 또 다른 부분이 있다. 모든 것을 다시 곱씹는 두 번째 인생이다. 이들은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마다 자신의 인생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 모습을 면밀하게 음미한다. 삶을 이루고 있는 재질과 세부 사항을 들여다본다. [91]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조금 어수룩한 바보가 되어도 괜찮다. 당신 속에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느림보가 들어 있다. 그 느림보가 당신이 모든 것을 팔아버리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당신에게 어디론가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이마에 주룩주룩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며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응시하게 만든다.[92, 93]
진짜 글쓰기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껌을 씹지 않는다. 대신에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린다. 그리고 호흡이 아주 깊어진다. 글을 쓰는 손은 느슨해지고, 그들의 몸은 몇 킬로미터를 내처 달려도 좋을 만큼 잘 이완되어 있다.[95]
글쓰기 역시 90퍼센트는 듣기에 달려 있다. 열심히 들으면 당신을 채우고 있는 내면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자연히 나중에 글을 쓸 때, 당신의 그 내면의 소리를 저절로 분출시킬 수 있게 된다. 내면의 진실한 소리를 듣게 된다면, 글쓰기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 없다. 당신은 그저 식탁 건너 편에서 당신에게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곳의 분위기가 내는 소리와 의자와 문이 말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문 너머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도.[98. 99]
듣는 것은 곧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이 더 깊이 들으려 하면 할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이 가는 길을 받아들일 때 그 사물에 대한 진실한 글이 태어난다. 만약 당신이 사물의 이치를 잡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글을 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은 셈이다.[99]
좋은 작가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많이 읽고, 열심히 들어 주고, 많이 써 보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냥 단어와 음향과 색깔을 통해 감각의 열기 속으로 뛰어들어가라. 그리고 그 살아 있는 느낌이 종이 위에 생생히 옮겨지도록 계속 손을 움직이라.[100]
위대한 선승 도겐은 “안개 속을 걷는 사람은 안개에 젖는다” 고 했다. 그러니 그저 듣고, 읽고, 쓰라. 당신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조금씩 당신만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너무 조바심을 내지 말고 그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 그냥 흐르는 대로 운율에 맞춰 노래하고 쓰라.[101]
문학의 책임은 사람들을 깨어 있게 하고, 현재에 충실하게 하고, 살아 숨 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방황한다면, 독자 역시 방황하게 된다.[103]
작가인 우리는 늘 의지할 것을 찾아다닌다. 동료들로부터, 비평가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안심하려 든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이나 작품에 대해 보내는 타인의 칭찬에 기대어 살아가는 한, 그 작가는 다른 이들의 비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보다는 우리의 근원적인 원조자에 대해 아는 편이 작품성을 높이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우리는 이미 매 순간 무엇엔가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서 있는 대지, 폐를 채우고 비우는 공기....., 이 모두가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질 때 그 대상을 멀리서 찾지 말라. 바로 지금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 아침의 침묵, 이런 것들로부터 시작하라. 그런 다음 마주 보고 있는 친구가 “난 네 작품이 너무 사랑스러워” 하고 말하면 그 좋은 기분을 그저 간직하면 된다. 대지와 의자가 당신 몸을 쓰러지지 않게 받쳐 준다는 사실을 믿는 것처럼 그 친구의 말을 그대로 믿어라.[106, 107]
우리는 정직한 지원과 격려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막상 누군가 칭찬을 해 주면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비평하는 소리를 들으면,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고 결국 자신은 별볼일 없고 진짜 작가도 못 된다는 쓸데없는 믿음만 키워가려 한다.[108]
누군가 당신을 칭찬해 준다면, 정말 그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무리 그런 일이 익숙하지 않고 계면쩍더라도. 계속 숨을 들이마시고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칭찬을 받는 것이 이렇게도 좋다는 것을 반드시 느껴 보아야 한다. 작가가 되려면, 자신을 향한 긍정적이고 솔직한 격려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여유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하니까.[109]
‘나는 개를 본다’ 라는 문장이 있다. 여기서 ‘나’는 우주의 중심이다. 이러한 문장 구조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내가 개를 보고 있는 동안 개도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 버린다. 우리의 사고 방식은 문장 구조에 맞추어져 있고 사물을 보는 관점도 그 안에서 제한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방식이 ‘주어-동사-목적어’의 틀에 짜맞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이런 문장론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고, 신선한 세상과 만날 수 있으며, 글쓰기에 색다른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다.[114]
