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은 김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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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버팔로 빌의 무용담이나 살가리의 모험담을 읽으면서 내 정신은 꿈의 세계로 확장되었다. 첫사랑, 지극히 순수한 사랑은 철물점 딸 블란카 윌슨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그녀에게 푹 빠진 친구가 나에게 연애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으나 그 편지가 아마도 내 처녀작일 것이다. 아무튼 우연히 그녀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자기에게 보낸 편지를 쓴 사람이 내가 아니냐고 물었다. 딱 잡아떼기도 어려워서 어물쩍 그렇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자 마르멜로를 건네주었다. 물론 먹을생각도 못 하고 보물처럼 보관했다. 이렇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나는 그 이후로 수없이 많은 연애편지를 보냈고 답례로 마르멜로를 받았다. 24
어디선가 애절하게 흐느끼는 아코디언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신비로운 바다를 향해 산자락을 끼고 미지의 넓은 강을 항해하는 것보다 더 열다섯 살 소년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없었다. 줄지어 늘어선 붉으색 기와지붕이 바호 임페리알 마을의 전부였다. 마을은 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가 묵을 집에서, 아니 그 전부터, 그러니까 낡은 부두에 정박한 작은 증기선에서 내렸을 때부터 묵직한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멀리서 으르렁거리는 바다였다. 파도가 몸 안으로 밀려왔다. 29
언제 처음으로 시를 썼는가? 난생처음 시심에 사로잡힌 때는 언제인가? 지금까지 이런 질문들을 수없이 많이 받아 왔다. 기억을 한번 더듬어 보겠다. 아주 오래전, 어릴 적 일이다. 글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강렬한 감정이 북받쳐올라 몇 자 적었다. 운율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일상 언어와는 다른 것이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깨끗한 종이에 정서할 때에도 설렘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깊은 불안, 일종의 고뇌와 슬픔에 사로잡혔다. 어머니에게 바치는 시였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어머니, 어린 시절 항상 포근하게 나를 감싸 준 천사 같은 새어머니에게 바치는 시였다. 첫 작품이 어떤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어서 부모님께 들고 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식당에 앉아서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를 확연하게 갈라놓는 대화 내용이었다. 나는 시적영감이 채 가시지 않아 조금 떨고 있었다. 부모님 앞에 종이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건성으로 받아 들고 대충 훑어본 후에 되돌려주면서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어디서 베꼈니?"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낮춰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와 중요한 문제를 의논했다. 내 기억으로 첫 시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무책임한 문학 비평의 쓴맛을 보았다. 36
내가 독립을 선언하고 처음으로 빌린 방은 사범대학 근처의 아르구엘레스 거리에 있었다. 그 회색 거리의 어떤 창문에 '셋방 임대'라는 광고가 보였다. 집주인은 도로변에 위치한 방에 살았다. 귀족 티가 흐르는 초로의 남자였는데 눈빛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 다변가에 능변가이며 미용사로 생업을 꾸려 가고 있었으나 직업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집주인 말에 따르면 자기 관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내세에 있다는 것이다. 52
그 무렵 우연히 어떤 과부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여인은 얼마 전에 죽은 남편을 생각할 때마다 커다란 푸른 눈에 애잔한 이슬이 맺혔다. 남편은 젊은 소설가였는데 체격이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환상적인 부부였다. 여자는 밀밭 같은 금발머리, 흠잡을 데 없는 몸매, 짙푸른 눈동자를 자랑하는 미인이었고, 남자는 건장하고 키도 훤칠한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이 분마성 폐결핵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중에야 금발의 아내 또한 분마처럼 날뛰는 비너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페니실린이 없던 시절이기는 하지만 건장한 남편이 두어 달 만에 쓰러진 데는 몸이 뜨거운 부인도 일조를 했으리라고 짐작했다. 55
내성적인 내 성격은 필요 이상으로 오래 지속되었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이후 차츰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수록 쉽게 우정을 맺을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인류에 대해서 별다른 호기심을 갖지 않았다.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다 알수는 없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아무튼 오간다는 인사도 없이 항상 쓸쓸하게 혼자 다니는 열여섯 살 남짓한 시인의 출현은 사람들 사이에서 약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스페인 풍의 긴 망토를 입은 내 모습이 허수아비처럼 보여서 그런 것 아니었다. 이렇게 유별난 복장이 가난 탓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7
파리를 점령한 나치는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저 콜럼버스의 달걀, 아니 콜럼버스의 감자를 미처 알지 못했다. 게바라는 어느 안개 낀 추운 겨울날 밤 자기 집에서 체포되었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팔에 문신을 새기고 포로 생활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지옥 같은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났을 때는 해골 같았다. 그 후에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마지막 여행지는 칠레였다. 게바라는 마지막 입맞춤으로, 몽유병자 같은 입맞춤으로 조국과 작별하고 프랑스로 돌아가 생을 마쳤다. 71
우리 시인들은 항상 이런 생가가을 하며 산다. 부자가 될 수 있는 훌륭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며 사업 수완도 뛰어난데 다만 이런 천재성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이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1924년 나는 이런생각에 사로잡혀 [황혼 일기]의 판권을 칠레의 어느 출판사에 넘겼다. 일시적인 판권이 아니라 영구적인 판권이었다. 이 거래를 통해서 부자가 되리라고 확신한 나머지 공증인 입회 아래 계약서에 서명하고 500페소를 받았다. 이 돈은 당시 환율로 5달러도 채 안되는 돈이었다. 로하스 히메네스, 알바로 이노호사, 오메로 아르세는 거나한 잔치로 이 성공적인 거래를 축하하려고 공증사무소 바깥이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당시 최고급 식당인 라바이아에서 값비싼 포도주, 담배, 술과 함께 식사를 했다. 식당에 가기 전에 구두를 거울처럼 광이 나게 닦았다. 그 거래로 횡재를 한 쪽은 식당, 구두닦이 네 명, 출판사 사장이었다. 시인까지 돌아오는 혜택은 없었다. 73
한편 칠레는 변하고 있었다.
