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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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극동의 신화>
제7장 중국 신화
1 중국 문명의 고대성
u 상왕조와 초기 및 중기의 주 왕조는 시간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그 성격에서도 아리안의 등장 이후 붓다의 시기에 이르는 기간의 인도와 대체적으로 상응한다. 기원전 8세기와 그 후 몇 세기에 걸쳐 인도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광범위한 지역에서 제후 도시 국가가 출현하고 초기의 봉건적 삶의 질서가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서로 비교할 만하다. .. 그러나 세상이 분열되기 시작할 때, 중국 사상은 전쟁을 포기하고 숲으로 은둔하는 대신 그 사회 질서를 회복하는 문제에 몰두하였다. 그러므로 은둔의 방식이라는 고고한 역사 대신에 중국 철학은 존재하는 세계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정향들의 체계로 특징지어 진다 (431).
2 신화적 과거
u 첫번째로 지적하여야 할 점은, 주나라의 이러한 초기 신화들이건 후대의 유교 경전이건 그 어디에도 창조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 중국 문헌에서는 이 세상이 인도인의 우주적 신기루보다 훨씬 더 실재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삶의 의지의 뿌리를 찾으려는 중국인의 근본적인 욕구 속에는 “위대한 반전”의 어떠한 흔적도 없다. 중국인들은 수많은 난관을 무릅쓰고 자기 자신들에 대하여, 그리고 다산, 번영, 장숭의 단순재에 대하여 놀라울 정도의 낙천적인 확신을 가지고 살아왔다 (434).
u 좋은 일은 모두 요순 황금기와 더불어 시작한다 (435).
u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내가 신화적 민족학이라고 부르는 사고 유형이다. 이는 중국 철학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고대적 사상 체계에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경계 너머에는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오랑캐들이 있고, 중국은 이들을 통제하여야 할 우주적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고이다 (437).
u ….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의 계승과 가치가 혈통이 아니라 도의에 입각하였다는 점인데, 이는 지극히 유교적이다. … 순이 우주적 축의 자격을 얻는 데에 요구되었던 유일한 표시는 효심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인도에는 이것과 비견될 수 있는 것이 없다. 거기서는 출생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441).
u 이렇듯 자신의 왕위를 신분과 관계 없이 백성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에게 양위하는 아주 독특한 중국적 모티브는 초기 모가장제의 잔재일수도 있고,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다룬 늙은 왕의 살해 모티브와 같은 폭력적인 것일 수도 있다 (441).
u 올바른 행위에 대한 중국인의 기본 정신- 서주 시대에 이미 형성되었지만 확실히 유교적인- 속에는 영웅의 덕이 자연 질서에 일치하며, 그렇기 때문에 영웅은 자신의 과제를 수행할 때에 하늘의 명령과 하늘이 계시한 홍범 구주의 도움을 받는다 (446).
u 하 왕조의 몰락 후에는 고고학적으로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 상 왕조가 등장하였다. 요, 순, 우왕이 중국의 문학에서 선왕의 성품을 지닌 모델로 등장한 반면, 하 왕조의 마지막 전설적 군주인 걸은 악한 왕의 모델이었다 (447).
u 비가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 덕 있는 군주 탕이 그러한 밭에서 기꺼이 자기 몸을 바치는 전설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나타나는 세상 회복을 위한 국왕 살해 의례와 관련이 있다 (449).
u 칼그렌 박사는 “나무로 변한 여자들의 이야기 (필레몬과 바우시스, 다프네)는 초기 헬레니즘의 영향인 것 같다,고 쓰고 있다 (449).
u 탕왕은 그의 시대가 떠오르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그 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격하라!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힘을 주겠다. 나는 그대를 도우라는 하늘의 위임 (천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450).”
3 중국의 봉건 시대: 기원전 1500~500년경
u 1928년에서 1938년 사이에 중국 최초의 역사적 왕조인 상의 왕릉이 일련의 발굴 작업을 통해서 드러났다 (451).
u 기원전 420년경에도 도덕주의자 묵자는 당대 왕실의 장례 의식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452).
u 중국 고고학은 앞에서 살펴본, 1. 초기 신석기의 조잡한 토기, 2. 앙소의 세련된 채색 토기. 3, 용산의 세련된 흑색 토기, 4. 상의 세련된 백색 토기, 청동 그리고 무덤의 가구를 순서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근동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나타났던 문화 변천의 과정이 극동에서는 늦게 출현하였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또한 지금까지 전해져온 초기 중국 신화의 단편들은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서 탈신화화되고 (euhemerized: 신을 역사적 영웅의 신격화의 산물로 해석하는 관점) 도덕화되었지만, 서에서 동으로 향하는 문화적 흐름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준다 (452).
u 조지프 니담 교수와 왕링 교수는 백과 사전적 저술인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북극권 아래에 있는 북위도 지역, 곧 북아시와와 북아메리카의 광대한 문화 공동체를 가로지르는 어떤 특질들이 발견된다. 이 지역 전체를 샤머니즘 지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453).”
u 아주 잘 보존되어 있는 상나라의 왕릉 예술에는 두 문화적 파도 사이의 상호 작용이 엿보인다. 서양에서 온 첫 번째 파도는 청동기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 두 번째 파도는 남쪽으로 흐르는 북극 지역의 “샤머니즘적” 물결과 다양한 몽골 계통의 물결이다 (454).
u 샤머니즘은 중국과 티벳의 종교 생활만이 아니라 불교와 일본 신도의 매우 현저한 특성이다 (454).
