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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5일 02시 41분 등록

북리뷰 45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유치환

책: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유치환 . 동서문화사. 1960

***저자에 대하여

* 청마靑馬 유치환 柳致環 (1908 - 1967)의 연보:

1908년. 7. 14 (음력) 경남 통영시 태평동 552번지에서 유생인 진주 류씨 준수(焌秀)와
                    어머니 밀양 박씨 우수(又守)사이 8남매중 차남으로 태어남.
1918년(11세) 11세까지 외가 私塾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하다.
1922년(15세)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渡日, 부장[豊山] 중학교에 입학하다.
1923년(19세) 豊山중학교 4학년 때 한의원을 하던 부친이 다른 사업에 손을 대어 실패하자 귀국. 가형 동랑 류치
                     진 이 주도하는 「토성」지에 고향 문우들과 시를 발표
1926년 풍산(豊山)중학교 4학년을 마치고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 편입.
1927년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 졸업(제4회)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2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중퇴.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학원에 다님. 이 해 10월, 11세부터 알고 지내던 경성
            중앙보육 출신인 같은 고향의 安東權氏 在順과 결혼하다. 이 무렵 일본 아나키스트 시 인 다카무라 고오타
            로 (高村光太郞), 쿠사노 심뻬이(草野心平) 등과 鄭芝溶의 詩에 감 명을 받다.
1929년 귀국. 고향에서 가형 동랑과 함께 「소제부」라는 회람지 발간. 長女 仁全 출생하다.
1930년 소제부 제일시집 발간. 시「5월의 마음」외 25편 발표.
1931년『문예월간』제 2호에서 시「정적」을 발표, 문단에 등단. 차녀 春妃 출생하다.
1932년(25세) 평양으로 이주. 몇 달간 사진관을 경영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문을 받고 詩作에 전념하다. 3녀 紫
                      燕   출생하다.
1936년(29세) 일본 동경으로 떠나는 李箱이 부산시 초량동 집으로 찾아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다.
1937년 통영협성상업고등학교 교사 취임.
              7월∼10월,동인지「생리」1,2집 발간.

1939 년 12월,<청마시초 靑馬詩鈔(초) >발간. 깃빨 수록
1940 년 3월, 통영협성고등학교 교사 사임.
                      만주 빈강성 연수현으로 이주,농장 관리 및 정미소 경영.
1945 년 6월말 귀국. 부인이 통영문화유치원을 경영.
                    통영문화협회를 조직, 초대 회장 역임.
1947 년 6월, 시집<생명의 서>발간. 시「귀고(歸故)」외 59편 수록.
1948 년 3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 사임.
               4월,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취임.
               9월, 시집<울릉도>발간, 시「동백꽃」외 34편 수록.

1949 년 5월, 시집<청령일기>발간. 시「심산(深山)」외 65편 수록.
1950년  6.25동란으로 부산으로 피난, 문인 구국대를 조직, 육군 제3사단에 종군함.
               1949년도 서울특별시문화상 수상.
1951년  9월, 시집<보병과 더불어>발간. 시 「호천」외 33편 수록.
1953년  4월 통영으로 이주, 수상록 <예루살렘의 닭>발간. 시『선한 나무』외 57편 수록
1954 년 4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피선.
               10월, 시집<청마시집>발간. 시집『기도가』와『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합본,
                       시「낙화」외 111편 수록.
1955 년 1월,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 사임, 경주고등학교 교장 취임.
1956 년 3월, 제1회 경북문화상 수상.
1957년  3월, 한국시인협회 회장 피선.
                4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재피선.
               12월, 시집 <제9시집>발간, 시 「춘조(春朝)」외 38편 수록.
1958 년 2월, 1957년도 아세아재단 자유문학상 수상.
                9월, 경주고등학교 교장 사임.
               12월,<류치환시선 > 발간.