‘나는 엉겅퀴 하나를 먹었다’ 라는 문장을 썼다고 치자. 이 문장 때문에 당신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일상적인 문장 구조를 넘어서서 엉겅퀴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엉겅퀴가 당신을 영원히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16]
글쓰기에 관련된 오래된 속담이 하나 있다. ‘말하지 말고 보여 주라’ 는 말이다. 무슨 뜻인가? 이것은 이를테면 분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 무엇이 당신을 분노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라는 뜻이다. 당신 글을 읽은 사람이 분노를 느끼게 하는 글을 쓰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에게 당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말고, 상황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정의 모습을 그냥 보여 주라는 말이다.[117]
작가는 슬픔과 기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독자의 마음을 슬픔과 기쁨의 골짜기로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117]
당신이 숨결을 느낄 수 없는 글은 당신이 그 글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119]
고유성을 허락하라. 그냥 ‘과일’이라고 말하지 말라. ‘이것은 석류 열매다’ 처럼 어떤 종류의 과일인지 분명히 밝혀 주라. 사물의 이름을 불러 주어 그 사물의 고유성을 만들어 주라.[120]
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근원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우리 마음속 흐릿한 부분이 선명해지면서 이 지상의 삶에 더 튼튼한 줄을 이어 주기 때문이다.[121]
사물들 속으로 파고들라. 새 꽃, 치즈, 트랙터, 자동차, 비행기..... 이 모든 것의 이름을 배우라. 작가는 건축가이자 프랑스 요리사이며, 농부여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작가는 이런 것 중 어느 것도 아니어야 한다.[123]
우리는 모든 것이 이미 평범함과 비범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열릴 때도 있고 닫힐 때도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이다. 세부 묘사는 무엇이 좋고 무엇은 나쁘다라는 식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이 세부 묘사의 본질이다.[128]
모든 사물을 올바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깊이 들어가야만 한다. 그 다음에는 세부 묘사가 독자의 눈 앞에 그러한 현실을 창조할 것이다.[128]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 지구를 위해, 텍사스를 위해, 지난 밤 우리의 끼니를 위해 생명을 바친 병아리를 위해, 각자의 어머니를 위해, 고속도로와 나무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친절하게 대할 책임이 있다. 먼저 자신에게 친절할 때에만 세상을 친절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글쓰기를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글쓰기를 대하는 올바른 눈이 떠질 때 우리는 세부 묘사를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모든 진실을 반영시키는 것으로 다루게 된다.
카타기리 선사는 말했다.
“찻잔 하나에도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이 찻잔 또는 바위 언덕, 하늘이나 개미에 대한 글을 쓰고 있을 때 그 대상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 대상들에게 선의의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사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되고, 글쓰기를 통해 초월적인 세계로 도약할 수 있게 된다.[130]
작가는 모든 소문과 지나가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책임이 있다. 이야기꾼은 이런 방식으로 인생을 배워 나간다.[132]
우리가 글쓰는 방법을 배우는 이유는 누군가를 심판하거나 탐욕과 질투를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경탄하고 애착을 가지기 위해서다.[132]
말하기는 혼자서 펜과 종이만을 상대로 보내야 하는 길고 긴 창작의 시간에 앞서 하는 준비운동이다. 당신이 수없이 누군가에게 말했던 이야기들을 목록으로 만들어보라. 그것으로 글쓰기의 많은 부분은 이미 이루어졌다.[134]
글쓰기는 공동체의 산물이다. 일반인들의 믿음과는 정반대로 작가는 절대 불을 지키기 위해 홀로 싸우고 있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다. 그래서 글 쓰는 사람은 완전히 혼자만의 고유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면, 나는 솔직히 아주 화가 난다.[135]
우리는 앞서 있었던 모든 작가들의 짐을 나르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역사, 이념 그리고 대중문화 모두를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글쓰기 안에 용해되어 나타나는 것이다.[136]
다른 작가들을 나와 ‘분리된’ 존재로 여기지 말라. “그들은 훌륭한데, 나는 형편없어” 식의 이분법적인 생각도 하지 말라.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의 작품은 좋아지기 힘들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나만 훌륭하고 나머지는 모두 형편없는 글쟁이들이야.” 이런 지나친 자만심으로는 절대 훌륭한 작가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당신 작품에 대한 비평에도 귀를 막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들도 훌륭하고 나도 훌륭하다” 라고 말하자. 이 말은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 준다. “그들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어. 그러니까 나는 잠시 그들의 경로를 따라 가면서 배우면 돼.” 얼마나 솔직하고 마음 편한 고백인가.[137]
우리는 더 큰 사람이 되어 두 팔로 세계 전체를 담는 글을 써야 한다. 거친 황야에서 홀로 떨어져 글을 쓸 때에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 같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만이 이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생각은 자기 본위에서 나온 우월감일 뿐이다.[147, 138]
작품을 자신만의 습작 노트에 사장시키지 말라. 바깥으로 꺼내 놓아라.