u 샤머니즘이 북극 부근의 몽골 족에서 최고로 발달하기는 하였지만, 실제로는 구석기 시대 이래 광범위하고도 기나긴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뱀이건 호랑이이건, 사슴이건, 용이건, 도철이건 간에, 상나라의 모티브는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456).
u 니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점을 치는 뼈가 ‘갑골점’에서 사용되었다. 갑골점은 이 문화권의 독특한 것으로 보이며, 상나라가 등장하기 얼마 전에 생겨났을 것이다 (457).
u 신화의 형태에서처럼, 조짐에 의해서 하늘의 의지를 측정할 때에도 초기 중국은 수메르와 특히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458).
u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신사에서는 이 놀라운 북소리, 날카로운 피리소리, 큰 종소리가 들리며, 장엄한 춤이 펼쳐진다. 여기에는 샤머니즘적 요소가 우아하게 절제되어 있다 (460).
u <서구의 몰락>에서 슈펭글러는 운명의 전개에 근거한 “시간적 사고”와 무시간적인 자연 법칙에 근거한 “공간적 사고”를 대비시켰다. 전자는 정치적 재능이 있는 사람, 곧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가진 자에 의해서 주로 대변되며, 그 자신이 운명의 주체가 되려고 한다. 후자는 사제적 혹은 과학적 지식을 가진 자에 의해서 대변되며, 그는 영구히 타당한 법을 적용함으로써 효과를 거두려고 한다. 슈펭글러가 사유와 행위의 양식에 관하여 언급한 주요 내용들 속에서 중국과 인도를 대비하면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문명에 서명을 하는 자가 중국에서는 정치가였고, 인도에서는 사제였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정치적 성취를 목적으로 변화하는 운명, 즉 도를 탐구하는 점복을 매우 강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영원한 진리로 간주되는 지식의 공식 안에 응축되어 있는 불변하는 법칙의 체계, 즉 다르마를 강조한다. 한쪽에는 역사 의식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어떠한 역사 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조상 숭배 (시간 안의 방향)가 지배적이고 인도에서는 땅과 대기와 하늘의 신 (공간의 장)이 지배적이다. 한편에서는 인간의 최고 목적이 의미 있는 참여 의식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초탈 의식이다 (463).
u 그러나 이 두 문화 세계가 서로 비교될 수 있는 변동의 시대를 거의 동시에 거치고 있었음은 놀라운 일이다. 아리안이 인도로 들어온 시기와 상나라의 전사들이 중국에 들어온 시기는 거의 같았다. 봉건적 베다 시대는 기원전 8세기경 군소 도시 국가가 등장하는 시기에 끝나고, 중국도 그 무렵에 이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격심한 변동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기원전 776년 8월 29일, 중국인 일관들이 일식을 하늘의 전조로 관찰하였고, 그것은 이미 다가온 불운의 시대로 해석되었다. <시경>의 후반부는 새로운 시의 양식, 곧 염세주의적인 애도의 문학을 보여주고 있다 (463~4).
u 중국에서 봉건제가 해체되고 서로 경쟁하는 제후 국가가 등장하는 시대는 춘추시대(기원전 771~480)로 알려져 있다. .. 전통적으로 그 시대는 유왕이 서쪽에 있는 자신의 가신에 의해서 살해를 당한 해로부터 시작한다 (465).
u 진나라는 공자 시대 이후에 중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중국 최초의 군사 제국을 건설하고 만리 장성을 세웠다. 또한 철학자들의 책을 불에 태웠으며, 전제주의 정치를 장엄하게 시작하였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가면을 쓴 채로 진행된 전제 정치는 그 이후의 중국사에서 천명의 도구로 작용하였다 (465).
u 우리는 뒤에서 덕의 여러 측면을 찬미하는 아주 멋있는 구절들을 읽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실제 역사에서는 전적으로 대립하는 종류의 철학이 중요한 구조적 힘으로 작용해왔음을 알아야 한다. … 중국 역시 아래의 간략한 예들에서 잘 드러나듯이 과거에는 힘의 정치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465~6).
4 위대한 고전의 시대: 기원전 500~ 기원후 500년경
주 왕조 후기: 기원전 480~221년
u 중국 고전 사상은 정치적 개혁에 최고의 관심을 두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이고 우주적인 해탈이 최고의 관심사인 인도 사상과 대조를 이룬다. 중국적 맥락에서 중심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세상의 권세와 권력의 바른 소재에 관한 것이다. … 중국 신화에 따르면, 하늘, 땅, 인간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인간의 영역 안에서 권세와 권력의 핵심 원천은 황제이며, 그는 신화적 종속의 정신 속에서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황제는 천명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최후의 사회적 질문은 천자의 천명을 유지하는 덕에 관한 것이다 (467).
u 그러한 문제는 복잡하지만 대체로 2가지 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1. 시간의 대우주적 질서의 측면. … 2. 인간의 소우주적 질서의 측면. … 아서 웨일리는 <도덕경>을 멋지게 소개하는 글에서 “모든 중국 철학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조화롭고 훌륭한 질서 속에서 어떻게 하면 함께 살 수 있는가에 관한 탐구이다”라고 쓰고 있다. “모든 중국 철학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통치의 기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의 모델은 모든 학파들이 사실로 받아들이고 해석한 요, 순, 우 왕의 신화적 황금 시대이다 (467).
u 이 문제의 첫 번째, 곧 대우주적 측면에 과한 중국의 주요한 문헌은 <역경>이다. … 이 책의 기원에 관한 전설에 따르면, 전설적인 10명의 황제 중 첫 번째인 복희씨가 역의 기본 요소를 발견하였다 (467).