1959년 3월, 한국시인협회 회장 재 피선, 수상록『동방의 느티』발간.
              4월, 경주중학교 교장 겸임.
              9월, 경주고등학교 교장 사임.
             12월, 자작시 해설 『구름에 그린다』발간
1960년  4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재피선.
             12월, 시집<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발간, 시「봄바람에 안긴 한반도」외 35편 수록. 
1961년  3월, 경주여자중고등학교 교장 취임.(1961년∼1962년)
1962 년 3월, 대구여자고등학교 교장 취임.(1962년∼1964년)
                7월, 예술원상 수상
1963 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장 피선,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 발간.
               7월,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취임.(1963년∼1965년)
1964년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장 역임.
               11월, 시집<미루나무와 남풍> 발간, 시「한 그루 백양나무」외 41편 수록.
               12월, 부산시문화상 수상
1965 년 4월, 부산 남녀자상업고등학교 교장 전임, 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 역임.
              11월, 시선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발간
1967 년 2월13일 하오 9시 30분 부산시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부산대학병원으로 후송 도중
              사  망. 17일 부산직할시 사하구 하단동 승학산 산록에 묻혔으나 경남 양산시 백운공원 묘지로 이장. 다
              시  1997년 4월 5일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지전당골산록으로 옮김.

* 유치환의 생애

유치환은 1908년 경남 통영의 태평동에서 한의였던 유준수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장남은 극작가인 유치진이다. 그의 부친은 본래 거제군에서 살았으나 결혼한 뒤에 처가가 있던 통영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는 외가에서 태어나 11세 때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 그는 말이 별로 없는 소년이었다. 학교 종이 울리더라도 뛰어가는 법이 없이 조용히 걸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갔다. 그가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2년이다. 그의 형 유치진은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의 내성적 성격은 중학 시절에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는 대신에 그는 혼자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일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 이듬해 관동대지진을 맞이했고, 그 때 그는 일본인들에 의해 아무 죄도 없는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 후 그는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보낸다. 그 소녀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권재순이다. 도요야마 중학 4학년 때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그는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그는 1928년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진명 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권재순과 결혼한다.

그 당시에는 드문 신식 결혼식이었다. 이 결혼식 때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던 어린아이 중의 하나가 훗날 시인이 된 김춘수이다. 권재순과 결혼한 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의 작품을 보고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 후 그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는 1931년 24세 때「문예월간」2호에 「정적」이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이 때 청마는 비슷한 또래의 통영 문학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곤 했다. 그의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던 아내는 시아버지와 청마를 설득하여 거처를 평양으로 옮긴다.

청마는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내 걷어치우고 시를 짓는 데에만 전념한다. 그의 아내는 청마에게 평양의 신학교 진학을 권유했으나 그는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거절한다. 다시 거처를 부산으로 옮긴 것은 1934년이고, 부산화신연쇄점에 근무한다. 30세 되던 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통영 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되는 것을 계기로 이후 교육계에 종사하게 된다. 문예동인지 생리(生理) (창간 1937. 7. 1.)를 주간하기도 했던 해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 여자 문제가 얽힌 데다가 통영경찰서에 근무하던 남 순사란 사람으로부터 그가 일제의 예비 검속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음을 귀띔 받고 가족들을 거느리고 인생을 다시 한 번 재건해 보려는 의도로 만주로 떠나게 된다. 만주의 연수현에 형 유치진의 농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곳에서 일을 한다.

광복 직전인 45년 6월에 귀국하여 광복을 맞이하였고 통영여자중학교 교사(1945. 10. ∼ 1948)가 된 그는 11월에 윤이상, 김춘수 등과 같이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문화유치원(그의 부인이 경영)을 포함하는 4동의 적산을 인수하고 '연극 부락' 중심의 예술 활동을 벌인다. 39세 때는 제 1회 시인상을 받았으며 41세 때인 1948년엔 청년문학가 협회 회장직을 맡아 반공 민족 문학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50년 북한 남침으로 부산으로 피난한 그는, 그 곳에서 문총 구국대 조직에 참여한 후 3사단과 함께 종군하여 원산, 함흥 등지로 병사들과 함께 전쟁의 아픔을 겪었다. 이 경험으로 잘 알려진 시 '보병과 더불어'(50), '돌아오지 않는 비행기'(50. 4.) 등이 쓰여졌다. 48년에 교직을 그만두었으나 54년에 거창 안의중학교 교장(54∼55)이 되었다. 그 후 그는 경주고(55∼61), 경주여중(61∼62), 대구여고(62∼64) 등 사학의 교장으로 있다가 경남 문교 사회국장이던 오복근의 주선으로 경남여고(64) 교장으로 옮겼다.

