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은 김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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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활동은 시간관리 훈련도 된다. 시간은 아무리 많아도 없다. 인생은 아무리 길어보여도, 짧다. 주어진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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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런트의 마음에 이제 질문은 없었다. 이것은 철학으로서의 역사라는 자신의 사유를 전파하는 일에서 마지막 시도가 될 참이었다. 내게 있어서 역사란 철학의 한 부분이다. 철학은 광범위한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삶과 현실의 광범위한 전망을- 당신의 태도를 현실이나 삶의 특정한 부분을 향해 이끌어가는 광범위한 전망 말이다. 예를 들면, 그것은 당신을 더욱 이해력 있고 용서를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줄까? 당신은 적어도 두 가지 방식으로 광범위한 전망을 얻을 수 있다. 하나는 과학을 통해서이다. 그것은 외계 현실의 모든 양상을 물들이고 있는 다양한 과학을 공부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광범위한 전망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공간속의 사물보다는 오히려 시간 속의 사건들을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첫번째 방식은 포기하였다. 그것이 지나치게 외적이고 수학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내면에서 그리고 다른 사물들 안에서 내가 찾아낸 생명의 요소에는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나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려 한다고 말했다. 과학을 통해서는 그것을 찾아낼 수가 없다. 역사는 시간 속의 사건들을 탐구함으로써 철학적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결론적으로 나는 자신이 역사를 쓰는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10
듀런트는 많은 상을 탄 저술가 이상의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 정부가 시민에게 수여하는 최고ㅛ 훈장인 자유 메달도 받았다.)그는 명성보다는 명료성을 위해 싸운 철학자였다. 눈부시고 힘찬 산문으로 글을 썼으며, 또한 인류는 충분히 영감을 받기만 하면 신들과 동일한 위대성의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여겼던 사람이다.
니체와 똑같이 <모든 철학은 역사에 그 힘을 빼앗겼다>고 느꼈던 듀런트는 현재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를 공부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곳이 바로 바로 인류의 본성이 진정 어떤 것인지 찾아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와 이런 철학은 [역사속의 영웅들]의 많은 페이지에서 울려나온다. 이 책은 역사가 가르쳐준다고 그가 믿었던 많은 교훈들을 보여준다. 종교와 정치에서 계급 전쟁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동성애 성향의 사람들이 군대에서 생존할 가능성에 관한 현재의 토론까지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덩산운 역사에서 동성애 성향의 사람들이 사나운 전사가 아니라는 어떤 징후도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몹시 곤란한 느낌이 들 것이다. 8장에서 그가 밝히고 있듯이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에서 에파미논다스와 300명의 그리스 애인들이 끈끈한 동성애로 똘똘 뭉친 테바이 군대는 -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강한 군대인 - 스파르타 군을 패주시켰다. 이로써 그리스에서 스파르타의 지배가 끝을 맺는 것이다.)
[역사속의 영웅들]은 더욱 솔직하고 개인적인 윌 듀런트를 드러내준다. 아마도 나이 탓이거나 아니면 자기 기술의 완성으리 위해 60년 이상을 바친 결과 얻은 더 커진 자유의 느낌 때문일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여기서 윌 듀런트는 신선할 정도로 새롭게 말하고 있다. 12
문명이란 무엇인가?
인류 역사는 생물학의 한 단편斷片이다. 인간은 수없이 많은 종들 중의 하나이고,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싸움과 살아남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들의 경쟁에 종속된다. 심리학, 철학, 정치적 능력 그리고 이상향들은 이 생물학 법칙과 화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의 흔적은 대략 기원전 1백만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ㄷ. 그 중 농업의 흔적은 기원전 2만 5천년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류는 땅을 경작하는 농부로 정착 생활을 한 것보다 40배나 긴 세월을 사냥꾼으로 살았다. 97만 5천 년의 이 세월 동안 인류의 기본적인 성향이 만들어졌고 아직도 그대로 남아 매일 문명에 도전하고 있다. 15
개인은 효율적으로 보호해 주는 공동체에 속해 안전해졌을 때 문명화되었다. 국가들은 효율적으로 보호해 주는 연방 그룹의 충성스런 일원으로 안전해질 때 문명화될 것이다.
남자들이 물려받은 사냥꾼 천성에도 불구하고 문명은 어떻게 성장하였나? 문명은 이 천성을 질식시키려 하지 않았다. 어떤 경제 체제도 축적 본능에 호소하지 않고는, 그리고 훌륭한 보상을 통해 더 우수한 능력을 이끌어내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문명은 받아들였다. 어떤 개인도 어떤 국가도 자기 보존을 위해 싸우려는 의지가 없이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어떤 사횐자 종족, 종교도 번식하지 않고는 유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축적의 욕심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산발적 도둑질, 대규모 강도질, 정치적 부정 부패 등이 널리 퍼질 것이고, 부富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집중되어 마지막에는 혁명을 부를 것이다.
호전성이 억제되지 않는다면 구석구석이 말다툼이고, 이웃이 암살자들에 의해 점령당할 것이고, 모든 도시는 라이벌 갱단들에 의해 분할되고 말 것이다. 성性이 통제되지 않는다면 소녀들은 호색한의 처분만 바라는 처지가 될 것이고, 아내들은 남편의 감추어진 욕망, 즉 여러 젊은 여자들을 향한 욕망에 휘둘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공원뿐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여자들은 전혀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강력한 본능은 통제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 질서와 공동체 생활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인류는 야만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18
이 황제 시대는 걸왕의 사악함으로 인해 끝이 났다. 그느 젓가락을 발명하고 사람들에게 방탕과 폭력의 난장판을 허용하였다. 남자와 여자들이 벌거벗고 황후의 정원에서 뛰어다녔다니까 말이다. 기원전 1123년 무렵 폭동이 일어나 걸왕을 쫓아냈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자신을 일컫는 중화 제국은 완전히 독자적이지는 못한 자유로운 제후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18세기 도이칠란트처럼 부분적으로만 독립적이었다. 이들은 시와 철학, 과학, 예술이 발전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공자는 시경에 이 봉건 시대에 만들어진 시 305편을 모아놓았다.
집을 떠나 스스로도 이해할 길 없는 죽음에 제물로 바쳐진 병사들의 탄식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호소력을 가지낟.
하늘을 나는 저 기러기 얼마나 자유로운지.
덤불 숲에서 얻는 그 휴식도 얼마나 자유로운지!
그러나 우리는 쉬지 못하고 왕에게 봉사하는 가여운 일꾼,
우리 집 기장과 벼를 심을 길이 없구나.
우리 부모는 무엇을 의지하실까?
오 멀고 짙푸른 하늘아,
이 모든 것은 언제나 끝이 날까?....
나뭇잎은 빨갛게 물이 들지 않았나?
남자는 아내를 떠나지 않았나?
우리 가여운 병사들!
우리 또한 남자가 아니던가? 27
그리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스무 살에 그는 선생이 되어 집을 학교로 삼아 무엇이든 학생들이 내는 것을 학비로 받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소크라테스처럼 책보다는 말로 가르쳤다. 우리는 그의 생각을 주로 그의 제자들이 남긴 신뢰하기 어려운 기록에 의존해서 알게 된다. 그는 다른 사상가들을 공격하지 않았고, 논박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명성과 관직을 열렬히 소망하엿으나 번번이 그의 눈에 부도덕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통치자들에게 임명을 받지 못하였다.
기원전 501년경 그가 중도 마을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그에게 기회가 왔다. 애국적인 전통이 전해 주는 말에 따르면, 그야말로 정직성이라는 전염병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다. 32소중한 물건이 길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누구하나 건드리는 사람이 없거나 아니면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이어서 공자는 노나라의 정공에 의해 범죄를 소탕하는 대신을 맡게 되었다. 그는 이 직분을 너무나 잘 해내서 마지막에는 법이 필요 없을 정도가 되었다. 중국의 기록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정직하지 못한 사람과 방종한 사람이 부끄러워서 머리를 감추었다. 충성과 신뢰가 남자들의 특성이, 정숙과 순종이 여자들의 특성이 되었다. 공자는 사람들의 우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좋다. 또 사실이라 해도 오래 지속되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상태였다. 범죄자들은 머리를 모아 선생님의 발치에 덫을 놓았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웃나라들은 노나라를 질투하고 노나라의 힘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꾀 많은 관리 한 사람이 노나라 제후와 공자를 이간질시킬 책략을 궁리해 냈다. 제나라 제후는 정공에게 아름다운 <노래하는 소녀> 한 무리와 아름다운 말 120마리를 보냈다. 노나라 제후 정공은 마음이 홀려 공자의 항의를 무시하고(공자는 좋은 본보기를 통치의 첫번째 원칙으로 여겼다)나라의 일을 소홀히 하였다. 공자는 사직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13년 동안이나 방랑하였다. 슬픈 어조로 그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만큼 덕을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노라>고 말하고 있다. 33
그리고 문학을 발전시켰는데 그 중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네 권의 [베다], 혹은 <지식의 책>들이다. 이 책은 대부분 기도문, 찬가, 종교적 의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파니샤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종교 철학적 대화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이 가르침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러다가 기원전 300년경에 기록되었는데 인도 철학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당신이 나와 함께 그 중 일부를 맛보길 청한다.
<우파>는 <가까이>, <샤드>는 <앉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하나 혹은 여러 명의 학생들이 구루, 곧 선생님 앞에 앉는다는 의미다. 가르침은 -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구루들에 의해 전수되고 있다. - 이해와 깨달음의 세 단계를 보여준다. 첫번째 단계는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내면을 관찰하는 일이다. 감각, 소원, 기억, 추론, 사색 등을 무시해라. 이 모든 지적 작업을 옆으로 밀쳐내라. 이들ㅇ느 외부의 사물을 다루기 위해 도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동을 그리고 행동에 대한 생각을 옆으로 밀쳐내라. 어떤 형태나 내용이나 개체성을 가진 것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면을 들여다보라. 마침내 그런 조작들 뒤에 숨어 있는 마음 자체를 느낄 때까지 그리고 의식 자체의 의식을 느낄 때까지 계속해라. 이것이야말로 모든 현상들 - 모든 지각과 따라서 모든 사물들 - 이 토대로 삼는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실체다. 구루들은 이러한 근원적인 실체를 아트만(자아)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영어의 혼spirit, 영감inspire 등과 마찬가지로 <숨결>을 뜻했던 말로 보인다. 42
반대로 혹시 고행을 통해 생겨났을지도 모르는 성스러움을 고행에 대한 자부심이 더럽히고 있었다. 그는 고행을 포기하고 그림자를 드리운 나무 아래 (여행자는 오늘날에도 이 <보리수>를 볼 수 있다) 앉아 깨달음이 오기까지 다시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인간의 근심과 병, 늙음과 죽음의 원천은 무엇인가?>탄생과 죽음의 무한한 연속의 환상이 나타났다. 이 모든 탄생과 죽음 하나하나가 고통과 슬픔으로 어두웠다. 그는 탄생이 바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째서 탄생은 그치지 않는가? 카르마(업)의 법칙이 새로운 탄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새로 얻은 삶에서 전생의 악행을 보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완전한 정의와 지치지 않는 인내와 모두에게 친절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또 영원한 일에 생각을 결부시키고, 시작되고 소멸되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어쩌면 재탄생을 면제받을 수도 있다. 즉 악의 원천 자체가 말라버리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모든 소망을 접고 오직 모두에게 좋은 일만 할 수 있다면, 인간의 기본적인 망상인 개체성(나 자신이라는 의식)은 극복되고 영혼은 마침내 의식이 없는 무한성과 합쳐질 수 있게된다. 모든 개인적 소망을 말씀히 걷어낸 마음속에 어떤 평화가 나타나는가!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말끔하게 정화시키지 못한 마음이 무슨 평화를 알겠는가? 행복이란 이교도들이 믿듯이 이승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믿듯이 저승에서도 가능하지 않다. 평화는 열망이 없는 냉정한 평온함에서만 가능핟. 그것이 해탈, 니르바나 이다. 이렇듯 7년 동안 명상을 한 다음 고타마는 해탈을 설교하기 위해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46
그 사이 인도는 열기와,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분할로 약해져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을 받았다. 이어서 흉노족, 아랍, 터키, 티모르(타메를란),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의 침략을 받았다. 1686년에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앞으로 올 모든 시대에 인도에서 거대하고 토대가 든든한 영국의 지배권을 세우는 것>이 목표라고 천명하였다. 대부분의 침략자들은 지칝 인도 대륙에 약간의 축복을 가져왔다. 회교 예술과 영국의 행정 같은 것읻. 그러나 모든 침략자들은 전설적인 <인도의 부>를 빼앗아가고 가난에 지친 사람들을 뒤에 남겼다.
흉노, 아랍, 터키, 기독교도 등의 압제나 태양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힌두 사람들은 대규모 건축물, 수많은 조각품, 섬세한 철학, 산문과 시로 이루어진 풍부한 문학을 발전시킬 에너지가 충분하였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에서 지혜로운 소녀가 애인의 찬사를 질문하는 것 같은 저 작은 보물을 어떻게 놓칠 수 있는가? 그 시를 읽으며 우리 마음을 가란앉히자.