u 이 기호를 더욱 발전시키고 그 미묘함을 더 풍요하게 한 사람은 문왕이다. 그는 효를 서로 결합시켜 64괘를 만들었다. … 공자도 주석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 기원전 213년 분서갱유의 대참사가 일어났을 때, 이 특별한 서적은 변덕 때문이 아니라 실용적인 이유로 보존되었다. 따라서 이 책은 모든 학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469).
u 점의 결과를 구하는 자는 이 모든 설명과 자신의 상황 사이의 어떠한 상응 관계를 찾아야 한다. 이러한 사유 방법은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 관념을 연합시키는 방법이다. 이러한 비밀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유가 아니라 느낌을 가져야 하며, 각 상징이 이러한 관념 연합의 우주 속으로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469).
u 인도의 신화는 술에 취하고 관능적이고 혹은 그와 정반대로 철저하게 금욕적인 데 비하여, 중국의 신화는 무미 건조할 정도로 실용적이거나 익살스러운 상징일 뿐, 결코 극단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신화 체계는 근본적인 면에서 서로 일치한다 (470).
u 한 마디로 <역경>은 일종의 신화의 기하학으로서, 특히 직접적 현재- 시초를 던지는 순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470).
u 이제 내부 세계의 질서, 즉 개인의 능력 안에서 지상에서의 조화로운 삶을 실현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힘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거기에는 3가지의 견해가 눈에 뜨인다. 공자, 묵자, 그리고 도가의 견해가 그것이다. 이들은 서로 구별되지만 중국의 전형적인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 관점은 신화를 우주론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본다 (470).
u 공자 (기원전 551~478년). 알면 알수록 더 신기루처럼 되어버리는 인물이 공자이다. … 그 성인에 대한 최초의 방대한 전기는 <사기> 제47장에서 나타난다. …. 그의 삶은 분명히 실패로 끝났다. 그는 붓다와는 달랐다. 공자의 욕망은 세상의 수호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요, 순, 우 황금 시대의 선정을 회복하는 제후의 자문관이 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470~1).
u 오늘날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할 경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공자가 아니라 유교라는 사실에 만족해야 한다. 유교는 “인”을 이 세상에서 삶의 조화를 실현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힘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유교는 중국 사상사에서 농경과 투쟁의 철학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지점에 서 있다. … 그리고 인은 관계, 곧 사람 사이의 자애롭고 진실하고 상호 존중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유교 문헌에서는 5가지 관계가 나타나고 있다. 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 친구 사이의 관계이다 (472).
u 관계의 질서에 따르면, 유교의 첫 번째 덕목은 인이고, 그러한 관계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두 번째 덕목이 필요하다. 그것은 정명이라고 불리는 덕목이다 (472).
u (인도의) 수많은 카스트와 직업의 규범은 인간의 영역 안에 나타난 자연적인 질서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규범을 준수할 때에는 다양한 계급이 서로 명백하게 갈등을 겪고 있는 경우조차도 서로 협동하고 있는 것으로 느낀다.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의무를 따르는 종족과 계급은 우주의 일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봉사를 통하여 개인은 자신의 독특성의 한계를 넘어서 우주적 힘의 도관으로 들어간다. … 그러므로 ‘덕’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완전하게 수행하는 것과 사실상 동일한 의미이다 (474).
u <중용>으로 알려진 유교 경전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저작으로 간주되지만, 아마도 진나라나 한나라의 작품일 것이다 (474).
u … 마누와 공자, 인도와 중국의 주요한 차이는 덕이 있는 자가 강조하는 의무의 지역적 특성, 곧 인도의 카스트 규정과 공자의 오륜에 있을 뿐, 두 체계의 형이상학은 동일하다 (475).
u 묵자 (기원전 480~400년): 공자의 사상 체계에 대한 첫 번째의 심각한 철학적 도전은 보편적 사랑의 가르침을 설파한 주창자로부터 나왔다. … 묵자는 공자가 죽을 무렵에 태어난 것이 분명하며, 기원전 480~400년 무렵이 그의 전성기였다고 한다 (475).
u 유가들은 어떤 행동이 이익이 되는가를 생각하는 대신 의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며, 그것이 물질적 보답을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원칙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이와 달리 묵자의 학파는 ‘이윤’과 ‘성취’에 최고의 강조점을 두었다. … 사회 질서와 그 질서를 구조화하는 힘의 문제는 공자의 경우처럼 묵자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묵자는 본성을 활성화시키고 계발시키는 예절, 예술, 의례의 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였다. 더구나 본성 자체에 대한 믿음도 잃었다 (476~7).
u 도교: 기원전 400년경 이후. 한편에는 부당하게 다스려지는 “저급한” 피착취 대중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통치 능력이 없는 혼란스러운 상류층의 폭군이 존재하는 사회의 질서를 생각해보라. 기원전 4~3세기경이 바로 이러한 상황이었다. 이때 예민한 감각을 지닌 많은 수의 중국 지성인이 숲으로 은거한 것은 놀라운가? 그 시대는 그보다 3세기 혹은 4세기 전에 해당하는 인도의 숲의 철학자들이 시대를 닮고 있으며, 적어도 그 시대를 연상시키고 있다. 당시의 인도에서도 초기의 봉건 질서가 와해되고 있었다 (480).