예술가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생각 같은 것은 떨쳐 버려라.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고통스럽다. 자신만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해서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이유는 없다.[138]
당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려라. 당신이 쳐다보고 있는 모든 사물들 안으로, 거리 속으로, 물 잔에 담긴 물 속으로, 옥수수밭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사라져 버려라.
당신이 느끼는 바로 그것이 되어 그 감정을 태워버려라. 걱정하지 말라. 당신은 어떤 감정을 잡았다거나, 그 감정과 완전히 하나가 된 바로 그 순간을 냄새 맡거나 보게 되면, 당신은 이미 위대한 시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140]
무엇이 되었든 모든 감각을 집중시켜라. 논리적인 마음은 꺼버려라. 마음을 비워 놓고 생각이 들어가지 않게 하라. 언어가 배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껴라. 머리를 위 속으로 끌어내리고 소화시키라. 당신 육체가 양분을 빨아들이도록 내버려 두라. 인내심을 가지고 한결같은 균형을 유지하라. 생각의 지층에 있는 무의식의 세계 속으로, 당신의 핏줄 속으로 글쓰기를 삼투시키라.
그런 다음 드디어 당신이 튀어나올 때, 가령 아침 10시에 글을 쓰겠다고 작정했다면 그 주어진 시간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 1시간이건 20분이건,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손을 멈추지 말고 모든 것을, 정맥에서부터 곧장 펜을 통해 종이 위에 토해 놓게 만들라. 멈추지 말라. 망설이지 말라. 백일몽을 꾸지 말라. 제한된 시간이 끝날 때까지 쓰라.[143]
제일 좋은 글은 당신의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실린 글이다.[144]
“글세, 웃기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마 그것이 푸른 말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글은 곤란하다. “이것은 푸른 말이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하라. 이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의 사고 속에 똑바로 서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146]
비록 우리 인생이 언제나 선명한 것은 아닐지라도, 명확하게 인생을 표현해 보는 것이 좋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이 순간의 나다.” 이렇게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만, 당신은 훗날 그만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146]
또 하나, 스스로 경계할 부분은 바로 질문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질문에는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질문 하나를 만들 수 있다면 아주 잘 된 일이다. 하지만 즉시 더 깊은 단계로 내려가 바로 그 다음 줄에서 그 질문에 답을 해 주어야 한다.[147]
‘혹시 내가 만든 질문에 답을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떨쳐버려라. 글쓰기는 안개에 싸여 있는 마음에 불을 지피는 행위다. 종이 위에 안개를 옮겨 놓지 말라. 설사 확실하지 않을 때라도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라. 이런 훈련은, 문장을 훨씬 힘차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147]
글쓰기는 발견의 기록이다. 당신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화제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당신과 그 화제와의 관계를 발견하기를 원한다.[158]
작가의 임무는 평범한 사람들을 살아있게 만들고, 우리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어떤 한 장소에 오래 살게 되면 그 장소에 대한 감각이 점점 둔해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거꾸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항상 흥미롭다. 새로운 장소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신선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해 준다.[161]
결국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진정 글을 쓰고 싶다면 모든 것을 잘라내고 쓸 수밖에 없다. 글을 쓰기 좋은 완벽한 환경도, 습작 노트도, 펜도, 책상도 없다면, 자신을 유연하게 훈련시킬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낯선 환경 속에서도, 완전히 다른 장소에서도, 글쓰기 훈련은 계속 되어야 한다. 기차 안에서, 버스 안에서, 허름한 부엌 식탁에서, 기댈 것이라고는 나무 둥지만 있는 숲속에서, 혼자 흐르는 개울물에 발을 담근 채, 사막의 바위 위에 앉아서, 당신 집 앞 모퉁이에 서서, 현관에서, 자동차 뒷좌석에서, 서재에서, 점심 먹는 계산대에서, 복도에서, 실업자 고용사무실에서, 치과 대기실에서, 공항에서, 텍사스에서, 캔사스에서, 과테말라에서, 콜라를 홀짝이는 동안에도, 담배를 피우는 동안에도, 베이컨과 양상추와 토마토가 들어 있는 샌드위치를 먹는 중간중간에도 당신은 글을 써야 한다.[164]