맞는지 말해 주세요, 내 사랑, 이것이 맞는지요.
내 두 눈이 당신 가슴속 어두운 구름을 환하게 비칠 때 폭풍 같은 대답을 해주어요.
내 입술은 첫사랑으로 벌어지느 꽃봉오리처럼 달콤한가요?
사라져버린 여러 5월의 추억이 내 사지에 남아 있나요?
내 발이 건드린 자국으로 대지는 하프처럼 노래를 만들어내나요?
내가 나타난 밤의 눈에서 이슬 방울 떨어지고, 아침 빛이 내 몸을 휘감을 때 그 빛은 정말로 기쁨을 느끼나요?
당신 사랑이 나를 찾아 수많은 세월 수많은 세계를 또돈 게 맞나요, 그것이 맞는지요?
당신이 마침내 나를 찾아냈을 때 수많은 세월 품었던 당신의 소망이 내 부드러운 말소리와 내 눈과 입술, 향기로운 머리에서 최고의 평화를 얻었다는 것이?
무한의 신비가 나의 이 작은 이마에 쓰여 있다는 말이 맞나요?
말해 주세요, 내 사랑, 이 모든 것이 정녕 맞는 말인가요?
영국은 이 시에 박수갈채를 보내긴 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야 겨우 인도에 정치적 자유를 돌려주었다. 51
인디라 간디는 모한다스(마하트마) 간디에게서 이름이나 정치적 강령을 물려받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은 뒷날의 남편인 페로즈 간디에게서 온 것으로 그는 <마하트마>와는 친척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의 통치 철학은 그녀의 아버지인 자와할랄 네루와도 거의 정반대의 것이었다.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한 후 첫번째 총리를 맡았던 네루는 신사적인 태도와 타협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60년대 나는 인디라 간디가 지역 문필가들에게 베푼 오찬에서 그녀 바로 옆을 앉을 기회가 있었는데 맨 먼저 그녀의 아름다움에- 이탈리아인의 모습과 빛나는 눈 -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인품과 정신의 힘에 더욱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1966년에 그녀가 인도 총리가 되었을 때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2년 전에 죽은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거의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다.
여기서 우리가 그녀에게 판결을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고 충분히 알지도 못한다. 인도의 경제, 정치, 사회는 무질서, 무능력, 부패에 빠졌고, 아마도 중앙 집권적이고 단호한 권혁을 움켜쥔 단호한 손길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고대 공화정 시대 로마는 법률로써 위기가 닥쳐올 때 1년 동안 독재관을 임명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기간이 만료되고 나서도 독재관이 계속 자리를 고집할 경우 누구라도 그를 제거할 수 있었다. 합법적이든 아니든 그랬다. 53
수많은 훈련된 서기들이 성직자 관리가 되어 파라오와 사제에게 봉사하였다. 또한 봉건적인 귀족들에게도 봉사하였다. 봉건 귀족들은 왕의 봉신 자격으로 각 지방을 다스렸다. 이렇게 해서 정부 기구는 우체국 서비스 같은 조직망을 갖추었다. 세금을 거둬들이고 자본을 축적하고 신용 금융 제도를 발전시키고 자본을 농업, 제조업, 상업 등에 배분해서 어느 정도 국가가 통제하는 계획 경제 수준에 이르렀다.
자유민 노동자뿐 아니라 지방 태수에 종속된 노예들도 제조업 분야에서 일을 했다. 전쟁에서 수많은 포로들을 데려왔고 그들 대부분은 노예로 팔렸다. 이들의 노동은 광산의 개발과 기술의 승리를 쉽게 만들어주었다. 계급 투쟁이 번성하고 파업이 빈번하였다. 어떤 문서는 감독과에게 보낸 노동자들의 탄원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곳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옷도 연료도 음식도 없어요. 주인이신 파라오와 우리를 감독하는 태수님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에게 생계를 유지할 물건을 주시도록 청해 주십시오> 그러냐 계급 혁명에 대해서는 들을 수가 없다. 유대인들의 항의 퇴거, 유대인의 이집트 탈출, 사건을 혁명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고대 이집트의 산업 기술은 르네상스 이전 유럽의 수준 정도로 다양하고 발전된 것이었다. 이집트 장인들은 청동으로 무기와 도구들을 만들었다. 그 중에는 가장 단다난 섬록암도 뚫을 수 있는 천공기와 강력한 대리석 관의 석판을 자를 수 있는 톱도 있다. 그들은 목판 조각의 거장들이었다. 100피트, 약30미터, 길이의 상업용 배를 만들고 죽음이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관을 만들었다. 이집트의 기술은 1800년 이전에 나온 세계의 어떤 기술보다 우수한 것이었다. 이집트 기술은 나일 강에서 홍해에 이르는 수로를 건설하고, 1천 톤에 이르는 오벨리스크를 운반하였다. 61
그는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유일신을 찬양한 몇 편의 시를 받아들여 신이며 태양인 아톤 신을 향한 열렬한 노래를 만들었다. 현존하는 그의 시 중에서 가장 긴 시는 고대 이집트 문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유산이다.
당신의 먼동은 지평선에서 아름답습니다.
오 살아 있는 아톤, 생명의 시작이여,
당신이 먼 동쪽 하늘에 떠오를 때
당신은 그 아름다움으로 온 땅을 가득 채웁니다.
당신은 아름답고 위대하고 반짝이면서 모든 땅 위에 높이 솟아
당신의 빛은 스스로 만드신 온 땅을 둘러쌉니다.
그들은 레, 당신은 그들 모두를 사로잡아 데려갑니다.
당신은 그 사랑으로 그들을 붙잡지요.
당신이 멀리 있어도 당신의 빛은 땅 위에 있습니다.
당신이 높이 오르면 당신의 발자국은 낮이 됩니다.
당신이 서쪽 하늘로 넘어가면
땅은 사자처럼 어둠에 잠기고
사람들은 모두 잠을 잡니다.
그들의 머리는 감싸져 있고 콧구멍은 멈추고
아무도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머리 아래 놓아둔 물건이 모두 도둑을 맞아도
그들은 모르지요.
모든 사자가 동굴에서 나오고 모든 뱀들이 물어도...
세상은 고요하고
그들을 만든 분은 지평선에서 쉬고 계시니.
당신이 지평선에 떠오를 때 땅은 밝아집니다.
당신이 아톤이 되어 환하게 비추면
낮이 되어 어둠을 쫓아 몰아냅니다.
당신이 광선을 보내면
두 나라는 매일 축제를 벌입니다. 당신이 일으켜 세우면
그들은 깨어 일어나지요.
그들은 몸을 씻고 옷을 입고
아침 빛을 숭배하기 위해 팔을 높이 쳐들지요.
온 세상에서 모두 자기 일을 합니다. 67
소 떼는 목장에서 휴식하고
나무와 식물은 꽃을 피우고
새들은 늪지에서 날개를 퍼덕이고
당신을 찬양하기 위해 날개를 펼칩니다.
모든 양들은 춤을 추고
날개 달린 것들은 모두 날고,
당신이 이드을 비추면 모두 살아납니다.
배는 강물을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당신이 비추기에 모든 길이 열립니다.
강에서 물고기는 당신 앞에 뛰어오르고
당신의 광선은 커다란 푸른 바다 한가운데도 비추지요.
여자 속에 배아를 만들고
남자 속에 씨앗을 만들어내는 분,
어미의 몸안에 있는 아들에게 생명을 주는 분
그가 울지 않도록 그를 어루만지고
자궁 속에 있는 그를 먹이고
모두에게 생명이 되는 숨결을 주시는 분!
그가 탄생일에....몸에서 밖으로 나올 때면
당신은 그의 입을 열어 말하게 하고
당신은 그가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당신의 빛이 모든 정원에 양분을 주시니
당신이 나오며 그들을 살고
그들은 당신에 의해 자라납니다.
당신은 모든 일을 하기 위해
계절을 만드시니
겨울은 그들에게 차가움을 가져오고
열기에서 그들은 당신을 맛봅니다.
당신은 먼 하늘에 떠올라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당시은 살아 있는 아톤이 되어 빛납니다.
여명이 되고 빛나고 멀리 갔다가 되돌아옵니다.
당신은 오로지 당신 자신을 통하여
수많은 형태들을 만듭니다.
도시, 마을, 종족, 길과 강을,
모든 눈이 당신을 봅니다.
당신은 땅 위에 낮의 아톤이시니....
당신은 내 마음에 계십니다.
당신의 아들 이크나톤 말고는
다른 누구도 당신을 아는 이 없습니다.
당신은 계획과 힘으로
그를 지혜롭게 만드십니다.
세계는 당신 손 안에 있나니,
당신이 그들을 만들었을 때에도.
당신이 떠오르면 그들은 살고
당신이 지면 그들은 죽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생명의 길이시니
당신이 지기 전까지
사람들의 눈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동안 69
그들은 당신을 통해 삽니다.
당신이 서쪽으로 지면
모든 노동은 사라집니다.
당신은 세계를 세우고
당신의 아들 이크나톤을 위해 그들을 키우십니다.
그의 생명은 길어라;
그가 사랑하는 왕비에게도,
두 나라의 여주인 네페르-네프루-아톤, 네프레티티, 그 또한 영원히 살고 번성하리.70
사람들은 기질과 자부심이 뜨겁고 정착지에서는 참을성이 없어 쉬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그들은 대규모 문명을 창출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곳에 오래 살았다. 수메르 사람, 바빌론 사람, 아시리아 사람들이었다. 바빌론 사람들은 과학과 의학을 발전시켰고, 함무라비 왕은 기원전 1940년경에 대단히 이성적인 법전을 만들었다.
성서에 따르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유목민 한 사람이 기원전 1800년경에 칼데아(갈대아) 지방 (오늘날 남부 이란)에 있는 우르 마을을 떠나 점점 커지는 가족과 양떼를 위해 새로운 땅을 찾아나섰다. 환상 속에서 그는 야훼 신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들었다. 신은 그와 그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제공하였다. 다만 그들은 오로지 야훼만 섬기고 남자 후예들은 신과 계약의 표시로 할례를 받아야 했다. 모세와 십계명에서도 그렇듯이 여기서도 종교적 신념이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단결, 도덕성, 용기 등을 강화시켜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가족을 거느리고 북서쪽을 향해 전진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그곳을 정복하였다. 모세가 나오기 6백 년쯤 전이었다. 그들은 그곳을 신께서 주신 땅이라 생각하였다.
아브라함의 맏아들 야곱은 낯선 사람과 싸움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 천사 혹은 신이었다. 야곱이 그토록 힘껏 싸웠기에 하느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내려주었다. 그것은 <하느님과 겨룬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이것은 종족과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 야곱이 사랑하던 아들 요셉은 질토하는 형들엑 의해 구덩이에 묻혔다가 구조된 후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다. 그 곳에서 꿈 해석을 잘해 풀려난 요셉은 파라오가 총애하는 신하가 되었다. 그는 파라오에게 풍년이 든 해에 곡식을 저장했다가 흉년이 든 해에 백성을 먹여 살리라고 조언하였다. 75
너희가 가난한 자를 마구 짓밟으며 그들이 지은 곡식을 거둬가는구나. 너희는 돌을 다듬어 집을 지어도 거기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탐스럽게 가꾸고도 거기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시온에서 편안한 자들아 화를 입어라. .....상아의 침상에서 뒹굴고, ....양 떼 가운데서 양 새끼를 골라 잡아먹고, 거문고를 뜯으며 제 멋에 겨워 흥얼거리는 것들. 몸에는 값비싼 향유를 바르고 술은 대접으로 퍼마시는 것들....나는 너희 술례절이 싫구나(야훼의 말씀)....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이 조금도 달갑지 않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이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장)
학자들에 의해 첫번째 이사야라 불리는, 더 위대한 예언자는 이러한 사회주의 복음을 세계 문학 사상 가장 고귀한 산문으로 발전시켰다.
야훼께서 재판정에 들어서신다. 야훼께서 당신 백성의 장로들과 그 우두머리들을 재판하신다. [내 포도밭을 다 먹어치운 것은 너희들이다. 너희는 가난한 자에게서 빼앗은 것을 너희 집에 두었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 가난한 백성을 짓밟느냐? 어찌하여 가난한 자의 얼굴을 짓찣느냐? .....아, 너희가 비참학 되리라. 집을 연달아 차지하고 땅을 차례로 사들이는 자들아!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악법을 제정하는 자들아.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만드는 자들아! 너희가 영세민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고 내가 아끼는 백성을 천대하여 그 권리를 짓밟으며 과부들의 재산을 털고 고아들을 등쳐먹는구나. 너희는 어떻게 하려느냐?]80
욥은 이 현상을 보고 놀라서 자신을 낮추고 말한다. <제 자신을 멸시하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야훼는 마음이 누그러져 욥의 도전을 용서하고 그에게 <전보다 두 배>나 많은 것을 선물하였다. 그래서 욥은<양 1만 4천 마리, 낙타 6천 마리, 소 1천쌍, 암나귀 1천 마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그후로도 140년을 더 살고 아들과 아들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4대를 더 보았다.