u 법가라고 불리는 강경한 학파의 또 다른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통치자는 자기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개인의 중요성을 신봉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러한 가르침은 사람들을 고요한 곳으로 물러나게 하거나 동굴이나 산속으로 숨게 만든다. 그들은 은둔하면서 현정부를 비난하고 권위를 지닌 자를 조소하며, 지위와 봉급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관직을 지닌 모든 사람을 멸시한다. 그럼에도 웨일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한 사람들이 관직에서 나오는 봉급을 거부하고 그들 자신의 노동에 근거한 자급 생활을 주장한 실제 이유는 별도로 있었다. 이들은 사회가 스스로를 완성시키는 각 개인들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481).”
u 웨일리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모든 학자들은 인도에서 들어온 지리적, 신화적 요소가 3세기의 문헌에 가득 차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482).”
u 인도와 비교할 때 중국 정적주의 운동의 궁극적인 힘과 방향은 매우 다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도 요가의 금욕주의자는 자신의 내부에서 모든 종류의 주술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어떤 “힘 (시디)”을 계발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인도 요가의 참된 목표는 이러한 힘을 넘어서는 데에 있다 (483).
u 이와는 달리 중국에서는 관심의 대상이 바로 힘(덕)이다. 웨일리는 “덕은 잠재적인 힘, 어떠한 것에 내재한 ‘덕’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도덕은 “길, 질서, 우주 (도)의 잠재적 힘(덕)”이며, 정적주의자들은 외부에서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이러한 힘을 추구한다. 그 힘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483).
u 중국의 도에 대한 철학의 고전은 “길의 힘의 책”인 <도덕경>이며, 그러한 종류의 도 철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나온다. 즉, 도에 대한 고요한 명상은 “외부 세계에 대한 힘을 불러일으킨다. 인도인은 이를 시디라고 말하고 중국인은 덕이라고 부르는데, 물질을 두고 서로 다투는 물질의 노예들을 결코 꿈꿀 수 없는 힘이다 (483~4).”
u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 봅니다 (485).
u 본래 삶이란 게 없었네. 본래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던 것이지. 본래 형체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본래 기가 없었던 것이지.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네 (486).
u 전반적으로 볼 때, 공자와 도가는 세계를 형성하는 힘의 자리를 인간 자신 안에 위치시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 자리의 깊이와 그 힘을 일깨우는 방식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도가는 “마음을 비우고 앉아”,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상태로 돌아가는” 내향화된 명상의 방법을 선호하였다.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이름이 붙은 것, 형태가 있는 것, 명예로운 것, 거부된 것보다 더 깊이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주장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무위는 그들의 표어였으며, 역설의 방법이 그들의 가르침이었다 (486).
u … 성인은 ‘하나’를 품고 세상의 본보기가 됩니다/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기에 밝게 빛나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기에 돋보이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되고/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 갑니다/ 겨루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겨루지 못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휘면 온전할 수 있다고 한 것이 어찌 빈말이겠습니까?/ 진실로 온전함을 보존하여 돌아가십시오 (487).
u 이와 달리 공자는 외향적 길을 가르쳤다. 그는 음악, 시, 의례에 관한 지식, 그리고 예절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친절함, 온화함 혹은 어짐의 감정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감정들은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인간 관계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487).
u 공자와 도가는 우주적 자리에서건 인간의 내적 자리에서건 인간의 본성을 신뢰하고 있다. 이점에서 이들은 <상군서>에 나타난 묵자나 법가 혹은 현실주의자의 사유 방식과는 정면으로 대립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권력만이 효과적인 힘이었고, 필요한 재화는 식량과 주거와 세속 법규였다. 이들은 “하나를 품으라”라는 도가의 공리에서 그 형이상학적 의미를 제거시키고, 그것을 단지 정치적으로만 받아들였다 (487~8).
진 왕조: 기원전 221~207년
u 소국 노나라 만큼 도덕과 예절에 관한 유가의 가르침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기원전 249년 노나라는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기원전 318년에는 아직도 인신 공희를 행하고 있던 비철학적 국가인 진나라가 주변 국가들의 연맹을 격파하였다. … 기원전 246년에 정이 진나라의 옥좌를 획득하였으며, … 221년에는 마침내 중국의 최초 황제로서 진시황제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야만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 곧바로 만리 장성의 건설에 들어갔으며, 213년에는 책을 불태우라는 칙령을 내렸다 (488).
한 왕조: 기원전 202~기원후 220년
u 헬레니즘 영향 하에 있던 박트리아, 불교가 번성하던 인도, 조로아스터교의 지배 하에 있던 파르티아, 그리고 로마로 이어지는 옛 비단길은 기원전 100년에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유럽, 레반트, 인도 그리고 극동의 네 지역 사이에 관념의 교류가 계속적으로 증대하였으며, 유라시아 대륙을 통하여 서로 어휘를 공유하는 신화 체계를 발전시켰다 (489).
u 로마, 파르티안 페르시아, 카니슈카의 인도 그리고 한나라 당시의 중국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신화적 모티브를 비교 문화적으로 검토해보면 서로 공유하고 있는 근본적인 주제의 보고가 나타난다. 그러나 네 지역은 오늘날까지도 분명하게 지속되고 있는 토착적인 양식, 감정 그리고 논리의 행태를 그 당시에도 가지고 있었다 (489).
u 5대 원소에 관한 신화적 개념이 어디에서 최초로 등장하였는가를 밝힌 사람은 아직 없다. 나는 그 증거들이 언제인가는 수메르와 아카드의 점토판에서 출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5대 원소에 관한 최초의 그리스적 신화 체계는 아낙시만드로스 (기원전 611~547년)가 남긴 단편에서 보이고 있다. 그는 이 원소들을 불, 공기, 흙, 물, 그리고 무한자로 명명하고 있다. 인도의 경우에는 그 신화 체계의 성립 연대가 확인되지 않았으나,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에 그 시리즈가 나타나고 있다 (490).