우리가 글쓰기에 열중해 있다면 장소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글쓰기에 빠져 있는 것 자체로 충분히 완벽한 것이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든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위대한 자율성과 안전성이 있다. 진정 글을 쓰고자 갈망한다면, 결국 당신은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는 길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165]
글쓰기에서도 같은 진실이 통한다. 지금 세상에 나온 책들 가운데 출판조차 못했을 뻔한 책이 아마 수천 권도 넘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저 계속 가야만 한다는 진실이 있을 뿐이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쓰라! 설령 그 글이 출판되지 않더라도 또 다른 글을 계속해서 쓰라. 훈련은 당신의 글을 점점 더 훌륭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두 달에 한 번씩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과 부딪힌다.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늘 똑같다. “어리석은 짓이야. 돈 한푼도 벌지 못하면서 그럴싸한 경력도 쌓지 못하고 있잖아. 이제는 내 걱정을 해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어. 너무 외로워. 이런 게 싫어! 바보 같은 짓이야. 나도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어.” 이런 생각은 그 자체로 고문이다.[174]
“정말 한심해. 그렇게 쓰면 어떡합니까? 도대체 당신이 뭐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작가가 되겠단 말이요?”
비평가가 지껄이는 말에는 신경 쓸 것 없다. 거기에는 당신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게 하나도 없다. 대신 자신의 글쓰기를 너그럽게 받아들여라.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인내심과 유머 감각을 키우라. 의심이라는 생쥐에게 갉아먹히지 말라. 훈련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잃지 말고 저 너머에 있는 광활한 인생을 바라보라.[175]
당신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저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유가 가능하다. 당신은 문체를 향상시키기 위해, 당신은 얼간이이기 때문에, 당신은 종이 냄새에 미쳤기 때문에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186]
명심해야 할 것이 또 있다. 당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 그 자체가 아니라, 당신이 어떻게 그 일을 하고 있는가, 어떤 방법으로 그 일에 접근해 나가는가 그리고 그 일에서 어떤 가치를 얻는가 하는 점이다.[188]
우리는 모두 전체의 한 부분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우리를 통해서 글로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189]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또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두 가지 모두 근사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가장 깊은 비밀이다.[193]
이것은 좋은 작가가 되려면 LSD나 향정신성 의약품을 꼭 경험해봐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 말은, 우리 삶에는 반드시 미쳐 버려야 할 시기, 사물을 바라보는 일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견고하지도 않고, 구조적으로 완벽하지도 않으며, 영원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때가 있다는 뜻이다.[206, 207]
우리는 스스로 영원불멸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며, 이런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그 시간조차 알지 못한다. 오래 살다가 편안하게 자연사하기를 바라지만 당장 몇 분 후에 죽을 수도 있다.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해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숙명에 대한 깊은 고찰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더욱 생동하게 만들고, 현실에 충실하게 만들며,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207]
예술은 의사소통이다. 고독의 씁쓸한 맛을 본 사람은, 거기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지애와 연민을 배우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에게 당신의 인생을 알려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끌고 나가게 된다. 당신의 글이 또 다른 외로운 영혼에게 닿을 수 있도록 손을 뻗으라.[224, 225]
고독을 이용하라. 고독의 아픔은 당신에게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만들어 줄 것이다. 고독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그 고독을, 당신의 더 깊은 곳을 탐사하는 내시경으로 이용하라.[225]
완전히 태워버린 것, 첫 생각에서부터 시작된 것만이 모든 사람을 깨우고 모든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다. 누군가 정말 뜨거운 작품을 읽을 때, 그것이 듣는 모든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수업을 하면서 많이 보아왔다.