칠레 민중 운동이 들끓어 올랐고, 학생들과 작가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호소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프티부르주아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역동적이고 선동적인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불길과도 같은 위협적인 연설로 온 나라를 뒤흔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좌에 앉자마자 라틴 아메리카의 전형적인 통치자로 변하고 말았다. 한때 투쟁 대상이던 과두 지배 계급은 입을 쩍 벌리고 혁명적인 연설을 꿀꺽 삼켜 버렸다. 온 나라가 심각한 갈등에 휩싸여 싸움 그칠 날이 없었다.
이와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지도자 루이스 에밀리오 레카바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고, 중앙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전국에 9~10개의 노동자 신문을 창간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대량 실업이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나는 매주 <클라리다드>에 기고했다. 우리 학생들은 민중의 권익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산티아고 거리에서 경찰에게 두들겨 맞았다. 수천 명의 초석 광산과 구리 광산 노동자들이 산티아고로 몰려왔다. 시위와 진압의 난무로 칠레 사회는 비극적인 상처를 안게 되었다.
그 시절부터, 간혹 공백도 있었지만, 정치는 내 시와 삶의 일부를 차지했다. 시를 쓸 때 젊은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 삶, 기쁨, 슬픔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는 길거리 일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83
우리는 일본에 도착했다. 칠레 정부가 우리에게 송금한 돈은 이미 영사관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사관에 가기 전까지는 요코하마의 선원 휴게소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잠은 낡아 빠진 다다미 위에서 잤다. 밖에는 눈이 내리는데 숙소 유리창이 깨졌으니 뼛속까지 추위가 몰려왔다.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일본 근해에서 유조선이 두 동강 나는 사고가 발생해 선원 휴게소는 조난 당한 선원들로 만원이 되었다. 이 가운데 스페인어와 바스크어만 구사할 줄 아는 바스크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나흘 밤낮을 배에서 떨어져 나온 널빤지를 붙잡고 표류했으며, 유조선에서 기름이 새어 나와 주변은 온통 불바다였다고 그동안 겪은 일을 들려 주었다. 조난 당한 선원들은 담요와 비상식량을 배급받았는데, 마음씨 좋은 바스크 사람이 우리의 구세주 노릇을 했다. 114
나는 꾸준히 성실하게 많은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들을 알고 있지만 알바로만큼 열심히 글을 쓰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출판한 책이 없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알바로는 아침이면 침대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안경을 콧잔등 위로 밀어 올리며 부지런히 타자기를 두들겼었다. 종이라는 종이는 다 잡아먹으면서...... 알바로의 순발력, 비판력, 오렌지, 정기적인 연락, 뉴욕의 아지트, 너무나 명쾌하게 보이는 혼란스러운 글, 너무나 혼란스럽게 보이는 명쾌한 글....... 그런데 고대한던 작품은 아직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다. 어쩌면 마음이 내캐지 않아서, 어쩌면 작품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항상 너무 바쁘고 항상 너무 한가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아바로는 모르는 게 없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꿰뚫어 보는 당돌한 푸른 눈, 섬세한 감수성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모래알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도록 내버려두고 있으니...... 119