청마가 세상을 뜬 것은 1967년 2월 13일이었다. 그날은 고교 후기 입시날이었다.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있던 청마는 학교일을 마치고 예총 일로 몇몇 문인을 만났고, 그들과 어울려 몇 군데 술집을 들렸다. 그런 후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청마는 좌천동 앞길에서 한 시내버스에 치였고 부산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절명했다.

청마 유치환은 사진관 경영, 화신 연쇄점 사원 경력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교직에 있었다. 통영 협성상고와 통영여중에서 4년쯤 교단에 섰고, 경주고 교장이 되기 전 한 학기쯤 경북대에서 강의를 맡은 경력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의 교직 경력은 교장이었다. 통영 문화협회에서 인수한 적산을 사유화하여 그의 아내가 경영하게 만든 사건이나 여러 차례 불륜의 여성 관계를 빚는 등 인간적인 약점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는 존경받는 교육자였고, 지사적인 시인이었다.

* 유치환의 삶과 문학

청마(靑馬)와 이상(李箱)은 여러모로 대조되는 시인이다. 청마는 건강한 몸을 지녀서 고래 술을 평생 마시고도 끄떡없었는데 이상(李箱)은 20대 중반에 얻은 폐결핵을 극복하지 못하고 28세로 요절했다.

이상(李箱)이 생(生)의 의미를 찾지 못해 절망하고 자기 모멸에 빠져 몸부림치고 있을 때 청마는 [생명의 서(書)] 같은 시집을 내놓으며 삶의 정열에 들끓었다. 이상(李箱)이 인간의 삶 자체를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의식적으로 '애욕의 진흙탕'에 뛰어든 반면 청마는 [깃발], [바위] 등을 발표하면서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를 바라보며 일생을 살았다.

이렇게 다르면서도 둘은 친하게 지냈다. 이상(李箱)은 신상에 이상이나 변화가 있을 때는 꼭 청마에게 엽서를 띄워 알려주곤 했다. 이상(李箱)이 절망을 극복해 보려고 일본으로 건너갈 때 마지막으로 찾은 사람이 청마였다. 청마는 그러므로 국내에서 이상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다.

이상(李箱)은 어느 날 일본으로 간다면서 느닷없이 청마를 찾아왔다. 둘은 항구의 싸구려 술집에서 엉망진창이 되도록 마셨다. 생명력이 충천한 시인 청마와 생명력을 찾아 얻어 보려는 이상(李箱)이 만난 술자리이니 그 순간만은 의기투합 '비슷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날밤, 지금은 불타고 없는 부산 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조선 여관이란 삼류 여인숙에서 지내고 이튿날 저녁 둘은 관부연락선 부두에서 영원한 작별의 손을 마주 흔들었다. '이상(李箱)은 까마귀 같은 퀭한 눈에 커다랗게 입을 벌려 흥소했다.' 이것이 청마가 기록한 이상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청마는 친계(親系)로부터는 강직한 성품을 이어받고 모계(母系)로부터는 후덕한 덕성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청마의 성격 규정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로 대표되는 양면성에서 찾아져 왔고, '의지와 사랑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청마는 타고난 저항 정신을 피 속에 용해시켜 놓고 있었다. 그는 우선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래고보 학적부를 보면 조선어, 영어, 한문은 늘 갑(甲;9점)인데 국어(일본어), 화학 등은 병(丙;4점)을 면치 못했다. 또 그는 결석을 잘 했다. 병이 났다고 결석계를 내고 학교엘 잘 빠졌는데 학적부에 기록된 '체격란'에는 항상 '갑(甲)'으로 되어 있다. 가기 싫은 학교를 꾀병 내고 안 갔음이 분명한데 그러고도 석차는 27명중 7등이었다.