자신의 작품을 솔직하게 쳐다보라. 무언가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된 것이다. 만약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죽은 발에 채찍질하는 짓은 멈추라. 다른 글을 쓰라. 무언가가 나타날 것이다.
나쁜 글은 세상에 이미 너무 많다. 그래서 좋은 글을 단 한 줄만 써도 당신은 유명해질 것이다. 미적지근한 글은 사람을 잠들게 만든다.[255]
그날 나는 작업실에서 도저히 좋은 글을 슬 수 없을 거라는 절망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앵앵거리는 모기떼 같은 이런 자기 비판적인 생각 아래서도, 내 손은 첫 생각을 기록하고, 그 순간을 옮겨 놓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지치지 않고 지껄여대는 내면의 비평가를 무시하고 계속 종이 위에 손을 움직이게 할 능력이 있다.[258]
산만한 정신을 뚫고 지속적으로 글쓰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훈련이다. 한 달 후 당신은 그 시절 당신이 썼던 노트를 읽으며 그 글의 훌륭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의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 서로를 깨닫고 하나가 되는 시점이다. 이것이 작품이다.[259]
“이 책을 완성하는 데 1년 6개월이 걸렸어요. 적어도 절반은 처음 썼을 때 나온 것들이죠. 가장 힘든 싸움은 글 쓰는 행위가 아니었어요. 내가 과연 괜찮은 것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싸우는 게 제일 힘들었죠.”
마지막 한 달 반 동안 나는 주말도 휴일도 없이 글을 쓰는 데 매진했다. 나는 한 장씩 완성시킨 다음,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내 속에서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먹어라, 친구를 만나라, 낮잠을 자라고 아우성 쳐댔지만, 나는 그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267]
“만약 그쪽에서 다신 책을 출판하겠다고 하면 아주 잘된 일이지만, 그것에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당신에게는 그냥 지나가는 일입니다. 계속해서 글을 쓰는 데만 정진하십시오.”[268]
저자는 자유롭게 글을 쓰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글쓰기라! 이런 말을 누가 못하겠는가? 하지만 다음에는 이 자유로운 글쓰기란 자신만의 솔직한 목소리를 찾아내는 길이며, 궁극적으로 인생의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진실! 정말 겁나는 단어다. 나는 나의 진실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고 꼭 나의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진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누가 나에게 시비를 걸어오겠는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도. 하지만 작가가 희망하고 있듯,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를 돌이켜보며 인생을 완성시켜 나가려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세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진짜 보물들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여러분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글 쓰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존경심을 더욱 높여 주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자유와 진실을 추구하고 세상과 자신에 대한 진정한 연민을 키워가는 끊임없는 훈련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아니라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점 또한 좋았다.[270]
3. 내가 저자라면
매주 칼럼을 쓰면서 재미없고 딱딱하기만 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내 자신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들곤 했다. 왜 이렇게 밖에 쓰지 못하는 지를 이리저리 궁리해 보기도 하고, 재미난 글쓰기를 시도해보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게 마음 같이 쉽게 되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글쓰기의 기본에 대해 잘 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는 구체적인 표현방법, 글쓰기 훈련, 작가가 갖아야 할 기본적인 마음자세에서 책을 쓰는 이유와 즐거움까지, 글쓰기의 전반적인 내용을 선(禪) 과 명상 경험을 통해 갖게 된 자신만의 독특한 글쓰기 방법에 따라 설득력 있게 기술한다.