내 주변에 둘러앉아 노래 부르고 시를 낭송하는 시인들은 이런 비참한 순례자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긴 흰 옷을 걸친 이 시인들은 풀밭에 쭈그리고 앉아 작은 북으로 장단을 맞추며 저음으로 짧게 짧게 끊어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입에서는 수천 년 전 고시가에서 사용하던 형식과 운율에 맞춰 작곡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가사는 달랐다. 관능적이고 흥겨운 노래가 아니라 저항 가요, 빈곤 퇴치 가요, 옥중에서 만든 가요였다. 인도 전역에서 만난 이 젊은 시인들의 근심 어린 눈동자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방금 감옥에서 나왔는데 어쩌면 다음 날 다시 감옥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이유는 비참한 현실과 억압적인 신을 뒤엎으려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이겅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시대의 실상이다. 이 시대는 보편성을 지닌 시의 황금기다. 새로운 노래가 총부리에 쫓길 때, 봄베이 변두리에서는 수백만 몇의 사람들이 밤마다 도로 옆에서 잠을 잔다. 그렇게 자고 태어나고 죽는다. 집도 빵도 약도없다. 문명국이라고 자부하는 영국이 식민지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식민지 신민들에게 학교, 공장, 주택, 병원은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오직 감옥과 빈 위스키 병만 산더미처럼 남겨 놓고 떠난 것이다. 123
실제 동양에 가보면 흔히 말하는 동양의신비주의란 서구인이 직면한 불안, 노이로제, 혼란, 기회주의의 부산물임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발생한 부산물인 것이다. 그 무렵 인도 사람들은 단전호흡이나 하며 명상에 잠길 만한 여유가 없었다. 야수와 같은 물질적 욕구에 시달리고, 식민 지배는 철저한 굴종을 강요하고, 매일같이 수천명이 콜레라, 천연두, 열병, 기아로 죽어 나가고, 거대한 인구와 빈약한 산업으로 혼란에 빠진 봉건적인 제도가 잔혹하게 삶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비적인 명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131
나무에 묶인 코끼리는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러나 사냥꾼들은 코끼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 굶도록 내버려두었다가 코끼리가 자유롭게 밀림을 돌아다닐 때 즐겨 먹던 식물의 순이나 여린 줄기를 코앞에 들이밀었다. 코끼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 음식을 먹었다. 이제 길들여 것이다. 지금부터는 고된 노동을 배우게 될 것이다. 146
이처럼 허공에 뜬 내 삶의 이야기가 이 시집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표현되어 있다. 잉크보다는 피를 가까이하라는 말이 바로이런 게 아니겠는가. 아무튼 내 문체는 한결 정제되었고, 반복되는 광적인 우수를 훌륭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진리와 수사법을 고려할 때 씁쓸한 문체를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내 고유의 문체를 체계적으로 파괴한 것이다. 문체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체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대기가 스며들지 않은 시는 죽은 시다. 숨을 쉴 수 없기 때분에 죽을 수 밖에 없다. 149
요술처럼 하루아침에 마드리드 주재 칠레 영사로 변신한 나는 로르카와 알베르티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었다. 며칠 되지 않아 이 스페인 시인들과 친해졌다. 당연하지만 스페인 시인들과 라틴아메리카 시인들은 서로 차이가 있었다. 이런 차이는 항상 자부심이나 상대방에 대한 오해를 수반한다.
내 세대의 스페인 시인들은 라틴아메리카 시인들보다 우의도 좋고 단결력도 강하고 쾌활했다. 이와 동시에 우리 라틴아메리카 시인들이 더 세계적이고, 다른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페인 시인들 가운데 스페인어 이외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몇되지 않았다. 그래서 프랑스 시인 데스노스와 크레벨이 마드리드를 방문했을 때 내가 통역을 맡을 수 밖에 없었다. 178
에르난데스에 관한 추억은 내 가슴속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으리라. 동부 스페인의 나이팅게일 노래, 첨탑처럼 치솟은 오렌지꽃 그늘에서 노래하는 새소리를 결코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 노랫소리는 피 속에 흐르고 있었고, 흙냄새 물씬한 야생적인 시 속에 흐르고 있었다. 황성한 젊음의 향기와 풍요가 배어 있고, 동부 스페인의 색깔, 향기 소리가 무성하게 뒤엉켜 있는 시 속에 아직도 그 노랫소리가 살아 았다. 180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1936년 7월 19일 밤에 시작된 셈이다. 다정다감하고 모험을 좋아하는 칠레인 보비 데글라네는 마드리드의 프리세 경기장에서 프로레슬링 프로모터로 일하고 있었다. 한번은 내가 그런 스포츠도 진짜 스포츠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더니 로르카와 함께 경기장에 나와서 얼마나 진지한 스포츠인지 확인해 보라고 권유했다. 나는 로르카를 설득하여, 시합이 시작될 무렵 경기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가면 쓴 혈겨인', '아비시니아의 교살자', '사악한 오랑우탄'선수의 혈투를 즐길 참이었다.