청마는 학교하고는 연분이 적었던 모양으로 연희 전문 문과에 입학했으나 마음에 안 들어서 1학년도 다 못 채우고 걷어치웠다. 그러고는 다시는 학교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일본에 건너가서 사진 학원에 들어가 사진 기술을 배운다. 사진관을 열어서 먹고 살 요량으로 한 것인데 사실상 그는 평양에서 그후 사진관을 차렸다. 그러나 그것도 서너 달만에 다 털어먹고 부산에 내려와 백화점 점원 노릇을 했다. 이것이 청마의 20대 모습이다.

30대 시절 청마는 만주 등지로 방황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외아들 '일향(日向)'을 잃게 된다.

얼어붙은 땅에 외아들의 시신을 파묻고 마음이 여린 청마는 종래 그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다.

사람도 나도 접어주지 않으려는 이 自虐의 길에
내 열번 敗亡의 人生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悔悟의 앓음을 어디에 號泣할 곳 없어.
                                                       [황야에 와서]  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만주 연수현에서 농장 관리인 노릇을 6년간 하다가 청마는 해방을 맞아 40대의 나이로 귀국하게 되고 그때부터 문화 활동과 교육자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청마의 저항성이 가장 돋보일 때가 자유당 말기 정치적 부정 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였다. 타고난 반골(反骨) 기질이 3.15 부정선거를 도저히 묵과하지 못한다.

그 환도를 찾아 갈라
비수를 찾아 갈라
식칼마저 모조리 시퍼렇게 내다 갈라

그리하여 너희들 마침내 이같이
기갈들려 미치게 한 者를 찾아

손에 손에 그 시퍼런 날들을 들고 게사니같이 덤벼
남 나의 어느 모가지든 닥치는대로 컥컥 찔러….

청마가 얼마나 통분 격분했으면 이런 살기 등등한 詩를 썼을까. 그는 그때 여기저기 신문 잡지에 정치 부패를 저주, 성토하는 시를 발표했다. 그 시절이 바로 청마의 경주(慶州) 시절이다.

55년부터 59년까지 그는 경주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있었고 그 기간동안 그는 '나는 시인이 아니다'면서 자유당 정치와 그 불의를 단죄하는 투사의 칼날을 휘둘렀다. 59년 9월 10일 그는 강요에 의해서 교장직을 물러나게 되고 그후 2년간 심한 신경통을 앓으며 낭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 기간동안 그는 대구매일신문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정치권을 질타하는 시를 계속 발표했다. 그 시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이다.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보라
저 거짓의 거리에서 물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는다. ― 1960년 3월 13일 '동아일보'

이 시가 나온지 1개월 6일만에 4.19가 일어났고 그가 그 동안 발표한 시편들을 묶은 시집들이 다투어 나왔다. 61년 5월 청마는 마침내 경주여자중고등학교 교장이 되어서 그리워하던 경주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학생들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직장에서 쫓겨난 청마는 바로 그 '덕목'으로 높은 추앙을 받게 되고 그후 문단에서나 교육계에서 크게 기림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투사'의 일을 떠나 곧 '詩人'의 자리로 돌아왔다.
                  출처- http://hanlover.new21.org


* 위의 글은  그의 생애와 문학을 엮은 책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고’ 를 가장 잘 요약하고 있다. 그의 친일 행동이라든지, 사회적 책임을 지닌 사람으로서의 작은 행위들을 비난하며 증거물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학자들이 그의 인격을 의심하고 있지만, 시인의 정서는 어쩌면 치외법권에 속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그 험한 시간에 시를 쓰지 않았으면 아니 시가 없었으면 어떻게 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을까? 나는 다만 “시인은 시로 자신을 말한다.” 는 시선으로 시인 유치환을 리뷰한다.