이것은 행복한 결말이다. 길들여지고 기쁨이 없는 결말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읻. 우리가 누구기에 - 순간의 안개 속에 있는 티끌들 - 우주를 이해하겠는가? 철학은 전체의 빛 속에서 부분을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주 큰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이 그 최초의 교훈이다. 부분과 전체의 조화라는 것은 아마도 건강, 아름다움, 진실, 지혜, 도덕성, 행복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가 될 것이다.
이것은 다시 전도서에 대한 유일한 답변이기도 한다. 이 작은 책은 성서에서 가장 쓰디쓴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도서>라는 말은 히브리말<코헬렛>이라는 단어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으로 <설교자>를 의미한다. 알려지지 않은 저자는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으며, 자신이 다윗의 아들이고 지혜로운 왕이었던 솔로몬인 척하고 있다. 그러나 무자비한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200년경, 그리스 정신에 물든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유대인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85
그녀(아티스?)는 고통에 가득 찬 눈물을 흘리며 나를 두고 떠났다. [아, 우리 운명이 얼마나 슬픈가요! 사포, 맹세해요, 내가 떠나는 것은 내 뜻이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즐겁게 너의 길을 가라, 하지만 나를 기억해다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지 않니. 네가 기억하지 않으면 내가 기억나게 해줄 거야. ....우리가 함께 보낸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가. 너는 내 곁에서 제비꽃과 달콤한 장미로 수많은 화관을 만들어 나부끼는 고수머리를 장식하곤 했지. 수많은 꽃들로 엮은 목걸이가 네 목을 장식했어. 그리고 너는 내 품에서 소중하고 값진 연고로 네 사랑스런 젊은 피부를 문질렀지, 우리가 함께 가지 않은 언덕이 없고 거룩한 장소나 시내가 없지. 이른 봄의 소리들이 나이팅게일의 노래로 숲을 가득 채우면 너는 나와 함께 그곳을 거닐었지.
남자 후배들은 그녀를 깍아내림으로써 그녀에게 복수하였다. 혹은 그녀가 어떤 남자를 짝사랑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꾸며냈다. 수이다스에는 <매춘부 사포>가 선원 파온을 사랑했으나 그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에 절망해서 류카스 섬의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그녀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그녀가 정열, 시, 우미 등에 대한 생생한 기럭을 남겼다는 것 그리고 당대 가장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한 가수로 알케우스를 능가하는 시인이었다는 것을 알 뿐이다. 97
그래서 그 시민과 노예들은 군사 훈련에만 열중해 인간성과 삶의 우아함을 위한 공간이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해군에 의해 보호를 받는 아테네 사람들은 사색과 아름다움에 헌신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극장을 철학의 목소리로 만들고 사원을 신들에 대한 찬양으로 만들었다.
미국인들은 그리스 신들을 낭만적인 상상력의 산물이나 시 문학의 은유로 생각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제우스는 지치지 않는 바람둥이고, 아프로디테는 미의 이상으로만 여긴다. 우리는 고전 문학의 수많은 구절들을 잊고 있다. 거기에 따르면 그리스 사람들은 맛 좋은 동물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심지어 아가멤논은 자기 딸까지도 미풍을 위해 희생 제물로 바칠 각오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기원전 450년경 소피스트들이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서 종교심의 토대를 없애기 시작하기 전까지 종교는 사람들과 가까웠고 그들의 도덕적 생활의 바탕이었다. 집집마다 신상을 갖추었고, 신이 지켜주는 가운데 가족은 서로 결속하였다. 도시마다 수호신이 있었다. 아테네의 수호신은 아테나 여신이었다. 여신을 숭배하느라 시민들은 일시적으로 가혹한 경쟁을 잊어버리고, 여신을 위한 파르테논 신전을 짓기 위해 파산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들의 종교는 그들의 애국심이 그렇듯 주로 도시와 도시를 둘러싼 시골에만 미칠 뿐 올림피아 산을 넘어가지 못하였다. 그들은 동맹 체제를 이루었을 뿐 하나의 국가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통일 페르시아가 도전하였을 때 그들은 하마터면 자유을 잃어버릴 뻔했다. 각각의 지역적 자유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102
그때까지는 부자들로만 한정되어 있던 집정관직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활짝 열렸다. 페리클레스는 대규모 공공사업을 일으켜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었다. 예를 들면 <긴 성벽>의 건축 같은 일이었다. 긴 성벽은 아테네와 그 항구들 - 팔레룸과 피레우스 -을 빙 둘러싸서 적들은 오직 바다를 통해서만 아테네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다는 다시 제국의 함대를 통해 철통같이 수비되었다.
아테네를 헬라스의 문화적 왕관으로 만들려는 마음으로, 그리고 페르시아 군이 살라미스 전쟁 초기에 파괴한 고대의 성소를 재건하려는 마음으로 그는 아테네의 예술가들을 고용하였다. 그리고 남아 있는 실업자들을 동원해서 아크로폴리스를 건축물로 장신한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이 거대한 사업에 돈을 대기 우해 그는 망설이는 시민 의회를 설득해 델로스에 아테네로 델로스 동맹 기금을 옮기도록 만들었다. 활력에 넘친 수도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 이 기금의 일부를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한편, 그러니까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페이디아스와 익티노스 같은 예술가들과 또 다른 건축가들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문학과 철학도 후원하였다. 이 시기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에서는 파벌 싸움으로 시민들의 힘이 소진되면서 문학이 시들어가고 있었지만, 아테네에서는 부와 민주적 자유가 커지는 것과 계몽된 정치적 지도력이 결합되면서 황금 시대가 만들어졌다. 페리클레스, 아스파시아, 아낙사고라스, 소크라테스 등이 함께 디오니소스 극장에 앉아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을 관람하였다면, 아테네는 그리스 생활의 절정과 통합을 생생하게 목격한 것이다. 111
한 장소에서 물건을 싸게 사서 다른 곳에서 비싸게 파는 일이 그리스 사람들 생활의 절반가량을 차지하였다. 아테네에서 그 주요 항구인 피레우스로 가는 9킬로미터 거리의 도로는 낮 동안 상업을 위한 교통으로 언제나 붐볐다. 상선들은 돛과 노예 일꾼의 힘으로 움직였다. (때로는 배 한 척에 노예가 200명이나 있었다.) 이 배는 시속 13킬로미터의 속도로 바다를 항해애 지중해 동쪽과 북쪽 해안에 자리 잡은 100여 군데의 무역 중심지로 향하곤 하였다.
해군이 우세하고 상업이 번성하자 사치는 늘어나고 도덕성은 줄어들었다. 매춘부가 아주 많았지만 그들은 후원자가 여론의 비난 때문에 고생하는 일은 드물었다. 아테네는 이것을 사업으로 인정하고 합법화하였으며 그 종사들에게 세금을 물렸다. 일부 매춘부는 음악과 춤과 다른 오락 형식을 훈련받았다. 최고급 기생인 헤타이라이, 곧 동반자들은 교육 받은 여성들로 지적인 후원자와 문학, 예술, 철학에 대한 토론을 벌여 그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소포클레스를 즐겁게 해주었고 또 다른 한 명은 - 바로 아스파시아 - 페리클레스와 결혼하였다.
매춘부가 직면한 문제는 법이 아니라 소년들이었다. 상인들은 잘생긴 소년들을 수입해 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에게 팔았다. 이들은 잘생긴 소년들을 사서 처음에는 애인으로 이용하고 나중에는 노예로 부려먹었다. 아테네 법은 동성애를 금지하였지만 여론은 그것에 관대하였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인간의 사랑을 논하지만 그것은 동성애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향연]의 토론자들은 동성애를 남녀간의 사랑보다 더 높은 것으로 만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관습을 인구 과다에 대한 공포심 탓으로 돌렸다. 113
분명 아테네의 소수 지식인 사이에서 신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두 가지 일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였다. 널리 여행을 한 중산층이 많아진 것과 떠돌이 학자들을 통해 사교육이 퍼진 것이었다. 이 학자들은 수사학, 문학, 과학, 철학, 정치학 등을 가르쳤다. 그들 중 몇 명은, 특히 프로타고라스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소피스타이>, 곧 <지혜를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아주 높은 수업료를 요구하였다. 그르들이 가르친 학생들 중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신앙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선생들은 돈을 밝히는 궤변가라는 이유로 고발당하였다. 이들에게는 아직도 궤변학파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로 자신의 시대를 시작하였다.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집에서 솔직한 불가지론을 설파하였다. <신에 관해 말을 하자면 나는 그들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르겟다> 아테네 시민 의회는 그에게 아테네를 떠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이 책 사본을 모두 빼앗아 시장에서 불태웠다.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소크라테스의 경력이나 운명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는 아마도 페리클레스 시대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서양 세계의 절반은 아마도 그의 대머리, 넓은 얼굴, 커다란 코, 텁수룩한 수염을 알고 있다. 그의 게으른 아내에 대해 그리고 그가 자기 입장은 밝히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서 화가 나게 만드는 방식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의 역사에서 그의 제자들이 종교적 신앙을 포기하려는 성향을 가졌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런 회의적인 젊은이들 중의 한는 아니토스의 아들이었다. 아니톳는 아테네 민주주의파의 지도자였다. 아니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파괴할 기회가 오기를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 연극과 더불어 우선 이 시대의 정상에 올라가 보기로 하자.
그리스 연극
보통 한 시대의 철학은 다음 시대의 문학이 된다. 한 세대 동안 사색이나 탐구의 영역에서 논쟁이 이루어진 사상이나 문제들은 이어지는 세대에 가서 연극, 허구, 시, 문학의 배경이 되곤 한다. 그러나 그리스 문학은 철학의 뒤를 쫓아가지 않았다. 시인들 자신이 철학자들이었고 자신들의 사유를 행하였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지적인 선봉에 섰다. 그리스의 종교, 학문, 철학을 뒤흔들었던 것과 동일한 보수주의와 과격주의 사이의 갈등이 문학과 연극에서 표현되었다. 역사 쓰기 영역에서도 그랬다. 투키디데스는 철학자 노릇을 하기 위해 역사적 인물을 위한 연설을 만들어냈다. 사변적 사색의 깊이에 예술적 형식의 탁월함이 덧붙여졌기 때문에 아테네 황금 시대 문학은 셰익스피어와 몽테뉴가 나타나기 전에는 거드릴 수 없을 정도의 높이에 도달하였다. 122
아테네 사람들은 [트로이아 여인들]에 분개하였고, 에우리피데스는 소크라테스만 빼고는 아테네에 친구가 거의 없음을 깨달았다. 페리클레스는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기원전 408년 그는 일흔두 살의 나이로 마케도니아의 왕 아켈라오스의 초대를 받아들여 그곳의 수도인 펠라에 머물렀다. 18개월 동안 그곳에서 안락과 평화를 맛보고 나서 신앙심 깊은 그리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406년 왕실의 개들에게 물려 사지가 찢겨서 죽었다고 한다.
죽은 다음 그는 아테네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그가 그토록 열렬히 주장했던 사상들은 다음 몇 세기 동안 주도적인 개념이 되었다. 헬레니즘 시대는 에우리피데스를 소포클레스와 함께 그리스가 배출한 가장 지적인 자극이라고 여겼다. 그의 선배들의 연극은 상대적으로 잊혀졌지만, 그의 연극은 그리스 세계가 무대를 가지고 있는 곳 어디에서나 해마다 공연되었다. 아테네 사람들이 시라쿠사 원정, 기원전 415년 에 실패하였을 때 포로가 된 아테네 사람들을 이탈리아 채석장에서 사슬에 묶인 노예가 되어,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은 운명을 눈앞에 두었다. 이들 중에서 (플루타르크가 전해 주는 바에 따르면) 에우리피데스 연극의 구절을 암송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주어졌다. 18세기와 19세기의 자유주의와 인도주의가 되살아나면서 에우리피데스는 거의 당대의 인물이 되었다. 오직 셰익스피어만이 그와 견줄 수 있다. 괴테는 이렇게 물었다. <세상의 모든 민족이 그의 신발을 들 만한 가치가 있는 극작가 하나를 만들어냈는가? >오직 셰익스피어 한 사람뿐이었다. 129
마침내 가난한 시민들이 의회를 장악하고 투표를 통해 부자들의 부를 국고에 환수하기 시작하였다. 그 돈을 하층 계급 사이에서 재분배하기 위해서였다. 입법자들은 국고 수입을 위한 새로운 세원을 찾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이렇게 세금을 부과한 결과 부와 수입이 전체적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탈세는 어디서나 이루어졌으며 세금 부과만큼이나 다양한 묘안을 찾아냈다. 세금을 걷기 위해 집을 기습하고 재물을 포위하고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다. 나이 든 부자인 이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은 기원전 353년에 이렇게 불평하고 있다. <내가 어릴 때 부유함은 아주 안전하고 찬양할 만한 것으로 여겨져 거의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부자로 보이려 했다. ....지금은 부자라는 것이 가장 고약한 범죄이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나 부자라는 것을 감춘다> 중간 계층과 부유한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질투심에 힘을 주는 것이라고 여겨 불신하기 시작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불평등한 부에 의해 바보가 되어버린 엉터리 평등이라고 여겨 불신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는 계층간의 전쟁이 점점 심해지면서 마케도니아의 필립 왕에게 기습당하였을 때 내부적으로 이미 분열되어 있었다. 그리스의 많은 부자들은 그가 온 것을 혁명에 대한 대안으로 여겨 환영하였다.
