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은 김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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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네프칼리 리카르도 레이에스 바소알토(Neftalí Ricardo Reyes Basoalto). 칠레 마울레주 파랄에서 출생. 아버지는 철도원, 어머니는 교사.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는 테무코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재혼한다. 네루다는 테무코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13살 나이에 일간지 '라 마냐나'에 글을 쓰고 시집을 냈으며, 1920년부터 문학전문지 '셀바 아우스트랄'에 파블로 네루다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필명은 그가 흠모하던 체코 시인 얀 네루다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1921년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 칠레대학에서 불문학, 교육학등을 공부한다. 1921년 10월 제가祭歌라는 시로 칠레 학생연맹이 주최한 백일장에서 1등상을 수상. 이 연맹이 펴내는 잡지'클라리다드'에 작품을 발표한다. 1923년 시집 <변천해가는 것>을 출판하여 시단에서 입지를 다진다.
1923년 처녀시집 <황혼의 노래>를 자비로 출판했으며, 이듬해에는 <스무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냈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읽혔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성공을 거두었고, 그뒤로도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네루다는 1927년 버마 랑군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받았으며 그뒤 세일론, 자바, 싱가폴, 부에노스 아이레스, 마드리드 등에 머물며 외교관 생활을 하였다.
1934년부터 1939년까지 에스파냐에 주재하고 있을 때, 인민전선정부가 탄생하고, 내란과 프랑코 독재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정치 시인으로 변모한다. 특히 1936년 스페인 내전과 친구 가르시아 로르까의 처형 등에서 받은 충격으로 이후 정치, 사회적 문제에 크게 집착한다.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칠레 정부는 그를 멕시코로 보낸다. 이곳에서 왕성한 창작기에 접어들며,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란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들이다. 귀국후 1945년 상원 의원이 되고, 공산당에 입당한다. 공산당이 비합법 단체로 인정되자 지하로 잠입하고, 망명을 하여 고난의 나날을 보낸다.
1950년 멕시코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를 노래한 웅장한 서사시집 <위대한 노래>를 발표 .그 속의 장시 <나무꾼이여, 눈을 떠라>로 50년도 스탈린 국제평화상을 수상한다. 52년에는 귀국하여 시 창작에 몰두. 70년에 아옌데 인민연합 정권이 수립된 후 , 주駐 프랑스 대사가 되고, 1971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네루다의 시는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생동이다'라고 정현종 시인은 말한다. 민용태 시인은 네루다 시의 생동감을 '열대성' 또는 '다혈성'이라고 표현한다. 네루다의 시를 읽으면, 폭우에 흠뻑 젖는 느낌, 강렬한 태양 아래 발거벗고 선 느낌, 폭풍우가 내 몸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교차한다. 초기 시집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만의 노래>에서 관능적 표현의 서정시를 주로 썼으나 이후 시집 <지상에서 살기>까지를 통해 초현실주의 기법의 시들을 썼으며, 스페인 내전1936년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현실 참여의 시들을 썼다. 평생 40여권의 시집을 냈다.
1973년 9월의 군사 쿠테타로 아옌대 정권이 무너지자, 병상에서 격렬하게 항의하는 시를 쓰다가 세상을 떠난다. 한편 1995년엔 파블로 네루다와 외딴섬 우편배달부가 나누는 소박한 우정과 사랑을 담은 이탈리아 영화 <일포스티>가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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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가 태어날 때부터 생을 마감하기 까지의 삶을 기술한 회고록이다. 낭만적인 연애 시인에서 위대한 민중 시인으로 거듭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 중, 자신이 특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 사건, 사랑, 창작과 비평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유년기로부터 보헤미안 생활을 하던 청년 시절과 동남아시아에서 보낸 영사 시절을 거쳐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 전후의 갈등, 칠레의 1970년대 정치 상황등을 그린다. 시의 창작과 비평에 관한 견해와 피카소, 에렌브르크, 네루, 체 게바라, 아옌데등의 단상을 이야기한다. 얼마전 시인을 만났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청계천 사업을 '눈가리고 아웅'이라고 했다. 4대강 반대운동에도 적극 참여중이다. 시인이란, 언어를 세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단어 하나를 하루종일 부여잡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내가 만난 시인은 순수한 영혼을 가졌을뿐, 언어적인 기교는 그다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네루다는,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라고 했다. 시인은 누구보다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 책은 시인이 일생동안 실천한 일의 기록이다.
나의 회고록은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 나는 일생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 피터드러커는 50이 되어서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인생을 헛산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회고록도 50이 되어서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이 보고 싶은 회고록이 되었으면 좋겠다. 네루다의 회고록은 시대적 상황과 인물을 회고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의 회고록은, 장사, 사업, 경영, 기획, 글, 책, 사람등으로 채워졌으면 한다.
며칠전 오프라인 수업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사실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생각이 그다지 없다. 주제를 잡고 쓰지 않는다. 마음에 무언가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면, 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써놓고 나서야, 제목을 붙이는 것이 나의 글쓰기 스타일이다. 이런 류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진실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관성이 없고, 호흡이 길지 않다. 묶어도, 일관성을 찾기가 어렵다. 커다란 덩어리로써, 큰 파장을 일으키기는 어렵다.
인생도 이렇게 되지 않을까? 지금 당장 죽으면, 나는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외식업 사장.
책 읽고 ,글 조금 쓰는 사람.
술, 담배 안하고 혼자 놀기 좋아하는 사람.
열심히 무언가 계속 하는 사람.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
사교성은 떨어지고, 외부에 그다지 관심 없는 사람.
나를 찾고자, 이리저리 방황한 사람.
이 정도다. 멋 없다. 회고록은 실천의 기록이다. 나는 매일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 사업을 한다. 나는 사업가다. 기획자가 어울릴 듯하다.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내 일이다. 매일 조금씩, 혹은 많이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사업 확장에 애쓴다.
나의 회고록은 기획과 실천의 기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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