* 그의 작품.

시집 :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청령 일기'(1949),
'보병과 더불어'(1951),
청마 시집'(1954),
'제9시집'(1957),
 '유치환 시선'(1958),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루나무와 남풍'(196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수필집: '예루살렘의 닭'1953   '동방의 느티' 1959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1959       ' 나는 고독하지 않다'' 1963 

*** 마음을 무찔러 든 싯귀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거제도 둔덕골(巨濟島 屯德)

거제도 둔덕골은
팔대(八代)로 내려 나의 부친(父親)의 살으신 곳
적은 골안 다가 솟은 산방(山芳)산 비탈 알로
몇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마을은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로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베 짜서 옷 입고
조약 써서 병 고치고
그리하여 세상은
허구한 세월과 세대가 바뀌고 흘렀갔건만
사시장천 벗고 섰는 뒷산 산비탈모양
두고두고 행복된 바람이 한 번이나 불어왔던가
시방도 신농(神農) 적 베틀에 질쌈 하고
바가지에 밥 먹고
갓난 것 데불고 톡톡 털며 사는 팔대 조카 젊는 과수 며느리며
비록 갓망건은 벗었을망정
활연(活然)한 기풍 속에 새끼 꼬며
시서(詩書)와 천하를 논하는 왕고못댁 왕고모부며
가난뱅이 살림살이 견디다가 뿌리치고
만주로 일본으로 뛰었던 큰집 종손이며

그러나 끝내 이들은 손발이 장기처럼 딿도록 여기 살아
마지막 누에가 고치되듯 애석도 모르고
살아 생전 날세고 다니던 밭머리
부조의 묏가에 부조처럼 한결같이 묻히리니

아아 나도 나이 불혹에 가까웠거늘
슬플 줄도 모르는 이 골짜기 부조의 하늘로 돌아와
일출이경하고 어질게 살다 죽으리..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영(羚(영))아에게
        ---문천에서

여기는 동해 바닷가의 한 솔밭.
호올로 모래 위에 누웠노라면
먼 포성은
인류의 크낙한 신음처럼 끊임없이 울려 오고

아가야
내 미처 몰랐던 네에게의 애정이
이렇듯 가슴 조여 그리움을 지을 줄이야.

수없이 젊은 목숨들이 아까움 없이 아까움 없이
어제도 죽어가고
오늘도 죽어 가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내쳐 모를
그 오직 하나밖에 아닌 목숨의 살고 죽음이
여기에선 차라리
일상 찬가게의 거래보다 수월히 치러지노니

아가야
그날 너의 어린 뺨에 입맞추고 나온 그 길이
설령 이대로 마지막 한이 된달지라도
인간 삶의 헌 옷 같은 애련일 랑
아예 벗어 남길 것이 못되거니
도시 인류에 아쉬운 애정의 가난에서

아가야
다만 나무처럼 자라며 살거라.



울릉도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무량한 안식을 거느린 저녁의 손길이
집도 새도 나무도 마음도 온갖 것을
소리없이 포근히 껴안으며 껴안으며

그리하여 그지없이 안온한 상냥스럼 위에
아슬한 조각달이 거리에 내걸리고
등불이 오르고
교회당 종이 고요히 소리를 흩뿌리고

그립고 애달픔에 꾸겨진 혼 하나
이제 어디메어 숨 지우고 있어도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귀를 막고
그리고 외로운 사랑은
또한 그렇게 죽어 가더니라.