사치가 커지고 지식이 해방되면서 도덕적 해이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신을 믿고 위안을 주는 헛소리에 매달렸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죽고 새로운 신들이 탄생하였다. 이집트와 아시아에서 외국의 신들이 수입되었다. 절반쯤 고립된 아테네의 신흥 부르주아지 계급은 전통저긴 신앙을 거의 존중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이렇게 적었다. <이제 인류의 일부는 신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는다.....>135
미술은 계속 번창하였다. 플리니우스 1세는 이렇게 썼다. <코스의 아펠레스는 자신의 앞과 뒤에 오는 모든 화가들을 능가하였다.> 그는 아주 뛰어났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경쟁자들을 칭찬한다는 드문 행동을 감행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쟁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프로토게네스가 가난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아펠레스는 그를 찾아 로도스 섬으로 항해하였다. 아펠레스가 예고도 없이 그의 작업장을 찾앗을 때 프로토게네스는 마침 자리를 비웠다. 나이 든 여자 제자가 아펠레스에게 선생님이 돌아오면 누가 다녀갔다고 말할지 물었다. 아펠레스는 그냥 붓을 집어들고 화판 위에 섬세한 윤곽을 단숨에 그렸다. 프로토게네스가 돌아왔을 때 제자는 돌아간 방문객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로토게네스는 그림을 보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아펠레스만이 이런 선을 그릴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아펠레스의 그림 안에 더욱 섬세한 선을 그려넣었다. 그리고 그 낯선 손님이 다시 오거든 이것을 보여주라고 제자에게 일렀다. 아펠레스는 다시 찾아왔다가 또 다시 집을 비운 경쟁자의 기술에 경탕하였다. 그런데도 두 선 사이에 세번째 선을 아주 섬세하고 미묘하게 그려넣었다. 프로토게네스가 돌아와 그것을 보더니 아펠레스가 자신 보다 낫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항구로 뛰어가서 스스을 붙잡고 환영하여 맞아들였다. 141
플라톤
우리는 정신의 청년기에 플라톤을 발견한다. 그리고 철학을 <소중한 즐거움>으로 여겨 좋아하고, 유토피아를 덕 있는 철학자들의 안내를 받는 일이라고 상상했던 잘생긴 젊은 청년을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서는 예술가와 시인들을 통제하거나 추방하고 독재자가 다스리는 정부를 제안한 사람, 사형의 형벌을 내걸고 국가 종교를 주장한 사람을 발견한다. 그는 어떻게 이러한 변화를 겪엇던가?
플라톤이 기원전 427년에 돈 많은 좋은 가문 태생이었음을 기억해 보자. 그는 오랫동안 열령한 소크라테스 추종자였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싫어한 스승의 생각을 후원하였다. 민주주의 정부에 의해 소크라테스가 처형된 일은, 싫어하는 것을 넘어 경멸하게 만들었다. 그는 민주주의 정치가들이 자유가 무정부 상태로 바뀔 때까지 민중의변덕에 비위를 맞춘다고 여겻다. 태도, 도덕성, 예술 등에서 문명을 보호하는 옛날의 행동과 취향은 널리 퍼진 천박함에 의해 타락하고 말았다. 145
그의 정복의 역사를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3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이수스 강에서, 기원전 333년, 페르시아 60만 대군과 맞닥뜨렸다. 예측되지 않는 기병의 기습을 통해 그들을 혼란에 빠뜨려 그들은 포기하고 다리우스 3세와 함께 재산과 공주들을 뒤에 남긴 채 도망쳤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어서 다마스쿠스, 시돈, 티루스 등을 정복하고 예의 바르게 예루살렘의 항복을 받아내쓰며 시나이 사막을 가로질러 이집트로 가서 페르시아 사람들을 내쫓고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아시아로 돌아와 아라벨라 근처에서 다리우스 3세가 거느린 어마어마한 다국적군을 만났다. 처음에는 그들의 숫자를 보고 놀라 당황하였으나 그의 병사들이 그를 안심시켰다. <걱적 마십시오, 폐하.....그들은 우리에게서 나는 염소 냄새를 견디지 못할 겁니다.>병사들의 용감함, 기병대, 방진 그리고 현명한 지휘를 잘 받은 것 등 때문에 그들은 이날도 승리하였다. 다리우스는 다시 도망치다가 자신의 종졸에게 살해당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을 정복하고 수사로 행군해 가서 그곳 정부가 모아놓은 보물을 찾아내고 그 중 일부를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승리감과 황금에 도취해 그는 내켜하지 않는 군대를 이끌고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갔다. 인더스 강을 가로질러 가서 포루스 왕에게 승리하였다. 그리고 갠지스 강까지 갈 것이라는 의도를 밝혔다. 그러나 병사들은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다. 그들은 가족과 그리스 문명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승리는 이제 따분한 일이었다. 153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판관들은 이탈루스가 오이노트리아의 왕이 되었을 때, 그곳 사람들이 자신들을 이탈리아 사람(이탈루스 사람)이라 불렀다고 보고한다. > 오이노트리아는 이탈리아 장화의 발가락 부분이다. 그곳은 포도가 풍부하게 산출되는 곳이기에 <포도주의 땅>이라고 불렸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이탈루스는 시칠리아를 정복한 시쿨리 사람들의 왕이었다. 로마인들이 헬레나 사람들은 모두 북부 아티카에서 나폴리로 이주해 온 그리스 사람들, 그래치(혹은 그래키)라는 말로 부르듯이, 그리스 사람들도 포 강 이남의 반도 전체를 점차 이탈리아라는 이름으로 일컫게 되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농업을 주업으로 삼았다. 소수의 사람만이 도시 주민이었다. 노예들에 의한 경쟁은 자유 노동자들의 임금을 깍아내렸고 그래서 대부분의 도시민들은 빈민 생활을 하였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하는 자유민들 사이에서 저항은 드물었다. 그러나 노예 반란은 잦은 편이었다. <첫번째 노예 전쟁>기원전 139년, 은 첫번째가 아니었고, 스파르타쿠스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은, 기원전 71년 마지막 노예도 아니었다. 158
중동과 스페인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무역을 하던 페니키아 상인들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에 중개 무역 기지들을 만들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같은 전설에 따르면 티루스 왕의 딸인 디도는 우티카 근처에서 카르타다쉬트, 혹은 <신도시>라는 이름의 셈족 정착지를 발견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그것을 카르타고라고 불렀다. 카르타고에 정착한 페니키아 사람들은 아프리카 원주민을 고용하거나 노예로 삼아 대규모 농업을 이루고, 상선을 제조하고, 티루스와 시돈사이, 스페인과 영국 사이로 상품을 실어다가 무역을 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 카르타고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인구 25만 명으로, 절정기 아테네의 세수稅收 보다 20배나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엿다. 궁전과 신전들은 2천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서도 영감을 줄 정도로 찬란했다. 플로베르의 [살람보]를 생각해 보라. 인기 있는 의회와 상인이 지배하는 원로원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졌다. 5단으로 노가 배열된 노예선 500척이 도시국가 카르타고의 비밀스런 자랑거리였다. 이 배들은 남서부 지중해를 지배하였다. 이 배들이 시칠리아 섬으로 군대를 실어왔을 때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를 파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내용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기원전 264년에서 146년까지 전쟁을 했다는 것, 어느 쪽이 시칠리아, 코르시카, 스페인을 점령하고 지중해를 <우리 바다>라고 부를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전쟁이라는 내용 말이다. 세 번에 걸친 카르타고 전쟁 (포에니 전쟁)에서 많은 영웅들이 역사에 등장하였다. 레굴루스, 하밀카르, 한니발, 하스두르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등이다. 167
<그는 멋대로 살았지만 쾌락이 그의 임무를 방해하는 일은 없었다. 남편으로서의 품행이 좀더 고결했을지도 모른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그는 자신의 길을 재빨리 만들어나갔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행복한 수단인 군대를 이용했다. 병사들을 동료로 대해 주고, 그들의 일, 행군, 위험 등을 함께 나누었다. <그가 유일하게 신경을 쓰는 것은 지혜와 용기에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능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으나 미신적 습관은 많았다. 또 로마인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무자비했다. 그의 상상력과 감정은 언제나 지성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는 절반은 사자, 절반은 여우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안에 있는 여우가 사자보다 더 위험하다는 평이었ㄷ. 평생의 절반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삶의 마지막 10년은 내전으로 보냈으며,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유머 감각을 유지하였고, 자신의 잔인성을 2행짜리 경구시로 우아하게 감싸고, 로마를 자신의 웃음으로 가득 채우고, 적을 10만 명쯤 만들고, 자신의 목표를 모두 달성하였으며, 그러고도 침대에서 죽었다.
영혼(아니마)이란 <생명의 호흡>이다. 이것은 신체 곳곳에 아주 섬세한 물질처럼 퍼져 각 부분을 움직이게 해준다. 그것은 몸과 더불어 성장하고 나이를 먹다가, 몸이 죽으면 그 원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생명은 자유로이 간직하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임시로 빌린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잘 이용해야 한다. 우리의 힘을 다 쓰고 나면 우리는 잔칫상에서 일어나는 손님처럼 우아하게 감사를 표시하면서 생명의 식탁을 떠나야 한다.
죽음 자체는 두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저승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이 죽음을 두렵게 만든다. 그러나 저승이란 없다. 지옥은 이승에서 고통을 받는 것으로, 그것은 무지, 정열,싸움을 좋아함, 욕심에서 온다. 천국은 이승의 <현명한 사람들의 평화로운 신전>에 들어 있다.
미덕이란 신들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즐거움을 조심스럽게 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 인도된 능력과 감각이 함께 조화롭게 활동하는 것을 뜻한다. 176
<그는 멋대로 살았지만 쾌락이 그의 임무를 방해하는 일은 없었다. 남편으로서의 품행이 좀더 고결했을지도 모른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그는 자신의 길을 재빨리 만들어나갔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행복한 수단인 군대를 이용했다. 병사들을 동료로 대해 주고, 그들의 일, 행군, 위험 등을 함께 나누었다. <그가 유일하게 신경을 쓰는 것은 지혜와 용기에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능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으나 미신적 습관은 많았다. 또 로마인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무자비했다. 그의 상상력과 감정은 언제나 지성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는 절반은 사자, 절반은 여우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안에 있는 여우가 사자보다 더 위험하다는 평이었ㄷ. 평생의 절반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삶의 마지막 10년은 내전으로 보냈으며,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유머 감각을 유지하였고, 자신의 잔인성을 2행짜리 경구시로 우아하게 감싸고, 로마를 자신의 웃음으로 가득 채우고, 적을 10만 명쯤 만들고, 자신의 목표를 모두 달성하였으며, 그러고도 침대에서 죽었다.
이런 남자는 화학적으로 보면 고향에서는 혁명을 억누르고 해외에서는 반란을 억누르는 데 필요한 특질드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3만 5천 명의 군대는 마리우스가 임시로 구성한 농부와 가난뱅이 정부를 재빨리 정복하였다. 그러나 술라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밖으로 나간 다음 - 그리스의 미트리다테스 4세를 다시 로마에 충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 마리우스는 또 다른 군대를 징집해 노예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로마를 점령하였다. 전투에 취해서 그리고 여러 해 동안의 증오로 뜨겁게 달아올라서 승리자들은 수천 명을 죽이고 귀족들의 머리를 창끝에 매달고 시내를 행군하였다. 187
아버지가 죽자 그녀와 이혼하고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였다. 킨나는 마리우스의 혁명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술라가 권력을 잡자 그는 카이사르에게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라고 명령하였다. 카이사르가 거절하자 술라는 그의 세습 재산과 코르넬리아의 지참금을 몰수하고 그를 사망자 명단에 넣었다. 카이사르는 도망치다가 해적들에게 잡혔으나 탈출해서 로도스로 가서 수사학과 철학을 배웠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에너지를 둘로 나누어 정치와 사랑에 헌신하였다. 그는 잘생겼지만 머리가 자꾸 빠져서 고민이었다. 코르넬리아가 죽자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했다. 이것은 순전히 정략적인 결혼이었기에 그는 당시 유행하던 대로 거침없이 애인을 만들었다. 그 숫자가 많고 남녀를 가리지 않았기에 쿠리오는 그를 <모든 여자의 남편이며 모든 남자의 아내>라고 불렀다. 귀족들은 그를 두 배로 미워하였다. 그가 정치적으로는 자신들의 특권을 망가뜨리고, 사적으로는 자신들의 아내를 유혹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이사르가 처음에는 무자비한 선동가이며 거침없는 난봉꾼이었다가 책임감에 의해 천천히 역사상 가장 신중한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의 결점을 보고 좋아하더라도 그가 위대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가 여자들을 유혹하고 교도관들을 매수하고 책들을 썼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 자신을 그와 대등하게 여길 수는 없다.