그런데 로르카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다. 로르카는 또 다른 교살자를 만났던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시인의 실종으로부터 시작외었으며 곧이어 내 시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186
피난민 가운데는 동부 전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알톨라기레, 그리고 그와 함께 종이를 만들고 [가슴속의 스페인]을 인쇄한 병사들도 끼어 있었다. 내 시집은 죽음을 무릅쓰고 만들어 낸 이사람들에게는 자랑거리였다. 식량이나 옷가지보다 내 시집을 먼저 배낭에 챙겨 넣은 사람이 많았다. 그 배낭을 어깨에 짊어지고 프랑스를 향한 긴 여정에 올랐던 것이다. 192
내 친구 낸시 큐나드는 1969년 파리에서 죽었다. 죽음의 고토에 시달리던 낸시는 거의 알몸으로 호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호텔 로비바닥에 쓰러진 낸시는 그 사랑스러운 하늘색 눈을 영영 감고 말았다. 임종시 그녀의 몸무게는 35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았다. 해골이나 다름없었다. 자기 몸을 갉아먹으며 이 세계의 불의와 오랜 투쟁을 벌여 온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갈수록 깊어지는 외로움과 돌봐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쓸쓸한 죽음뿐이었다. 197
이러한 이념적 혼란과 무분별한 파괴를 목격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오스트리아 무정부주의자의 활약상에 대해 들은 적도 있다. 이 사람은 근시에다가 금발을 기른 노인이었는데, 주 특기가 '산책'이었다. 단체를 하나 조직하고 이름을 새벽이라고 지었다. 주로 해가 뜰무렵에 활동했기 때문이다.
"가끔 머리가 아프지 않아요?" 이 오스트리아 사람은 희생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예, 물론 가끔 아파요."
"그러면 좋은 진통제를 하나 주겠소." 그러고 나서 희생자의 이마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잡아당겼다고 한다.
이 같은 무리들이 마드리드 밤거리에서 준동하고 있을 때 오로지 공산주의자들만이 세력을 조직하고 군대를 창설하여 이탈리아인들, 독일인들, 무어인들, 팔랑헤 당원들과 대적하였다.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은 반파시즘 투쟁과 저항을 지탱해 주는 정신적 힘이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209
운 좋게도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우리들에게 알베르티라는 이름은 스페인어로 쓴 찬란한 시를 의미한다. 알베르티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시인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장인이었다. 그의 시는 한겨울에 꽃망울을 터뜨린 붉은 장미처럼 공고라의 눈송이, 호르헤 만리케의 뿌리,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의 꽃잎, 구스타보 아돌포 베케르의 서러운 향기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스페인 시의 정수가 알베르티의 시라는 크리스털잔에 녹아 있는 것이다.
이 붉은 장미는 스페인에서 파시즘과 투쟁하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을 밝게 비춰 주었다. 세상은 이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투쟁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 알베르티는 서사시적인 성격의 소네트를 창작하여 막사와 전선에서 낭독했을 뿐만 아니라 시적 게릴라, 즉 반전시라는 시적 게릴라를 창조했다. 포성 속에서 날개가 돋아나고 나중에는 전 세계를 날아다니게 된 노래를 창조했다. 212
창작에 전력투구하기로 다짐했다.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덕분에 나는 훨씬 강해지고 성숙해졌다. 이제 우울한 시는 쓸 수 없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우수에 찬 주관주의나 [지상의 거처]에 담긴 고통스러운 애상은 막을 내렸다. 두 시집을 형성하는 광맥은 지하 암반에서 캐낸 것이 아니라 온갖 책갈피 속에서 찾은 것처럼 보였다. 시가 우리 인간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을까? 시가 인류의 투쟁에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지금껏 시는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영역을 실컷 걸어왔다. 이제는 걸음을 멈추고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비록 휴머니즘이 현대 문학에서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 존재의 염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214
모든 사람들이 예상하던 일이었다. 진작부터 히틀러는 여기저기서 영토를 삼키고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인들은 우산을 들고 히틀러에게 달려가 새로운 도시와 왕국과 사람들을 갖다 바치고 있었다. 거대한 혼돈이 양심을 뒤덮고 있었다. 내 방 창문 너머로 앵발리드 광장을 바라보았다. 첫 출정 부대가 떠나고 있었다. 군복도 제대로 입을 줄 모르는 청년들이 죽음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226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거대한 영역이 시작된다. 그곳 밀림에는 고대 멕시코인이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숨어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물, 지상의 물 가운데 가장 신비한 물은 만난다. 그 물은 바다도 아니고, 개천도 아니고, 강도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종류의 물도 아니다. 유카탄 반도의 물은 모두 땅속에 있다. 갑자기 땅이 움푹 꺼지면서 거대한 천연 웅덩이가 생긴 것이다. 웅덩이 가장자리에는 열대 식물이 무성하게 우거지고, 저 아래에서는 하늘을 담은 짙은 초록색 물이 어른거린다. 마야인들은 이 천연 웅덩이를 가리켜 세노테라고 부르고, 신성하게 여긴 나머지 기묘한 의식을 거행했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이 마야인도 처음에는 필요한 것과 풍요를 신성시 하였는데, 건조한 유카탄의 땅의 목을 축여 주려고 땅이 움푹 꺼지던니 숨겨진 물이 드러난 것이다. 234