u 이에 상응하는 중국의 신화 체계는 한대의 학문에서 처음 출현하였으며 그 체계들은 각기 다르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최초의 신빙성 있는 증거는 “홍범”이라고 알려진 <서경>의 한 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490).
u 중국에서의 5대 원소는 물, 불, 나무, 쇠, 흙이다. … 한대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5대 원소의 기초 체계를 많이 만들고 그 위에 일종의 관념의 탑을 세웠다. 그 모든 관념들은 5대 원소와 연결되어 있다 (491).
u 풍요하고 장엄한 군사 제국 한나라는 하나의 일치 개념을 공유하는 경건하고 근면한 수많은 손들에 의해서 매우 조화로운 문명을 형성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문명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비인간적인 힘과 잔인한 폭력에 근거한 통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흔들리지 않는 축, 곧 중국 (Middle Kingdom)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었다 (492).
u 기원전 200년이라는 중요한 연대를 지나면 상황이 급격하게 달라진다. 천년 동안 번성한 봉건 왕조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 기원전 250년의 저자들은 아직 그들이 목격한 의례를 살아 있는 실재로 묘사할 수 있었지만, 기원전 100년이 되면 221~211년 대파국 이전의 상황이 어떠하였는가를 이야기하여야만 하였다 (493).
u 동시에 외국의 영향도 증대하였다. 서아시아에 대한 지식이 급증하였으며, 무엇보다도 한왕조의 사람들은 북부와 북서 지역의 유목민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관념과 관습을 교류하였다. 현재의 중국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과도 교류하였다. 양자강의 남쪽에 위치한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인의 침투와 식민화는 2세기 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한나라의 전통은 주나라의 전통보다 덜 동질적이고 덜 중국적인 혼합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493).
u 그러나 초기의 한 왕조와 기원후 2세기의 한 왕조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존재하였다. 처음 3세기 동안 한나라의 통치는 중국인의 삶과 사상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후기 한나라와는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나라의 첫 세기에 활동한 학자들은 시간적으로 아직 봉건 시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493).
u 그러나 2세기가 지난 뒤에 위대한 학자들의 시대가 되면, 그러한 지식은 많은 세대의 사슬을 거쳤기 때문에 더 이상 최근의 기억이 아니라 고대의 전통에 근거하여야만 하였다 (494).
육조 시대: 기원 후 190/ 221~ 589년
u 불교는 한나라 시대에 중국에 들어왔다. 그 연대는 아마 서기 67년경일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의 신화적 사유와 문명에 미친 영향은 한나라 황실 몰락 이후의 무질서 시대에 증가하였다. 한나라의 몰락 이후 거의 400년간 지속된 전쟁과 참화로 인하여 이 기간은 기나긴 역사의 대부분 동안 중국적 실재들을 근거짓는 실재로 존재하게 되었다. 봉건 질서의 몰락기에 등장한 내부의 보다 깊은 ‘실재’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이 시기에 다시 시작되었던 것이다. 준치로 다카쿠수 교수가 <불교철학의 본질>에서 제시한 중국 불교의 10개 종파가 모두 이 시기에 “경전을 번역하고 소개한 유능한 사람들”에 의해서 창시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494).
u 이 시기에는 도교 사상의 세계에도 활력이 넘쳤다. 독서 계급의 마음을 지배한 유교의 영향력은 국가의 관료 체계가 무너짐에 따라 약화되었다 (494).
u 서기 3~4세기의 스승들은 “제도와 도덕”을 의미하는 명교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함, 자발성, 자연적인 것”을 의미하는 자연이라는 원리에 따라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95).
u 이 시기에는 또 다른 도가의 길이 발전하고 있었다. 이미 후한대에 도가의 목적의 하나로 등장한 것은 신화적 불멸의 존재인 “산 사람”, 즉 “선으로의 변형”을 추구하는 기적이었다 (496).
u …. 구겸지의 영향 아래에서 440년에 도교는 국가 종교로 되었으며, 불교는 얼마간 억압을 받았다 (499).
5 위대한 신앙의 시대: 500~1500년
u 니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304년에서 535년 사이에 북부에서는 17개의 ‘왕조’가 서로 투쟁하고 있었다. 이중에서 4개의 왕조는 훈 족, 4개의 또 다른 왕조는 투르크 (돌궐), 6개의 왕조는 몽골족 (선비)이었고, 단지 3개의 왕조만이 한족의 가문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를 통하여 북중국이 야만화되었다기 보다는 ‘오랑캐’가 더 중국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500).
u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약5세기 동안 중국 땅에서 정착해온 외래 종교인 불교도 토착화를 통하여 철저하게 중국적인 2가지 현상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대중적인 도교를 패러디한 것이다. … 다른 하나는 선으로 알려진 극동의 불교 종파이다. 선불교는 분명히 도교적인 사상과 감정을 수입된 불교 용어로 번역한 것이다 (500).
수 왕조: 581~618년
u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정치적 분열의 역사는 수 왕조 (581~618년)에 의해서 마감되었다. 수 왕조는 단명하였지만 상당한 능력을 발휘한 왕조였다 (503).
u 니담은 “대부분의 중국 및 서양의 역사가들은 당을 중국의 황금 시대로 간주하였다”라고 말한다 (504).