기원전 68년 서른두 살의 나이로 그는 스페인에서 재무감사관 노릇을 하도록 선출되었다. 그는 폭도 진압을 위한 원정 부대를 지휘하였고 또한 자신도 넉넉하게 약탈을 해서 그 돈으로 빚의 일부를 갚았다. 195
이제 지중해 세계 전체가 무질서한 상태로 진정한 통치를 기대하면서 옥타비아누스의 발 아래 놓였다.
그는 공화정의 용어와 형식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공화제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었다. 그는 원로원의 의장 자리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가 추진한 것이 아니거나 그의 동의를 얻지 못한 것은 원로원에 의제로 올라가지 못하였다. 그는 평민 의회가 열리는 것을 승인하엿다. 그리고 집정관 자리에 열세 번이나 입후보하고 나머지 사람들처럼 투표해 달라고 호소하고 다녔다. 관습에 대한 양보였다. 5세기까지도 집정관과 호민관들은 계속 투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능은 행정적인 것이기 보다는 관리직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왕에게 양도하였다. 정치적인 부패는 계속되었지만 각 후보가 뇌물을 받지 않도록 각기 재정 보증인을 내세우게 함으로써 그 규모를 줄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치명적인 선례를 남겼다. 공공 질서와 자신의 통치권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도시 안에 3개 보병대를, 도시 근처에 6개 보병대를 자신의 휘하에 두었던 것이다. 이들 9개 보병대는 근위대를 이루었고, 이들은 41년 클라우디우스를 권좌에 내세움으로써 정부는 이들에게 종속하게 되었다.
그토록 많은 권위로 무장하고, 또한 당시 부상하던 상업 계층에서 찾아낸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아우구스투스는 경제와 국가를 위해 생산적인 질서를 복구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토지 소유자를 늘리고 책임감 있는 농부들에게는 이자 없이 돈을 빌려주었으며 새로운 광산, 도로, 항로 등을 개척하고 산적과 해적을 통하였으며 로마에 물을 대줄 수로를 보호하고 넓혔다. 209
형식을 얻기 위해 밤낮 그리스 문학을 연구하라. 새롭거나 너무 낡아서 쓰이지 않게 되었거나 아니면 1피트 반(약 46센티미터)이나 되는 것 같은 긴 단어는 피하라. 당신의 작품이 이 모든 것을 견디고 살아남거든 그것을 8년 동안 감추어두어라. 그러고 난 다음에도 그것이 당신을 즐겁게 하거든 그제서야 출판하라. 그러나 이것이 성숙해진 당신을 부끄럽게 할 수도 잇다는 점을 기억하라. 희곡을 쓸 경우에는 세 개의 통일성을 지켜라. 줄거리, 시간, 장소의 통일성이다. 삶과 철학을 연구하라. 연구와 이해가 없는 완전한 양식이란 너무 약해서 사용할 수 없는 공허한 빈 그릇과 같다.
호라티우스는 자신의 작품과 그것이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청동보다 더 오래 견디고 피라미드 꼭대기보다 더 높은 기념비를 세웠다......나는 완전히 죽지 않으리라> 그는 기원전 8년에 재산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몸은 대지에 넘기고 메케나스의 무덤 곁에 안식처를 찾았다.
이 시대 세번째 시인이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영광스럽게 만들었다. 혹은 (이 경우 아우구스투스의 생각에 따르면)고약하게 시대를 망신시켰다.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는 아우구스투스가 성적 자유에 반대하는 법안을 만든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저 쾌락주의 로마인들의 모델이자 계관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해방된 로마 여성들의 매력을 탐색하는 동안 이국 땅에서 죽음을 찾아 헤매는 전사들을 비웃었다. 부유한 중산층인 그의 아버지는 법학을 공부하라고 그를 수도로 보냈다. 그는 아들이 시인이 되려한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오비디우스는 정말로 성격에 맞지 않는 판사가 되기는 했지만 도중에 난잡한 성생활을 예찬하는 시집을 한 권 썼다. 216
심각하게 탐구적인 애정 행각을 겪고 나서 그는 [사랑의 기술]기원전 2년 이라는 안내서를 썼다. 하지만 현명하게도 독자들에게 이 교훈을 오직 창녀와 노예들에게만 사용하라고 권하였다. 이 책들과 뒤에 나온 책들이 너무나 잘 팔려 오비디우스는 명성과 오만의 절정에 도달하였다. <내가 이렇듯 온 세상에서 칭송을 받은 동안에는 엉터리 법률가한 두 명이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는 이 엉터리 법률가들 중 한 명이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13년에 이미 통과시킨 율리우스 법안에 효과를 높일 방도를 궁리하고 있었다.
오비디우스는 번영을 누리고, 세 번이나 결혼하고, 파비아와 새로운 행복을 찾고 마침내 바람의 열기를 식혔다. 7년에 그는 가장 오래 남은 작품 [변신 이야기]를 썼다. 이것은 물건, 동물, 사람, 신들에게 나타난 유명한 변신의 사례를 생동적이고 유려한 6운각 시행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거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 그림, 조각상들이 바로 이 보무 상자에서 주제를 얻었다. 마지막에 자신만만한 이 작가는 자신의 불멸성을 선언하였다. <나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살아남으리라.> 8년에 황제가 쉰한 살의 그를 저 흑해 연안의 루마니아 해안에 자리잡은 춥고 안개 낀 도시 토미(오늘날의 콘스탄차)로 귀양을 보냈을 때라면 이러한 예언을 내놓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은 아내나 친구들에게 자주 시를 써서 보냈다. 이들은 뒷날 모아져서 [비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우울한 항구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따뜻한 여성들과 즐거운 하늘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졌다. 형식과 표현이 여전히 아름다운 그의 시구들은 전에는 보이지 않던 감정의 깊이를 드러내 보인다. 그는 겸손하게 용서를 구하였지만 답변은 오지 않았고 176년, 망명지에서 죽었다. 그래도 그의 내면에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남아 있었다. 그의 세번째 아내는 그가 죽은 후 홀로 남겨졌지만 마지막까지 그를 향해 정절을 지켰기 때문이다. 217
역사의 유머 덕분에 그는 <기원전 (그리스도 이전)> 3년이나 4년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성 마태오 복음서(마태복음)에 따르면 (마태오 2장 15절) 위대한 헤로데 왕이 죽기 전에 태어났다. 왕은 기원전 4세기에 죽었다. 예수는 유대아 지방 베들레헴 사람이거나 아니면 갈릴레아(갈릴리) 지방 나자렛 사람이다. 마태오 복음서는 다윗 왕의 계보에서 시작해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까지 그의 조상을 나열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그 영광을 회복시킬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이 되리라는 유대인의 신앙과 잘 들어맞는다. 그러나 마태오는 이렇게 덧붙였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마태오 1장 18절) 루가복음은 이 기적을 확장시켜 위대한 문학으로 만들었다.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소시글 들은 그녀의 사촌 엘리사벳은 이렇게 덧붙였다.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이것은 가장 사랑스러운 가톨릭 기도문의 하나가 되었다. 마리아는 장엄한 <마리아 송가>로 이에 화답하였고, 이 송가는 많은 위대한 음악에 영감을 주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설레입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루가 1장 46 ~ 48절 )239
그리스도가 혁명가였든 아니든 그는 로마에 의해 명백하게 혁명가로서 처형당하였다. 타키투스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였다. 빌라도 총독의 관청 뜰에 모일 수 있을 정도의 적은 군중이 그리스도를 처형시키라고 외쳤다. 이제 그가 골고다 언덕에 올라갈 때, 루가의 표현을 빌자면<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뒤따랐는데> 그 중에는 슬픔으로 가슴을 치는 여자들도 있었다. 분명히 이 처형은 유대인 민중의 인정을 받지는 못하였다.
십자가는 <세번째 시간에>, 그러니까 아침 아홉 시경에 세워졌다. 마르코는 강도 두 사람도 십자가형을 받았다고 보고한다. 그들은 예수를 모욕하였다. 루가는 둘 중 하나가 그에게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사도들 중에서는 요한만 그 자리에 있었다. 그와 함께 세명의 마리아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 그의 누이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였다. 그리고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여자들도 있었다. 로마의 관습에 따라 병사들은 죽어가는 남자의 옷을 찢었다. 그리스도는 옷을 한 점박에 걸치지 않았기에 그들은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 이 자리에 시편 22장 18절의 구절을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겉옷은 저희끼리 나눠 가지고 속옷을 놓고는 제비를 뽑습니다.] 이 시편은 이런 말로 시작된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 마르코와 마태오는 죽어가는 그리스도에게 이토록 절망적인 인간의 말을 주었다. 빌라도 앞에서 그를 떠받치던 저 위대한 믿음이 이 쓰라린 순간에 시들어 가슴을 찢는 의심이 되었던 것일까? 251
여러 차례에 걸친 이러한 원정들은 신앙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중동은 회교도 지역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업적 목적도 이루지 못하였다. 회교도들이 이룩한 부, 과학, 예술, 학문 등은 패배한 십자군 원정대의 마음에 의심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수많은 이단의 형태로 기독교 정교 신앙을 괴롭혔다.
다른 통치자들도 그렇듯이 인노켄티우스 3세는 이단을 배신이라고 여겼다. 전체의 질서와 평화에서 부분이 이탈하려는 분열적인 행동을 본 것이다. 특히 발칸 반도에서 프랑스로 들어온 새로운 신앙을 가장 위험한 것을 여겼다. 이 신앙은 몽펠리에, 나르본, 마르세유, 툴루즈, 오를레앙 등지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훨씬 더 북쪽 지역인 수아송과 랭스에서도 강력한 소수 신앙 집단을 이루었다. 프랑스 남부에 자리잡은 이들 순결파는 세계를 정신과 선善을 나타내는 신과, 물질과 악을 나타내는 악마로 나누었다. 그들은 모든 육체는 악마의 것이고 성관계는 불결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스도의 산상 설교를 자신들의 윤리로 받아들이고 전쟁이나 폭력의 사용을 일절 거부하였다. 그들은 지옥과 연옥을 부인하고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가 그리스도 교회라는 사실을 거부하였다. 성베드로는 로마에 간 적이 없다. 그리고 교황청을 세우지 않았다. 교황들은 사도들의 후계자가 아니라 황제들의 후계자이다. 그리스도는 머리를 누일 자리도 없었는데 교황은 궁전에서 산다. 이들 귀족과 같은 대주교들과 주교들, 세속적인 사제와 뚱뚱하게 살찐 수도사들은 옛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살아난 것이다. 로마 교회는 바빌론의 창녀이며 교황은 반그리스도라고 주장하였다. 261
그리고 [예와 아니오]에는 157개의 질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각 질문에 대해 긍정의 답변을 위한 이유와 부정의 답변을 위한 이유를 제시하였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혜를 향한 첫번째 열쇠는 자주 부지런히 질문하는 것이다.....의심을 통해 우리는 탐구에 이르고, 탐구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기 때문이다>[기독교 신학]에서 그는 오직 기독교도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비이성적인 것이라 해서 거부하였다. 그는, 신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주신다고 주장하엿다. 이단은 폭력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억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1140년 가톨릭 신앙에 열광적인 성 베르나르가 상스에서 모인 주교 회의(종교 재판)에서 아벨라르의 견해 중에서 몇 가지를 비난하였다. 이미 나이가 들었고 고통으로 몸이 약해져 있었지만 철학자는 이 사건을 교황에게 가져가기 위해 로마로 길을 떠났다. 부르군트에 있는 클뤼니 수도원에 도착해서 그곳의 수도원장인 피에르의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인노켄티우스 2세가 이미 상스 주교 회의 판결을 인정하고 그에게는 항구적인 침묵과 수도원 유폐라는 형벌을 부과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체적, 영적으로 피로에 지친 아벨라르는 클뤼니 수도원의 어둠속에 숨어버렸다. 그는 경건함과 침묵과 기도로 동료 수도사들에게 교훈을 주었다. 엘로이즈에게는 편지를 써보냈다.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신앙이 교회의 가르침 안에 있다고 확인하였다. 그는 그녀를 위해 중세 문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송가를 만들었다. 272
돈은 문명의 뿌리다. 상인들과 은행가들의 기금과 교회의 기금이 필사본들을 사들일 돈을 지불하였고, 이 필사본들이 고대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정신과 감각을 자유롭게 만든 주요한 힘은 그런 사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산층의 힘이 커지면서 나타난 세속주의 덕분이었다. 또한 대학과 지식과 철학의 성장 덕분이었으며, 역사와 법을 연구해서 정신이 현실적으로 예민해진 덕분이었다. 더 폭넓은 세상과으 만남을 통해 정신이 확장된 덕분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신앙의 교리를 의심하고 성직자가 속인과 똑같이 쾌락주의적이라는 것을 보면서 교육받은 이탈리아인들은 지적, 윤리적, 금기들에서 벗어났다. 자유로워진 감각은 자연, 여자, 남자, 예술에 드러난 아름다움에서 노골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새로 얻은 자유는 놀라운 1세기 동안 (1434 ~ 1534) 그들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나서 도덕적 혼란, 통합되지 않는 개인주의 그리고 민족의 굴종 등으로 그들을 파멸 시켰다. 르네상스는 두 가지 규율(중세와 종교 개혁) 사이의 막간극이었다. 282
그는 폴리치아노와 조반니 라스카리스를 이탈리아 여러 도시들과 외국으로 보내 사본들을 사들이도록 햇다. 아토스 산에 위치한 어떤 수도원에서 라스카리스는 2백 권의 책을 가져왔는데 그 중 80권은 당시 서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책들이었다. 폴리치아노에 따르면 로렌초는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 심지어는 가구를 저당 잡히면서까지 책을 구하기를 소원하였다. 그는 살 수 없는 사본들을 베끼기 위해 서기들을 고용하였고 그 대신에 또 다른 수집가들, 예를 들면 헝가리의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왕이나 우르비노의 페데리고 공작 같은 사람들이 서기를 보내 메디치 도선과에 있는 사본을 베낀느 것을 허용하였다. 로렌초가 죽은 다음 이 수집품들은 코시모의 수집품과 함께 산 마르코 수도원에 보관되었다. 1495년에 모두 합쳐서 1,039권에 이르렀고, 그 중 460권이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뒷날 이 책들을 위한 휼륭한 건축물을 설계하였고, 후세 사람들은 이 도서관에 로렌초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즉 로렌초 도서관이 그것이다. 베르나르도 첸니니가 피렌체에서 인쇄소를 차렸을 때, 로렌초는 친구인 폴리치아노나 우르비노의 페데리고 공작처럼 이 새로운 기술을 경멸하지 않았다. 그는 즉석에서 활자의 혁명적인 가능성을 알아보았던 것 같다. 그는 학자들을 고용해서 가능한 한 정확하게 고전 작가 작품이 인쇄될 수 있도록 여러 텍스트들을 정밀하게 검토하여도록 하였다. 이런 일에 용기를 얻은 바르톨로메오 디 리브리는 신중한 학자 테메트리우스 카트콘딜레스의 도움을 받아 호메로스 초판본을 간행하였다. 294
그런데도 이것은 그의 가장 위대한 그림 중의 하나이다. 원래 그가 가진 계획은 철저히 기하학적인 원근법의 모형이었다. 전체 공간을 점점 작은 정사각형 형태들로 분할하는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속에 숨어 있는 수학자가 언제나 그의 속에 숨은 화가와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자주 협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속에 숨은 화가는 이미 완전히 성숙하였다. 이 작품에서 성모 마리아는 이미 레오나르도의 작품에 마지막까지 남게 되는 자세와 형태를 갖추고 있다. 젊은 화가로서는 특기할 만한 능력으로 그는 동방 박사들에게 노인의 성품과 표현을 부여하고 있다. 왼편에 있는 <철학자>는 말 그대로 절반쯤 회의적인 명상에 잠긴 사람을 그린 갈색의 습작이다. 마치 화가가 머지않아 그리스도 이야기를 못마땅해하면서 미지 못하는 정신으로, 그러면서도 깊은 신앙심으로 바라볼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이 모습을 주위로 약 50명의 인물들이 모여들어 있다. 모든 종류의 남자와 여자들이 서둘러 이 마구간으로 찾아와서 삶의 의미와 세계의 빛을 탐욕스럽게 구하고 마침내 탄생의 흐름 속에서 답을 찾은 것만 같다.