나는 논리적인 글, 그러면서도 잘 읽히는 글을 써보고 싶었다. 그런데 저자는 글을 쓸 때 논리는 잊어버리라고 한다. 논리적으로 잘 다듬어진 글을 쓰고 싶으니 난 초벌 글에 대해서 많은 수정을 가했다. 그러다 보니 딱딱해 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첫 생각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마음 가는대로 쓸 것을 주문한다. 난 일주일에 한 편의 칼럼을 쓰는 정도로 글쓰기 연습을 해오고 있었는데, 저자는 끊임없이 훈련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나 어떤 시간에나 글쓰기를 할 수 있고, 작가는 또 그래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말하지 말고 보여 주라’ 는 말도 내게는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다. ‘독자에게 감정을 직접적으로 강요하지 말고, 상황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정의 모습을 그냥 보여 주라’는 말은 내가 이제껏 써왔던 칼럼에서 대부분 지키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래서 나의 글은 회사에서 작성하는 보고서 같은 글 논문 같이 딱딱하기 그지없는 글을 써왔다.
내 글쓰기 자세의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쓰려고 하는 책에 저자의 방법론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의 글쓰기에서 고쳐야 할 점이 매우 많다는 사실이다. 사부님께서 우화를 수집해서 읽어보라고 하셨는데, 우선 우화에 대해 공부하면서 글쓰기 방법을 다듬어 나가야 겠다는 생각이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수업을 할 때 나는 학생들에게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라’ 고 요구한다. 자기 마음의 본질적인 외침을 적으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여러분, 분명하고 아주 솔직하게 써야 해요” 라는 말만 던져 버린다면 그것은 선생이 아니다.[18]
훈련은 공연에 앞서 무용수가 몸을 풀고, 시합 전 육상 선수가 스트레칭을 하는 것과 똑같다. 육상 선수라면 “난 어제 뛰었어. 그러니 오늘은 워밍업을 할 필요가 없어” 라고 말하지 않는 법이다. 그들은 달리기를 위해 매일같이 몸을 풀고 스트레칭을 한다.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글도 많이 쓰면 쓸수록 실력이 향상된다.
또, 육상 선수들은 달리기가 힘들고 지겨워져도 달리는 행위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연습을 쉬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서 계속 달리고 싶게 만드는 뜨거운 열망이 찾아올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더구나 열망은 절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거나 회피하는 사람에게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31]
내가 만들어낸 시는 그 시를 쓰고 있을 때의 내 생각, 내 손, 나를 둘러싼 공간과 내가 느낀 감정들일 뿐이다. 스스로 속지 않도록 경계하라. 시시각각 우리는 변한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변한다는 사실, 이것처럼 좋은 기회도 없다. 우리는 한 순간에 얼어붙어 있던 자신과 자신의 이상으로부터 빠져 나와 신선하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이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우리를 동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흐르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66, 67]
은유란 논리나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그와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부터 비롯된다. 은유를 위해서는 사물을 바라보던 익숙한 시각에서 기꺼이 벗어나야 한다. 개미 한 마리와 코끼리 한 마리 안에서 공통된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거리낌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71, 72]
은유를 위한 은유를 하지 말라. 무언가를 은유하기 위해 당신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저 평소의 사고 방식에서 한발 물러서서 머릿속을 지나가는 생각들을 계속 기록해 보라. 이런 연습은 사고를 부드럽게 해 줄 뿐 아니라 창조력을 키워 준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생각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엄청난 도약을 하게 된다. 마음이란 순식간에 위대한 도약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72]
“아주 맛있어요, 일품이야!” 라는 말에는 에너지가 없다. 어떻게 대단한 것인가? 독자에게 그 대단함의 냄새를 맡게 하라. 바꿔 말해서 세부 묘사를 이용하라. 세부 묘사야말로 글쓰기의 기본 요소이자 단위다.[90]
좋은 작가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많이 읽고, 열심히 들어 주고, 많이 써 보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냥 단어와 음향과 색깔을 통해 감각의 열기 속으로 뛰어들어가라. 그리고 그 살아 있는 느낌이 종이 위에 생생히 옮겨지도록 계속 손을 움직이라.[100]