당 왕조: 618~906년
u 매우 국제적이던 이 시기의 전반부는 중국 불교의 전성기였지만, 후반부는 쇠퇴기였다. 침묵의 종파인 선종은 불교 교리의 중국화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841~845년 사이에 유교-도교가 반격하면서… (504).
u 선불교의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서 선종의 제6대조이자 마지막 조사가 된 혜능이 인도적 영성과 중국적 영성의 절묘한 종합을 표상하는 깨달음을 성취한 것은 황매현의 조용한 산사에서였다. 그의 시대를 거치면서 극동의 조사의 계보는 다음과 같이 이어져 왔다: 보디다르마/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 (504).
u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은 어린아이이다. … ‘도덕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평생을 통해서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키고 있는 자라고 맹자는 말한다. 이러한 관념은 3세기 (기원전)의 문헌들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기원후 8세기가 되면 이러한 관념은 열반의 복음과 결합한다 (508).
u 스즈키 박사의 다음과 같은 말은 참으로 맞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인습과 인위적이고 세련된 위선에 의해서 전혀 방해받지 않는 자연스러움 속에는 신적인 어떠한 것이 있다. 인간적인 것에 의해서 제약되지 않는 이러한 것 속에는 신선한 그 무엇이 있으며, 그것은 신적인 자유와 창조성을 암시한다 (512~3).
송 왕조: 960~1279년
u 중국 불교는 841~845년이 타격에서 결코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채 대체로 조야한 민속 종교의 수준에서 민간 도교와 함께 잔존하였다 (517).
u 중국 불교의 이러한 행동은 청동기 시대의 배경에서 나온 것이고, 그 의미에서, 이것은 참으로 현대 세계에서 5천 년의 과거를- 인도와 함께- 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17).
u 인도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절대적인 세계 창조라는 관념은 없다. 그러나 해체- 재창조의 모티브가 강조되는 인도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의 주요 사상은 세계의 현재적 측면을 강조한다 (518).
u 카타가와 교수가 간명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무엇이 도인가?”보다는 “도를 실현하는 방법”이 중국인의 주요 관심사를 이루어온 문제이다 (519).
u 여기서 다시 한번 인도와 대조되는 점을 살펴보자. 이론적으로 정적인 카스트 제도가 우주적 질서의 사회적 측면을 재현하고 개인은 그의 광범위한 카스트의 자양분에 의해서 자신의 의무로 향하는 인도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에서는 가족과 직계 친족의 자양분이 지배하며 신에 대한 봉헌이 아니라 효가 그 제도의 핵심적 감정이다 (519).
u 차등없는 보편적 사랑을 외친 묵자의 철학은 이러한 감정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따라서 1950년대 공산주의자들- 이들의 관점과 묵자의 철학은 잘 어울린다-에 의해서 부활될 때가지 묵자는 한나라 이후 중국 문명을 유지시켜 온 감정 체계를 형성하는 데에 상대적으로 미약한 역할 밖에 하지 못하였다 (519).
u 그러므로 중국 종교는 성과 속의 차이를 결코 만들지 않았다. 그 (키타가와 교수)는 이렇게 쓴다. “의식 활동의 중요성이 무시되어서는 안되지만, 중국인의 종교적 에토스는 의식 활동보다는 일상 생활 속에서 발견되어야만 한다. 중국인의 삶의 의미를 종교적이라고 불리는 삶의 어떤 한 부분에 한정시켰던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찾았다 (519).
u 군주들 자신이 신화적 성인인 노자의 후손이라고 생각한 당 왕조는 906년에 붕괴하였다. 50년에 걸친 전쟁 군주의 시대 (이른바 오대) 이후에는, 정치적으로는 약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놀라운 수준을 지닌 송 왕조 (960~1279년)가 등장하였다. … 마침내 불교, 도교, 유교 어휘를 종합한 신유교가 등장하였다 (520).
u … 신유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교적 성현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불교의 붓다와 신유교의 성인 사이의 차이는, 붓다가 영적 수양을 사회와 인간 세계 밖에서 증진해야 하는 반면 성인은 인간의 유대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520).
u 전한 시대의 두 지도적 유가인 맹자와 순자의 시대에 이미 중국의 완성된 문명이 기초할 근본 원리들이 잘 확립되어 있었다 (521).
<제8장. 일본 신화 >
1. 선사 시대의 기원
u 일본으로 눈을 돌리면 4가지 사실이 곧바로 드러난다. 첫번째는 불교의 도래 시기, 그리고 불교와 함께 발달한 문명의 기술이 도래한 시기가 게르만 유럽의 기독교화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도와 중국은 내적으로 완성되고, 소진되었으며, 슈펭글러가 부르듯이 농민으로 간주될 수 있는 데 비하여, 일본은 젊고, 아직 꿈꾸고 있으며, 니체가 말하듯이, “춤추는 별을 낳을 수”있다 (522).
u 두 번째 점은, 이 젊음 때문에 전통적인 일본에서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그리고 중국에서 보았던 사회적 또는 우주적 탈환상화 같은 근본적인 경험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불교가 도래하였을 때에, “삶 자체가 괴로운 것이다”라는 첫 번째 고귀한 진리가 귀에는 들렸겠지만, 결코 가슴 속까지 닿지는 못하였다. 일본은 붓다의 복음에서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들었다 (522).
u 세 번째 점은 비교적 원시적인 민족이었던 일본인들은 역사의 무대로 들어갈 때에도 아직 모든 것에서 근원적인 누미누스의 감정- 루돌프 오토가 종교의 고유한 정신적 상태라고 이름지은- 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522).
u 네 번째 사실은 영국처럼 섬나라인 일본에서는 사회 질서의 꼭대기에서부터 밑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근본적인 교감 (rapport)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륙에서는 인종, 문화, 그리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계급 사이의 충돌이 사회사의 규범으로 실제 나타나고 있었던 반면, 일본에서는 가장 잔인한 무질서의 시기에도 제국이 하나의 유기적 단위로 기능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명예심을 동반한 본질적으로 영웅적이고 귀족적인 정신이 일본 사회의 곳곳에 스며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523).