이 미완성 걸작은 시간에 의해 상당히 지워진 모습으로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걸려 있다. 스코페토 수도원의 주문을 완성한 사람은 필리피노 리피였다. 레오나르도 그림을 시작하며너 너무 풍부한 상상을 하였고, 세부적인 것들에 실험적으로 빠져들면서 자기를 잊었다. 원래의 주제를 넘어 인간, 동물, 식물, 건축 형태, 바위, 산, 강, 구름, 나무들의 끝도 없는 모습을 신비스러운 명암으로 바라보았다. 그림의 기술적인 완성보다는 그 철학에 빨려들어갔고, 의미를 드러내느라 바빠 이 인물들에게 색을 주는 일처럼 덜 중요한 작업은 다른 사람들 손에 넘긴 것이다. 307
예술가이면서 사상가이기도 했기에 레오나르도는 프레스코 벽화를 사색에 대한 적으로 여겨 피하였다. 갓 발라서 축축한 벽에 그리는 그림은 벽면이 마르기 전에 빨리 완성되어야 한다. 레오나르도는 템페라 물감을 젤라틴 성분과 섞은 물감으로 마른 벽면에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이런 방법은 그에게 깊은 생각과 실험을 허용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물감은 벽면에 단단히 달라붙지 않았다. 레오나르도가 살아 있을 때 이미 - 식당의 습기나 비가 많이 내릴 때는 이따금 식당에 물이 차기도 해서 - 그림은 조각이 떨어지고 망가지기 시작하였다. 바사리가 그림을 보았을 때 이미 윤곽이 흐려졌다. 완성된 지 60년이 지나서 로마초가 보았을 때는 이미 수선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수도사들은 나중에 사도들의 다리를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을 내서 이런 붕괴를 재촉하였다. 1656년. 전세계로 퍼져나간 이 그림의 판화 복제는 망가진 원래의 그림에서 복제한 것이 아니라 레오나르도의 제자인 마르코 도지오노가 만든 불완전한 모작을 복제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전체의 구도와 일반적인 윤곽을 연구할 수는 있지만 명암이나 미묘함은 탐구할 수가 없다. 그러나 레오나르도가 그림을 떠났을 때 작품이 어떤 결함을 가졌든 간에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르네상스 시대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는 것을 즉석에서 알아보았다. 312
1496년 그는 로마를 방문해 달라는 한 추기경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곳에서 프랑스 대사와 계약을 맺고 [피에타]를 조각하였다. 그것은 오날늘에도 성 베드로 성당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성모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아들을 무릎에 안고 있다. 미켈란제롤는 겨우 스물세 살이었다. 이 그룹 조각상은 그의 젊음이 범했을 결함을 보여주고 잇다. 과도한 의상, 주름, 어머니의 손은 몸에 비해 지나치게 작고 그녀의 왼손은 이해할 수 없게 공중에 매달려 있다. 자식 더 젊은 여인으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 그러나 맥빠진 채 축 늘어진 그리스도의 모습과 흐르는 돌의 의상을 지닌 이 작은 그룹은 모성애와 죽음 사이에 벌어진 경쟁으로서 인류사의 본질을 포함하고 잇다. 라파엘로의 방들처럼 이 작품도 르네상스의 열기와 경쟁 가운데 한 예술가가 얼마나 빨리 성숙할 수 있는 지 보여준다.
가난해진 친척들의 부름이 이제 유명해진 조각가를 피렌체로 불러들였다. 그곳에서 1501년에 대성당 위원회는 그에게 4.9미터 높이의 대리석 덩어리로 인체를 조각하라는 주문을 내주었다. 이 대리석 덩이는 하도 울퉁불퉁하게 생겨서 1백 년 동안이나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었다. 미켈란 젤로는 2년 반 동안이나 이 다루기 힘든 재료를 매달려서 일했다. 그는 대리석의 높이를 거의 다 이용하였고, 그렇게 해서 위풍당당한 [다윗]상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도시의 적들에게 반항하면서 여러 세기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334
이런 상황에서 과학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과학은 13세기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아래서 도달했던 수준보다 아래로 떨어졌다. 과학은 예술처럼 속인들과 교회의 통합된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유일하게 번영을 누린 과학은 의학이었다. 남자들은 건강을 위해 식욕 말고는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하였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돈을 너무 많이 받는다고 욕을 먹었고 높은 사회적 지위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주황색 의상으로 질투를 샀다. 그들은 시체 해부에 대한 중세의 적대감을 없앴다. 이따금 성직자들이 그들을 도와주었다. 1319년 볼로냐 대학의 의학부 학생들이 공동묘지에서 시체를 훔쳐 대학교 선생에게 가져갔고,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이 시체를 해부하였다. 그들은 고소되었으나 곧 방면되었다. 이 순간부터 시민 관청들은 처형된 경우나 연고가 없는 범죄자의 시체들을 <해부용>으로 쓰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머지않아 로마의 교황청 학교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모든 의학부에서 해부가 시행되었다. 그렇게 해도 1500년까지 해부학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가 이미 가졌던 지식 수준에 도달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외과의 수술 목록과 기구들이 고대 이집트의 다양성과 능력에 접근하면서 외과 분야는 빠르게 명성이 올라갔다. 1500년에는 많은 유럽의 외과 의사들이 철학을 의학에 덧붙여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그들은 공부나 가르치는 일에서 아주 손쉽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곤 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귀족이기도 했으며, 시대의 만병통치 약이었다. 342
침입자들은 거리로 몰려가면서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였다. 산스피리토의 병원과 고아원으로 들어가 거의 모든 환자를 죽였다. 성베드로 성당과 바티칸 궁전은 샅샅이 약탈당하였다. 라파엘로의 그림이 그려진 방에는 말들이 매여졌다. 모든 궁전은 방어를 위해 몸값을 냈다. 그러나 잠시 뒤에는 다른 떼거리가 몰려와 또 다시 몸값을 치뤄야만 했다. 돈을 숨겨놓은 곳을 알아내기 위해 부모들 앞에서 아이들을 높은 창문에서 흔들어댔다. 어떤 추기경은 구덩이에 던져져 몸값을 가져오지 않으면 산 채로 매장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망자 수는 계산할 수가 없었다. 유린은 8일 동안 계속되었다. 클레멘스 교황은 천사성의 탑에서 고문당하듯이 드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다. 아직 스페인에 있어 카를은 로마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으나 유린의 야만성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일이 이렇게 과도하게 진행된 것에 대해 책임을 부인하였지만 그래도 교황의 당황함을 이용하였다. 6월 6일 그의 대표들은 어쩌면 그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클레멘스에게 수치스런 평화안에 서명하라고 강요하였다. 천사성에 있던 사람들은 교황과 교황을 수행한 13명의 추기경을 빼고는 모두 다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교황청 전체가, 물질과 영혼은 가리지 않고 비극적인 파국에 빠지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클레멘스의 배신과 교황청의 죄악, 교황청 직원들의 탐욕과 부정 부패 그리고 로마의 죄악이 어는 정도는 이런 형벌을 받을 만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355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겨우 몇 개뿐이지만, 어쨌든 그래서 수없이 많은 성모의 수태를 알림, 그리스도의 탄생, 방문들, 죄 없는 사람들의 학살, 이집트로 도망침, 그리스도의 변모, 최후의 만찬, 십자가의 처형, 예수를 무덤에 누임, 부활, 승청, 그리고 순교 등의 그림들이 나왔다. 그리스 사람들도 자신들의 신앙을 영원히 그리는 데 그렇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베네치아 유파를 탄생시키는 데 몇 가지 외부의 자극이 도움이 되었다. 다른 도시에서 온 두 명의 화가가 비잔틴 전통의 어둡고 진지한 얼굴들을 바꾸었다. 그리고 조토가 그린 성인들의 생명 없는 모습을 대체하였다. 메시나의 안토넬로는 플란더즈 지방을 여행하면서 당시 아직 이탈리아에서 사용되던 템페라 물감 - 안료를 젤라틴 물질과 섞은 것 - 과 비교해서 유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마감이 더 밝고, 더 오래 지속되고, 또 색채의 등급이 더욱 섬세한 것을 보았다. 그는 <여자와 쾌락에 중독되어>베네치아에 자리를 잡고 유화를 그렸다. 그리고 템페라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이런 물감의 혁명이 베네치아 미술의 첫번째 꽃을 피우게 했다.
이복형제 - 젠틸레 빌리니와 조반니 벨리니 - 두 사람이 화려한 색채의 행진을 선도하였다. 1474년 정부는 그들에게 대의회실에 있는, 망가져가는 14점의 패널화를 수리하는 일을 맡겼다. 그것은 베네치아 유화의 가장 초기의 성과에 속한다. 기독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1453년, 터키의 술탄 모하메드 2세는 그들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베네치아 정부에 유능한 초상화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베네치아는 젠틸레 벨리니를 보냈다. 젠틸레는 나이 든 술탄을 에로틱한 그림들로 즐겁게 하였고, 마침내 많은 승리를 거둔 이 강력한 술탄의 초상화를 그렸다. 1474년 365
신성로마 제국 황제는 이탈리아 지역 대부분을 정복하고 그것을 재정비하는라 바빴다. 그는 초조하게 초상화를 갈망하고 있었지만 초상화란 1두카토(12.5달러)의 값이 나간다고 여겼다. 만토바 후작인 페데리고가 티치아노에게 조용히 150두카토를 더 주었다. 그리고 황제에게는 그가 지금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화가>를 위해 모델을 서고 잇다고 알려주었다. 1532년에는 황제도 이 사실을 납득하고, 다음 16년 동안 티치아노를 위해 너무나 자주 모델이 되는 바람에 화가는 자유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교황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떠났던 일이 그에게 어느 정도 구원이 되었을 것 같다. 바오로 3세도 <황제>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강한 성격과 섬세한 힘을 가진 남자로, 두 세대의 기록을 지닌 얼굴이었다. 여기서 티치아노에게는 의사 소통이 불가능한 황제 곁에서보다 더 나은 기회가 주어졌다. 1543년 바오로 3세는 볼로냐에서 티치아노 초상화법의 사실주의를 보았다. 지쳤지만 굴하지 않는 일흔다섯 살 된 남자의 모습이다. 교황의 의상을 입고 긴 머리와 커다란 수염이 한때 강력했던 윤곽을 감싸고, 직위를 나타내는 인장 반지가 귀족적인 손 위에 뚜렷한 모습을 나타낸다. 이 초상화와 라파엘로가 그린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는 서로 경쟁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훌륭하고 깊이 있는 초상화를 보여준다.