그런데 뱃놀이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테킬라 몇 잔을 마신 탓인지 어떤 시인이 나를 기념하는 특별 행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은과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자기 권총을 내줄 테니 하늘을 향해 쏘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내 곁에 있던 동료가 재빠르게 자기 권총을 꺼내 들었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시인은 애초에 제안한 시인의 권총을 밀쳐 내고 내 손에 자기 총을 들려 주며 쏘라고 했다. 그 순간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거기 모인 시인들은 저마다 자기 총을 쏘아야 한다면서 소지한 권총을 꺼내 내 앞에 들이밀었다. 내 코앞이나 겨드랑이 사이로 휙휙 지나다니는 총구가 너무 위험했다. 마침내 묘안이 떠올랐다. 나는 커다란 멕시코 모자를 내밀며 시와 평화의 이름으로 권총을 모두 모자에 담으라고 부탁했다. 시인들은 모두 내 말을 따라 주었다. 이렇게 수거한 권총은 며칠 동안 우리 집에 안전하게 보관했다. 이렇게 시인들에게 여러 가지 권총을 모았으니, 권총 선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43
그 대답은 너무 단순하고 또 재미있는 뒤얘깃거리도 없어서, 될 수 있으면 입을 다물고 살았던 것이다.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문학을 못 하게 막았다. 당신 아들이 시인이 되는 게 너무나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를 발표할 때 아버지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필명을 사용했다. 어떤 잡지에서 네루다라는 체코인의 이름을 보고 필명으로 사용한 것인데, 당시만 하더라도 그 사람이 체코인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작가로서 아름다운 발라드와 로망스를 창작하였으며, 프라하의 말라스트라나에 기념 동상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 뒤 체코슬로바키아에 갔을 때, 구레나룻을 기른 네루다 동상 앞에 꽃 한 송이를 바쳤다. 245
라틴아메리카의 몇몇 국가는 여러 민족이 혼합된 혼혈 국가인데도 불구하고 불합리한 인종주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는 과거 식민 시대의 잔재물이다. 모두들 정상에 오르고 싶어 하지만, 이 정상이란 극소수의 백인 속물들만이 순수 아리안 족이나 위선적인 관광객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뽐내며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곳이다. 다행히도 이런 편견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이고, 국제 연합은 흑인과 몽골족 대표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 종족이라는 나무에 지성이라는 수액이 타고 올라감으로써 다양한 색깔의 나뭇잎이 무성하게 자란 것이다. 251
자청해서 총영사직을 사임한 덕분에 아주 즐거운 일이 생겼다. 칠레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은 자기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 뿌리 뽑힌 사람이 맛보는 좌절감은 어떤 형태로든 영혼을 흐리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향 땅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에 발을 딛고, 내 땅을 만지고, 내 땅의 소리를 듣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의 물소리와 그림자를 느끼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자양분을 흡수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255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서 콧구멍만 한 창문으로 발파라이소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길거리 한 자락만이 겨우 시야에 들어왔는데 밤에는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가난한 변두리 동네였는데, 창문에서 100미터 아래에 있는 좁은 길이 그 동네의 불빛을 독점하고 있었다. 구멍가게와 술집이 줄지어 있는 곳이었다. 쪽방에 갇힌 신세라고 생각한 탓인지 내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가끔씩 풀지 못한 문제도 있었다. 예를 들어, 왜 저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한가한 사람이나 바쁜 사람이나 한결같이 같은 가게 앞에서 발길을 멈출까? 그 가게 진열장에 도대체 어떤 신기한 물건이 있길래? 어떤 때는 아이를 목말 태운 일가족이 그 가게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오랫동안 서있기도 했다. 틀림없이 그 사람들은 황홀한 표정으로 잔열장을 바라보고 있으리라고 상상해 보곤 했다. 267
우리는 저 끝없는 고독의 세계, 푸르고 하얀 침묵의 세계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우람한 나무, 무성한 덩굴 식물, 수백 년 동안 쌓인 부엽토, 느닷없이 우리 앞을 가롹고 나선 나무둥치를 헤치고 전진했다. 이 모두는 신비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연이면서 동시에 갈수록 심해지는 추위와 눈과 추적의 위험을 뜻했다. 고독, 위험, 정적, 절박한 심정이 한꺼번에 우리를 엄습했다. 278
하루는 피카소가 나를 만나러 이 집에 왔기에, 그림 앞으로 그를 데려갔다. 아주 오래전에 그린 그림이라서 정작 피카소 본인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피카소는 매우 진지하게 그림을 살펴보았다. 비상한 집중력으로 그림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었는데, 얼굴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우수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앞으로 다가갔다 뒤로 물러섰다 하며 10분도 넘게 자기 작품을 감상했다. 피카소가 감상을 끝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보면 볼수록 좋은 그림이야. 우리나가 박물관에 이 그림을 구입하라고 제안할 생각이야. 지루 부인도 팔 의향이 있다고 말했거든."