춘신(春信)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저녁놀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 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밤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같이 없잖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생명의 서(書)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아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회한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그리움 1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즉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긴 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기빨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그리움 2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낙화(落花)

뉘가 눈이 소리없이 내린다더뇨
이렇게 쟁 쟁 쟁
무수한 종소리 울림하며 내리는 낙화
아 길이었다

손 하나 마주 잡지 못한 채
어짜지 못한 젊음의 안타까운 입김 같은
퍼얼펄 내리는 하아얀 속을
오직 말없이 나란히 걷기만 걷기만 하던
아아 진홍 장미었던가

그리고 너는 가고
무수한 종소리 울림하는 육체없는 낙화 속을
나만 남아 가노니
뉘가 눈이 소리없이 내린다더뇨




석굴암 대불

목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감고 앉았노니
천 년을 차거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

목숨이란! 목숨이란
억만년 원을 두어도
다시는 못갖는 것이기매
이대로는 못버릴 것이기매

먼 솔바람
부풀으는 동해 연잎.
소요로운 까막까치의 우짖음과
뜻없이 지새는 흰 달도 이마에 느끼노니

뉘라 알랴!
하마도 터지려는 통곡을 못내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적적히 눈감고 가부좌 하였노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턴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간 기술사의 모자.
알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를 치레하기에 앗기지 않으리.

들어보라.
저 거짓의 거리에서 물결 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는다.


*** 내가 만일 저자라면

우선 왜 청마 유치환을 이 시점에서 리뷰하는지를 말하고 싶다. 그는 60 평생을 통해 11권의 시집과 2권의 수필집과 한권의 수상록을 남겼다. 그는 평생을 문학에 전념했다. 소년시절부터 일본으로 만주로 평양으로 어쩔 수없이 방황의 길을 떠나기도 했지만 그는 격정의 시인이었고 정감이 넘치는 로맨티스트였다. 생명과 의지를 노래한 생명파 시인이라고 해석되지만 그의 시에는 그도 어쩔 수 없는 열정과 사랑과 치열한 자기검열이 있는 것 같았다. 학창시절 이래로 수많은 시를 읽고 외우고 따라 써보기도 하며 우리말을 공부해왔지만 어떤 인연으로든 가슴에 와 닿아 떠나지 않는 문장들이 끝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 같다. 청마 유치환의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는 시가 내게는 그 “문장”이다.

나는 그의 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1960년 초판본으로 가지고 있다. 보수동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후 언제나 이 책은 내 책장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나는 그 시가 항상 입에서 머리에서 맴맴 돌고 있다.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는다.’ 독재와 4.19의 시기를 지나며 부른 노래다. 그 말이  떠나지 않는 이유를 요즈음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무슨 한이 그리 많아 뜨거운 나의 노래를 땅에 묻고 말았는가? 그래서 학교 도서관을 다 훑어 그의 책을 빌려왔다. 그 책들 속에 그의 인생이 녹아있었다.

그는 어릴 적 소꼽친구와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그의 죽음을 앞두고 ‘아내를 위하여 열녀문을 세워야한다’ 고 아내 사랑을 노래했다. 결혼한 여인에게는 ‘참 좋은 아내였다’는 말을 지아비에게 들을 수 있으면 참 성공한 삶이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청마가 21세였고 부인 권 재순 여사가 20세였을 때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 전에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권재순: “내가 계속 보모로 재직하여 생활을 꾸려간다면, 앞으로 뜻하는 문학에 전념하여 이 나라의 대 시인이 될 자신이 있나요?”
유치환: “맹세코 문학에 나의 몸을 불사를 것이며, 반드시 훌륭한 인간, 훌륭한 시인이 되겠오.”

청마는 1931년 24세의 나이로 문예월간에 “정적 靜(정)寂(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14세 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0년의 습작기를 거친 셈이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20대의 감정이 솔직하게 담겨있는 ‘그리움’이라는 시다. 그는 “항구의 거리, 바람 부는 날, 항구 안에 닻을 내리고 섰는 크고 작은 선박들의 마스트마다 달린 기폭들은 그리움에 부대끼는 마음처럼 찟길 듯이 항상 나부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같이 못 견딜 듯이 몸짓하고 있는 많은 기폭들 가운데 섞여 어느 것이 나의 그리움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습니다.”라고 그의 시를 스스로 해석해 보이고 있다.