1552년 티치아노는 여행을 마치고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는 너무나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었지만 이제 일흔다섯의 나이로 어쩌면 죽음의 필연성과, 그리스 신들로부터 젊은 날의 신앙으로 돌아오라는 부름을 느꼈던 것 같다. 기독교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을 연속적으로 내놓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활동성을 통해 거듭 이교의 주제로 돌아가서 이따금 디아나 여신과 아프로디테 여신이 그의 붓끝에서 만들어져 나왔다. 370
이탈리아에서 교황청의 주요 도시들, 주로 페라라, 볼로냐, 라벤나, 리미니, 우르비노 등은 용병대장들에게 점령되었고 그들은 멀리 있는 교황에게 형식적으로 복종하였지만 수입은 내놓지 않았다. 잉글랜드 정부는 백년전쟁 동안 아비뇽의 교황들이 프랑스 왕에게 돈을 빌려준 것 때문에 분노하였다. 일허게 사방에서 괴롭힘을 당하게 되자 아비뇽의 교황들은 안락과 쾌락이 버릇이 된 추기경과 총신들의 요구 및 경비를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고위성직자인 알바로 펠라요는 이렇게 적었다. <즉대들이 교회를 통치하면서 기독교 양떼의 피를 먹고 살고 잇다.> 1311년 망드(프랑스 남부)의 주교인 윌리엄 뒤랑은 빈 공회의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로마 교회가 나쁜 예들을 떨쳐버림으로써 새로 시작하게 된다면 교회 전체가 개혁될 것이다.....이런 나쁜 예들을 놓고 사람들은 분개하고 민중은 그것에 전염되었다. ....모든 나라에서 ...로마 교회는 나쁜 명성을 얻고 있다. 외국에서는 모두들 교회의 품안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부터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탐욕에만 마음을 두고 있다고 떠들어대고 출판하고 있다. ....모든 기독교도가 해로운 탐욕의 예를 본받고 있음은 명백한 일이며 또한 악명 높은 일이기도 하다. 375
르네상스 교회(1418 ~ 1517년)
교황국이 가장 찬란한 시대 하나를 맞고 있을 때 종교 개혁이 다가왔다. 콘스탄츠 공회의는 세 명의 교황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마르틴 5세는 교회 집행부와 재정의 통합을 복구시켰다. 유게니우스 4세는 페라라, 피렌체 그리고 그리스로부터 고전 학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로마에 활기를 불어넣어 혼란스럽도록 성직자 천지로, 반항적이라 할 정도로 봉건적으로, 혹은 과격한 대중주의로 바꾸어 놓았다.
1447년 니콜라스 5세가 교황이 되었을 때 알프스 북부의 유럽에서 흘러 들어온 돈은 이탈리아를 다시 번성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알프스 남쪽에서 르네상스를, 알프스 북쪽에는 종교 개혁을 만들어냈다. 니콜라스 5세는 고대의 사본들을 복구하고 번역하고 편집하는 학자들을 열광적으로 후원하느라 교황국을 다시 파산 상태로 만들었다. 가톨릭 교회의 수도는 플라톤의 아테네나 세네카의 로마를 계승한 것 같았다.
체사레 보르지아는 기독교 윤리를 산산조각 내고 교황국을 위해 나라와 세수를 확보하느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실천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드로스 6세는 로마의 건축과 자식들을 황금으로 부유하게 만들었다. 율리우스 2세는 중부 이탈리아를 완저히 정복해서 교황국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재정이 바닥나는대도 불구하고 돈을 모아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교황궁과 시스티나 성당을 장식하는 일을 후원하였다. 은행가인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인 레오 10세는 시인, 예술가, 학자, 총신들을 위해 황금을 물 쓰듯이 뿌려댔다. 그러고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완공할 돈을 모으기 위해 형벌 면제 칙령 판매인들을 파견하였다. 389
뉘른베르크는 대규모 산어이나 금융 중심지가 아니라 예술과 수공업의 중심지였다. 도시의 거리들은 중세 방식으로 꾸불거리고 집의 위층이나 발코니들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시골 풍경과 넘쳐흐르는 강물을 배경으로 붉은 기와 지붕과 뾰족하게 솟은 박공 그리고 바깥으로 돌출한 창문들은 서로 엉겨서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냈다. 아우그스부르크처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유쾌하고 쾌적함을 즐겼다. 그리고 해마다 사육제가 되면 가면과 의상을 차려입고 축제를 즐겼다. 이곳에서 한스 작스와 장인 가수들이 유쾌한 대기를 노래하였다. 이곳에서 알프레히트 뒤러는 도이치 미술과 동판화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이곳에는 알프스 이북 최고의 금은 세공사들이 값진 꽃병, 교회 용기듥과 작은 조각상들을 제작하였다. 이곳에서 금속 세공사들이 청동으로 수많은 식물, 동물, 인간 형태를 제작하고 쇠를 이용해서 아름다운 난간, 문, 칸막이 등을 제조하였다. 그리고 목판 세공사들이 흥겨운 형태를 만들었다. 도시의 교회들은 예술의 저장소이자 박물관이 되었다. 모든 수공업 조합이나 시의회, 부유한 가문들은 도시 수호 성인의 사당을 꾸미기 위해 경건한 아름다움을 지니 그런 작품들을 주문하였기 때무이다. 이곳 상인 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인 빌리발트 피르크하이머가 여로강적인 인문주의자이며 예술의 후원자이고, 뒤러의 친구였다는 사실은 바로 뉘른베르크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의 여행 그리고 터키가 에게 해를 통제하게 되엇다는 점, 또한 막시밀리아 황제가 베네치아와 벌인 전쟁등이 도이칠란트와 이탈리아 사이의 교역을 방해하였다. 399
다른 사람들은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받았던 굴욕을 상기하고 이제 복수의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1521년에 교황청 사절 알레안더는 레오 10세에게 교회에 반대하는 폭동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5년 전에 자신은 많은 도이치 사람들에게서 자신들은 <어떤 바보>가 로마에 반대하여 입을 열기만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수많은 인자들과 영향들 - 교회 내부의 것, 지적, 감정적,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인 것들 - 이 수백 년의 방해와 억압을 견딘 다음 하나의 회오리바람으로 뭉쳐져 야만인이 로마를 정복한 이후로 유럽에 가장 큰 전복을 가져올 참이었다. 아비뇽 유폐와 교황 분열로 인해 교황청의 힘이 약화된 것. 수도원 계율과 성직자 독신주의의 붕괴, 고위성직자의 사치와 교황청의 부정 부패, 교황들의 세속적 활동들.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스 6세의 도덕성의 결함, 율리우스 2세의 전쟁, 레오 10세의 조심성 없는 즐거움. 성유물 판매와 형벌 면제 칙령(면죄부)행상. 십자군 전쟁과 터키 전쟁에서 기독교에 대해 회교가 승리를 거둔 일. 기독교 이외의 신앙이 점차 퍼져나간 일. 아랍의 과학과 철학의 유입. 스콜라 철학이 붕괴되고 스코투스의 비합리이주의와 오캄의 회의주의가 등장한 것. 개혁을 위한 공회의 운동의 실패. 세속적 고대의 발견과 아메리카 대룩의 발견. 인쇄술 개발. 읽기 교육과 일반적인 교육의 확대. 성서의 번역과 성서 읽기. 가난하고 단순하게 살았던 사도들의 삶과 교회의 화려한 의식 사이의 모순에 대한 새로운 인식. 도이칠란트와 잉글랜드의 부와 경제적 독립이 커진 일. 종교적 제약과 요구를 싫어하는 시민 계급의 확대, 돈이 로마로 흘러가는 것에 대한 저항감. 법과 정부의 세속화. 민족주의의 심화와 왕조들의 권력 강화. 모국어와 모국 문학의 민족주의적 영향. 404
도이칠란트 거의 모든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수도원들은 약탈당하거나 높은 몸값을 지불하도록 강요받았다. 마인츠에서 알프레히트 대주교는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도망을 쳤지만 그의 대리인은 12개 조문에 서명하고 1만 5천 길더의 몸값을 지불하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4월 11일에 밤베르크 사람들은 주교의 권한을 없애고 그의 궁전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그리고 정통 신도들의 집을 약탈하였다. 알자스에서는 폭동이 너무나 빨리 퍼져나가 4월 말에는 모든 가톨릭교도 혹은 부유한 지주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4월 28일에 1만 명의 농부들이 슈트라스부르크 주교인 차버른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수도원을 파괴하고 시를 접수하고 강제로 시민의 4분의 1을 자기들 편에 가입하게 하였다. 십일조 지불을 거부하고, 그이후로 황제를 제외한 모든 관리들은 투표로 선출한 것이며 해임에 응한 것을 요구하였다.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에서 농부드른 궁전과 수도원들을 약탈하고 도시는 <복음의 형제단>에 가입하도록 강요하였다. 같은 달인 5월에 농민군은 뷔르츠부르크 주교를 궁전에서 내쫓고 그의 창고를 털어 축제를 베풀었다. 팔츠의 노이슈타트에서는 선제후 르드비히가 8천 명의 무장 농민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그 지도자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그들의 요구에 기꺼이 응하였다. 앙시 누군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곳에서 농노와 주인이 함께 앉아 먹고 마시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과 한마음이고 그들도 그와 한마음인 것 같았다.>429
도이칠란트와 네덜란드에서 많은 재세례파는 뮌스터 형제들이 폭력에 의지한는 것을 비난하였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이 혁명에 찬사를 보냈다. 퀼른, 트리어, 암스테르담, 라이덴 등의 도시들은 재세레파 설교자들과 함께 이 운동의 성공을 빌었다. 3월 28일 뭔스터 폭동에 대한 응답으로 한 재세례파 집단이 서부 프리들란트에서 수도원 하나를 접수해서 요새로 만들었다. 이렇게 반란이 퍼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가리지 않고 제국의 보수 세력이 재세례파를 진압하기 위해 동원되기 시작하였다. 1528년 새로운 이단에 대해 관대하라고 권고했던 루터는 1530년에는 이들을 <허풍선이>이며 혁명가라고 보고 그들에 대해 <칼을 사용>하라고 권고하였다. 도시들은 차츰 발덱 주교와 그 군대에 돈과 사람을 지원하였다. 보름스 제국 의회 (1535년 4월 4일)는 도이칠란트 전지역에서 뭔스터 공격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거두기로 하였다. 주교는 이제 도시를 포위하고 도시로 통하는 공급을 완전히 끊었다.
기근까지 겹쳐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존 왕(라이덴의 존)은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도시를 떠나도 좋다고 선포하였다.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일부 남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남자들은 주교의 병사에게 잡혀 갇히거나 살해당하였다. 여자들은 다른 용도를 위해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민자 한 사람은 도시 성벽 중에서 방어되지 않는 부분을 포위군에게 보여주기로 하고 목숨을 구하였다. 그의 안내를 받은 주교의 군대는 성벽을 기어올라 도시의 성문을 열었다. 곧 몇몇 부대가 도시로 밀려 들어왔다. 기근이 이미 그들이 할 일을 많이 처리하였다. 438
수많은 인문주의자들, 일부 예의 바른 회의론자들은 교회의 높은 지위까지 올라갔다. 이탈리아는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얻을 수 없는 진리를 위해 그것을 망칠 수가 없었다. 저 광신적인 튜톤 사람들(루터와 멜란히톤)이나 제네ㅏ의 심술궂은 사람(칼뱅), 아니면 영국 옥좌에 있는 잔인한 통치자(헨리 8세) 는 진리를 찾았나? 저들 개혁가들은 대체 무슨 우울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인가. 이탈리아의 지식인 계층이 방금 지옥과 저주를 깡그리 잊어버렸는데 말이다!
이탈리아의 논의는 교회 안에서의 개혁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교회 사람들을 벌써 수백 년 동안이나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선언하였다. 종교 개혁의 발발과 전개는 이제 이런 필요성과 요구에 대해 새로운 절박함을 부여하였다. <수많은 글과 캐리커처에서 엄청난 욕설이 성직 계층에 쏟아 부어졌다> 로마 유린1527년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추기경과 주민들의 양심과 수입에 타격을 입혔다. 1백 명의 사제들은 이 재앙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스타필레오 주교는 1528년에 교황청 법정에서 개신교도의 말투로 하느님께서 기독교의 수도를 내리친 이유를 설명하였다. <모든 살이 썩었기 때무이다. 우리 시민들은 성스러운 도시 로마의 시민이 아니라 부정부패의 도시 바빌론의 시민이다.>루터의 말처럼 들린다.