피카소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그림을 쳐다보았다. 거대한 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피카소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졌다.
"괜찮은 작품이야." 287
이렇게 지상에서 상처 입고 불에 탄 뿌리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이런 뿌리는 오솔길을 가로막고 우리에게 나무가 자라는 땅 속의 비밀을 들려주고, 나뭇잎이 무성하게 우거질 수 있는 신비를 보여주며, 실물 와국을 일으켜 세운 근육을 자랑한다. 무성한 이끼에 덮여 비극적인 생을 마치는 뿌리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만들어낸 조각품, 자연이 만들어 낸 걸작이 바로 뿌리이기 때문이다. 291
나는 첫눈에 소련 땅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땅은 전 세계인에게 정신적 교훈을 주었고 역사 발전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였으며, 생산과 분배의 영역에서 눈부신 진보를 이룩했다. 이와 더불어 나는 순수한 자연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이 스텝 지대에서부터 획기적인 비상이 시작되리라고 생각했다. 전 인류는 그곳에서 거대한 진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알고 있으며, 전 세계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로, 어떤 사람들은 막연하게, 어떤 사람들은 확신에 차서 기다리고 있다. 294
서한을 전달했다. 네루는 졸리오 퀴리에게 존경심을 느낀다고 말하고, 천천히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에는 내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졸리오 퀴리는 네루에게 내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네루는 편지를 다 앍자 다시 봉투에 집어넣고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문득, 내가 이곳에 나타난 것을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저 검붉은 얼굴의 사내는 육체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지금 매우 힘든 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통치자가 흔히 그러하듯이 네루는 오만하고 다소 경직된 인물이었으나 통솔력은 없는 사람 같았다. 네루의 아버지 판티트 모틸랄은 자민다르, 즉 전통적인 귀족 지주 계급 출신으로 간디의 재정을 담당했으며, 정치적 조언뿐만 아니라 국민회의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 부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쩌면 내 앞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 사람도 자민다르의 속성을 못 버리고 마치 맨발로 다니는 농부들을 대하듯이 무관심과 경멸적인 태도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06
'바이칼 호 연구소'에서 점심식사 초대를 받았다. 연구원들은 한 가지 비밀을 털어놓았는데, 아무도 우랄 산맥의 아들이자 눈동자라고 할 수 있는 이 호수의 정확한 깊이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심 2,000미터쯤에서, 그 칠흑 같은 심연에서 이상하게 싱긴 장님 물고기가 잡힌다고 했다. 갑자기 맛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원들에게 그 이상한 물고기를 식탁에 올릴 수 없겠냐고 넌지시 떠보았다. 점심 때 맛 좋은 시베리아 보드카를 곁들여 그 물고기 요리를 먹었는데, 아마도 그 고기 맛을 본 사람은 세상에 몇 안 될 것이다. 313
강당을 가득 매운 청중들 앞에서 시를 낭송할 때는 한없는 기쁨을 느꼈다. 내가 시를 읽으면 옆에 있던 사람이 웅장한 이탈리아 말로 옮겨 주었다. 그렇게 번역된 시를 듣고 있으면 내 시가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경찰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스페인어는 무사통과시켰지만 이탈리아 번역은 여기저기 잘라먹었다. '서구 세계'가 금지하는 평화를 찬양하는 시구는 물론이고 민중 투쟁을 고무하는 시구 또한 위험하다고 여겼다. 318
나는 대서양의 잔물결을 바라보며 새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뱃머리 양쪽으로 하얗고 푸르고 누르스름한 물살이 갈라지자 바다는 포말을 일으키며 요동친다.
대서양이라는 문이 흔들린다.
그 문 위로 반투명한 은빛 물고기가 치솟아 오른다.
이제 망명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오랫동안 바닷울을 응시한다. 나는 이 물을 건너 다른 물로 나아가고 있다. 내 조국의 결알을 항해하고 있다.
긴 하루의 하늘이 대양을 뒤덮고 있다.