위대한 선승 도겐은 “안개 속을 걷는 사람은 안개에 젖는다” 고 했다. 그러니 그저 듣고, 읽고, 쓰라. 당신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조금씩 당신만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너무 조바심을 내지 말고 그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 그냥 흐르는 대로 운율에 맞춰 노래하고 쓰라.[101]
글쓰기에 관련된 오래된 속담이 하나 있다. ‘말하지 말고 보여 주라’ 는 말이다. 무슨 뜻인가? 이것은 이를테면 분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 무엇이 당신을 분노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라는 뜻이다. 당신 글을 읽은 사람이 분노를 느끼게 하는 글을 쓰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에게 당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말고, 상황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정의 모습을 그냥 보여 주라는 말이다.[117]
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근원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우리 마음속 흐릿한 부분이 선명해지면서 이 지상의 삶에 더 튼튼한 줄을 이어 주기 때문이다.[121]
사물들 속으로 파고들라. 새 꽃, 치즈, 트랙터, 자동차, 비행기..... 이 모든 것의 이름을 배우라. 작가는 건축가이자 프랑스 요리사이며, 농부여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작가는 이런 것 중 어느 것도 아니어야 한다.[123]
글쓰기는 공동체의 산물이다. 일반인들의 믿음과는 정반대로 작가는 절대 불을 지키기 위해 홀로 싸우고 있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다. 그래서 글 쓰는 사람은 완전히 혼자만의 고유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면, 나는 솔직히 아주 화가 난다.[135]
우리는 앞서 있었던 모든 작가들의 짐을 나르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역사, 이념 그리고 대중문화 모두를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글쓰기 안에 용해되어 나타나는 것이다.[136]
글쓰기에서도 같은 진실이 통한다. 지금 세상에 나온 책들 가운데 출판조차 못했을 뻔한 책이 아마 수천 권도 넘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저 계속 가야만 한다는 진실이 있을 뿐이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쓰라! 설령 그 글이 출판되지 않더라도 또 다른 글을 계속해서 쓰라. 훈련은 당신의 글을 점점 더 훌륭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두 달에 한 번씩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과 부딪힌다.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늘 똑같다. “어리석은 짓이야. 돈 한푼도 벌지 못하면서 그럴싸한 경력도 쌓지 못하고 있잖아. 이제는 내 걱정을 해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어. 너무 외로워. 이런 게 싫어! 바보 같은 짓이야. 나도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어.” 이런 생각은 그 자체로 고문이다.[174]
우리는 모두 전체의 한 부분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우리를 통해서 글로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189]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또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두 가지 모두 근사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가장 깊은 비밀이다.[193]
이것은 좋은 작가가 되려면 LSD나 향정신성 의약품을 꼭 경험해봐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 말은, 우리 삶에는 반드시 미쳐 버려야 할 시기, 사물을 바라보는 일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견고하지도 않고, 구조적으로 완벽하지도 않으며, 영원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때가 있다는 뜻이다.[206, 207]
예술은 의사소통이다. 고독의 씁쓸한 맛을 본 사람은, 거기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지애와 연민을 배우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에게 당신의 인생을 알려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끌고 나가게 된다. 당신의 글이 또 다른 외로운 영혼에게 닿을 수 있도록 손을 뻗으라.[224, 225]
완전히 태워버린 것, 첫 생각에서부터 시작된 것만이 모든 사람을 깨우고 모든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다. 누군가 정말 뜨거운 작품을 읽을 때, 그것이 듣는 모든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수업을 하면서 많이 보아왔다.
자신의 작품을 솔직하게 쳐다보라. 무언가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된 것이다. 만약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죽은 발에 채찍질하는 짓은 멈추라. 다른 글을 쓰라. 무언가가 나타날 것이다.
나쁜 글은 세상에 이미 너무 많다. 그래서 좋은 글을 단 한 줄만 써도 당신은 유명해질 것이다. 미적지근한 글은 사람을 잠들게 만든다.[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