바오로 3세의 재임 초기에 유명한 법률학자 조반 바티스타 카치아는 교황에게 교회 개혁에 관한 논문을 선물하였다. 서문에는 이런 글이 들어 있었다. <성스러운 어머니 교회가 너무나 변해 더는 복음의 특성을 갖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교회에서 겸손, 절제, 자제, 사도들의 강인함 등은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445
평생 동안의 헌신을 향한 그들의 외침을 듣고 파리에서 이미 아홉명의 학생들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정해진 때에 모두 함께 팔레스티나로 가서 그곳에서 가능한 한 그리스도의 삶과 가까운 삶을 살자고 제안하였다. 1534년 8월 15일 로욜라, 파브르, 사비에르 그리고 일곱 명의 다른 사람들이 몽마르트르의 작은 예배당에서 순결과 빈곤의 맹세를 하였다. 그리고 2년 동안 더 공부하고 난 다음 성지로 가서 그곳에서 살기로 맹세하였다. 1536년에서 1537년 겨울에 그들은 걸어서 프랑스를 지나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통과해서 베네치아에 이르렀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터키와 전쟁 중이었다. 여행은 불가능하였다. 로욜라와 그 제자들은 1년 동안 기다려보고도 팔레스티나로 가는 길이 막혀 있으면 교황에게 가서 그가 정해 주는 어떤 일이든지 하기로 하였다. 1537년 가을 로욜라, 파브르, 라이네츠는 베네치아를 떠나 로마로 가서 자신들의 계획에 대해 교황의 승인을 요청하여다. 그들은 걸어서 여행을 하였고 음식을 구걸하였으며 거의 빵과 물로만 살았다. 그러나 길을 가면서 행복하게 노래를 불렀다. 마치 이 작은 숫자가 곧 강력하고 빛나는 조직으로 성장할 것을 미리 안 것 같았다.
그들은 교황 바오로 3세의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팔레스티나로 가지 말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들은 예수회를 조직해서 무신앙과 교회를 해체시키려는 다른 힘들에 맞선 전쟁에서 병사 노릇을 하기로 하였다. 새로운 회원들을 맞아들이게 되자 원칙과 규율을 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되었다. 순결과 청빈의 계율에 복종의 계율을 덧붙였다. 454
가톨릭 종교 개혁, 혹은 반종교 개혁은 주요 목표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가톨릭 국가나 개신교 국가를 가리지 않고 사라믈은 계속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처녀를 유혹하고, 직위를 판매하고, 사람을 죽이고,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성직 계층의 도덕성은 개선되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거친 자유는 진정되어 인류의 요구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 형태가 되었다.
르네상스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주요 산업이었던 매춘은 그 머리를 감추었다. 순결은 유행이 되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즐거운 특성은 사라졌다. 이탈리아 여성들은 초기 종교 개혁의 자유에서 온 매력과 유쾌한 기분을 어느 정도 잃어버렸다. 양심적인 도덕성은 이탈리아에서 거의 청교도적인 시대를 만들어냈다. 수도원 생활이 다시 살아났다.
교회 개혁은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것이었다. 절대 군주제에 해당하는 교황제가 주교 귀족 정치를 뜻하는 공회의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였지만 이것은 시대의 정신에도 맞는 일이었다. 도이칠란트를 제외하고는 어디서나 귀족 중심의 정치가 절대 왕조에게 밀려나던 시대였다. 교황들은 이제 주교에 대해 도덕적으로 우위에 섰다. 교회 개혁을 위해 요구된 규율은 권위가 나뉘는 것보다는 중아에 집중됨으로써 더욱 효율적으로 될 수 있었다. 교황들은 친척 등용을 중지하였다. 교황청은 일 처리를 질질 끌어 비용을 올리는 일과 악명이 자자한 매수의 전통을 치유하였다. 461
[맥베스]의 살인자는 삶을 잔인하게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아!
삶이란 걸어가는 그림자일뿐 , 가련한 배우는
주어진 시간 동안 무대에서 점잔 빼거나 속을 태우지,
그리고 나면 끝이야. 그건 바보가 들려주는 이야기,
아무 뜻도 없는데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찬 이야기. 5막 5장
삶에 대해 이보다 더 쓰라린 판결이 있을까? 있다. <아테네의 티몬>을 생각해 보라. 한때는 아테네의 갑부로 그에게 아양을 떨고 선물을 받는 친구들이 주위에 잔뜩 있었다. 돈을 잃고 친구들도 하룻밤 새 모두 사라진 것을 본 그는 문명의 먼지를 발에서 툭툭 털어내고 숲의 고독 속으로 은둔한다. 그곳에서 그는 <가장 불친절한 야수도 인간보다는 더 친절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알키비아데스가 개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너를 조금이라도 사랑할 수 있도록>말이다. 그는 풀뿌리를 캐서 연명한다. 땅을 파다가 금을 발견한다. 친구들이 다시 나타난다. 그들을 조롱해서 쫓아보낸다. 그러나 창녀들이 찾아오자 가능한 한 많은 남자들에게 성병을 옮긴다는 조건을 그들에게 금을 준다.
체력의 탈진이여, 이제 남자의
텅 빈 뼈 속에 씨를 뿌려라. 그들의 날카로운 정강이를 쳐라.
남자들의 서두르는 결혼을 망쳐라.
변호사의 목소리를 갈라놓아라.
그가 다시는 가짜들을 변호하지 못하도록,
그의 궤변들이 새된 소리를 내도록
머리 허연 사제는 육체의 좋음을 반대하여 야단치면서
자신도 자기 말을 안 믿는다.
콧대를 눌러,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버려.
다리를 멀리 치워버려라.....
상처 자국도 없는 전쟁 허풍선이들이
네게서 고통을 조금 얻어가게 해라.
모두에게 질병을,
너의 활동이 발기의 모든 원천을 쓰러뜨려 평정하여라.
여기 금이 더 있다.
너는 다른 놈들에게 저주를 주고, 이것으로 너의 저주를 삼아라. (아테네의 티몬 4막3장)468
제왕의 취지를 가지고 - 작업에 따라 분할하기 - 그는 자신의 기획을 제안하였다. 첫째, 현존하는 혹은 바람직한 학문들의 새로운 분류를 시도하고 그들 안에서 문제와 탐구의 영역을 나눈다. 그는 이 일을 실천하였다. 자신의 저술 [학문의 진보]를 확대해서 라틴어로 번역한 책[De augmentis scientiarum]1623으로 국제적 주목을 받은 것이다. 둘째, 현재 통용되는 논리학의 결함들을 검토하고, [오르가논(도구)]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논리학 논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요약해 놓은 것보다 <인간 이성을 더욱 완전하게 이용하는>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다. 베이컨은 이것을 그의 [노붐 오르가눔(새로운 도구)]1620년, 이라는 책에서 실천하엿다. 셋째, <우주의 현상> - 천문학, 물리학, 생물학,- 의 <자연사>를 시작할 생각이다. 넷째, 자신의 새로운 방법에 따른 학문(과학)탐구의 예들을 <지성의 사다리>에 편입시킬 예정이다. 다섯째, <나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선구자>라고 명명할 것이다.
그리고 여섯째로 그는 그렇게 탐구된 과학(학문)으로부터 발전되고 확증된 철학을 상세히 설명하는 일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의 완성은.....나의 힘을 넘어가는 일이고 내 희망의 저편에 있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지식과 전문 분야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며 헐떡이는 우리들 눈에 베이컨의 프로그램은 거창하고 공허하게 보인다. 그러나 당시 학문은 아직 그토록 광범위하고 세분화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계획의 각 부분들이 만들어내는 광채가 전체의 거만함을 용서해 주고 잇다. 그가 세실 경에게 <모든 지식을 나의 영토로 삼았다>고 말하였을 때 그의 말뜻은 모든 지식을 세부적으로 다 끌어안으로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은 학문들이 서로 협동하고 격려하도록 전망을 가지고 <바위에서> 내려다보듯이 조망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486
그는 [뉴 아틀란트스]에서 상상력의 역할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것을 무시하였다. 그리고 과학 탐구에서 가설과 연역법을 낮게 평가하였다. 끈질기게 사실을 수집하라는 그의 제안은 천문학에서는 잘 작동하였다. 이 분야에서 수많은 학생들의 관찰과 기록은 혁명적인 연역을 위해 코페르니쿠스 귀납법의 자료들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이루어진 행성의 움직임, 목성의 위성, 지구의 자력, 피의 순환 등을 발견한 실제 방법과는 별로 비슷하지 않았다.
그는 귀납법을 찾아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타도한 >최초의 사람은 아니었다. 로저 베이컨, 페트루스 라무스 같은 사람들이 이미 수백 년 전에 그렇게 하였다. 그들이 폐위시킨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이따금 깨달았듯이) 귀납법이나 실험을 자주 사용하고 찬양했던 저 그리스 사람이 아니라 아랍인과 스콜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철학자>였다. 그는 지식이 권력에 이르는 길이라고 강조한 첫번째 사람도 아니었다. 로저 베이컨도 그렇게 했다. 캄파넬라는 베이컨 방식의 간결함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권력은 우리 지식에 비례한다>
아마도 베이컨의 내면에 있는 정치가는 적절하지 않게 과학의 공리적 목적을 강조했던 것 같다. 그래도 <응용>과학에 비해서 <순수> 과학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열매>와 구별해서 <빛>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는 목적과 똑같이 수단의 연구도 촉구하였으며, 인간 본성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경우 발명의 시대는 문제를 풀기 보다는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였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도덕적 느슨함을 보면서 지식이 성격의 규율보다 더욱 발전할 겨웅 만들어질 심연을 찾아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495
그러므로 우리는 프란시스 베이컨을 이성의 시대의 맨 앞에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후계자들 중의 일부가 그랬던 것처럼 이성을 우상처럼 숭배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실제 경험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사고를 믿지 않았고 소망으로 오염된 결론들을 믿지 않았다. <인간의 오서은 메마른 빛이 아니라 의지와 감정으로부터 어떤 주입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과학은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의 과학'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또한 그는 18세기 철학자들처럼 이성을 종교의 적이나 아니면 그 대체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는 철학과 삶에서 이성과 종교 두 가지 모두를 위한 공간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전통과 권위에 위존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감정적 추측,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 인기 있는 신화 대신에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을 요구하였다.
그는 모든 과학을 위하여 깃발을 들어올리고 그것을 다음 세기의 가장 열렬한 정신들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원했건 아니건 그가 요구하였던 기획 - 자연 탐구를 위한 포괄적인 기구, 지식의 세계적인 확장과 보급 - 은 현대의 가장 심오한 드라마의 씨앗을 이미 품고 있었다. 오늘날 가톨릭이건 개신교이건 기독교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과학 및 철학의 확산과 힘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이 현대의 드라마는 베이컨을 통해 세계를 향하여 그 프롤로그를 말했던 것이다. 498
어머어마한 학문의 역사를 포함하는 서양사를 단순히 정치, 사회의 역사가 아니라 사상과 예술의 흐름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의 관찰은 유연하고 매력적이다. 바로 문화사를 읽는 눈길이다. 문화사를 읽는 이 눈길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몇 가지 통찰이 재미있다. 문명을 시작한 것은 여자이며 남자는 여자가 길들인 마지막 동물이라는 듀런트의 태연자약한 고백은 우리를 멈칫 놀라게 한다. 문명을 떠받치는 다섯 기둥으로 꼽은 항목들은 기억할 만한 것들이다. 즉 가족, 종교, 교육, 법, 대중의 의견등이다. 이 기둥을 바탕으로 그의 관찰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축을 이루는 관점의 하나로 역사를 깊이 관찰한 사람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대단히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이 하나 있다. 그는 사회 변혁의 핵심적인 이유의 하나로 부富의 편중 문제를 꼽고 있다. 부가 지나치게 한편ㅇ로 쏠리면 반드시 혁명의 기운이 생겨난다. 그리고 역사상의 어느 시대이든 관계없이 한 사회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아니면 그에 휩쓸리느냐에 대한 답변이 그 시대의 배경과 흐름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대한 열쇠가 된다. 우리 시대라고 어찌 다르겠는가?
여기서 역사는 영웅의 역사이다. 영웅이란 역사상 위대한 정치가나 장군만이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와 예술가, 시인까지 포함된다. 이 모든 영웅들은 한결같이 위대함과 더불어 인간적인 약점을 지녔다 듀런트는 이들의 위대성을 깍아 내리지는 않지만 스르그머니 미소를 띤 채 약점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역사나 사실을 바라보는 이러한 냉정함이 우리에게는 낯설다. 우리는 서로 모순을 이루는 형용사를 얼른 이해하지 못한다. 501
그리고 인류의 수많은 어두운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도 분명히 읽을 수 있는 유머와 재치, 낙천적 요소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죽기까지 인류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통찰을 계속했던 그 삶의 흔적을 만나고 그 깊은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우리 삶이 참으로 경이롭고 또 노년을 존경하는 마음이 뭉클 솟아난다. 나도 이같이 아름다움 노년을 맞이하고 싶가 하는 마음이 든다. 여기서 한 스승이 후세와 젊은이들에게, 특히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역사의 교훈을 귀 담아 들어보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귀 있는 이여, 들어보라. 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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