곧 밤이 다가올 것이다. 신비하고 거대한 초록색 궁전을 다시 한 번 어둠이 뒤엎을 것이다. 332
나는 수감 절차에 따라 소지품을 영치했다. 심심할 때 읽으려고 가져간 추리소설도 허용하지 않았다. 사실 심심하다고 느낄 틈도 없었다. 철창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가 닫힐 때마다 들것은 점점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날 밤 체포된 사람들이었다. 전부 2,000명도 넘었다. 나는 격리 대상이었다. 아무도 내 근처에 올 수 없었다. 그러나 담용 밑으로 손을 뻗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군인은 총을 내려놓고 사인들 부탁한다며 종이를 내밀었다. 339
칠레인이 즐기는 국민적 스포츠는 '청산 세일'이다. 우리나라 특유의 주말 경매에는 구름 같은 인파가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룬다. 경매가 붙은 저택은 파국을 맞는다. 경매가 시작되면 나같은 보통 사람들의 출입을 가로막던 철 대문을 비롯하여 안락의자 그리스도 수난상, 오랜된 초상화, 접시, 숟가락, 평생 놀고먹는 후손을 만들어 대던 침대 시트가 최고가 응찰자에게 낙찰된다. 칠레 사람들은 저택으로 들어가서 물건을 만지고 구경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정작 구매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윽고 건물을 허물어 건축 자재를 경매에 붙인다. 구매자들은 눈(창문)을 가져가고, 내장(계단)을 가져가고, 발(마루)을 가져가고, 마침내 정원의 야자수까지 나눠 갖는다.
아무튼 나는 시 몇 편을 읽고 몇 마디 설명을 한 다음에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시를 한 편,, 한 편 읽어 나가며 내 목소리가 깊은 우물과 같은 침묵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도 저 노동자들의 검은 눈동자와 눈썹이 점차 내 시에 빠져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제야 진정한 독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운율에 취하고 또 버려진 영혼들이 시에 젖어 들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머지 계속 시를 낭송했다.
아옌데는 칠레의 또 다른 지하 자원인 구리를 국유화했다는 이유로 암살당했다. 두 경우 모두 과두지배 세력이 피비린내 나는 정변을 일으켰으며, 두 경우 모두 군이 사냥개 역할을 했다. 발마세다의 경우에는 영국 기업이, 아옌데의 경우에는 미국 기업이 이 같은 군부의 만행을 조장하고 후원했다.
이에 반해 유럽에서는 대저택을 보존한다. 그 덕분에 가끔 우리는 운 좋은 화가만이 두 눈으로 볼 수 있던 공작과 공작부인의 초상화 앞에서 선과 색을 음미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비밀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범죄와 가발을 비롯하여 이채로운 문서철, 다시 말해서 후대의 영화관 벽이 그러하듯이 수많은 대화가 스며든 태피스트리도 엿볼 수 있다.
나는 초청을 받고 루마니아로 갔다. 루마니아 작가들은 아름다운 트란실바니아 숲 속의 문인 별장으로 나를 안내했다. 예전에 이곳은 난잡한 애정 행각으로 세게적인 화제가 되었던 카롤 국왕의 궁전이었다. 현대식 가구와 대리석 욕조를 갖춘 이 궁저을 이제는 루마니아 시와 사상의 산실로 이용하고 있었다. 나는 왕비가 사용하던 침대에서 잠을 푹 자고 난 후, 다음 날 시인 에우젠 제벨레아누, 미하이 베니욱, 라두 보우레아누의 안내로 박물관과 휴양소로 개조한 성을 둘러보았다. 367
우주 비행사들이라고 해서 일반인과 다르지는 않았다. 시골, 농촌, 공장, 사무실에서 일하는 우리들과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붉은 광장에서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소련의 이름으로 이들을 환영했다. 나중에 이들을 성 게오르그 홀에서 보았다. 나는 두 번째 우주 비행사 게르만 티토프를 소개받았는데, 크고 빛나는 눈을 가진 상냥한 청년이었다.
'소령, 한 가지 묻고 싶은데, 우주에서 지구를 봤을 때 칠레를 확실히 구별할 수 있던가요?'
이건 마치 '자네가 맡은 중요한 임무는 우주에서 조그만 칠레를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이미 예상한 대로 웃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남아메리카에서 노란 산맥을 본 기억이 납니다. 상당히 높았습니다 아마 칠레였을 것입니다'
당연히 칠레지, 동지.
사회주의 혁명 40주년 기념일에 모스크바에서 열차를 타고 핀란드로 향했다. 역으로 가는 동안 화려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파란색, 붉은색, 자주색, 초록색, 노란색 오렌지색 불꽃이 높은 하늘에서 환호성을 올리고 있었다. 승리를 축하하는 그날 밤, 전 세계 민중에게 보내는 상횡해와 우정의 신호탄 같았다. 373
아무튼 나는 시 몇 편을 읽고 몇 마디 설명을 한 다음에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시를 한 편,, 한 편 읽어 나가며 내 목소리가 깊은 우물과 같은 침묵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도 저 노동자들의 검은 눈동자와 눈썹이 점차 내 시에 빠져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제야 진정한 독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운율에 취하고 또 버려진 영혼들이 시에 젖어 들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머지 계속 시를 낭송했다.