그의 진심은 차라리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본질은 의지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갈구하는 나머지의 허세에 불과한 것이다.” 라고 말하는 어쩔 수 없는 시인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25세에 평양으로 가서 그 당시는 인기 있었던 사진관을 경영했다. 그는 뛰어난 사진 기술이 있었고 시인의 감각이 있었지만 사진관 운영은 실패했고 부인의 월급에 의존해서 살다가 다시 서울로 부산으로 옮겨 다녔다. 그때 꼬박 1년 동안 부산의 화신 연쇄점에 근무했다. 바다 비린내 풍기는 주점들, 그 쓰러질 듯이 서있는 목로주점이 고향같이 마음을 끌었고 29세, 1936년에 <조선 문단>에 그의 대표적인 시가 된 ‘깃발’ 을 발표하였다.

1940년 그가 33세일 때 첫시집 <청마시초>가 발간되었다. 구본웅화백의 그림이 곁들인 126쪽 55편의 작품이 수록된 책이었고 서울 남산구락부에서 선배들이 출판 기념회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북만주로 떠났다.

이 처녀시집 <청마시초>에 시를 쓰는 그의 태도가 드러나 있다.

“이 시는 나의 출혈이요, 발한이옵니다.....항상 시를 지니고 시를 앓고 시를 생각함은 얼마나 외로웁고 괴로운 노릇이오며 또한 얼마나 높은 자랑이오리까.....시를 쓰고 지우고, 지우고 또 쓰는 동안에 절로 내 몸과 마음이 어질어지고, 깨끗이 가지게 됨이 없었던들 어찌 나는 오늘까지 이를 받들어 왔아오리까, 시인이 되기 전에 한 사람이 되리라는 이 쉬웁고 얼마 안된 말이 매게는 갈수록 감당하기 어려움을 깊이 깊이 뉘우쳐 깨다르옵니다.”

이 옛 사람의 생각과 문체이지만 많은 부분 공감이 간다. 그의 피와 땀인 시를 위하여 그는 새벽 3시 4시에 깨어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창작을 했다. 부모에게 “새벽 토끼”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오래된 습관이었단다. 그는 평생토록 이 습관을 지녔고 늘 혼자만의 새벽시간을 가꾸었다. 그리고 시의 길이 사람의 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청마는 직계 가족을 이끌고 장장 3천리 길을 떠난다. 아나키스트로 감시받고, 조선의 지식층으로 받는 탄압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때였다. 만주의 하얼빈 일대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장을 관리하는 것이 그의 일 이었다.

그들에게는 딸이 셋 있었다. 첫째와 둘째는 그곳에서 여학교엘 다녔고 셋째는 소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만주에서 귀하게 얻은 아들을 잃었다.

그가 만주에서 해방이 되기 1주일 전에 귀국했다. 그때 부인 권여사는 꿈에 마치 신탁처럼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어떤 고귀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부인에게 이런 꿈자리가 여러날 계속되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인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결단을 내리고 평소와는 다르게 청마를 재촉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청마는 가족을 먼저 돌려보내고 다시 짐을 정리하러 오려고 했다. 그때가 1945년 8월 초였고 곧 해방이 되어 그는 다시 만주 땅으로 되돌아 갈 수 없었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 그리고 고향인 통영에서 통영여자 중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1947년 5월 제 2시집 <생명의 서>를 발간했다. 57편의 시가 실렸다. 1부는 해방전 국내에서의 작품을 , 2부는 만주생활에서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이 시집은 ‘생명의 서’ 와 ‘바위’에서와 같이 청마 자신이 생명과 삶에 대해 끝없이 회의하면서도 한 치의 안일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치열함이 담겨있다고 평가된다.

그의 마지막 시집은 1965년 11월에 발간된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이며 5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리움’ ‘행복’ ‘행복은 이렇게 오더라’등이 수록되어있다. 사랑과 서정의 결정체라고 할 소품들이 많다.