u 일본 고고학의 영역은 5가지로 나누어진다. 첫번째는, 대체로 가설적이기는 하지만, 북경원인과 자바원인의 시기에 해당하는 구석기 수렵인의 단계이다. 기원전 40만 년경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일본 열도는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다 (523).
u 두 번째의 선사 시대 역시 가절적이지만 중석기 수렵인의 단계에 해당하며,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3천년 경 이후에 시작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523).
u 세 번째 영역은 상당히 중요하다. … 연대는 기원전 2500년에서 기원전 300년 사이이며. … 이 문화를 최초로 이식한 무리는 코카서스 인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아이누는 오늘날 북쪽의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지만, 한때는 혼슈의 전부 혹은 대부분에 걸쳐 살고 있었다 (523~4).
u 네 번째 단계에서는 … 대륙 청동기 문화의 영향이 보인다 (524).
u 마지막 단계에서는 정착 마을이 형성되고, 소와 말의 외양간과 아울러 메밀, 삼, 팥, 참깨 농사가 발달하였다 (524).
u 야요이 시대로 불리는 네 번째 영역의 연대는 기원전 300~기원후 300년 경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일본 고유 문화의 토대가 형성되었다. 발굴지가 큐슈와 남부 혼슈에 국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문화는 한국을 경유하여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524).
u 다섯 번째 영역은 기원 후 300년경에 시작되는 야마도 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중앙아시아인이 한국에서 큐슈를 거쳐 혼슈로 들어왔음을… (525).
2. 신화적 과거
u 일본 지식인이 모델로 삼은 것은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과 같은 종류의 전설적인 중국의 연대기였다. …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골격에 옷으로 입혔던 재료는 약간 유치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들 자신의 민간 전승이었다. 그 결과 우리의 주제에 관한 문헌 중에서 가장 놀라운 동화로서의 세계사가 등장하였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일본인의 정신에 잘 어울린다. … 일본에서는 삶의 이상이 지닌 비상한 진지성과 심오한 무게가, 모든 것은 장난일 뿐이라는 유행성 허구에 의해서 감추어지기 때문이다 (527).
u 중국이 일본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유교였다. 유교는 4세기 무렵에 들어온 것 같으며, 5세기에는 분명히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연대는 6세기에 속하는 552년이다. 이 해에 백제의 왕이 킴메이 천황에게 몇 권의 경전과 황금 불상을 선물하였다. 이렇게 해서 문명의 예술이 이 나라로 쏟아져 들어왔으며, 그 후 300년 동안 탐욕적인 동화 작용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한 과정은 나라 시대 (710~794)에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 시대에 2가지 상징적 사건이 일어났다 (527).
3. 신들의 길
u 일본인은 분위기를 느끼는 데에서 즐거움을 찾으므로 환경에 의하여 쉽게 동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539).
u 이제 마지막으로 신도의 현실적인 기능에 관해서 살펴보자. 고대 일본의 신도는 네 영역에서 작용하고 있다. 1) 가정신도. … 2) 지역 공동체 신도. … 3) 장인 집단의 신도. … 4) 국가 신도 (541).
4 붓다의 길
u 이처럼 붓다는 불교적 관점이 아니라 신도적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었다 (543).
u 씨족의 종교였던 불교는 그(쇼토쿠 태자)의 통치 하에 제국의 종교가 되었다. 중국에서처럼 일본에서 선호된 불교의 가지는 대승이었다 (544).
나라 시대: 710~794
u 일본 불교는 아직 어떤 참다운 토착 사상도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단지 여러 가지를 혼합하고 병존시키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544).
u 8세기의 일본에서는 보살이 자비의 정신으로 서로 도우면서 국가의 소박한 정신에 합류하였다 (545).
i. 나라: 일본 최초의 불교 도시이자 수도의 시대 (710~794): 이 시대에는 중국의 불교 예술과 사상이 힘차게 들어오고 있었다.
ii. 두 번째의 불교 수도인 헤이안 (현재의 교토: 794~1185): 첫 시기 (794~894)에는 중국의 영향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새로운 전환이 있었다. 일본의 승려인 전교 대사와 홍법 대사의 가르침 속에서 일본의 가미가 지역 보살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후자의 학파는 인도의 나란다 대학에서 새로이 형성된 밀교 교의를 소개하였다.
iii. 다음 시기는 (894~1185)는 헤이안에서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당나라와의 외교적, 문화적 교류가 단절되었다. … 대륙으로부터 단절된 일본인들은 이제 그들 자신의 불교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다음 시대인 카마쿠라 막부의 통치 하에서 일본 불교는 성숙하게 된다.
iv. 카마쿠라 시대 (1185~1392): 이 시대에는 후지와라 시대의 여인과 귀족의 미세한 감수성과 미적 에로티시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강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 결과 4개의 강력하면서도 매우 일본적인 불교 종파가 개창되었다.
u 인도에서는 불교가 초연의 교리로 존재하였지만, 일본에서는 참여, 감사, 경외의 교리로 변형되었다 (546).
u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동대사의 대불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 안치된 불상은 인도의 고타마 샤카무니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과 인종을 초월한 명상하는 붓다이다. … 이 특별한 붓다를 지칭하는 산스크리트 용어가 비로자나 (태양에 속하고, 태양으로부터 나오는)이다 (547).