한 시간도 넘게 시를 낭송했다. 내가 강당을 나서려고 하자 한 사람이 일어섰다. 허리에 마대 자루를 두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을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지금까지 이렇게 감동을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377
이 세상에 미술 작품은 얼마나 많은 가. 더 이상 전시할 공간이 없을 정도다. 전시실 밖에 걸어 놓아야 한다. 책은 또 얼마나 많은가. 큰 책,작은 책......이렇게 수많은 책을 모두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책을 먹을 수 있다면 왕성한 식욕으로 샐러드를 만들거나 양념을 곁들여 요리를 할 텐데. 이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세계는 책의 홍수에 잠겨 버렸다. 언젠가 피에르 르베르디는 이렇게 말했다. '우체국에 가서 더 이상 책을 배달하지 말라고 부탁했어. 소포를 뜯어 볼 수도 없거든. 공간도 부족해. 천장까지 쌓여 있어서 무너질까 봐 두려워. 내 머리를 덮칠 것 같다니까.' T.S.엘리엇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엘리엇은 화가가 되기 전에, 희곡 연출가가 되기 전에, 비평가가 되기 전에 내 시을 읽었다. 나는 우쭐해졌다. 엘리엇보다 내 시를 잘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엘리엇은 나에게 자작시를 읽어 주려고 했다. 이기심에 사로잡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가면서 투덜거렸다. '읽지마, 제발, 일지 말라고' 나는 욕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엘리엇은 문틈에 대고 시를 읽었다.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시인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영국의 인류학자로 , 황금가지의 저자]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나를 나무랐다. '왜 엘리엇을 그렇게 대하는거야'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독자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엘리엇은 내가 키운 사람이야. 내 시의 주름살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어. 재능도 뛰어나, 그림도 그리고 평론도 쓴다고. 나는 이런 독자를 잃고 싶지 않아. 희귀한 식물처럼 물을 주며 가꾸고 싶단 말이야. 나를 이해할 수 있지? 프레이저' 385
내 시의 길을 재는 사람들도 있다. 시행이 너무 짧거나 혹은 너무 길다고도 한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아니, 시행이 좀 더 짧아야 한다거나 좀 더 길어야 한다거나, 좀 더 좁아야 한다거나 좀 더 넓어야 한다거나, 좀 더 노란색이어야 한다거나 좀 더 빨간색이어야 한다는 규칙을 누가 정해 놓았단 말인가? 모든 결정권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 있다. 피와 한숨 그리고 있는 지식과 없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결정한다. 이 모두가 시라는 빵에 들어가는 것이다. 394
어린 내가 보기에도 이런 식의 잡지 기획은 정도가 너무 지나쳤다. 그러나 그 일을 못하게 말리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페리코 씨는 잡지 창간의 귀재였다. 어디서 자금을 끌어와 그 따위 잡지를 끊임없이 창간하는지 감탄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페리코 씨는 치밀한 행동 계획을 세운 다음 춥고 외딴 지방을 돌아다녔다. 먼저 의사, 변호사, 치과 의사, 농촌 지도사, 교수, 공학자, 고급 관료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그리고 잡지, 전집, 시와 산문을 실은 팸플릿 등 대단한 경력을 앞세워 세계 문화의 전도사로 치장하고 속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 근엄한 표전으로 이 모든 것을 제공하겠으니 그 대가로 몇 푼 안되는 돈을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운을 뗀다. 페리코 씨의 화려한 말솜씨 앞에서 희생자들은 주눅이 들어 파리만도 못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페리코 씨는 돈을 챙기면 보통은 위대한 세계 문화에 매몰된 파리만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431
특히 기자들이 그러는데,, 지금 무슨 작품을 쓰느냐 또는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왜 사람들은 하나 마나 한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항상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시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 시에 대한 정의라든가 시 경향에 관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어싸. 미학에 관한 논의는 죽기보다 싫다. 미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문학 작품의 탄생 경위 파악이나 사후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윌트 휘트먼은 '외부적인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부가적인 요소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나 벌거벗은 창조 행위를 대신할 수는 없다. 495
아옌데는 칠레의 또 다른 지하 자원인 구리를 국유화했다는 이유로 암살당했다. 두 경우 모두 과두지배 세력이 피비린내 나는 정변을 일으켰으며, 두 경우 모두 군이 사냥개 역할을 했다. 발마세다의 경우에는 영국 기업이, 아옌데의 경우에는 미국 기업이 이 같은 군부의 만행을 조장하고 후원했다.
두 경우 모두 대통령 관저는 저명한 '귀족들' 명령으로 파괴되었다. 발마세다 관저는 도끼로 부셔 버렸고, 아옌데 관저는 기술이 발전한 덕분에 , 용감한 우리 공군이 폭격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발마세다는 사람을 사로잡는 웅변가였다. 그러나 거만한 성격이어서 갈수록 일인 통치자로 변해갔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고결하다고 확신했다. 항사 적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났기 때문에, 또 그만큼 고독했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 골몰하게 되었다. 발마세다를 도와주어야 할 민중은 힘이 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예언자나 몽상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위대한 꿈은 꿈으로 남았다.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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