“목마름” 이라는 작품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내가 이렇듯 당신을 애모함은 무슨 연유이랴.
당신의 용모? 당신의 자질?
-아니거니
당신을 통해서 저 영원에의 목마름을 달래려는 한 가상으로-
그러기에 아득한 별빛을 우러르면 더욱 애닯게도 그리운 당신.

아마 이 마음이 청마의 진심인 듯 하다. 사랑을 하는 행위는 상대가 누구이든 결국 영원을 향한 동화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인간의 이상향인 진,선,미를 추구하는 경지일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청마는 평생 아내에게 격려와 내조를 입었다. 부인은 항상 그를 위해 자기 자신을 덜어내며 남편과 가족을 지켰다. 눈물겨운 희생이었다. 그래서 청마는 그의 어머니에게 아내를 위해 열녀비를 세워 주자고까지 말했단다. 그때 어머니는 살아있는 사람의 열녀비를 어찌 세우겠느냐고 웃으며 대답하셨단다. 세 딸을 모두 출가시켰으나 후손을 위한 아들이 없음을 부인이 한탄하자 청마는 “많은 제자들이 곧 내 아들인데 더 무슨 아들이 필요하겠는가?”하며 부인을 위로했다 한다. 과묵하여 아기자기하게 애정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사랑을 안으로 키워 심중에 담은 말을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1967년 2월 13일 불의의 윤화로 생을 마감한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슬픈 기억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나갔다.

시인은 시로서 그를 표현한다. 독자는 시를 통하여 시인과 소통한다. 그가 만주에서 아들을 잃고 경황중에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것을 6년이 지난 어느날 그 심정을 시로 남겨두었다.그리고 시조 시인 이영도와 교류한 5000통이 넘는 편지가 있었다. 우체국에서 쓴 그 행복한 시들이다. 그가 죽은 후 이영도 시인과 친구 최계락이 편지들을 모아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난 행복하였네라> 라는 서간문을 발간했다. 이 책은 엄청난 인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 후 사람들은 이 편지글을 통해 청마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청마에 대한 애도의 정이 다 가라앉기도 전에 편지를 공개하였다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여성과 편지는 뮤즈와 그 날개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부인과 소년시절부터 주고 받았던 수많은 편지는 6.25 동란 중에 피난살이하는 동안 소각되었다. 돌이켜보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손을 떠난 시는 시인의 혼을 담고 독자의 영혼의 무게만큼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일생을 통해 수많은 시를 읽고 이해하고 읊으며 정서를 고양해 왔지만 유난히 내게 강하게 남아있는 시인의 마음을 더 잘 느껴보고 싶다. 죽은 시인을 위한 추모의 념이라고 할까? 이제 우리는 지난 일년을 마무리하는 졸업여행을 떠난다. 시인이 태어나고 자라났고 묻혀있는 바닷가 마을, 통영으로 간다. 아마 이 여행을 생각하며 제일 먼저 떠오른 청마 유치환을 그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에서 그가 그토록 그리워 한 바다를 보며 술 한잔과 시 한수로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해보려 한다.

IP *.67.223.107

프로필 이미지
삼칭이
2010.02.25 18:36:14 *.246.146.157
통영에서 살았지만 교과서 수준 이상으로 청마를 잘 몰랐습니다.
인연이 닿아 청마의 뜻을 잇는 문학회원들이 발간하는 회지가
손에 들어왔고, 글을 읽는 내내 상상 이상으로 멋진 선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비오는 날, 퇴근해서 집에서 다시 한번 청마를 그리워하며 막걸리
한잔 해야겠네요.
프로필 이미지
2010.02.26 15:56:20 *.195.50.239
삼칭,사칭,오칭...
비속에...배가 뜨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해금강도 외도도 못가고....
바람부는 언덕에 서서 "다만 바라다 볼 뿐..." 이런 분위기에요.

이상 거제도에서....편지를 보냅니다. 우체국은 못찾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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