u 이 거대한 불상은 붓다의 깨달음의 한 측면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와 같은 가르침은 화엄경과 보로부두르에 있는 자바 인의 거대한 불탑 (기원후 8세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547).
u 그 가르침은 모든 일본 불교 종파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그것의 한두가지 요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엄의 교리는 앞에서 언급한 12연기설에 요약되어 있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을 현실에 더 철저하게 적용하고 있다. … 이 법칙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스스로를 만들어내고 있다 (547).
u “화엄” 안에서 이 가르침이 더욱 확대되면 공간 안에서의 상호 의존 관념이 생겨난다. 그러면 우주는 상보적이고 총체적으로 상호 연관을 맺으며 “연기”한다. 어떤 존재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준치로 다카쿠수 교수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그것을 모든 존재의 공동적 행위- 영향에 의한 인과 관계라고 부른다 (548).
u 이제 인관의 문제는 시간과 공간의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읽혀진다. 이른바 여래장 (타타가타 가르바)은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다. 여래장은 사물의 존재 방식이며, 그 자신 안에 붓다, 곧 여래를 감추는 동시에 드러낸다. 이것이 꽃들의 둥그런 원인 화엄이며, 그 안에 거대한 태양불이 앉아 있다 (548).
u 이것이 일본에서 게곤으로 알려진 화엄의 놀라운 가르침이며, 그 경전은 각각의 붓다를 에워싸고 있는 화환처럼 모든 존재의 통일을 이루려고 한다. 그 모든 존재에 대한 느낌은 명상하는 마음 속만이 아니라 활동하는 신체 속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종교의 실천은 삶 자체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2가지의 것이 필요하다. 하나는 보살 서원 (프라니다나)으로서 모든 존재 – 자기 자신도 포함하여- 로 하여금 불성을 깨닫도록 끊임없이 인도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비 (카루나)이다 (549).
헤이안 시대: 794~1185년
u 일본 고유의 불교를 형성하기 위한 두 번째의 중요한 발걸음은 804년 전교 대사와 홍법 대사가 중국으로 향하면서 시작되었다 (549).
u 전교 대사가 중국에서 돌아와 세운 종파는 천태종이라고 불린다 (549).
u 신적 현현의 수많은 등급, 질서, 형태에 관한 힌두- 불교 개념에 조응하여 수많은 상징적 이미지가 나타났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만트라와 관련된 마음가짐에 모범적인 길을 제공하는데, 그 이미지는 크게 2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1) 금강석이나 번개 본체의 원을 상징하는 이미지. 이러한 이미지는 파괴될 수 없는 상태, 참된 상태, 혹은 금강석 상태를 표상한다. 이 중 가장 핵심적인 이미지는 자신의 현현에 의하여 에워싸인 위대한 태양불, 곧 비로자나이다. 2) 자궁의 이미지. 이러한 이미지는 앞에서 여래장으로 불렀던 변화하는 세계의 질서를 상징하며, 인도 불교 예술에서는 세계의 여신- 불꽃으로 나타난다 (551).
u 새롭게 동화된 고등 문화 단계의 모든 측면이 일본의 독특한 양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헤이안 시대의 두 번째 단계에서였다 (552).
u 중국의 도교는… 이상적인 성인은 사회적 영역으로부터 자연으로 도피하여 자신의 본성을 산, 물, 나무, 놀라운 안개의 숭고한 영향 하에서 발현시킨 인간이다. … 이와는 달리, 인도에서는 그 이상적인 목적이 인간의 영역뿐만 아니라 우주적 영역으로부터의 해방 (목샤)이었다 (552).
u 인도 불교는 우주에서 환멸을 느끼고 중국 불교는 사회에서 환멸을 느꼈지만, 일본 불교는 전혀 환멸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도인은 무로 물러나고 중국인은 가정이나 자연으로 은거하였음에 비하여, 일본인은 은거하지 않고, 그가 있던 자리에 정확하게 서 있었다. 일본인은 단지 가미를 붓다 속으로 확장시키고, 기이함과 슬픔만이 아니라 즐거움을 가지고 이 세상 자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연화장세계로 보았다 (553).
가마쿠라 시대: 1185~1333년
u 일본 불교의 성숙기에 해당하는 가마쿠라 시대의 불교는 2가지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힘, 자기-의존”을 의미하는 자력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힘, 중재에 의한 구원”을 의미하는 타력이었다. 후자는 주로 아미타 종파에 의해서 대표되었으며, 전자는 선에 의해서 대변되었다 (557).
u 일본에 들어와서 사무라이의 불교가 된 선에서는 깨달은 삶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비신학적인 견해를 취한다. … 자유는 태양불의 나타남 자체이며, 이기심, 걱정, 두려움, 강요, 추리 등이 이를 방해하고 왜곡하고 막을 수 있다 (558).
5 영웅들의 길
u “무사의 길”인 무사도는 일본의 영혼이라고 부른다. 보다 큰 견지에서 보면 무사도는 동양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고대 세계의 영혼이다. 그것은 거대한 연극을 향한 사제적 이상이기 때문이다 (564).
<제9장: 티벳- 붓다와 새로운 행복>
u 티벳 불교는 10~12세기의 인도 대승 불교를 대체로 따르고 있으며, 인간의 심리를 매우 정교하게 묘사하는 진언 종파로부터 발전하였다. 저 경이적인 <티벳 사자의 서>를 약간만 살펴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573).
u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천상이건 지옥이건 라마가 항상 영혼을 수행한다. 라마는 영혼의 앞에 나타난 모든 형상이 그의 의식의 투사물임을 간파하도록 권유한다 (581).